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란 얘기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트라우마 이론 혹은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라 부른다. 20세기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득세해왔다.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트라우마 이론의 토대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불행이 생겨나고, 그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미래까지도 계속되리라는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런 논리로 현재의 불행을 과거로 돌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문제는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괴로움과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간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트라우마 이론은 지독할 정도로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이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인물이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다.인간은 감정이나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의 지금과 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게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과 여기에서 생각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아들러의 담대한 주장이다.아들러의 주장에는 많은 게 함축돼 있다. 과거에 의지하거나 과거를 핑계 삼아 현재의 엄살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현재의 행과 불행의 원인을 오직 과거에 돌리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 과거의 노예이자 수인(囚人)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인간의 미래 역시 과거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아들러는 과거와 미래의 무관함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용기의 심리학 이론가다.세 번째, 아들러는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고 천명(闡明)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를 용기 있게 살려면 과거나 미래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그의 주장에 상응하는 노래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밖에 물까치 조용히 운다.
2022-09-18
김규종 경북대 교수 교과서에 실린 안톤 쉬나크(A. Schnack·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학창 시절에 여러 번 읽었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이렇게 시작하는 미문(美文)의 결정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깊이 물든 선홍색 단풍잎처럼 마음이 내려앉아 있을 때, 나는 쉬나크의 글을 읽었다. 더러는 깊은 한숨을 동반하고, 더러는 이국적인 풍광과 습속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랬던 박박머리 소년은 청년을 지나 중년의 기나긴 터널을 거쳐 초로의 입구에 있다. 쉬나크가 절절하게 써 내려간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내겐 없다.장 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9)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두 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 하나는 양심의 가책이고, 그 둘은 육체적 고통 혹은 질병이다. 톨스토이가 프랑스어 원문으로 ‘에밀’을 읽고 난 기억을 더듬어 소설에서 루소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고 나는 짐작한다. 육체적 고통과 질병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둘을 제외한 모든 고통은 상상의 결과라고 말한다.우리가 깊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사유가 타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 이후 정형화된 이른바 ‘트라우마 이론’은 고통의 원인을 모두 과거에서 유추하는 원인론 혹은 인과론이다. 과거에 깊은 슬픔이나 마음의 상처 또는 육체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예외 없이 지금도 괴롭고 죽기 전까지도 괴로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서 쉬나크의 글을 떠올린다. 그러다 홀연히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나이 먹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광기나 어리석음일까, 비난의 칼날로 상대를 괴롭힌 일이었을까, 아니면 명절에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불효였을까?! 아니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놓고 없던 일처럼 치부해버린 후안무치였을까?!영원히 사라져버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나락으로 떠나간 시간과 관계와 사건을 돌이킴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반추와 성찰에 담긴 어둑한 자신과 나누는 대화에는 분명 치유 이상의 힘이 있다. 오래전부터 나를 아프게 했던, 하여 기억의 씨줄과 날줄에 깊이 새겨진 고통의 현장을 눈앞에 끄집어내서 용감하게 대면하는 일이야말로 다가올 날들을 예비하는 현명한 자세 아닐까,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은 아마도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자세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그들과 대면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차분한 9월 초순의 아침나절이 고요히 지나간다.
2022-09-04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에게나 타인과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지식과 정보 혹은 정서의 교감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에게 우리는 친밀감과 신뢰감을 가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인간관계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해진다. 인간은 식주의(食住衣) 세 가지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젊은이의 전화였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믿음을 접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하지만 젊은이는 막무가내였다. 일단 만나서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전화로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상대의 눈과 표정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의 답답한 심경은 진보와 보수, 개인과 집단을 넘어서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현안에 관한 집단적 무의식 혹은 일방적인 편 가르기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일방의 주장이나 욕망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무의식이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고, 생각이 같거나 비슷하면 친구가 되는 케케묵은 구시대의 이분법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비교적 젊은 그였지만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의 면면은 상당히 다채로웠다.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내 의중을 묻는 정중함도 갖추고 있었다.다만, 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불쑥 끼어드는 말버릇은 조금 거슬렸다. 아마도 그런 습관은 지금까지 그가 대면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해주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조급해지기 쉬우며, 상대방의 말허리를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요하고도 바닥 모를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의 내면세계를 본다. 젊었을 때 나 역시 정치와 정치가가 세상을 구원하고 민중을 구제하리라는 삿된 희망을 품었기에 청년을 향한 안타까운 맘이 적지 않았다. 그러하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고, 때마침 대구로 귀환한 젊고 패기만만한 정치인을 소개했다. 나처럼 늦가을 물든 단풍잎처럼 고요해진 사람에게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뭔가 새롭고 활기찬 대화와 출구를 기대하고 찾아온 젊은이를 보내고 나서 잠시 회억(回憶)에 잠긴다. 40년 세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소리쳤던 인간이 이토록 고요하게 자신의 지나간 시간과 공간과 관계와 시대를 돌아본다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그 시절의 내가 갈구했던 변혁과 새로운 시대정신은 이미 오늘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그와 나눈 대화가 그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그만이 알 수 있고, 오직 그의 몫이므로. 하지만 우리의 미래(未來)는 희망적이라는 소회는 생생하게 남았다.
2022-08-28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기역과 지읒의 차이 하나로 아주 다른 뜻을 가지는 두 단어, 거울과 저울. 이런 어휘가 우리말에는 차고 넘친다. 겨울과 여울, 장마와 악마, 선발과 후발, 밥상과 책상. 이런 본보기는 거의 무한대다. 하지만 나는 거울과 저울의 상관성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거울과 저울 양자가 우리 시대의 단면 가운데 하나를 적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익숙한 질문이다. 백설공주(白雪公主) 의붓어미가 마법의 거울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거울은 백설공주라고 답한다. 여기서 중요한 수식어는 ‘예쁘다’가 아니라, ‘제일’이다. 새 왕비를 괴롭히는 것은 예쁘지 않다가 아니라, 제일 예쁜 여성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울이 어떤 기준으로 백설공주를 최고의 미녀로 지적하는지 우리는 모른다.문제는 왕비에게 있다. 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지 아니하고, 사물에 불과한 거울의 판정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그녀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폭력적이다.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막가파 혹은 일방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제일’ 예쁜 여자가 되려는 욕망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다.저울은 무게를 재는 데 유용한 도구다. 수량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길이를 재는 것이 자요,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이다. 길이와 무게는 눈금으로 표시되는 까닭에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가능성이 아주 작다. 눈금을 속이는 고수(高手)들도 있지만,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저울눈을 속이는 담대한 자는 찾기 어렵다.저울 가운데 상징적으로 쓰임새를 과시하는 형상은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일 것이다. 여신은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법에 따라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법전이다. 판검사나 변호사의 욕망과 의지가 아니라, 법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재판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저울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표현한다.문제는 저울의 그와 같은 의미가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1988년에 지강헌이 남긴 기막힌 명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마법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 세대 넘도록 금전과 금권의 위력이 한국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법과 정의는 여전히 가진 자들 편에 있으며,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의 고통은 무시당하고 있다.거울은 주관적이며 자의적이고 편향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에 비친 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비뚤어진 거울은 대상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왜곡된 형상을 구현한다. 그런데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저울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질(變質)될 수 있다는 점에 우리의 곤혹이 있다. 이질적인 양자를 사유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내로남불’을 새삼 돌이켜본다. 밤벌레 울음소리 깊어간다.
2022-08-21
김규종 경북대 교수 젊어서는 사람 하나 만나고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 그런 의미를 곧바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별리(別離)의 각별한 고통을 경험한 뒤에 불현듯 찾아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부대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않고 일상을 영위한다는 데 있다.내가 이상엽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5월 일이다. 여느 때처럼 저녁 8시 뉴스를 보려고 도이칠란트 국영방송 ARD 앞에 앉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천연색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고, 소리가 사라지더니 한국 여학생 하나가 화염에 휩싸인 채 무슨 말을 절규하는 것이다. 7∼8초 정도 지났을까?! 사위(四圍)가 깜깜해지고 내 몸과 마음은 먹통이었다. ‘저게 뭐지,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긴 거야?!’다음날 베를린 자유대학 건물에서 이상엽과 마주쳤다. “이상엽씨, 데모 안 해?!” 내가 물었다. “선배님이 성명서 써주시면 조직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 한인 학생회는 150명 정도 유학생을 바탕으로 5인 집단 지도체제였다. 야경꾼으로 생계와 학비를 벌던 나는 초안을 잡고, 일터에서 집으로 전화했다. 그렇게 성명서는 마련되었다.1996년 12월 31일 나는 이상엽과 마주 앉았다. 교환교수로 베를린에 머물던 나는 니체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그와 선술집에서 해가 바뀌는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 보기 드문 한파(寒波)가 도이칠란트 전역을 휘감았던 시절 눈보라를 뚫고 둘이 거리를 질주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런 삼복염천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에 그런 시공간과 인연은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시간은 화살처럼 직진한다. 시간은 영원한 원운동의 본령이다. 시간은 인간의 기억에 따라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시공간 기억 속에 살아간다. 어느 때부턴지 이상엽은 나의 아끼는 동료이자 후배 교수이며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나보다 아홉 살 아래인 그를 보노라면 언제나 경이로웠다. 밝은 얼굴과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를 간직한 그가 ‘어린 왕자’처럼 내게 다가왔던 때문이다.그가 담도암 수술을 받은 것은 2019년 9월 30일이었다. 암의 급습을 받은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칠게 날뛰는 암과 대적(對敵)하면서 그는 당당하고 경이롭게 싸웠다. 마치 그의 선배이자 우상이며 경외의 대상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2020년 5월 25일 만난 그날도 그는 환하게 웃었더랬다. 작년 2월에 마주한 그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그랬던 이상엽이 내 곁을 떠나갔다. 그를 조문한 밤에 하늘은 청명했고 대기는 음습했다.몇 번이고 가능했을 이상엽과 나의 대면은 영정사진으로 이뤄졌다. 그를 만날 용기도, 떠나보낼 마음도 준비하지 못한 용렬함이 후회스럽다. 누군가와 영영 작별하려면 용기 내서 손을 내밀고 만나야 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먼 길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
2022-08-07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가 연일 화제를 뿌리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영우’의 폭발적인 인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 우영우를 수식하는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를 생각해보면 상황이 녹록지 않다. 천재성을 가진 자폐 장애인 우영우가 대형 법률회사에 입사하여 좌충우돌하는 게 기둥 줄거리이기 때문이다.그동안 자폐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드라마는 적잖다. 영화 ‘말아톤’ (2005)과 ‘그것만이 내 세상’(2017), ‘증인’(2019)과 드라마 ‘굿닥터’ (2019) 등을 거명할 수 있다. 이런 장애 영화와 드라마를 해외로 확장하면 부지기수(不知其數)가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장애인을 따사롭게 보듬는 인권 선진국들은 자폐를 포함한 각종 장애인을 외면하거나 냉대하지 않고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1988년 할리우드 영화 ‘레인 맨’에 등장하는 레이먼드와 그의 아우 찰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인색한 아버지로 인해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찰스가 거액의 유산 때문에 형 레이먼드와 여행하면서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레이먼드는 ‘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을 겪는 자폐 장애인이다.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암기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소통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우영우 역시 자폐에 시달리는 장애인이지만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우리는 우영우를 장애인 취급하기보다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장애와 장애인 문제는 그다지 심각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난제를 이겨내는 그녀의 인내력과 빼어난 능력에 감탄하면서 드라마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따뜻하고 이해심 있는 태도로 바라보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전장연의 주장을 보면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사람들은 우영우란 캐릭터를 보면서 함께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장애인도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끄고 현실로 돌아와 출근길에서 장애인이 ‘지하철 타기 선전’을 하면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의 마음들은 오간 데 없습니다.”이와 같은 이중성은 한국 사회의 민낯 가운데 하나다. 예전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고, 지금은 가까운 친구나 친지가 성공하면 암에 걸릴 지경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은 여전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우영우’가 끝나면 장애인의 이동권, 노동권, 탈시설 목소리도 시나브로 잦아들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험난한 세상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022-07-31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 인터넷에 의미심장한 통계자료가 올라왔다. 한국갤럽이 제시한 ‘우리 사회 차별 정도 인식’의 8개 항목 수치가 그것이다. 구체적인 항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빈부 차별, 비정규직 차별, 학력-학벌 차별, 장애인 차별, 성 소수자 차별, 국적-인종 차별, 성(性)차별, 나이 차별이다. 여덟 가지 차별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회문제라 할 것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한다.차별 정도가 매우 심각하거나 약간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을 보자. 빈부 차별 81%, 비정규직 차별 79%, 학력-학벌 차별 75%, 장애인 차별 72%, 국적-인종 차별 62%, 성 소수자 차별 58%, 나이 차별 54%, 성차별 41%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상위 네 가지 차별의 뿌리는 하나다. 돈에서 발원하는 차별이다. 가장 극심한 차별로 나타난 빈부 차별에서 그 아래의 차별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부유한 부모 아래 성장한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사교육을 받고, 이름난 특목고에 진학하여 ‘스카이’에 들어가거나 외국 유학하고 와서 세상에 나서면 남 부러울 게 없다. 그들은 빈부 격차나 비정규직이 겪어야 할 설움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학력과 학벌에서 오는 차별이나 아침저녁으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 경험해야 하는 온갖 수모와 차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특수한 신분을 가진 자들의 자식들이니 말이다.2차 대전 후에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라는 평가를 듣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수식어인가?! 하지만 저변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사뭇 다르다. 세계 전체에서 빈부 격차가 가장 크다는 미국에 뒤질세라 바로 뒤에서 쫓아가는 나라가 한국이다.돈과 권력과 명예를 모두 움켜잡으려는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이런 배경에 굳건하게 자리하는 것이 각종 차별이며, 그 선두에 빈부 차별이 있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라. 엊그제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현 정부는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대대적인 세금 손보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직장인을 위한 감세 규모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극소수 부자들을 위한 종합부동산세 감면으로 줄어드는 세수가 1조7천억 원인데, 노동하는 직장인들의 감세 규모는 1조6천억 원에 머물고 있다. 대기업들을 위한 법인세율은 현행 25%에서 22%로 낮춰서 이 부문의 세수 역시 6조8천억 원이 줄어들 것이라 한다.2019년 12월 기준으로 종부세를 내는 한국인은 전체 인구 가운데 2.5%다. 국민 가운데 압도적인 절대다수인 97.5%는 종부세를 내고 싶어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2.5%의 부자들을 위한 감세 규모가 국민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직장인들의 감세 규모보다 크다는 것은 빈부 격차에서 유래하는 빈부 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겠다는 의지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기막힐 만큼 막막하고 답답한 세상 아닐 수 없다.
2022-07-24
김규종 경북대 교수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표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022년 7월 17일은 74번째 맞이하는 제헌절이었다. 그동안 우리 헌법은 9차례 개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2, 5, 6, 7, 8차의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통령 1인을 위한 헌법개정이 다섯 번이나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더욱이 마지막 헌법개정은 지난 1987년의 일이었으니, 35년 동안 헌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영화 ‘1987’에도 나오지만, 1987년 헌법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는지, 우리는 안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해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최루탄과 맞서 싸운 눈물겨운 투쟁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희대의 사기극을 종식하고자 6월 10일, 18일, 26일의 ‘평화 대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은 기억할 만하다.오늘의 대한민국은 1987년 개정된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21세기 2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20세기 80년대 헌법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헌법(憲法)은 낡아빠진 ‘헌’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헌법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니 하는 말이다. 동서고금에 유용한 격언이 ‘만상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는 말이다. 변하지 않는 유일자(唯一者)는 사멸한 것이기 때문이다.전투경찰과 백골단의 최루탄과 각목과 쇠파이프에 맞서 꽃병과 투석으로 맞서야 했던 시대에 개정된 헌법이 인공지능 로봇이 활보하는 우리 시대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자명하다.35년 동안 진행된 변화양상을 보노라면 눈앞이 아찔할 정도다. 이동통신과 전자우편, 인터넷과 가상공간, 똑똑한 전화기(스마트폰)의 세계적인 보급이 현저하다. 4차 산업혁명이 눈부시게 현현하는 시대 아닌가?!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이질적인 시공간을 창출한 시점에 우리의 법과 정의 개념은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를 인도할 시대정신을 담아낼 담대하고 원대한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앙권력과 이념의 시대에서 지방분권과 실사구시의 시대로, 나와 가족에서 우리와 공동체로, 지역과 세대 갈등에서 국민통합과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때다.한국 사회는 누적된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각자도생을 꾀하는 개인과 조직 때문에 사회 전반의 활기와 진취적인 기상이 위축되고 있다. 소소한 이익과 분노로 인한 갈등 요소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작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정세 또한 우리의 치밀한 미래기획과 슬기로운 대처를 요구하고 있다.사정이 이럴진대 이번 제헌절을 맞이하여 국가 운영의 근본적인 틀을 혁신할 수 있는 웅대하고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내용은 새로운 형식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분발을 촉구한다.
2022-07-17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황금 세기라 부른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문학과 비교할 때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러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라섰기 때문이다.푸쉬킨에서 시작하여 레르몬토프, 고골을 거쳐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지나 체호프에 이르는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운항은 경이롭다.그중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은 한국 독자에게도 퍽 친숙하다.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그녀의 돈을 사회의 유용한 곳에 쓰겠다는 생각을 구체화한다. 자신의 거처에서 전당포에 이르는 거리는 물론 살해수법과 소요 시간까지 주도면밀하게 계산한 그는 완전범죄를 실행한다. 바로 그때 노파의 누이동생 리자베타가 살인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예정에 없던 살인을 해야 하는 라스콜리니코프. 하지만 그가 들고나온 돈은 그야말로 푼돈이었다.그가 왜 노파를 살해하려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밝혀진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눈다. 번식만을 위해 살아가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과 나폴레옹처럼 진정한 인간, 비범한 인간 혹은 강자(强者)의 이분법으로 인간을 나눈다. 그가 보기에 전당포 노파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이(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인간을 죽이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도 강자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자신의 강고한 내면세계를 확신했던 그가 마주하게 된 현실은 정반대였다. 그의 깊은 잠재의식 안에 자리하던 죄의식이 ‘섬망(8B6B妄)’의 형식으로 그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가족의 생계를 매춘으로 짊어진 여인 소냐를 만나게 된다. 의식적-정신적 세계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살인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존재론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소냐에 강력하게 이끌린다.왜 사람을 죽였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라스콜리니코프는 “나는 그저 시험해보고 싶었어. 그게 다야.”하고 대답한다. 수많은 사람처럼 자신이 이가 아니라, 진정한 강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살인했다는 것이다. 자수하라는 소냐의 충고를 따르는 라스콜리니코프. 시베리아 유배지까지 그를 따라와 뒷바라지하는 여인 소냐. 자신의 온몸을 던져 가족을 먹여살리면서도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던 소냐.소냐를 보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조금씩 깨달아간다. 그 자신도 전당포 노파도 세상 누구도 이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런 자명한 사실을 수긍하도록 인도한 것은 소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었다.세상은 증오나 살인, 폭력으로 나아지거나 개선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강자의 철학과 실천으로 세상은 단 한 치도 바뀌지 않는다. 세상에 필요한 유일한 덕목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대하면서 인간적인 유대를 확장하는 일이다.날이면 날마다 언론을 도배하는 숱한 물리적 폭력과 가공할 폭언과 폭력의 결과를 보노라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유일한 구원의 길,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야 한다.
2022-07-10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에게나 나름의 습관이 있다. 타인과 구별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좋아하는 영화가 있으면 여러 번 본다. 지겹거나 귀찮은 노릇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이렇게 대꾸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 번만 먹고 마나요?! 혹은 좋아하는 사람을 한두 번 만나고 그만 만나시나요?!’ 열댓 번 본 영화도 있다. ‘동사서독’이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이런 영화는 여러 번 보아도 질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사람을 끄는 강렬한 매력이 부설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감독인 기타노 다케시가 1999년 연출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우리나라에서 2002년에 개봉된다. 일본문화를 경계하여 빗장을 채운 전임 정권과 달리 김대중 정권이 개방에 앞장선 결과다.일본 만화영화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나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어둠의 경로를 거쳐서만 볼 수 있었다. 두세 번에 걸쳐서 녹화하고 그걸 다시 녹화한 필름으로 보았기에 화질은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만큼은 선명하게 다가오곤 했다. 그런 암흑기를 거쳐서 요즘에는 한류가 외려 일본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정말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는 대목이다.각설하고 ‘기쿠지로의 여름’을 보면서 여러 상념에 젖어 들었다. ‘소나티네’와 ‘하나비’, ‘자토이치’ 같은 영화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야쿠자나 검객 같은 폭력적인 인물을 다룬다. 그런데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그는 아주 다른 질적인 변용을 선보인다. 영화 중간에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보름달에 반딧불이 정도다. ‘기쿠지로의 여름’에 담긴 서정성이 마음 한가득 따사로이 다가오는 것이었다.9살짜리 소년 마사오와 52살 먹은 전직 야쿠자 사내가 왕복 600km의 여정을 경험한다. 로드무비 형식을 갖춘 ‘기쿠지로의 여름’은 어째서 그들이 장도(長途)에 올랐으며, 그런 노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를 풀어나간다.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와 함께 사는 마사오가 먼 데서 일한다는 엄마를 찾아가는 것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다 보면 아, 저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여러 번 찾아온다.토요하시에 거주하는 엄마가 어떤 여자애의 엄마이자 어느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마사오.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닦는 마사오를 위로하는 기쿠지로. 엄마를 만난다는 기대와 기쁨에 들떠서 머나먼 길을 어렵게 찾아왔건만 눈앞의 엄마는 다른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 어린 마사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不問可知) 아닌가?! 그런 소년을 달래려고 온갖 기지를 발휘하는 기쿠지로를 보면서 ‘천사’를 떠올린다.아직도 일본 사회에는 저런 순박하고 따사로운 영혼을 가진 어른이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일본은 여전히 살만한 나라일 것이고. 한 편의 영화가 전해준 따뜻함이 오래 기억될 듯하다. 올여름은 ‘기쿠지로의 여름’과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다.
2022-07-03
김규종 경북대 교수 세상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든 일은 예정된 궤도와 시간 순차성에 따라 수미일관하게 진행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언젠가 잠시 살았던 곳 인근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차를 수리하거나 엔진오일을 교체한다. 저녁마다 방문하는 방송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4년 넘게 산 적이 있다.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와보았던 대구에서 30년 넘도록 인연과 관계를 맺고서 살아간다. 우연처럼 보이는 이런 인과율은 곳곳에서 작동한다.개체에서 발생하는 우연이 유기체에서 필연으로 작동한다는 명제가 있다. 소규모로 일어나는 우연이 필연으로 기능한다는 말이다. 작은 우연들의 누적이나 축적이 마침내 거대한 필연을 가져온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눈이 아주 밝은 사람은 작은 우연을 포착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대개는 건성으로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문득 아, 하는 깨달음의 탄식이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서두가 길었던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얼마 전에 ‘우연히’ 20년 전 사진과 만나게 되었다. 2002년 7월 12일 날짜가 사진 오른쪽 아래에 선명했다. 나를 포함한 열 사람이 사진에서 여러 가지 표정으로 사진 찍는 이를 응시하고 있다. 반 팔과 청바지 차림의 편안한 복장과 막걸리와 맥주가 놓인 식탁, 그 위에 자리한 마른안주 몇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열린 창 너머로 전등의 밝은 빛이 유리창에 선명하게 비친다.세 사람의 교수와 일곱 사람의 대학원생이 한 장의 사진에 빼곡히 담겨 있다. 20년 전에 우리는 저런 얼굴과 옷차림과 마음가짐으로 여름밤을 보내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여러 감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사진의 인물 가운데 몇몇은 소식 두절(杜絶)된 상태고, 몇몇은 여전히 추억을 곱씹는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어떻게 그런 차이가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인생 행로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종착지점은 누구에게나 다른 의미와 색깔과 무게를 가진다. 각각의 지점에서 우리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기도 하고, 끊기도 한다. 누군가와 맺은 깊고 질긴 인연은 애별리고(愛別離苦)를 잉태하기도 하고, 원증회고(怨憎會苦)를 결과하기도 한다. 그것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관자는 나나 그 혹은 그 여자나 그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결정권 바깥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끝까지 머물 사람과 함께할 관계와 인연은 어떤 일이 있어도 최후까지 이어진다. 아무리 좋았던 인연과 관계를 맺은 사람과도 어느 날 홀연히 단절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나의 의지도 그들의 결단도 아닌, 순전히 우연처럼 보이는 사사로운 사건과 갈등이 원인일 수 있다. 그러하되 우리는 그런 상황과 인과율의 변화양상에서 구경꾼이나 방관자 이상의 자리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니 수수방관이야말로 최상의 선택일 수 있겠다.한 장의 사진에 들어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연과 여러 가지 사연을 떠올리면서 나의 지나간 20년을 반추한다. 삶은 언제든 어디서든 환하고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2022-06-26
김규종 경북대 교수 6월 21일은 하지(夏至)다. 북반구에서 밤이 가장 짧고 낮이 가장 긴 날이 하짓날이다. 여름의 정점이다.본디 빛을 좋아하고, 어둠을 꺼리는 성정인지라, 아파트와 거리를 두었다. 해가 늦게 떠서 일찍 사라지는 시멘트 콘크리트 건축물. 촌에서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까지 사위를 밝힌다. 그런 밝음은 사람을 무연하게 행복하게 해준다. 층간소음에 괴로워했던 기억도 사라진 지 오래다.상강(霜降) 지나고 입동(立冬) 거치면서 낮은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상황이 역전된다. 시골의 고요는 거룩하고 심오하기가 비할 데가 없기로, 처연함과 쓸쓸함을 형언하기 어렵다. 절집처럼 소음과 차폐되고, 빛도 제한적이어서 적막과 고요는 깊어간다. 그런 연유로 내가 봄의 찬미자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풀과 나무에 초록의 신생이 찾아들어 생명의 환희와 약동(躍動)이 춤추는 시절이 봄이기에.여름은 봄의 기운이 하늘까지 뻗치는 계절이고, 하지는 여름의 절정이기에 특별한 날이다. 때마침 지구 주변의 오행성(五行星)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나란히 배열되는 장관이 펼쳐진다니 반가운 일이다. 6월 중순 이후 2~3주에 걸쳐 우주의 진기한 잔칫상이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할 터. 곳곳에서 아마추어 관측대회가 열릴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고 있다.우리가 범하는 실수 하나는 대상에 관한 무관심과 태무심(殆無心)에서 온다.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은 지나치게 익숙하여 그것을 당연시하기 쉽다. 하지만 정작 대상의 부재가 발생하고, 부재 기간이 길어지면 대상의 소중함을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나도 같은 실수를 여러 번 되풀이했더랬다. 그래서다. 이번 여름을 깊이 느끼고 고마운 마음을 갖기로 한 까닭은 그래서다.여름 한가운데서 덥다느니 습하다느니 짜증이 난다느니 하면서 여름을 원망하곤 했던 부질없는 행태를 반성하면서 여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요즘 마당에 황금물결로 피어난 루드베키아와 드물게 얼굴을 내미는 낮분홍달맞이꽃, 시절이 조금 지난 자주달개비를 볼라치면 경탄이 절로 나온다. 그래, 생명의 환희는 저렇게 작고 여린 것들에도 얼마든지 가능해, 혼잣말한다. 그러다 문득 눈길 닿은 곳에 원추리의 길고 미끈한 꽃대가 솟아올랐다.원추리가 피어나고, 여름 한 철을 호령하는 큰 키의 참나리가 화려하게 몸을 열면 여름은 슬슬 떠나갈 태세를 갖추기 시작할 터다. 하지만 그 사품에도 땅속 어딘가에서는 상사화(相思花)가 개화할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숨 쉬고 있을 것이다.하기야 얼마 전 텃밭에 나 있는 작은 구멍에 무엇인가 들어있길래 살폈더니 올여름 우화(羽化) 기다리는 매미 유충이었다. 아하, 그렇구나. 매미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때가 가까운 게로구나! 작은 한숨과 탄식이 뒤따른다.지하세계에서 5∼6년 견디고서 지상의 보름 남짓한 날 살아보려는 매미의 고단한 생이 울컥 다가온다. 그렇다! 삶은 언제 어디서든 의미가 있는 법. 여름 한가운데서 여름을 찬미해본다!
2022-06-19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87년 그해 여름은 습하고 무더웠다. 하지만 군부독재 세력과 건곤일척의 회전(會戰)을 앞둔 청춘들의 결기는 공고했다.종철이를 민주주의 제단에 바친 이 나라 민중의 혈맥은 힘차게 뛰놀았다. 그들에게 지거나 밀릴 수 없다는 의지는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6월 10일을 기점으로 우리는 18일과 26일 세 차례에 걸쳐 거리로 춤추듯 나아갔다. 학교 부근 개운사 승려들까지 장삼(長衫)에 유인물을 들고 광화문 가는 버스에 동승했다.거리 곳곳에서 터지는 최루탄과 지랄탄의 굉음과 뽀얀 연기도 전진하는 행렬을 막지 못했다. 일부는 명동성당으로 진입했고, 어떤 이들은 지하철 구간을 점거했다. 거리와 광장과 지하철에서 시위대는 백골단과 전투경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거리는 시위대를 응원하는 시민들과 구경 나온 인파로 넘쳐났다. 이 나라 미래가 한판의 승부에 달렸다는 절박함이 느껴졌다.최루탄 자욱한 거리를 뛰어다녔던 나는 대학로 부근에서 ‘민족극연구회’ 친구와 만났다. 그와 대화하다 우리의 발길은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밤 11시가 되어갈 무렵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시위대와 전경 무리의 긴장을 실감하던 그때! 갑자기 들려온 날카롭고 새된 소리 “전투 준비!” 아하, 그들은 그것을 전투라 불렀다. 명동성당 진입을 노리는 경찰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시위대의 공방전이 시작될 찰나!출근해야 하는 친구와 학교에 나가야 하는 나는 퇴각을 결정하고 헤어졌다. 하되 짧은 순간 귓전을 때린 네 음절의 전음(顫音)은 내 귓가에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그는 누구였으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서슬 퍼런 명령에 따라 전투태세에 돌입한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적들의 수괴(首魁) 두 사람은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는데….2017년 가을부터 2018년 초봄까지 한반도 남단을 울퉁불퉁 수놓은 촛불에는 87항쟁의 기억이 서려 있다. 터무니없이 모자란 대통령과 그 졸개들의 협화음에 대응하여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민주와 인권의 함성 그리고 화사하게 불타오른 촛불들의 춤사위에는 분명 1987년의 장엄한 투쟁과 승리의 기억이 담겨 있었다. 이겨본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고, 싸워본 사람들이 투쟁의 선두에 서는 법이다.불완전하게 마무리된 87항쟁과 ‘87체제’지만, 지금 우리가 향수(享受)하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때 산화해간 숱한 열혈 청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이다. 눈을 떠보니 박 아무개와 전 아무개가 대통령이었던 사람들과 눈을 떠보니 민주와 자유가 공기처럼 차고 넘친 사람들의 세상은 각별한 것이다. 싸워서 얻어낸 사람들과 공짜로 동승한 사람들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천양지차(天壤之差)다.1987년 6월 위대했던 민주항쟁의 날을 맞으니 그 시절 향수가 걷잡을 수 없이 떠오른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이라 했지만, 가버린 순백의 시절이 못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아, 자유여, 민주여, 환하게 빛나던 청춘이여!
2022-06-12
김규종 경북대 교수 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의 위기에 자발적으로 일어선 백성들의 조직을 가리켜 의병이라 한다. 누란지위(累卵之危)의 국가와 민중을 위해 궐기한 의병을 기리는 날이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에 거병(擧兵)한 의병이 가장 많았다고 역사는 전한다. 의병 하면 암군(暗君) 선조가 때려죽인 김덕령과 수도 진공 작전의 총대장 이인영이 떠오른다.김덕령(1568∼1596)은 광주 출신 의병장이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4살의 나이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는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여 공을 세우지만, 1596년 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는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김덕령이 선조에게 국문(鞫問)을 당한 끝에 장형(杖刑) 130대를 맞고 순절한 장면을 그려낸다.용렬한 선조는 자리를 보존하고자 김덕령을 희생제물로 삼는다. 파스테르나크가 ‘지바고 의사’에서 그려낸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암군 선조는 닮은 꼴이다. 소심함과 연약함으로 신료들을 처형하고 구속하며 용서하는 전제군주들의 양상은 어찌 그리 똑같은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김덕령은 허망하게 세상과 작별한다. 광주의 충장사와 충장로가 그를 기리는 공간이며, 그가 지은 시조 ‘춘산곡(春山曲)’이 오늘까지 전한다.“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이런 서정과 춘심을 가진 장수 김덕령을 때려죽이고도 오랜 세월 옥좌에 앉아 자리보전한 암군을 찬양하는 일부 사학자들은 광대놀음의 주역이다.이인영(1867∼1909)은 색다른 교훈을 주는 인물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궐기한 그는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 합류한다. 같은 해 11월 전국에서 모여든 13도 창의군 총대장이 된 이인영은 수도 진공 작전을 기획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다. 동료와 부하들의 만류에도 그는 삼년상(三年喪)을 고집하다가 1909년 일본군에 잡혀 경성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다. 일본군의 눈에 이인영은 아주 기인한 인물로 보였다. 국가를 위해 일어난 의병 총대장이 삼년상을 위해 자리를 내놓고 돌아갔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과 청나라에서 강조한 ‘충경(忠經)’ 대신 조선에서는 ‘효경(孝經)’만 읽게 한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충효가 본디 다르지 않지만, 충의 뿌리를 효에서 본 조선 사대부의 생각이 이인영에서 구현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과 청나라가 국가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조선 지배층은 가문을 중시(重視)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자세는 뿌리 깊게 남아서 우리 사회를 어둡게 한다. 나라의 운명과 민중의 삶이 어찌 되든 나와 집안만 생각하는 자들이 적잖다.의병의 날을 맞아 가족과 가문만을 생각하는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2022-05-29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살다 보면 의지와 무관하게 일이 겹치는 수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린다. 참, 재미있네. 그런 유쾌한 일이 지난주와 그 전주에 있었다. 2주 전 금요일 오후에 포항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30년 인연을 맺어오는 졸업생을 찾아가는 길이다.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집을 구한 그가 집을 말끔하게 수리하고 난 다음 나를 초대한 것이다.나는 가끔 내 집을 찾아오는 그와 늦은 시각까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집을 찾아간 게다. 그가 안내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와 식탁에서 예의 정담을 이어간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행복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좋은 사람과 늦은 시각까지 격의 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나누는 일은 얼마나 우리를 평온하게 하는가?!지난주 금요일에는 다섯 사람이 포항에 간다. 집에서 10미터 떨어진 곳에 바다가 자리하고 있는 해변이다. 죽도시장에서 준비한 광어회와 멍게, 전복이 돼지고기와 더불어 차례로 상에 오르고, 선선한 바닷바람이 운치를 돋군다. 흉중에는 사심이 없고, 대화는 미리 설정한 방향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오랜만의 양주가 내장을 간질이고, 바다 건너에서 반짝이는 등불이 언젠가의 은성(殷盛)한 추억을 소환한다.옥상에서 거실로 자리를 옮긴 그들이 노래를 청한다. ‘그래, 대구에서 가져온 기타와 노래책이 있었지.’ 악보대(樂譜臺)가 없어 종이상자로 대신하고, 슬로우 고고와 트로트, 왈츠, 스윙을 곁들여 가면서 예전 노래들을 하나둘 불러낸다.어떤 노래는 다 함께 부르기도 하고, 어떤 노래에는 내 경험에 기초한 작은 이야기가 덧대지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이 시나브로 흐르고, 우리는 세월과 인생과 술로 마음을 주고받는다.하필 금요일 오후와 밤에 포항에서 사람들과 인연과 추억과 시간을 함께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잠시 포항을 더듬는다. 열일곱 살 고교 수학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난 바다는 해병대 일일 입소(入所)에서였다.짠 남새가 넘치고, 가슴에 들이닥치는 바닷바람이 그렇게 상큼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짠지 조금 먹어본 바닷물의 맛은 여전히 기억에 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을 연신 되풀이하면서 우리에게 담배를 권했던 까만 얼굴의 병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한다.일일 입소를 마친 이튿날 우리를 태우러 포항제철에서 15대의 버스를 해병대로 보내왔다. 고교 선배 한 분이 버스 한 대에 분승하여 포철을 돌면서 설명해주었던 놀라운 시간대가 핑, 하니 사라져간다.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포철에 오면, 저기 서 있는 캐비닛 크기의 쇳덩어리를 주마. 얼만지 알아?! 삼백만 원이야.” 당시 고등학교 석 달 등록금은 6천 원이었다. 그런 추억을 안겨준 포항의 추억을 지난주에 새삼 돌이킨 것이다.세상의 인연은 의지만으로 엮이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게다. 그리하여 두 눈이 서로 마주치면서 인연은 시작된다. 포항의 낮은 속삭임이다.
2022-05-22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늘 5월 16일은 성년의 날이다. 성년의 날은 만 19세 성인이 되는 청년들을 격려하고, 책임감을 일깨워주려는 의도로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다. 성인이 됨은 가슴 벅차고 유쾌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책무를 의식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이제는 자신의 언어와 행위 하나하나 신중하게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 시기다. 밥만 축내고 나이만 먹는다고 성인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요즘 한국인들의 인식에 깊게 자리한 것 하나가 젊어지고 싶은 일이다. “젊어지셨네요”라거나 “젊어 보이세요!” 하고 말하면 누구나 반색한다. 나는 그런 말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면 사람은 나이에 맞는 얼굴과 몸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동안(童顔)의 나이 지긋한 사람 사진이 나오면 외면한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젊거나 어려 보이는 일이 아니라, 제 나이에 맞게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런데도 한 살이라도 젊게 보이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젊은이들처럼 차려입고, 신발 신고, 말투까지 흉내 내는 사람을 보면 뭔가 어색하고 낯설다. 더욱이 6∼70대가 그렇게 하는 모양을 볼라치면 왜 그러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다. 뭐, 각자들 제멋에 겨워 사는 것이 인생이니, 내가 끼어들 처지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빠른 속도로 실종되어 가는 권위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현대 한국의 가정에는 아버지가 없다.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아버지는 있지만, 전통 시대의 강력한 아버지는 오래전에 실종되고 없다. 이런 형편이기에 아버지의 권위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버지와 가부장권 그리고 아버지의 권위가 부재한 까닭에 나이 먹은 사람들의 설 자리도 당연히 없다. 그 결과 존경받는 원로와 권위 있는 원로도 없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마지막 보루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너도나도 어려지고 젊어지고 싶은 판국에 ‘꼰대질’이라 비난받을 각오로 나서는 사람도 보기 어렵다. 몸 사리고 평안하게 노후를 보내겠다는 자들만 득시글댄다. 세상이 혼탁하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들이 설레발치지만, 누구 하나 담대하게 나서지 않는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봐도 못 본척하는 세상이다. 이런 상황변화는 똑똑한 전화기(스마트폰)가 나온 후 급속도로 퍼져나가서 일반적인 현상이자 추세로 자리 잡았다.이런 형편에 맞는 성인의 날에 속이 편하거나, 젊은이들을 푸근하게 축복해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한 길동이가 집을 나간 것처럼 권위를 상실해버린 노인들의 흉중에 젊은이들을 위한 박수와 환호가 가당한 노릇인가?!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짠한 게다. 이 거칠고 완악하며 완강하고 무지막지한 세태의 격랑(激浪)을 저들이 어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걱정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하되, 젊은이들이여! 너무 겁먹거나 주눅 들지 말 일이다. 세상과 정면 대결하여 돌파할 일이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세계와 부딪치면서 그대들의 길을 멋지게 찾아가기 바라노라!
2022-05-15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음력 4월 8일인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올해가 2,022년이고, 불기(佛紀)로는 2,566년이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44년에 태어난 셈이다. 도이칠란트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유라시아에 걸출한 사상과 종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놀라운 발상이자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인도에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바탕을 둔 자이나교와 불교가 출현한다. 중앙아시아에는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며, 근동에서는 히브리 선지자들이 유대교의 가르침을 예비한다. 그리스에서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같은 자연 철학자와 소크라테스를 비조(鼻祖)로 하는 아티카 철학이 나타난다.인공지능 로봇과 드론의 21세기에도 이들의 가르침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도 우리는 2,000년 선각자들의 가르침에 의지해 살아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사상과 종교다. 종교와 사상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의지해서 우리는 인간성과 품위, 가치와 미덕, 선과 정의를 아침저녁으로 사유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 말씀 가운데 ‘탐진치 삼독(三毒)’이 특히 폐부를 찌른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세 가지가 인생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들 세 가지는 세 마리 새끼돼지처럼 한 묶음으로 뭉쳐 다닌다. 탐욕에 사로잡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면, 우리는 분노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다시 어리석은 행동으로 향한다. 지극히 명약관화한 연쇄반응이자 인과(因果) 법칙이다.이 세상 누구에게나 나름의 욕망이 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절정의 수도승이거나, 절반 죽은 사람 내지 광인(狂人)일 것이다. 문제는 욕망의 제어 정도에 있다. 욕망이 욕망과 충돌하면 강렬한 파찰음과 불화의 굉음이 터져 나온다. 요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폭발 직전의 거대한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듯하다. 남녀와 세대, 부자와 빈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갈등과 알력이 최고조에 달한 느낌이다.하나의 궤도(軌道) 위를 마주 보고 달리는 두 대의 열차가 정해진 충돌 시각에 맞춰 질주하는 살풍경을 나는 오늘도 예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 ‘탐욕’이 자리한다. 욕망을 넘어선 탐욕, 특히 물질을 향한 욕망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거대하다.영화 ‘스파이더맨’ 연작에 등장하는 각종 괴물이 한반도 남단에 총출동해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비단 나만의 감촉일까?! 어째서 우리는 탐욕의 열차를 멈추지 못하고 충돌을 향해 곧바로 직진하고 있는 것일까?!이 나라의 수많은 민초(民草)의 넉넉함과 선량함과 달리 탐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과 언론인, 일부 권력자들의 행악질을 통렬하게 경고하고 그들을 퇴출하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에 적신호가 켜질 것은 자명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전하고자 하는 나의 낮은 목소리다.
2022-05-08
김규종 경북대 교수 해마다 5월 1일은 ‘노동절’이다. 이날은 세계 전역이 노동자와 노동을 생각하면서 하루 노동을 내려놓는 날이다. 그야말로 노동하는 인간들의 휴식과 노동의 의미 반추를 위해 만들어진 날이다. 그래서 이름도 ‘노동절’이다. 하지만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이 나라에서는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이다. 해괴한 일이다.1886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발생한 노동자 시위와 관련하여 노동자 8명이 죽어 나간 비극적인 사건이 노동절의 발단이다.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노동절’로 정해 기념하기로 한다. 노동절은 133년의 역사를 가지고 오늘에 이른 게다.한국에서는 이승만이 1958년에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했으며, 1963년에 박정희는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바꾼다. 김영삼은 1994년에 한국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 대신 5월 1일로 날짜만 바꾼다. 이름은 끝까지 ‘근로자의 날’을 고수한다.근로자와 노동자는 별 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근로자는 국가나 회사를 위해 근면 성실하게 순종적으로 일하는 사람, 노동자는 주체적으로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래서 국가와 기업은 노동자보다 근로자를 좋아한다.21세기 2020년대를 살아가면서도 한국 정부와 관료, 기업은 여전히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며 순치(馴致)된 인간을 욕망한다.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깨어있는 노동자들을 두려워하고 경원하는 것이다. 20세기 3공과 5공의 너덜너덜하게 낡아빠진 시대착오적인 인식과 세계관으로 인간과 세상을 재단하는 자들이 이 나라 주류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세상 어느 선진국이 ‘근로자의 날’이란 이름으로 5월 초하루일 노동절을 기념하는가?!내가 굳이 노동절이라는 이름을 주장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언젠가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가 스승에게 묻는다. “정치를 하신다면 무엇을 맨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은 뜻밖이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하겠노라! (必也正名乎)” 놀란 자로가 되묻는다. “현실을 모르십니다. 하필이면 이름을 바로 하시겠다니요?!” 이에 공자가 준엄하게 자로를 타이른다. 이른바 공자의 6단 논법이 화려하게 전개된다.“이름이 바르지 아니하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 없고, 일을 성취할 수 없으면,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며, 예와 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실정과 어긋나게 된다. 형벌이 실정과 어긋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고로 군자의 말에는 모호함이 없어야 한다. (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 事不成則禮樂不興, 禮樂不興則刑罰不中, 刑罰不中則民無所措手足. 君子於其言無所苟而已矣)” - 논어‘자로’ 편‘근로자의 날’과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가기관 ‘고용노동부’의 부조화는 어찌할 터인가?! 고용노동부를 ‘고용근로부’로 바꾸든지 아니면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꿈이 온당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진보 정부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발목을 잡은 노동절이 어제였다.
2022-05-01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나 좋아하는 꽃과 나무가 있다. 나는 이팝나무꽃과 작약꽃 그리고 배꽃을 특히 좋아한다. 이팝나무꽃의 하얗고 풍성하며 우아하고 여유로운 자태와 그윽한 향기. 작약꽃의 은은하고 새침하며 깔끔한 자태. 배꽃의 화사하고 조화로우며 미끈한 형상이 정말 멋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복숭아꽃과 배꽃을 천시하고 구박했는데, 그것은 꽃에도 인문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유자(儒者)들의 유난함 때문이었다.나무 가운데서는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그리고 대나무를 좋아한다. 가정집에서 느티나무를 키우는 일은 격에 어긋나는 일이어서 단풍나무를 기른다.화분에서 키우던 오죽(烏竹) 몇 그루와 산죽(山竹)을 마당에 옮겨 심었다. 단풍나무는 길이와 부피생장이 느긋한 편이다. 반면에 대나무는 감추고 있던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 저런 일이?!어째서 사람들이 ‘쑥대밭’이라는 말을 쓰는지 알게 되는 참사(慘事)가 일어났다. 어디서 날아온 지 모르게 마당 일부를 점령하여 세를 키워나가는 쑥과 오른쪽 모퉁이에서 시작하여 마당 전체를 접수할 요량으로 번지는 대나무의 위세는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쑥대밭에 가깝게 번지는 녀석들의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그들과 대적(對敵)하면서 ‘방아쇠 손가락’ 증후군까지 경험해야 했으니, 이쯤이면 전쟁이 따로 없었다.올해도 쑥과 대나무는 푸릇푸릇하게 존재감을 발휘한다. 서책에서 조선의 선비들이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인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는 춘하추동과 결부된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설중매, 여름의 무더위와 비바람을 견디는 난초, 서리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국화도 대단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군자 가운데 으뜸은 역시 대나무라고 한다.곧게 자라는 강직함과 속이 빈 겸허함 그리고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지조와 절개를 선보이는 대나무야말로 선비의 표상으로 최고였기 때문이다.국가가 경영하는 ‘도화서’의 화원을 선발하는 과거시험인 ‘취재(取才)’에 대나무, 산수, 인물, 영모(翎毛), 화초의 다섯 가지 종목이 있었는데, 대나무가 그 가운데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대나무는 선비사회에서도, 화원 집단에서도 가장 사랑받은 묘사 대상이었다.조선 시대에 대나무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은 탄은(灘隱) 이정(1554∼1626)이었다. 세종의 고손자 이정은 왕족 출신 화가였다. 더욱이 그는 임진왜란 당시 오른팔에 왜놈의 칼을 맞아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이정은 굴하지 않고 대나무 그림을 계속 그렸다. 그가 남긴 ‘풍죽도(風竹圖)’는 그야말로 대나무 그림의 압권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의 형상화가 최고도로 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이정의 그림은 바람이 균질하게 불지 않음까지도 포착하고 있다. 아, 저런 시선과 손길을 가진 화가가 실존했구나, 하는 크나큰 즐거움이 몰려온다. 그래도 마당에서 번성하는 대나무는 근절해야 한다는 다짐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시절이다.
2022-04-24
김규종경북대 교수 차고 건조한 겨울이 길게 이어지더니 마침내 봄이 왔다. 예년보다 늦게 피어난 꽃들은 무질서하게 몸을 활짝 열었다. 매화와 산수유, 살구와 목련이 필 무렵 사람들은 온통 벚꽃의 개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벚꽃 환한 길이 역시 봄날의 장관이다. 하지만 일시에 사라지는 벚꽃은 허무의 극치를 선사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벚꽃이 더 매혹적인지도 모를 일이다.
2022-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