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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등록일 2025-09-30 18:12 게재일 2025-10-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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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호수공원을 거닐다 보면 잔잔한 물 위에 유유히 떠 있는 연꽃들 사이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레방아가 눈에 들어온다. 철썩이며 물을 퍼 올리는 소리도 없고, 강가처럼 세찬 물살도 없지만 호수공원의 물레방아는 고요한 물결 속에서 천천히, 그러나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풍경으로 지나치지만 그 안에는 묵묵히, 자기 일을 감당해내는 단단한 내공이 깃들어 있다.

물레방아는 한낱 장식물처럼 보일지 몰라도 여전히 그 본래의 쓰임을 잊지 않는다. 물이 주는 힘을 받아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는 순간, 나는 시간의 무게를 느낀다. 곡식을 빻아내던 지난날의 소임은 사라졌어도 그 반복의 움직임은 여전히 우리 삶과 겹쳐진다. 나의 하루 또한 다르지 않다. 같은 일, 같은 동작, 같은 장소, 같은 일과가 이어지지만 그 속에서 삶이 빚어지고 세월이 완성된다.

물레방아의 바퀴가 돌고 도는 동안 계절도 바뀌고 사람들의 얼굴도 변해간다. 한 번 돌 때마다 똑같아 보이지만 물은 언제나 새 물이고 풍경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나의 하루도 같은 자리를 지키는 듯해도 매일의 햇살과 바람이 다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늙고 조금씩 익어간다.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채워내는 원의 결이다. 물레방아는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그 사실을 조용히 들려준다. 반복의 무늬가 모여 삶의 무게를 지탱한다는 사실을 물레방아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레방아는 호수의 물결을 거스르지 않는다. 다만 흘러오는 물을 받아내어 제 몸을 돌리고 그 힘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이다. 불평하지 않고 억지로 앞서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물레방아의 가장 큰 지혜일지 모른다. 우리 삶 또한 그러하다. 바꿀 수 없는 환경을 원망하기보다 그 안에서 자기 길을 걸어갈 때 삶은 비로소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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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김경아 작가

가을이 성큼 다가온 길목에서 물레방아를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의 성급한 발걸음과는 달리 한결같은 그 움직임이 내 마음을 붙들어 놓는다. 성취와 잘하고 싶은 욕심만을 좇느라 쉼 없이 달리던 나의 질주가 잠시 멈춰 서고, 호수 위를 스치는 바람처럼 고요한 평온이 찾아온다. 삶은 반드시 직선으로 뻗어야만 빛나는 것이 아니다. 돌고 도는 원 안에서 고요히 제 몫을 감당하는 것 또한 존귀한 삶의 얼굴임을 가르쳐준다.

호수공원의 물레방아는 혼자가 아니다. 햇빛이 닿아야 반짝이고 물이 흘러야 움직이며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어울려야 하나의 풍경이 된다. 초록빛 연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을 만들고 그 사이사이 연꽃들이 고운 무늬를 더했다. 연못의 심장처럼 연밭과 어울려 반짝이며 톱니바퀴는 연밭과 어울려 하나의 풍경을 완성했다. 지나가는 바람과 새소리마저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결코 혼자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고립되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가족과 친구, 스쳐 지나가는 이웃의 따뜻한 인사 하나까지도 우리의 하루를 지탱해준다. 물레방아가 연밭과 햇빛, 바람, 웃음소리에 기대어 서 있듯 우리의 존재도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연도 삶도 풍경이 되고 의미가 되어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하루가 여백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나는 불평을 조금 줄여 보리라 다독여 본다. 세상은 늘 돌고 도는 물살 같아도 그 물살을 받아내는 물레방아처럼 묵묵히 나아가고 싶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구멍 난 삶의 일부가 채워지고 단단히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물레방아 앞에 서서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운동을 나오신 어르신들도 소풍을 나온 아이들도 주위를 돌며 포즈를 잡고 있다. 사람들의 발걸음과 이야기 소리가 어우러져 풍경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할 때 사람과 자연은 저절로 모여들고 의미도, 아름다움도 찾아온다는 둥글둥글한 삶의 법칙을 문득 깨닫는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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