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아무렇지 않게 밀고 나가던 문 하나가, 이토록 높은 벽이 될 줄은 몰랐다. 최근 다리 골절로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게 된 뒤 나는 ‘통행 약자’라는 낯선 문턱에 서게 되었다. 세상을 걷는 나의 발걸음만이 느리게 변했을 뿐인데 세상은 그 느림을 참아주지 않았다.
며칠 전 한 건물의 문 앞에서였다. 문을 열면 닫히고, 한 걸음 나아가면 또 닫히는 문의 냉정함 속에서 나는 몇 번이고 목발을 짚은 팔힘과 발끝으로 균형을 잡느라 허우적거렸다. 그때 마주친 여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도움의 손길 하나 내밀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문보다 무겁게 내 앞을 가로막았고, 나는 어색한 미소로 상황을 넘겼다. 도시 문은 닫히는 속도보다 사람 마음이 닫히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걸 깨달았다.
또 다른 날, 교재와 짐을 옮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남편이 그 일을 도와주었지만 그날은 남편이 오기 전에 잠시 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손에 짐을 들어 맞지 않은 균형으로 목발을 짚고 낑낑대며 짐을 나르는 근처에 나를 바라보던 중년의 부부가 있었다. 그들의 눈은 분명히 나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 속에는 어떤 결심도 피어나지 않았다. “도와 드릴까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을텐데, 그 말은 끝내 공기 중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꼭 도와주길 바랐던 것도 아니었고 나는 시간이 지나면 곧 회복될 사람이지만 그 짧은 순간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컸다. 세상에는 아직도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문이 닫혀 있음을 깨닫게 했다.
나 또한 그 문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누군가의 불편함을 보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의 타이트함을 이유로 모른 체한 적은 없었을까. 이 사회의 냉담함은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씩 무뎌진 나의 마음과 우리 모두의 문제는 아닐지. 우리의 일상은 효율과 속도에 길들여져 타인의 느림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정서적 부재가 사회의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은 기술이나 제도의 결핍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이 약해진 탓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닫혀 있던 것은 문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수업을 하기 위해 만나는 아이들은 나의 목발을 대신 챙겨주었고 물을 떠다 주며 “선생님 괜찮아요?”하고 물어주기도 했다. 순수한 배려는 계산도, 시선도 없었다. 그저 어른들에게 배운대로, 학교에서 배운대로 불편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기어이 짐도 들어주며 마냥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미소가 따뜻했다. 그들은 세상의 인정(人情)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가끔 있지만 정작 어두운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우리 어른들’이 아닐까.
그래도 세상이 모두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목발을 짚고 택시를 탔을 때 기사님은 굳이 내려서 문을 열어 주고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서성일 때 한 중년의 남성이 아무 말 없이 문을 잡고 서 있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들의 행동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용한 배려 속에는 언어보다 깊은 인간의 온기가 배어 있었다.
세상은 무심과 냉담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어딘가에서 여전히 남의 불편함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가 사회를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약자의 눈으로 볼 때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절망 대신 희망을 본다. 무심함이 전염되듯, 따뜻함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다른 이의 마음으로 옮겨 다닐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곧 깁스를 풀고 다시 두 발로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험은 나에게도 값진 경험이었다. 세상은 늘 건강한 보행자의 속도로 돌아가지만 그 사이에는 걸음이 느린 이들의 숨결이 있다. 문 하나를 열어주는 손길, 그 사소한 배려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그 문 앞에서 멈춰 선 사람으로 살 것인가. 혹은 문을 잡아주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제 나는 그 질문을 나의 삶 한가운데에 세워두려 한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