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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길을 잃을 용기

어른이 된 후로는 지도를 보며 길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 내비게이션이 알아서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안내해 주기 때문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늦을 일도, 위험한 일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머릿속 지도는 점점 길을 잃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교회 수련회가 있던 날이다. 겨울 수련회였기 때문에 바깥의 날씨는 매서웠다.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숨을 들이마시면 폐속까지 시린 기운이 퍼졌다. 하지만 고등학생 아이들은 세상의 방향과 늘 반대인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른들의 생각과 어긋나고 가야 할 길 위에선 되돌아가기가 일쑤고 자기만의 셈법으로 어른들과의 갈등을 자아내는 아이들과의 수련회 날이었다, 도착지에 와야 할 4명의 아이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단체로 이동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온다는 아이들이었다. 잠시 후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경찰이었다. 아이들은 교회 선생님도, 부모님도 속이고 30km가 넘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다. 추위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라는 듯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낄낄대며 출발했다. 목적지만을 보고 열심히 달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을 그대로 따라가며 완벽한 일탈을 즐기며 젊음의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안전한 길’이 아닌 ‘빠른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고속도로에 들어서 있었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아이들은 한껏 내려간 수은주만큼 꽁꽁 얼어붙었다. 한편으로는 마치 어른들만의 전유물인 도로를 자신들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야, 여기 맞아?” “모르겠어! 근데 지금 돌아갈 수도 없어.” 순식간에 사태는 심각해졌다. 차들은 경적을 울려대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딘가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경찰이 출동했다. 아이들은 갓길에서 붙잡혔다. 지나가는 차들은 경악했고 경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아이들을 쏘아봤다.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희 무슨 생각으로 여기로 들어온 거야?” 녀석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수련회 가려고요….” 경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다행히 경찰의 에스코트 덕분으로 아이들은 큰 사고 없이 상황이 잘 정리되었고 녀석들은 무사히 도착하여 교회 목사님과 선생님들, 부모님들의 폭풍 같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생각해 보면 무모한 일이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의 그 무모함이 부러웠다. 어른이 된 나는 어느새 익숙한 길로만 다니고 확실한 길만을 선택한다. 실수하지 않으려 조심하고,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안전을 택한다. 내비게이션이 인도하는 길 위에선 길을 잃어버릴 기회마저 잃어버린다. 길도 모르면서 페달을 밟고 어른들에게 혼날지언정 목적지에 닿고 싶다는 마음을 앞세우는 저 무모한 아이들의 젊음이 닮고 싶었다. 김경아 작가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 길이 위험한지도,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알게 될 것이다. 이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고 가슴 뛰는 순간이었는지. 그리고 어쩌면 또 한 번 무모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을 떠올리며 어른이 된 그들은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용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결국, 삶이란 크고 작은 모험들의 연속이니까. 언젠가 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그 날을 기억하며 가끔은 길을 잃을 용기를 내보기를 바란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을, 때로는 그 길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탄생한다는 것을 이 겨울날의 기억이 그들에게 오래도록 가르쳐 주기를 바란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길을 잃는 법을 잊는다. 길을 잃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할 일도 없다. 때때로 길을 잘못 들어서야만 진짜 나아가고 싶은 길이 보이기도 한다. 길을 잃을 용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나는 새로운 길을 향해 페달을 밟고 가는 저 아이들의 무모함에 박수를 보낸다. /김경아 작가

2025-03-25

숨비소리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는데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숨 쉴 틈이 없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주변 이야기들을 쓰나미처럼 쏟아내 나를 덮는다. 내 속은 점점 깊이 잠겨 버린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내가 먼저 건 전화였다. 내 마음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 안부를 묻는 가벼운 질문조차 없이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만을 토해냈다. 자신의 아이들 일상을 풀면서 정작 내 아이들의 일상은 묻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의 문제만 존재하는 듯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거친 파도처럼 쉼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참았다.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나는 듣는 사람으로 남았다. 익숙한 일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적절한 순간에 맞장구를 치고, 간혹 짧은 감탄사를 얹으며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 감정을 삼키고 하고 싶은 말도 접어두는 일, 그 소실점에서 묘하게 차분한 순간이 찾아왔다. 마치 깊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말할 수 없는 심연 속에서 조용히 견디는 느낌이다. 숨을 참고 버티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끝내 내 차례는 오지 않았다. 잠깐 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친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끊어진 전화기 너머로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쉰다. 마치 해녀가 물 밖으로 올라오며 내뱉는 숨비소리처럼, 참아낸 숨이 길수록, 내쉬는 숨은 더 깊고 진하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작업한 뒤, 물 밖으로 나올 때 내뱉는 숨소리다. 깊은 바다에서 오랜 시간 머무르려면 숨을 최대한 참아야 하고, 마침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강하게 내쉬는 숨이 바로 숨비소리다. 그것은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생존과 인내의 증거이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지금 물속을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깊이 잠길수록 주변은 조용해지고 오직 나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들린다. 숨을 참고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온몸이 묵직해지지만 나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물 속에 오래 머물려면 급하게 숨을 쉬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면 방향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살면서 숨을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아이가 원하는 대학을 가지 못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감정을 숨기고 숨을 죽이며 아이의 마음을 감쌌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자신만의 길을 찾았고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주었을 때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숨을 참았던 그 시간이 나와 아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준 시간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할 때,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버텨야 할 때, 조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숨을 참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그 순간을 이겨낼 때 비로소 물 위로 나와 크게 숨을 내쉴 수 있다. 해녀들이 힘겹게 숨을 내쉬며 다시 바다로 향하듯, 나 역시 삶에서 숨을 참고 견디는 과정을 반복하며 바닷속 보물들을 캐 나가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의외로 물속은 신비롭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일수록 고요하지만,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잠시 그곳에 머문다. 물속에서 나의 감정들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조급했던 흐린 감정들이 잠잠해지고 내 수면 깊숙이 덮여있던 언어의 조각들을 꺼내어 가만히 듣는다. 오래 참을수록 숨을 내쉴 때의 해방감은 더 크다. 친구가 다 들어주지 않더라도 견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면 위의 공기는 더욱 달고 청량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숨을 참고 견디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작가

2025-03-18

빈 둥지

겨우내 텅 빈 둥지를 품고 있던 나뭇가지들이 다시 연둣빛 잎을 피워 올리는 3월이다. 올해는 무척 바쁜 겨울의 끝자락을 보냈다. 내 둥지를 비워내기 위해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분주한 봄을 맞는다. 아이들과 함께 나도 거실에 앉아 짐을 쌌다. 한 가득 꺼내놓은 아이들의 흔적들이 어느새 집 안 구석구석에서 옅어졌다. 한 달 전 잘 다니던 직장을 부모와 동의 한 마디 없이 사직서를 내고 온 아들이 이직의 기회를 얻어 다시 타지로 가게 되었고,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이 된 딸도 독립을 하여 같은 날 남매가 둥지를 떠났다. 평생 맞벌이를 하며 아이들의 일상을 챙기며 바삐 움직였던 나는, 오늘 아침 처음으로 느긋하게 커피를 내렸다. 식탁에 마주 앉아 친구들 이야기며 진로 이야기며 깔깔대며 나누던 자리도, 현관문을 다다다다 쫓아가던 발소리도 사라졌는데 습관처럼 그 쪽을 바라보며 아이들의 대화에 맞장구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오래전, 아이들이 어릴 때 나는 이 날을 꿈꾸었던 것 같다. 알람소리에 잠을 깨지 않아도 되고 아침마다 서둘러 밥상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날, 숙제를 챙기고 학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느라 허둥대지 않아도 되는 날.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며 언젠가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조용하고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막상 그 시간이 오고 보니 익숙했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자리는 생각보다 깊은 고요로 가득 찼다. 텅 빈 방엔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을 것 같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시간 맞춰 들릴 것만 같다. 매일매일 움직이며 아이들을 챙기던 그 시간들이 나를 단단하게 묶어두고 있었던 줄 몰랐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이 시간이 어쩐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하지만 나는 안다. 이 침묵 속에서 나는 새로운 나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둥지가 빈다는 것은 새들이 이제 자신의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임을. 그토록 바라고 응원했던 순간이 아닌가. 어미새가 언제까지나 둥지에 머물며 새끼를 품을 수는 없다. 충분히 그 시간을 준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나의 모습에서 미흡한 어미새를 본다. 날아오를 준비를 시킨다고 했지만 정작 떠나보낼 준비는 내게 부족했나 보다. 아이들은 새로운 세상 속에서 저마다의 날개짓을 하고 있을 텐데 나는 아직도 둥지 근처를 맴돌고 있는 듯 하다. 시간이 지나면 어미새도 알려나. 둥지는 언제까지나 새를 붙잡아두는 곳이 아니라 떠날 수 있도록 힘을 길러 주는 곳이라는 걸. 아이들이 각자의 하늘을 날고 다시 돌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나는 더이상 외로운 어미새가 아니라 따뜻한 미소로 맞이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어 있겠지. 김경아 작가 아이들에게 쏟아부었던 시간과 에너지를 이제 나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오랫동안 미뤄뒀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젊은 시절 묵혀 두었던 외국어도 배우며 나를 설레게 하는 일들을 찾아볼 것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둥지를 만들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빈 둥지는 텅 비어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채워질 순간을 기다리며 그 사이 나 자신을 채우는 시간이다. 이제는 나도 나의 날개짓을 연습하려 한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미뤄 두었던 일들, 마음 한구석에만 담아두었던 소망들을 하나씩 펼쳐본 것이다. 천천히, 꾸준히, 아이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듯 나도 내 몫을 살아가야 한다. 빈 둥지는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또 다른 쉼표일 뿐이다.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하루를 기다리는 대신 나를 채우며 하루를 살아가기로 한다. 그렇게 나도, 아이들도 각자의 하늘을 더 넓게 날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작가

2025-03-11

깨진 유리창의 법칙

학원을 파하고 급히 횡단보도를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아찔하다. 차들은 바삐 오고 갔다. 아파트 옆 동 동생과 함께 저녁 산책을 다녀오며 무심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신호등을 찾았지만 없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신호등이 있는 것처럼 계속 서 있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우리 뒤로, 우리 옆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멈춰 서기 시작했다. 누군가 휴대폰을 보며 뒤따라 멈췄고, 이어서 유모차를 밀던 엄마도 정지선에 멈췄고, 손을 꼭 잡고 걸어오던 노부부도 멈췄다. 횡단보도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마치 당연히 기다려야 하는 장소가 된 것처럼. 나는 문득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떠올랐다. 작은 무질서가 방치되면 더 큰 무질서를 부른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거꾸로 누군가가 질서를 지키면 다른 이들도 따라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 같아도 때로는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곤 한다. 누군가가 무단횡단을 하면 뒤따르는 사람들도 별다른 고민 없이 건넌다. 반대로 누군가 오늘처럼 멈춰 서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멈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작용하는 듯 했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전봇대에는 낙서가 많았다. 처음에는 작은 글씨 몇 개였는데 금세 키 큰 전봇대는 사람의 손이 닿는 모든 지점이 낙서로 뒤덮였다. 그 때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붓을 들고 페인트를 칠해 낙서를 지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의아해했지만 깨끗해진 전봇대는 의외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새로 낙서를 하는 아이들이 줄어든 것이다. 누군가 작은 질서를 만들어 놓으면 그 질서를 따르려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는 듯 보였다. 횡단보도 앞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단순히 멈춰 서 있었을 뿐인데 그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다려야 한다’는 신호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작은 변화가 새로운 흐름을 만드는 순간이었다. 조금 후, 차 한 대가 멈췄다. 신호등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지자, 운전자가 양보한 것이다. 그곳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넜다. 재밌는 상황이 벌어지자 모두가 건너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 앞에 또 새로운 사람이 서 있었다. 뒤에 또 다른 사람이, 그 뒤로 또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작은 행동이 가져 오는 변화, 질서를 깬 작은 요소가 혼란을 가져오듯 질서를 지키는 작은 행동도 조화를 만들 수 있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보이지 않는 신호처럼. 최근에 본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한 카페에서 자리가 부족해지자 어떤 손님이 쓰레기를 테이블에 그냥 두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손님들도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다. 결국 카페 안은 금세 어질러졌고 직원이 치우기 전까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유명한 카페라고 갔지만 정돈되지 않은 무질서에 시간 내어 찾아온 카페에 대한 불 김경아 작가 신과 후회까지 밀려왔다. 긴 시간도 아니었고 찰나에 일어난 무질서였다. 작은 행동 하나가 큰 흐름을 만들 수 있다. 무질서가 퍼지듯 질서와 배려도 전염된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는 대신 닦아내고 정돈을 시작하는 것, 지금 우리 주변에 가장 필요한 법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종종 거대한 변화를 원하지만 정작 변화를 만들어내는 작은 행동의 본질을 간과하곤 한다. 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이 있다면 그림자를 본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게 같은 행동을 하게 되고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대화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점점 그 공간은 질서를 갖춘 분위기로 변해가는 간다. 우리는 선순환의 시작점을 만드는 자리에 서야 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내딛는 한 걸음이 작은 변화가 되고 큰 바람을 일으킨다. 시간이 흐르면 긍정의 선택이 모여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 낼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더 박살내고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으려는 시작점에 누군가는 또 서 있게 될 것이니까. /작가 김경아

2025-03-03

소통의 풍경

채팅방 내게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있다. 시험을 끝낸 아이들의 표정이 안쓰러워 밥을 사 주겠다고 했다. 식당에 6명이 모였다. 메뉴를 정하려고 하는데 음성적 언어가 무음 상태다. 정확히 말하면 목소리는 고요하고 손가락이 바빠졌다. 나의 휴대 전화가 진동을 했다. 아이들과 함께 단체 채팅방에 초대되었고 그 방에는 주문할 메뉴가 나열되어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 낯선 메뉴 선택을 선택한 아이들의 소통 방식이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메뉴판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며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모두가 한 공간에 붙어 앉아 있는데, 굳이 채팅으로 주문해야 할까. 잠시 멈칫하는 사이 아이들은 마치 처음이 아닌 듯 자연스럽게 화면 속에서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문득 생각해 본다. 내가 이 아이들만 했을 때의 풍경을 소환해 보면 예전엔 메뉴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지갑도 늘 얇아서 메뉴판이 굳이 필요 없기도 했다. 혹이라도 누군가 좋아하는 메뉴를 말하면 또 다른 아이들이 반응하며 이야기가 이어졌고 그 밥상머리에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깔깔거림과 맞장구가 곁들여져 풍경이 완성되곤 했다. 지금은 화면 속에서만 이야기하고 소리는 없고 이모티콘만이 엉덩이를 흔들며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월이 변했고 문화가 변했으니 어쩌면 이들에게 우리들의 이야기가 꼰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들만의 소통방식인 것을. 우리 세대는 대화 속에서 눈빛과 표정을 읽었지만 아이들은 채팅 속에서 미묘한 텍스트의 뉘앙스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이 신비로웠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단절이라 하겠으나 이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일 수 있을테니 우리의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여전히 궁금했다. 화면 속 말풍선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무엇인지. 그저 조용한 주문 목록을 공유하고 있을 뿐인지.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로를 보며 주문을 해 보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다른 문화를 접하는 듯 어색해했다. 한 아이가 용기를 내어 피식 웃으며 메뉴판을 집어들고 말했다. “우리 하나씩 말해 보자. 난 떡볶이” 다른 아이들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나는 김밥” “우와 이렇게 주문하니 진짜 주문하는 기분이 나요.” 아이들의 얼굴에 활기가 돌았다. 메뉴를 정하는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었고 작은 농담도 오갔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대화의 리듬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김경아 작가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이어갔다. 학교 이야기, 좋아하는 가수, 주말에 있었던 소소한 일상, 휴대전화 화면이 아닌 우리 앞의 식탁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화면이 되어 소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면 한 주문이 마중물이 되어 아이들의 수다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음성으로 주고받는 말 속에만 감정이 존재할까. 채팅방 속 이모티콘의 열열한 움직임 속에도 감정의 무게가 존재하는 걸까. 아이들이 나눈 눈빛처럼 말보다 더 깊이 전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 틈에서 옛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함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밖으로 나오니 저녁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휴대전화를 잊은듯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와 노을 예쁘다.” 모두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로의 얼굴과 같은 하늘을 공유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화면으로 대화하는 것이 아닌, 같은 자리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였다. 아이들이 저녁노을처럼 따뜻한 오늘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걸으며 뒤를 돌아본다. 아이들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저녁 공기 속에서 하늘과 바람과 나무를 타고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울림은 아이들 마음속 깊이 스며들 것이다. /김경아 작가

2025-02-24

당김음

세상은 늘 일정한 질서 속에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높은 곳에 있던 물이 아래로 흘러가고 낮은 곳에 고여 있던 물이 증발해 다시 하늘로 올라가듯, 자연의 순환 속에는 끊임없는 위치의 이동이 있다. 땅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조차도 계절에 따라 잎을 떨구고, 새로운 가지를 뻗으며 끊임없이 변한다. 우리는 익숙한 자리를 영원할 것이라 믿지만 세상의 모든 위치는 바뀌고 흐름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암묵적으로 정해진 지위와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한때는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던 사람이 어느 순간 세상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흔히 ‘성공’과 ‘평범’을 구분하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유동적이다. 음악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다. 당김음은 원래 있어야 할 박자를 벗어나 예상보다 앞서거나 뒤로 밀려난다. 순간적으로 리듬이 어긋난 듯 보이지만 그 변주가 있기에 음악은 더 풍부한 은유를 만들어 낸다. 규칙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조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탈선이 곡을 더 생동감 있게 만든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졸업한 지 꽤 시간이 흘러서인지 친구들의 얼굴에는 그때와는 다른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금세 그 시절로 돌아가 건배를 하며 유치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김음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낯설었다. 다음 달에 있을 동창회 행사를 앞두고 그 시절 공부를 제일 못했던 친구가 유명한 사업가가 되어 기부금을 척척 내고 있었다. “올해만 해도 몇 백만원은 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반면 공부를 제일 잘했던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다. 학생 때 우리가 부러워하던 ‘성공한 직장인’이었다. 사회적으로 보면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그는 “와이프 눈치 보여서 기부는 힘들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학생 때 우리는 성적이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할 것처럼 생각했다. 공부를 잘하면 성공하고, 못하면 힘든 삶을 살 거라고 믿었다. 물론 어른들의 경험적인 삶에 비추어 보면 맞는 말일 수는 있지만 현실은 조금 달랐다. 어떤 친구는 예상대로 정박을 따라갔고, 어떤 친구는 엇박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떤 친구들은 아예 박자를 바꿔가며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김경아 작가 어쩌면 인생이란 단순한 4분의 4박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정해진 박자에 맞춰 사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당김음처럼 예기치 않는 흐름이 삶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가 사업가가 된 것도, 공부를 잘하던 친구가 월급을 받으며 사는 것도 결국은 각자의 박자대로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음악을 할 때 리듬을 타는 감각을 좋아했다. 일정한 박자 위에서 튀어나오는 당김음은 연주에 긴장감을 주고 곡의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규칙적인 비트 속에서도 변주를 만들어 흐름을 깨뜨리는 순간 엇박이 정박이 되는 것이다. 중년이 된 지금은 음악이 아닌 글을 쓰고 있지만 내 삶의 리듬은 여전히 당김음처럼 흘러간다. 예측했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을 때 마디마디를 연주하듯 글을 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흐름 속에서도 나만의 박자로 살아가는 것, 박자가 어긋날 때조차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음악일지도 모른다. 동창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자동차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안에도 어김없이 당김음이 섞여 있다. 박자가 예상과 다르게 흐를 때 우리는 놀라고 어색해하지만 그 당김음이 음악을 완성 시킨다. 살며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당김음이 만들어 내는 리듬을 즐기며 나만의 박자로 걸어가 보기로 한다. /김경아 작가

2025-02-17

퍼즐

우리는 저마다의 조각을 손에 쥐고 살아간다. 어떤 조각은 금세 자리를 찾아가지만 어떤 조각은 어디에 끼워야 할지 몰라 한참을 헤매기도 한다. 때때로 맞지 않는 조각을 억지로 끼워 넣으려 하다가 뒤엉켜 버리는 순간도 있다. 결국 모든 조각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음을 자각한다. 어린 시절 색색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가 하나둘 맞춰지며 선명한 그림이 되어가는 퍼즐 맞추기를 좋아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퍼즐 한 조각을 들고 침침해져 가는 눈으로 끼워넣고 있을 때가 많다. 어린 시절 단순한 놀이처럼 여겼던 퍼즐이 이제는 삶의 은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조각이 흩어진 채 시작되지만 차근차근 맞춰 가다 보면 선명한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다. 삶의 조각들은 내가 원하는 순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날은 순조로웠고 계획했던 일들이 잘 진행되어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느낀 순간들도 있었지만 애써 끼워 넣은 조각이 어긋나고 방향을 잘못 잡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었다. 내 삶의 조각은 언제나 하나가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맡아야 할 가장의 자리에 엄마가 있었고 집 안의 엄마 자리는 늘 부재중이었다. 기형도 시인의 ‘엄마 생각’이라는 시에 나오는 시구처럼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난 늘 엄마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하루를 보냈다. 하교하는 길에 소낙비가 내려도 내게 우산을 가져다주는 보호자는 없었다. 내 삶의 퍼즐은 완성되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 빈 공간이 못 견디게 신경 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조각 하나가 없는 모습 그대로가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완벽할 필요는 없었고, 때로는 빠진 조각 하나의 이야기로 의미가 짙어지기도 했다. 빠진 조각을 찾기 위해 나의 여정은 더 단단해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사라진 채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조각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는 인내하는 법을 배웠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익혔다. 때로는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를 찾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장애물 앞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단순히 조각 하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찾기 위해 걸어온 모든 과정 속에서 자신이 성장해 갔던 것은 아닐까. 김경아 작가 누군가에 기대어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스스로 답을 찾아내고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갔다. 미완의 조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그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어 가기 위해 뾰족한 부분은 깎아내고, 네모진 부분은 둥글게 다듬으며 점점 독립적인 자아로 성장했다. 어쩌면 퍼즐은 처음부터 미완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든 조각이 완벽하게 맞춰져야만 그림이 완성된다고 믿지만 사실 인생이라는 퍼즐에는 처음부터 빈 공간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된다. 빈틈이 있다고 해서 그 그림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오히려 그 여백이 우리를 더 성장하게 만들고 새로운 조각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것을. 결국 중요한 것은 모든 조각이 다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을 배우고 의미 있는 한 조각을 발견하는가일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퍼즐판을 바라본다. 몇몇 조각은 이미 제자리를 찾아가 또렷한 그림을 이루었지만 아직 맞춰지지 않은 빈 공간들을 끝까지 다 맞출 수 있을까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 빈자리조차 하나의 계단임을 안다. 언젠가 알맞은 조각들이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고 설령 몇 개의 조각이 끝내 남더라도 그것이 곧 나만의 그림으로 남을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조용히 다음 조각을 맞출 순간을 기다린다. /김경아 작가

2025-02-10

풍금

소리는 잠자는 풍경을 깨운다. 옛 노래를 들으면 세포들이 서서히 돌기를 세운다. 그것은 나를 추억이라는 간이역으로 데려간다. 과거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접점, 그 플랫폼에 내리면 유년 시절에서 출발한 열차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 풍금이 있네.”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폐교가 된 모교를 정리하다가 풍금 하나를 발견했단다. 풍금? 순간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음표들이 술렁거렸다. 잠시 통화하는 동안 마음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 운동장에 들어섰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운동장에는 손질 안 된 잡풀들이 무성했다. 이순신 장군의 긴 칼은 반 토막이 나 있고 비바람에 살이 튼 폐타이어는 모래 군데군데 힘없이 박혀 있다. 그네는 무료함에 지쳤는지 저 혼자 바람에 흔들린다. 녹슬고 망가진 폐허 속에서도 담 모퉁이를 따라 들국화는 방긋 피어 나를 반겼다. 문짝이 사라진 교실 입구에는 2학년 2반이라는 팻말이 걸려있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짝 잃은 실내화, 아이들을 긴장 시켰을 회초리와 교재, 검정이 내려앉은 부러진 분필이 어지러이 나뒹굴었다. 산산조각이 나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유리와 잡다한 것들이 흩어져 교실은 을씨년스러웠다. 다 떠나고 홀로 남아 무섭다는 듯 풍금이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풍금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이들이 붙어 이 반 저 반으로 옮겨 다니던 자신의 인기를 잊은 듯 조용하다. 오랜 시간 자신의 이름은 물론 목소리조차 잊었을 그것. 풍금의 뚜껑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열었다. 두려움을 토해내듯 뿌연 울음을 쏟아냈다. 손 때 묻은 건반 위에 내 손을 포갰다. 검은 건반, 하얀 건반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자 잠자던 음표들이 하나씩 깨어났다. 음표들은 도돌이표를 돌아 어린 시절로 날아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총각 선생님은 인기가 좋았다. 축구도 잘 하고 여러 과목도 잘 가르쳤다. 그런데 음악 시간이면 나에게 건반을 맡겼다. 선생님은 풍금을 켜지는 못했던 것이다. 풍금 의자에 앉으면 내가 선생님이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다. 발판을 있는 힘껏 꾹꾹 밟았다. 선율이 교실에 가득 퍼지면서 70명의 아이들은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반주가 멈추면 아이들의 노래 소리도 멈추고 반주가 시작되면 노래 소리는 풍금의 선율을 타고 느티나무를 돌아 담장을 넘었다. 나는 음악 시간마다 탈피를 끝낸 나비처럼 날개가 돋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성악을 전공하며 이곳저곳에 초청을 받아 노래를 불렀다. 졸업 후에는 지역합창단원으로도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숨표에서 숨을 고르고 쉼표에서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탓일까. 가을비가 내리던 아침,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큰 돌이 박힌 듯 목이 갑갑했다. 일주일을 버티다 병원에 갔다. “노래는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경아 작가 성대를 잘라 냈다. 목소리가 갇히자 마음의 문도 조금씩 닫혀갔다. 모든 것들이 그늘져 보였다. 뻐꾸기 울고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음침하게 들렸다. 합창단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돌아서는 나를 배웅 하는 건 커튼이 내려 온 텅 빈 무대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공연장을 찾았다. 구석진 객석에 숨어 앉았다. 막이 열리고 합창단원들은 앞줄부터 무대를 채웠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첫 곡이 울렸다. 동료들의 목소리가 다 모인 자리에 내 목소리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래책을 끄집어냈다. 성냥을 그었다. 그 후 오래도록 음악과는 결별했다. 풍금을 집으로 옮겼다. 반질반질 닦았다. 건반 하나하나에 잠자는 소리를 깨우고 싶었다. 다리를 모으고 발판 위에 발을 올렸다. 페달을 밟으며 건반을 눌렀다. 소리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풍금 소리에 맞춰 노래 한 곡을 불렀다. 폐허 속에서도 꽃이 피듯 내 마음도 환해졌다. 풍금은 내가 잃어버린 소리를 15년 만에 찾게 해 주었다. 집안 가득 내 마음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김경아 작가

2025-02-03

폐지

김경아 작가 태풍경보가 내렸다. 비바람이 다짜고짜 해송의 멱살을 흔들어 댄다. 해송은 흔들리면서 힘겹게 버틴다. 수평선 너머에서 시커먼 너울들이 거침없이 다가온다. 오늘 밤이면 방파제를 훌쩍 뛰어넘은 파도가 배들을 다 삼켜버리겠다. 바닷가로 이사 온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다. 포구는 전쟁 전야처럼 긴장감이 가득하다. 밀려올 파도에 대비하는 뱃사람들의 몸짓이 분주하다. 배를 계류하기 위해 위치를 옮기고 배마다 육상 비트에 홋줄을 건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배와 배가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밧줄로 팽팽히 묶어 스크럼을 짠다. 풍랑이 몰아치면 줄은 배들이 서로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홋줄은 굵은 밧줄이다. 성인 남자의 팔뚝만큼 두껍고 길이도 길다. 작은 배는 혼자서도 줄을 걸 수 있지만 큰 배는 어림도 없다. 그러므로 윈치라는 기계를 이용하여 홋줄을 당긴다. 홋줄에 묶이면 배는 고정이 된다. 누군가가 풀어주지 않으면 배는 아무리 요동쳐도 바다로 떠나지 못한다. 더 넓은 바다로 떠나야 할 엄마는 집에 묶여버렸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계는 외할머니가 떠맡았고 외할머니가 생선을 팔러 나가면 집안일은 모두 엄마가 떠맡았다. 밤이 이슥해지면 잠투정하는 동생들을 다독거리느라 토막잠을 잤다.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외할머니는 엄마를 시집보냈다. 시집은 친정보다 형편이 조금 나아서 춘궁기에도 배는 곯지 않았고 가끔 웃을 일도 생겼다. 그러나 아버지가 폐결핵에 걸리면서 엄마의 삶은 또 발목이 잡혀 버렸다. 아버지의 병은 외할머니에게 쓰나미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일만 시키다 어렵사리 시집보냈는데, 또 병 치다꺼리라니, 딸에게 당신의 삶을 고스란히 이어주었다고 생각한 할머니는 깊은 시름에 들었다. 마음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던지 할머니는 정신줄까지 모조리 놓아 버렸다. 그때부터 할머니의 삶은 항해가 아니라 표류였다. 할머니는 밤이면 귀신이 보인다고 울었다. 자다 말고 쫓아간 엄마에게 할머니는 매질을 했다. 심한 욕설도 내뱉었다. 가족의 생계도 고스란히 엄마에게 맡겨졌다. 종일 생선과 씨름하느라 몸에는 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집안 곳곳에 일이 널브러져 있었다. 방으로 부엌으로 빨래터로 분주히 몸을 놀리다 보면 밤이 이슥해졌다. 서른도 안 된 엄마의 고운 손은 점점 지문이 닳고 닳아 거칠고 투박해졌다. 엄마를 옭아매는 줄은 하나가 아니었다. 깜깜한 골목길을 들어서면 울고 있는 자식들, 뼈만 앙상히 남은 채 피를 토하며 기침만 해대는 남편, 벽이며 바닥이며 마루며 온 집안을 배설물로 칠하는 할머니, 발목, 허리, 손목에 줄이 매어져 있었다. 엄마도 꽃이 피는 봄날이면 치맛자락 펄럭이며 꽃구경도 가고 싶었고 지천이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가을이면 생선 좌판 걷고 단풍을 보러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하루 놀고 나면 내일 끼니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이어지는 줄은 동아줄보다 질겼다.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는 줄이었다.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줄을 끊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겠지만, 그렇다고 인연의 줄까지 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며느리라는 줄은 경우에 따라 끊을 수 있지만 자식과 연결된 줄은 누구도 끊을 수 없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먼 길로 떠나셨다. 엄마를 옭아맨 홋줄이 하나씩 끊어지면서 엄마는 자유를 조금이나마 찾았다. 그러나 꽃다운 나날이 이울어버린 뒤였다. 게다가 자식들을 더 보듬어야 했다. 엄마는 더 넓은 바다로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항구가 되었다. 제 마음대로 움직였던 몸의 지체 하나하나가 또 발을 묶었다. 자식들이 성장해 하나씩 항구를 떠났다. 그렇다고 엄마는 쉬지 않는다. 집을 떠난 자식들이 가끔 돌아와 쉬었다 갈 때 바리바리 내어준다. 밥을 먹고 돌아서도 ‘밥 먹을래’하고 묻는다. 인연의 끈이 손주까지 이어져 챙길 입이 많아졌다. 그래도 그것을 천륜의 줄이라 여기고 늘 몸을 놀리지 않는다. 엄마와 나는 탯줄로 이어졌다. 뱃속에서 나와 탯줄이 끊어지면서 핏줄이 되고 그때부터 생긴 인연의 줄이 엄마와 나를 잇고 있다. 엄마라는 항구를 떠난 지 오래지만, 엄마는 이제 휴대폰을 통해 문자를 보내온다. 밥 묵었나, 아픈 데 없나. 엄마는 스스로 자식과 홋줄을 묶는다. / 작가

2025-01-20

도돌이표

도돌이표.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풍경이 있다.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적힌 결심, 체중계 앞에서의 고요한 다짐, 그리고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 마지막이라고 외치며 먹는 피자 한 조각, 나의 다이어트는 매년 새해의 단골 레퍼토리다. 이 다짐은 마치 악보 위의 도돌이표처럼 늘 같은 지점으로 돌아간다. 시작과 끝이 반복되는 이 리듬 속에서 나는 올해도 다시 한 번 다이어트를 새해 목표로 삼아 본다. 스스로에게 체면을 건다. 다이어트는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행위가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을 새롭게 정돈하는 과정이고 불필요한 일정 부분을 줄여 건강을 되찾는 일이니까 성공할 수 있다라고 자신에게 체면을 건다. 그러나 매번 도돌이표를 찍는 음악처럼 같은 지점으로 돌아간다. 처음엔 열정적으로 식단을 관리하고 운동도 빠지지 않고 하지만 어느새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라는 나른한 핑계가 나를 휘감는다. 결국 또다시 목표에서 멀어진 나를 발견하며 자책하곤 한다. 음악에서의 도돌이표는 단순히 끝없는 반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돌아가 더 풍성한 연주를 이어가는 기회를 준다. 새해 다짐한 다이어트도 좀 더 성숙한 방식으로 이전보다 조금 더 꾸준한 노력으로 나를 다듬어 가고 나의 건강과 더불어 일상이 더 풍부해지길 바란다. 새해 목표를 세우며 나의 작은 변화를 떠올린다. 화려한 계획 대신 나만의 소소한 도돌이표를 그려 나가는 것이다. 매일 조금 더 걷고, 꾸준히 물도 마시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보다는 계단을 이용하고, 공복 시간을 더 늘려가며 소소한 습관이 도돌이표처럼 돌아가는 나만의 악보들을 그려가는 것이다. 어쩌면 도돌이표 같은 다이어트 결심은 실패가 아니라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반일지도 모른다. 올해도 나는 체중계 위에서 숫자에 연연하기보다는 매일의 작은 성취를 기록하며 내 몸과 마음을 이해해 가는 여행을 떠나려 한다. 도돌이표를 찍는 음악이 결국 아름다운 멜로디를 완성하듯, 나의 반복되는 다짐도 올해는 나만의 리듬을 완성해 가리라. 완벽한 그림을 그리며 시작해 보지만 늘 익숙한 현실의 무게에 눌려 흐지부지되기 일쑤다. 시작은 화려하지만 결국 한 해의 끝자락에선 같은 자리로 돌아와‘다시 시작해야지’라는 다짐으로 반복한다. 하지만 실패라는 프레임을 씌우기보다는 인간의 본능적인 리듬이 또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도돌이표가 반복을 의미하듯 저마다의 다짐은 우리 삶의 연습곡 같은 것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며 또다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성장하다 보면 우리 삶은 한 편의 소나타가 완성되어 가지 않을까. 김경아 작가 비단 다이어트뿐일까. 우리의 삶도 도돌이표가 반복되는 악보같다. 한 번 지나온 구간을 다시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같은 멜로디가 끊임없이 이어질 때도 있는 것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돌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돌아갈지라도 그 안에서 다시 호흡하고 숨을 불어 넣고 새로운 마디를 찾아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멜로디가 익숙하다고 누가 시시하다고 말할 것인가. 되풀이된다고 누가 그 가치를 폄하할 것인가. 도돌이표는 끝이 아니라 연주의 일부분이다. 다시 도돌이표로 돌아가 결심한다. 멈추지 않고 나의 다이어트를 이어갈 것이다. 내 삶의 연주를 이어갈 것이다. 결국 그 열심이 모여 나만의 인생곡이 완성해 가기 때문이리라. 운동화 끈을 다시 묶는다. 느슨해지거나 다시 풀려도 괜찮다. 돌아가더라도 또 다시 매듭을 묶고 한 걸음 더 내딛으면 된다. 도돌이표가 있는 삶,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무한 반복 속에서 또 다음 마디를 연주할 준비를 한다. 내 삶의 선율은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현재진행형이다. /김경아 작가

2025-01-13

폐지

먼지를 뒤집어쓴 덮개를 걷는다. 헌책이 와르르 무너진다. 읽고는 쟁여놓은 책들이다. 해묵은 것들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라면 상자에 책을 담았다. 네 상자 째 들고 나갔을 때, 마침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가 오고 있었다. 키가 자그마한 할아버지는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다. 하루는 밀짚모자를 쓰고 또 하루는 꽃이 달린 여자 모자를 썼다. 모자가 자주 바뀌어서 동네 사람들은 모자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책 더미를 보며 잇몸을 가득 드러냈다. 오늘은 횡재수가 들었다며 수레에 실린 짐들을 밀어내고 빈자리를 만들었다. 내가 거들려 하자 할아버지는 지저분해진다며 만류했다. 마지막 상자를 들고 나가자 할아버지가 상자 밑에 깔린 신문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새댁, 참기름 짰어? 신문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네” 참기름? 그럴 리가 없었다. 고소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엄마는 비싼 참기름은 아들에게, 싼 들기름은 딸인 나에게 주었다. 마음이 바뀌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의 편애는 눈에 훤히 보였다. 어쩌다 내가 상을 받아 와도 ‘우리 아들이 받아야 하는데’하며 속을 드러냈다. 내 아이가 전교 1등을 해도 ‘친손주가 잘해야 하는데’ 하며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쏟아냈다. 엄마의 지갑 속에는 오빠네 가족들의 사진만 환하게 웃고 있다. 오빠에겐 늘 새 밥에 금방 한 반찬을 차려주지만 내가 가면 ‘어제 먹던 돈가스 있는데 데워 먹을래’ 하며 식어빠진 말을 던진다. 부리나케 들어와 싱크대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놓인 두 개의 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병뚜껑을 여니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웃음이 실실 났다. 엄마의 실수가 고소해서다.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았다. 실수일까, 진심일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갑자기 참기름이 먹고 싶었다. 양푼에 밥통에 있는 밥을 모두 퍼 담았다. 열무를 꺼내어 넣고 김치도 잘게 썰고 계란 프라이도 부치고 김 가루를 뿌렸다.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었다. 꼬신내가 숲의 향기처럼 기분 좋게 내 몸에 먼저 닿았다. 그릇을 덮고 수저를 두 개 챙겨 재활용품 수집장으로 내려갔다. 김경아 작가 할아버지는 만선이 된 리어카를 끈으로 묶고 있었다. 할아버지 좀 쉬었다 일하라고 엄마가 준 참기름으로 밥을 비벼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이내 묶었던 끈을 풀고는 신문지를 꺼냈다. 겹겹이 포개어 자리를 두 개 만들고 손바닥으로 탁탁 치니 어느새 평평해졌다. 함께 밥을 먹긴 처음이었다. 나는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밥을 밀어 넣으며 아들만 챙기는 엄마에게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꺼내 놓았다. 구석구석 묵은 감정들이 하나씩 실체를 드러냈다. 당신도 어머니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할아버지는 여자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했다. 모(母)는 어미고 자(子)는 아들이므로 모자를 쓰면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참기름이면 어떻고 들기름이면 또 어떤가. 손수 짜서 보내주는 엄마가 있는 새댁이 부럽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숟가락질만 했다. 설움도 서운함도 함께 담아 비벼 먹는데 갑자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나는 몸을 돌렸다. 눈물이 났다. 엄마가 원하는 ‘착한 딸’로 살아온 지난 감정들이 빛바랜 스냅 사진 속에 들어 있는 끝없는 이야기처럼 불쑥 올라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반복될 감정의 멍에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 비워내고 지친 마음이 들어가 쉴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늘 참기름 실컷 먹었으니 이제 앙금은 리어카에 하나도 남김없이 다 내려놓아요. 고물상에 가서 폐지도 팔고 새댁 묵은 감정까지 팔고 오지요.” 할아버지는 몸을 일으켰다. 내게 환한 웃음을 보이고는 다시 리어카를 끌었다. 내 마음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지만 내 묵은 감정까지 실은 할아버지의 리어카는 무거워보였다. 할아버지의 리어카가 보이지 않고서야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김경아 작가

2025-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