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나를 누르고 있다. 7월의 태양은 사람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눌러 짓누른다. 그늘에 있어도 더웠고, 냉방이 잘 된 실내에 들어가도 더운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냉기가 피부를 덮어도 마음속까지 닿지 않으면 더위는 여전히 내 안에서 끓는다.
바쁜 일상 속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작년에 보고 올해는 처음이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식당 창가에 앉자 웃음소리 사이로 철썩이는 물빛이 가볍게 스며들었다. 반가움은 말보다 눈빛으로 먼저 전해졌고 잔잔한 바다와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람이 그 순간을 환하게 감싸 주었다.
식사가 나왔다. 접시의 색감과 감바스의 마늘 향이 테이블을 감쌌고 카프레제의 토마토는 싱그럽게 빛났다. 여름은 성난 소처럼 쨍쨍거렸지만 바다는 여전히 반짝였다. 수박 주스 잔에는 투명한 얼음이 천천히 녹고 우리의 마음도 청량함으로 채워졌다. 음식을 흘리며 먹어도, 우걱우걱 씹어 먹어도, 새우 껍질을 마구 까도 흠이 두렵지 않은 편안함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목적은 없었다. 그저 어디라도,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곳을 찾아 나섰다. 바닷바람을 기대하면서. 몽돌 해변에 도착하자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바다는 거짓말처럼 조용했고 바람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대듯 우리를 향해 한결같이 불어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몽돌 위에 누웠다. 각자의 온기와 각자의 무거움을 품은 채.
바닷가에 3명이 나란히 누워 “우리 가을에는 여행을 갈까?” “우리 팔찌 하나 맞출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물새의 깊은 속을 항구는 알까.’ 우리의 노래는 떼창으로 이어졌고 옛날 유행가에서 찬송가까지 이어졌다. 노래는 마치 얼음 조각처럼 하나하나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내 마음속에 있던 열기, 조급함, 서운함, 어쩌면 말 못한 외로움까지 서서히 녹였다.
바깥은 에어컨으로 시원해도 갱년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서 탈진할 때가 있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알았다. 내기 진짜로 필요로 했던 것은 낮은 온도의 공기가 아니라 ‘함께 있음’이라는 시원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방식으로 더위를 피하려고 애쓴다. 강한 냉방, 차가운 음료, 그늘, 물놀이. 하지만 정작 식혀야 하는 것은 마음이다. 짜증, 서운함, 조바심, 염려 같은 마음의 열은 기계로는 식지를 않는다. 그것은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독이는 ‘존재의 온기’로만 가능하다. 결국 우리를 진정으로 식히는 것은 찬바람이 아니라 묵묵히 옆에 앉아주는 누군가의 숨결이다. 마음을 식히는 바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곁에 머문 존재가 조용히 건네는 온기에서 비로소 분다. 온도를 낮추는 것은 기계지만 온도를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날의 노래와 바람, 친구들과의 떼창, 그리고 몽돌 위에 누운 시간이 나에겐 ‘마음의 에어컨’이었다. 세상이 너무 뜨거워서 달아오른 나를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한 냉기. 사람이 사람을 식혀주는 건 공기의 냉기보다 더 오랜 지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가끔 너무 더운 말들을 내뱉고, 너무 뜨거운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마음을 식혀줄 무언가를 갖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게 바다일 수도, 노래일 수도,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 혹은 무심코 들은 “괜찮아”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순간에 마음의 온도를 낮출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는 에어컨이 되어본 적은 있는지를.
여름은 계속된다. 기온도, 뉴스도, 삶도 뜨겁다. 몽돌 위에서 불렀던 노래처럼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곁에서 있어 주는 존재 하나가 마음의 온도를 내릴 수 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에어컨을 찾아내고 누군가의 에어컨이 되어주는 일, 그게 여름을 견디는 우리의 방식일지 모른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