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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등록일 2025-08-12 18:06 게재일 2025-08-1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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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올여름 내 몸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신호를 보냈다. 이유 없이 심장이 두근거리고 밤이면 눈꺼풀이 무거워져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숨이 가빠지는 순간마다 가슴속 어딘가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병원 진료를 받으니 의사는 ‘자율신경계 불균형’이라고 했다. 교감 신경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며 마치 경계 태세를 풀지 못하는 병사 같다고 설명했다. 평생 괜찮다며 달려오던 몸이 이제는 더는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은밀하지만 단호하게 경고한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내렸던 결정은 커피와의 이별이었다. 아침마다 주방에 들어서면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물줄기 위로 피어오르는 향기는 하루를 여는 기지개였다. 검은 물결 속에 흩어지는 갈색 거품을 바라보는 그 몇 초는, 나만의 고요한 의식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 의식을 중단해야 했다. 한 모금만 마셔도 심장이 두 배 속도로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마임드 콘트롤’을 해 보아도 자의적으로 조절이 되지 않았다. 의사도 커피는 안 되겠다고 했다. 오래된 친구를 문밖으로 내모는 것만큼 서글픔이 밀려왔다.

커피 없는 아침은 텅 비어 있었다. 몸은 불안했고 마음은 허전했다. 마트 진열대에 놓인 원두봉지들이 풍기는 향은 마치 나를 시험하는 유혹 같았다. 텀블러 속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를 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근질거렸다. 나의 커피 습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늘 바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기폭제였고 위로였다. 그것이 사라지자 몸뿐 아니라 마음에서도 금단현상이 찾아왔다.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커피만이 아니었다. 살아오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놓아왔다. 결혼 후 혼자만의 여행은 먼 꿈이 되었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책 한권 여유롭게 읽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좋아하던 피아노 건반을 만져본 지는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흐릿하다. 합창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러본지는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로 가물하다. 어느날 친구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듣다가 잊고 있었던 손끝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그 순간 깨달았다. 커피처럼, 삶은 나에게서 많은 것을 조금씩 떼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놓음의 이유는 다양했다. 커피를 놓은 건 건강을 위한 나의 결정이었지만 다른 많은 놓음들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상황이, 책임이, 혹은 나이 듦이 조용히 빼앗아 간 것들이었다. 피아노, 책, 느긋한 저녁 산책···. 그것들은 내 의지가 아닌 삶의 흐름에 휩쓸려 떠나간 것들이었다. 그 부재 앞에서 느끼는 허전함과 초조함은, 커피 금단이 주는 감정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금단은 불편하다. 몸과 마음이 저항하고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만 피어나는 가능성도 있다. 커피 대신 나는 허브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맛 같아 밋밋했지만 어느 순간 레몬밤과 케모마일 향이 은근히 스며드는 걸 느꼈다. 피아노 대신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오래된 나의 목소리를 다시 찾았다.

몸이 보내온 경고로 나는 커피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빈 자리는 빨리 다른 것으로 채워졌다. 여전히 커피향을 맡으면 가슴이 설레지만 나는 안다. 놓는 것이 반드시 잃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떤 금단은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고 오래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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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커피.

오늘도 나는 커피 잔 대신 따뜻한 허브차를 손에 쥔다. 향은 옅지만 그 옅음 속에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다. 창밖을 바라보면 잃어버린 것들이 남긴 빈자리 위로 부드러운 빛이 조용히 내려앉는다. 예전의 나는 그 빈자리를 애써 매우려 했고, 매우지 못하면 불안해했다. 하지만 이제는 비워진 자리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금단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웠다.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난 자리에서 우리는 그동안 지나쳐 온 마음의 결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때로는 그것이 상실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놓는다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내 안에서 커피의 자리는 허브차가, 피아노의 자리는 글이, 떠나간 시간의 자리는 다시 나를 만나는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언젠가 이마저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겠지만 그때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삶은 그렇게 끊임없이 놓고 다시 채우는 과정 속에서 이어진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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