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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쉼표가 없다

등록일 2025-07-08 18:37 게재일 2025-07-0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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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지휘를 부탁드립니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어느덧 손을 놓은 지 스무 해가 다 되어 간다. 악보를 보는 감각도, 박자를 가르는 손끝의 감성도 점점 퇴색되어 빛이 바랬다. 그런 나에게 찬양 지휘를 부탁한 사람은 교회 목사님이었다. 단 한 번의 부탁이었지만 그 말 한 마디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염려를 안겼다. 마치 먼지 쌓인 피아노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야 하는 손길처럼, 묻어두었던 나의 음악을 다시 끄집어내는 일이 남의 일처럼 낯설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사양했을텐데, 망설임의 긴 여운이 사양할 시간을 앗아갔다. 찬양곡 하나를 맡아 연습하고 무대에 올리기까지 내게 주어진 시간은 5일이었다. 오랜만에 심장이 또박또박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내 방식대로 정성껏 음원을 찾아듣고, 악보를 인쇄하고, 필요한 조표는 빨간 펜으로 그려 넣었다. 눈에 잘 띄게 박자를 나누고 헷갈릴 만한 쉼표는 두꺼운 선으로 표시했다. 삐뚤한 음표 하나에도 마음이 쓰여 또 다시 지우개로 지우며 화음을 그려 넣었다.

조심스레 골라낸 찬양 악보 위에 손으로 개사한 가사를 덧붙여 적었다. 서툴지만 정성껏 만든 내 악보를 옆에 있던 젊은 선생님에게 의견을 묻고 싶어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능숙하게 태블릿을 열어 단 몇 분 만에 깔끔한 디지털 악보로 바꾸어 주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악보처럼 완벽하고 세련되었다. 화면 위에 정렬된 음표들과 가사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름 세상의 흐름을 따라왔다고 생각했지만 기술 앞에서 나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변하지 않는 내 방식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나는 여전히 연필로 음표를 그리고, 지우개로 화음을 수정하며 시간을 들였다. 그 속에 나름의 애정과 고집이 있었지만 눈앞에서 펼쳐진 디지털 작업은 그 모든 과정을 단숨에 뛰어넘었다. 기술은 사람의 수고를 덜어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수고의 의미마저 잊게 만든다. 내가 쏟은 시간과 정성은 과연 오래된 것들일까. 아니면 사라져 가는 것들일까.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앞에서 나의 느린 손끝은 질문을 품는다. 나는 뒤처진 걸까. 아니면 그만큼 오래도록 남을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는 걸까.

나는 아직도 손글씨에 의존하고 프린터보다 펜을 먼저 찾는다. 모니터보다는 종이의 질감을 더 신뢰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 속도를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하다. 조금만 멈춰 서 있어도 세상은 너무 멀리 가 있다. 쉼표가 없는 악보처럼.

나는 생각했다. 익숙한 방법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것만 고집해서는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음악처럼 삶에도 새 음이 필요하고 때로는 전조가 필요하며 박자를 바꾸는 유연함이 필요하다는 걸. 기술을 배우는 일은 단지 도구를 익히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언어를 익히는 일임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배움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학교를 졸업하면 배움도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배움은 교실 밖에서 시작된다. 뒤처진다는 건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멈춘 상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른이 된 뒤부터 자꾸만 체면을 차리고 묻는 걸 두려워한다. “그 나이에 그것도 몰라요?”라는 말 한마디에 말문을 닫는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진짜 모른는 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쪽이다. 배우지 못해 뒤처지는 게 아니라 물을 용기를 잃어 점점 자신을 접어 두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배우겠다’는 마음은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과정이다. 나는 젊은 선생님 앞에서 낡은 방식이 틀린 것이 아님을 알았고 동시에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당위도 느꼈다. 배움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여전히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손으로 그린 악보를 다시 펼쳐본다. 삐뚤한 음표 사이사이에 내가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다. 젊은 선생님의 손끝에서 척척 나오는 기술을 보며 감탄한 뒤 나도 배워보겠다고 다짐했다.

배움에는 정해진 리듬이 없다. 누군가는 빠르게, 누군가는 느리게, 각자의 템포로 배운다. 중요한 건 끝내 쉼표를 찍지 않는 일이다. 배우는 사람은 계속 나아가는 사람이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은 여전히 젊은 사람이다. 나도 그 끝없는 악보 위를 다시 걸어가 보기로 한다. 쉼표 없이 흘러가는 이 악보 같은 세상에서 오늘 나는 새로운 박자를 하나 익혔다. 조금 더 느리지만, 나도 연주할 수 있다. 세상과 함께.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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