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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결을 돌아보며

등록일 2025-11-04 18:42 게재일 2025-11-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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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이 있다. 그것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어떤 관계의 결은 매끄럽고 단단하게 이어지지만 어떤 결은 쉽게 틀어지고 거칠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결의 질감을 세심히 느끼며 살아왔다. 마음의 거리를 재고 온도를 가늠하며 서로의 결이 상하지 않도록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관계를 다듬어왔다. 나에게 관계란 늘 섬세한 조율의 예술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섬세한 균형이 무너졌다. 내가 서로를 알게 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나는 각각과 다른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왔고 우리 세 사람의 관계가 유연하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중 한 사람이 나와 의논 없이 다른 한 사람에게 과도한 선물을 건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듯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잠식되었다. 마치 조용히 흘러가던 물 위에 돌멩이가 던져진 듯 파문이 일어났고 그 진동은 결국 나의 마음에까지 닿았다.

나는 언제나 ‘관계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이라 자부했다. 주어야 할 만큼 주고 감사를 표현해야 할 만큼 하며 감정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규율이 통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돌출된 행동과 미성숙한 흐름이 관계의 결을 어긋나게 만들었고 나는 그 틈을 매만지려 애쓰다가 점점 지쳐갔다. 마치 세 사람의 관계를 억지로 맞추려는 장인처럼 나는 관계의 결 사이를 계속 문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다듬어도 이미 나버린 미세한 금은 메우기가 어려웠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율자’의 위치보다는 나의 기준을 자꾸 흐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만의 잣대가 있는데도 상대의 방식을 맞춰주려 했다. 무게가 기울면 내가 더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원만해질 줄 알았지만 그것은 조율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그 흔들림은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로 자꾸 흘러갔다.

관계는 늘 주고받음의 균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균형이 무너질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잃는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상황이 어긋나지 않게, 모든 흐름이 부드럽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나는 자 자신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감정의 결은 뒤로 밀려나고 타인의 기준이 나를 차지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마음 한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쌓여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라기보다는 나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피로였다.

관계의 온도를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체온을 가지 존재이고 그 온도를 완전히 같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온도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단순한 진리를 최근에야 되새기게 된다. 가까워질수록 명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리가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경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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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처럼 쌓인 관계의 결. 

이제 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맞출까’보다 ‘어디까지 지킬까’를 먼저 생각해본다. 관계의 평온을 위해 무리하게 마음을 맞추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호의나 방식이 내 기준과 다르다면 그것을 불편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흔한 말이긴 하지만 다름으로 인정하려 한다. 관계의 진정한 성숙은 조율이 아니라 기준을 지키며 타인을 존중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밀착된 관계는 숨통을 죄고 너무 멀어진 관계는 온기를 잃는다. 그 중간 어딘가 결이 맞되 엇갈리지 않는 그 지점을 찾는 일, 그것이 성숙한 관계의 기술일 것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인간관계는 난로 같은 거리가 가장 알맞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두는 용기가 이 가을, 나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삶은 여전히 관계의 결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결들을 억지로 다듬지 않는다. 어긋난 결은 어긋난 대로 두고 그 틈새에 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허락한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더 단단해지고 더 나다워진다. 관계의 피로는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내 결을 다시 세워가는 일이 남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 전, 관계의 결을 다시 배워야 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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