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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의 안부

등록일 2025-10-12 14:26 게재일 2025-09-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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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아침에 창문을 열자 차가운 기운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잔열이 남아 도로 위를 달궈 놓았던 바람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뚜렷하게 결이 바뀐 공기 속에서 나는 하던 일들을 잠시 멈췄다. 길가의 가로수가 어느새 하나씩 물들어가고 있었다. 아파트 주위 들풀도 붉은빛을 품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순간은 늘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삶의 큰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그 바람이 좋아 모자만 쓰고 아파트 둘레길을 걸었다. 바람은 낯선 악보처럼 내 마음에 선율을 그려 넣었다. 가을의 향을 품고 내게 감긴 그 바람이 좋아 집 안으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가을바람은 단순히 계절을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 같았다. 문득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던 학창시절도 떠올랐고 바람을 타고 교문을 달려 나가던 여러 장면들도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미래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설렘을 품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다. 살아온 세월은 바람의 방향처럼 끊임없이 변했고, 그 변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가을바람은 다급히 흘러가는 발걸음을 붙들어 세운다. 잠시 멈추어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고개를 들어 구름의 흐름을 바라보라고, 바람은 그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산책길 옆 작은 벤치에 앉았다. 낯익은 풍경이었지만 바람은 그것을 전혀 다른 그림처럼 바꾸어 놓았다. 느티나무 잎새가 흔들리는 소리는 오래된 편지의 활자처럼 내 귀에 새겨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 어느 집에선가 들리는 바이올린 소리, 내 안에서 되살아나는 묵은 감정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가을바람은 안부처럼 다가온다. 무더운 여름을 잘 지냈는지, 마음은 무겁지 않은지, 스스로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바람의 물음 앞에서 나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가족을 돌보느라. 일에 쫓겨 사소한 근심에 사로잡히느라, 내 안의 목소리를 외면한 날이 많았다. 그러고 보면 계절의 바람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하는 가장 솔직한 거울인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바람이 내 어깨에 가만히 내려 앉았다. 위로처럼 느껴졌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오면서 잘 버텨냈으니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위로는 멀리 있지 않았다. 화려한 말이나 거창한 행동이 아니어도 계절의 바람 한 줄기면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 카페 앞 노란 국화가 눈에 들어왔다. 향기가 풍겼다. 바람은 향기를 데리고 다닌다. 삶에서 중요한 것들도 어쩌면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을지 모른다. 오래 머물지는 않지만 그 순간의 향기와 빛깔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사랑도, 추억도, 슬픔도 모두 바람처럼 다녀가지만, 다녀간 자리에 남는 흔적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집 앞에 다다르자 오후의 빛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햇살은 정오의 날카로움을 거두고 서쪽 하늘로 기울며 누런 금빛을 흘러내렸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마다 바람이 흔들어놓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가을바람은 여전히 곁을 맴돌며 내 결음을 가볍게 했다. 그 바람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바람은 흘러갔다. 흘러감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몸짓일 것이다. 오늘의 바람이 내일의 구름을 움직이고 다시 새로운 계절을 불러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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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의 안부. 

바람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 더 귀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야말로 마음에 오래 남는다. 바람은 흘러가지만 그 곁에 스친 향기와 서늘함은 내 안에서 겹겹의 결을 이루며 쌓인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의 삶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것이다.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도 잠시 머무는 순간에 따뜻한 기운을 건네준다. 가을바람은 오늘도 그렇게 덧없음 속에서 충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비로소 나는 나에게 안부를 묻는다. “너는 잘 지냈느냐.”그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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