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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우산

등록일 2025-09-02 18:06 게재일 2025-09-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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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볼일을 마치고 건물 밖을 나오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비가 쏟아졌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만 해도 햇빛이 쨍쨍했기에 우산은 아예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설마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비 예보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하늘은 순식간에 변덕을 부렸다. 그야말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소나기였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편의점까지 뛰어갈까 했지만 물이 땅에 닿기도 전에 튕겨 오르는 빗줄기를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빗방울은 그저 내리는 게 아니라 마치 작은 못처럼 박히는 기세였다. 나는 상가 건물 처마 밑에 몸을 붙이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골목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같은 처지였다. 누구도 비를 뚫고 나설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저 하늘의 변덕이 잠잠해지기를 바라는 표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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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를 나눈 우산. 

그때였다. 한 사람이 우산을 들고 내 앞에 서더니 말을 걸었다.

“이거 쓰고 가세요.”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빗속에서 서성이는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우산을 내밀었다.

“저도 누가 주신 거예요. 그냥 쓰고 가세요.”

그 말은 너무 짧고 무심하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묘한 온기가 숨어 있었다. 그는 더 설명하지도 않았다. 우산을 건네주자마자 곧장 비 속으로 사라졌다. 우산을 쥔 내 손끝이 괜히 따뜻해졌다. 한낮의 소나기 속에서 뜻밖에 건네받은 건 비를 막는 우산 하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음 한 구석도 함께 가려주는 듯 했다.

우산을 펴고 집으로 향하는데 그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누군가에게서 우산을 받았고, 다시 누군가에게 그 우산을 내어주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 우산은 오늘 하루만 해도 몇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 모른다. 비 오는 날의 우산 하나가 사람들의 손을 타고 옮겨 다니면서 누군가의 발걸음을 적시지 않게 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집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또다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내 눈에 들어왔다. 허둥지둥 뛰어온 듯 바짓단은 이미 젖어 있었고, 그는 연신 빗줄기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내 손에 준 우산이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우산을 내밀었다.

“이거 쓰고 가세요. 저도 누가 주신 거거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표정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며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알았다. 우산은 단순히 비를 피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였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였다.

우리의 삶이란 것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주고,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을 내밀어준다. 그 손길 덕분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게 된다. 받은 것을 갚는 방식은 꼭 같은 모양일 필요가 없다. 다만 그 마음이 이어지면 된다. 도움의 손길이 한 방향에서 다른 방향으로, 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다니며 세상을 조금씩 따뜻하게 바꾸는 것이다.

집에 도착해 오늘 몇 번을 스쳐간 우산의 여정을 그려보았다. 아마도 언젠가 또 다른 비오는 날, 누군가는 오늘의 나처럼 서성이고 있을 것이고, 그때 또 다른 손이, 이 우산을 건네주리라. 그렇게 이어진 마음들이 겹겹이 포개져 어느새 세상을 감싸 안게 될 것이다. 오늘의 우산은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나눔의 사슬이었다. 그 사슬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가는 일,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앞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우산 한 자루에서 시작된 작은 나눔이 오늘은 나를 거쳐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졌다. 비는 그쳤지만 그들이 베푼 온기는 오래 머문다.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것은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이 사슬이 끊어지지 않도록 마음으로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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