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부터 갱년기 증상이 시작되었다. 이따금 땀이 훅 끼치고 밤이면 이유 없이 잠이 달아났다. 그렇게 자꾸만 눈이 말똥말똥해지는 밤이 늘어나며 이러다 탈 나겠다 싶어 가끔씩 수면제를 찾게 되었다. 다행히 약의 도움으로 서너 시간은 단잠에 들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잠을 못 자는 날이 이어지자 낮에 운동을 시작했다.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면 밤에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처음엔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며칠 만에 땀도 나고 숨이 차오르자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덕분에 최근 며칠은 약 없이도 비교적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뭔가를 했다는 만족감, ‘오늘은 잘 수 있을거야’라는 기대감이 오히려 수면제보다 나은 약이 되어준 듯했다.
며칠 동안 잠이 잘 들어 이제는 약이 없어도 괜찮겠다 싶었던 밤에 다음 날 중요한 약속이 있어 빨리 잠이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 뒤척이기만 몇 시간이었다. 서랍을 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수면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 머리를 감으려는 찰나 약 봉투를 보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수면제가 아니었다. 그 약은 혈압약이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으로 부작용을 검색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탈 없이 푹 잔 내 몸이 그저 멀쩡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이걸 수면제라고 믿었으니 잔 거였네?”
이내 웃음이 났다. 아찔하면서도 신기했다. 진짜가 아니어도 진짜라고 믿었기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플라시보 효과’였다. 알약이 아니라 믿음이 효과를 만든 것이다. 의학적 효능이 없어도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병원에서도 가끔 쓰이는 이 원리를 나는 내 일상 속에서 실감한 셈이다. 그날 밤 내가 잠든 것은 약 때문이 아니라 ‘이제 잠이 들 거야’라는 믿음. 그것 하나가 나를 편안하게 눕혔고 나도 모르게 몸은 그 믿음을 따라갔다.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순간이 그런 믿음 하나로 바뀌는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도 이런 ‘심리의 약’이 참 많다. 내 친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고 했다. ‘이것도 지나간다. 다 괜찮아진다.’ 처음엔 허무맹랑해 보였지만 어느새 그 말이 친구의 삶을 붙드는 버팀목이 되었다. 믿고 바라보는 쪽으로 삶은 나아가게 되어 있다. 진짜 변화는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삶에서 플라시보 효과는 단지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진실로 믿느냐’에 따라 삶의 질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증거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설명되지 않는 불안과 고통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견디는 존재다. 그러니 어떤 말, 어떤 행동, 어떤 믿음이 실제로 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해 ‘살아낼 힘’을 얻는 것이다. 치유란 병의 완치가 아니라 그 병을 안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내적 수긍일 수 있다. 플라시보는 그 수긍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때로 거짓말 같은 희망을 붙들고서도 그 믿음 하나로 현실을 견디고 넘어간다.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생존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이후 내 서랍 속 빈 약 봉투를 가끔 들여다본다. 약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재웠다는 사실이 어딘가 뿌듯하다.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믿음일지도.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갱년기와 수면 장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화들 앞에서 마음이 약해질 때면 그날 밤을 떠올린다. 혈압약을 수면제로 믿고 스르르 잠든 어설픈 나의 착각이 되레 나를 위로한 밤. 삶은 때때로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이 된다.
플라시보 효과는 그저 의학적 현상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나를 믿는 마음 하나가 삶을 조금 더 부드럽고 단단하게 만든다. ‘괜찮아 잘 해낼 거야’라고 믿는 마음이 이미 반쯤은 이룬 셈이니 오늘도 내 마음에게 말을 걸어본다.
/작가 김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