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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나이

등록일 2025-08-19 19:55 게재일 2025-08-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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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에스컬레이터가 한 층, 또 한 층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주말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매장 사이로 풍기는 화장품 향과 음식 냄새가 공기 속에서 뒤섞였다.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꽂혔다. 서너 명의 어르신들이었다. 나이로만 따지면 칠순은 훌쩍 넘은 듯한 분들이었는데 말투는 묘하게 젊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들으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들려 오는 소리는 막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식당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되었다. 한 종업원이 주문을 받으며 말했다고 한다.

“어르신, 여기 메뉴판입니다.”

그 한마디가 문제였다. 이야기를 주도하던 분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누가 나를 보고 어르신이라고 하나? 주문 받는 자기가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더만. 나 아직 그렇게 안 늙었어!”

그 말에 다른 친구들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종업원이 무심히, 혹은 예의를 지키느라 던진 호칭이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침처럼 꽂힌 모양이었다.

나는 그 대화가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누가 봐도 사회가 통상적으로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연령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젊음이 살아있는 듯 보였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를 ‘젊다’고 여기는 감각이 그분들의 자아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몸이 늙는 것이지 마음이 반드시 늙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머물러 있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거울 속 주름진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 안의 시간은 여전히 예전의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의 절반쯤을 산 듯 성숙해 보였고, 쉰이 넘으면 어김없이 ‘중년’이라는 무게를 짊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면 마음은 여전히 스무 살 무렵의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나를 나이로 분류하지만 내 속의 나는 그 분류를 거부한다.

이 착각은 어쩌면 생존 본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전히 젊다고 믿는 마음은 무기력과 체념을 막아주고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품게 만든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주관적 연령(subjective age)’이라고 부른다. 실제 나이보다 자신을 젊게 느끼는 사람일수록 건강 지표가 좋고 사회적 관계망도 더 활발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젊음에 머물러 있다는 착각’은 분명 삶을 지탱해 주는 긍정적인 힘이다.

그러나 그 착각에는 그림자도 있다. 젊음을 고집하는 마음은 때로는 나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지점에서 불필요한 분노를 만든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에서 예민하게 반응한 백화점의 그분들처럼 말이다. 사실 ‘어르신’이라는 말은 존칭이다. 그 안에는 연륜과 경험을 존중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아니다’라는 내면의 방어막이 그 호칭을 곡해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나이 듦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려면 내 마음 속의 젊음과 거울 속의 나이가 화해해야 한다. 그것은 순순히 늙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젊음의 감각을 지키되 나이가 쌓아준 지혜와 품격을 함께 품으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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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태화강국가정원에 나들이 나온 노부부의 모습. /김경아 작가 제공

나 역시 나이를 계산하면 중년의 어귀에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삼십대의 감각이 살아 있다. 거울 속의 얼굴과 마음속의 나이가 다른 채로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 불일치가 인간을 더 유연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을 나서며 나는 뒤에서 들려오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오래 곱씹었다. ‘어르신’이라는 호칭 하나에 담긴 세대 간의 인식 차이, 나이듦에 대한 자기 해석,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나이를 둘러싼 심리적 줄다리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대화 속에 압축되어 있었다.

나이란 단순한 숫자기 아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불러 주는가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현상이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어르신’이라 부를 때 나는 그 말 속에 존경을 먼저 읽어내고 싶다. 내 마음속 젊음과 거울 속 나이가 그때쯤은 비로소 화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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