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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 그런가?!

김규종경북대 교수 세상이 작게 보이는 때가 있다! 그래, 뭐 그리 대단해서 괴로워하고 미워하며 끔찍하게 생각할 게 있냐는 생각에 너그럽고 관대해지는 때가 있다. 딱 이맘때 일이다. 지지 않았으면 하는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라일락 향기가 오가는 바람에 내년을 기약하는 이즈음 일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 철모르고 둥지 만들어 뻐꾸기의 탁란(托卵)을 허하던 때다.거친 바람, 괘씸한 바람 불어, 가슴이 바싹 조여오면 하늘과 나무와 구름장 들여다본다. 저리 작은 목숨 지탱할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밤 지나가는 때 있다. 사람 마음이야 언제나 항상 같지 않기에, 관대함과 여유로움이 악착같음과 치졸함 하나로 얽히는 법. 지나면 비로소 우연함과 느닷없는 너그러움 대하(大河)와 대양(大洋)으로 이해되는 바 있으니, 이런 어처구니없음은 지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며칠 전 일이다. 멀쩡하게 달리던 뒤쪽 승용차가 한 자도 아니 되게 뒤꽁무니에 되우 붙더니 이리저리 몸 뒤척이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편도 1차로에서 어쩌자는 것인지, 뒷거울로 보이는 행각이 실로 가관이다. 마음 같아서는 없는 길 만들어 양보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하되, 좁아터진 길에서 속도 만들며 구부러진 행로 단축하면서 질주해보는 게 고작이다. 하되, 뒤차는 재촉에 재촉을 거듭한다.사정이 이럴진대 이쪽에서도 내장이 뒤틀림은 인지상정이리라. 이윽히 다가온 4차로에서 문득 참았던 분노 일시에 폭발하니 질주 본능과 과시 본능 한 데로 어울려 폭주한다. ‘그래, 따라올 수 있으면 해보라’ 하는 심사로 가속 페달을 밟는 것이다. 뒷거울에서 홀연히 지워지는 염치없는 차량을 확인하며 쾌재를 부르는 것이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진대, 잠시 돌이키며 ‘60 넘은 놈이 한심하군!’ 생각한다.같은 일이어도 너그러운 성정이 작동하지만, 어느 땐 악착(齷齪)같은 마음 일어남은 알 길 없는 모순이라. 깊고 너른 이성의 대양과 문득 마주하는 모순 어쩌지 못하는 일 다반사라! 그럴 즈음 확인하는 ‘아하,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아니로군!’ 하는 사실이다.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라면, 흔들리거나 말도 아니 되게 망령(妄靈) 되는 행동 하지는 않을 것이라. 그러하되, 항시 비틀거리고 흔들리며 뒤뚱거리는 것이 이 마음 아닌가?!하여 다가오는 사유와 인식의 다발은 이것이다. ‘너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너의 육신은 그대의 것인가?!’ 젊은 날의 대답은 매양 그렇다, 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나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의 흉중(胸中)이 어디 있는지, 나의 몸뚱어리가 나의 자유의지와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명징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나의 몸과 마음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터다.낮과 밤이 하나였던 한 주가 스러지고 바람마저 사라진 터에 사위도 고요한 시점이라. 개도 고양이도 그 주인들도 기세가 풀려버린 시절에 새삼 묻는다.그대들의 기특한 사념과 애틋한 연련(戀戀)함은 아직도 무상하며 건강한 것인지, 지나간 꽃잎 새삼 묻는다.

2022-04-10

유튜브 예찬론

김규종 경북대 교수 새로운 옷이나 물품이 유행하기 전에 남보다 빨리 사거나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가장 늦게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유(浮遊)하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부나 정신적인 여유 또는 대담성이 완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모히칸이 되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자로 살아가는 일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도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로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하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명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얻어걸린 유튜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기계를 잘 알거나, 적극적으로 알고 싶은 기질도 없어서 최소한으로 유튜브를 만나면서도 기실 놀라운 바가 적잖다.나한테 유튜브는 명탐정 ‘셜록 홈스’ 연작이나 중단편 소설을 듣는 수단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읽겠다는 강박증 없이 다른 일 하면서 귀만 열어두면 가능한 노릇 아닌가?!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한밤의 적요(寂寥)를 나직하게 깨뜨리며 들려오는 낭송자들의 정감 어린 목소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 아하, 참 멋진 신세계로군! 혼잣말한다.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가 돌연 알게 된 사실이 유튜브의 세력 확장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군, 하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 그들도 나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과 작별하고 유튜브에 의지하여 많은 걸 얻고 있었다. 사람마다 취향과 필요에 따라서 접하는 내용만 다를 뿐, 매체 활용도와 충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이 드러난다.얼마 전 피천득 선생의 유명한 수필 ‘인연’을 들으며 감회에 젖는다. 꼬마 아사코와 처녀 아사코를 거쳐 일본인 2세의 아내가 된 주부 아사코와 세 번 만남으로써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수필가. 마치 단편소설의 장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 이다음에 이런 집에서 살아요!” 하고 아사코가 속삭였을 때, 연두색이 고왔던 아사코의 우산을 보았을 때, 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더욱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넋두리다. 그러니까 달착지근한 추억은 가슴에 간직하되, 쓰라린 작별 장면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것이라 결론 내린 셈이다. 저런 이기주의자의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의 잠꼬대에 오랜 세월 붙들려 살았군,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강렬하게 아사코를 마음에 두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못했을까?!식민지 조선의 유약한 서생 수필가가 인생의 황혼 무렵에 느닷없이 도달한 깨우침이란 게 저런 것이었나, 하는 걸 새삼 알려준 유튜브를 예찬하고 싶은 게다. 인연은 함부로 맺어서도, 함부로 걷어차도 아니 되는 것 아닌가?! ‘불수자성수연성’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리라.

2022-04-03

‘타이타닉’을 보지 않은 남자

김규종경북대 교수 코로나19의 선물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다채로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관객들로 만원이 되곤 했던 2020년 이전의 대형 영화관들은 장삿속에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윤이 남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수입하여 배급했다. 복합 상영관이라는 것은 말뿐이고, 실제로는 잘 팔리는 서너 개 영화 일색이었다. 그런 상황이 코로나19 이후 일변하였다.장삿속에 정신이 나가 있던 복합 상영관들이 정말로 다양한 영화를 세계 전역에서 수입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내가 본 영화는 대개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제작된 것이다. 프랑스, 에스파냐, 핀란드, 도이칠란트, 일본, 영국, 홍콩, 중국 등등을 들 수 있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소재 또한 폭력-속도-사랑-공상과학 일변도를 넘어서 우리의 현실과 상상력을 극대화한 경우가 많았다.205명이 들어갈 수 있는 복합 상영관에서 핀란드 영화를 보았다.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영화. 영화 제목에서 의도적으로 빠트린 어휘가 있다. 영어로 표기된 원제에는 있지만, 수입 과정에서 일부러 뺀 것 같다. ‘눈먼’이라는 어휘가 남자 앞에 있었건만, 수입사는 한사코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장애인 영화라는 걸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다발성 경화증으로 가슴 아래 육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남자 야코가 주인공이다. 더욱이 그는 경화증의 결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아침마다 그를 깨워주는 다정한 문자 메시지가 멀리서 날아온다. 그가 사는 곳에서 천 km 떨어진 곳 사는 또 다른 여성 장애인 시르파다.시르파는 혈관염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그녀의 소망은 바이오 생약 치료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은 항암치료가 필수적이며, 생약 치료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시르파. 야코는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몸이지만, 그녀를 찾아가서 만나겠다고 마음먹는다. 다섯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야코는 충분히 시르파를 만날 수 있다.장애인 택시를 타고 정거장으로 가다가 그가 운전기사에게 라디오 소리를 높여달라고 부탁한 다음 “자유다!” 하고 외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다. 장애가 없는 사람이면 당연한 것으로 느끼는 이동의 자유와 권리가 야코 같은 중증 장애인에게는 사후의 낙원이자, 그림 속의 성찬일 따름이다. 자신의 차폐된 공간을 벗어나 모험을 강행하는 야코가 공중에 대고 소리치는 ‘자유’는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이던가?!오늘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자유의 이면에는 그것을 위해 스러져간 수많은 선배 투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공기처럼 물처럼 차고 넘치는 값싼 물건인 양 당연시한다. 영화를 보면서 장애인들이 매일 겪는 장벽과 차별과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세상에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2022-03-20

파랑새를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1862∼1949)가 쓴 ‘파랑새’가 떠오르는 시점이다.1908년 출간된 ‘파랑새’를 러시아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라프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무대에서 곧바로 상연한다. 외견상 ‘파랑새’는 어린이를 위한 작품 같지만, 그 내면에는 삶의 본질을 찾아가는 기나긴 여로가 자리한다.크리스마스 전날 밤 가난한 남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선물을 받지 못해 의기소침해 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와서 앓고 있는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건네준 요술 모자를 쓰고 길을 떠난다. 아이들은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을 지나 ‘행복의 궁전’과 ‘미래의 나라’를 떠돌다가 돌아온다.아이들이 돌아왔다기보다 엄마가 깨우는 소리에 꿈에서 깨어났다는 말이 더 맞겠다. 아이들이 돌아다닌 세계는 꿈의 환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들어오자 아이들은 파랑새 대신 비둘기라도 가져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집에서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다.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긴다. 아이들의 비둘기 날개가 파란색으로 변하여 그들이 찾아다녔던 파랑새가 집 안에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할머니는 파랑새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고, 딸은 기력을 회복한다. 아이들이 먹이를 주려고 새장 문을 열자 파랑새는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파랑새는 행복의 상징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행복의 노예처럼 보인다. 누구나 삶의 가장 큰 원인을 행복에서 찾는다. 행복하지 않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행복 강박증에 중독된 사람들 같다.그런데 그들이 바라는 행복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어보면 돌아오는 답변이 별로 없다.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행복의 조건을 숙고하지 않은 채 행복을 추구함은 허전하고 이상하다. 왜 부자가 되려는지, 왜 결혼하려는지, 왜 대학에 들어가려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들이 행복을 찾고, 부자가 되려 하고, 결혼과 진학은 누구나 하는 거니까 거기 맞춰 살아가려는 게다. 오랜 세월 독재자들의 병영국가, 군사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서 그런지 우리는 전체주의와 획일주의에 익숙하며 그것에 순치(馴致)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마주하고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온갖 것을 돌이켜보면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이토록 차고 넘치는 물질과 재화와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때로 격절(隔絶)된 작은 섬들을 본다. 난바다에 둥둥 떠서 서로를 목청껏 부르지만, 누구도 그 목소리에 호응하지 않는 차갑고 비정한 세상.3월 9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선이 끝났다. 홀가분하다. 북새통처럼 시끌벅적하던 사위(四圍)가 고요해지니 이제야 사람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인다. 사람 하나 바뀐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러니 다투고 시비하던 사람들이여,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가 차분하게 일상과 대면하시라. 당신이 기다리던 진정한 파랑새는 거기 있을지 모르니까.

2022-03-13

대통령 선거 유감

김규종 경북대 교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다. 지금까지 있은 어떤 대선보다 후보들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감도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돌아보면 이런 견해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하는 심사를 금하기 어렵다.‘87체제’ 이후의 대선만 회고해 보자. 1노 3김 경쟁체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은 문자 그대로 ‘양김’의 분열과 노태우의 어부지리로 종결됐다. 하지만 박정희·전두환의 체육관 선거를 종식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한 대선이었다. 1992년 김영삼-김대중-정주영의 3자 경쟁 구도는 흥미진진했다.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진 대선의 백미는 ‘우리가 남이가?!’였다. 문민정부 탄생은 그 결과물이다.1997년 이른바 ‘디제이피 연합’과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으로 촉발된 위기 상황에서 대선이 치러졌다. 김대중의 승리로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한 나라가 되었다. (일본은 2009년에야 하토야마 유키오의 민주당 정권이 탄생한다). 2002년은 고졸 신화의 노무현이 보수우파의 거목 이회창을 이긴다. 정몽준의 단일화 약속 파기에 굴하지 않은 승리로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를 새롭게 쓰게 한다.2007년 대선은 결과가 나와 있었다. 국민의 관심은 오히려 이명박과 박근혜 가운데 누가 보수의 대표선수가 되느냐에 쏠려 있었다. 2012년 대선은 노무현의 서거와 이명박의 실정이 맞물려 문재인과 박근혜의 박빙 승부가 흥미로웠다. 민노당 이정희 대표의 돌출발언으로 박 후보가 승리한다. 그리고 촛불시위로 창출된 2016년 대선 공간은 싱거운 대결로 끝나 문재인이 당선되어 오늘에 이른다.지금까지 거론된 인물들은 상당히 비중 있고 역사적인 책무를 수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20대 후보들의 면면은 다르다. 누구도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나 호응을 받지 못한다. 그들을 둘러싼 저급한 수준의 뒷얘기가 토론회까지 잠식할 정도이고 보면 중언부언이 필요 없다. 어쩌다 저리 추락하고 말았을까?! 정치가들의 수준을 보면 그 나라 국민들의 수준, 즉 민도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행정부인 내각과 입법부인 국회의원들의 얼굴을 보면 그 나라 국민의 지적·정신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참기 어려운 분노와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숱한 정치인들과 행정관료들이 득세하는 세상 아닌가. 더욱이 어떤 후보는 투표용지 인쇄가 끝난 다음 갑자기 후보직 사퇴를 선언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태연자약하게 유권자들을 우롱해놓고도 천연덕스러운 사람의 심사는 무엇일까?!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투표장에서 권리를 행사하자!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는 사람 같은 사람, 배포 크고 식견도 넓고,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능력도 있으며, 역사 인식도 투철하고, 미래기획도 튼튼하게 준비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도록 판 자체를 바꿔보자.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최소의 도리 아닐까?!

2022-03-06

12평 원룸 전세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아들과 전화하다가 숨이 턱 막힌다. 정말이냐, 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 나간다. 서울에 인접한 인구 29만의 소도시 하남의 원룸 전세가 1억6천만원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일자리를 얻어 그리로 이주한 아들의 말이었다. 방 하나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에 ‘억’ 소리 나는 세상이다. 이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세상이다.건축부지에 4∼5층 규모로 올려진 닭장 같은 방을 그 가격에 빌려서 살아야 하는 이 나라 청춘들의 삶은 지극히 피폐하다. 아무리 이자율이 낮기로서니 평당 1천300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전세를 살아야 하니 말이다. 이런 데도 나이 든 축은 젊은이들이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다고 나무란다.원룸이 방음이나 방한도 엉성하고, 관리도 그래서 건강한 주거환경을 제공하는 곳은 아니지 않은가?! 남향을 주장할 형편도 아님은 자명(自明)한 이치고. 얼마간의 땅에 몇 달 뚝딱하여 건물 세우고, 거기서 나오는 이득을 몽땅 챙겨가는 자들은 누구인지 궁금하다. 돈이 돈을 벌어도 무지막지하게 긁어가는 세상!지주와 시공업자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행태는 고쳐야 한다. 하기야 몇 년 전에 지인의 딸이 마포에 있는 두 개짜리 방을 2억5천만원에 전세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기겁한 적도 있으니 금시초문은 아니다.언제부터 이런 지경으로 된 것일까?! 숱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한 정부의 무능(無能)에 분노가 치민다.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 종부세 걱정하고, 노숙자들이 재벌 상속세에 한숨 짓는 이상한 나라고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먹고 입고 자는, 이른바 식주의(食住依) 세 가지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런 조건마저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정부라면 21세기 대명천지에 얼굴 들기 민망할 것이다.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정치적으로 후진국에서 불과 60년 만에 세계 10대 경제 강국과 민주국가로 변신했다. 우리 국민 모두 이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런데 그런 허울의 이면에 승자독식과 경쟁만능 그리고 약육강식의 정글 투쟁이 횡행(橫行)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등골을 훑듯이 빼먹는 나이 든 축들의 탐욕은 식을 줄 모른다.권력욕이든, 물욕이든, 명예욕이든 탐욕은 탐욕으로 잠재워지지 않는다. 갈증이 심하다 해서 바닷물을 마시면 조갈증은 더 심해질 따름이다. 사회적 공론장의 형성과 깊이 있는 논의를 거쳐 생산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성세대만을 위한 돈과 권력이 아니라, 미래세대와 그들의 어린것들을 위한 청사진도 함께 그려야 한다.논의의 출발은 ‘나와 내 아내와 내 남편’이라는 편협한 가족주의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대전제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상실된 공동체와 공동체성을 시급하게 회복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2022-02-20

모든 것이 공(空)하다고?!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반야심경’을 암송하다가 앞부분에서 딱 막힌다. “관자재보살이 반야심경을 깊이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밝게 보시고 일체(一切)의 고액(苦厄)을 넘어섰다.” ‘반야심경’첫머리에 나오는 이 구절이 명징하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반야심경’ 260글자의 본질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우리를 포함한 세상 만유의 존재 형식과 실체가 색이다. 색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수이며, 받아들인 바에 따라 생각을 일으킴이 상이다. 생각에 따라 행동함을 행이라 하고, 행동의 결과를 판단하는 것이 식이다. 예를 들어보자.강의실에 강아지가 들어온다. 나도 수강생들도 강아지를 본다. 강아지가 색이다. 강아지를 보고 모두 마음이 불편하다. 강의 도중에 왜 강아지가 들어온단 말인가. 누가 주인인가?! 그런 불편한 마음이 수다. 그리하여 나는 강아지를 쫓아내기로 마음먹고 실천에 옮긴다. 강아지를 쫓아낸 행위가 행이다. 강아지를 쫓아낸 것을 판단해보니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식이다.여기서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시간적 순차성에 따라 이루어졌다. 육하원칙에 충실한 과정을 모두 거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인과율이 적용된 게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결과 모두가 공하다는 것이 관자재보살의 깨달음이다.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은 세상의 온갖 고통과 괴로움을 건넜다는 것이다.그런 까닭에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분명히 내 눈으로 강아지를 보고 강의실 밖으로 몰아낸 다음, 그 행위를 후회한 나의 일련의 행동이 왜 공하단 말인가?!한 가지는 확실하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내가 노력해온 독서와 사유, 인식이 가져온 지식으로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붓다가 설하신 ‘반야지혜(般若智慧)’와 내가 추구해온 얕은 지식의 범주가 양립하기 불가능한 까닭이다.그런데 깨달음은 엉뚱한 서책에서 온다. ‘우주의 구조’를 읽다가 대면한 차원의 문제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4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 그런데 초끈이론은 9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한 10차원을, M-이론은 10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이 조합된 11차원 세계를 주장한다. 여기서 무릎을 친다.붓다가 말하는 전생과 사후의 여섯 세계가 확연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여섯 공간이 그것이다. 그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던 내가 초끈이론의 주장과 만나니 눈앞이 환해진 것이다. 시간개념이 없는 개미는 3차원 공간이 아니라, 2차원 면을 움직이는 존재다. 개미에게 인간의 4차원 세계를 말하면, 개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오온에서 10차원으로 전화(轉化)하는 과정을 보면서 각자 간직한 지식과 관습 혹은 지혜의 깊이와 너비가 얼마나 다를 것인지, 생각하니 새삼 가슴 서늘해진다.

2022-02-13

장예모(張藝謀)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50년에 출생한 현대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장예모의 ‘원 세컨드 (1초)’가 상영되고 있다. 대구에서도 상영관이 희귀하여 한 군데서만 영화를 볼 수 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 당시 하방을 경험한 반동 집안 출신 지식인 장예모의 아픈 기억을 담은 영화다.3년에 걸친 하방을 마치고 갖은 고생 끝에 그는 모택동이 죽고 난 다음인 1978년에야 북경 영화학원의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영화 인생 밑그림을 그린다.1982년 대학 졸업과 함께 ‘광서영화제작공사’의 촬영기사로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영화와 만난다. 1982년 5세대 감독의 선두주자 진개가(陳凱歌)의 영화 ‘황토지’의 촬영감독이 된다. 1987년에 그는 ‘오래된 우물’의 촬영감독 겸 주연배우로 이름을 알린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장예모는 1988년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영화제 대상인 황금곰상을 받아 세계적인 감독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1992년 ‘귀주 이야기’,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로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1994년에는 ‘인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다. 이외에도 그가 받은 국제 영화제의 수상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가 세계 영화제의 주인공으로 등극한 것은 현대 중국의 복잡다단한 사회·정치문제의 천착이 바탕이다. 소품을 만들되 소품 이상의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과 날카로운 시각을 소유했던 덕이다.1999년 ‘집으로 가는 길’로 대약진운동 시기의 사회상을 그려낸 장예모의 영화 세계는 2002년 ‘영웅’을 기점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천하를 통일하다 보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대(국가)를 위해 소(개인과 가문)는 얼마든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일관되게 관철되기 시작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을 총괄하는 총감독 자리에 오른다. ‘어용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다.1990년대 중국 영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장예모의 영화는 서서히 관객들에게 잊히기 시작한다. 여전히 뛰어난 색감과 활달한 무협을 바탕으로 한 ‘연인’이나 ‘천리주단기’ 혹은 ‘황후화’ 같은 영화도 속절없이 망각(忘却)되기에 이른다. 그랬던 그가 이번에 ‘원 세컨드’로 귀환했다. 단 1초를 위해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는 어떤 아비의 삶을 그려내는 따사롭고 온정이 넘치는 영화.고희를 넘긴 그에게 문화혁명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는 듯하다. 대수롭지 않은 싸움으로 여덟 살짜리 딸과 생이별하고 오랜 수형생활을 해야 했던 사내의 고통과 딸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강렬하게 그려져 있는 ‘원 세컨드’. 그와 함께 어린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누이의 살가운 혈육사랑도 애틋하게 묘사된다.‘썩어도 준치’라는 말처럼 장예모의 시선과 연출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특히 부드럽게 춤을 추는 사막의 모래가 연출하는 기막힌 능선의 풍경을 잡아내는 렌즈는 아, 하는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영화 인생 후반기가 환하게 열리기를 기원한다.

2022-02-06

웃음과 가면

김규종 경북대 교수 내 집의 이름은 ‘파안재(破顔齋)’다. ‘파안대소(破顔大笑)’라는 한자어에서 따온 것이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웃는 웃음이 파안대소다. 실제로 이런 웃음을 언제 웃어보았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나처럼 웃기 좋아하는 사람이 이럴진대 2022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 가운데 파안대소하는 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웃음의 기억이 흐려져 가는 개인과 사회, 국가는 건강하지 못하다. 웃음은 건강의 징표이기 때문이다.유치원과 요양병원 가운데 웃음소리 들리는 곳이 어딘지 생각해보면 결론이 나온다. 전염성 강한 웃음은 건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필수 요건이다. 웃음의 걸림돌이 되는 사회악과 시대정신, 개인 혹은 집단의 세력이 강하면 웃음은 사라진다. 웃음 대신에 억압과 강제와 법과 공권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횡행하는 사회는 고장 났거나, 회복 불능의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언뜻 공정하고 정의로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상군 열전’의 주인공 상앙 혹은 공손앙 내지 상군(商君)의 최후가 그것을 웅변한다. 상앙의 변법으로 전국 7웅의 강자로 부상한 진나라가 훗날 천하를 통일하여 중국 최초의 제국을 이루지만, 불과 15년 만에 망한다. 법가로 통일할 수는 있을망정, 제국을 경영할 수는 없다는 교훈이다.법이 지배하는 세상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가면이 횡행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감추고 본색을 드러내지 않는 인간이 득시글거리는 세상. 웃음은 눈물만큼이나 개인의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그런데 웃음을 억압하는 제도적 장치가 법률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정치풍자와 웃음이 오래도록 금기시된 우리나라 같은 사회에서 웃음은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중세 유럽의 기독교가 강제한 엄숙주의와 경건주의가 웃음과 희극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고 폭력적으로 억압한 일은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의 초월적 절대자 자리에 인간과 인간의 눈이 들어서면서 중세 천년은 종언을 고한다. 그와 함께 인간의 관점과 기준, 인간의 웃음과 눈물이 신과 교회를 대신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교회가 강제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한다. 카니발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코로나의 세계적인 유행과 더불어 우리는 2년 넘도록 마스크의 가면을 쓰고 거리를 활보한다. 우리는 그나 그 여자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진짜 표정과 속내를 읽어낼 수 없다. 모두가 마스크의 외피 안에서 내면을 감추고 살아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 관계가 약화-붕괴하기에 이르렀다.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이해관계의 충돌, 세계관의 마찰, 세대의 불협화음, 서울과 지방의 불평등, 각종 사회적 모순의 격화가 가면 뒤로 숨는 기괴한 현상이 전개된다. 자, 가면부터 벗어보면 어떨까?!

2022-01-23

어린이 대학을 설립하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 ‘시인의 저녁’을 방송하다가 도이칠란트의 ‘어린이 대학’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내가 유학했던 나라의 소식을 타자에게 전해 들으니 조금 쑥스러워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 있고 아름답기로 여러 사람이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보편화된 세상에 특별한 비밀이나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알고 계신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우리나라가 들썩거릴 때 도이칠란트 ‘튀빙엔 대학’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대학이 시작된다. 일곱 살 이상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수들이 다채로운 주제를 가지고 강의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대학 참가자들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 따라서 성적도 없다. 학생들은 대학의 학생 식당을 이용하고, 대학 당국은 학생증까지 발급한다. 어린이 대학생들을 위한 대우가 극진한 것이다.대학 교수들이 제공하는 강의 주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왜 공룡은 사라졌을까?’,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학교는 왜 그렇게 지겨운가?’, ‘어째서 우리는 웃기는 얘기를 들으면 웃는가?’, ‘왜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인가?’, ‘왜 나는 나일까?’ 이런 주제를 놓고 해당 분야의 전공 교수들이 최대한 쉬운 어휘와 본보기로 어린이들에게 강의를 베푼다는 게다. 야, 하는 감탄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온다.2002년 이후 ‘어린이 대학’ 기획은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여 이웃 나라 일본과 동유럽의 루마니아, 남미의 브라질과 오스만튀르크의 후예 터키에서도 어린이 대학 프로그램이 성행한다. 더욱이 ‘유럽 어린이 대학 네트워크’ 회원국이 무려 29개국에 달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어린이들이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최고 교수들에게 세상의 온갖 궁금증을 묻고 대답을 듣는다는 즐거움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나의 경각심을 잡아끈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어린이 대학 설립에 딸린 원칙 네 가지다. 첫째, 분과학문을 넘어 석학의 전문지식을 어린이 눈높이로 전달할 것. 둘째, 어린이들에게 대학을 재미있게 경험하는 기회를 줄 것. 셋째, 모든 강사는 재능기부를 원칙으로 하여 강의는 모두 무료로 운영할 것. 넷째, 신청하는 학생은 전원 수용할 것. 만세! 하는 탄성이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우리나라 어린이들의 교육 현장을 생각해보시라. 어린이 대학은 만 7세 이상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기에 우리 기준으로 보면 초등학교 1학년부터다. 한국의 초중등생들은 저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학교 수업도 모자라 각종 학원에서 속셈, 영어, 태권도, 피아노, 웅변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을 배우느라 진이 빠지고 있지 아니한가?! 무엇을 위해서 왜 그렇게 이런저런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가?!우리는 사람 대신 인적 자원이라는 용어를 쓰는 희한한 나라다. 인간을 소모품이나 생산재가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인식하는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면 이제라도 어린이 대학을 설립해야 하지 않을까?!

2022-01-16

꿈과 대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언제부턴가 국립대 교수들은 학생 면담이 의무가 되었다. 한 학기에 1회, 1년에 두 차례는 반드시 지도학생 면담이 필수적인 과제로 부과된 것이다. 이른바 학생 지도비라는 명목의 수당이 예전의 봉급에서 차감 지급된다. 학생들과 대면하기를 꺼리는 교수는 거의 없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학문의 전수에 그치지 않는 것이 우리 대학사회의 풍토이기 때문이다.학생들과 면담하노라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그들의 내부에 깊이 각인된 수동성과 흐느적거림이다. 젊은 시절의 담대한 패기와 무모할 정도의 배짱과 오기, 무엇인가를 향해 달려가는 저돌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학생을 대학에서 찾을 수 없다. 예전에는 완전히 멸종되지 않아서 드문드문 만날 수 있었기로, 커다란 기쁨이었건만, 이제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영리한 학생들은 그들의 향방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난 연후에 가장 안전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한 길을 택한다. 그러하되 그 길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를 나한테 검증받으려 한다. 그러면 나는 속이 짠하다! 학부 3년 동안 그가 들여다본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국립대 졸업반 학생의 함축적인 선택이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저토록 범속한 소시민으로 만들어버렸을까?!꿈이 없는, 아예 처음부터 꿈이라고는 꿔본 적 없는 청춘이 나날이 늘어간다. 그들에게 꿈이 뭐야,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공무원이라 답한다. 그들은 꿈이 미래에 가질 직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앞으로 희망하는 직업이고, 내가 묻는 것은 꿈이야, 하고 말해도 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위대한 축복을 받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찬란한 20대에 아스라한 창공으로 비상하는 꿈을 꾸지 않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언젠가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과 꿈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꿈 아닌 꿈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듣던 중 유일하게 어느 학생이 꿈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40대가 오면 저만의 고유한 카페를 차리고 싶고요. 그 전에 제힘으로 세계일주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잘 들었지?! 내가 듣고 싶은 꿈 이야기가 바로 저거다.”꿈을 꾸는 젊은이들이 멸종단계에 이른 우리 사회는 중증의 질환을 앓고 있다. 그것은 아파트와 승용차와 안정적인 공무원 일자리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의 ‘꿈’으로 집약된다. 그들이 말하는 공무원은 9급이고, 따라서 굳이 대학에 들어오지도 않아도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면 그들과 그들의 부모가 굳이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일이 이쯤 되면 대학이 특히 국가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이 이 땅에 존립할 근거가 무엇인지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의 강단 역시 허다한 소시민 교수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연구비, 프로젝트, 빈곤한 화제와 얄팍한 지적-정신적 풍토가 대학의 주류문화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에게 대학은 무엇인가?!

2022-01-09

경희와 베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나혜석(1896-1949)의 단편소설 ‘경희’(1918)의 주인공 경희는 러시아 최초의 여성 혁명가 베라 자수리치(1851-1919)를 떠올리게 한다. 귀족 집안 출신의 지식인이자 사회운동가 베라는 페테르부르크 경시총감 트레포프 저격 사건으로 수감된다. 만년의 투르게네프(1818-1883)는 그녀를 염두에 두고 산문시 ‘문지방(Porog)’(1878)을 쓴다.문지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베라는 선택의 기로(岐路)에 선다. 이쪽은 교양, 세련, 안락, 계몽, 행복, 가문 같은 우아함이, 저쪽은 무지몽매, 야만, 가난, 질곡, 투쟁, 배신 같은 악덕이 자리한다. 목소리가 베라에게 묻는다. ‘문지방을 넘겠느냐?’ 그녀는 넘겠다고 답한다. 마침내 담대하게 문지방을 넘은 그녀에게 두 목소리가 들린다. “성녀(聖女)!”와 “바보 같은 년!”어쩌면 식민지 조선 여성 가운데 나혜석은 최초의 수식어를 가장 많이 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양화가, 진보적 여성운동가, 소설가이자 문필가 등등. 1921년 ‘매일신보’에 실린 시 ‘노라의 집’은 나혜석의 직선적이고 노골적인 선언문이다.“노라를 놓아라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논 /장벽에서 /견고히 닫혔던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나주게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저”아내이자 어머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 살아가려는 그녀의 강고한 의지가 빳빳하게 드러난 절창이다. 전통적인 가족관계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해야 했던 여성의 운명을 정면으로 거부한 나혜석. 그녀는 그것을 사람이 되는 ‘신성한’ 의무라고 규정한다. 이런 당찬 포부와 인생관으로 무장한 여성 나혜석.경희는 나혜석의 자화상이다. 1918년 당대의 엄격한 가부장제와 고루한 결혼관, 교육받은 신여성을 바라보는 세상의 냉담한 시선과 정면으로 싸우고자 했던 경희. 그녀의 투쟁대상은 일차적으로는 아버지와 친인척이며, 나아가 여성의 구실과 사회활동을 차갑고 냉소적으로 바라보았던 식민지 조선 사회 전체였다.그녀보다 이른 시기에 러시아의 진보적 여성 혁명가 베라는 사회개혁과 인간의 길을 열기 위해 질곡의 길을 선택한다. 경희 역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와 가족들의 인식에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여성상을 선보인다. 그들의 풍찬노숙과 신산(辛酸)한 삶의 여정을 돌이키면서 2022년 우리 사회와 세태를 생각하노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 든다.남학생들보다 높은 여학생들의 대학 진학률, 활발한 사회진출과 성과가 우리 앞에 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허다한 난제가 있지만, 100년 전 식민지 조선 사회와 비교하면, 아니 50년 전인 1970년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진보와 혁명에는 피와 눈물과 땀이 서려 있다. 안나 카레니나가 베라 자수리치와 노라 헬메르를 거쳐 다시 이경희로 옮아가는 경이로운 계보를 새삼 확인하는 새해가 환하다.

2022-01-04

인연에 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사노라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도회지나 아파트에서는 당연지사로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촌에서는 일로 다가오는 수도 있다. 얼마 전에 비운 정화조만 해도 그렇다. 최소 한두 해에 한 번은 정화조를 말끔하게 비워야 한다. 그러려면 지역을 담당하는 사람과 사전 연락하여 일자와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부쩍 쌀쌀해진 어느 날 아침 아홉 시가 되지 않아서 그가 도착했다. 이미 몇 차례 우리 집을 찾아온 터라 반갑게 인사하고 나는 뜨거운 커피를 준비했다. 다정다감하고 말수도 많은 그이는 이것저것 묻고 충고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고맙고 반가운 사람이다.30분 정도 지나 작업이 끝났고, 계좌이체를 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어어, 친숙한 이름이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이 초등(국민)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과 이름이 같았다. 내가 언짢게 기억하는 선생님과 이름이 같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분은 학부모들에게 촌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사였다.나처럼 선출직 어린이회장 같은 ‘고위직(?)’ 부모라면 학기마다 최소 1회는 찾아가 촌지를 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 부모님은 깊고 오랜 생활고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정의로웠던 나도 오실 필요 없다고 극구 만류(挽留)하는 입장이었고.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나고 말았다.학급당 90명 이상 꾸겨 넣은 콩나물 교실, 그것도 13살 어린 소년들이 무더기로 모여있는 교실이 조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따라 친구들은 담임이 없다는 이유로 무지하게 떠들고 뛰고 장난쳤다. 그러다가 홀연 모습을 드러낸 그가 반장이 아닌 회장을 부르는 것이었다. 바지 걷어, 하더니 박달나무 몽둥이로 종아리 대신 뼈 있는 정강이 쪽을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 아닌가?! 그런 통증은 처음이었다.아이들이 떠드는 것과 어린이 회의를 진행하는 회장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열흘 정도 절룩거리며 걸어 다녀야 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나의 부친은 ‘사표 내라’고 하셨지만, 난 그 당시 사표가 뭔지도 몰랐던 터였다. 어쨌든 돈 봉투 들고 찾아가지 ‘못한’ 엄마 덕분에 모질게 얻어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수업 시간에 그분은 일제 강점기에 자신의 ‘창씨개명(創氏改名)’ 경험을 말하면서 ‘쇼모도쇼캉’이라는 이름을 알려주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쇼모도쇼캉’과 그의 인상은 많이 겹쳐 보였다. 그런데 정화조 청소하러 온 사람 이름이 그분 이름과 같았다. 친숙하고 뭔가 형언하기 어려운 이 느낌은 뭐지, 하는 묘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그분의 환생이 빨리 이뤄져서 지금 내 앞의 젊은 사내가 그분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을지도 모르잖아, 하는 생각. 하여튼 살다 보면 재미나고 유쾌한 일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하리라. 한 해의 끄트머리 감상이 깊어만 간다.

2021-12-28

노인을 위한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개 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알몸으로 거리에 뛰쳐나와야 겨우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어. 늙은이들에 대해서 누구 하나 관심이 없잖아.”2008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을 받은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말이다. 이유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인을 거듭하는 연쇄 살인범 쉬거를 추적하는 황혼의 보안관 벨. 그는 확연히 달라진 미국의 현주소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노인들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무관심이다. 노인이 알몸에 개 목걸이를 걸치고 거리를 배회해야 비로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노인에 대한 무관심이 어디 미국만의 문제인가?! 우리나라에서도 노인들에 대한 무관심은 극에 달한 형편이다. 선거철이면 표 때문에 얼굴 들이미는 정치인들 말고 누가 노인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기야 아직도 ‘고독사’의 정확한 통계치마저 없는 나라고 보니 노인을 향한 냉대에 가까운 무관심과 무반응, 무신경은 당연지사처럼 보인다.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 하루 24시간의 변화나, 1년 사계절의 운항이나, 생로병사의 필연적인 수순(手順)은 변화가 만고불변의 진리임을 입증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경영대학원 마우로 기옌 교수가 펴낸 ‘2030 축의 전환’은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베푼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인’에 대한 관점의 필연적인 변화다.기옌 교수에 따르면, 불과 9년 뒤인 2030년의 70대 노인들은 요즘의 50대처럼 원기 왕성하고 혈기방장하며 쓰임새가 클 것이라 한다. 그들 자신의 건강에 관한 관심과 엄격한 자기관리, 나아가 사회 전반적인 의료와 영양의 진보가 그 바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이 확보한 부(富)가 젊은 세대를 압도하기 때문에 돈을 벌고자 하는 기업은 주 고객 대상으로 70대 이후의 세대에게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우리 주변에도 강건하고 의욕에 넘치는 은퇴한 세대가 즐비하다. 그들 가운데 남성들은 등산이나 신체 단련에 시간을 소모하고, 여성들은 각종 모임에 분망하다. 그들은 돈은 적게 받아도 좋으니 일자리를 달라고 하소연한다. 집에서 온종일 얼굴 맞대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부부의 불화와 반목(反目)을 예방하는 최적의 수단이 남성의 출근 아닌가?! 여기서 문제가 생겨난다. 기업은 고임금과 정비되지 않은 노동법을 근거로 노인 재취업에 난색이다. 하지만 노인 문제를 방관하면 어떤 문제가 불거질 것인지는 명약관화! 이제라도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토론회나 공청회부터 열어야 한다. 적정한 임금 수준과 노동 가능 시기를 조율하여 숙련된 노인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방치하고 낭비하는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명제만큼 자명한 이치도 없다. 인생 3막을 열어가려는 노인들에게 새로운 활기와 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이제라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다.

2021-12-21

강자(强者)의 철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니체의 ‘초인(超人·Uebermensch)’을 선행한다. 법대 휴학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저당으로 잡은 물건으로 사욕을 채우는 버러지 같은 인간으로 그녀를 본 것이다. 노파가 가진 재산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한다.치밀한 계산과 사전답사를 마친 그는 완전범죄를 실행하기 직전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와 마주치게 된다. 그는 불가피하게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하지만 그의 흉중에는 자신감이 있다. 나폴레옹은 수십만 수백만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누구도 그를 살인자라 하지 않는다. 외려 그를 영웅이라 부르고 숭배하기도 한다. 벌레 같은 노파와 누이동생을 죽인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그의 사상적 배경은 강자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강자의 철학’이다. 그의 심리에는 자신을 강자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은 소영웅주의가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우연히 거리의 여자 소냐를 알게 되고 나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처럼 인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순교자 소냐의 형상에 크게 동요하는 라스콜리니코프. 소냐의 또 다른 변용은 스비드리가일로프다.라스콜리니코프는 루소가 ‘에밀’에서 갈파한 ‘양심의 가책’이 보낸 ‘섬망에 시달린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뒤집어버리는 섬망과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점점 강력하게 조여오는 소냐의 자수 권유. 그가 한낮에 더러운 센나야 광장에 키스하고, 포르피리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올라가는 장면은 기막히다. 뒤에서 그를 따르면서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소냐.‘죄와 벌’과 라스콜리니코프를 거명한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 요즘 한국 사회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돈’과 ‘권력’을 향한 강박 때문이다. 잘 사는 18개 나라 국민의 의식을 조사한 결과가 참혹하다. 다수가 가족을 가장 소중한 첫 번째 가치로 꼽았지만, 유독 한국인들은 ‘돈’을 맨 앞자리에 올려놓았다. 자나 깨나 ‘돈 돈 돈!’인 것이다. 아, 아직도 돈을 향한 처절한 갈망이 기갈(飢渴)처럼 해소되지 않았구나, 하는 허망함!깜냥도 되지 못하는 자들의 대권 놀음에 언론사들의 지면이 하루가 멀다 않고 누렇게 시들어간다. 권력을 향한 그들의 탐욕과 그들을 향한 민중의 분노가 상충하는 양상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적임자인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한 극심한 정치적-문화적 양극화, 상상을 뛰어넘는 세대 갈등과 남녀갈등, 뿌리 깊은 분단 문제 극복 같은 당면한 난제를 누가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그저 돈과 권력만을 탐하는 무리 때문에 골수까지 병들어가는 이 나라 민초(民草)들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줄 정치가와 정치세력의 도래를 기대한다. 돈과 권력을 움켜쥔 강자들만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세상 모두가 상생하는 정치와 정치가를 소망한다.

2021-12-07

어떤 전화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우리는 문명의 이기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집 안팎에는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물건들이 자리한다. 그중에서 나는 가끔 전화기를 생각한다. 1980년대 초에 거금 20만원 넘게 들여서 구한 전화기가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사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25만원 정도였으니, 전화기가 얼마나 비쌌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받은 전화번호는 아직 나의 비밀번호로 살아 남아있으니, 그 위력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아들들로 인해 괴로웠던 어머니가 한시름 놓을 수 있도록 배려한 전화기. 가정의 풍속도마저 바꾸어놓았던 전화기에 얽힌 일화를 누구나 하나쯤 기억하고 있을 터. 러시아의 계관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였던 알렉산드르 푸쉬킨이 1830년에 출간한 ‘벨킨 이야기’에 아픈 사연이 나온다. 순정파 처녀 마리아를 사랑한 사내 블라디미르가 도둑 결혼하려다 눈보라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이야기다.프랑스 감상주의 소설로 교육받은 마리아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 귀족 청년 블라디미르. 그는 마리아의 집에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에 주례를 담당할 신부와 증인까지 구해놓는다. 하지만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눈보라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다.소설을 읽으면서 ‘아, 전화기만 있었더라도 이런 불행은 피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며 구슬픈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200년 전에 이런 사연이 어디 러시아에서만 있었겠는가?! 예기치 않게 걸려오는 반가운 소식부터 언짢고 슬픈 이야기까지 전화는 담담하게 사연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얼마 전 아픈 전화를 받았다. 재작년에 담도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면서 건강을 상당 정도로 회복한 친구에게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 듣자마자 속이 짠하고, 마음 한 자락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전남대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학교 안팎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온갖 꽃과 풀을 사진으로 찍어 그에게 보내곤 했다. 다행히 2019∼20년 겨울은 포근했다. 눈 속에 빨갛게 피어난 장미 사진을 보내기도 했더랬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그는 항암치료 없이 베트남에서 생산된 ‘개 구충제’만으로 2년 이상을 버텨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기적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맑고 투명한 그의 웃음소리에 환호하곤 했다.그런데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모든 기쁨과 환희와 미래기획을 눌러버린 것이다. 아, 하는 짧은 탄식과 아픈 가슴 그리고 무거운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의 가족과 학생들과 그가 기획한 미래가 스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상념(傷念). 하지만 우리는 단념하지 않기로 한다. 2년도 넘게 버텨온 그의 생명력과 낙천성 그리고 강고한 긍정적 사유와 환한 웃음이 그를 반드시 살려내리라 믿는다.우리가 오늘 하루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음은 내일과 모레, 그리고 그 내일의 장밋빛 희망과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꿈과 기적 같은 미래가 그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21-11-30

오동도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랜만에 전남대-경북대 인문대학 교수 모임이 있었다. 작년 7월 경북대 ‘인문한국진흥관’에서 개최한 정기 교류 모임 이후 처음이니까, 어느새 1년 4개월이 지나버린 셈이다. 누가 시키거나 바란 것도 아니건만 세월만큼은 꼬박꼬박 어김없이 제 길을 간다. 더러는 무심함을 넘어 냉담함마저 느끼게 하는 것이 시간의 정속 운동이다. 이번에는 여수(麗水)에서 ‘인문학 대중화’를 주제로 하여 활발한 발제와 토론이 오갔다.제한된 인원과 경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대구-경북과 광주-전남 지역에 인문학을 보급하려는 노력이 역력하게 개진되었다. 다만 나름의 실천 방향과 방법론과 경륜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서로 배우고 갈고 닦아 앞으로 나아갈 방도와 협력할 지점도 환하게 보이는 것이 유쾌했다. 우리 속담에 이르기를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흥미로운 발제와 토론을 뒤로 하고 오동도로 걸음을 옮긴다. 소설(小雪)을 목전에 둔 터라 저녁해가 빠르게 자취를 감추는 날이어서 해거름의 어둠이 이내 찾아든다. 아, 그런데 겨울이 아니라, 5월의 봄날처럼 훈훈한 바람이 갯내음을 전한다. 심훈의 ‘5월의 바다’가 떠오를 만큼 훈풍이 보름달을 두둥실 띄우는 것이다. 간난신고(艱難辛苦)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 아낙의 고단하기 그지없던 삶을 그려낸 심훈의 따사로운 정서와 민족애!오동도 산책길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말끔하게 단장한 길마다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서 있다. 겨울이 닥치고 매서운 바람 불면 선홍색 동백꽃이 다투어 피어났다가 모가지째 툭툭, 소리 내며 지상과 작별할 터. 그 장관(壯觀)이 눈앞에 삼삼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오래전 10시간도 넘게 열차를 타고 처음 밟았던 오동도는 이제 없다. 마음의 고통을 달래려 불쑥 올라탔던 야간 삼등열차의 추억은 아득하게 사라져갔다.먼 화물선과 어선의 등불이 장계의 ‘풍교야박’에 그려진 것처럼 나그네의 객창감(客窓感)과 감상적인 서정을 일깨운다. 어찌 심사가 복잡하지 않겠는가?! 늦어진 저녁 자리에 울려 퍼지는 옛노래 가락이 떠나간 세월을 불러 세운다. 그래, 너는 어디로 갔더란 말이냐?! 우리의 놀랍도록 청정했던 시절과 눈물과 땀방울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모든 사라진 것과 지나간 것이 불러일으키는 애잔함과 향수가 깊게 찾아드는 시각.어쩌면 인문학은 상실과 망각과 추억의 어떤 지점에서 우리의 시공간과 관계와 인연을 반추하도록 인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은 어렵게 특화한 신상품이 아니라, 백거이가 주창한 ‘노구능해(老軀能解)’처럼 쉬워야 하리라. 민족시인 김소월이나 윤동주, 이육사의 시 가운데 이해되지 아니하는 시가 있던가! 시는 모름지기 잘 읽히고 받아들이기 편하며 우리의 영혼을 후려갈겨야 하지 않을까.오동도의 밤만큼이나 보름밤의 정취도 여간 깊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사는 정리(情理)가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창공의 달도 했을 터였다.

2021-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