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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지금도, 앞으로도 붓을 들고 살아갈 겁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서예를 시작했고, 이후 차례차례 단계를 밟아 캘리그라피에 이르렀다.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글씨에 대한 애정을 간직해, 꾸준히 성실하게 노력한 작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고 싶다.”캘리그라퍼 이현정(40)씨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하지만,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는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다.예술가 혹은, 작가로서 바람직한 태도다. 모든 문화·예술적 작업은 스스로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는 법이니까.이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졸라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글씨’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됐고, 중고교 시절엔 자신의 작품을 공모전에 부지런히 보냈다. 대학에선 디자인을 전공했다. 현재는 서예에 더해 캘리그라피 작업을 진행하며, 영남대학과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고 있다.서예(書藝)는 ‘붓으로 글씨를 쓰는 예술’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보다 조금 생소한 단어인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뭘까?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그린 문자라는 뜻으로 기계적인 표현이 아닌 손으로 쓴 아름답고 개성 있는 글자체’를 지칭한다. 여기에 보다 상세한 설명을 더한다면 “의미 전달 수단이라는 문자의 본뜻을 떠나 유연하고 동적인 선, 글자의 독특한 번짐, 스쳐가는 효과, 여백의 균형미 등 순수 조형의 관점에서 보는 글씨”라고 할 수 있다.캘리그라퍼(Calligrapher)는 캘리그라피 작업을 하는 사람이니, 이현정 작가는 서예가인 동시에 캘리그라퍼다. 거기에 더해 그림 작업과 강의까지 겸하고 있으니 항상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사람이기도 하다.“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타고난 천재성보다 멈추지 않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 작가는 자신부터가 노력파다. 마흔이라는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에 이미 ‘글꽃이 필 때까지’(2015년) ‘그곳에 따뜻함이 있다’(2017년) ‘서양연화-글씨가 빛나는 순간’(2020년)으로 명명된 캘리그라피 개인전을 세 차례나 열었고, 포항시 서예대전 초대작가가 되기도 했다.포항 산림조함 ‘숲마을’ CI와 BI를 제작하고, 영일대해수욕장 장미원 상호 글씨를 쓰고, 포항 국제불빛축제 타이틀 손 글씨를 쓴 것도 이현정 작가.이처럼 스스로 선택해 뛰어든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기 위해 분주히 살고 있는 ‘젊은 예술가 이현정’을 지난주 화요일 포항 환호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아래는 그날 이 작가와 기자가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출생지와 유년을 보낸 곳은 어딘가.△1983년 포항에서 태어났다. 구미와 대구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때를 제외하면 쭉 포항에서 살아왔다.-어린 시절부터 글씨와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는지.△초등학교 때 서예를 접했다. 친구가 서예학원에 다니는 걸 보고 “나도 가겠다”며 부모님을 졸랐다. 어떤 대단한 결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서예 하는 모습이 너무 근사해 보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내성적인 학생이었는데, 글씨건 그림이건 혼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좋았다.-대학에선 뭘 공부했나.△디자인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땐 포토샵과 일러스트 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 결과물을 대학 공모전에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상을 받은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당신이 정의하는 캘리그라피는.△붓을 들었을 때 느끼는 감성을 글씨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봄이면 봄이란 단어 속에 봄 내음이 스며든 글씨를 쓰고, 여름이면 글씨로 더위를 표현하는 거다. 캘리그라피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한국에서 캘리그라피 작업이 본격화된 시기는 언제쯤인가.△개념이 구체화된 건 아직 30년이 안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캘리그라피의 시작은 서예로 보면 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붓으로 글씨를 써온 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캘리그라피로 진화했다고 보면 무방하다. 우리가 붓으로 주로 작업한다면 외국은 펜이나 만년필로 작업을 한다. 내가 한글로 작업하듯 외국 작가들은 각기 다른 그들의 언어로 작품을 만든다. 그렇게 디자인화 된 문자가 캘리그라피다. -당신이 캘리그라퍼로 활동한 건 언제부터인지.△대학 다닐 때 각종 포스터를 접하면서 독창적인 글씨에 매료됐다. 글씨가 광고나 디자인에 접목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걸 보며 캘리그라퍼를 꿈꿨다. 내 경우엔 일찍 시작한 서예에서 모색과 진화 과정을 거쳐 캘리그라퍼에 이르렀다고 봐도 좋다.-예쁜 글씨, 매력적인 글씨를 쓰는 노하우가 있나.△연습밖에 다른 길이 없다. 서예를 배우면 다양한 서체를 만들 수 있으니 캘리그라피 작업에 도움이 된다. 부지런히 많이 쓰고, 오랜 시간 다듬어야 붓과 사람이 하나가 된다. 그래야 글씨건 그림이건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나 또한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작업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기억에 남는 전시회는.△‘코로나19 사태’가 심각했던 2020년에 3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그 전시회를 통해 내가 지향할 수 있는 방향이 다양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고, 활동 영역도 포항만이 아닌 다른 곳으로 넓혀가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캘리그라피 작업이 매력적인 이유는 뭔가.△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붓끝이 만들어내는 글씨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글씨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공감이 가능하다는 것도 매력적이다.-영향 받거나 존경하는 작가가 있다면.△내게 서예를 가르친 솔뫼 정현식 선생님이다. 15년 가까이 그분에게 글씨와 글씨 쓰는 사람의 태도를 배우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 작가다. 틀을 깨는 도전의식과 멈추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도 정 선생님에게 배웠다.-작업 시간 외에는 뭘 하며 지내나.△캘리그라피를 포함해 다양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장에 간다. 어떤 전시장이건 그곳에선 영감을 받을 수 있고, 지금 생산되는 작품들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캘리그라피를 가르치기도 하는데.△6년 전부터 영남대에서 캘리그라피와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내 작업실에서도 10여 명의 사람들과 수업을 진행 중이다. 수강생은 직장인도 있고 주부도 있다. 처음엔 취미로 시작해 공모전에 출품을 하기도 하고, 회원전도 개최한다. 서로가 서로의 작품을 보며 자극 받을 수 있기에 가르치고 배우는 게 즐겁다.-어떤 캘리그라피를 지향하는지.△요즘엔 이미지와 컬러에만 치중한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캘리그라피보다는 글씨라는 단단한 기본 개념을 가지고, 나만의 스타일로 흔들림 없이 작업하고 싶다는 게 나의 바람이다.-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계속 붓을 들고 살아가려 한다. 나의 색채와 감성을 만들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할 각오가 돼있다. 캘리그라피만이 아닌 회화에도 도전하고 싶다. 물론, 출발점이 된 서예에도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을 이어간다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꾸준하고 성실하게 오래 작업한 작가로 기억될 수 있을 듯하다. /홍성식기자

2023-03-14

“민속은 가장 원초적인 민족 정신이 스며들어 있어”

모든 단어에 시제가 있다면 민속은 과거형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스럽기 그지없는 민속은 지난 시대의 잔존 형태가 아니라 살아서 꿈틀대는 생물이다. 지역의 민속문화가 살아움직이는 현장을 10여 년 전, ‘다시 듣는 포항의 토속민요’ 공연으로 목격했다. 사라져가는 포항의 민요를 지역의 젊은 소리꾼들이 복원하는 무대였다. 이어서 끊어져가는 전통을 잇고자 포항흥해농요보존회가 출범했다. 주민들은 농요의 복원을 위해 엎드려서 모를 찌고 지게를 지고 도리깨질을 하는 행위와 노래를 엮어 재현했다. “옹헤야”의 포항 흥해 버전인 “에헤 화이요”로 하나 되어 돋우던 신명이 잊히지 않는다.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연결시켜야 시작된다. 원형 그대로의 포항민요가 보존될 수 있도록 갯목(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통나무)을 끼운 이가 박창원 민속학자이다. 40여 년 동안 지역의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전승을 위해 애쓰고 있는 박창원 민속학자를 포항문화원에서 만났다. -포항의 민속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1982년에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했다. 고향이 고령으로 같은 경북권인데도 말씨부터 달랐다. 말로 정착된 문학을 구비문학이라고 한다. 동네 주민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바로 구비문학이었다. 사투리를 시작으로 동네에서 전해오는 노래와 설화를 수집했다. 교지에 연재한 것이 세간에 알려졌고, 1990년에는 ‘영일군사’ 민속 편 집필에 참여했다. 그 후로는 녹음기를 들고 포항 지역 골짜기마다 다니며 전설과 신화, 민요, 민담, 놀이, 세시, 풍속 등을 채록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분석하고 해석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민속학을 공부했다.-민속자료 채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나.△살아있는 자료가 나오려면 생활에서 얻어지는 채록이 바람직하다. 주민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레 이뤄졌다. 어느 동네 누가 소리를 잘 한다더라는 식으로 알음알음 대상자들을 만났다. 학교 인근에 사시는 강부용 할머니는 나물을 잘 아셨다. 산에 같이 간 적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나물마다 노래가 있었다. 고사리를 보면 “올라가는 올꼬사리 너러가는 늦꼬사리”라며 고사리를 캐서 나물을 무치는 과정을 읊조렸다. (올꼬사리는 일찍 올라오는 고사리, 늦꼬사리는 늦게 올라오는 고사리를 말한다.) 젊어서 혼자되신 어르신이 노래로 외로움을 달랬구나 싶을 정도로 노래를 많이 아셨다. 민속놀이의 경우 현장에서 채록하고, 조용한 곳에 따로 모셔 또 한 번 확인했다. 지게상여놀이는 상여꾼의 허리춤에 녹음기를 달아 채록했다.-수집된 자료들은 보존 활동의 바탕이 되고 있다.△묻혀 있던 송라면 화진1리의 구진마을 앉은 줄다리기를 발굴해 학술지에 발표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송라 앉은 줄다리기 재현행사’가 송라의 축제가 됐다. 지역의 사라져 가는 구전민요를 채록해 낸 자료집은 포항흥해농요보존회의 보존과 전승 활동에 기틀을 마련했다. 현재 흥해농요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신청해 놓은 상태이다. 지금까지 포항에 국가나 도지정 무형문화재는 한 점도 없는 실정이다. 시간이 흐르고 전승환경이 바뀐 곳에 전통 민속은 온전하기 어렵다. 20년, 30년 전에 조사한 민속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도 있다.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저서의 서문을 연 ‘민속은 생물’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얼마 전에 죽장에서 주민들이 찾아왔다.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를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전승의 맥이 중요하다. 과거로부터 어떻게 전승이 되어 있고, 현재 어떻게 이어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후진을 양성할 것인지가 명확해야 한다. 흥해농요의 경우 기능보유자가 생존하고, 보존회를 중심으로 전승 노력이 활발하며, 학술 세미나로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게상여놀이도 기능보유자가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는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80년대 발굴됐는데, 초창기와 지금의 모습에 차이가 크다. 초창기에는 지게목발소리, 짱치기, 어사령 등을 포함했지만 지금은 지게상여놀이 하나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장례 풍습이 어떻게 놀이가 됐나.△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운반하는 운구 행렬은 상여소리를 부르고, 잠시 쉬는 동안 앞소리꾼이 상주에게 노자를 요구하기도 한다. 장례 때의 운구 풍습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애도하고 엄숙한 분위기로 추모해야 할 장례를 즐거움의 놀이판으로 바꾼 것에서 민중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전국에서 지게상여놀이를 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지역은 3곳이다. 죽장 지게상여놀이의 효과적인 전승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지역 곳곳에서 전해내려오는 설화도 다수 발굴했다.△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으로 나뉜다. 뭉뚱그려 전하던 포항지역 설화에서 신화를 분리했다. 영일만 지형이 움푹 팬 배경으로 거인 신화가 전해온다. 일본 역사(力士)가 조선의 창해 역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는데 그곳이 움푹 꺼지면서 영일만이 되었다는 설화다. 창해 역사는 키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몸집이 태산만하며, 손바닥 하나가 영일만 크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내연산을 지키는 산신인 할무당 신화가 있다. 산속에 신당을 차려놓고 오랫동안 제사를 모시는 걸 보고 관심이 생겨 논문까지 썼다. 할무당을 모신 신당인 백계당은 이후 포항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역 인물에 대한 전설로는 권달삼을 조명했다. 흥해 사람들의 술자리나 시장통에서 흔하게 들리는 기이한 행적이 재미있어 녹음기를 둘러메고 수집하러 다녔다.-권달삼이 그렇게나 유명했나.△워낙 입담이 뛰어나서 ‘산에는 산삼, 바다에는 해삼, 육지에는 달삼’이라고 했다. 평양의 봉이 김선달, 서울의 정수동, 경주 정만서, 영덕 방학중과 비슷한 류의 기인이다. 이들에 비해 권달삼(1881-1952)은 다소 후대의 인물로 유일하게 생존 연대가 확실하다. 권달삼 이야기의 배경에는 흥해시장이 많다. 제사를 지낼 돈이 없어 과일전에 가서 사과와 배 앞에 지방을 붙여놓고 절을 한 다음, 어물전에 가서 조기 앞에 지방을 붙여 놓고 절을 해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권달삼 설화로 만든 국악뮤지컬이 영일민속박물관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그때 울산에 거주하는 외손녀를 초청했다. 흥해시장에 권달삼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억했으며 하는 바람이다.-권달삼과 같은 기인의 설화가 유행했던 배경은 무엇일까.△근대화 과정에서 계급 문화는 흐려지고 권위주의는 땅에 떨어졌다. 권달삼은 돈 많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희롱했고 권세가들이 당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쾌감을 느끼고 박수를 쳤다. 권달삼이 꾀를 부리는 목적은 대게 기본적인 생계유지였다. 권달삼의 행적에서 보여주는 재치와 웃음은 한국문학의 풍자적, 해학적 전통을 잇고 있다.-옛사람들의 민속문화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의미는.△민속은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뤄낸 생활문화이다.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지역문화를 잘 농축하고 있으며, 가장 원초적인 민족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민속에 대한 믿음과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민속문화를 소홀해서는 안 된다. 포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자산 중 무형문화재가 될 만한 것에는 죽장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게상여놀이, 여성들의 줄다리기 놀이인 앉은줄다리기, 흥해지역의 농요, 월월이청청이 등이 있다. 대부분의 민속놀이는 전승 단절의 위기로, 국가나 지자체가 의도적으로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멸된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생물의 본성을 어쩌겠나. 다만 그들 중 민속놀이로 전승 가능한 것들을 발굴해 놀이화하면 어떨까. 월포의 후릿그물 당기기 놀이는 원래 어부의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피서철 체험놀이로 행해지지 않나. 생명력 있는 놀이를 눈여겨보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대적 쓸모를 고민해도 좋겠다.- 30여 년간 지역 민속문화를 찾아다녔는데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연구가 있나.△5년 전 퇴임하면서 매년 책 한 권을 쓰자고 다짐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한두해에 한 권씩 썼다. 포항지역 민요에 관해 쓴 3권을 ‘포항민요전집’으로 집대성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 중에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다. 호미곶 지명의 유래부터 오류가 보인다. 조선시대 풍수지리학자인 남사고가 포항 장기의 명승명당으로 호미등을 처음으로 언급했다는 ‘산수비록’은 실체조차 없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 잘못 전해지는 부분들의 근거와 과정을 밝혀 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작업을 해 나갈 계획이다. 박창원 민속학자 박창원 민속학자경북 고령 출신으로 영남대 국문과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국어교육학을 졸업했다. 1982년 청하중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해 2017년에 교장으로 퇴임했다.1990년대초부터 사라져가는 지역의 토속민요를 채록해 ‘포항지역 구전민요’, ‘소리로 듣는 포항의 민요’, ‘흥해의 민요’, ‘북송리의 마지막 소리꾼 김선이의 흥해농요’등의 자료집을 냈다.흥해의 문화인물인 권달삼의 행적과 일화를 채록한 ‘흥해의 기인 권달삼 이야기’와 30여년 간 지역의 민속문화를 정리한 ‘동해안 민속을 기록하다’, ‘포항의 민속놀이’ 등을 저술했다. ‘수필문학’으로 문단에 등단한 수필가이기도 하며 수필집으로 ‘향기있는 사람’이 있다.청하중학교에서 35년간 근무했고 지금도 청하에 살고 있다. 조선시대 건립된 청하읍성이 겸재 정선의 ‘청하성읍도’ 그대로 복원되기를 ‘맑고 푸른 터’ 청하 사람으로서 소망한다./배은정 작가

2023-03-13

“체육공공기관 이전에 집중… 경제·문화관광산업 부흥 시킬 것”

문경시는 민선 4대, 5대 문경시장을 지낸 신현국 시장이 지난해 6월 문경시장으로 다시 당선되며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다. 한때 석탄산업으로 번성했던 문경은 국가에너지산업 구조변화에 따른 석탄산업의 쇠락으로 도시는 점차 활력을 잃었다. 위기감을 느낀 시민들은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고 지난 지방선거에서 지역 발전을 이끌어 줄 지역의 지도자로 풍부한 시정 경험을 갖춘 신현국 시장을 선택했다. 신 시장은 지난 민선 4·5대 문경시장 재임기간 동안 국군체육부대와 문경 STX리조트, 서울대병원연수원, 숭실대 문경연수원을 지역에 유치하는 등 문경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9대 문경시장으로 다시 취임한 신 시장은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1호 공약으로 스포츠 체육도시 육성을 약속했다. 1%의 가능성에도 도전한다는 긍정의 정신으로 한국체육대학, 대한체육회, 국민체육진흥공단 등 체육 관련 공공기관 및 유관단체를 집중적으로 유치해 문경을 스포츠의 요람으로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아시아하키연맹 정기총회와 전국단위 육상·유도·탁구·테니스·태권도·씨름 등 70여개 각종 대회를 국군체육부대 및 지역 체육시설에 분산 개최해 정치권은 물론, 체육인 및 동호인에게 스포츠 도시 문경을 각인시켜 나가겠다는 방침이다. 신 시장은 이뿐만 아니라 대학과 기업, 국가공공기관을 지역에 유치해 지역 경제와 문화관광산업을 동시에 부흥시키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 경북 소방장비전문관리센터를 문경에 유치한 배경은.△군위군에 위치한 경북소방장비전문관리센터가 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기관 유치 전담부서에서 소방관련단체와 이전 예정용지가 있는 산양면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이 포함된 이전 건립 추진위원회를 신속히 출범시켰다.문경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범시민 서명운동과 도움단체들의 유치 퍼포먼스까지 이어지며 온 시민이 한 뜻을 모았다.지난달 28일 열린 이전지 선정 심사위원회에서는 다른 경쟁 지자체 중 유일하게 시장인 제가 직접 발표자로 참석해 문경시로 이전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수도권과 세종의 중앙부처, 도청 신도시와의 탁월한 접근성, 충북 음성에 위치한 소방장비 검사검수센터와 인접한 거리로 신속한 업무협약이 가능하다는 점이 문경시만의 차별화된 장점이다.또한, 문경에 경북도 소속의 직속기관이 하나도 없다. 이제는 문경시에 위치한 경북도 산하 기관이 필요하다는 지자체 간 형평성도 함께 강조했다.초조하게 결과를 현장에서 기다리다 심사위원회로부터 최종적으로 문경시로 경북소방장비전문관리센터 이전을 확정하는 공식적인 발표를 확인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공식적인 첫 번째 기관 유치 성과이다.-기관 유치 성과의 비결과 향후 계획은.△평소 늘 강조하는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는 ‘긍정의 힘’이 바로 그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면 그 정성은 결국 판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이번 경북소방장비전문관리센터의 유치도 모두가 함께 반드시 할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빠른 행동과 판단으로 유치전에 뛰어들어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적절한 부지를 찾는 등 필요한 모든 사항을 하나하나 공들여 이뤄낸 성과이다.무엇보다도 이번 유치전을 통해 문경시의 중점 과제인 기관과 대학 유치를 위한 성공의 경험치를 학습했다고 생각한다. 유치전 프로젝트에서 각자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며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최상의 결과를 도출하는 조직으로 훈련된 셈이다. 이 기세로 또 다른 유치 작전을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다. 시민들의 많은 지지와 응원을 부탁드린다.- 시장에 취임하며 했던 중점 공약사항의 추진 경과는.△한국체육대학 문경이전은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뚜렷한 입장 표명이 없어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문경에 국군체육부대가 있고, 세계적인 군인체육대회를 치를 만큼 잘 조성된 스포츠 인프라와 수도권과의 탁월한 접근성을 들어 한체대 이전의 최적지로 강점을 홍보하고 있다.1%의 낮은 가능성으로도 국군체육부대를 유치했던 기존의 경험을 살려 끊임없이 전국을 누비며 유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숭실대학교 문경캠퍼스 추진은 작년 말 문경시와 문경대 간의 확약서 체결에 이어 빠른 시일 안에 숭실대까지 함께 참여하는 3자간의 문경캠퍼스 설립 협약을 준비하고 있다. 두 대학 상호 간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어 전국 최초로 수도권대학과 지방대학이 통합하는 사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경새재 주흘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문경의 대표 관광지인 문경새제는 연간 40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중부내륙 최대의 관광중심지이다. 주흘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은 문경이 한 단계 도약하자는 관광 명품화 프로젝트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주흘산의 험한 산세를 케이블카 설치로 어린이나 노약자도 백두대간의 중심을 정상에서 조망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더 나아가 관봉과 주봉 간 2.5km의 능선을 잇는 데크로드도 조성해 한국인이 꼭 타고 걸어봐야 할 관광상품으로도 구성할 계획이다. 빠르면 내년 연말 착공에 들어 갈 수 있도록 전담부서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시민과 공직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공공기관 이전을 위한 정치권에 대한 호소는 물론, 관련 부처와 기관 설득 작업에 모든 전력을 쏟을 것이다. 아울러, 지역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과 산적해 있는 여러 과제들과 각종 행정절차를 긴장감을 갖고 속도를 내 분명한 결과를 이끌어 내겠다.문경시의 시정 슬로건이 ‘긍정의 힘 yes 문경’이다. 저와 공무원 및 시민이 하나가 되어 긍정적인 마인드와 최고의 친절정신으로 공공기관 유치와 문경 발전을 위한 개발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문경의 백년대계를 다질 수 있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문경/강남진기자 75kangnj@kbmaeil.com

2023-03-13

봄에 떠나는 음악여행… 바다의 선율에 빠지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고, 피곤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라고 말했다. 요즘 음악 애호가는 물론 막 음악 감상에 빠져든 20~40대 사이에 LP 음악 열풍이 불고 있다. 1970~1980년대 유행했던 LP 음악감상실이 곳곳에 다시 생겨나고, 중고 LP판이 고가에 거래된다. 지난 해 경기 파주에 지상 4층 규모의 대형 LP 음악감상실이 문을 열었다. 단일 규모로만 따지면 세계 최대 수준이라고 한다.‘노래하고 연주하며 화합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은 콩치노 콩크리트(Concino concrete)라는 곳이다. 햇살이 눈부신 봄의 길목에서 음악과 함께 즐겁게 하루를 보내면 어떨까? 고통스럽고 지쳤을 때 음악으로 종종 위로받았다는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처럼 우리도 음악으로 치유받을 수 있지 않을까? ◇1930년대 첨단기술 총합 웨스턴 일렉트릭파주의 콩치노 콩크리트 앞에는 임진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강줄기는 속절없이 평온하다. 임진강을 뒤로하고 콩치노 콩크리트 내부로 들어가니 물결처럼 음악이 쏟아져 들어온다. 콩치노의 첫인상은 잘 만들어진 콘서트홀 같다. 콘서트홀과 다른 것은 무대가 있어야 할 곳에 놓여 있는 거대한 스피커들이다. 826.45㎡ 규모에 객석은 테이블도 없이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 2층에는 콘서트장이나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볼 수 있는 돌출된 객석까지 있어 오케스트라 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연주회장 정면에는 1930년대 전설의 명기로 소문난 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가 세 개나 놓여 있다. 1930년대 당시 첨단기술을 총동원해 완성한 이 시스템은 워낙 거대해서 최소 1천500~3천석 정도의 대형극장에서 쓰였다고 한다. 80년 전 스피커라고 하지만 지금도 복각이 어려울 정도로 음질이 뛰어나다고 한다.전문가들은 현대의 최첨단 오디오 기기들이 현미경으로 음표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듯 음의 디테일을 강조한다면, 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는 음의 골격을 확실하게 잡아주면서 자연스러운 실재 음을 들려준다고 평했다. 전문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마치 연주회장에서 듣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했다. ◇좋은 음악 나누고자 건물 완공웨스턴 일렉트릭 스피커 옆에는 대형 나무판처럼 생긴 유로노 주니어(Euronor Junior)라는 이름의 스피커가 있다. 독일의 물리학 박사인 칼 크뤼거와 콘스키 크뤼거 형제가 만들었다. 유로노 주니어는 높이 3.5m, 너비2.6m에 무게는 150㎏이나 되는 대형 스피커로, 주로 독일의 1천500석 이상 대극장에서 사용했다고 한다.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공습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고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콩치노 콩크리트의 설립자인 오정수 원장은 우연히 독일 남부도시를 여행하던 중 한 극장에 설치된 유로노 주니어 스피커를 발견했다. 오 원장이 비싼 값을 치르고 한국으로 가져오려 하자 독일 당국이 문화재라는 이유로 반출을 막았다. 유로노 주니어 스피커는 무려 한 달이나 독일 공항에 압류돼 있다가 겨우 들여올 수 있었다고 한다.음악인도 아닌 오 원장이 콩치노 콩크리트 같은 거대한 콘서트홀을 지은 것은 음악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10대 후반부터 음악에 푹 빠져 살았던 그는 돈만 모으면 오디오 기기를 사는 음악 마니아였다. 처음에는 소니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다가 오디오 기기의 하이엔드라는 마크 레빈슨, 골드문트, 자디스 같은 최고급 오디오 기기를 섭렵했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빈티지 기기인 웨스턴 일렉트릭을 알게 되면서 사자고 마음먹었다. 또 이 빼어난 소리를 혼자 들을 게 아니라 넓은 공간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졌다. ‘아시아의 인어’로 불렸던 전 수영선수 최윤희의 언니이자 19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 배영 은메달리스트인 부인 최윤정 씨도 남편의 계획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콩치노 콩크리트 콘서트홀의 대표이기도 한 최씨는 “콩치노 콩크리트에서 LP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넘어 실제 공연도 열고, 음악 영화도 보여주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음악은 끊임없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창문 너머 임진강에는 붉은 태양이 고요하게 강밑으로 내려앉았다.운영 시간 월·화·금요일 오후 2~7시, 토·일요일 정오~오후 7시(수·목요일 휴무, 대관 시 임시휴무), 입장료는 2만 원이다. 이곳도 둘러보세요△황인용의 카메라타카메라타는 파주 헤이리예술마을 7번 게이트 앞에 있다. 2004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벌써 20년이 돼간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음악 애호가들에게 ‘최고’라는 찬사를 받아온 건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카메라타로 떠나는 음악 여행은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 구석에 있는 작지만 묵직한 철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된다. 새로 산 음반에 첫 바늘 올릴 때처럼 ‘지지직’기분 좋은 긴장감이 밀려온다.실내는 공연장처럼 꾸몄다. 의자는 모두 정면을 향해 가지런히 놓였고, 전면에 있는 그랜드피아노 뒤로 빈티지 스피커가 늘어섰다. 독일 클랑필름 스피커가 중심을 잡고, 미국 웨스턴일렉트릭에서 제작한 극장용 스피커가 양옆에 포진했다. 두 스피커 모두 1920~1930년대 제작했으니 나이가 100살에 가깝다. 천창으로 스미는 따스한 봄 햇살이 실내를 채운 감미로운 클래식 선율과 잘 어울린다.원하는 자리에 앉아 음악에 집중하면 된다. 아니 가끔 책을 읽거나, 눈을 감고 명상해도 좋다. 향 좋은 차 한 잔 마시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음악 평론가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난 클래식을 모르는데’같은 걱정은 접어두자. 중·장년층이라면 황인용이라는 이름 세 글자로도 이 공간에 머물 이유가 충분하다. 색채가 강렬한 초상화로 유명한 고낙범 작가와 독특한 콜라주 기법을 선보이는 김상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호사는 덤이다. 카메라타(camerata)는 ‘예술인의 모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문학동네와 협업하는 ‘이달의 책’에 소개된 책은 3층 아담한 서재에서 읽을 수 있다. △김광석 흔적 찾기 파주 이등병마을대중음악의 상징적인 인물인 고(故) 김광석의 노래인 ‘이등병의 편지’를 모티브로 꾸민 이등병 마을도 같이 들러볼만하다.이 곡은 파주시 광탄면 출신 김현성이 작사·작곡했다. 김광석에 앞서 전인권이 리메이크해 불렀으니, 비교해 들어봐도 재밌다.마을에는 정겨운 골목을 따라가는 편지길, 이등병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카페 바스 등이 있다. 대구시 동성로에도 김광석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방천시장 옆 김광석다시그리기길에는 한 시대를 보듬은 뮤지션의 온기가 묻어나고, 동성로 하이마트음악감상실에는 긴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공간의 향수가 전해진다./최병일 작가

2023-03-09

“일흔이 되니 아버지의 삶 이해하게 됐어요”

먼저 흥미로운 질문 하나. 다음에 열거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김상국 전 세종대 체육학과 교수, 이치호 전 건국대 축산식품생명공학과 교수, 곽병휴 전 경성대 글로컬문화학부 교수, 정두환 경주대 관광외국어학부 교수.하나로 묶이지 않는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고, 서울과 부산, 경주까지 각자 다른 지역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이력이 있는 이 4명의 학자 모두는 1950년대 초중반 같은 동네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함께 보냈다.당시엔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고현1리, 현재는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 고현1리로 불리는 곳이 바로 이들의 고향.청하면 고현1리는 1950~1960년대에도 80호 남짓의 조그만 마을이었고, 한국의 어느 시골마을 할 것 없이 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현재는 채 50여 호가 되지 않는 소읍이다.그럼에도 한국전쟁 이후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시절을 허위허위 통과해온 그 작은 동네에서 또래 대학교수가 4명이나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궁금했다. 이와 관련해 김상국 전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내 고향에선 일찍 벼농사를 시작했다. 당시 가장 귀했던 게 쌀이다. 지금 세대들에겐 믿기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1950년대엔 쌀이 곧 돈이었다.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자신은 굶더라도 밥을 지을 때마다 쌀을 조금씩 모아 그걸로 자식들의 학용품을 사주고, 학비를 댔다. 난 그런 모습을 직접 보며 자랐다.”그렇다면 그 마을이 한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 벼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토대는 어떻게 마련된 것일까?여기엔 김 전 교수의 아버지 김두수(金斗洙)씨의 역할이 작지 않았다.그 역시 고현1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두수 씨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지금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으로 고향마을에 농업용 저수지를 만들고, 마을길을 넓히고,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는 일에 앞장섰다.넓혀진 길과 넉넉한 농업용수, 여기에 사방사업(沙防事業·황폐지를 복구하거나 산이 붕괴되는 걸 막기 위해 식물을 심는 일)으로 태풍과 홍수 걱정을 덜었으니 인근 마을들에 앞서 안심하고 쌀을 재배하고 수확할 수 있었던 것.2023년 봄이 목전으로 다가온 지난 주. 고향을 찾아온 김상국 전 교수와 함께 따스하고 평화로운 풍광을 지닌 청하면 고현1리를 찾았다.그날 김 전 교수는 자신이 채 열 살도 되기 전 세상을 떠난 선친과 일흔이 돼서야 그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 고향에 관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려줬다.포항 시내에서 30여 분 차를 달려 도착한 고현1리. 마을 입구엔 김두수 씨의 행적을 기록한 ‘공적비’가 서있었다. 1969년 만들어진 이 비석에 적힌 글귀를 해석해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공(公·김두수)은 甲寅年(호랑이의 해)에 종찬(金鐘贊)의 아들로 태어나 甲辰年(용의 해)에 생을 마쳤다. 그는 총명해 배움에 힘쓰고 부모에 효도했다. 농사를 짓는 일에 본보기를 보이며,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니, 고장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다. 그는 사방조림사업과 재방을 튼튼히 하고. 고현리 농업창고 건설과 농수로 개설은 물론, 농로 개설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그는 사업의 추진을 위해 관계당국에 건의는 물론, 솔선 실천해 향토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다. 그가 먼저 주창했던 일들이 열매를 맺었으니, 우리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한 조각돌에 새겨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공을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다.’ -오늘 아버지의 공적비를 다시 보는 마음이 어떤지.△선친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 돌아가셨다. 난 5남매의 막내다. 지금도 기억나는 건 아버지가 마을과 공동체를 위해 애쓰던 모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학생 시절엔 돈이 넉넉하지 않아 고생도 했다. 그땐 ‘아버지는 왜 자식들을 위해 돈을 모아두지 않았을까’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아버지의 삶은 공동체를 위한 의미 있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친은 고향마을 사람들이 공적비를 세워줄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사람인데.△민의원 선거에 나간 것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지역의 현안 사업을 효과적으로 돕겠다는 마음에서 출마를 결심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계몽소설을 읽고 그 분위기에 경도된 분이셨다. 문맹이 적지 않았던 시절에 관공서의 문서를 읽고 해석할 줄 알았으니, 동네 사람들의 힘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진심을 알아준 고향 사람들이 고맙다.-이치호, 곽병휴, 정두환 교수 모두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연관된 추억이 있는가.△나이 차이가 조금씩 나지만 어릴 때 모습이 왜 생각나지 않겠는가. 모두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던 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경우엔 해병대에서 고생했던 경험이 나머지 삶을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김 전 교수와 천천히 돌아본 청하면 고현1리는 그야말로 조용하고 호젓한 시골이었다. 나지막한 산과 제법 너른 들판이 마을을 품에 안은 형상이 안정감을 주는 풍경. 길을 가다 75년간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김 전 교수의 동네 형을 만났다.그 주민 역시 김상국 전 교수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르신과 함께 산에 나무를 심고, 수레가 다닐 수 있도록 동네 길을 넓히던 일이 엊그제 같다”며 “마을 위에 고현저수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김두수 어르신의 노력이 컸다”고 회상했다. 이와 관련해 김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내 아버지는 고향 발전을 위해 헌신한 게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공적비에 새겨진 내용이 우리 동네의 이야기와 자랑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엔 한국 농촌 근대사의 단면이 담겨있기에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우리 역사의 한 조각이 아닐까.” -오랜 시간 대학 강단에 섰다. 후학들에게 강조해서 말한 게 있다면.△공부와 운동을 병행하며 대학을 마쳤다. 석사 학위를 받고 미국으로 간 게 1982년이다. 학비가 모자라 뉴욕에서 택시 운전까지 하며 컬럼비아대학에서 스포츠교육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떠난 지 10년만인 1992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세종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정년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에게 ‘스스로를 정확히 알게 되면 미래를 효과적으로 설계할 수 있으니, 자신의 참된 자아를 알아가라’고 가르쳤다. 참된 자아를 깨닫기 위해선 반성적 사고와 독서가 기본이다.-나이가 들어 고향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몸은 떨어져 있지만 우리 마을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제도 고향에 간다고 생각하니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고향은 어머니가 날 반기며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모습을 기억나게 하는 공간이다.-일흔이 됐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던 것 같은지.△선각자였다. 자신이 사는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이타적인 행위를 했으니까. 그런 모습이 존경스럽고 앞으로도 같은 마음일 것 같다. 늦었지만 이제야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귀향할 생각은 없는지.△유년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곳이니 왜 오고 싶지 않겠나? 잊을 수 없는 고향의 공기와 분위기를 느끼며 작은 봉사 활동이나마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마을 사람들이 선친을 위해 세운 공적비와 1958년 자신의 아버지가 수십 차례 관공서를 오가는 수고 끝에 만들어진 고현저수지까지 둘러보고 포항 시내로 돌아오는 길. 굳이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사자성어를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노학자의 얼굴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앞서 언급한 이치호, 곽병휴, 정두환 교수 역시 그들의 고향 청하면 고현1리를 돌아본다면 똑같은 표정과 심경이지 않았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3-07

김유신 장군 말에 물 먹이던 마위지 아시나요?

고대국가 압독국(押督國)이 문화를 꽃피우는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의 경산은 인근 대구광역시의 영향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구 28만의 중소도시에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 문화가 살아있고 성장잠재력이 무궁한 도시, 10개의 대학에서 10만여 명의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젊고 살기 좋은 도시다.본지는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경산을 살펴 지역민에게는 자긍심을, 후손들에게는 지역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내 고장 경산(慶山) 알아가기’란 주제로 기획연재물을 싣는다.글싣는 순서① 역사② 산업과 경제③ 문화와 관광④교육과 사회복지⑤ 미래 □ 경산의 유래지역의 역사는 지역민에게 긍지와 자부심에, 과거와 현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경산은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과 선돌로 대표되는 공동체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청동기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목관묘(木棺墓) 시대가 열리며 지금의 임당동과 옥곡동, 압량읍 신대리 일대에 임당동을 거점으로 강력한 읍락국가인 압독국이 자리 잡아 지역을 다스렸다.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압독국은 신라에 복속되고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던 신라는 505년(지증왕 6)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며 옛 압독국의 중심지에 압량군(押梁郡)을 설치했다.삼국통일의 중심인물인 김유신이 압량군주로 군사를 훈련했던 병영유적과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마위지 등이 남아 있다.757년(경덕왕 16) 신라는 전국의 주·군·현(縣)의 명칭과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며 기존의 압독군을 장산군(獐山郡)으로 개칭했다.시간이 흘러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는 940년(태조 23) 무렵 행정구역을 단행해 기존의 장산군을 장산군(章山郡)으로 개칭했다.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자 왕의 이름인 ‘장(璋)’을 피하고자 고을 이름을 장산에서 경산(慶山)으로 개칭해 처음으로 경산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팔공산 자락에 금호강이 관통하는 경산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자인현(慈仁縣)을 중심으로 유교 문화를 꽃피웠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하나로 경산현과 하양현, 자인현은 대구부(大邱府) 소속의 경산군·하양군·자인군으로 개편되었다가 1896년 13도인 도제(道制)로 경상북도로 편제되었다.이후 1914년 식민지 정책에 적합한 지방행정 기구를 만든 일제에 의해 기존의 경산군과 하양군, 자인군이 통합되며 인근 신녕군의 일부가 흡수된 경산군이 기록에 등장한다.이후 1981년 경상북도 대구시가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며 고산면과 안심읍이 대구광역시로 편입되고 현재 경산시의 면적이 되었다. □ 부침의 역사1914년 탄생한 경산군은 지금 경산시의 411.76㎢ 면적보다 넓은 473.01㎢이었다.대구시가 1981년 7월 대구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고산면 일원 38.27㎢와 안심읍 22.98㎢이 편입되면서 경산군은 지리적인 손해를 입었다.이들 지역이 발전을 거듭해 고산면은 대구시 수성구의 시지로, 안심읍은 동구 혁신도시의 바탕이 되는 등 대구시의 재정충원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어 경산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직할시는 1964년부터 1994년까지 정부의 직할하에 있던 지방자치단체의 행정구역으로 특별시와 함께 일종의 특별행정구역이었다가 1994년 12월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광역시로 바뀌었다.경산군도 1989년 1월 오산시 등 12개 시 및 태안군 설치와 군의 명칭 변경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산읍이 경산시로 승격되며 시·군으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산시로 통합돼 현재는 3읍 5면 7동(행정동) 체제로 운용되고 있다.경산의 역사에도 아픈 과거가 있다.해방 이후 지역에도 좌익세력이 존재하며 1949년 빨치산에 의한 와촌면 박사리 양민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좌익세력과 일반 군민들이 보도연맹(保導聯盟)에 반강제로 가입되었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며 이들의 반발을 걱정한 군경에 의해 코발트 광산에서 1천여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며 양민학살의 아픈 현장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역의 고대국가 압독국압독국은 경산지역을 대표하는 고대국가로 임당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 이전 단계인 족장사회인 읍락국가(邑落國家) 였다.압독국은 원삼국시대 영남지방에 분포하고 있던 진한의 소국 중의 하나로 삼국사기에 ‘압량소국(押梁小國)’ 또는 ‘압독국(押督國)’이란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권 34 잡지 3 지리 1 장산군편에 “장산군은 지미왕 때에 압량소국을 쳐서 빼앗아 군을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니 영형이 셋이었다”고 기록하는 등 관련 기록이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압량읍이 이와 연관 있는 지명이다.압독국이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초 임당동 고분군에서 도굴된 유물이 해외로 밀반출되려다 적발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유적 일대가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며 임당유적 대부분의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임당 고분군이 옛 문헌에 기록된 압독국의 중심 고분군으로 서서히 밝혀졌다.대구 동구 불로동 고분군과 임당동 고분군, 조영동 고분군, 진량의 신상리 고분군, 자인의 북사리 고분군 등으로 압독국의 최대 범위는 국읍(國邑)인 임당유적을 중심으로 과거 경산군 전체(대구에 편입된 고산면과 안심읍 포함)와 대구시 동구 불로동 일대까지를 포함했을 것으로 보인다.압독국의 유적은 기원전 2세기 목관묘에서 기원후 7세기경의 석실묘까지 대략 800년 동안 단절 없이 지속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특히 5세기경에 축조된 고총 고분에서는 수많은 토기와 철기, 금동관과 금동관식, 은제 허리띠, 고리자루칼 등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 등 번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 지역의 발전6·25전쟁이 끝나고 경산도 전후 복구 사업이 빠르게 진행돼 1956년 경산면이 경산읍으로 승격되고 1973년 하양과 안심이 읍으로 승격됐다.1960년까지 경산은 금호평야와 산재한 분지에서 곡물 위주의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대구가 빠르게 성장하며 1980년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점차 위성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1968년 영남대의 경산캠퍼스가 조성되고 대구지역의 대학들이 잇따라 경산으로 이전하거나 신설되면서 학원도시의 이미지가 강해졌다.또 일반산업단지와 지식산업단지 등이 들어서고 2012년 대구지하철 2호선이 경산까지 연장되며 인구가 지속으로 늘어났고, 기업을 경영하기 좋은 도시와 살기 좋은 도시로 급성장해 가고 있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3-03-07

질 좋은 재료와 경험이 좋은 요리를 만든다

매스컴의 먹방과 요리 열풍은 요리에 대한 국민적 인식과 관심도를 높였고 미식가들의 입맛도 높아졌다.그 중에서도 중국 요리는 단연 세계적이다. 지구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화교가 있고 중국 음식점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중국 요리는 그 지역에 적응해 대중화된 요리다. 대구에도 화교가 직접 운영하는 그런 중화요리점이 여럿 있다.그 중화요리로 대구시민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손보충(63) 전 대구화교협회장.그가 최근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대한민국과 대구시민의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다”고 귀화한 이유를 설명하는 손 전 회장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평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랑스럽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한다. -늦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을 축하한다. 어떻게 귀화할 마음을 먹었나.△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대한민국에서 살아왔다. 이제 중화민국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나를 키워주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귀화하게 됐다. 대구시민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손보충은 없었을 것이다.-왜 진작 귀화하지 않았나.△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특히 화교협회 회장 등 화교로서 여러 가지 직책을 맡아야 했고 그런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귀화할 기회를 놓쳤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가 2년 전 드디어 귀화를 결정했다. 남은 인생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구시민들과 서로 도와주면서 살고 싶다. 화교들이 대구시민들과 협력하는데도 앞장설 것이다.-화교로서 불편한 점은 어떤 것인가.△화교로서의 불편?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다. 특히 복지혜택에서 소외돼 있는 것이 가장 큰 불만이자 불편이었다. 물론 세상이 달라졌고 지금은 많이 개선됐다.-귀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대한민국으로 귀화하고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위한 법무부 시스템이 개선됐으면 좋겠다. 직접 서울까지 가야 하는 등 귀화 절차를 밟는데 1년이 걸렸다. 귀화하니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자부심이 생기더라. 화교로서도 명예 대구시민이자 수성구민, 남구민으로 지역 사회에 많은 기여와 봉사 등으로 참여했는데 이제 내놓고 국민이자 시민으로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이다. 앞으로는 대구시민과 화교들이 모두 같이 잘 살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화교협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협회 활동을 통해 대구시와 중화민국의 민간교류에 가교 역할을 한 것이다. 김범일 대구시장 당시 대구화교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화교에게도 65세 이상은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화교에게 복지혜택이 너무 없었고 특히 대중교통 문제는 큰 불만이었다. 그래서 지하철 무료탑승 혜택을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전국에서 대구가 처음으로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화교들이 대한민국에서 인정받은 사건이었다. 물론 대구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대구시민과 화합의 차원에서 그때부터 대구 화교의 대문도 개방하고 있다.-대구에서 중국요리점을 운영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특히 손 사장의 전가복(全家福)은 인기가 높다. 전가복 때문에 손 회장의 가게를 찾는다는 고객도 많이 봤다.△그 점에 대해서는 대구시민들이 정말 고맙다. 오랜 단골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것은 내 요리실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특히 전가복은 스스로도 내세울 만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재료를 넉넉히 썼고 모든 재료를 직접 구해왔다.- 도대체 전가복의 어떤 점이 그런 히트를 치게 됐다고 생각하나.△무엇보다 재료에서부터 차이가 났다고 생각한다. 송이 철이 되면 전국의 송이 산지를 찾아 1등품을 매집했고 대게 철에는 동해안을 누볐다. 전복과 해삼, 대하, 조갯살(관자) 같은 해산물을 구하러 일주일에 한 번, 많을 때는 두 번씩 전남 여수까지 갔다. 4시간씩 걸리는 먼 길을 저녁에 가서 재료를 구해 새벽에 대구로 돌아왔다. 당시로서는 정말 고생을 했지만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전가복이 식도락가의 입맛을 사로잡고 IMF로 피로해진 대구시민들을 위로해 줬다고 생각한다.전가복이 히트하면서 우리 음식점도 전가복으로 유명해졌고 전국적으로도 중국요리에서 전가복 붐이 일게 됐다고 하더라.지금도 전가복을 먹으러 연경반점을 찾는 많은 고객들이 ‘가격에 비해 맛과 양이 대만족이다’고 칭찬해주어 신이 난다. 요리는 재료부터 신선하고 좋아야 한다. 나는 돈을 벌면 저축하는 대신 해삼을 사서 비축했다. 그만큼 좋은 재료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언제부터 요리에 발을 들여 놓았나.△고등학교(대구 화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요리 공부를 하러 서울로 갔다. 중화요리집에서 주방일을 하며 중화요리 수업을 하고는 서울에서 부산, 경주의 요리집을 거쳐 30년 전인 1993년 대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는 대구 중앙로 만경관 옆에서 중화요리집 원화반점을 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의 1세대 화교들이 운영하던 유명 중국 음식점들이 지금은 대부분 2세대로 세대교체가 됐거나 사라졌고 아버지도 몇 년 뒤엔 식당을 그만 두셨다.-아버지와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요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고 손진은·25년 전 작고)로부터 기초를 배웠다. 그러나 장사는 아버지와는 딴 판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베풀고 퍼주는 것을 좋아했다.-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것 아닌가. 언제까지 할 생각인가.△이제 그만 두려 해도 손님들이 찾아주어서 그만 둘 수가 없다. 장사의 기본은 손님이다. 손님이 음식을 먹고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도록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 요리라면 손님이 먹을 수 있도록 내용부터 만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특히 요리의 미관까지 생각해서 요리를 해야 한다. 지금 젊은 사람들이 내용은 충실하게 채우지 못하면서 선전만으로 음식점을 홍보하려는 경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경험을 통해 요리를 배워야 한다. 노력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요리도 그렇다.-요리점 소문이 나면서 에피소드도 많이 있었겠다.△돈을 싸들고 와서 동업하자고 찾아오거나, 분점을 내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직 한 곳에서만 했다. 한 곳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음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지켰다.-도대체 중국 요리는 종류도 많다는데 얼마나 되나. 손 회장이 해 본 요리는 얼마나 되나.△중국 요리는 셀 수가 없다. 변화무쌍한 것이 중국 요리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배우면 열 가지를 응용해 만들 수 있고 열 가지를 알면 백 가지를 조리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요리다. 물론 내가 조리해 본 요리도 셀 수 없을 정도다. 언젠가 소꼬리 새우말이를 주문한 손님이 있었다. 갑자기 그의 주문을 받아서 재료를 챙겨보니 당장 할 수 있는 요리가 아니었다. 궁리 끝에 소고기를 얇게 저며서 새우를 말아 조리한 뒤 테이블에 올렸더니 손님이 ‘바로 이거야!’ 하면서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음식은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그런데 중국 요리는 모두 불에 익힌다고 들었다. 생선회 같은 요리는 없나? 낯선 지방에 가서 음식을 모를 때는 일단 중국음식점에 가면 가장 무난하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그렇다. 육류나 어패류는 물론 야채까지 어떤 재료든 모두 불로 익혀 내놓는다. 모든 요리는 재료에 양념을 하거나 녹말가루를 묻히거나 손질해서 기름에 튀기거나 볶거나 찌거나 굽거나 훈제로 익히는 등 즉석에서 조리한다. 미리 해두는 요리는 없다. 그러니 생선회 같은 요리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중국 요리가 위생적이고 안전하다는 거다.-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음식점은 있다고 한다. 모두 같은 중국음식인가? 심지어 중국인들은 한국의 중화요리가 중국 현지에는 없는 요리라고 한다는데.△그건 아니다. 세계 어디에도 중국음식점이 있지만 모두 현지화 된 중국음식점이라고 보면 된다. 미국에는 미국식 중국음식점으로, 일본이나 유럽에도 그 지역에 맞는 음식점으로 현지화(로컬라이즈)된 것이다. 한국의 자장면이나 짬뽕이 중국면의 한국화인 것처럼 중국 음식점이라도 메뉴들이 현지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만큼 변화무쌍한 요리가 중국 요리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중국인들조차도 넓은 중국 땅의 음식을 모두 모른다고 보면 된다. 중국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다르고 그 음식들이 조리법에 따라 다른데 정통 중국요리라고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식당을 찾는 손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우리집에 오는 단골들 중에는 ‘알아서 해 달라’고 주문하는 손님들도 있다. 자신 있는 요리를 해 달라는 주문이다. 그럴 때는 준비된 계절 재료로 요리를 낸다. 가을이면 송이를 재료로 하듯 지금은 부추가 제철이니 부추를 재료로 한 요리를 내놓게 된다. 중국 요리집에 오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장 즐겨 찾는 메뉴가 탕수육이다. 비슷하지만 그 탕수육으로 요리 실력을 알 수 있고 고객 입맛을 맞출 수도 있다. 특별한 메뉴는 시간이 걸린다. 동파육만 하더라도 주문하고 빨라야 1시간 이상 걸리기 때문이다.-요리 붐이 일면서 TV에서 요리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겨나고 인기 셰프들이 등장하고 있다.△같은 요리사로서 저마다 특징을 가지고 시청자들에게 중화요리에 대해 인식을 넓혀주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식객들의 입맛도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셰프들이 TV에 나와서 시범을 보이거나 공개 강연을 하는 것을 보니 모두 대단하다. 요리들은 모두 특색이 있고 각기 선호도가 있는데 내가 평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말 대단한 실력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더라.-살아오면서 가장 기쁜 일은 무엇인가.△맨주먹으로 출발해서 어엿한 내 가게를 가졌으니 평생의 희망이자 꿈을 일군 것이다. 맨땅에서 세집을 전전하다 내 집을 장만했다. 열심히 사는 것이다.-하고 싶은 말이 있나.△돈 많이 벌어서 가져가는 것 아니다. 베풀어야 하고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 단체에서 요구하는 각종 기금이나 성금에서부터 공개할 수 없는 여러 형태의 기부에 인색할 수도 없다. 연말이면 각종 단체에서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을 정도였다. 그래도 대구시민 덕분에 오늘의 연경이 있고 손보충이 있으니 보답하기 위해 대한민국에 귀화한 것이다.□ 손보충(孫寶忠)전 대구화교협회 회장, 중화요리 전문가.전 대구화교중 이사장. 전 중화민국 교무위원전 명예 대구시민. 현 연경반점 대표.그의 부친(고 손진은)은 중국 산동성 치하현 출신으로 해방 후 인천에서 열린 누나의 결혼식에 따라왔다가 한국전쟁이 터져 나가지 못하고 부산을 거쳐 대구에 터를 잡은 1세대 화교상이다.손보충은 1993년 대구 남구 이천동에서 연경반점으로 시작, 때마침 IMF로 지친 시민들을 전가복으로 위로해주면서 전국적 히트를 친다.귀화 전에는 명예 대구시민으로 지역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의 가게를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감사패나 표창장이 대변해준다.그의 가게는 연말이면 각종 사회단체의 기부금 출연 요구가 줄을 이었고 근본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에다 어렵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손 전 회장은 이들의 요구에 인색하지 않았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3-06

“예술은 창조물이 아닌 사회적 토양에서 피는 꽃”

예술은 사회적 토양에서 피는 꽃이라고 한다. 예술가 홀로 뚝딱 만들어내는 창조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예술이 발달한 도시에는 튼실한 밑동이 존재하며, 뿌리 깊이 간직한 수분과 양분은 대를 잇는 자양분이 된다. 찬란한 고대 문화의 성지인 경주는 한국 근현대 미술의 선두였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가 그 축이었다. 가난하고 피폐했던 시절, 남한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의 설립은 한국 근현대예술사를 통틀어서도 파격적인 사건이다. 경주의 문화적 토양이 풍부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동안 조명 받지 못했던 경주예술학교 출신들의 전시가 2015년부터 이뤄지고 있다. 경주 예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지역 예술인들의 노력 덕이다. 경주 근현대 미술사를 발굴하고 추적하며 스스로의 작품 활동 또한 성장했다고 말하는 박선영 작가를 경주미술사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났다. -최근 7번째 개인전을 일본에서 개최했다고.△작년 12월에 일본 오이타현 나카츠시 기무라 미술관에서 ‘푸른 사유·빛, 일상과 조우하다’전을 했다. 동아시아 문화예술교류의 일환으로 기무라 미술관이 진행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다. 빛을 이용하는 작가를 공모한다고 해서 포트폴리오를 제출했고 초청을 받았다. 일본의 방역조치가 강화됐던 때라 사전 조율은 온라인으로 했고, 전시 기간에 2주간 머물며 워크숍과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했다.-그동안의 개인전 타이틀을 보면 ‘기억의 풍경’, ‘반가사유’, ‘무엇이든 무엇도 아닌’, ‘푸른사유’ 등 주로 기억과 시간, 사유를 주제로 하고 있다. 작품을 구상할 때 주제부터 확정하고 형태를 확장시키는 편인가.△애초에 의도했든 아니든, 지나고 보니 관통하는 주제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소멸이다. 언젠가는 사라지는 존재지만 그렇다고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아서 우리에게 여전히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어릴 적부터 세상과 현실의 이면이 궁금했고 ‘세계의 불가사의한 이야기’ 같은 류의 책을 읽곤 했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건, 감정, 그리고 감각으로 느끼는 많은 것들은 몸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시간이 지난 후 작업을 하면서 그 ‘기억’은 칠해지고, 닦이고, 다시 덮어짐을 반복한다.-작품 전반의 푸른색이 인상적이다. 푸른색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인가.△내면의 사유적 풍경은 결국 푸른색으로 남을 때가 많았다. 내게 푸른색은 하나의 색이 아닌 무수한 스펙트럼을 지닌 색이다. 연한 파랑, 어두운 파랑, 따뜻한 파랑, 차가운 파랑, 초록색이 느껴지는 파랑, 붉은색이 도는 파란색까지. 그리는 순간의 우연성을 담은 추상 작업이 많은데, 그 과정의 결과가 대체로 푸른색 계열이었다.-코로나19를 전후로 작품의 분위기가 다르다. 드로잉 위주의 평면에서 조명과 소리를 더한 입체로의 변화는 어떤 고민의 산물인가.△팬데믹을 전후로 나와 연결된 타인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지면서 사진과 조명을 작업에 사용하게 되었다. 팬데믹은 공포로 다가왔고 타인과 멀어져야 했던 동시에 가깝게 연결된 세계임을 알게 해주었다. 마스크 탓에 누가 누군지 분간되지 않는 현실이 낯설면서도 마스크를 끼지 않는 행위들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멈춰진 일상은 한편으로 사유할 시간을 제공했다. 반가사유상을 배경으로 나의 초상사진을 겹쳐 표현한 작품은 그렇게 나왔다. 경주미술협회 활동과 경주미술사 연구를 통한 지역 미술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작품의 변화로 이어진 측면도 있다. 예전에는 내 안에서만 뭔가 끌어내려고 했다면, 지금은 예술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오랫동안 ‘기억과 시간’을 주제로 작업을 한 영향인지 경주 미술사 연구에도 열심이다. 지역 근현대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경주의 첫 공립미술관 추진 당시 특정인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명칭을 둘러싼 논쟁이 컸다. 경주는 근현대 미술의 역사가 깊고 작가군이 상당하지만 관련 연구가 미약했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가 대단했다거나 황술조, 손일봉 등등의 거장이 있었다는 것만 알려진 정도였다. 그런 문제 의식에서 경주미협 내에 경주근현대미술연구회를 발족하고, 드러나지 않은 1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아카이브 자료를 발굴했다. 솔거미술관 개관전인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을 시작으로 매년 관련 전시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70년이 지났으니 자료 수집이 쉽지 않았을 텐데.△ 경주 근현대미술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와 나란히 할 만큼 역사가 깊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지방의 미술역사가 소외되어 왔고 관련 연구자도 드물다. 경주예술학교의 경우 경주시사나 예총사의 한두 페이지가 전부였다. 당시 신문 기사를 찾아 일일이 대조하고 연락이 닿는 유족들과 만났다. 집중적인 자료발굴과 유족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환경은 전시회를 통해 마련됐다. ‘1946 경주예술학교’ 전시 소식을 들은 사공침(경주예술학교 1회 졸업생)의 손녀가 자료를 들고 찾아왔다. 조희수 선생에게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또렷하게 기억을 하시더라. 경주예술학교 출신으로 유일한 생존자인 조희수 선생은 경주 근현대 미술사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든든한 조력자이다. 작품과 자료의 발굴에 있어서는 서양화가인 최용대 수석 연구원의 역할이 컸다. 최용대 선생은 경주 1세대 사진작가 최원오 선생의 아드님이다. 그리고 미술사학자인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을 만나면서 연구는 활기를 띠게 됐다. 해방 직후 설립된 경주예술학교에 관한 논문 저자로 지금까지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경주가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이 된 배경은.△경주가 근대 미술문화를 선도한 배경은 탁월한 인재들에 있다. 황술조를 필두로 손일봉, 김준식, 김만술, 손수택 등이 해방을 전후로 활동했다. 경주예술학교는 경주 근대미술의 중요한 축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과 보다 6개월 빨리 설립된 남한 최초의 예술전문학교이다. 서울의 중진 미술가를 교수로 초빙했을 정도로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좌우익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1952년 2회 졸업생 배출을 마지막으로 폐교의 수순을 밟게 된다. 재학생들은 폐교 이후 홍익대학교로 편입했다. 예술학교의 꿈을 버리지 못한 김준식은 미술과를 계림학숙으로 흡수합병한다. 이후로도 예술을 향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고, 빛바랜 사진 뒷면에서 ‘1956년 경주미술관 건립위원회’라는 글귀가 발견되기도 했다.-경주에 인물이 많았던 이유는.△문화 예술의 저력은 오랜 역사에서 나온다. 경주에 예술가가 많았다는 건 신라 문화의 풍토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에 유학을 떠났던 작가들 대부분은 해방 후 귀국해서 서울이나 대구에 정착했다. 고향에 돌아와 활동한 경우는 경주가 유일했다. 신라 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 내재된 풍부한 문화적 토양이 예술적 가치를 일찍 일깨우지 않았을까. 유학생들의 잇단 귀국은 경주의 문화 예술적 역량을 고조시켰다. 일본에서 미술교사를 한 황술조를 비롯해 손일봉과 김준식, 김만술은 일본 유학파로 수상 경력도 화려하지만 경주에 머무르며 작업을 이어갔다.-창작 활동과 미술사 연구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할 텐데 문화 기획에도 관심이 크다고.△작년에 경북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으로 70대 이상을 위한 ‘황남 골목에서 청춘을 만나다’를 기획해서 운영했다. 미술감상과 다양한 표현활동을 통해 삶을 회고하고 긍정하는 다소 거창한 목표의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워하던 어르신들이 점차 몰입하고 성취감을 느꼈으며, 마칠 때는 아쉬워했다. 예술을 일방적으로 건네는 것이 아닌 예술로 소통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앞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을 만들기 위해 뜻있는 동료 작가들과 매주 만나 공부도 한다.-앞으로는 또 어떤 행보를 작업을 보여줄지 기대된다.△경주 미술사 정립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지금은 경주화단의 2세대 작가인 배한기, 이재건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향후 60년대 이후 경주 현대 미술사도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경주 미술의 맥을 찾는 작업을 하다 보면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다. 작품 활동 또한 변수가 끼어들어 길을 잃을 때가 있지만, 우연과 필연이 섞였을 때 만들어지는 에너지라는 것이 있다. 그럴 때 희열이 크다. 생각지 못한 울림을 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독창적인 작품을 구축한 작가들, 오래도록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온 모든 작가들을 존경한다. 나 또한 원하고 맞다면 서슴지 않으려 한다. 박선영 작가는경주 출생으로 학창 시절 내내 미술부 활동을 했다.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부산대학교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주요 전시로는 ‘기억의 풍경’(경주라우갤러리, 2010), ‘반가사유 2020’(서울 GB갤러리, 2020), ‘무엇이든 무엇도 아닌’(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 2021), ‘푸른사유·빛’(경주솔거미술관, 2022), ‘푸른사유?빛, 일상과 조우하다’(일본 나카츠시 기무라기념미술관, 2022) 등이 있다. 7회의 개인전과 400여 회의 단체전 및 초대기획전, 해외교류전 등에 참여했다. 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17~18대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솔거미술관 특별기획전을 담당했다. ‘경주미술의 뿌리와 맥 7인’을 시작으로, 경주예술학교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던 김준식, 경주예술학교의 마지막 학생으로 홍익대 교수를 지낸 김종휘, 경주예술학교 출신의 유일한 생존자 조희수 선생을 비롯해 경주 근현대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들을 조명하는 10여 회의 전시를 기획·총괄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경주지부 부설 경주미술사연구소장이자, 미술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아트앤지(ARTG)미술경영연구소 대표이다./배은정 작가

2023-02-27

경제·문화 요충지 대구엑스코 ‘역대 최고 실적’

대구 엑스코가 지난해 사상 최대 경영성과를 달성하면서 지역경제 및 문화 활성화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6일 엑스코에 따르면 지난 23일 개최된 이사회에서 실적을 심의·의결한 결과 매출액, 영업이익 및 행사 개최건수 등 모든 분야에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2천19건의 행사를 개최하며 매출액 328억, 영업이익 13억 원을 기록한 엑스코는 2021년 대비 매출액은 84억이 증가됐고, 영업이익은 엑스코 설립 이래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한 2019년 3억의 4배 이상의 실적을 기록했다.전시장 가동률도 52.3%로, 2021년 전시장 확장으로 2배 넓어진 공간을 2년 만에 50% 이상으로 가동시키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이는 전국 전시컨벤션센터가 전시장을 확장하고 전체 가동률을 50%까지 회복하는데 평균 7년이 소요되는 점과 비교하면 엑스코는 확장 2년 만에 전시장이 활성화 됐다는 지표라 의미가 깊다.지난해 엑스코는 세계가스총회 특수와 9월 발표한 경영혁신 계획에 따른 예산절감을 바탕으로 엑스코 일대 조경을 확충하고 경관 조명을 설치하면서 시민들에게 복합 문화공간으로 각광받았다. 이는 연말 문화행사 매출액으로 연결돼 2021년 대비 매출액만 1.6배 증가한 것이 주효했다. 또한, 지난 10월과 11월에는 중앙정부가 주최하는 대한민국 안전산업박람회와 국제농기계자재박람회가 연이어 성료되면서 대형 전시회 개최를 위한 최적의 전시장으로 위상을 확고히 했고, 이로 인해 매출의 증대뿐만 아니라 향후 정부순회 전시회 등 대규모 행사를 지속 유치·마케팅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됐다는 분석이다.올해 엑스코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비즈니스 교류의 장으로 소비재와 산업재 전반에 대한 다양한 아이템으로 역대 최대인 125건의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 전시장 목표 가동률인 55%도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더불어 1, 2월에 개최된 전시회 방문객도 지난해 대비 20%이상 증가한 것으로 집계돼 지역 전시컨벤션산업 활성화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전시회 방문객 증가는 행사의 규모 증가와 신규 전시회 유치로 이어지기 때문에 지역에 가져오는 파급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기대된다.엑스코는 대구 5대 미래산업과 관련한 주관 전시회 규모도 확대한다. 친환경 에너지 분야 국내 최대전시회인 국제그린에너지엑스포는 올해 20주년을 맞아 규모는 30% 늘어나고 참가업체도 20%이상 증가돼 태양광, 수소, 연료전지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 최신 기술들을 만나볼 수 있어 국내외 기업 및 기관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대구국제미래모빌리티엑스포는 대구가 자율주행과 도심항공교통(UAM) 선도 도시로서 육성하고 있는 지능형 자동차부품 및 UAM분야를 결합해 전시회 규모를 50% 이상 확대 개최할 예정이다. 메디엑스포와 첨단의료기기산업전은 지역 헬스케어 산업의 디지털 전환 및 글로벌 시장 진출 지원에 주력해 엑스코 동관 전관에서 개최된다.이와 함께 ICT융합엑스포와 로봇산업전시회도 ABB와 로봇분야를 확대하고 스타트업, 유망 기업들이 최신 트렌드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특별관과 활로 개척을 위한 수출상담회도 확대 운영해 개최한다.아울러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산업기술 RD대전, 국토교통부에서 주최하는 국토교통기술대전 등 정부 정책 관련 수도권 전시회를 지속 유치해 지역 기업들에게 산업육성 핵심정책과 미래 전략기술들에 대한 공유 및 경쟁력 강화에 보탬이 될 예정이다.이밖에도 대구의 우수 기업제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메이드인대구페스타도 신규로 엑스코에서 기획하여 개최될 예정이다.지난해 9월부터 추진한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엑스코 주변 명소화 사업’도 계속 추진된다. 야외광장에 가을 국화전시회와 더불어 개최된 무료 공연과 겨울철 조명과 조형물을 설치해 빛이 있는 거리로 만든 엑스코는 올해 산림청과 대구시의 지원을 받는 2023년 생활밀착형 숲 조성사업에 참여해 전시홀과 회의실 방문객을 위한 실내정원 조성을 추진한다. 또한, 향후 엑스코 주변 1만㎡ 일대를 걷기 좋은 거리와 대규모 광장으로 조성해 시민들이 365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동관 전시장과 서관 전시장 사이 도로에 녹지 쉼터를 조성하고, 동·서관 전시장을 가로 지르는 공중 다리도 설치해 편리한 이동과 일대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한다. 서관 전시장 벽면에는 대형 미디어파사드를 설치해 활력을 넘치게 하고, 엑스코와 인근 대불공원을 잇는 녹지공간을 조성해 유통단지 일대 활성화와 대기질 개선에도 기여해 ESG경영도 실현한다.이밖에도 엑스코 내부에는 에너지 효율이 높은 냉·난방설비와 공조기 설비를 도입해 탄소를 절감하고 쾌적한 관람환경을 제공할 계획이다. “마이스산업 선도, 지역업계와 동반성장”쾌적한 시설·내실있는 콘텐츠 제공 약속“2023년은 지역 마이스업계와 동반성장하는 한해가 될 것입니다.”이상길 엑스코 대표이사 사장은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로 도약하기 위한 올해 엑스코의 목표를 설정했다.특히 MICE산업 선도를 이 사장은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이 사장은 “지난해 12월 엑스코는 지역 MICE업계 관계자 초청 간담회를 개최해 현장의 애로사항과 건의사항을 청취하고, 상생 발전하기 위한 방안들을 논의했다”며 “엑스코는 올해 지역 주최자의 전시회 개최 및 신규 전시회 개발을 장려하기 위해 임시 사무실 제공, 엑스코 홍보 네트워크 지원, 아이디어 및 성공사례 공유를 통한 신규전시회 개발 지원 등 다양한 지원제도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현재 엑스코는 지역 MICE산업 활성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간담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지역 MICE업계가 동반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고, 더욱 다양한 행사들을 꾸준히 개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이를 위해 엑스코는 지역 MICE산업의 핵심 인프라로서 사회적 책임 이행을 더욱 확대한다.이 사장은 “최근 엑스코는 지역 유수의 대학들과 함께 지역 청년들의 MICE업계 진출 기회 확대 및 인재 양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올해 전시 컨벤션산업의 현장에서 전문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할 예정”이라며 “특히 현재 운영 중인 대학생 인턴십은 엑스코에서 MICE관련 행사의 준비부터 개최까지 업무 전반의 실무를 경험하고, 향후 현장으로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하반기에도 운영될 계획”이라고 했다.엑스코 이상길 대표이사 사장은 “엑스코가 홍준표 시장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역대 최대의 성과를 거둘수 있었고, 엑스코가 글로벌 전시컨벤션센터로 성장하고 지역 MICE산업의 앵커시설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홍 시장님을 비롯한 대구시와 경북도 그리고 시도민들에게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도 엑스코는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 도약하기 위해 쾌적한 시설과 내실 있는 콘텐츠로 MICE산업을 선도하겠다”고 전했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2-26

‘미스터 션샤인’ 주인공처럼… 애절한 감성 그대로 느껴보세요

입영열차를 탄 신병들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이 논산훈련소다. 논산은 군사도시 같은 느낌으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 잡고 있다. 논산이 의외로 볼거리가 많고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유적지가 널려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유명 영화·드라마의 산실 ‘논산선샤인랜드’부터 마치 흑백필름처럼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논산 강경읍까지 한국의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이번 주 충남 논산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국내 최장의 탑정호 출렁다리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순위 정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출렁다리가 중요한 볼거리가 되면서 전국 곳곳에 경쟁하듯 출렁다리가 생겼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국내에 있는 출렁다리는 무려 160개. 그중 논산 탑정호에 세워진 출렁다리가 600m로 가장 길다. 종전 1위였던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402m)보다 198m 길다. 폭 2.2m, 길이 600m 다리를 조성하는 데 총 158억원이 투입됐다고 한다.사실 출렁다리 길이를 순위로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탑정호 출렁다리는 미적인 감각으로 순위를 정한다 해도 수위권에 들 것이 확실할 만큼 화사하고 그림처럼 아름답다. 출렁다리는 현수교 양식으로 기둥에 걸린 주 케이블에서 내려온 행어(hanger·가는 케이블)가 받치고 있다. 상판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게 특이하다. 교량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멍을 뚫었다고 한다. 수면에서 상판 바닥 구멍까지 높이는 10m로,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의 공포감이 극대화하도록 설계됐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발을 떼기 어려울 정도다. △유명드라마 산실 논산선샤인랜드논산시와 드라마 제작사 등이 손잡고 조성한 논산선샤인랜드는 국내 유일한 개화기 촬영 세트장인 선샤인스튜디오, 한국전쟁 직후의 풍경을 재현한 1950스튜디오, 실내에서 사격과 VR 체험을 즐기는 밀리터리체험관 등으로 구성된다. 총면적 약 2만㎡에 이르는 선샤인스튜디오는 1900년대 초반 한성(서울)을 재현한 공간이다. 한성전기 사옥을 비롯한 근대 서양식 건물과 기와집, 초가집, 일본식 가옥에 1899년 운행을 시작한 전차까지 어우러져 120여 년 전 모습이 완성됐다. 이곳에서 ‘미스터 션샤인’을 대부분 촬영했고, 드라마가 인기를 끌자 논산선샤인랜드는 한류 관광지로 떠올랐다. 온빛자연휴양림도 새로운 한류 명소다. 2021~2022년 방영한 드라마 ‘그해 우리는’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촬영지인 온빛자연휴양림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근대 건축물 볼 수 있는 강경읍강경읍은 논산의 근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국내 첫 천주교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성지인 강경성당, 국내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 강경화교학교 등 근대건축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1905년 세워진 ‘옛 한일은행 강경지점’은 일제 강점기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이었다가 해방 이후 한일은행 강경지점,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된 곳이다. 지금은 은행의 용도를 다하고 강경의 역사를 품은 강경역사문화관으로 사람들을 맞고 있다. 역사문화관 안에는 강경의 근현대 모습을 담은 사진과 주판, 전축, 텔레비전, 전화기 등 생활용품이 전시돼 있다.역사문화관에서 약 2㎞ 떨어진 둑길에는 미내다리가 있다. 뜬금없는 느낌이 들지만, 미내다리는 원래 충남과 전북을 이어주던 길이었다. 외견은 단단하고 위엄과 기품이 넘친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는 일대 세도가들이 돈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걸어서 1분이면 건너갈 정도의 작은 다리지만 당시에는 영남·호남·충청을 통틀어 제일의 대교였다고 한다. △윤증 고택, 비극의 황산벌까지강경에서 차를 타고 10분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논산이 나온다. 조선 후기 대학자인 명재 윤증 고택이 노성면에 있다. 배롱나무와 연못이 품격을 더하는 고택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노학자의 꼿꼿한 품성을 닮았다. 윤증의 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단 하루도 이 집에 머무르지 않았다. 늘 초라한 집에 사는 윤증이 안타까워 제자들이 돈을 추렴해 집을 세웠지만 그는 과분하다며 이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고려시대의 논산을 편린처럼 엿볼 수 있는 곳은 관촉사다. 고려 광종 때 혜명이 창건한 관촉사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높이 18.12m, 둘레 9.9m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은진미륵으로 불린다. 거대한 얼굴과 옥수수 모양처럼 위로 솟은 뾰족한 머리를 하고 있어 ‘못난이 불상’으로도 불렸지만, 2018년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백제시대 비극의 드라마가 펼쳐진 곳도 논산이다. 계백의 결사대가 김유신의 5만 신라 대군과 결사 항전했던 황산벌이 탑정호 수변생태공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가족을 베고 쓰러져가는 조국과 함께 죽음을 택한 장수의 안타까운 절규가 들리는 것 같다. 참담한 비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황산벌에는 패전의 역사를 담은 백제군사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한 번도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했지만 시기마다 깊고 선명한 흔적을 남겨놓은 곳. 어머니의 주름 같은 애환이 남아있는 곳. 논산은 바로 그런 곳이다.유명 영화·드라마 촬영지 2選 △‘헤어질 결심’-강원 삼척 부안해변부남해변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마지막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마을에서 관리하는 아담한 해변은 그 자체로 영화적이며, 입구 대숲과 바위산과 모래밭도 시적이다. 해변에 서면 애잔한 사랑의 사연이 밀물처럼 다가온다. 탕웨이는 이 해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 박해일은 모래사장에 숨어 파도속으로 사라진 탕웨이를 애절하게 찾아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부안해변은 작고 아름다운 해변이다. 이곳은 원래 군사 시설 지역으로 1년에 40일 정도만 개방되는 곳이었다고 한다. 해변 자체도 매우 작아서 동해에서 가장 작은 해수욕장에 속한다고 하는 곳이다. 주로 7,8월 여름에만 개방되는 곳이다. 주간에는 대체로 개방하나, 입구가 닫혔을 때는 삼척시청 관광정책과에 문의하면 마을에 연락해준다.△‘갯마을 차차차’- 경북 포항 북구 최근 포항으로 여행자를 이끄는 한류 드라마는 ‘갯마을 차차차’다. 현실주의 치과 의사 윤혜진(신민아 분)과 만능 백수 홍두식(홍반장, 김선호 분)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렸다. ‘갯마을 차차차’를 따라가는 여행의 시작점은 북구 청하면에 자리한 청하공진시장. 시장 한가운데 장터 건물을 중심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공진반점과 보라슈퍼, 청호철물, 오윤카페(한낮에커피달밤에맥주)가 있다. 주말에는 제법 많은 여행객이 찾아오는데, 오윤카페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참 줄을 서야 할 정도다.구룡포항과 가까운 석병1리 방파제의 빨간 등대 역시 ‘갯마을 차차차’ 촬영지로 알려졌다. 혜진이 두식에게 고백할 때와 여러 장면에서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구룡포근대문화역사거리는 일제강점기 가옥 80여 채가 남은 곳으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방영되면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최병일 작가

2023-02-23

“오래도록 나만의 색깔 담긴 사진 찍고 싶어”

새벽 4시에 홀로 카메라를 들고 구미 원평동 재개발 지역에 들어섰다.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옛 모습으로 돌아올 수 없는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아 사라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하지만, 그런 ‘예술적 필요성’을 건설사 관계자와 경비원들에게 이해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철거와 신축이 계속되는 도시의 재개발 현장은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다. 안전을 위한 감시와 예기치 않은 사고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다.오래전부터 원평동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진행 중인 사진작가 김은정씨가 카메라를 들어 딱 한 번 셔터를 누르자 저 멀리서 재개발 업체 관계자가 달려나와 촬영을 가로막았다. “카메라의 메모리 카드와 신분증까지 뺏긴 적도 있어요.”원평동에는 조그만 교회가 있다. 철거를 위해 인근을 철책으로 막았지만, 예배를 하려는 신도들을 위해 조그만 쪽문을 만들어뒀다. 거기서도 촬영을 시도했으나 그것 또한 제지당했다. 상황이 이처럼 어려웠지만, 김 작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을 위한 열정을 꺾지 않았다. 흑백사진에 담긴 ‘원평동 시리즈’는 이런 우여곡절의 과정 속에서 탄생했고, 그 동네를 카메라에 담는 작업은 5년째 이어지고 있다.김은정 작가가 허물어져 가는 ‘원평동에서의 사진 찍기’에 이처럼 에너지를 쏟는 이유는 뭘까? 2021년 ‘원평동…ing’ 전시회에서 김 작가는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구미의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다 도심 상권의 변화에 밀려 변두리로 존재했던 원평동. 재개발 사업으로 낡은 구시가지는 초고층 아파트로 변모 중이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아이들이 뛰놀고 대가족이 한 집에서 모여 살던 정겨움은 추억이 되었다. 진정한 다큐멘터리는 삶이 녹아있는 기록이고 희망이 돼야 한다. 사진은 시간을 담는 예술이며 우연의 산물이다. 시간의 흐름 속 어느 한순간을 포착해 동결해 놓으며 과거를 상상만으로 소유하는 것이 사진의 매력이다.”김 작가는 마흔을 넘겨서야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한 늦깎이지만, 자신의 일을 대하는 태도와 사진을 향한 믿음은 여느 청년 작가들 못지않다.2019년부터 2022년까지 ‘사진 바다 기획전-멈출 수 없는 그리움’을 필두로 포항갤러리와 구미 드림큐브에서의 ‘원평동…ing’ 전시, ‘사진의 섬 송도 외부작가 전시’ ‘포항 산책 기획전’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대한민국 국제 포토 페스티벌 형형색색(形形色色) 수상자전(展)’ 등의 단체전에도 참여한 바 있는 김은정 작가.“사진이란 빛과 어둠이 만나 내 눈을 이끄는 순간, 외부 세계인 피사체와 내부 세계인 정신이 만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라 말하는 김 작가를 지난 18일 본사 편집국에서 만났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새로운 길’을 찾아가고 있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아래 옮긴다. -태어난 곳과 생활한 지역은.△통도사가 가까운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업 관계로 이주한 아버지를 따라 구미에 정착했다. 스물셋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아 길렀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남아 서른여섯 살에 구미1대학에 입학해 미용·보건을 전공했다. 만학도였으니 열심히 공부했고, 이후 경일대로 편입했으며, 대구한의대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사진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력인데.△맞다. 정규 교육과정으로 사진을 공부하지는 못했다. 중고교 시절엔 그림을 좋아했다. 크고 작은 상도 몇 번 받았다. 사진과는 무관하게 살았는데, 10여 년 전쯤 구미의 한 화실을 다니며 풍경 스케치를 위해 카메라를 구입하게 됐다. 그게 계기가 돼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작업을 지속하면서 애정도 커져 갔다.-사진과 그림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나.△내가 사진을 시작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림보다는 천재성이 덜 필요하다고 느껴서다. 사진은 감각과 더불어 성실성이 요구된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겐 한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진은 일단 카메라를 들면 쉽게 그만두는 사람이 드물다.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 성실함이 더해진다면 발전 가능성이 높은 예술 장르가 바로 사진이다.-그렇게 시작된 사진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관심 가졌던 주제나 소재는.△낡고 허물어진 것들에게 마음이 간다. ‘원평동 시리즈’도 그래서 시작했다.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는 구미 원평동 일대는 낙후된 지역이었는데, 쪽방이 있던 그곳에 41층 초고층 건물이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것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철거됐거나 철거가 예정된 지역을 촬영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재개발 관계자는 물론, 거주하는 사람들도 민감하고 예민한 상태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 때마다 항상 조심스럽다. -어떤 사진을 지향하는지.△내가 찍는 사진에 사람 사는 냄새와 따뜻함이 담겼으면 좋겠다. 동네 아이들의 웃음, 그 아이들의 친구로 살아가는 개와 고양이, 좁은 골목 사이에서 무언가를 나누며 사는 이웃들을 기록하고 싶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흔적들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흑백사진이 매력적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주로 흑백으로 작업한다. -영향을 받았거나 닮고 싶은 사진작가는 누구인가.△서울 중림동 골목 안 풍경을 30여 년간 촬영한 김기찬 씨다. 어릴 적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 골목 안 사람들의 애환, 소박한 우리네 일상의 모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인데, 지금 내가 하는 작업과의 연관성이 있어 더욱 좋아하게 됐다. -‘좋은 사진’을 찍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사진엔 자신만의 개성이 담겨야 한다. 달력에 인쇄된 사진처럼 천편일률적인 게 아닌 자기의 정신세계가 오롯이 표현된 사진이라면 단 한 장이라도 가치가 있다. 미학적 표현을 위해서는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철학과 인문학 관련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도 관심을 가진 주제를 보다 깊이 알아가기 위해 서점에 자주 가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구입한다.-향후 예정된 전시회가 있는지.△오는 4월 7일부터 14일까지 ‘기획초대전 No Rules’이 미국 뉴저지에서 막을 올린다. 같은 달에 서울 강호갤러리에서 개인전도 열린다. ‘대구 비엔날레 5인 기획전’도 준비하고 있다.-어떤 사진작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좋겠는지.△성실하게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이어간 다큐멘터리 작가로 남고 싶다. ‘원평동 시리즈’ 작업을 하며 쫓겨나기도 했고, 달려드는 모기에게 수없이 물리기도 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엔 흔적과 함께 고요함과 공포가 남는다. 밤에 혼자 사진을 찍다보면 무서울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이 작업을 묵묵히 해낼 각오가 돼있다. 과거를 포착해 그걸 영원으로 남기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시간이 흐를수록 빛이 난다. 내가 더 나이 들었을 때 원평동에서의 작업이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사라진 것들의 향수를 불러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2-21

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모든 시는 음악이다. 시에 멜로디를 입힌 가곡은 그래서 희노애락의 우리 감정을 한 단계 승화시키는 우리의 노래다. 품위와 격조를 갖춘 우리의 노래, 바로 가곡이다. 반주자는 그 가곡을 더욱 가곡답게 만든다. 반주 전문연주자 정혜경은 반주자나 성악가에게 더 많은 작사가와 작곡가에 대한 공부를 주문한다. 그것이 우리 가곡을 더 많이, 더 멀리 전파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피아니스트 정혜경에게 한국 가곡이란 어떤 것인가.△한국 가곡은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아픈 역사의식도 함께 새겨진 시가 만들어낸 음악이다. 그렇게 우리의 희노애락이 담긴 가곡이 지금 시대에서 부르기엔 구시대적 유물처럼 폄훼되어 점점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사장되어 가는 데에 위기감을 느꼈다. ‘봉숭아’의 가사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라는 부분이 있다. 마치 우리 가곡의 미래를 예견한 듯해서 가곡을 지켜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전공이 독일 예술가곡이다. 왜 한국 가곡에 관심을 갖게 됐나.△어릴 때부터 책을 참 좋아했다. 친정아버지께서 내게 ‘책벌레’라는 별명을 주셨을 정도다. 글보다는 시가 좋았고 시보다는 시조를 더 좋아했다. 한국 가곡의 작사는 대부분 아름다운 시로 지어졌고 가곡의 효시인 홍난파의 ‘봉숭아’나 박태준의 ‘동무생각’의 작사는 시가 아닌 시조다.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우리 가곡에 대한 인식을 새로 하게 됐다. 유학 생활 중 친구의 입학시험에 반주를 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심사하시는 독일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왜 너희 나라 음악은 연구하지 않고 여기에 왔니?” 그 말을 듣고 한국 가곡을 돌아보게 됐다. 유학에서 돌아와 우리 음악계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됐다. 남의 나라 곡과 작곡가는 그토록 연구하면서 우리나라 가곡의 작곡가는, 또 작사자는 왜 연구하지 않느냐는 스스로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였다.-국내 음악에서 가곡의 위치와 중요성은 어느 정도인가.△가곡의 위치보다는 우리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 가곡은 우리의 근본적인 부분이므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때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깊은 물이 조용히 흐르는 것처럼. 일제가 우리나라를 말살시키기 위해서 한 일이 우리글을 없애고 문화의 훼손과 저급화를 꾀한 일이었다. 우리의 얼이 깃든 음악과 문화를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 가곡의 위치에 앞서 한국 가곡을 바라보는 우리 정신의 위치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이다.-최근 K팝의 세계적 인기와 트로트 신드롬 속에서 우리 가곡의 위치는 어떠한가.△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세대는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그런 시대의 대중성을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가곡이라도 대중이 함께 그 의미를 호흡할 수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 살아있는 생물이 되어야 명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예술적인 가곡의 대중화를 위한 협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예술가곡과 대중가요의 콜라보는 더러 있었다. 가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의 도입부는 베토벤의 ‘Ich liebe Dich(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차용한 것이며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은 시인 김소월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대중가요 작곡가인 김희갑 씨가 작곡을 하고 성악가인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함께 불러 크게 히트했다. 클래식을 고급으로 보면서 대중가요를 낮춰 보는 인식이 강했던 시대에 엄청난 비판을 받으면서도 앞질러 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정지용의 ‘향수’는 작곡가 채동선이 작곡하기도 했으나 오리지널 가곡이라 할 이 노래는 지금 악보로만 남아있고 별로 불러지지 않는다. 대신 김희갑의 ‘향수’가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피아노를 선택하고 반주를 전공한 이유는.△어머니의 바람이었다. 국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원하시는 대로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결국 솔로 피아니스트보다 시와 가곡에 끌려 반주로 전향했다. 결정적 계기는 친구의 레슨 반주 중 성악 교수님의 일갈이었다. 슈베르트의 ‘겨울여행’ 중 ‘봄의 꿈’에서 사랑을 잃은 청년의 꿈 이야기를 노래할 때다. 청년이 추운 방안에서 잠시 잠들었다가 사랑하던 여인과 5월의 푸른 잔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꿈을 꾼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닭 홰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었다. 이 부분을 반주에서는 빠른 16분 음표가 나오는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쳤던 것이다. 그때 교수님은 “혜경아, 여기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 것처럼 홰치는 리듬의 감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셨다. 그 소리에 머릿속이 확 깨쳐지는 것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시와 음악, 두 마리 토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전문반주자로서 성악, 특히 가곡과 반주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이탈리아나 독일에서는 성악가들에게 그 곡의 내용을 좀 더 알게 하고 풍부하게 하며 곡을 다듬는 일을 반주자와 함께 협업한다. 이것을 우리 음악에서는 음악코치라고 한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어떤 때는 성악가들조차도 반주는 선율을 보강하거나 곡을 강조하려는 무엇인가를 보충하는 보조인식으로, 심하게 표현하면 백 그라운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많다. 반주는 노래나 악기를 지원하는 단계(accompaniment)를 거쳐 공동 작업(collaboration)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가곡뿐만 아니라 음악과 협업하는 음악 코치로서 서로 음악에 대한 의견을 나누어서 무한대의 색깔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반주자와 음악과의 관계다. 반주는 솔리스트의 종속물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면 전문 반주자의 자세는 그냥 연주자와는 달라야 하나.△무엇보다 반주자는 먼저 배려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를 빛나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주자의 역량이 느껴지고 결국에는 반주자로 인해 서로가 빛나게 만드는 것이 전문 반주자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유능한 반주자는 솔리스트를 감싸는 예술가이다. 요즘 들어 내가 생각하는 전문 반주자는, 특히 내 전공인 가곡 반주자는 피아노로 시를 읊을 수 있는 피아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이다.-최근 ‘가곡의 시간’이라는 가곡 해설집을 발간했다.△반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우리 가곡은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고도 연주할 수 있다는 오해를 조금이나 줄이고 싶었다. 무엇보다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다. 또 성악가들도 작사가와 작곡가를 공부하고 노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책을 쓰게 됐다.-슈베르트의 가곡 반주와 한국가곡 반주의 차이는 무엇인가.△‘가곡의 왕’이라는 슈베르트는 스스로 자신은 운명적으로 가곡 작곡가로 태어났다는 자부심으로 가곡을 작곡했다. 그가 작곡한 가곡은 유명 시인의 시나 신화 등을 작곡에 두루 반영했다. 우리 가곡은 그런 시들 외에도 역사적인 아픔과 한의 요소가 깊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 작곡보다는 시인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부분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반주는 당연히 서양 기법의 피아노 테크닉이지만 그 테크닉 중에서도 페달링 기법은 우리 가곡의 반주가 독일 가곡만큼 촘촘하거나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음악을 풍부하게 하고 시를 적확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런 점이 한국가곡의 지상 레슨을 쓰게 한 중요한 이유가 됐다.- CMAK를 결성한 이유와 활동상을 설명해 달라.△협업(Collaborative)에 의미를 둔 Collaborative Musicians Association of Korea, 클래식 음악 앙상블이라 보면 된다. 반주라는 개념이 성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주자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확대하고 연주기회를 더 많이 갖기 위해 2009년 서울에서 결성됐다. 현재 피아노와 성악 관현악 작곡가 60여 명의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 매년 정기연주회를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영산아트홀 등 메이저급 장소에서 개최한다. 회원들의 공부 기회를 주기 위한 작은 연주회는 연간 4∼5회 열고 있으며 대구지부도 연 2회 정기연주회를 통해 회원들의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서울협회가 18회의 정기연주회와 40회의 작은 연주회. 8회의 CMAK 음악인협회 콩쿠르를 개최했고 대구지부도 21회의 정기연주회를 했다.-대구의 음악계 풍토와 대구반주연구회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나.△대구에는 좋은 성악가가 많다. 특히 오페라 쪽이 더 강세가 있다. 또 피아노 단체의 연주들도 활발하며 특히 모던 앙상블이라는 현대음악 단체는 그 존재가 귀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1999년 창단한 대구반주연구회도 23년 동안 해마다 2차례 정기연주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반주자 공부단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우리 가곡을 더 널리 보급하고 젊은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한국적인 것과 전통을 사랑하고 지키며 발전시키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에게 예술가곡이 많이 노출되도록 해야 한다”는 유미경 도서출판 성득 대표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2030세대에게 우리 가곡을 전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일종의 사명감으로 도서출판 유 대표와 협업하고 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CMAK(앙상블 음악인 협회)와 북 콘서트도 여러 차례 연주되었고 현재도 진행중이다. 또 가곡이야기와 연주를 병행하는 실버에서 청소년까지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가곡 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서울 홍난파 가옥에서 이야기가 있는 한국가곡연주회가 3, 5, 9월에 기획되어 있다. 살롱음악처럼 작은 공간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할 수 있는 연주를 모색하고 있다.-개인적인 바람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 달라.△‘지성(至誠)’과 ‘불광불급(不狂不及)’ 그리고 ‘연습은 장엄한 구도의 길이었다’라는 글귀를 신조로 삼고 있다. 지극한 정성과 미쳐야만 하나를 이루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으며, 끝없는 연습만이 위대한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혜경(鄭惠卿)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이사장. 반주전문 피아니스트.1963년 서울생. 선일여고 졸.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졸업독일 뒤셀도르프 슈만국립음대 대학원 졸업(피아노)독일 부퍼탈 국립음대 대학원 졸업(리트 반주)1991년 귀국 후 대구반주 연구회 창립 및 회장(현), (사)CMAK음악인협회(앙상블연주단체) 창단 및 이사장(현).‘음악저널’콩쿠르에 대한민국 최초의 예술가곡 콩쿠르 창설.20042023년 24회의 반주자 정혜경의 반주연주회 개최.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러시아 한국 등의 예술가곡 반주 음반 41매 발매.독일 인도주의재단 ‘동행’초청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연주, 주독일 한국문화원 초청 연주,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아우아리바이 문화원 오픈 초청연주 등 해외연주 및 수백회의 연주.제30회 오늘의 음악가상(2010년), 제15회 대한민국 오페라대상 예술상 부문 공로상(2022년), 이화여자대학교 개교 130주년 ‘올해의 이화인’ 선정(2016년).자연을 사랑하고 순수함을 지향하며 문학과 시를 좋아한다.반주는 노래를 더욱 노래답게 만들어주며 성악가의 보조를 넘어 동행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정통 반주전문 연주자.가곡의 반주는 가사와 작곡가의 의도를 알고 충실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반주자는 성악가와의 학구적인 마찰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우리 가곡을 온 나라에 더 널리 보급하고 다음 세대에까지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2-20

근로자 상병수당, 아프면 쉴수 있는 사회 향한 ‘첫 걸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프거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출근하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 근로자가 질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장기간 일을 쉬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하는 걱정은 생계에 대한 어려움이다. 대다수 직장인은 다달이 나가야 하는 고정비와 생활비 등을 생각하면 쉽게 쉴 수가 없다. 그래서 ‘아파도 참고’ 출근한다.노동자의 ‘아프면 쉴 권리’를 보장해주는 상병제도는 현재 우리나라와 미국(일부 주 제외)을 제외하면 모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운영하고 있다.한국도 뒤늦게 일련의 연구와 자문을 거쳐 ‘한국형 상병수당’의 1단계 시범사업이 6개 기초자치단체에서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됐다. 한국형 상병수당 제도는 이제 시작하는 단계로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만, 아픈 노동자가 소득 걱정 없이 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첫걸음인 만큼 해당 제도의 필요성과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사례 1. 근로자 A씨 “의사 선생님은 당분간 일을 쉬고 치료에 집중하자고 하는데, 생계 걱정에 아픈 걸 참고 일하다 보니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요….”# 사례 2. 택배노동자 B씨 “다리를 다쳐서 어쩔 수 없이 몇 달간 일을 쉬게 되었는데, 모아 놓은 돈도 떨어져 가고 막막하네요….”# 사례 3. 직장인 C씨 “가슴에 멍울을 발견했는데, 혹시라도 큰 병이면 일을 그만두고 소득도 없어질까 봐 두려워요….” □ ‘아프면 쉬기’가 생소한 사회16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근로자라면 누구나 소득 수준과 근로형태와 관계없이 아파서 일할 수 없는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다.전체 취업자의 35%가 1년 내 일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병을 경험했고, 특히 소득수준이 낮고 안정적 일자리가 아닐수록 더 많이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지난 2019년 기준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1천967시간으로 OECD 평균(1천726시간)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이는 OECD 가입국 중 무려 2위에 해당하는 수치다.반면 아파서 휴식을 취한 일수는 한국이 2일로 가장 적었으며 미국 4일, 프랑스 9.2일, 독일 11.7일, 벨기에 12.3일을 기록했다.이들 근로자 중 64%는 아파도 휴식이 어려웠던 경험이 존재했고,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아파도 참고 일하는 분위기’를 지목하고 있었다.□ 아파도 쉬지 못해…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아픈 근로자의 약 30%는 제때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그 이유로는 휴식을 취할 수 없는 직장 분위기(43%)가 가장 많았고, 소득 상실에 대한 우려(18%), 실직·폐업 우려(10.7%) 등의 순이었다.이같은 상황은 질병 중증화로 인한 의료비 상승과 치료기간의 장기화를 유발했다.근로자가 아파도 참고 일을 하게 되면 사업주 또한 노동의 생산성 손실 및 질병악화로 인한 조기 퇴직이 발생하고, 그로 인한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등 악영향이 연쇄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코로나19가 일깨운 ‘아프면 쉴 권리’최근 코로나19 확산을 계기로 근로자의 아프면 쉴 권리 보장 및 감염병 확산 방지 차원에서 상병수당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대두하고 있다.특히 단계적 일상회복의 정착을 위해서는 감염병 증상 발견시 집에서 바로 휴식하면서 타인 접촉 및 감염확산 차단이 필요했다.이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일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질병을 제때 충분한 치료를 통해 치료하는 건강권 확보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이는 근로자들이 아플 때 소득상실 걱정 없이 적시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지원하도록 해 질병의 중증화·만성화 방지 및 추가 의료비용 감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또 아픈 근로자의 무리한 출근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방지하고, 질병 악화로 인한 조기 퇴직사례를 줄여 기업의 비용절감을 유도했다. □ 상병수당이란‘상병수당’은 근로자가 업무 외 질병·부상 발생으로 경제활동이 어려운 경우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전해 주는 사회보장제도를 뜻한다.다만 법정 유급병가 등이 보장되는 공무원·교직원, 자동차 보험 적용자, 해외 출국자 등도 상병수당 지급 대상에서 제외된다. 고용주로부터 유급병가가 보장된 근로자는 해당 유급병가와 중복 수급은 불가하며 유급병가 소진 후 상병수당을 신청할 수 있다.복지부는 지난해 7월 상병수당 1단계 시범사업을 △서울 종로구 △경기 부천시 △충남 천안시 △전남 순천시 △경북 포항시 △경남 창원시 등 6개 지역에서 추진해왔다.6개월간 상병수당 신청 건수는 모두 3천856건으로 집계됐으며, 이중 2천928건이 지급됐다. 평균 지급 일수는 18.4일, 평균 지급금액은 81만5천원이었다.□ 상병수당 도입 추진방향보건복지부는 오는 2025년에 보편적 상병수당 제도 도입을 목표로 ‘3단계 시범사업’과 ‘사회적 논의’ 추진 중이다.2단계 시범사업에서는 소득 하위 50% 취업자에 대한 집중 지원이 이뤄질 전망이다.복지부는 2단계 시범사업 지역은 공모를 통해 선정할 예정이다. 전액 국비 지원이 이뤄지며, 관련예산은 204억3천300만원이다.2단계 상병수당 시범사업 지원 대상의 기본자격은 시범사업 지역에 거주하거나 시범사업 지역 내 사업장에 근무하면서 15세 이상 65세 미만의 대한민국 국적자다.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추진방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세부 운영방안 마련을 위해 ‘상병수당 시범사업 기획단’을 구성 및 운영해 심층적으로 논의할 계획이다”며 “보건복지부와 국민건강보험공단,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각 분야 전문가, 현장관계자 등을 중심으로 대상자의 기준, 신청절차 및 제출서류, 의료인증 방법 등을 확정해 안내하겠다”고 밝혔다. /이시라기자

2023-02-16

김천시, 대한민국 스포츠 중심도시로 날아오르다

김천시는 차별화되고 공격적인 스포츠 마케팅으로 대한민국 스포츠 중심도시로 날아오르고 있다.김천시는 36만㎡의 종합스포츠타운을 조성해 제87회 전국체전, 제36회 전국소년체전, 제27회 전국장애인체전을 역대 가장 모범적이고 성공적으로 치러 낸 저력 있는 스포츠 중심도시다.이러한 스포츠 시설활용과 전국체전을 개최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해 43개의 국제 및 전국단위 대회를 개최하고, 30여개의 전지훈련팀을 유치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지난해에 25만여 명의 선수단과 관람객들이 김천을 찾아 250억원 이상의 지역경제 파급효과를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특히, 2021년과 2022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른 도시는 개최하기를 꺼려하는 대회까지 김천에 유치하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쳐 단 한건의 코로나 확진 없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냈다.김천시가 전략적으로 유치하고 있는 종목은 수영이다. 수영대회는 저비용·고효율 효과를 내는 가장 대표적인 종목으로 매년 많은 수영 선수들이 김천대회에 참가하고 있다.지난해에는 제12회 김천전국수영대회를 비롯해 제18회 꿈나무 전국수영대회, 2022 교보생명컵 꿈나무 수영대회, 수영 국가대표 선발대회, 제94회 동아수영대회 등 대규모 수영대회를 차례로 개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2023년 계묘년에도 김천시만의 차별화된 스포츠마케팅 전략과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를 바탕으로 스포츠 중심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 국가대표 전지훈련장11만평의 김천종합스포츠타운 내에 김천종합운동장, 김천실내체육관, 김천실내수영장 등 14개의 경기장 시설이 집약된 전국 최고의 스포츠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매년 30회 이상의 전지훈련을 유치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는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국가대표 전지훈련을 대거 유치할 계획이다.특히 전국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하는 김천실내수영장은 수영선수라면 누구나 한번 이상은 거쳐 간 곳으로, 대한민국 수영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수영의 모든 종목을 치러낼 수 있는 수영장을 비롯해서 수영·다이빙 지상훈련장까지 보유하고 있어 해마다 많은 선수들이 대회 참가와 전지훈련을 위해 김천을 다녀가고 있다.김천시는 전국 최고 수준의 경기장 시설과 편리한 부대시설을 활용해 전지훈련 최적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2025년 경북도민체전 유치김천시는 2025년 제63회 경북도민체전 유치에 성공했다. 경북도민체전은 23개 시·군에서 시범종목을 포함한 29개 종목에 2만5천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하는 도내 최대의 체육대회다.김천시는 지난 2013년 제51회 경북도민체육대회 개최 이후, 12년 만에 도민체육대회를 유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도민체전 유치 시 경북장애인체전, 경북생활대축전, 경북어르신생활체육대회까지 뒤따라 개최돼, 관내 숙박업소 및 음식점을 비롯한 시 전반에 걸친 경제적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된다.2000년 제38회와 2013년 제51회 경북도민체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김천시는 매년 40~50여개의 국제 및 전국단위의 대회를 개최하면서 풍부한 대회운영 노하우를 통해 도민체전은 물론 전국단위 대규모 대회의 개최 최적지로 평가받고 있다.김충섭 시장은 “2025년 경북도민체전 유치가 스포츠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스포츠인프라 확충과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며 “성공적인 도민체전 개최를 통해 시·군 화합과 경북체육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대회 준비에 철저를 기하겠다”고 밝혔다. □ 김천상무 프로축구단 명문구단으로김천상무 프로축구단(이하 김천상무)은 2022년 김천시민들의 열렬한 응원과 환호 속에 1부 리그에 데뷔했다. 평균 2천여명의 관중들이 홈경기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와 지역경제 활성화 및 시민 화합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리그 중·후반 치열한 순위권 경쟁의 중요한 시기에 주요 선수들이 만기 제대를 하면서 아쉽게도 1부 리그에 잔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2023년 리그는 윤종규(FC서울), 박민규(수원FC), 조영욱(FC서울), 원두재(울산 현대), 김진규(전북 현대), 이상민(FC서울) 등 2022 리그에서 맹활약한 우수한 선수들이 지난달 김천상무에 입단하며 탄탄한 전력을 구축하고 1부 리그 재입성을 정조준하고 있다.김천시 서포터즈와 수사불패(雖死不敗) 서포터즈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응원문화를 개선해 다른 명문구단에 뒤지지 않는 응원전을 펼친다는 계획이다.또한 김천상무는 유소년팀(U-18, U-15, U-12, U-10) 4개팀을 체계적으로 운영해 지역출신 스타플레이어를 육성하고 다양한 팬 서비스를 제공하여 팬 층을 더욱 두텁게 할 계획이다.김천상무 선수는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1년 6개월의 복무기간이 끝나면 제대를 하고 소속 구단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경기력을 유지하고 팀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다.그러나 반대로 1년 6개월 마다 새로운 젊은 선수들이 입단하기 때문에 김천상무는 언제나 젊음과 패기, 뜨거운 열정과 승부욕으로 가득하다. 이들 선수들이 짧은 기간 동안 최고의 기량을 발휘해 팀 승리에 기여하도록 김천시민들이 응원하고 있다.2023년 김천 상무에는 김태완 전 감독(52)이 물러나고 성한수 감독(47)이 지휘봉을 잡는 큰 변화가 있었다. 탁월한 전술 구사로 ‘펩태완’이라는 별명을 보유한 김 전 감독은 트레이너, 코치를 거쳐 20년 넘게 상무에 몸담았다. 빈자리가 클 수밖에 없다.성한수 감독은 전임 감독의 큰 존재감 때문에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음에도 자신감에 차있다. 그는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하게 돼 한편으로 두렵지만, 기대감과 설렘이 앞선다. 하루하루를 즐기고 있다”며 “2023시즌 목표는 K리그2에서 20승 이상을 거두고 승격하는 것 이다”며 결의를 다졌다. □ 한국도로공사 배구단 V리그 구단 선호도 1위김천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배구 여자부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가 지난해 12월 5일 서울시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18회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상(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한국도로공사 배구단은 데이터 분석을 통한 다양한 디지털 마케팅 전환으로 2021-2022 V리그 구단 선호도 1위, 멤버십 만족도 2위를 달성하는 등 프로배구 산업의 활성화와 배구 팬들의 만족도 향상을 위한 성과를 인정받았다.김천/나채복기자 ncb7737@kbmaeil.com

2023-02-15

“은행원의 행복보다 과메기 식당 주인의 행복 택했죠”

어느 지역이건 그 도시를 떠올리면 동시에 연상 작용으로 이어지는 음식 하나쯤은 있다.흑산도는 홍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독특한 발효법으로 숙성시킨 ‘삭힌 홍어’는 이제 호남만이 아닌 전국의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경기도 이천은 좋은 쌀로 기억되는 고장이다. 잘 차려낸 ‘이천 쌀밥’ 한 상은 관광객들의 미소를 불러낸다.포항이라고 흑산도 홍어와 이천 쌀밥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특별한 먹을거리가 없을까. 당연지사 있다. 겨울철에 한국인이 맛보는 과메기의 8할은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 만들어진다.적절하게 건조된 꽁치를 미역과 김, 손질한 파·고추·마늘 등과 함께 먹는 과메기는 큼직한 대게와 함께 포항을 대표하는 겨울 진미(珍味)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이강수산 호미곶과메기 이강훈(50) 대표는 30대 중반부터 50대에 이른 오늘까지 17년의 시간을 과메기와 함께 울고 웃어온 사람이다.“우리 가게를 찾아 내가 준비한 과메기에 술 한잔 마시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손님을 볼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이 대표는 젊은 시절엔 은행에 다녔다.지난주 화요일. 죽도동 호미곶과메기를 찾아 은행원으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강훈 대표와 만났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한다.△1973년 포항 오거리, 바로 이 근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중·고교도 포항에서 다녔다. 호미곶과메기가 있는 동네는 내 유년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다.-은행원에서 과메기 식당 주인으로 직업을 바꾼 계기가 있었나.△2006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17년째 들어섰다. 은행원으로 일할 땐 여유로운 삶을 동경했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는 낮엔 은행에 나가고, 밤에만 과메기를 팔았는데 식당 이름이 알려지고 잘 되니까 둘 모두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른넷에 은행을 나와 본격적으로 가게에 매달렸다.-과메기 판매만이 아닌 건조와 숙성도 직접 하는지.△그렇지는 않고 단골 거래처가 있다. 한 살 아래 후배가 16~17년째 덕장을 운영 중이다. 둘 사이가 친밀하기에 과메기의 건조와 숙성 전 과정을 머리 맞대고 의논했다. 그런 적극적인 소통이 우리 가게 과메기의 품질을 높여온 것 같다. -포항 구룡포에서 만들어지는 과메기가 맛있는 이유는.△바람과 건조 조건이 생선 말리기에 적합해서 그렇다. 게다가 수십 년 동안 과메기를 만들어온 지역의 노하우가 더해지니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어릴 때부터 과메기를 좋아했다. 손님과 더불어 내 입에도 더 맛있는 과메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웃음)이른바 ‘과메기 제철’은 11월과 12월이다. 불어오는 동해의 차가운 바람과 구룡포의 맑은 공기가 건조·숙성된 꽁치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시기인 것. 그 기간에 맞춰 호미곶과메기는 10월 중순 가게를 열어 이듬해 2월 말까지 영업한다.포항 사람들은 1년을 기다려온 탓에 11월 초순부터 과메기를 맛보러 이 대표의 식당을 찾는다. 전국으로 보내지는 택배의 양과 관광객 손님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는 건 12월부터라고 한다.지난 3년, 그러니까 ‘코로나19 사태’가 이어졌을 때는 택배 주문이 많았다. 올해는 어떨까?이 대표에 따르면 “택배량도 줄고, 가게의 손님도 조금 줄었다”고 한다. 어째서 그럴까. “코로나19가 바꾼 생활 패턴이 밤 10시 이후엔 사람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만든 듯하다”는 게 이강훈 대표의 생각이다.-물가 상승이 가파르다. 가게 운영에 어려움은 없는지.△원재료 가격과 할복(割腹·꽁치의 배를 가르는 작업)하는 할머니들의 인건비, 유류비, 전기세, 난방비 등이 모두 올랐다. 가게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었다면 직원을 더 고용해야 했을 테고, 지금의 가격으로 과메기를 판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몇 해 전엔 청어과메기가 인기였는데.△그랬다. 5년 전쯤엔 나도 청어과메기를 팔았다. 하지만, 덕장과 식당을 유지할 정도로 많은 양이 팔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꽁치과메기가 대세다. 비율로 보자면 꽁치가 95라면 청어는 5 정도다. ‘통마리’라고 꽁치를 할복하지 않고 통째 말린 것을 찾는 손님도 있는데, 그건 날씨가 예전처럼 춥지 않고, 건조되기 전에 부패하는 경우가 흔해 판매가 어렵다.-과메기를 만들던 옛날 풍경이 기억나는지.△30~40년 전엔 과메기가 포항 서민들의 겨울 군입거리였다. 어르신들에겐 값싼 안주이기도 했고. 어머니가 죽도시장에서 덜 마른 꽁치나 청어를 사와 짚으로 엮어 부엌에서 건조시키던 모습이 생생하다.-포항에 과메기를 파는 식당은 얼마나 되나.△최소 200개는 넘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는 과메기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문적으로 과메기만을 판매하는 가게도 많이 생겼다. -손님이 오면 “잘라드릴까요? 찢어드릴까요?”라고 묻던데.△가위로 자른 과메기와 손으로 찢은 과메기는 식감이 다르다. 예전에 어머니가 신문지 위에 과메기를 놓고 쭉쭉 찢던 걸 기억하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우리 가게에선 찢어달라는 분들이 훨씬 많다.-맛있는 과메기는 어떤 조건에서 만들어지는가.△‘속도’와 ‘습도’가 중요하다. 꽁치의 배를 가를 때도 그렇고, 건조된 과메기의 껍질을 벗길 때도 빠른 속도로 해야 한다. 숙련된 할머니는 1~2초에 꽁치 한 마리 배를 가르고 내장을 빼낸다. ‘생활의 달인’급이다. 가능하면 손에서 머무는 시간이 짧아야 한다. 거기에 더해 과메기 만들기는 습도 조절이 관건이다. 과하게 습기에 노출되면 과메기에서 비린내가 난다. 그런 이유로 생산과 판매 모든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는 게 속도와 습도다. 노력 없이 그저 얻어지는 성장과 발전은 없다. 과메기 전문식당도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호미곶과메기가 ‘포항 맛집’ 중 하나로 자리 잡기까지 이 대표는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과메기를 찍어 먹기에 최적화된 초장의 완성을 위해 고추장과 식초 한 드럼통쯤을 버렸다.과메기가 구룡포 덕장을 출발해 가게로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도 습도를 맞추기 위해 냉장 트럭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최상의 식감을 지키고자 가능하면 과메기 껍질은 손님이 주문한 후에 벗긴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호미곶과메기는 1년에 5개월만 운영한다. 가게를 여는 10월부터 2월까지는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방문객과 주문량이 많으면 하루에 말린 꽁치 1~2천 마리를 파는 날도 있으니 휴일 또한 없다.그렇다고 나머지 3월부터 9월까지는 편하게 쉬느냐? 그렇지 않다. 그 기간엔 다른 식당의 영업 전략도 배우고, 더 맛있는 과메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스템을 고민하는 게 이강훈 대표의 일상이다.포항 사람들에게 과메기는 일종의 소울 푸드(Soul Food)다. 결혼해서 미국에 사는 딸이 임신을 해 친정인 포항으로 돌아왔다. 입덧이 심해 고생하는 딸이 과메기만은 잘 먹기에 사흘이 멀다 하고 호미곶과메기를 찾았다는 한 어머니를 이 대표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마지막으로 물었다. “은행을 그만둔 걸 후회한 적은 없나?” 잔잔한 웃음 끝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안정적인 직장생활도 매력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가게 과메기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손님들을 보는 게 더 좋다. 앞으로도 행복한 과메기 식당 주인으로 살고 싶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23-02-14

봉화군 “주민 3만명 수성·군민 증가 토대 마련에 올인”

민선 8기 봉화군이 지방소멸 위기 극복을 최우선 군정 과제로 삼고 인구 늘리기에 몰두하고 있다.수도권과 지방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지방소멸이 전국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인구 약 3만 명이 살고 있는 봉화군도 예외는 아니다. 봉화군은 한때 인구 10만이 넘는 농업도시였지만, 저출산·고령화와 꾸준한 인구 유출로 지난해 12월 말 기준 인구 3만 139명까지 감소해 인구 3만 명의 벽이 붕괴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특히 봉화군은 2021년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인구감소지역 전국 89곳에 포함돼 있다. 또 지역 내 인구소멸 위험을 알 수 있는 국토조사보고서의 인구과소지역 지표에서도 약 50%로 전국 시군구 중 가장 높다.군은 이러한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속 가능한 봉화 발전을 위한 봉화군 인구정책 종합 추진계획을 세우고 인구감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봉화군은 단기적으로는 인구 감소추세를 완화해 인구 3만 명을 유지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인구 증가기반 확립을 통한 정주인구 3만 3천 명 회복과 생활인구 30만 명 달성이라는 목표로 앞으로 모든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박현국 봉화군수는 “올해는 우선 인구 3만 명을 지키고, 앞으로 우리 군 인구 늘리기의 토대를 다지는 데 힘쓰겠다”며 “앞으로도 군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군 인구정책을 수정·보완해 나감으로써, 군민과 함께하는 지속 가능한 행복 봉화 만들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 주민 공감대 형성이 먼저군은 그간 부재했던 인구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지난 1월 1일자로 조직개편을 시행해 인구정책 총괄부서인 인구전략과를 신설했다.개별·단발적으로 추진하던 인구정책에서 벗어나 지방소멸대응기금 확보와 인구종합계획 수립 등 인구정책 전반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응해 나간다는 전략이다.군은 지난 1월 인구정책 종합 추진계획을 수립한 이래 인구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군 인구시책 홍보를 통한 범군민적 인구 늘리기 참여 유도에 나섰다.지난 3일 소천면을 시작으로 10개 읍면을 순회하며 봉화군 인구정책 설명회를 열고 있다. 읍면 이장을 대상으로 봉화군 인구 현황에 대한 설명과 주요 정책을 홍보해 지역 주민의 이해를 돕고 인구 늘리기의 범군민적 동참을 이끌어낸다는 계획이다.또 실제 봉화에 거주하는 공무원·유관기관·기업체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봉화사랑 주소갖기’ 운동 캠페인을 진행해 지역에 거주하는 숨은 인구를 찾아 전입을 유도하고 봉화군 인구 3만 지키기 운동에 대해 홍보하며 주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앞으로도 관내 각종 단체와 유기적으로 협력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꾸준히 홍보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찾아가는 전입창구 운영 등 보다 적극적인 인구시책을 펼쳐나갈 방침이다. □ 도시민 유치 인프라 확충 생활인구 확대봉화군은 연 1조 원 규모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을 확보해 도시민의 지역 유치를 위한 지역의 정주여건 개선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지난해 132억 원의 기금을 확보해 분천산타마을 킬링콘텐츠 조성사업, 백두대간 펫빌리지 조성사업 등 현재 8개의 사업을 추진 중이다.앞으로도 일자리 창출, 관광 육성 등 지역의 생활인구 증가를 위한 다양한 시책을 발굴해 앞으로 8년간 약 800억 규모의 인구 시책사업을 추진한다.지난해 공모에 선정된 경북형 작은정원 조성사업과 두 지역 살기 기반조성사업 등 인구 유치 마중물 사업들도 내실 있게 추진할 계획이다.경북형 작은 정원 사업은 도시민을 위한 휴식·여가·농촌체험 복합공간을 조성해 체류 및 생활 인구를 확보하는 ‘체류형 야외정원’ 사업이다. 특히 경북도가 지역 활성화와 인구활력을 도모하기 위해 올해 처음 실시해 주목을 받고 있다.봉화군은 ‘봉화에서 즐기는 웰니스 정원, MushroomLand’라는 테마로 물야면 북지리 일원에 약 2만 5천㎡ 부지에 44억 원을 투입한다. 이곳에 도시민의 수요에 맞춘 15동의 개별체류시설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주말농장, 전 세대가 어울릴 수 있는 휴식공간과 커뮤니티센터, 지역특색을 살린 버섯재배시설 등을 조성할 예정이다.두 지역 살기 기반조성 공모사업은 경북도가 제2생활거점 마련을 희망하는 신중년 도시민을 대상으로 경제적 부담 없는 살아보기 공간 제공을 위해 시행하는 사업이다.봉화군은 사업비 10억 원을 투입해 ‘세컨하우스-너나들이 조성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소천면 분천리에 모듈러 주택 10동 규모의 주거 시설 및 생활 인프라를 조성한다.다지역 거주를 희망하는 도시민을 유치해 생활인구를 확대하고 예비 귀농·귀촌 인구 유치를 위한 정주환경을 개선해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을 예정이다.또 도시미관을 저해하는 빈집을 리모델링해 관내 거주를 희망하는 귀농, 귀촌인에게 임대 또는 매각하는 시책사업을 추진하는 등 도시민 인구 유치 기반을 확충할 계획이다.□ 신규주택 공급을 통한 인구유출 방지최근 5년 동안 인구 순이동 현황을 살펴보면 봉화군은 영주, 안동, 예천 인접 3개 시군으로 순유출이 91.7%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신축 아파트 등 정주여건을 이유로 영주시로의 인구 순유출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이에 봉화군은 인구유출에 따른 인구감소를 막기 위해 주택 공급 확대에 나섰다.현재 봉화읍 삼계리와 물야면 북지리, 춘양면 소로리·도심리 등 4개 지구에 사업비 216억 원을 투입해 125호 물량의 신규 전원주택단지 부지 및 기반시설 조성사업을 시행 중이다.특히 북지리는 작은정원 조성사업과 연계한 도시민 체류형 농촌체험주택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소로지구 전원주택단지는 올해 준공 및 분양을 목표로 추진 중이며, 삼계·도심지구는 실시설계용역을 추진하고 있다.또 봉화군 유휴부지인 봉화읍 내성리 구 워터파크 부지(사업부지 6,325㎡)를 활용해 최대 150세대의 신규 민영공동주택을 유치해 지역의 부족한 주택 공급을 위해서도 노력할 방침이다. □ 전입인구 대상 인구시책 패키지 지원다양한 인구 유입 시책지원도 올해 상반기 중 제도화할 예정이다.올해부터 타 시군구에서 봉화군으로 전입한 주민에게는 30만 원의 전입지원금을 지원한다. 전입 즉시 10만 원, 1년 경과 시 20만 원을 봉화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할 예정이다.이동별 인구증가 실적에 따라 반기별 3개 이동을 선정해 2천만 원의 상사업비를 지급하는 인센티브도 제공한다.아울러 만 19세에서 49세 청년 전입자에게 3년간 360만 원의 주택 임차료를 지원하고, 만 30세 이상 만 49세 이하의 가업승계청년에게 월 100만 원씩 3년간 지급하는 가업승계청년 정착지원제를 도입해 지역 출신 청년의 안정적 정착을 지원한다.출산육아지원금의 경우 지원기준을 완화해 출산 예정자와 5세 미만 유아를 양육하는 세대의 전입을 유도할 계획이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3-02-13

“연말에 집중되는 연탄 나눔… 2∼3월에 한 번 더 와주세요”

올겨울 치솟는 난방비가 화두다. 비용을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난방을 덜 가동하고 단열에 안간힘을 쏟는 분위기다. 당장 내 앞의 사정이 급할수록 주위를 살필 여유가 없는 법이다. 코로나에 이은 불황으로 기업의 후원은 줄고, 유례없는 고물가에 개인 기부 활동마저 위축되는 상황. 더 춥고 더 취약한 곳의 사정은 어떨까. 포항연탄은행 유호범 대표는 이 시기를 ‘연탄 춘궁기’, ‘연탄 보릿고개’라고 말한다. 연말 집중되는 나눔의 온기가 식어가며 연탄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때가 요즘이다. -이 질문부터 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연탄을 때는 곳이 많나.△연탄은행 추산으로 전국 8만 가구(2021년 기준) 이상이다. 포항연탄은행을 운영하기 시작한 2014년. 연탄을 사용하는 세대는 800가구로 조사됐고 그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취약계층 650가구를 지원했다. 연탄 소비는 차츰 감소하고 있어 현재는 400~500가구로 추산된다.-연탄을 나눌 가구는 어떻게 선별하나. 세대가 원하는 만큼 지원이 가능한가.△처음에는 대상자를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가가호호 일일이 찾아다니며 조사하다 터득한 비법이 경로당이었다. 어르신들은 도움이 필요한 집과 여유가 있는 세대를 정리해 주었다.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대상자의 건강 상태와 수입 등을 기준으로 등급을 매겼다. 최하층의 경우 요청이 오는 대로 연탄을 제공한다. 이번 겨울에만 두세 번 지원한 세대도 있다. -포항연탄은행에서 지원하는 수량은 얼마나 되나.△포항연탄은행은 한 해 평균 10만여 장의 연탄을 나눔 한다. 세대당 한 번에 제공하는 연탄은 300장이니 대략 300가구에 지원하는 것으로 계산된다. 중복되는 가구를 제외하면 200가구 정도 된다. 정부의 에너지바우처 지원사업이 있지만 부족한 실정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연탄으로 난방을 하려면 하루 평균 다섯 장을 기준으로 천여 장이 필요하지만 바우처로 구매할 수 있는 연탄은 절반에 불과하다. 복지제도는 좋아졌지만 신고제가 문제다. 방법을 몰라 혜택을 못 받는 고령층도 있다.-연탄을 때는 가구의 생활 정도는 어떤가.△고령층 그 가운데 독거노인이 다수다. 젊은 층은 어려워도 연탄을 안 땐다. 때맞춰 연탄 갈기가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인성 질환에다 막노동이나 농사일로 관절이 망가져 거동이 불편하고 일할 능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연탄 나눔을 시작하던 무렵에는 송도동, 청림동, 용흥동 거주자가 많았다면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최근엔 흥해읍 거주자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연탄 때는 가구가 줄어드는 건 좋은 일 아닌가.△정부는 연탄사용 가구의 보일러 교체를 지원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면서 저소득층의 생활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매년 연탄을 지원받던 세대가 올해는 연락이 없길래 전화를 걸어봤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가스보일러를 들였다며 하는 말이, 집 안이 추워서 생활이 어렵다고 한탄을 하더라. 가스나 기름보일러는 때면 땔수록 돈이 들지만, 연탄은 꺼트릴수록 돈이 든다. 연탄 갈기가 수고스럽지만 다른 에너지에 비해 확실히 저렴하다. 연탄 때는 집에 가보면 훈기가 감돌지만, 가스나 기름 때는 집은 그야말로 썰렁하다. 전기장판에 두터운 이불을 늘상 깔아놓아도 냉골이다. 기름 겸용 보일러가 있어도 연탄을 사용하는 어르신이 많다. 가난한 이들이 겨울을 그나마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연료는 연탄이 유일하다.-기부와 후원이 감소하고 단체 봉사가 불가능했던 코로나 시기는 어떻게 견뎠나.△연탄 나눔은 순수 후원에 의존한다. 매해 15만 장씩 하던 나눔이 코로나 첫해에는 3분의 1로 감소했다. 후원을 약속했던 기업과 단체들이 줄줄이 취소했다. 하는 수없이 긴급으로 필요한 곳에만 연탄을 제공했다. 연탄을 날라줄 봉사자가 없으니 배달료 부담도 문제였다. 코로나 기간 내내 틈날 때마다 마스크와 소독제를 들고 어르신들을 방문했다.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우려와 불안으로 거의 감금되다시피 생활하던 상황이라 눈물까지 흘리시더라. 지금은 폐차된 경차를 끌고 안 다닌 데가 없다. 다행히 지난해 말부터 후원과 봉사가 늘고 있지만 코로나 이전의 활기는 아직이다. -연탄 나눔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예닐곱 살 무렵, 고향인 경기도 양평에서 서울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행상을 다녔고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이삿짐을 수시로 쌌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내면서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연탄은행을 만든 허기복 대표가 청년 시절에 다니던 교회의 전도사였다. IMF가 터지고 원주에서 무료급식을 하다 연탄은행을 설립한 분이다. 허기복 대표의 권유로 김천에서 연탄은행을 시작했고 영주와 포항까지 이어졌다. -난방비 대란이라는 요즘 에너지 취약계층의 상황은.△이곳이 연탄은행이기는 하지만, 가장 취약한 에너지 빈곤층은 기름보일러를 때는 세입자이다. 기름값 부담에 맘 놓고 쓸 수도 없고 거기다 보일러 수리나 교체는 엄두도 못 낸다. 그러므로 연탄은 에너지 취약계층의 상징어로 보면 된다. 기부자가 대상과 방식을 지정하는 것을 ‘지정기탁’이라고 하는데, 연탄은행 후원자의 90%가 연탄을 지정한다. 후원자들에게 난방용 등유로 변경해도 괜찮으냐고 양해를 구하기도 하는 이유다. 난방은 주거 환경이나 건강과 연계된 문제이다. 단순히 연탄 지원에 그치지 않고 수명이 다 된 연탄보일러를 교체하는 시설 개선 사업을 동반한다. 혹한기에는 방한복과 이불을, 혹서기에는 선풍기와 생수 등의 생필품 나눔도 4~5년 전부터 하고 있다. 에너지 취약층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에너지은행 사회적협동조합’을 구성해 나눔 영역을 넓히고 있다.-입춘이 지난 요즘 시기에 나눔이 더 절실하다고.△연탄 나눔은 연말에 집중된다. 소외이웃에 온정을 나누는 연말연시 분위기 덕이다. 보통 한 집에 300장씩 배달하면 한 달 반 정도 사용하니, 2~3월이면 연탄이 바닥나게 된다. ‘이월에 보리 꾸러 갔다가 얼어 죽는다’고 하지 않나. 연탄은 떨어지고 늦추위는 가시질 않아 보릿고개처럼 힘들다고 ‘연탄 춘궁기’라는 말이 있다. 연말에 찾아오는 봉사자들에게 2~3월에 꼭 한 번 더 와달라고 부탁을 드린다.-힘듦과 보람이 공존하는 나눔의 현장에서 기억에 남는 후원자가 있다면.△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전날에 젊은 부부가 찾아왔다. 매일 천원씩 모았다며 36만5천원을 후원했고 이후로도 거의 매년 찾아온다. 처음에는 둘이서 나중에는 아이와 셋이서 말이다. 남을 돕는 나눔은 자신을 충만하게 한다. 자원봉사자들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예상외로 가까이 있음을 깨달았다거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불평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현장이다 보니 간혹 기념촬영에만 집중하는 후원자나 도움을 당연시하는 수혜자도 있는데 정중하게 말씀을 드리는 편이다.-연탄은행을 운영하며 바라는 바가 있다면.△연탄 나눔에도 쏠림 현상이 있다. 시기적으로는 연말에 몰리고 지역적으로도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포항의 경우 기업 후원은 철강공단이 위치한 남구에 집중된다. 골고루 분배되면 더불어 따뜻한 겨울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연탄은행은 제도가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공적 지원은 기초생활수급이니 차상위라느니 조건이 필요하지만 실제 현장에선 사정이 더 딱한 경우가 많다. 시청에서 연탄은행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낡은 조립식 패널 집에 거주하던 출소자였다. 구멍 뚫린 벽 사이로 찬바람이 드나들었지만 연탄난로 하나가 전부였다. 우리가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고 패널을 구입해 직접 덧대주었다.-포항연탄은행이 운영된 지 9년이 됐다. 앞으로의 계획도 궁금하다.△연탄 지원을 경주 지역까지 확대하고 있다. 도움의 손길을 힘닿는 대로 뻗고 싶다. 뜻있는 분들과 얘기하고 있는 부분은 ‘연대’이다. 연탄은행은 에너지, 의료 봉사 단체는 건강, 이런 식으로 다양한 분야가 연대하면 체계적 지원이 가능하다. 또 하나는 나눔의 자력(自力)이다. 지난 2002년 원주에서 시작된 연탄은행은 전국협의회로 운영된다. 포항에서 사용되는 사업비 가운데 포항에서 충당되는 비율은 20~30%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국협의회에서 도움을 받는다. 지역의 에너지 빈곤층을 지역민의 힘으로 도울 수 있는 자력이 생겼으면 한다. 나눔은 불평등을 극복하는 힘이라고 하지 않나.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둔덕이 조금이라도 더 평평해진다면 지금보다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유호범 포항연탄은행 대표는김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연탄은행 운영을 시작했다. 포항은 산업도시라 형편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늘은 더 짙었다. 죽천리 바다 마을에 연탄 나눔을 위한 그루터기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31번째 연탄은행을 포항에 설립했다. 일요일 오후 예배는 연탄 배달 봉사로 대신한다. 정치성과 종교성을 띠지 않아야 한다는 비영리 민간단체의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포항연탄은행을 한동대학교 인근으로 옮겼다. 연탄은행의 상징 무늬에는 쌀알과 연탄이 밥그릇에 담겨있다. 연탄은행의 정식명칭은 ‘밥상공동체 연탄은행’이고 슬로건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에너지 빈곤층을 더 깊고 넓게 돕기 위해 ‘에너지은행 사회적협동조합 포항지부’를 조직하고 인근 도시로 나눔을 확장 중이다./배은정 작가

2023-02-13

응급의료 전달체계 개편과 환자 이송·전원 지침 마련돼야

지난해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으로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국내 굴지의 대형병원인 아산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간호사가 원내에서 개두술을 할 의사가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고 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사망한 사건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줬다.이번 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K-의료의 민낯’.서울에서도 발생하는 의료공백 문제는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더욱 심각하다.이번 일은 특정 병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생명과 직결된 필수 과목에서 충분한 숙련의를 확보하지 못한 우리 의료체계 전반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특히 대형병원 하나 없는 경북지역 주민들은 원정 치료가 일상이다.본지는 지역 간 의료 불균형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 경북 유일의 보건복지부 인증 뇌혈관전문 병원인 에스포항병원의 김문철 대표원장을 만나 필수의료의 붕괴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글 싣는 순서1. 급성뇌졸중치료를 위한 뇌혈관 전문병원의 역할과 전망2.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병원 전 단계 환자이송에 달렸다3. 전문병원 제도의 현실과 문제점4.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지키려면’ 뇌혈관 전문병원 활용이 답이다 △포항에 에스포항병원을 설립을 하게 된 이유는.- 불과 15년 전만 하더라도 환동해권 지역 시·군 100만 명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포항’이란 지방 도시의 의료 인프라는 부족했다. 응급 중증환자들이 응급치료를 받기 위해서 가까운 대학병원이나 큰 병원이 있는 수도권으로 후송되는 과정에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촌각을 다투는 뇌혈관 질환을 이 지역에서 해결하지 못해 후송되는 환자들이 겪는 많은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 빠른 시간에 수술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병원이 지역 내 필요했다. 그래서 2008년 10월 지역 의료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병원을 만들고자 우수한 실력을 갖춘 의료진과 직원 70명과 함께 에스포항병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 전문병원(1기 신경외과 분야, 2~4기 뇌혈관 분야)으로 지정받아 역할을 하고 있다.△에스포항병원의 뇌혈관 질환 관련 전문 인력 구성은 어떤가.- 경북 지역에서 신경외과 전문의가 제일 많은 12명이 근무하고 있다. 신경과 4명, 중재 시술이 가능한 전문의는 9명이 있다. 신경외과, 신경과 전문의가 24시간 당직을 서며 진료를 볼 수 있어 언제든 응급환자가 수술과 처치를 받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춘 병원이다. 최근에는 뇌졸중 전문 간호사 교육을 실시해 간호사들의 전문적인 뇌졸중 치료 역량과 강화를 통해 뇌졸중 환자의 치료와 간호 서비스의 질을 향상하고자 노력도 하고 있다.△보건복지부 전문병원 제도 필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2011년부터 본사업으로 전환된 대형병원의 환자 쏠림을 해소하고 중소병원 경쟁력 강화를 기치로 도입된 전문병원제도는 앞으로도 의료전달체계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방에서 어렵게 전문병원을 위한 의료인력을 유지하며 최적의 의료환경을 마련한 이 뇌혈관전문병원을 운영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제도에서 전문병원이 제외되고 노력에 비해 미흡한 보상체계 등으로 우리 병원과 같은 전문병원들이 많이 만들어지지 못하는 의료환경에는 아쉬움이 있다.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을 계기로 드러난 한국 의료시스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의료 인력, 시설 및 장비 등 인프라를 구축하고 환자 이송 즉시 수술, 입원을 할 수 있도록 의료 시스템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119 이송체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해 또 다시 안타까운 사건이 되풀이될까 걱정이다. 국민들은 제대로 된 곳에서 적절한 시간에 치료받아야 하는데 단순히 병원의 규모에 따라 환자를 이송한다면 과연 그 이송이 환자를 위한 일인가?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곳으로 이송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 않은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문병원제도 활용, 그리고 학회로부터 뇌혈관 수술이 가능한 뇌혈관 관련 인증 병원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한국에서 40대 이상의 실력 있는 뇌혈관 의사는 거의 고갈된 상태’라는 말이 있던데 이 같은 상황을 어떻게 보나.- 신경외과 뇌혈관 질환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지역 뇌혈관 질환 환자의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매일 바쁘게 살아왔다. 그리고 뇌혈관 전문병원인 에스포항병원을 15년째 운영하면서 실력 있는 의료진을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작은 도시 포항까지 데리고 오기에 적잖은 공을 들여서 데리고 왔다. 나는 신경외과 의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33년간 환자를 돌봐 왔지만 이러한 사명감 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어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이 상황을 물려주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깝다. 사명감에 어울리는 보상과 법률적 보호가 실질적인 지원책일 것이다.△의료 수가 인상하면 나아질까.- 낮은 수가로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하고 하면 할수록 적자인 게 현재 뇌혈관질환 분야다. 뇌 수술을 하면 할수록 병원은 손해다. 부족한 의사 인력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병원 눈치 보느라 건강보험 수가를 올려준다고 필수의료 인력 부족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병원이 필수의료분야의 후배 양성을 할 수 있도록 기존의 건강보험 내에서 수가를 조정하는 것이 아닌 다른 외부에서 적극적인 지원과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 에스포항병원 김문철 대표원장이 ‘필수의료의 붕괴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 정부가 필수의료 인력 부족 문제 해결하는 방안으로 의대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던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필수의료 붕괴 위기를 두고 의대정원 확대의 목소리는 현장과 매우 동떨어진 정책이다. 정부가 생각하는 의사 수가 부족하니 의대 정원수를 늘리자는 단순한 논리로는 필수의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의사 수가 증가한다고 현재 부족한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의사가 확충되리란 보장도 없다.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필수의료분야에 근무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어 후배들이 필수의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우선이다.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기피하는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별도 지원책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 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뇌혈관질환은 골든타임 내에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게 중요하다고 들었다. 근데 무려 지난 5년 동안 80만건 이상의 중증 응급 환자 가운데 52%가 전원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데 이같은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규모가 큰 응급의료센터나 권역 심뇌혈관질환 센터 등 응급질환 대응체계 자체는 마련되어 있지만 서로 연계가 미흡하거나 야간시간 의료진 대기 인력이 부족해 응급환자 중 절반 이상의 환자들이 다른 곳으로 전원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응급의료법상 권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기관으로 전달체계가 나누어져 있지만 각 종별로 역할 기능과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증 질환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기관을 포함한 응급의료기관 전달체계 개편과 그에 따른 응급환자 이송 및 전원 지침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정부나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지난 1월 31일 보건복지부가 ‘필수의료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먼저 현재 필수의료 진료기반 유지를 목적으로 공공정책수가제 도입 필수의료인의 보상과 지원 등 10대 주요과제를 발표했다. 하지만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 대책이지만 구체적인 재정 계획 없이 이슈가 된 사건을 면피하기 위한 처방 위주라 많이 아쉽다. 급하게 공청회, 간담회 몇 번으로 만들어낸 정책이 아닌 필수의료 기반 강화를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필요한 분야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보완하면서 추가 대책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해결책일 것이다. 끝/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3-02-09

매혹적인 겨울왕국, 자작나무숲으로 떠나보세요

오지(奧地)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을 말한다. 흔히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을 이를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경북 영양군 수비면 죽파리는 오지라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작나무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온전하게 쉬고 싶다면 죽파리 자작나무 숲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 하얀 자작나무의 황홀한 수피자연 속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다. 영양에서 울진 평해로 이어지는 국도를 타고 가다 면 소재지인 발리리에서 또 한참을 가야 겨우 죽파리에 닿는다. 여기에서 영양 자작나무 숲 입구까지 약 3.2㎞의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원래는 차량이 통행할 수 있지만 산림 보호 차원에서 지난해 여름부터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영양 자작나무 숲은 산책로 초입에서 숲 입구까지 이르는 과정이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작나무 숲이 있는 검마산 자락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지루할 것만 같던 산길은 초입에 들어서면서부터 청정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람쥐와 산토끼, 고라니 같은 야생동물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고, 수령이 족히 100년은 넘을 것 같은 금강송 등 아름드리나무가 곳곳에 널려 있다. 그 옆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걷는 내내 잠시도 지루할 틈이 없을 만큼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청량한 숲길을 한참 걷다 보면 어느 지점부터 휴대폰 전파마저 끊긴다.그렇게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걷다 보면 영양 자작나무 숲이 나타난다. 사실 이곳은 사람이 만든 인공 숲이다. 산림청이 1993년 죽파리 검마산 일대에 나무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높이가 평균 20m에 달하는 자작나무 수만 그루가 30만6천㎡의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국내 자작나무 숲을 대표하는 강원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세 배에 달한다고 하니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다가 인근 검마산 자연휴양림을 찾은 여행객들을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 자작~ 자작~ 하얀 숲의 속삭임 들어봐요자작나무는 줄기의 껍질이 하얗게 벗겨지고 얇아서 고급 명함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자작나무 껍질이 떨어지면 연인들이 사랑의 글귀를 남기고 걸어두기도 하는 낭만적인 나무라고 한다. 자작나무는 실용성도 뛰어나다. 널리 알려진 껌, 치약의 재료인 자일리톨도 자작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것이다. 북유럽에서는 자작나무를 이용한 가구를 최고로 친다. 껍질에 기름기가 많아서 밀초로도 쓰인다.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을 ‘화촉(華燭)을 밝혔다’고 하는데 여기서 쓰이는 화촉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밀초다. 잘 썩지 않아 신라시대 고분에서 자작나무 껍질에 글자를 새겨놓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자작나무의 하얀 껍질과 머리 위를 뒤덮은 초록 잎 사이로 아담한 오솔길이 열렸다. 오솔길은 약 2㎞ 펼쳐지는데 검마산 정상 부근까지 연결된다. 산등성이 위로 스러져가는 햇볕 사이로 빛나는 하얀 자작나무의 모습은 황홀하다. 숲을 걷다 보면 지저귀는 새소리, 부서지는 햇살, 자작나무의 연초록 잎과 하얀 수피가 어우러진 장면이 비현실적인 감동을 준다.너럭바위를 기점으로 길이 시작된 지점으로 돌아가거나 임도를 따라 정상 자락에 있는 자연휴양림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도 아니면 자작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느끼며 숲에서 쉬어가도 좋다. ◇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부신 별수비면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별이 하나둘씩 불을 켜기 시작했다. ‘야외 조명의 빛 공해에서 어두운 밤하늘 환경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만든 미국 비영리단체 국제밤하늘협회(IDA)는 2015년 10월 수비면 반딧불이 생태공원 일대(3.9㎢)를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으로 지정했다.이곳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에서 별이 얼굴로 쏟아진다’는 말이 실감 난다. 외국의 사막에서 본 것 같은 무수한 별이 밤하늘에 펼쳐져 빛도 없는 깊은 산골짝을 은은하게 밝힌다. IDA의 슬로건처럼 ‘불을 끄고, 별을 켜자’라는 말이 딱 맞는 곳이다.별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근처의 영양반딧불이 천문대에 들러보자. 주간에는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야간에는 은하와 달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다. 인공의 빛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곳은 일찌감치 반딧불이 보존구역으로 지정됐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맹그로브숲이나 필리핀 레가스피 등에서 봤던 것처럼 반딧불이의 장관이 펼쳐지지는 않지만 어두운 숲속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녹색의 광채는 잊을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자작나무 명소 2선영양 자작나무 숲 외에도 전국에는 매혹적인 자작나무 숲이 여러 군데 있다. 그중 세상에 잘 알려진 곳은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과 BTS가 애정하는 양평 서후리 자작나무 숲이다.△ 치유와 휴양을 겸한 원대리 자작나무숲햇살을 받은 자작나무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물고기처럼 퍼덕거린다.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에 있는 자작나무숲은 25만㎡에 70여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숲이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솔잎혹파리 피해를 입은 소나무 숲을 벌채한 뒤 1989년부터 8년간 조림한 결과다. 2012년 8월 인제국유림관리소가 자작나무 숲을 산림문화·휴양 공간으로 개방한 뒤 방문객이 꾸준히 늘어났다.자작나무 숲 탐방로는 4개의 탐방 코스로 구성됐다. 1코스(0.9㎞)에선 순백의 자작나무 정취를, ‘치유코스’라 불리는 2코스(1.5㎞)에선 여러 종류의 나무가 어우러진 혼합림과 천연림을 만날 수 있다. 3코스(숲길 1.1㎞·원대임도 2.7㎞)는 작은 계곡을 따라가는 코스이며, 4코스(숲길 2.4㎞·절골임도 2㎞)에선 원대봉 능선을 따라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인제국유림관리소는 봄철 산불 방지를 위해 3월 15일부터 5월 15일까지 입산을 통제하므로 방문을 원한다면 서두르는 것이 좋다.△ 호젓한 명품 자작나무 숲길 서후리숲양평의 옥산(578m)과 말머리봉(500m)에 감싸 안긴 서후리숲은 경기도에서 드물게 자작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사유림 33㏊(약 10만 평)를 숲으로 꾸며 2014년부터 개방했다. BTS가 2019년 달력 사진을 찍으면서 더욱 유명하며 잔디밭, 원형 테이블, 자작나무숲 등 BTS가 화보를 찍은 지점에 사진을 전시해 팬들이 인증 샷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차 한 대 겨우 지나는 좁은 길을 한참 따라간 후에야 서후리숲 입구가 나타난다. 숲 탐방로는 두 개의 코스로 자작나무숲에 가려면 A코스를, 시간이 부족하거나 노약자가 있다면 B코스를 택하는 것이 좋다. 계곡 옆길을 따라가는 A코스는 제법 경사가 있어 1시간 동안 등산하는 맛이 나고, 침엽수림 중심의 B코스는 30여 분간 호젓한 산책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어느 코스든 모든 길이 일방통행이어서 다른 이들과 마주칠 일이 적으니 고요한 숲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다.서후리숲에는 자작나무, 메타세쿼이아, 단풍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권역별로 자란다. 그중 제일은 숲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자작나무숲. 새하얀 수피를 두른 자작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풍광은 감탄의 연속이다. 하얀 나무 기둥을 타고 내려온 햇볕이 싸라기눈처럼 반짝인다. 풍경이 아름다운 곳마다 하얀 벤치를 둬 그림 같은 자연을 즐기게 한 덕에 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목~월요일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화~수요일은 쉰다. /최병일 작가

2023-02-09

옛이야기 다룬 옛날 영화 보며 봄맞이 어때요?

입춘도 지났으니 이제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 분명하다. 시간의 흐름이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법. 유난스러웠던 2023년 혹한(酷寒)도 곧 추억 속으로 사라져 옛날이야기가 된다.나른함과 안온함을 동시에 선물하는 봄 햇살을 받으며 옛날 영화 한 편쯤 골라 보고 싶은 시기. 알다시피 ‘옛날 영화’란 고리타분한 설정과 비슷비슷한 스토리를 반복하는 단순한 영화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극장은 물론 넷플릭스 등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 높은 걸 보면 ‘옛이야기’는 여전히 마르지 않는 예술의 재료로 역할하고 있는 것 같다.아래 ‘그 옛날 조선’을 배경으로 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턱밑까지 다가선 봄을 기다리며 감상해보면 어떨까. 두 명의 광대, 폭군에 맞서는 혁명가로… ‘왕의 남자’혁명을 꿈꾸는 자는 두려움 속에서 살지만 무료하지 않다. 전복시키려는 대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그렇다.20세기 초반 레닌과 트로츠키, 그 이전 19세기를 살았던 무정부의자 오귀스트 블랑키와 미하일 바쿠닌은 바로 이렇게 두려움에 매혹됐던 사람들이다.프랑스 파리 지하철에 폭탄을 던져 수십 명의 승객을 살해한 열여덟 살 아나키스트 에밀 앙리는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가”라는 판사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지상에 죄 없는 부르주아는 없다.”신념이 자신을 단두대로 보냈음에도 죽음의 순간까지 앙리는 모반과 반역이 주는 매력에 매료돼 있었다. 사족은 그만 달고 이제 영화로 가자. 여기 남사당패 줄광대 둘이 있다. 장생(감우성 분)과 공길(이준기 분). 태생적 신분에 의해 정해진 반상의 구분이 엄혹하기 짝이 없던 조선시대. 정치와 경제, 문화적 헤게모니까지 독점했던 양반이 아닌 것은 물론, 농사를 짓거나 물건을 만들거나 이것들을 사고파는 평민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천민. 게다가 둘은 당시로선 ‘하늘의 법도를 거스르는 인간 이하의 것들’로 하대 받던 동성애자다.양반집 잔치에서 탈춤판을 벌이고, 그도 안 되면 예쁘장한 공길의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는 최하층 계급.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 한 술이 급한 이들에게 언감생심 반역은 뭐고, 모반은 또 뭐란 말인가?그들은 분명 앞서 말한 에밀 앙리와는 하등 관계없는 족속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건 무슨 일. 길거리에서 풍자극을 공연하던 이들이 권세 당당한 내시의 눈에 들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무소불위의 연산군 앞에 불려간다.대운이 트여 연산의 총애를 얻게 되는 공길과 장생. 뿐이랴, 공길은 만조백관의 어버이로 불리는 임금의 침소에까지 불려 다닌다. 이런 신분 상승이 어디 있으며, 이처럼 갑작스런 계급 역전을 또 어디에서 봤던가.먹기보다 굶기를 자주 하던 광대들에게 상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진 산해진미는 감읍과 황송을 절로 부른다. 그런데, 누구나 예상했듯 반전이 없을 수 없다.‘왕의 남자’는 “그래서, 그들은 고깃국에 쌀밥 먹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끝을 맺는 아동용 전래동화가 아니라, 감동을 산업화함으로써 존재를 증명 받는 영화이기에.비극은 공길의 아름다움(?)에서 시작된다. 왕이 그에게 계간(鷄姦)의 욕망을 품은 것이다. 남녀의 역할이 엄연하다는 공맹의 도덕을 줄줄 외우고 다니던 정승·판서와 질투로 이름 높은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가 이를 두고 볼 리 만무하다.사태가 일촉즉발 생명이 오가는 형국으로 치닫자 장생과 공길은 궁정광대에서 ‘혁명가’로 존재를 전이시킨다.모든 혁명이 적대적 계급관계에 있는 상대방을 향한 물리적 폭력의 형태로 진행되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공길과 장생은 그럴 만한 힘을 소유하지도 못했다. 하여, 그들이 선택하는 혁명 노선은 왕에 대한 가시 돋친 날선 비판과 자기 학대다. 사람 같지도 않은 천출의 광대무리가 만인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임금을 향해 상소리를 내뱉다니. 의외의 놀라움에 비례해 충격의 진폭 역시 커진다. 이 과정에서 장생은 달구어진 부젓가락에 눈을 잃고, 공길 역시 죽음 직전까지 간다.이윽고 눈앞에 닥친 파국. 장생·공길과는 달리 물리력을 가진 모반 세력이 연산군을 향해 칼을 빼든다. 몰려드는 반군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태연히 줄을 타던 둘은 슬픔과 절망만을 강요한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른다.궁전 상공에서의 스톱모션 라스트 신.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파괴할 수 없었던 광대의 왕 장생과 그의 남자 공길이 꿈꾼 혁명이 실패하던, 아니 온전히 성공하던 순간이었다.‘왕의 남자’가 누구도 예상 못한 관객 동원력을 발휘한 이유는 뭘까? 누구나 가슴 속에 하나씩은 품고 있는 모반과 반역의 칼, 그 서슬 푸른 번득임을 보여줬기 때문 아닐지.맞붙으면 상호 적대적인 두 계급 중 하나의 목은 떨어져야 끝이 나는 모반과 반역, 통칭해 혁명은 눈에 보이는 힘만으로 추동되는 게 아니다. 때론, 보이지 않는 에너지도 혁명의 힘이 된다.그 힘의 발원지는 타의에 의해 사랑의 종말을 맞은 자들의 지독한 자학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장생과 공길은 얼핏 에밀 앙리와 닮기도 했다. 광해군보다 주목받은 최하층 백성 이정재… ‘대립군’조선의 왕위 계승역사는 피와 살점이 튀고 뼈가 부러지는 ‘골육상쟁사’라 불러도 무방하다. 과장이나 의도적 폄훼가 아니다.왕국이 세워진 초기.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는데 걸림돌이 될 이복동생을 도륙했다. 역사에 관심이 크지 않은 이들도 숙부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살해 명령을 내렸다는 것 정도는 안다.왕조국가에서 정승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면, 왕은 자기 위에 아무도 없다. 해서 부끄러울 일도 경계해야 할 일도 원칙적으론 없었다. 다만, 왕조의 건국이념이 된 경전의 가르침을 형식적으로 섬겼을 뿐.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26대 왕 고종과 함께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무능하고 무기력했던 왕’으로 불리는 경우가 흔하다.당쟁을 일삼던 신하들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고, 임진왜란 때는 나라와 백성을 버려두고 중국으로 도망쳤다. 자신의 책임인 국가방위는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 광해군에게 억지로 떠넘기고.정윤철 감독이 연출한 영화 ‘대립군’은 바로 전쟁을 피해 도망친 왕과 허울뿐인 통치권을 억지로 나눠가진 왕자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오만 가지 영화는 다 누렸지만, 책임은 방기했던 왕족들의 한심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앞서 말한 것들은 영화와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는 역사적 사실의 나열이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그렇다면 ‘대립군’의 영화적 완성도는 어느 정도일까?분명 감독은 여진구가 연기한 소년 광해군이 임진왜란이라는 극단의 비극적 상황을 통해 인간적 성장을 이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터. 광해군 역시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이복동생 영창대군은 물론, 친형 임해군까지 죽인 사람이다. 그러나, 국방과 외교 분야에선 능력을 보인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대립군’은 광해의 국방과 외교 관련 소양이 임진왜란의 참상과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걸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이러한 감독의 메시지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영화의 구성과 흐름을 통해 관객의 자연스런 수긍을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대립군’에선 설득의 바탕이 되는 이해와 감동을 끌어낼 코드가 보이지 않는다. 비유로 이야기하자면 ‘엉성한 역사교과서’ 같다.살인과 약탈이 벌어지는 장면이 갑작스럽게 툭 끊겨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못하는 화면으로 뜬금없이 전환되고, 불화를 일으키던 대립군과 양반, 백성과 왕실관료의 갑작스런 화해는 그 계기와 연결고리가 없거나 약하다.영화의 제목인 된 대립군은 궁핍과 신분적 한계 탓에 남의 군역(軍役)을 대신해주고 밥을 벌던 사람들을 뜻한다. 최하층 백성이란 뜻.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나라를 구하고자 스스로 칼과 낫을 들었던 건 왕과 왕자도, 정승과 판서도 아닌 바로 이 최하층 백성들이었다. 나라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못했으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조선의 역사와 비슷하게 영화 ‘대립군’을 구하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대립군으로 분한 배우 이정재, 박원상, 한재영 등의 호연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대는 영화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해냈다.특히, 그저 잘생긴 청춘스타에서 연기력 좋은 배우로 진화 중인 이정재는 거듭 칭찬해도 넘치지 않는다.영화 ‘관상’에서도 수양대군 역할을 맡아 야욕과 동정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 그는 곧 ‘사극에 썩 잘 어울리는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을 듯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2-07

“세금은 알아야 손해 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덕을 본다 ”

세금,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금이었다. 현실에서건 작품에서건 세금을 다루는 세리는 늘 악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납세가 국민의 의무로 규정됐을 만큼 세금은 피할 수 없으니 최대한 아끼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조세 전문가는 가까이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됐다. 40년 세무 행정을 담당했고 지금도 납세자의 세금 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손동근 세무사. 그는 세금을 피할 수 없다면 세무사를 가까이 하는 방법이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들의 세금에 대한 저항이 항상 있는 것 같다.△그건 어쩌면 당연하다. 금전을 지불할 때는 개별적인 보상이 따르기 마련인데 세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세금의 필요성을 인정할 만큼 납세 의식도 많이 개선됐다. 또다른 불만은 과세의 공평성 문제일 듯하다. 1970년대만 해도 모든 것이 수기(手記)였다. 지금은 첨단 컴퓨터와 빅 데이터 등 과학기법을 이용해 전 국민의 자산과 소득, 비용 등을 파악해 전산화하고 있으니 공평과세에 접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불평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속설처럼, 공평과세가 무너지는데서 오는 불평불만이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소득을 줄여 세금을 덜 내려는 시도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본능 아닌가.△대구의 대형 재래시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다. 상인들은 피해액이 엄청나다고 주장했다. 장부를 정확히 기재하지 않아 매출이나 재고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보험회사에서도 사업규모나 손해액 사정을 위해 국세청에 자료를 요구하는데, 신고된 자료가 없거나 소액으로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에는 절세 차원에서 매출액을 축소 신고했다가 막상 재난을 당하면 그때는 부풀려 피해를 하소연하는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주변에는 판매가 6천원인 자장면을 ‘현금가 5천원’이라고 적어 놓은 가게도 있더라.△매출을 줄이기 위해 과표를 누락하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1977년 7월 시작된 부가가치세는 당초 연매출 2천400만원 미만이면 면세했고 지금은 연매출 8천만원까지는 세율을 낮춰 적용해준다. 간이과세자 제도이다. 일반사업자는 공급가액의 10%를 부가세로 납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금 결제를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선을 넘어 노골적으로 현금가를 차등 적용한다고 버젓이 광고하는 것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페널티를 적용받을 수도 있다.-그런데 우리 세법이 너무 어렵고 또 복잡해서 세법 전문가인 세무사조차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는데.△세법이 바뀌는 것은 우리 경제 규모가 커지는 만큼 당연한 것이다. 5·16 혁명 후 박정희 정권에서 이낙선 당시 국세청장은 국세 수입규모 700억원 달성을 목표로 차번호를 700번으로 했다고 하더라. 그러던 우리 경제 규모가 올 세수 목표가 400조원(2022년 세수 396조원)을 넘을 만큼 규모도 커지고 형태도 다양해졌다. 경제현상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현상들을 세법의 테두리에 가둬 반영하기 위해서는 세법을 현실에 맞게 개정해야 했던 것이다. 마치 앞에 도망가는 도둑을 경찰이 뒤쫓아 가는 형국에 비유할 수 있다.-정치적인 문제는 없나.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문재인 정권의 세금 문제가 불거졌다.△세법이 바뀌는 이유 중 하나는 정권의 문제라기보다는 선거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세감면법이라 비난받는 조세특례제한법이 대표적인 예다. 세법은 세목별로 과세 대상, 과세기간과 과세표준이 있고 거기에 맞춘 세율과 납부기한 방법 등 고유 체계가 있는 것이 정상인데 여기엔 그런 것이 없다. 말 그대로 특례다. 각종 직능단체나 이익단체들이 민원성 감면조항 신설을 요구하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수용을 하는 쪽으로 유혹을 받을 것이다. 지역구의 민원을 해결한다는 순기능도 있겠지만 너무 많은 감면 조항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다 보니 세법이 어렵게 된 것 같다. 세법 제목이 그럴듯해도 들여다보면 특정 사안에 대한 특별 예외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례를 모두 뒤져봐야 한다.-구체적으로 어떤 게 있나.△꼭 선거 시기에 입법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가건물 장기 임대 사업자 세액공제, 소형주택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액감면, 장기 임대주택 등에 대한 양도소득세 감면, 미분양 주택의 취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과세 특례 등의 규정은 비슷비슷한 조문들이 거미줄처럼 난해하게 열거되어 있고 00년 세계 00선수권대회에 대한 과세특례, 00박람회용 물품에 대한 소비세 면세규정과 같이 일회성인 경우도 있다.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을 조세 측면에서 지원하는 방안으로 입법이 되었겠지만 들여다보면 포퓰리즘 세법이라 할 이런 특례 규정들이 선거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니 세법이 더 어렵고 복잡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종합부동산세도 국민을 화나게 했다. 소득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금언을 정면 배반하는 미실현소득에 대한 세금은 국민을 열 받게 만들었다.△1세대 1주택, 평생 월급쟁이로 살면서 남은 게 집 하나뿐인데 공시가가 올랐다고 세금을 올려버리니 국민들 속이 터지는 것이다. 세율은 고정됐지만 과표가 해마다 오르면서 20, 30만원 정도 용돈 규모의 재산세가 150, 200만원의 뭉치돈으로 올랐으니 서민들이 풀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부동산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정치권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는데 어쨌든 그건 세무행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부의 조세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개인이 이해관계가 높은 세법 중 양도소득세법이 특히 어렵다고 한다.△인터넷과 온라인 서비스에 익숙한 젊은 세대라면 혼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국세청 홈텍스에서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 사라질 전문직 중에서 세무사가 꼽히기도 한다. 그런 반면 세무전문가인 세무사조차도 양도세는 어려워 아예 ‘양포사’(양도소득세 포기 세무사)라는 자조 섞인 신조어도 나오고 있을 지경이기도 하다.-왜 그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가.△경제현상만큼 다양한 세법 특례 조항들을 시기와 사례에 맞춰 적용해야 하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이다.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데다 소급 적용은 않지만 이 법은 ‘00년 00월 00일부터 적용한다’는 시행 단서를 잘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반적인 1세대 1주택의 양도에 대해서는 양도소득세를 비과세하다가 2003년부터 6억원 초과, 2008년 10월 이후에는 9억원을 초과, 2021년 12월 8일부터는 12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을 고가주택이라 하여 비과세를 배제하고 세액계산특별규정이 생겼다. 또한 2020년 1월에는 2년 이상 보유조건에 2년이상 거주요건이 세액계산 특례요건으로 추가되었다. 1년 4%씩 10년 동안 소유하고 실거주하면 양도차액에서 40%씩 총 80%의 장기보유 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도록 개정되어 2021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수시로 변하는 이런 다양한 조건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세법을 잘못 적용해 상당한 금액의 보상을 해 준 세무사도 있고, 그런 위험에 대비한 세무사 대상 보험 상품도 생겨났다.-양도세 문제가 불거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양도세가 어려운 것은 양도차액의 산정 때문이고 이는 매도가보다 취득가액의 산정이 어렵기 때문이다. 납세자는 세금을 적게 내려는 심리에서 매입 당시 다운계약서를 작성했다가 매도하면서 이를 실거래가나 그 이상으로 부풀려 양도차액을 책정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나. 2006년 이후 매매는 등기부에 기재된 금액을 매입가로 적용하지만 그 이전에 취득한 부동산은 당시의 취득가 산정을 위해 토지등급, 공시지가 등 토지의 여러 형태에 대한 규정에 따라 토지 취득가격을 계산해야 하고 사업용 비사업용 토지 여부를 따져야 하는 등의 문제 때문에 전문가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언제 세무사가 필요한가.△동대구세무서장으로 있을 때 대구 유명 예식장 양도세 사건이 있었다. 당시 건물주는 대구시내 2개 세무서에 210억원 정도 체납됐고 일선 구청에도 4천만원의 지방세가 체납돼 있었다. 그는 예식장 매매로 408억원을 받았지만 은행 대출금과 체납세금을 제하면 한 푼도 손에 쥘 수 없었다. 그가 예식장을 매도할 당시 매입자는 세무사 외에도 변호사와 회계사 법무사 등 7명의 전문가를 대동했지만 그는 아무런 주위 도움 없이 혼자 와서 매매계약 하는 걸 봤다. 그 과정에서 매입자 소유의 다른 지역 처리 곤란한 건물을 매수해 주는 조건으로 예식장을 매입하겠다고 하니 건물 매입대금 20억원을 체납액 충당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세법상 불가능함을 통보했다. 매매대금으로 개인재산을 취득하는 행위는 세금 납부 이후라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줬다. 그가 왜 진작 세무사와 상의해서 세금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의문이다.-개인과 법인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법인이 반드시 유리한가.△회사 설립을 하면서 개인회사로 할 것인지 또는 법인으로 할 것인지는 숙고해야 할 문제다. 사실 개인사업자의 소득세는 최고 45%지만 법인세는 훨씬 낮다. 그래서 작은 회사를 법인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반드시 유리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법인이라면 반드시 공개하고 배당을 분명히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형식만 법인으로 만들고 실지로 개인 소유의 중소기업 경우 소득세 대신 법인세를 내서 재미를 보더라도 잉여금을 처리하면서 배당 소득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는 적자를 보면서도 은행 거래 등을 이유로 분식회계를 했을 경우 이익을 주주에게 배당하면서 많은 세금을 물어야 한다. 사전에 수시 배당하는 등의 절세 방법을 세무사와 의논하는 것이 현명하다.-세무서장을 여러 곳 거쳤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사연은 없나.△대구국세청 개인납세1과장 시절 가짜 양주를 단속한 사건이 있다. 양주 박스를 인쇄해 가는 업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직원들이 추적을 시작했다. 오랜 시간 추적과 잠복 끝에 일당을 검거한 사건이었다. 사건 해결과 동시에 비디오 필름 보도자료를 지역 언론사에 직접 배포했다. 그랬더니 일당 검거에 동원됐던 경찰에서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난다. 그 뒤 경찰에 몇 차례 화해를 요청해도 응하지 않아 결국 서먹하게 관계가 끝났다. 주류 거래는 전용 카드만으로 결제해야 하는데 이를 위반한 업주를 면허를 취소한 사건이 있었다. 상급자가 잘 알고 있었지만 선처해 줄 수 없었고 취소 이후에 지역 목욕탕에서 만나 당황하고 미안했던 적이 있었다. 행위는 법을 위반했지만 면허정지까지 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했지만 인간적으로 두고두고 미안했다.-여가시간에 따로 하는 운동이나 취미생활은 무엇이 있나.△취미로 등산을 했다. 1996년부터 등산을 시작해서 한때는 1년에 40~50회 산행을 할 정도로 산에 미쳐 있었다. 매월 가는 고교 산악회는 회장을 맡기도 하고 산악회 정기등산만도 200여 차례 다녀오기도 했으니 친구들이 산신령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다.□ 손동근(孫東根·68)칠곡 출신. 경대사대부고 졸.1973년 세무서기보로 세무공무원 출발, 이후 대구지방국세청 법인세과 징세과 부동산 조사담당관실 근무, 1996년 사무관 승진 이후 구미서 부가세과장, 북대구 법인세과장, 대구지방국세청 징세과장 개인납세1과장을 거쳤다. 대구지방국세청 세원분석국장과 영덕 수영 동대구 서대구 세무서장 등 역임,홍조근정훈장과 대통령표창 받다.2013년 7월 세무사 개업.평생을 세무공무원으로 지냈으나 얼굴은 이웃집 선한 아저씨다. 부모님 권유로 공무원이 됐고 국세청에 발령난 것이 평생 직업이 됐다. 국세공무원 업무는 성격에도 맞지 않아서 너무 힘들어 모친에게 ‘그만 두겠다’고 여러 번 투정을 부리며 10년을 보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면서 평생을 견뎌냈다. “항상 배우는 마음으로 듣고(學心聽)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자(深思熟考)”라는 자세로 살아왔다. 마음은 맑고 신체는 깨끗하게 늙고 싶다. 노후는 고향에서 부모님의 대를 이어 땅에 기대어 살아가려 한다./이경우 편집위원

2023-02-06

고향사랑기부 줄 잇고… 포항연고 소개에 ‘큰 박수’

‘2023 재경포항인 신년인사회’는 실내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해제된 후 처음으로 열려 한결 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날 자리를 빛내준 각계각층의 포항인들은 서로 안부를 주고 받으며 지역 중점 현안들에 대해 소통하는 등 상생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단합하는 자리가 됐다.○…전당대회 주자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날 3·8 국민의힘 전당대회 출마 주자들도 행사장을 깜짝 방문해 이목이 집중됐다. 최고위원에 출마한 이만희(영천·청도) 의원은 “오늘 행사인 재경 포항인 신년인사회를 방문해보니 포항의 대단한 힘을 느낄 수 있는 자리였다”면서 “3월 8일 전당대회에 최고위원으로 출마했는데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고 피력했다.당 대표에 출마한 김기현 의원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 행사를 찾아 출향인들을 격려했다. 김 의원은 “우리 해오름동맹인 포항이 요즘 어려운 상황이지만,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주역도시임을 부정할 수 없다”라며 “해오름 동맹의 동지로서 더불어 잘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 고향 발전을 위해 많이 돕겠다”고 밝혔다. ○…포항출신 각계 인사들의 덕담 한마디강석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는 “1991년도 포항시의원과 이후 경북도의원, 옆 동네 국회의원으로 3선을 하며 고향을 떠나봤는데 더 넓은 지역을 경험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포항은 인구 52만이 섞여 있는 통합의 도시이다. 이제는 포항이 경북 제1의 도시로 여러분의 힘이 필요하며, 포항의 발전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할아버지가 포항인으로, 일명 포항의 손녀인 이인선 의원은 “포항은 교육과 철강, 모든 게 다 있는 도시이며 ‘사람’이 있는 곳’이라며 그 한 사람으로 포항을 위해 열심히 뒷받침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구룡포읍 하정1리 출신임을 밝히며 큰 호응을 얻은 김미애 의원은 “부산이 지역구지만 포항을 사랑한다”면서 “지난해 구룡포시장이 수해를 입었을 때도 복구에 참여했고 고향사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향사랑기부제에 동참하겠다”라고 밝혔다.조명희 의원은 3대가 포항 해병대 출신이라며 포항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1978년대 해병대 공관으로 처음 시집을 갔다. 그런 인연으로 남편, 아들까지 모두 해병대를 갔다”면서 “포항에 큰 수해가 났을 때도 추석상여금을 수해복구에 보탰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고향분들 만나 반갑고 기뻐, 포항출신이라 든든해요행사장 입구 앞에서는 포항시가 준비한 과메기를 활용해 만든 여러 음식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이날 과메기를 활용한 또띠아와 과메기 젤리, 과메기 꼬치 등 여러 음식이 재경 포항인들의 입을 즐겁게 했다.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선후배들의 반가운 인사소리는 이날 행사장을 가득 채웠다. 한 향우인은 “5년만에 선배님을 여기서 뵈어서 정말 기쁘다”라면서 “코로나때문에 자주 보기 힘들었는데 이런 자리가 마련돼서 참 좋다”고 밝혔다. ○…“포항시 장학금 감사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이날 포항시로부터 장학금을 수여받은 서영택(26·성균관대학교 전자공학과)씨는 “고등학교 시절에는 서울권 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두고 공부했지만, 막상 고향을 떠나 서울에 혼자 갈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당장 서울에서의 주거문제를 해결해준 ’포항학사’부터 오늘 장학금까지 내 고향이 포항이라 든든하고, 포항에 고마운게 많다. 앞으로도 포항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장래에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고향에 보답하고 싶다”며 소감을 밝혔다.○…“포항은 내 친정”공로패를 수여 받은 재경포항향우회 여성국장 김윤선(68·여)씨는 “결혼을 서울에서 한 뒤로 서울에서 쭉 살게 됐지만, 서울에 산 세월과 상관 없이 아직 나는 내가 포항사람이라 생각한다”며 “일년에 3~4번 정도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맞춰 포항에 들린다. 거리가 멀어 몸이 힘들긴 하지만, 아직도 포항이 서울보다 더 편하게 느껴진다”고 전했다.이어서“고향이 좋아서 그저 한 일인데, 이렇게 상을 주시니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서울지역 포항인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재경포항인 신년인사회 빛내주신 분 무순△국회의원 김정재(포항북), 김병욱(포항남·울릉), 이인선(대구 수성구을), 김미애(부산 해운대을), 황보승희(부산 중구), 조명희(비례) △경상북도의회 부의장 박용선, 도의원 한창화 △포항시의회 의장 백인규, 부의장 김일만, 운영위원장 배상신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강석호 △前 국회 부의장 이병석 △前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박창달 △범죄과학연구소장 표창원 △강원대학교 교수 정정화 △홍익대학교 교수 오웅성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이규환 △세명대학교 교수 이상휘 △한성대학교 교수 최천근 △前 문체부 제2차관 김정배 △법무법인 세종 전문위원 김두억 △법무사 안영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조병현 △법무법인 지엘 변호사 진형혜 △법부법인 도울 변호사 최용규 △행정안전부 서기관 권명철 △前 감사원 금만수 △행정안전부 사무관(행정제도과) 김민규 △행정안전부 조직제도혁신추진단장 김민정 △보건복지부 국립재활원 장애예방운전지원과장 김상락 △경북도 경제부지사 이달희 △前 외교부 김진만 △前 국토교통부 국장 김철문 △국방부, 예비역 김형록 △대통령비서실 국민소통관장실 행정관 박대기 △농림축산부 국장(기획조정실) 박상호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 박일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관장 박주옥 △농림축산식품부 한국농수산대학교 박해청 △국회예산정책처 서기관 백경엽 △농림축산식품부 경영인력과 신종갑 △행안부 지방분권정책관 안승대 △nis 유성일 △국가보훈처 차장 윤종진 △前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 이부형 △조해진국회의원실 보좌관 이상이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장영진 △前 서울시 서초구 행정지원국장 조이제 △前 노동부 노동정책실장 조재정 △행정안전부 지방소득소비세제과장 진선주 △경찰청 대변인 진현식 △인사혁신처 상임위원 최관섭 △서울경찰청 은평경찰서 최기용 △국토교통부 노조위원장 최병욱 △한진그룹 전무 최종석 △행정안전부 혁신기획과 허환녕 △행정안전부 국장 황명석 △선거연수원 선거연구부 전임교수 황성원 △국립장기조직혈액 관리원 장기이식관리과 과장 황영원 △포항지역발전협의회 회장 공원식 △포스코건설 상무 김대현 △(주)포스트웨이 대표 김동길 △엑스위젯 대표 김성운 △LG디스플레이 차장 김제문 △우리종합금융 대표이사 김종득 △우리투자증권 김종훈 △(주)선영종합엔지니어링 회장 김천호 △(주)지앤엘에스티 대표 김한용 △인천도시공사 이사회의장 김헌수 △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이사장 김형렬 △(주)삼원제이씨 전무 박철 △코스틸 회장 박재천 △더 행복한 흉부외과 박준호 △서울시티클럽대표 박철근 △SGI 서울보증 여의도대리점 대표 방귀철 △네오피오텍 대표 손덕익 △한국부동산원 원장 손태락 △서울특별시가라테연맹 회장 오상철 △서울데이터시스템 윤구홍 △LG DO CEO 이동언 △상우건설(주)대표 이상우 △성광수도 대표 이상웅 △정림엔비텍 대표 이승용 △해마루부부한의원 이용운 △LIG Nex 1 연구위원 이정모 △우리항공 대표이사 이종태 △(사)한국지방자치연구원장 이창균 △The GIAF 운영위원장 장선헌 △포항수협 돈암동지점장 정경윤 △NH투자증권 부사장 정용석 △(사)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상무 차영태 △로젠택배 대표이사 최정호 △일월미디어 회장 최종태 △(주)스타비스코리아 대표이사 이덕재 △(주)옴니허브 대표(한의사) 허 담 △작곡가(한국가요창작협회장) 김상욱 △개그맨 김용현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 김동하 △TV조선 사회부 기자 송지욱 △연합뉴스 한민족센터 동포다문화부장 이동경 △TV조선 기획취재부 기자 이재중 △매일경제 국회반장 이지용 △뉴시스 부국장 임재현 △조선일보 사회부차장 정녹용 △국회방송 기술감독 정형식 △재경포항향우회 회장 김일권 △前 재경포항향우회 회장 이종칠 △재경포항향우회 고문 최성해, 사무총장 황병수, 사무차장 서용자, 이사 박태구·이상자, 감사 최명자, 감사 이재관, 이사 김윤선, 기획이사 김숙이, 특임차장 김경이, 부회장 유지연, 이사 권영희, 대외국장 박영식, 재무국장 손애경, 성균관 관장 손진우 △재경포항포럼 회장 고병준 △재경연일향우회 박상일, 이영, 정수현, 정영운, 정정수, 최우림 △재경청하중동문회 회장 박상호, 부회장 김상혁, 사무총장 장경복, 재무위원장 김옥미 △재경청하중동문회 박명숙 △재경송라향우회 곽규환, 김환섭, 이경미, 이웅형, 이장우, 임창훈 △재경흥해향우회 사무총장 김석주 △재경흥해향우회, 진태현 △재경구룡포향우회 김광진, 김정득, 김종순, 김태자, 서상천, 심상렬, 이규활, 정선옥, 최윤정, 하인국 △재경장기향우회 김경룡, 김달오, 김병구, 김종극, 김창기, 김춘화, 김현철 , 박병운, 엄기찬, 정영수 △재경호미곶향우회 김계숙, 김귀란, 김금자, 김두수, 김형록, 김화자, 하영희 △재경기계향우회 이상순, 손영규 △재경기북향우회 정숙희 △재경동지산악회 김남규, 김노기, 김순이, 엄은옥, 오재훈, 장경용, 정성광 △재경포항여성회 한선, 김미정, 서두련, 김경희, 최정숙, 유정희, 서기자, 이한복, 배순득, 조경희 △재경동지여고동창회 회장 곽미혜, 부회장 황보희, 사무국장 안미한 △재경동지여고동창회 김옥자, 이경옥 △재경포항여고동창회 회장 이재희 △재경포항여고동창회 김옥진, 임성희, 최옥남 △재경포항고동창회 사무총장 김기영 △재경포항고동창회 권용현, 김세일, 김수민, 김현수 △재경대동고동창회 회장 이연우, 사무처장 정재명 △고려대학교 김나영 △한양대학교 박우진 △성균관대학교 서영택 △연세대학교 양재훈 △국민대학교 윤준영 △덕성여자대학교 이민주 △한양대학교 이예람 △고려대학교 주태호 △고려대학교 하채형 △이화여자대학교 황누리 △포항시장 이강덕 △서울사무소장 서현준화환 보내주신 분△포스코그룹 회장 최정우 △DGB금융그룹 김태오 회장 △DGB대구은행 은행장 황병우 △쿠팡(주)대표이사 강한승 △에코프로 회장 이동채 △조선내화(주) 사장 이상암 △(주)코스틸 회장 박재천 △(주)서울약령시협회 회장 김월진 △수원대락교문화컨텐츠 연구소장 우경진 △농엽중앙회 회장 이성희 △(주)서한 대표이사 정우필 △SBS 미디어넷방송사업본부장 이상수 △화성산업(주) 대표이사 최진엽 △법무법인 율촌 명예회장 우창록 △(주)태왕 대표이사 회장 노기원 △(주)한연총가요창작협회 회장 김상옥 △채널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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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2

무조건 큰 병원 가려다 낭패… 환자 이송 지침 개선돼야

최근 5년간 허혈성 뇌졸중 등을 포함한 3대 중증 응급환자의 절반 이상이 골든타임 내에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병원에 도착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중증외상은 1시간 이내, 심근경색은 2시간 이내, 허혈성 뇌졸중은 3시간 이내가 ‘골든타임’이다.지난 5년 동안 80만7천131건의 3대 중증 응급환자 가운데 무려 52.1%인 42만410건이 적정 시간 내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했다.이 같은 문제의 가장 큰 원인 바로 ‘환자의 전원’ 때문이다. 이처럼 중증 응급환자 중에서 뇌졸중 환자들이 타 병원을 거치며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 싣는 순서1. 급성뇌졸중치료를 위한 뇌혈관 전문병원의 역할과 전망2.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병원 전 단계 환자이송에 달렸다3. 전문병원 제도의 현실과 문제점4.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지키려면’ 뇌혈관 전문병원 활용이 답이다 □무조건 큰 병원 이송? … 119구급대 지침이 골든타임 ‘발목’ 잡아그 이유는 바로 ‘119 중증 응급환자 이송 지침’ 때문이다. 이 지침에는 급성기 뇌졸중 환자들이 골든타임을 놓칠 수밖에 없는 2가지의 문제점을 갖고 있다.먼저 현재 119 중증 응급환자 이송 지침에 따르면 급성기 뇌졸중이 의심될 경우 가까운 ‘지역응급의료센터’ 이상의 의료기관으로 이송하게 돼 있다.중증 응급의료환자 중심 진료를 맡는 더 상위기관인 권역응급의료센터로 뇌졸중 환자를 이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의료기관 사정으로 인해 환자를 치료하지 못해 지역의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앞서 살펴본 약 80만건 중 허혈성 뇌졸중 환자 골든타임을 놓쳐 다른 병원에 이송되는 비율은 49.2%나 됐다.두 번째 문제점을 가진 지침은 ‘병원 이송 전 뇌졸중 선별검사가 양성인 경우 즉각적인 혈전용해 치료가 가능한 지역응급의료기관 이상의 의료기관으로 이송’하게 돼 있다.의료기술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 현재 뇌경색 치료는 ‘혈관조영실에서 막힌 혈관을 얼마나 잘 개통하는가’ 그리고 ‘뇌혈관 수술이 가능한 병원인가’가 치료의 핵심이다.이들 지침이 지방에 사는 환자들이 골든타임을 놓치고 전원 되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서울과 경기권의 경우는 병실이나 중환자실 부족 등 ‘시설 부족’으로 인해 타 병원으로 이송되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하지만 지방의 경우는 응급수술 및 처치 불가로 전원 된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이는 도·농간 의료서비스 불균형이 심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다.이렇듯 단순히 규모가 큰 병원으로 이송하라는 지침이 아닌 빠른 시간에 치료할 수 있을 수 있도록 촌각을 다투는 뇌혈관 질환과 관련해서는 뇌혈관 전문병원을 포함한 지역응급의료센터 이상으로 이송되도록 바뀌어야 한다.즉각적인 혈전용해 치료가 가능한 지역응급의료기관 이상의 의료기관으로 이송이 아닌 뇌혈관 수술이 가능한 ‘뇌혈관관련 인증병원’으로 이송되도록 관련 지침을 개선해야 한다. □문제 개선 방법먼저 현장에서 119구급대원이 뇌졸중·심근경색을 감별 진단해 적합한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돕는 관제 시스템을 둬야 한다.다만 이보다 앞서 119구급대원의 훈련과 원격 자문 체계가 마련돼야 하고 구급차에서 심전도검사가 가능하게 하는 등의 선제 조치가 필요하다.적절한 지원이 있다면 전국 권역심뇌혈관센터가 해당 역할을 할 수 있다.또 다른 방법은 최소한 급성 심뇌혈관 질환에 대해서는 병원 간 이송에 119구급대가 관여하는 것이다. 관련 법령과 시행령을 보완하면 가능하다. □전문병원 제도의 현실뇌혈관전문병원을 비롯한 전문병원이 역할을 다하고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정책 차원에서 지원이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전국 110개 전문병원 중 서울, 경기권, 광역시를 제외한 나머지 지방 지역에는 9개만이 분포하고 있다.지방지역의 전문병원 추가적인 신설이 필요한 상황이다.하지만 의료질평가 지원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상황에서 규제는 많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질 않는 상황이라 점점 병원들의 전문병원 참여가 감소하는 추세다.이와 관련 일선 병원 관계자들은 “종합병원급 전문병원 15개가 겪는 의료질평가 평가제도의 불합리한 기준 및 지원금 정책의 개선 때문”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즉 환자의 실질적 선택권 결여, 선택 진료의 축소, 과중한 선택진료비 부담, 의료의 질 수준과 관련성 미흡으로 인해 도입한 평가제도가 전문병원이 갖고 있는 질환의 특성을 고려한 질환별에 맞는 적절한 지표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 정책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의료 질 평가 기준 주요내용 중 환자안전 영역(신생아중환자실 여부), 공공성 영역(분만실 운영, 소아중증질환 환자 수), 교육수련 영역 등 평가 분야에서 가중치를 두고 그 병원이 해당되지 못하면 점수를 받지 못한다.전문병원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질환에 특성에 맞게 전문화가 돼 있는 중소병원들인데 정작 기준은 규모가 큰 대형병원들과 같은 평가기준 항목으로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규모에 맞게 의료기관 내의 진료과 및 진료시설의 부재에 따른 제외기준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그로 인해 전문병원으로 지정받은 종합병원들은 전문병원이자 종합병원으로 산정되는 수가가 종합병원만 해당하는 수가보다 현저히 낮게 산정되는 역차별 문제를 겪고 있다. □전문병원 제도가 겪는 역차별 문제전문병원으로 운영되는 병원은 질환에 특성에 맞게 전문화가 되어 있는 중소병원들인데 정작 기준은 규모가 큰 대형병원들과 같은 평가기준 항목으로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질환의 특성에 맞게 운영되고 있어 평가요소 중 진료과 및 진료시설의 부재에 따른 제외기준이 마련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그 결과 전문병원으로 지정받은 종합병원들은 전문병원이자 종합병원으로 산정되는 수가가 종합병원만 해당하는 수가보다 현저히 낮게 산정되는 역차별 문제를 겪고 있다.그럼에도 낮은 수가를 받으며 전문병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전문병원이 갖는 의료전달체계를 통해 의료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이다.□뇌혈관전문병원은 선택이 아닌 ‘필수’지난해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을 계기로 지역을 위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병원의 노력보다는 지역의 뇌혈관 환자를 위해 이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정책 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할 시기다.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가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들이 시행돼 위험을 줄이고 더 안정적인 사회 뇌졸중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 되어야 한다.최근 필수의료 강화 필요성에 대다수가 공감하고 함께 대책을 마련해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려고 하고 있다.다만 해당 문제는 단기간에 살펴보고 끝낼 것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정책 방향으로 나아가야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의 탄탄한 의료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이시라기자sira115@kbmaeil.com

2023-02-02

연서(戀書)를 띄우는 마음으로 출간한 ‘포항 5부작’

몇몇 사람들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고향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한다.현대도시는 태어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인간의 유소년 시절 ‘기억’과 ‘그리움’은 대부분 고향과 연관돼 있다. 이는 동서와 고금이 다르지 않을 터.지지난해 시작해 최근까지 포항과 관련된 책 5권의 기획·출간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내 고향 포항’에 대한 애정을 무시로 드러내는 김도형(55)씨다.경희대 국문과에서 공부했고, 출판 편집자 이력이 있는 그는 재작년 하반기부터 ‘포항문화의 상징과 공간’ ‘포항의 해양문화’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1권과 2권, ‘포항-빛, 물, 철이 빚어낸 천일야화의 땅’이 출간되는 과정을 주도했다.‘포항 5부작’으로 불러도 재론의 여지없는 이 책들은 김도형 씨의 고향 사랑이 지역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기록 욕구로 진화한 사례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좋은 책을 만들어냄으로써 포항을 향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그는 “출간은 여러 사람과 공동으로 작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사진, 그림과 함께 포항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시간을 쪼개 자신의 고향이 지닌 진면목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으니, 그는 이제 ‘지역학 연구자’로 중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지난 토요일 오후. 짙푸른 포항의 겨울 바다가 배경으로 출렁이는 조그만 카페에서 김도형 씨를 만났다. 아래 그날 오간 대화를 요약해 옮긴다. -포항에서 보낸 유년은 어땠나.△중앙초등학교(지금의 북구청사)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초등학생 시절 남빈동 가구상 거리에 살았던 기억은 점점이 남아 있다. 집 근처에 제일교회가 있었고, 길 건너편에 죽도시장이 있었다. 붉은 벽돌에 푸른 담쟁이가 드리워진 고색창연한 예배당과 시끌벅적한 장터는 너무나 대조적인 분위기였다. 이를테면 나는 성(聖)과 속(俗)의 한가운데서 유년을 보냈던 셈이다. 당시 수레를 끌고 가던 말들의 모습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포항역에서 짐을 실은 마차가 동빈내항 쪽으로 이동했는데, “따가닥 따가닥” 하는 말발굽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포항 사람들만의 기질이 있다면.△학생이고 어른이고 간에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분명한 것 같다.-고향을 떠나 있을 때 가장 그리웠던 풍경은.△어릴 때부터 동빈내항과 영일만을 보고 살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 바다를 못 보니 갑갑했다. 그 때문에 잠시 향수병을 겪었던 것 같다. 청년 시절 고속버스를 타고 해도동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면 환여동 집까지 걸어갔다. 해도동에서 죽도시장, 동빈내항, 영일대해수욕장을 거쳐 환여동까지. 아마 본능적으로 그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기억 속에 남은 학창시절 스승은 누구인가.△소설가 조해일 선생이 대학 은사다. 석사 과정 때 연구실에서 선생의 삶과 문학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학부 시절은 어수선했고, 석사 시절은 선생의 말씀을 듣는 게 공부의 거의 전부였다. 내게 기대를 하셨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스럽다.-포항으로 돌아온 건 언제이고, 귀향의 이유는.△1999년 예담출판사 편집장을 맡았다. 그해 5월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출간했는데 반응이 좋았다. 같은 해 여름 포항에 일자리가 생겨 귀향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생겨 미련 없이 고향으로 왔다. 2000년엔 포항에 있으면서 ‘이중섭, 그대에게 가는 길’의 출간 작업을 했다. 다행히 그 책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소년 시절 본 포항과 지금의 포항은 뭐가 변했고, 어떤 게 여전한지.△큰 변화라면 원도심은 쇠락했고, 부도심은 급격하게 팽창한 것이다. 원도심의 쇠락은 한국 도시의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안타깝다. 오랜만에 고향에 온 친구들로부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 정도로 도시 모습이 급변했다. 영일만 풍경도 많이 바뀌었지만 바다 그 자체는 변함이 없다. 바다가 그대로 있어줘 너무 고맙다. -얼마 전 ‘포항-빛, 물, 철이 빚어낸 천일야화의 땅’을 출간했는데.△아름다운 자연과 흥미로운 역사를 배경으로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이 포항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이 쉽고 편안하게 포항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책을 고민했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내가 포항을 공부하며 쓴 노트이자, 포항에 보내는 연애편지다.-출간 과정을 간략히 요약한다면.△취재와 집필에 일 년 이상 걸렸다. 이런 작업은 좋은 자료를 얼마나 섭렵하는가에 성패가 달렸다.다행히 근래 포항과 관련된 좋은 자료들이 꽤 나왔다. 포항지역학연구회에서 포항지역학총서를 열 권 만들었고, 김진홍 선생이 1935년 발간된 ‘포항지(浦項誌)’에 주해(註解)를 붙인 ‘일제의 특별한 식민지 포항’을 냈다. 이런 책들이 집필 과정에 도움이 됐다.내가 쓴 책엔 144장의 사진이 실렸다. 한마디 불평 없이 까다로운 촬영 부탁을 들어준 사진작가 김훈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진작가 김진호도 귀한 자료사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독자와 지인들의 반응은.△“포항 역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정리하고 알리는 작업이 필요한데 좋은 방안이 없겠냐”는 질문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선후배들은 “선물하기 좋은 책”이라는 말로 격려했다. 솔직히 이 책은 포항 시민들에게 선물한다는 마음으로 구상했다.-포항을 찾는 여행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호미곶에 있는 구만리 보리밭이다. 해 질 녘 보리밭 사잇길을 걸으며 영일만 너머 비학산 일몰을 바라본 후, 밤바다에 맑고 투명한 빛을 뿌리는 등대를 찾아보길 권한다. 더불어 1948년에 서울 생활을 접고 포항으로 온 한흑구 선생의 삶과 문학을 살펴봤으면 한다. 한 선생은 맑고 깊은 영성의 담지자다. 생전에 수필집 ‘동해산문’과 ‘인생산문’을 냈는데, 곧 이 책이 복간된다. 어쩌다 보니 내가 편집을 맡았다. 깊이 있는 철학적 수필집이니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한다.-단답형 질문이다. 당신에게 포항이란.△어머니 같고 아버지 같은, 천일야화의 땅이다. -향후 다루고 싶은 포항 관련 주제는.△포항은 204km의 해안선을 접하고 있는 해양도시다. 그런 까닭에 바다와 얽혀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 때문에 ‘포항의 해양문화’를 냈다. 앞으로도 해양 관련 이야기를 발굴해 정리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선 뜻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2023년 계획은.△3월까지 한흑구 선생의 수필집 편집을 마무리하고,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3’도 내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다.-마지막으로 덧붙일 말은.△한흑구 선생은 “포항은 한국 속의 뉴욕 같았다”고 말했다. 일본, 만주 등 각처에서 모인 사람들이 살았기에 섞여 살기가 힘들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런 개방성에 매력을 느껴 1979년 작고할 때까지 포항에서 살지 않았나 싶다. 바다와 개방성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것이다. 포항이 가진 매력을 잘 살려 나가면 더 멋있는 도시가 되지 않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제공=김훈

2023-01-31

찾고 싶은, 살고 싶은 ‘동구’ 만든다

대구 동구가 목재친화도시로 탈바꿈된다. 동구는 최근 불로고분마을 목재친화도시 조성사업 세부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불로고분마을이 지난달 20일 산림청이 추진하는 ‘2023년 목재친화도시 조성사업 공모’에 최종 선정돼 국비 25억원을 포함 총 50억원의 예산을 확보하게 됐다. 이에 동구는 목재를 통한 주민 삶의 질 향상과 지역경제 활력 증진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사업명은 ‘목향만리(木香萬里) 불로고분마을’이며, 숲과 숨쉬며 나무와 공존하는 걷고 싶은 마을 만들기라는 비전 아래 △목재특화거리조성 △건축물내 목재이용 △목공체험센터조성 △목재교육프로그램 등 4가지 정책방향에 맞춰 9개 사업을 실시한다. △목재특화거리 조성목재특화거리 조성은 주민 보행안전 확보와 가로경관개선을 위한 사업으로 ‘팔공로, 고분로 목재특화거리 조성’과 ‘불로천로, 고분가는길에 보행친화 Wood Road 조성’ 등 총 2개의 사업이 진행된다. 우선, 대구국제공항에서 팔공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팔공로와 불로고분군으로 진입하는 고분로에 목재데크, 목재가로등, 버스쉘터 등을 설치해 대구 동구 대표 ‘목재특화거리’로 조성한다. 둘째, 불로천로의 경우 제방상부공간에 인도를 확보해 목재데크, 목재벤치를 설치하고, 불로고분군 주변을 잇는 고분 가는 길에 목재데크와 파고라를 설치해 걷고 싶은 거리 명소로 육성한다.△건축물 내 목재 이용목재친화도시답게 마을 발전 원동력 확보 및 마을 활력 증진을 위해 조성되는 시설에 목재를 활용한다. 세부적으로 ‘창업인큐베이팅시설 불로전수소 조성’과 ‘목조주택수리거점 불봉이네수리소 조성’ 등 2개 사업이 진행된다. 불로전수소는 지역대표기업인 대구탁주합동과 협업해 막걸리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창업자들을 위한 인큐베이팅 시설로 ‘불로전수소1’은 젊은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모던한 감각의 신축 목조건축물로 조성하고, ‘불로전수소2’는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을 통해 목질화할 계획이다. 불봉이네수리소는 불로동일대 노후목조주택 수리하는 거점공간이다. 앞으로 집수리 관련 정비와 교육 등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곳을 목조건축물로 조성해 목재에 대한 이해를 높일 계획이다. 불로전수소와 불봉이네수리소는 불로동 도시재생뉴딜사업의 하나로 목재친화도시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된다. △목공체험센터조성목공체험센터 조성은 목재를 통한 마을 명소화 및 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이 목표이며, ‘목재문화 커뮤니티센터 불로애(愛) 조성’, ‘목재활용 창업플랫폼 히트 조성’, ‘어린이목재문화 놀이터 나무야 놀자 조성’등 3개 사업이 있다. 향후 목재문화의 확산거점으로 활용하게 될 ‘불로愛’는 지상3층으로, 시민들이 쉽고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목재체험 교육실, 목공예품 제작판매장, 공유카페 등이 들어선다. 목재교육프로그램의 주요공간이자 마을창업플랫폼 ‘히트’는 청년들의 창업교육을 전담하게 될 교육기관이자 창업자 자녀에 대한 돌봄시설 등을 포함한 창업 플랫폼으로 지상4층 건물 내외부를 목질화해 조성한다. 나무야놀자는 동구 대표 관광지인 불로동고분군과 인접한 곳에 어린이 대상 친환경 목재체험놀이터로 트리하우스 등 10종이상의 천연목재 놀이시설을 조성할 계획이다.△목재교육프로그램과 목향만리추진단목재가치에 대한 인식제고 및 목재문화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세부적으로 ‘목관악기제작교실 나무소리’, ‘불로목조건축교실’, ‘목공예DIY교실 뚝딱’ 등이며 시설조성 시기에 맞춰 오는 2025년부터 운영될 예정이다. 목관악기제작교실 ‘나무소리’는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대구에 걸맞게 다양한 목관악기 전문제작과정을 수료하고 창작목관악기를 생산하는 등 목재를 활용한 예술활동을 연계할 방침이다. 또 불로목조건축교실은 명실상부 목재친화도시로서 목조건축교육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기 위해 목재재료의 이해, 목조주택 기본/실무교육, 현장실습과정 등 목조건축의 전문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다. 목공예DIY교실 ‘뚝딱’은 누구나 쉽게 제작이 가능한 DIY제품을 중심으로 목공예교실을 운영해 목재에 대한 관심을 유도할 계획이며, 사업추진을 위한 협력체계마련과 전문인력 확보 및 활용을 위해 ‘목향만리추진단’을 운영해 속도감 있는 사업추진과 사업성을 극대화 할 방침이다. “목재친화도시·도시재생뉴딜사업 연계 불로동 탈바꿈”“목재친화도시 사업과 도시재생뉴딜사업을 연계해 불로동을 탈바꿈 하겠습니다.”민선8기 첫 국가공모사업 선정에 대해 윤석준 동구청장은 “동구청 공직자들과 주민들이 함께 이룬 쾌거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윤 청장은 사업 시행에 있어서 주민 참여를 강조했다. 윤 청장은 “선정 과정에서 주민들의 협조가 컸다”며 “사업 시행에 있어서도 주민들과 늘 소통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나가겠다”고 했다.그는 ‘불봉이네수리소’를 언급하기도 했다. 윤 청장은 “불봉이네수리소는 도시재생뉴딜사업이 진행되기 전부터 진행된 불로동의 대표 봉사활동으로 도시재생뉴딜사업과 이번 목재친화도시 선정에 큰 역할을 했다”면서 “목재친화도시 사업에도 불봉이네 수리단이 노후목조주택을 수리하게 됐으며, 이처럼 주민이 참여하는 사업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구상을 설명했다.이번 목재친화도시 선정으로 지난 도시재생뉴딜사업에 이어 불로동 일원에 2026년까지 총 351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게 됐다. 윤석준 대구 동구청장 이와 관련 윤 청장은 “도시재생뉴딜사업과의 연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실제로 사업 계획서에도 도시재생뉴딜사업과 관계된 사업들이 많은 만큼 사업의 성패가 달린 만큼 충분히 살펴보고 진행하겠다”고 전했다.2021년 도시재생뉴딜사업에 이어 불로동이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윤 청장은 “그동안 불로동 일대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인접한 군 공항 등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지만, 2개의 큰 사업을 통해 불로동 일대가 꾸준히 그리고 크게 바뀔 것이다”고 확신했다.아울러 목재친화도시로 대구를 대표하는 휴양지로 육성하겠다는 뜻도 밝혔다.윤석준 동구청장은 “동구에는 팔공산을 비롯해 천연기념물 1호 도동측백나무 숲 등이 있고, 불로동에는 국가사적 262호 불로동고분군도 있다”면서 “목재도시로 거듭날 최적의 여건을 갖춘만큼 앞으로 대구 동구를 자연 휴양에 대표 도시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그는 “불로동의 오랜 역사의 가치는 존중하고, 동시에 지역 맞춤 전략을 통해 주민 삶이 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3-01-31

“미래 먹거리사업 발굴·추진…지역발전 새 전기 마련”

‘곳간 채우고, 경제 살리고, 군민 늘리고’를 군정 목표로 내건 김재욱 칠곡군수는 오직 군민만 바라보며 본격적으로 민선 8기의 돛을 올려 새로운 칠곡을 향해 항해에 나선다.2023년은 민선 8기 출범 이후 준비해 온 계획들을 본격 추진하는 중요한 해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과 새로운 일자리 창출 등 지역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는 각오다.김재욱 군수는 “지난 6개월 동안 군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실천하고 칠곡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며 “어려운 여건 속에도 애정어린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군민 여러분과 맡은 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해 주신 공직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김 군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과 주요 정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변화하는 행정수요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조직개편을 단행했다.특히, 군부대 유치, 기업투자, 각종 공모사업 등을 통한 칠곡의 미래 먹거리사업 발굴과 추진에 중점을 뒀다. □ 대구 지역 군부대 유치김재욱 칠곡군수는 선거운동 때부터 대구에 있는 군부대를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7개 군부대를 대구 밖으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밝히자 가장 먼저 홍 시장을 만나 군부대 유치의사를 전달했다.칠곡군은 대구 중구와 남구 북구 수성구 등 도심 내 646만㎡ 부지에 주둔한 육군 제2작전사령부와 50사단, 공군방공포병학교 등 국군 부대 4곳과 주한미군 부대인 캠프 워커 등 3곳을 모두 유치하겠다고 밝혔다.군부대 통합 이전을 통해 대규모 ‘밀리터리 타운’을 조성하는 구상을 갖고 있다. 군부대를 유치하게 되면 주거시설과 문화 체육 복지 같은 인프라까지 따라올 것으로, 앵커 기업을 유치한 것과 비슷한 경제 효과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칠곡군은 대구 중심지에서 가장 가깝고 대구권 광역전철망도 들어서 교통편의에 있어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였던 ‘호국 도시’인 점과 사통팔달의 교통망, 미군부대(캠프캐럴) 주둔 등 군부대 유치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후보지로 제시된 석적읍 망정·도개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낸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고, 주변에 호국평화기념관·평화전망대 등 호국 관련 인프라와 낙동강세계평화문화대축전 등의 소프트웨어까지 잘 갖추고 있다.칠곡군은 이런 지역적 특색을 살려 2023년 군정 최대 목표를 대구 지역 군부대 유치로 선정하고, 군부대유치 TF팀을 구성해 대구 군부대 유치에 전방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군부대 유치 위원회 발대식도 가졌다.김 군수는 “군부대 유치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을 수 있는 핵심사업으로 인구 증가는 물론 소비 수요 증가와 경제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다” 며 “취임 이후 대구 군부대 유치를 위해 홍준표 시장을 만나 칠곡 이전을 요청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했다”고 말했다.□ 한티가는 길을 통해 ‘평화의 도시’ 강조6·25 전쟁 당시 다부동 전투로 인해 칠곡군은 과거 지향적인 ‘호국의 도시’이미지가 형성됐다. 천주교인이 평화를 갈망하며 걸었던 한티가는 길을 통해 칠곡군이 미래지향적인 ‘평화의 도시’로도 알릴 계획이다.한티가는길은 칠곡군 왜관읍 가실성당에서 동명면 순교 성지까지 45.6㎞ 이어지는 구간으로 조선말 박해를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천주교인이 오고 갔던 길을 순례길로 조성한 것이다.‘그대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돌아보는 길(1구간) △비우는 길(2구간) △뉘우치는 길(3구간) △용서의 길(4구간) △사랑의 길(5구간) 등 다섯 구간으로 조성됐다.김재욱 군수는 한티가는길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만들고자 한다. 천주교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와 한티가는길 활성화를 논의하고, MOU를 체결했다.순례길과 안내판을 정비하는 것은 물론 구간별로 쉼터를 마련하고 동명성당과 지천면 창평리에 숙박 시설을 조성키로 했다.전국의 천주교인이 한티 성지를 찾는다면 자연스럽게 일반 관광객의 방문도 이어질 것이다. 칠곡군에서 가톨릭 관련 문화행사와 축제는 물론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전국 규모의 미사 개최도 검토하고 있다.□ 기업 유치로 지역경제 살리기김 군수는 최우선 과제로 지역경제 살리기를 꼽는다. 경제회복을 위해서는 튼튼한 일자리부터 필요하고, 제대로 된 사람도 필요하고, 인구도 모아야 한다는 논리이다.김 군수는 “실제 기업 대표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람만 있으면 지금 수출의 두 배는 하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며 “이는 지금 사람들이 전부 수도권으로 떠나니 일할 사람 구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서 직장과 주거가 한 곳에 있는 직주근접을 실현시키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생각이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군은 지역을 살기 좋은 곳, 교육시키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군은 또 기업유치를 위한 전략으로 생산 거점을 해외에 뒀다가 국내로 복귀하는 유턴 기업에 주목하고 있다.특히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들이 미중 갈등 여파 등으로 ‘차이나 리스크’에 직면한 가운데 유턴 기업들이 국내에 돌아올 공간이 마땅치 않은 것으로 보고 이들 기업을 유치할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정보통신기술(ICT)과 소프트웨어(SW) 중심의 신산업 분야 기업 유치에도 적극나설 계획이다. 직원들도 관련 분야를 적극 공부하고 있다. 칠곡군은 조직 개편을 통해 기업 유치의 행정 절차 등을 원스톱으로 지원하는 부서를 신설할 방침이다. □ 자전거 타는 군수자전거를 타고 이색 소통을 펼치고 있는 김재욱 칠곡군수. 김 군수는 관용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해 자주 출퇴근한다.김 군수는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학인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금융사, 건설사, 방송사에서 경영 업무를 맡으며 잔뼈가 굵어진 엘리트 출신이다.화려한 스펙과 달리 그의 행보는 서민적이고 소박하다. 180㎝가 넘는 큰 체구이지만 눈높이는 항상 주민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출장이나 바쁜 일정을 제외하고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며 주민을 만나 소통 행보에 나선다. 자전거에서 내려 사이클 복장으로 나타나 “칠곡군수입니다”라고 말하면 처음에는 놀라던 주민들도 이제는 편하게 군수를 대한다.김 군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민과 셀프 촬영을 하기도 하고 격의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독거 어르신 집을 방문해 말동무가 되는 것은 물론 주민들과 함께 붕숭아 물을 들이고 번역기를 이용해 결혼 이주 여성과 소통에 나서기도 한다.자전거뿐만 아니라 바리스타가 되어 커피를 직접 내리며 직원들과 함께 탁구 치는 자치단체장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군수실을 찾는 직원과 외부 손님이 방문하면 김 군수는 머신기에서 커피를 직접 내린다. 여직원이 탕비실에서 커피를 준비해 대접하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또 서민적인 소통 행보와 함께 합리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업무 효율성과 환경 보호를 위해 종이 없는 ‘스마트 보고’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공직 문화를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바꾸고 새로운 성장 동력 마련을 위해 익숙한 것을 내려놓았다.김 군수는 “군민이나 공직자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군수가 먼저 변해야 했다”며 “관행이 주는 편안함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낯설고 불편하더라도 원점에서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3-01-30

“포항지역 500기 고인돌 중 개발·훼손으로 300기만 남아”

지역사는 지역민의 뿌리이자 거울이다. 지역민의 역사 알기는 지역의 정체성 찾기이며 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위에서야 지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환경은 발전할 수 있다. 포항 지역사 연구가 생소하던 시절. 황인 선생은 지역사 연구의 선구적 길을 걸어왔다.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지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해석하는 일에 힘을 쏟았으며 문화재 보존에도 앞장서 왔다. 역사에 대한 전문성과 사명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교직에서 정년퇴임하고도 활발하게 활동해 온 선생을 동해면 도구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년 녹내장 수술을 한 탓에 건강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도 남다른 기억력과 넘치는 열정으로 인터뷰는 한나절 남짓 이어졌다. -포항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1977년 동해중학교에 역사 교사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수업에 들어가 보니, 희귀 성씨인 ‘황보’ 성이 한 반에도 여럿이었다.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킨 난) 당시 영의정이던 황보인의 집성촌이 학교와 가까운 구룡포읍 성동 3리였다. 황보인의 비석을 찾으러 가던 길에 심상치 않은 큰돌을 발견했다. 밭일하던 노인이 잔돌을 골라내어 큰돌 주변에 모으며 구시렁댔다. 돌무더기를 헤집어보니 파손된 마제석검 손잡이가 있었다. 당시 지역 방송 기자였던 박이득 전 포항예총 회장에게 제보했고, 포항 공당리 고인돌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며 특종으로 다뤄졌다.-포항의 고인돌은 기계면에 많지 않나.△기계면에 대규모로 분포하지만 구룡포와 동해, 흥해 등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4~5년 돌아다니며 정리한 고인돌 보고서를 문교부(1990년 교육부로 개칭)에 올렸더니 모 대학 고대사 교수가 대학원생 3명과 찾아왔다. 포항시 기계면 일대에 고인돌 수십 기가 있고 형산강 건너쪽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문교부에 보고하니, 내 보고서를 내밀더라는 것이다. 그때가 80년도 즈음으로 기억한다. 문교부에 보낸 글은 남아있지 않고, 1999년 ‘영일군사’에 관련 내용을 실었다.-포항에 산재한 고인돌은 어떻게 해석되나.△청동기 고인돌 사회는 평등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수장이 거느린 인원을 계산하면 포항에 선사문화가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날씨가 따뜻해 살기 좋고 먹거리가 풍부하며, 동해와 형산강이 외부의 침입을 막았던 덕이다. 포항에는 5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었지만 무관심과 개발로 훼손되고 300여 기가 남았다. 포항에서 발견되는 선사유적으로 암각화와 선돌(立石)도 있다. 선돌은 청동기시대 부족 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어떤 특별한 사건을 기념해 세웠다. 동해면 신정리에 있는 ‘할배 짝짓돌’과, 도구리의 ‘할매 짝짓돌’에 대한 것은 박일천 초대 민선시장이 집필한 ‘일월향지’에 실려있다. ‘할매 짝짓돌’은 동해초등학교에 있었지만 ‘할배 짝짓돌’을 찾지 못하다가 신정 1리 마을 앞 수로 공사로 발견됐다. 청년회에서 경로잔치를 하면서 마을에 세워 지금까지 수호신으로 보존된다. 포항에 현재 남은 선돌은 5개이다.-선사문화가 발달했던 포항의 고대사회는 어땠나.△포항 지역은 청동기 이래 고대 소국이 발전되다 신라에 병합된다. 경주 지역에 강력한 고대국가가 발달한 배경에는 포항의 풍족한 선사문화가 한몫했다고 여겨진다. 신라 왕경 주변의 풍성한 수확물이 신라 지배층을 뒷받침한 것이다. 포항의 고대사회는 청하와 신광, 흥해에 산재한 삼국시대 고분을 통해 확인된다. 주인이 확실한 무덤은 없고 도굴이 심한 상태지만, 영일만과 형산강을 경계로 남북이 뚜렷이 구분된다. 북방적인 문화 요소와 남쪽에서 올라온 가야적인 요소가 수용되는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은 청하 고현까지 남하했으므로, 신광 냉수리 고분군에서는 고구려 양식이 나타난다. 청하에는 고구려 군사가 철새처럼 되돌아가길 기원하는 ‘회학지(回鶴池)’와 고구려군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도끼재’가 있다.-고려시대 인물인 배천희 국사의 행적을 발견하게 된 과정은.△고려시대 포항에는 1군(흥해)과 5현(연일, 청하, 신광, 기계, 장기)이 있었다. 흥해가 군으로 승격된 건 배천희 국사의 고향이라서다. 흥해읍 행정복지센터 뒤에 ‘순국반공 위령탑’을 탁본하러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위령탑의 글씨를 쓴 해공 신익희는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과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낸 대단한 명필가이다. 탁본을 하고 들른 중국집에서 노인 한 분이 조상 중에 대단한 스님이 있다고 했다. 무덤은 흥해에 있고, 비석은 수원 광교산 창성지에 있다며 족보까지 펼쳐 보였다. 고려말 고승인 진각국사 배천희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머리가 쭈뼛 섰다. 화엄종계의 승려로는 유일하게 국사가 된 인물이다. 왕명에 따라 목은 이색이 짓고 승려 혜잠이 새긴 ‘진각국사 대각원조탑비명(眞覺國師 大覺圓照塔碑銘)’은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마침 탁본 전시를 앞두고 있었는데 반드시 떠서 전시장에 걸고 싶어 수원으로 갔다. 막상 가보니 비석은 수원성으로 이전됐고 탁본은 정부 승인 없인 안 된단다. 탁본은 해야겠고 별 수가 있나. 나흘 동안 시청으로 출근하니 단 한 장을 조건으로 허락이 떨어졌다. 탁본하던 날 함박눈이 내렸는데도 글씨가 하나도 안 번졌다.-포항에 남은 진각국사의 유적은 어떤 것이 있나.△진각국사의 고향인 흥해 양백리 백산에 무덤과 유허비가 있다. 길이 험해서 한참을 헤매다 찾았는데 묘 앞에 당간지주 혹은 왕릉의 호석 모양의 돌기둥 2개가 남아있다. 당시 승려들은 화장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국사의 부도는 아직 찾지 못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도 대신 무덤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국사의 묘 옆에 말 무덤이 있고 관련한 설화도 전해온다. 최근 문중에서 안내판을 세웠다.-조명해야 할 포항의 인물들이 많다고.△한의학의 대가 석곡 이규준이 동해면 임곡리 태생이다. 북쪽은 동무 이제마, 남쪽은 석곡 이규준을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이라 부른다. 동해면에 살면서도 석곡의 존재를 몰랐는데, 제자들이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묘소를 참배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매년 전국에서 100여 명이 모이지만 정작 포항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외지인으로는 처음으로 참배 행사에 참여했다. 이후 석곡을 조명하는 사업들이 이어졌고 동해에 석곡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건립됐다. 그리고 10년 넘도록 학생들을 데리고 참배한 의병대장도 있다. 구한말 영남지방 대표적인 의진(義陳)인 장기의진을 이끈 의병장이다.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라 보훈지청으로부터 의병도 아닌 사람을 왜 참배하느냐는 항의도 받았다. 결국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제694호)을 추서 받고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됐다. -포항에서 발견된 유물 가운데 독특한 것이 있다면.△조선시대 충비(忠婢) 즉 ‘계집종’ 비석이 3기나 있다. 광남서원의 충비 단량비, 곡강천의 참포에 있는 충비 순량비, 연일읍 연화재의 충비 갑연비이다. 갑연 비석은 조선왕조실록(순조 30년11월21일 조)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단량은 조선시대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으로 계유정난 때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탈출했다. 단량의 덕으로 혈통을 유지한 것이다. 여종을 위한 비석은 전국적으로 드물어 역사적 가치가 높고, 포항 사람들의 인간미를 보여준다.-아는 만큼 보인다니 사소한 것도 예사로 보지 않을 것 같다.△흥환리 바닷가를 산책하다 흥선대원군의 친형인 흥인군 이최응의 공덕비를 발견했다. 블록으로 담을 쌓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덮은 구조물을 처음에는 그저 어촌의 그물 창고거니 했다. 태풍으로 지붕이 날아간 뒤 보니 2개의 비석이 있었다. 목장의 감목관인 민치억과 흥인군의 공덕비였다. 이로써 조선시대 군마를 방목하며 국가의 군마 조달에 큰 역할을 한 ‘장기 목장성’의 존재가 드러났다. 비각을 세우기 위해 터 고르기를 하던 중 비석 하나가 더 발견됐다. 울부 김노연의 공덕비로 장기 목장성이 울산 목장성의 관할임이 적혀 있었다.-당장은 아니어도 결국에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사례도 있다고.△장기면에 있는 고석사 약사여래불은 약초나 정병이 없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제강점기에 덧바른 석고를 떼어내니 유려한 선이 드러났지만, 훼손이 심해 문화재 등록은 어려웠다. 그러다가 불교미술사의 대가인 문명대 교수에 의해 최초의 통일신라시대 미륵불 의좌상(倚坐像)임이 밝혀졌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형상화한 의좌상은 국내에선 보기 드물어 경주 삼화령과 법주사를 포함해 단 3구뿐이다.-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쉬운 때는.△충비 단량 비석은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후손들이 다시 만든 비석을 비각 안에 넣고 원래의 것은 비바람에 방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화재 지정을 위한 현지실사가 나왔다가 이걸 보고 그냥 가버렸다. 또 장기면 죽정리에 있는 태봉산은 신라시대 왕자의 태(胎)를 안치한 ‘잡인출입금지’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무관심 속에 도굴의 표적이 되어 태를 묻은 태실은 파헤쳐 지고 장대석이 흩어져 버렸다.-향토사가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역사는 사견이 들어가서도 부풀리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꾸미지 말고 기록돼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연오랑 세오녀 테마공원은 고증이 상당히 아쉽다. 블루밸리산업단지 개발 과정에서 20여 기의 고인돌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고인돌의 체계적 보존과 활용방안이 마련되길 바란다. 포항에 특히나 많은 봉화대와 등대는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불빛축제 때 등대와 봉화도 밝히면 얼마나 멋지겠나. 역사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먹고살기 바빠서 생각을 못 하고 살았지만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바로 역사와 문화이다./배은정 작가

2023-01-30

“긍정행정·친절도시·명품정책 삼박자, 시민과 함께 만들 것”

석탄산업이 사양 길에 들어선 이후, 문경 지역사회는 인구감소에 따른 경기침체와 골목상권 쇠퇴, 일자리 부족의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10여 년 전 국군체육부대와 민간숙박시설인 STX리조트를 유치한 뒤 이렇다 할 대규모 시설유치가 없다 보니 16만에 이르던 인구는 반토막이 났고, 구도심은 비어가는 상가들로 지역 상권을 유지하기 힘든 실정이다.천혜의 자연경관과 문경새재라는 걸출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관광명소의 명맥을 근근히 이어가고는 있지만, 치열해 지고 있는 타 지자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한 상황이다.지난해 7월 시민들의 부름을 받고 10여년 만에 돌아온 신현국 문경시장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이다.신 시장은 긍정·친절 3대 마인드와 시정 3대 중점과제 구상을 발표하면서 “기존 업무추진 관행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현대 트렌드에 맞는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에 ‘감동의 긍정행정, 멋진 친절도시, 지방부활 명품정책’의 삼박자를 시민과 함께 만들어 갈 것”을 다짐하며 공직자는 물론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실천을 당부했다.신 시장은 이어 “올해를 긍정의 마인드로 새로운 도약과 문경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원년으로 만들어 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긍정의 힘! yes 문경민선 8기 제9대 문경시장으로 당선된 신현국 시장은 ‘긍정의 힘! yes 문경’의 슬로건 아래 대학·기업유치 올인, 스포츠·체육도시 육성, 문화·관광도시 완성, 일등농업·농촌 실현, 교육·복지도시 건설 등 5대 시정목표를 내세우며 문경시민들 앞에 다시 섰다.아울러 문경시 변화와 발전을 위한 핵심주력사업으로 작은 가능성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공직자와 시민이 하나가 되어 긍정의 마인드로 반드시 이뤄야 할 민선8기 60개 공약사업을 지난해 9월 확정했다.또한, 비록 6개월의 짧은 기간이지만 보여준 적지 않은 성과는 문경시 발전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과 기대를 한껏 고조시켰다. 골프장건립과 항공테마파크사업, 영상산업 기반조성사업 등 대규모 사업 투자를 위한 MOU체결과 3년만에 대면으로 치러진 오미자, 사과, 한우 등 지역의 대표 축제의 성공 개최를 통해 지역발전을 위한 분위기가 한층 고무됐다.문경시 발전을 위해 ‘찬반 더운밥 가리지 않겠다’는 신현국 시장의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2023년은 민선 8기 본격적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한해이다. 아울러,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 문경의 시대를 열 중부내륙고속철도 개통의 해이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을 꿈꾸고 있는 문경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신현국 시장은 계묘년 새해를 맞아 신년인사에서 문경의 변화를 이끌어 갈 3대 프로젝트 추진 구상을 밝히며, 공직자와 시민의 협조를 당부했다. □ 공직사회 혁신문경시는 먼저 ‘3게 긍정실천운동’으로 공직사회 내부의 변화를 시도한다.공직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새롭게(new), 멋있게(cool), 재밌게(fun)’라는 구호를 설정했다. 비슷하지만 같지 않게 좀 더 시민에게 감동을 주고, 품위 있는 정책으로 멋이 깃든 문경을 건설하고, 의미와 재미가 가미된 기획으로 시민들에게 삶의 충전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또한, 고객 감동으로 친절도시 문경 실현을 위한 범시민 ‘3대 친절운동’을 전개한다.문경은 연간 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 명실상부한 중부내륙의 중심 관광지이다. 아름다운 새재와 어울리는 명품친절 도시로서 친절을 관광 상품화한다는 생각이다.아무리 좋아도 감동을 주지 못하면 재방문을 기대하기 어렵듯 ‘가슴으로, 정성으로, 따스함으로’라는 친절정신을 공직자는 물론 공단, 유관기관, 나아가 시민이 함께 참여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친절을 실천하도록 세부 과제를 발굴해 고객이 감동하는 전국 최고의 친절도시로 발돋움한다는 목표이다. □ 대학 캠퍼스 지역 유치신현국 시장의 공약 1·2·3호 사업은 한국체육대학교 문경유치, 숭실대 문경캠퍼스 건립, 문경새재 케이블카 조성이다. 문경시는 이들 사업을 시정 3대 중점과제로 설정하고 적극 추진한다.문경 또한, 시대적 문제인 지방소멸의 파도를 피해 갈 수 없다. 시정 3대 중점과제를 선정, 선제적으로 추진해 소멸을 이겨낸 모범도시를 만들어 나간다는 복안이다.먼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국립대학이자 한국 체육의 요람인 한국체육대학교를 국군체육부대가 위치한 문경으로 유치해 젊은 층이 넘치는 스포츠체육도시로 조성하고 나아가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에도 이바지한다는 구상이다.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응 방안으로 지난해 9월 한국체육대학교 문경 이전 범시민 서명운동을 펼쳐 시민의 절반인 3만 6천551명의 서명부를 대통령 비서실에 전달했다, 12월 5일에는 민간위원 716여 명으로 구성된 범시민 추진위원회 출범식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유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현재는 한국체육대학교 문경 이전을 위한 타당성 검토 용역을 진행 중이며 6월 완료할 예정이다.한체대 유치를 통한 국정과제인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발전’을 이루는 모범사례와 지역 경기 부활이라는 시민들의 염원 달성을 위해 1%의 가능성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열정으로 이전 당위성 호소에 주력하고 있다.아울러 지역대학인 문경대와 서울의 유수 대학인 숭실대의 통합을 이끌어 내 숭실대 문경캠퍼스 설치를 통해 지방대학도 살리고 숭실대도 상생하는 윈윈의 정책을 추진한다.교육부 또한, 지방 실정에 맞는 대학운영을 교육정책으로 검토하고 있고 대학 상호 간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어 전국 최초로 수도권대학과 지방대학 통합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이의 일환으로 문경대와의 통합동의 확약에 이어 문경대와 숭실대, 문경시, 경북도 4자간 MOA 체결도 성사시키며 두 대학 간 협의를 위한 노력도 발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또 문경새재 케이블카 조성사업은 주흘산 관봉 주변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것이다.케이블카 조성사업을 통해 주흘산 정상에서 문경의 아름다운 산세를 조망할 수 있는 세계최고의 관광명소로 발돋움시키겠다는 방침이다.문경새재는 주홀산이라는 명산을 품고 있으나 산세가 험해 등반이 쉽지 않다. 케이블카가 조성된다면 백두대간의 중심을 정상에서 조망할 수 있어 전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명소가 될 수 있다.정상에는 관봉과 주봉간 2.5km의 명품 데크로드 조성을 동시에 연계 추진해 한국인이 꼭 타고 걸어봐야 할 명품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3-01-29

생사 갈림길서 이송?… 뇌졸중 환자 20% ‘골든타임’ 놓쳐

‘골든타임(Golden Time)’은 치명적 손상을 입은 후 1시간 안에 결정적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학용어인 ‘골든아워(Golden Hour)’에서 나온 말이다. 그 시기를 놓치면 결코 이전 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적 능력과 신체 활동을 관장하는 중추 기관인 ‘뇌’에 손상이 발생했을 때의 골든타임은 과연 몇 분일까.뇌경색은 최대 6시간 내에 막힌 혈관을 뚫어주면 좋은 경과를 기대할 수 있어 ‘골든타임’이란 게 존재한다. 하지만 뇌출혈의 경우 다르다. 뇌출혈은 출혈량과 출혈 위치 등 다양한 것들이 예후의 기준이 된다. 큰 뇌혈관이 터져 다량의 출혈이 발생하면 즉사할 수도 있다. 또 출혈로 인해 뇌척수액이 내려가는 길을 막으면 수두증이 발생하고 뇌압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사망할 수 있다.매년 통계청이 발표하는 한국인의 사망원인 1위는 암, 2위 심장병, 3위가 바로 뇌혈관 질환이다. 뇌질환은 국내 사망 순위 3위를 기록했지만 암보다 훨씬 무섭다. 뇌 기능이 멈추면 몸은 살아 있지만, 식물인간 상태로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글 싣는 순서1. 급성뇌졸중치료를 위한 뇌혈관 전문병원의 역할과 전망2.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병원 전 단계 환자이송에 달렸다 3. 전문병원 제도의 현실과 문제점4. 뇌혈관질환 ‘골든타임 지키려면’ 뇌혈관 전문병원 활용이 답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다실제로 지난 2022년 7월 경산에 거주하는 59세 여성이 의식 변화로 같은 지역의 한 병원으로 이송돼 전교통 동맥의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지주막하출혈 진단을 받았다.이송된 병원에서는 수술할 수 없어 수술을 위해 대구에 위치한 수술 가능 병원을 찾았지만, 바로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 결국 수술이 가능한 타지역의 뇌혈관전문병원으로 전원 됐다.하지만 이 여성은 전원 중 재출혈로 인해 의식수준이 급격히 악화됐다. 뇌혈관전문병원으로 옮겨진 뒤 그는 급히 응급코일색전술 및 뇌실외배액술의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식물인간이 되었다.뇌혈관 질환은 치료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후유장해를 얻거나 사망할 위험이 커진다. 죽어가는 세포를 얼마나 빨리 살려내느냐가 치료의 관건인 셈이다.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 입장에서는 전원을 위해 이송되는 그 시간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치료의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것이다. □뇌혈관질환 전문병원 활용으로 급성 뇌질환 골든타임 잡다지난해 1월 울산에 연고지를 둔 65세 여성이 의식 변화로 울산지역 종합병원으로 옮겨져 좌측 후교통동맥의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지주막하 출혈 진단을 받았다. 이후 해당 병원이 여성을 대상으로 코일색전술 시행했지만, 실패하였고 그는 수술 가능한 인근 뇌혈관전문병원으로 전원됐다. 뇌혈관전문병원은 그를 대상으로 응급코일색전술 및 뇌실외배액술을 실시했고, 이 환자는 30일 후 퇴원했다.같은 해 4월에는 창원에서 56세 여성이 쓰러진 채 발견됐고,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뇌동맥류 파열로 인한 지주막하출혈 진단을 받았다.하지만 대학병원에서 당일 수술이 불가능해 수술이 가능한 부산과 대구, 구미 지역의 병원을 찾았지만, 치료가 불가해 포항의 한 뇌혈관전문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후 그는 해당 병원에서 응급코일색전술과 뇌혈관 약물 성형술을 받았고 23일 후에 퇴원했다. □뇌졸중환자 20% … 첫 방문 병원서 치료 못 해 ‘전원’대한뇌졸중학회에 따르면 해마다 약 10만명 이상의 뇌졸중(뇌경색과 뇌출혈)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수 역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뇌졸중 치료에서는 병원 전단계인 뇌졸중센터가 중요하지만 국내 상황은 열악하다.실제로 2016∼2018년도에 발생한 허혈성 뇌졸중환자의 약 20%는 첫 번째 방문한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으며 24시간 이내에 타 병원으로 전원 돼 치료를 받았다.전원환자의 비율은 지역별로 편차가 컸다. 해당 비율이 가장 낮은 곳은 제주로 환자의 9.6%를 차지했다. 반면 전남의 경우 44.6%로 환자의 절반 가까이 치료가 가능한 다른 병원을 찾아야 했다. 대구와 경북 역시도 각각 23.1%, 24.9%를 차지하며 비교적 높은 전원율을 보였다.더 큰 문제는 이런 소도시에 ‘뇌졸중 고위험군’인 고령층이 다수가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현재 뇌혈관질환에 관련된 센터는 70∼80%에 이르는 병원이 서울, 경기권, 광역시에 편중되어 있다. 지방에 거주하는 국민은 시간이 생명에 직결된 응급 뇌혈관질환 치료를 골든타임 내에 받기가 쉽지 않아 뇌혈관질환 의료서비스의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이다.□현실반영 못 한 응급의료진료권역 분류현재 응급의료센터 분류 체계를 보면 응급실의 가용자원이나 특수처치 이용 가능성에 따라 응급의료기관을 등급화해 ‘권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센터’, ‘지역응급의료기관’으로 나누고 있다.국가에서 각 병원의 응급실을 규정에 따라 평가하고 지역의 인구나 인근지역의 균형을 고려해 등급과 함께 합당한 업무를 부여하고 있지만, 현재 이 같은 응급의료센터 분류 체계는 병원과 병상수의 크기로 인한 내용이지 골든타임이 중요한 뇌혈관 질환의 실제 진료 내용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이와 관련해 일선 의료진들 사이에서는 “효율적인 응급의료체계를 확립해 뇌혈관질환 환자들이 골든타임 내에 적시 적소에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단순히 규모가 크다고 이송되는 비능률적인 요소들은 제거하고 새롭게 체계화된 응급의료체계가 구축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사건 발생 후 늦었지만, 응급의료전달체계를 강화하려고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뇌혈관질환 전문병원 선택이 아닌 ‘필수’현재 전국에 운영되고 있는 55개의 뇌혈관센터를 운영 중인 병원 중 서울 및 경기권, 광역시에 위치한 병원은 43곳으로 총 78.2%를 차지하고 있다.대도시권과 그 외 지방 중소도시 간 지역 의료서비스의 불균형은 매우 심하다.또 전국에서 뇌졸중 집중치료실을 갖춘 병원은 42.5%에 불과하고, 전국 응급의료센터 중 30% 이상이 24시간 뇌졸중 진료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다.뇌혈관 질환은 빠른 시간 내에 표준화된 일련의 치료과정이 가능하고 초급성기 치료 이후에 뇌졸중 관리가 가능한 시스템이 갖춰진 병원을 요구한다.치료과정에 있어 급성기 골든타임을 고려해 환자가 내원 시 혈전제거술 및 스텐트 삽입술 등 뇌혈관내중재치료(Intervention)를 모두 시행할 수 있는 기관이 지역별로 분포돼야 하며 뇌출혈에 대한 수술, 감압술, 경동맥 절제술, 뇌혈관문합술 등 고난도 관혈적 뇌수술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필요하다.현재 뇌혈관질환센터 시스템의 실태와 문제점을 해결해줄 대안은 뇌혈관 내 중재치료가 가능한 뇌혈관 전문병원제도를 이용하는 것이다.뇌혈관전문병원은 상급종합병원의 난도 높은 진료와 시술 일부 분담이 가능하고 환자 거주지역을 기반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접근성이 보장된 역할이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뇌혈관질환에 대한 의료서비스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다.□도·농간 의료서비스 격차 해소 기대보건복지부는 지난 2011년부터 대형병원 환자쏠림을 완화하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화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소병원을 전문병원으로 지정하고 있다.이는 환자구성비율, 의료질 평가 등 7개 지정기준(환자구성비율, 진료량, 병상수, 필수진료과목, 의료인력, 의료질 평가, 의료기관 인증)에 대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서류심사 및 현지조사, 전문병원심의위원회 심의를 이들 병원을 최종 결정했다.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전문병원 제도가 지역주민들이 전문적인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지역사회에서 쉽게 이용하고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도록 각종 진입장벽, 진료영역, 지원체계 등 제도 전반을 지속적으로 점검하여 문제점을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이시라기자 sira115@kbmaeil.com

2023-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