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늘 걷는 자들의 속도에 맞춰 돌아간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발을 재촉하며 살아왔다. 지난 금요일, 평범한 계단 한 칸이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헛디딘 발목이 심하게 부어올랐고 시커먼 멍이 자리를 잡았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뼈에 금이 갔고 인대가 파열된 상태였다. 깁스를 하고 3주 동안은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계단 몇 칸, 문턱 하나, 식탁 의자 하나가 이렇게 높은 장벽이 될 줄은 몰랐다. 혼자 병원에 가는 길,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일, 진료비를 수납하고 다시 택시를 호출하는 과정이 하루치 에너지를 다 소진하게 했다. 택시가 오기까지 목발에 의지하여 기다려야 하는 그 몇 분이 유난히 길었고 내 발끝은 사무치게 땅을 그리워했다.
깁스에 갇힌 발을 보며 나는 묘한 고립감을 느꼈다. 세상은 그대로 움직이는데 나만 정지된 듯했다. 가장 서운했던 건 사람보다 내 마음이었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기다리던 나는 정작 아무에게도 내 고통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가까웠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근황과 자신의 힘든 상황만 이야기했고 나는 ‘그래, 그랬구나’하며 웃어 보였다. 웃음 뒤에 서운함이 밀려왔다. 다리를 다쳤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배려해 주리라는 기대는 너무 큰 기대였나 보다.
가족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아갔다. 내가 청소하고, 챙기고, 잔소리하던 일들을 대신해 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밥을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고 분리수거를 비롯한 많은 집안 일들은 쌓여갔고 더뎌졌다. 내 눈에는 보이지만 내 발은 꽁꽁 묶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손과 발이 되어주던 일상은 나 혼자 만들어 낸 순환이었구나, 결국 아프면 나만 손해구나 하는 자조가 밀려왔다.
그 와중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발목은 좀 어때?’라며 문자를 보내오는 친구, 뜬금없이 반찬을 가득 사서 건네주는 친구, 그들의 짧은 안부는 놀랍게도 진통제보다 나를 더 깊이 진정시켰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 한편은 포근하게 데워졌다. 인간관계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행동 하나, 작은 관심 하나, 작은 말 한 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버티게 만든다.
움직이지 못하니 오히려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 너머로 스치는 햇살의 각도, 마룻바닥을 따라 번지는 먼지의 그림자, 하루에도 몇 번씩 일상의 기적을 체험하며 감사하는 내 목소리, 나는 그동안 너무 빨리 달렸고 너무 많이 여기저기 챙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나를 돌볼 시간도, 나를 위로할 여유도 없이 타인들만 챙기며 너무 많이 뛰었다. 걸음을 멈추고서야 비로소 내가 어디까지 챙기고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지가 보였다.
3주라는 시간은 짧지만 나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아직 나는 깁스에 갇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발을 내려 딛고 싶은 충동이 밀려오지만 통증이 주는 무게가 그것을 막는다. 멈춤 속에서 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 물 한 컵을 먹기 위해 애쓰는 손끝의 섬세한 의지가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다. 걷는다는 것은 그저 이동하는 수단만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자유롭다는 것. 두 발이 동시에 땅을 딛는다는 것, 식탁까지 걸어가 밥을 먹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 평범한 동작들이 이렇게도 눈부신 행위였다는 걸. 몸이 멈춘만큼 시선은 깊어졌고 불편함은 감사의 형태로 변해갔다. 세상이 내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 기대어 살아왔다는 사실을 지금 배워가고 있는 중이다.
깁스를 풀면 나는 다시 자유로워지겠지만 예전처럼 무심히 걷지는 않을 것이다. 바람이 발끝을 스치는 감각, 계단을 오르며 들리는 숨소리, 길가의 사람들과 스치는 짧은 인사마저 새롭게 느낄 것이다. 아픔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삶을 다시 배운다. 걸음이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보게 된 것들, 그것은 나의 쉼이고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