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는 세상이 조용했다.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시간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때의 하루는 낮게 깔린 선율 같았다. 피아노의 도와 레 사이를 오가며 간간이 불협의 음이 섞여도 금세 사라지곤 했다. 나는 나의 음표에 맞춰 살아도 괜찮았다.
어느새 어른이 되어도 벌써 어른이 된 중년에 접어들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고 일정표는 빈칸이 없으면 불안할 정도로 꽉 차 있다. 손끝에는 처리해야 할 문서와 원고들이, 마음 한쪽에는 챙겨야 할 관계들이 쌓였다. 나의 하루는 점점 음량이 커졌다. 아침엔 휴대폰 알람으로, 점심엔 수업 알림으로, 저녁엔 문자 알림으로···. 세상은 나에게 쉬지 말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제는 음악의 볼륨을 줄이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어릴 땐 소리가 점점 커지는 음악을 듣는 일이 설렜다. 그건 무언가가 완성되어 간다는 신호였으니까. 음악에서 크레센도(crescendo)란 ‘점점 세게, 점점 커지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처음엔 낮게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힘이 더해지고 소리가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 단어에는 기대와 긴장, 생동감이 함께 깃들어 있다. 나는 늘 그 악상기호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간에도 점점 커져가며 하나의 절정에 다다르는 것이 마치 우리의 꿈이 커지고 포부가 커져가는 순간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크레센도는 다르다. 내 인생의 음량은 점점 커지는데 정작 내 마음의 여백은 점점 작아진다. 처음엔 잠시일 줄 알았다. 일이 많아도,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아도, 언젠가 다시 조용한 구간이 찾아오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의 악보엔 ‘디미누엔도(점점 작게)가 잘 없었다. 지휘자는 언제나 손을 들어 올리고 나는 그 손짓을 따라 힘껏, 있는 힘껏 소리를 내어야만 하는 구간이 너무 길었다.
가끔 나는 묻는다. 이 음악은 언제 끝나는 걸까. 언제쯤이면 쉼표를 얻을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나는 여전히 그 무게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의 기대를 감당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손길을 만나며 때로는 버겁고 때로는 울컥하면서도 나는 계속 나의 소리를 내고 있다. 그건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이 점점 커지는 소리에 휩쓸리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조화를 찾아내는 일일지도.
친구들은 늘 나에게 일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일을 많이 하냐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명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해야 해서’라는 말은 뭐가 초라해 보이고, ‘좋아서’라고 말하기에도 뭔가 진심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자발적 연주자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각자의 파트가 있고 그 파트는 서로 얽혀서 하나의 곡을 만든다. 내가 내 음을 멈추면 누군가의 멜로디가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 조금 지쳐도, 조금 흔들려도, 나의 악보를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크레센도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두의 삶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의 울음 속에서, 누군가는 회사의 불빛 속에서, 누군가는 늦은 밤 병실의 모니터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소리를 조금씩 키워내고 있었다. 이 커짐은 소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부르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 크레센도는 끝나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 음악은 자연스럽게 다음 악장으로 넘어갈 테니까. 잠시 조용해질 때, 그 여백 속에서 나는 다시 내 소리를 조율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음으로 울릴지도 모른다. 단단한 음은 세게 내는 소리가 아니라 오래 울릴 수 있는 소리일 것이다. 삶이 나를 흔들 때마다 나는 그 울림으로 다시 나를 지탱해 본다.
삶은 한 곡의 연주다. 누구도 리허설 없이 각자의 템포로, 각자의 악기로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모여 세상을 채운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커져가는 크레센도로. 우리 모두의 크레센도로.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