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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학입시와 지적 호기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했고,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알고 싶은 욕망, 지적 호기심(好奇心)이다. 한국동란이 한창이던 1953년 5월 29일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는 네팔의 산악인 텐징 노르가이의 도움을 받아 에베레스트를 처음 등정한다. 그들보다 30년 앞서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다가 정상 수백 m 앞에서 실종된 조지 멀로리(1886-1924)는 기막힌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산이 거기 있으니까.”에베레스트에 오르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나는 이 말을 다른 형태로 변용한다. “코끼리나 도마뱀, 공룡이나 악어, 침팬지나 개구리가 산소통 짊어지고 에베레스트에 오른 적이 있던가?!” 왜 인간은 극한의 고통을 참으며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의 정상에 오르려 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이유로만 설명할 수 있다. 궁금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보이고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등반가의 마음은 또 어떤지. 호기심은 진화 사다리의 정점에 인간을 끌어올린 원동력이다. 직립보행으로 자유로워진 두 손과 높아진 시야, 언어능력 이외에도 인간은 지평선 너머의 세계를 궁금해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은 동아프리카 지구대를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시기를 유발 하라리는 7만년 전, 다니엘 밀로는 5만8천년 전, 홍윤철은 5만년 전으로 상정(想定)한다. 그들이 활용하는 고고학 자료와 문건이 상이하기 때문이다.호모사피엔스의 최초 이동이 오늘날 지구촌의 초기 역사를 결정한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사바나에 남거나, 유럽으로 넘어가거나, 아시아와 호주 쪽으로 이동하거나,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거나! 이런 분기점의 차이는 사바나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새로운 땅과 물에 대한 사피엔스의 거역할 수 없는 지적 호기심에서 발원한다.호기심을 자극하는 원천은 인간의 뇌(腦)다. 뇌는 인간 몸무게의 2%를 차지하지만, 기초대사율 비중은 20%에 이른다. 여느 신체 기관보다 월등한 에너지 소비량을 자랑하는 것이 뇌다. 뇌가 활발하게 작동되어야 인간이 자격이 생겨난다는 얘기다. 인류의 생존비법이자 진화 사다리 정점에 도달한 근본적인 동력이 뇌에서 나왔다는 증거다. 그런데 요즘 청춘들은 뇌를 본래의 기능에 맞춰서 쓰지 못하는 듯하다.생각하는 능력으로 여타 생명체를 압도한 인간이 21세기 시점에 스스로 퇴행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이런 현상은 특히 나의 조국에서 강력하게 현현하고 있으며, 책임소재의 상당 부분은 대학입시에 있다. 독서와 사색, 글쓰기와 토론에 기초한 교육 대신에 암기와 찍기 능력 향상을 목표하는 수능은 폐지되어야 한다. 중고생들의 지적 호기심을 말살하고 성적순으로 서열화를 강요하는 악랄한 대입제도는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자라나는 청춘들에게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대입제도의 도입이 시급한 시점이다. 국가교육위원회의 분발을 새삼 촉구한다.

2022-12-25

수사(修辭) 과잉의 나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늦게 시작한 겨울이 조금씩 겨울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겨울이 겨울답지 아니하여 온화하면 이듬해 농사와 어로(漁撈)에 애로가 생기기 마련이다. 차고 넘치는 벌레들의 향연과 은성(殷盛)한 축제도 그렇고 해양 생태계 역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5세 청년 공자의 명언 ‘군군 신신 부부 자자’가 떠오른다. 제(齊) 경공(景公)이 정사(政事)에 관해 물었을 때 당대 최고 천재 중니(仲尼)의 답변이 그것이었다.일기 예보에 관한 일간지들의 협박성 보도를 보자. “일요일 ‘최강한파’ 닥친다…아침 체감기온 영하 21도.” 12월 18일 서울 아침 최저기온과 체감온도는 각각 영하 14도와 영하 21도로 예보된다. 여기서 기자의 주안점은 ‘최강한파’다. 최강(最强)이란 말은 더는 강할 수 없다는 말이다. 기자의 머릿속에 자리한 최강의 한파가 영하 14도에 체감온도 21도라는 얘기다. 정말 그것이 지구와 대한민국의 최강한파인가?!1805년 출간된 현동 정동유의 ‘주영편’에 따르면, 그때까지 조선에는 쇠바늘이 없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글이 유씨(兪氏) 부인의 ‘조침문’이다. 청나라 사신으로 간 시삼촌에게 바늘을 얻어 27년을 쓰다가 바늘이 부러지는 바람에 애통한 심사를 수필로 풀어낸 것이 ‘조침문’이다. 사대부 집안 처자(妻子)야 청국의 쇠바늘을 얻어쓸 수 있었으나, 민초(民草) 아낙들은 대바늘로 옷과 이불을 꿰맸을 터 겨울의 우심(尤甚)한 추위를 어찌 견뎠을까?!4∼50년 전 서울 최저기온 14∼5도는 연례행사였다. 그 정도 추위는 당연했고, 석유-가스보일러 따위는 언감생심이었다. 문풍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이닥쳤고, 윗목에서는 아버지의 자리끼가 쩍쩍 얼어붙었다. 연탄 한두 장으로 하룻밤 나는 게 예사였고, 식전 댓바람에 세수할라치면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붙었다. 그때 기자들은 ‘최강한파’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첨단의 창호와 난방으로 한겨울 실내온도 25∼6도에 딸기와 열대과일이 넘쳐나는 시절에 ‘최강한파’ 운운하니 기가 막힌다. 기후 온난화로 밋밋하고 맹숭맹숭한 겨울을 보내는 판국에 조금 내려간 기온을 두고 ‘최강한파’라고 호들갑 떤다. 여기에 맞장구치듯 날씨를 보도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감기 조심해라, 건강 유의해라, 하면서 어린애 다루듯 시청자를 희롱한다.3주 연속 베를린의 최저기온이 영하 30도, 최고기온이 영하 18도였을 때 최강이라 과장한 도이칠란트 언론사를 본 적 없고, 최저기온 영하 20도인 흑룡강(黑龍江) 추위를 중국 기자들이 ‘최강한파’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 없다. 평상시 영하 40도 최저기온이 영하 28도로 올라가자 ‘따뜻한 겨울’이라 서운해하는 러시아인들의 표정은 환하고 밝았다. 고작 영하 14도 가지고 숱한 언론사 기자들이 합창하는 ‘최강한파’ 놀음에서 벗어났으면 한다.수사의 과잉은 언어의 과잉을 낳고, 언어의 과잉은 행동의 과잉을 낳는다. 필요 이상의 꾸밈과 언어와 행동은 사회 구성원들의 불화와 충돌을 초래한다. 적절한 기준선을 지키는 언어와 행동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규준(規準)으로 자리했으면 한다.

2022-12-18

부모의 자격

김규종 경북대 교수 35년 전 분단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떠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난생처음 타본 비행기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經由)해 북극항로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당시 한국 여권의 결혼 관련 질문은 두 가지였다. 미혼이냐 기혼이냐, 그것이 전부였다. 나 역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도이칠란트에 가보니 당연한 것이 당연지사가 아니었다. 문화적 충격이 쿵, 하고 다가왔다.유럽의 유일 분단국가 서도이칠란트의 여권에 기록된 결혼 관련 질문은 다채로웠다. 미혼, 기혼, 이혼, 별거, 동거, 미혼모, 미혼부 같은 여러 항목이 기재돼 있었다. 당시 나로서는 경천동지할 일이었고, 전연 이해할 수 없는 요지경의 세상이었다. 이혼조차 낯선 것인데, 거기에 별거와 동거, 남편과 아내가 없는 미혼모와 미혼부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가 같은 하늘 같은 시간에 버젓하게 자리하고 있었다.서론이 길어진 까닭은 미국의 CNN 방송이 지적한 한국의 저출생 국가 면모에 대한 보도 때문이다. 주지하듯 대한민국의 출생률은 지난 3분기 기준 0.79명이다. 안정적인 인구 유지에 필요한 2.1명의 거의 3분의 1 수준이다. 미국의 1.6명이나 일본의 1.3명보다도 현저하게 낮은 출생률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짚은 CNN의 분석이 폐부를 찔러왔다. 지난 15년 동안 225조 원, 해마다 15조 원의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도 실패한 저출생의 원인을 지적한 게다.CNN 방송 보도에 내가 크게 공감한 까닭은 ‘부모의 자격’에 관한 지적 때문이다. “한국에서 아기를 갖는 것은 젊은 이성 신혼부부에게는 기대하는 일이지만, 그 외의 가정은 자녀를 기를 자격이 없다. 미혼여성에겐 체외수정이 제공되지 않고, 동성결혼은 인정하지 않으며, 사실혼 관계의 부부는 입양할 자격조차 없다. 이것이야말로 출생에 관한 청교도적인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명쾌하고 통렬한 정답이다. 근데 언제부터 한국이 청교도의 나라가 되었는가?!결혼과 가족 그리고 부부의 형식에 관한 성찰이 배제된 채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정치권과 보수언론이 문제의 발원지다. 조선 시대의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의 전통적인 결혼관이 지배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이 문제의 근원이다. 1820년대 팡틴이 코제트를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겨야 했던 프랑스의 미혼모 문제가 200년 뒤에 자칭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되풀이되고 있다.혼자 살거나 동성애 부부로 살면서 아이를 입양하여 가족을 구성할 수 있고, 결혼과 무관하게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 미혼모와 미혼부가 가능하다는 가족문화가 인정되어야 한다. 이른바 ‘정상’이란 틀 안으로 사회-정치적인 문제를 끌어들이려는 시대착오적이고 경직된 시선으로는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일본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단일민족신화’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21세기를 살면서 결혼과 가족에 관한 국민의 의식은 아직 19세기에 정체돼 있음은 신비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참에 우리의 후진성을 깊이 성찰해봄은 어떨까, 생각한다.

2022-12-11

개인과 국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월남(越南) 작가 이범선(1920∼1982)의 단편소설 ‘오발탄’(1959)을 읽다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요즘엔 상상하기도 힘든 새빨간 가난이 등장인물들을 날로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가장인 철호의 모친은 해방이 되었다고 곱게 차려입고 만세까지 불렀지만, 토지개혁으로 집과 땅을 빼앗긴 채 남한으로 내려온다. 6·25 한국동란 와중에 폭격으로 실성한 그녀 입에서는 ‘가자, 가자’하는 소리만 흘러나온다.계리사(공인회계사) 사무실 서기로 일하는 철호에게는 이대를 졸업한 아내와 다섯 살 먹은 딸아이, 남동생 영호와 여동생 명숙이 있다. 10년 전 음대 졸업식장에서 싱싱하고 어여뻤던 아내는 가난에 찌든 만삭의 몸이고, 딸아이는 철호의 셔츠를 잘라 만든 치마를 입고 있다. 영호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제대한 후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2년 넘게 무직이다. ‘양공주’ 노릇을 하는 명숙에게 철호는 말을 섞지 않은 지 오래다.“해방촌 고개를 추어 오르기엔 속이 너무나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재가 군데군데 헌 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처절한 빈곤으로 시달리는 철호에게 영호가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이고 다 벗어던지자고 말한다. 양심은 손끝의 가시, 윤리는 나일론 팬티, 관습은 리본, 법률은 허수아비라는 것이다. 가시는 빼내면 그뿐이고, 나일론 팬티는 입으나 마나 하며, 리본은 없어도 그만이고, 허수아비에 참새는 놀라지만, 까마귀는 그것을 비웃는다는 명석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하지만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선량한 인간 철호는 영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과 정의 그리고 윤리와 도덕은 철호가 금과옥조로 지키는 신념이자 철칙이다. 생활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철호는 금지의 선(線)을 넘어서지 않는다. 하지만 영호의 생각과 행동은 철호와 다르다. 법과 정의가 무너진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는 극단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인 은행강도 짓을 하는 것이다.우리는 ‘오발탄’의 결말을 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길을 선택한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죽음과 감옥과 처절을 극한 완벽한 절망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철호의 선택과 영호의 선택을 사유해야 한다. 국민의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하여 영호는 격렬한 저항의 방식을 택하지만, 철호는 순응 일변도로 나아간다. 현대사회에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이범선은 제기한 셈이다.이승만 치하에서도 적잖은 인간들은 호의호식했고, 일부는 권력의 호사마저 누렸다. 그러나 허다한 철호와 영호는 가족은커녕 개인 하나도 구원하지 못한 국가의 희생양으로 전락한다.그 가난뱅이들의 뼈아픈 삶의 질곡을 외면하고 그 같은 참상에 침묵하는 국가를 어찌할 것인지, 그런 정황에 처한 개인의 선택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오발탄’은 묻고 있다.

2022-12-04

‘자칭(自稱)’ 선진국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선진과 후진을 규정하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고 한다. 좋은 일이다. 반갑고 가슴 벅찬 일이다. 어린 시절엔 후진국 소리를 들어야 했고, 청소년 시기엔 개발도상국 소리를 지겨울 정도로 들어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어 있었다. 실로 경천동지할 일 아닌가?!닷새 전인 11월 23일 서울 서대문구 다세대주택에서 모녀 사망 사고가 보고된다. 그들이 살던 방 앞에는 미납된 5개월분 전기요금과 월세를 독촉하는 주인의 편지가 있었다고 한다. 언론은 숨진 60대와 30대 모녀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전한다. 지난 8월에는 수원에서 세 모녀가 생활고를 겪다가 숨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복지 사각지대에서 발생하는 자살자들의 행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이번에 일어난 두 사건을 보면서 2014년에 일어난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을 떠올린 사람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 석촌동 반지하에 살던 세 모녀가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한 사건은 한국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그들은 전 재산 70만 원을 짤막한 유서와 함께 남기고 지옥 같은 이 나라를 영원히 떠나갔다.“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보다 더 절절하게 인간의 영혼을 후벼파는 글이 있었던가?!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에게 마지막 70만 원이 남았다면, 그걸로 집세와 공과금을 내겠나, 아니면 탕진하고 생을 마감하겠는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돈을 다 쓰고 죽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60대 모친과 30대 두 딸에게 그토록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추동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순정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 나라의 정체는 무엇이고, 권력자와 정치가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아서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났다.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한 304명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생매장되었다. 이 사건을 책임지는 정부 고위직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지난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158명이 사망하고 196명이 다쳤다. 지금까지 이 사건으로 옷을 벗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뭉개고들 있을 뿐이다. 혹여 책임의 파편이 날아올까 전전긍긍하면서!삶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참혹한 나라, 사람이 죽어 나가도 돈만 외치는 인간 장사꾼들의 나라, 누가 죽든 나와 내 가족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아귀들의 나라, 오직 아파트 가격 하락만 걱정하는 경제 동물들의 나라, 세상이 어찌 되든 월드컵에 정신 놓은 인간들의 나라, 국민의 삶과 죽음에 무관심한 자칭 권력자들의 나라, 정치는 사라지고 권력욕만 판을 치는 하이에나들의 나라, 대한민국!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근저에는 인간적인 정과 유대가 있는 법이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정리(情理)가 사라지면 그 사회와 국가는 소멸하는 법이다. 이것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한다.

2022-11-27

이순(耳順)의 어려움

김규종 경북대 교수 대학원 들어갈 무렵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나는 중대한 결론에 도달한다. 공자보다 10년을 더 살기로 한 것이다. 중니(仲尼)는 생애주기별로 자신의 성취나 경지를 낱낱이 밝혔다.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홀로 섰으며, 40세에 불혹에 이르렀으며, 50세에는 천명을 알았고, 60세에는 이순, 70세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경지에 도달했다.공자보다 10년 늦게 학문을 뜻을 둔 나는 공자보다 10년 늦게, 하지만 그가 도달한 경지에 확실하게 이르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어언 세월이 물처럼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나는 설정한 목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문제는 노력한 것보다 내가 도달한 학문과 인품의 경지였다. 가령 40세에 나는 홀로서기에 성공했는지, 그것이 중요했다는 말이다. 결론 먼저 말하면, 그러지 못했다.첫 번째 단추를 빼놓으면, 그사이 내가 이룩하거나 도달한 지점은 아주 미욱하거나 미미한 것이었다. 그 이유를 깊이 사유하기보다는 더 멀리 더 높이 가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언제부턴가 그가 말하는 ‘일이관지(一以貫之)’ 개념은 이해할 수 있었고, 지식의 상호 연관과 연결에는 눈이 떠졌다. 문제는 지식보다 다른 영역과 분야에서 발단한 걸림돌이었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격의 없는 유대관계의 실종이었다.춘추 말기의 혼란한 세파를 겪은 공자였지만,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중니에만 고유한 학문과 인품과 미래기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의 길을 가리라는 고집스러움, 가던 길이 틀렸을 경우 그것을 고칠 줄 아는 용기와 담대함, 어려움을 당해서도 꺾이지 않는 의연함 같은 덕목이 공자에게는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공자의 남다른 확신과 강렬한 바람이 바탕이었을지도 모른다.이순이 목전에 다가온 나를 돌이켜보건대, 중니의 그런 장점이 내게는 없다. 살면서 부딪치는 숱한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극복해가는 의지와 끈기 그리고 앞날에 대한 확실한 믿음 같은 것이 내게는 없다. 문제에 봉착할 경우,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기보다는 에둘러 피하는 쪽이 더 편하고 빠른 해결책이었다. 천성적으로 남들과 다투기를 싫어하기에 변명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꺼리는 본성이 내게 있다.사태의 본질을 논구하는 정교한 분석(分析)에 필요한 칼과 도끼가 없음이 나의 결함 가운데 하나다. 더 쪼갤 수 없을 데까지 나아가고, 그것에 기초하여 다시 종합으로 귀환하는 자유자재함 역시 내게는 없다. 예상했던 결론과 달리 창대한 결론이 나왔을 때, 그것을 논리적인 비약으로 묶어내는 장쾌한 시야 또한 나와 무관했다. 더욱이 세상은 하루가 멀다 않고 수많은 지식과 정보를 쏟아내서 발길을 붙잡기 일쑤였다.이제 나는 안다. 10년을 더 살아도 이순의 경지나 그보다 높은 지경에 이를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렇다면 어떤 방도로 생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겨울 초입 마당에 햇살이 봄날처럼 따사롭고 환하다.

2022-11-20

시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마쓰오 바쇼(1644∼1694)는 하이쿠(俳句)를 배우의 유희에서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다. 평생을 가난과 방랑으로 일관한 그는 돈이 지배하는 시대에 당당하게 맞선 인물이다.에도 막부(1603∼1868) 초기를 살아간 그는 자본주의의 광풍에 휘둘리는 군중과 시류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가 남긴 하이쿠 한 수는 이렇다.“두견새 운다 / 지금은 시인이 없는 세상”봄의 서정이 피를 토하며 우는 두견새의 울음소리로 단출하게 구상화된다. 그런 봄날에 에도의 시인들은 시를 버리고 돈을 찾은 지 오래다.서정주는 ‘귀촉도’에서 먼저 세상 버린 낭군을 그리워하며 고요히 절규하는 여인의 형상을 두견새로 그려낸다. 하지만 마쓰오 바쇼는 봄의 절정에서 울어대는 두견새와 시인의 부재를 나란히 세운다.하지만 일본에는 예나 지금이나 시인이 살았고 살고 있다. 그들의 시문학 전통과 창작자 그리고 독서층이 강고하되 문득 도타운 정황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서정주가 ‘귀촉도’ 시집(詩集)을 출간한 때가 해방공간인 1948년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엇갈려 불꽃처럼 각축하고 항쟁했던 때에도 사람들은 시를 읽었다. 6·25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대투쟁의 시기에도 그러했다.국제통화기금 사태로 촉발된 노숙자들이 거리를 헤매던 때에도 시인들은 시를 썼고, 독자는 여전히 시를 읽었다. 그러나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이 도래하면서 모든 것이 전복된다. 시인은 아직도 꿈처럼 추억처럼 시를 쓰지만, 시를 읽고 나직하게 암송하며 거리를 걸어가는 청춘은 완전히 소멸했다. 아침햇살에 간밤의 보름달이 빛을 잃고 시나브로 사위어가는 것처럼 시를 읽는 청춘들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대학에 들어와서 제 돈을 주고 시집을 사서 읽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손드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 시가 죽고 소설이 절멸하는 판국에 희곡을 읽는 학생은 진즉에 깔끔하게 사라졌다. 문학의 종말, 문학의 소거(消去), 문학의 죽음이 당연시되는 시간대가 우리 곁에서 고요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누구 하나 아쉬워하거나 조종(弔鐘)을 울리거나 손을 들어 무언가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얼굴이며 진면목(眞面目)이다.시가 어려워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 너무나 한가로운 일이어서, 시를 읽는 시간이 아까워서 젊은이들은 시를 버리고 현실로 도주한다. 학점, 알바, 취직에 목매야 하는 판국에 시와 시인과 시집은 한가로운 옛노래라는 게 그들의 합리적인 변명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가 이렇게 완벽하게 죽어 나가고, 시인이 이토록 위축된 적은 없었던 듯하다. 모두 과학기술과 생활의 편리와 이기, 눈앞의 이익과 돈벌이로 질주하는데, 어떻게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시가 죽어버린 참혹한 세상에 살면서 새벽녘 된서리 맞은 머위와 루드베키아와 민들레 이파리를 본다. 죽었으되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시와 시인에게도 허여될 것인가?!

2022-11-13

대구 여성영화제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12년에 시작되어 올해로 열한 번째를 맞은 ‘대구 여성영화제’가 지난 11월 3일부터 5일까지 열렸다. “우리는 거침없이 나아간다”는 표어를 내건 주최측의 주장이 마음에 닿는다.‘여성과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대해 영화로 이야기하고 연대하고자 합니다.’ 성소수자와 미혼모, 트랜스젠더, 딸을 잃어버린 어머니, 일자리 구하는 청소년,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녀,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앞다투어 상영되었다.우리 사회에서 여성과 소수자의 입지는 제대로 마련된 적이 없다. 대규모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梨泰院)의 옛 이름 가운데 하나가 동명(同名)의 이태원(異胎院)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놈들에게 겁탈당하고 그들의 씨를 가진 여성들이 모여 살았다는 곳 이태원! 임란 이후 불과 38년 만에 당한 병자호란 대참사의 희생자인 환향녀(還鄕女)들이 호로자식(胡虜子息)들과 함께 거주한 곳 이태원! 한 서린 여인들의 보금자리 이태원!여성의 시련은 12,000년 전 형성된 홀로세의 기후 조건에서 10,000년 전 시작된 농업혁명이 시발점이다. 농경과 목축의 계급사회에서 사회·경제적 지위 하락을 경험해야 했던 여성들이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 후 여성들의 권리 찾기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일정하게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여성의 지위는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여성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적잖게 자리하고 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대구 여성영화제’가 여성과 소수자들에게 초점(焦點)을 맞춘 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11년을 지나오면서 영화제를 추진해온 담당자들이 계속 겪어야 했고 겪고 있는 대구시의 무관심과 냉담함이다.문화관광 부서에 가서 재정문제와 홍보를 말하면 그들은 여성 관련 부서로 가라고 한다. 여성 관련 부서에 가서 지원을 호소하면 문화관광으로 가라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11년을 넘어섰다. ‘컬러풀’도 모자라 ‘파워풀’을 내건 대구시장들의 문화적 문맹과 정치적 맹목은 날이 갈수록 극심하다. 아직도 토건에 목을 매는 그들의 근시안적인 행정은 21세기 세계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대구시장은 ‘금호강 르네상스’라는 구호와 더불어 5천400억을 들여 강바닥을 할퀴고 자전거길을 내고 각종 오락 시설을 만들겠다고 한다. 단군 이래 가장 악질적인 4대강 사업의 아류이자 판박이로 대구시의 재정을 고갈하려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5천400억을 들여 시민들의 눈에 훤히 보이는 성과를 바탕으로 그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삼척동자도 알지 않을까?!열렬 여성들이 11년째 열고 있는 ‘대구 여성영화제’에 최소한도의 재정적인 지원과 인간적인 예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21세기 세계는 이른바 시멘트 콘크리트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의 소프트웨어가 좌지우지한다. 그 점 명징하게 이해했으면 좋겠다.

2022-11-06

이란 ‘히잡 시위’를 생각하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10월 13일 22세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테헤란에서 이란 ‘도덕 경찰’에 체포된다. 그녀가 체포된 이유는 머리카락 일부가 보일 정도로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다.사흘 뒤에 의문사한 아미니를 추모하면서 ‘히잡 시위’가 불타올랐다. 히잡 시위의 슬로건은 ‘여성, 생명, 자유’다. 히잡 시위로 지금까지 사망자 200여 명과 2천명 이상의 구금자가 발생했다고 외신은 보도한다.검사 출신으로 검찰총장을 역임한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7월 22일 제정한 ‘히잡과 순결의 날’이 히잡 시위의 원인 가운데 하나다. 여성 작가이자 예술가인 28세의 세피데 라슈노가 옷차림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성희롱을 당한 끝에 체포되었는데, 그것의 근거가 ‘히잡과 순결의 날’이었다. 이란 여성들의 옷차림에 국가가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일상화된 게다.히잡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지고 있는 까닭은 이란 정부의 통제적인 사회정책, 독재정치, 기득권 세력의 부정부패,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한 심각한 경제 상황 등이다.1979년 호메이니가 주도한 혁명으로 팔레비 국왕이 쫓겨나고 이란에는 정교일치의 신정정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세계가 한 지붕 아래 살아가는 21세기에 시대착오적인 권위주의 정권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란의 젊은 세대는 종교적인 억압에 불만을 품고 세속화를 추구하며 한류 열풍에 열광한다. 반면에 특권층은 부정부패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대를 물려가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한다.이런 복합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온 아미니의 의문사가 이란 청년들을 격동시킨 것이다. 여성들이 단순히 히잡을 안 쓰겠다고 일으킨 시위가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그들이 주장하는 여성과 생명과 자유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여성 인권운동이 19세기 후반에 태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많은 나라에서 여성 인권은 사각지대에 있다. 팔레비 체제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이란 여성들에게 호메이니 체제와 그 연장은 질곡 그 자체다. 여성이 자기들이 옷차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면이 지적되어야 한다.생명의 근저에는 여성이 자리한다. 여성과 생명은 등가(等價)이며 언제나 등치(等値) 가능하다. 여성과 생명 모두에게 자기 의사(意思) 결정권이 부여되어야 함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들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 것 또한 필연의 수순(手順)이다.여성들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자기 결정권을 온전하게 부여하지 않는 나라는 분명히 독재국가이거나 인권 후진국이거나 시대착오적인 왕조 국가일 것이다.이란의 히잡 시위는 세계 곳곳의 동조 시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이란 청년들의 시위에 담긴 정당성과 세계 시민들의 살아있는 연대 의식이 서로 결합한 까닭이다. 이란 청춘들의 목숨을 건 분투 노력을 강력히 지지하며 승리의 그 날을 간절히 기원한다.

2022-10-30

꼬마들의 재잘거림 속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전 10시 반에 강의가 있는 아침은 여유롭다. 이번 학기 수업 가운데 사흘이 9시에 시작한다. 그런 아침나절에는 7시에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 강의 내용을 미리 살피고, 이것저것 보충하려면 조금 서둘러야 한다.하지만 2교시 수업이 있는 이틀은 상대적으로 넉넉하다. 그런 날 아침 대학원동 앞 너른 인도에 꼬맹이들이 풍선을 하나씩 들고 저쪽에서 걸어온다. 재잘재잘 조잘조잘 웅얼웅얼하면서 손에 손 맞잡고 걸어오는 것이다.숫자 헤아리는 버릇이 있는 나는 아이들이 11명, 인솔 교사가 3인임을 확인한다. 네다섯 살 먹은 녀석들이 앙증맞게 내 옆을 지나간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던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이들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혼잣말한다. ‘세 명의 선생에 아이들이 열하나. 좋아졌네. 그래, 사람 대접받는 세상이 오긴 왔구나.’생각은 어린 시절로 치달린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는 전국에서 학생수 3위를 자랑했다. 학년별로 18반에서 20반까지 있었고, 학급당 학생은 예사로 90명이 넘었다. 그 많은 학생을 담임 교사 한 사람이 책임져야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우리는 뛰고 달리고 장난치고 도시락 먹고 공부하고 벌을 서가며 성장했다. 아이들이야 그렇다 쳐도 선생님들의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경제성장 한다고 교육 관련 비용을 국민 개개인에게 넘겨버린 정부 때문에 가난한 부모들은 육성회비 때문에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한 집에 너덧 명의 자녀가 기본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도시락 싸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던 엄혹한 시기를 살아남아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 그런 초로의 인생에 스치듯 다가온 유치원생들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게 찾아왔던 게다.때마침 아침 바람이 차갑지 않고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고 있어서 아이들의 가을 나들이를 축복해주고 있었다. ‘저 꼬맹이들이 내 나이가 되어도 우리 푸른별 지구가 건강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근대 성립 이후, 특히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불러온 지구 온난화는 분명히 재앙 수준이다. 1만2천년 전에 시작된 간빙기 홀로세의 기후 조건에 힘입은 인류문명이 지나치게 지구를 옥죄는 바람에 지구의 회복탄력성이 악화일로(惡化一路)를 걷고 있다.202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구 온난화를 최대한 저지하지 않는다면, 저 어린것들의 앞날은 보장하기 어렵게 된다. 가뜩이나 탐욕스럽게 젊은 세대의 등골을 빼먹은 한반도의 기성세대 아닌가?! 희대의 4대강 사업으로 사기 처먹고, 아파트와 원룸 가격 폭등시켜 젊은이들 피를 흡혈귀처럼 빨아 먹은 타락하고 노회한 세대 아닌가. 거기에 지구 온난화가 불러일으키는 최악의 환경파괴까지 덤터기 씌운다면 이건 정말 인간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파렴치다.평등이니 공정이니 하는 미사여구로 대중을 속여먹고 우려먹는 짓은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저 어린것들의 눈동자 앞에서 새빨간 거짓말은 집어치워야 마땅하다. 저 아이들의 환한 미래를 위해서 이제라도 발 벗고 나설 일이다.

2022-10-23

길에서 길로 길을 떠돌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길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그 길이 새로운 길이든, 이미 익숙한 길이든 길은 나그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2019년 한 해 동안 광주 전남대에서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나는 광주와 대구, 청도와 광주를 뻔질나게 오고 갔다. 하지만 길을 나설 때마다 가슴을 채우는 설렘과 기대는 매번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타고난 역마살 덕택일지도 모를 일이다.신천대로를 지나 남대구 톨게이트를 거쳐 갈림길에 이른다. 예전의 구마고속도로와 지금의 달빛 고속도로가 갈려 나가는 길이다. 잠시 후 고령과 합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난다. 500년 넘도록 번성했던 대가야의 본거지 고령. 한국의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로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의 합천. 길은 다시 이어진다.내가 가본 곳 가운데 가장 빼어난 산세와 지세, 수세(水勢)를 자랑하는 거창이 지척이다. 북으로 남덕유산과 수도산, 동으로 두리봉과 비계산, 서로는 기백산과 금원산처럼 1천m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황강과 남강, 위천이 들을 가로지른다. 크고 작은 분지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로움이 서슬 퍼런 산들의 기백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거창을 지나 만나는 함양은 지리산 초입이다. 함양의 지명은 진나라 수도 함양에서 따왔기로 다소 우울하다. 함양 안의면에 있는 물레방아를 떠올리며 위안(慰安) 삼는다. 1780년 동지사의 일원으로 열하(熱河)를 다녀온 연암 선생이 청나라에서 본 물레방아를 처음 조선에 세운 곳이 함양 안의 고을이었다. 그것이 1792년이라 하니 못내 원망스러운 세월이다.함양과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있는 도시가 전북 남원이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이 얽힌 광한루가 널찍하게 자리한 예향이자 묵향 남원.언젠가 경북대 학생들을 인솔하여 졸업여행 마지막 기착지로 삼았던 광한루의 추억이 엊그제처럼 다가온다. 88고속도로로 서대구와 남원을 2시간 반에 주파했던 그 길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너희가 언제 다시 남원에 오겠느냐. 같이 가보자!’ 하고 다독였던 36살 청춘의 나!남원을 뒤로하고 한참을 달려야 나타나는 순창. ‘남부군’의 지은이 이태가 1950년 9월 30일 얼떨결에 입산한 곳이 순창 엽운산(여분산)이다. 17개월 동안 남부군 빨치산으로 있다가 1952년 3월 지리산에서 군경에 체포되는 이태. 그가 남긴 시대의 기록 ‘남부군’을 소설가 이병주가 장편소설 ‘지리산’에서 표절한다. 차마 해서는 안 되는 글 도둑질을 감행한 ‘조선일보’의 작가 이병주!이제 광주도 지척이다. 대나무와 소쇄원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담양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대구 옆에 자리한 경산이나 청도처럼 담양은 광주의 배후도시 같기도 하지만, 나름의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 그리고 먹을거리가 풍성한 고장이다.그리하여 길손은 마침내 광주에 이른다. 이런 길을 떠돌면서 우리의 풍요로운 산하와 역사와 이야기를 되새긴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절, 달빛(광대) 고속도로 여행을 독자 제현께 권해드린다.

2022-10-16

말 말 말

김규종 경북대 교수 공자와 동시대인이었던 진항(陳亢)은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공자가 아들 교육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어느 날 공자의 외아들 백어(伯魚)에게 아버지에게 특별한 무엇을 배운 게 있는지 묻는다. 골똘히 생각한 백어가 답한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게 시를 공부하느냐고 물으시길래 그렇지 않습니다, 대답했더니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고 하셔서 시를 공부했습니다.” (‘논어’ 계씨편)여기서 시는 공자가 당대에 엮은 ‘시경’에 들어있는 305편의 작품을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시는 서정시에 한정되지만, ‘시경’의 시는 범위가 넓고 다채롭다.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도 있지만, 신과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노래와 군왕들의 전쟁과 사냥, 부패한 귀족들의 모습과 백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따라서 시를 공부함은 언어를 넘어서 풍속과 제례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춘추시대에 시를 공부함은 ‘시경’에 담긴 305편의 시 전체를 기억하여 자유자재하게 활용함을 의미한다. 모방이 창조의 바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와 인식을 선행한 공자의 혜안이 우뚝하다. 오늘날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극작가들이 앞선 시대 문필가들의 작품을 필사하면서 나름의 글쓰기 방식을 체화해가는 작업과 같은 방식이다.1965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전범(戰犯)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기록을 남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이히만은 그에게 부여된 과업을 기계적으로 수행한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악행을 ‘악의 평범성’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그에게 결여(缺如)된 세 가지 무능을 삼단논법으로 거명한다.생각의 무능, 언어의 무능 그리고 행동의 무능이 그것이다. 제대로 생각할 능력이 없기에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언어로 풀어내지 못하고, 그 결과 행동 역시 올바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역으로 유추해보면 행동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언어가 그릇되며, 언어가 그릇되는 이유는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말은 생각과 행동의 중간 정거장에 자리하면서 양자의 결합점이자 중추적인 구실을 한다고 하겠다.누군가의 말과 행동에 깊이가 있고 신중하며 무게가 있다면, 그것의 출발점은 깊이 있는 사유에 있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언어로 표출된다.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실행할 때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사유와 언어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튀어나오는 말은 그의 평소 생각을 드러낸다. 그런 생각과 언어의 구체적인 결과물이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얘기다.지난 며칠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대통령의 말은 수많은 말로 다시 해석과 재해석, 오해와 또 다른 오해를 증폭시키면서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국정 책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와 의미를 지닌다. 당연한 일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말에 담긴 생기(生氣)와 살기(殺氣)를 두루 살펴 신중할 일이다.

2022-09-25

과거를 묻지 마세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란 얘기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트라우마 이론 혹은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라 부른다. 20세기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득세해왔다.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트라우마 이론의 토대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불행이 생겨나고, 그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미래까지도 계속되리라는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런 논리로 현재의 불행을 과거로 돌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문제는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괴로움과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간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트라우마 이론은 지독할 정도로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이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인물이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다.인간은 감정이나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의 지금과 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게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과 여기에서 생각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아들러의 담대한 주장이다.아들러의 주장에는 많은 게 함축돼 있다. 과거에 의지하거나 과거를 핑계 삼아 현재의 엄살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현재의 행과 불행의 원인을 오직 과거에 돌리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 과거의 노예이자 수인(囚人)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인간의 미래 역시 과거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아들러는 과거와 미래의 무관함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용기의 심리학 이론가다.세 번째, 아들러는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고 천명(闡明)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를 용기 있게 살려면 과거나 미래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그의 주장에 상응하는 노래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밖에 물까치 조용히 운다.

2022-09-18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김규종 경북대 교수 교과서에 실린 안톤 쉬나크(A. Schnack·1892∼1961)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학창 시절에 여러 번 읽었다.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래서, 가을날 비는 처량히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은 끊어져 거의 일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이렇게 시작하는 미문(美文)의 결정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깊이 물든 선홍색 단풍잎처럼 마음이 내려앉아 있을 때, 나는 쉬나크의 글을 읽었다. 더러는 깊은 한숨을 동반하고, 더러는 이국적인 풍광과 습속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랬던 박박머리 소년은 청년을 지나 중년의 기나긴 터널을 거쳐 초로의 입구에 있다. 쉬나크가 절절하게 써 내려간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내겐 없다.장 자크 루소는 ‘에밀’(1762)에서,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1869)에서 인간을 괴롭히는 두 가지를 지적한 바 있다. 그 하나는 양심의 가책이고, 그 둘은 육체적 고통 혹은 질병이다. 톨스토이가 프랑스어 원문으로 ‘에밀’을 읽고 난 기억을 더듬어 소설에서 루소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고 나는 짐작한다. 육체적 고통과 질병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둘을 제외한 모든 고통은 상상의 결과라고 말한다.우리가 깊은 괴로움에 시달리는 이유를 돌이켜보면 그들의 사유가 타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 이후 정형화된 이른바 ‘트라우마 이론’은 고통의 원인을 모두 과거에서 유추하는 원인론 혹은 인과론이다. 과거에 깊은 슬픔이나 마음의 상처 또는 육체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예외 없이 지금도 괴롭고 죽기 전까지도 괴로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이런 생각을 하면서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에서 쉬나크의 글을 떠올린다. 그러다 홀연히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나이 먹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젊은 날의 치기 어린 광기나 어리석음일까, 비난의 칼날로 상대를 괴롭힌 일이었을까, 아니면 명절에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은 불효였을까?! 아니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해놓고 없던 일처럼 치부해버린 후안무치였을까?!영원히 사라져버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나락으로 떠나간 시간과 관계와 사건을 돌이킴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반추와 성찰에 담긴 어둑한 자신과 나누는 대화에는 분명 치유 이상의 힘이 있다. 오래전부터 나를 아프게 했던, 하여 기억의 씨줄과 날줄에 깊이 새겨진 고통의 현장을 눈앞에 끄집어내서 용감하게 대면하는 일이야말로 다가올 날들을 예비하는 현명한 자세 아닐까, 한다. 나를 아프게 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것은 아마도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자세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도 그들과 대면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차분한 9월 초순의 아침나절이 고요히 지나간다.

2022-09-04

어떤 대화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에게나 타인과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지식과 정보 혹은 정서의 교감을 바라기 때문이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에게 우리는 친밀감과 신뢰감을 가진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야 하고 중얼거린다. 주변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 인간관계의 질적인 차이가 확연해진다. 인간은 식주의(食住衣) 세 가지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얼마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젊은이의 전화였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믿음을 접은 지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하지만 젊은이는 막무가내였다. 일단 만나서 자신의 말을 들어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전화로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다. 상대의 눈과 표정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의 답답한 심경은 진보와 보수, 개인과 집단을 넘어서 우리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현안에 관한 집단적 무의식 혹은 일방적인 편 가르기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화나 토론이 아니라, 일방의 주장이나 욕망을 여과 없이 분출하는 한국인 특유의 집단적 무의식이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고, 생각이 같거나 비슷하면 친구가 되는 케케묵은 구시대의 이분법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다.비교적 젊은 그였지만 그동안 만나본 사람들의 면면은 상당히 다채로웠다.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고 내 의중을 묻는 정중함도 갖추고 있었다.다만, 내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불쑥 끼어드는 말버릇은 조금 거슬렸다. 아마도 그런 습관은 지금까지 그가 대면한 개인이나 집단이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해주지 않은 결과일 것이다. 존중받지 못한 사람은 조급해지기 쉬우며, 상대방의 말허리를 자르고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고요하고도 바닥 모를 심연으로 침잠하는 나의 내면세계를 본다. 젊었을 때 나 역시 정치와 정치가가 세상을 구원하고 민중을 구제하리라는 삿된 희망을 품었기에 청년을 향한 안타까운 맘이 적지 않았다. 그러하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고, 때마침 대구로 귀환한 젊고 패기만만한 정치인을 소개했다. 나처럼 늦가을 물든 단풍잎처럼 고요해진 사람에게는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했다.뭔가 새롭고 활기찬 대화와 출구를 기대하고 찾아온 젊은이를 보내고 나서 잠시 회억(回憶)에 잠긴다. 40년 세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소리쳤던 인간이 이토록 고요하게 자신의 지나간 시간과 공간과 관계와 시대를 돌아본다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하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고,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없다. 그 시절의 내가 갈구했던 변혁과 새로운 시대정신은 이미 오늘날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그와 나눈 대화가 그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왔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그만이 알 수 있고, 오직 그의 몫이므로. 하지만 우리의 미래(未來)는 희망적이라는 소회는 생생하게 남았다.

2022-08-28

거울과 저울 사이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기역과 지읒의 차이 하나로 아주 다른 뜻을 가지는 두 단어, 거울과 저울. 이런 어휘가 우리말에는 차고 넘친다. 겨울과 여울, 장마와 악마, 선발과 후발, 밥상과 책상. 이런 본보기는 거의 무한대다. 하지만 나는 거울과 저울의 상관성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거울과 저울 양자가 우리 시대의 단면 가운데 하나를 적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익숙한 질문이다. 백설공주(白雪公主) 의붓어미가 마법의 거울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거울은 백설공주라고 답한다. 여기서 중요한 수식어는 ‘예쁘다’가 아니라, ‘제일’이다. 새 왕비를 괴롭히는 것은 예쁘지 않다가 아니라, 제일 예쁜 여성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울이 어떤 기준으로 백설공주를 최고의 미녀로 지적하는지 우리는 모른다.문제는 왕비에게 있다. 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지 아니하고, 사물에 불과한 거울의 판정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그녀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폭력적이다.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막가파 혹은 일방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제일’ 예쁜 여자가 되려는 욕망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다.저울은 무게를 재는 데 유용한 도구다. 수량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길이를 재는 것이 자요,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이다. 길이와 무게는 눈금으로 표시되는 까닭에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가능성이 아주 작다. 눈금을 속이는 고수(高手)들도 있지만,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저울눈을 속이는 담대한 자는 찾기 어렵다.저울 가운데 상징적으로 쓰임새를 과시하는 형상은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일 것이다. 여신은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법에 따라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법전이다. 판검사나 변호사의 욕망과 의지가 아니라, 법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재판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저울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표현한다.문제는 저울의 그와 같은 의미가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1988년에 지강헌이 남긴 기막힌 명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마법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 세대 넘도록 금전과 금권의 위력이 한국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법과 정의는 여전히 가진 자들 편에 있으며,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의 고통은 무시당하고 있다.거울은 주관적이며 자의적이고 편향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에 비친 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비뚤어진 거울은 대상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왜곡된 형상을 구현한다. 그런데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저울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질(變質)될 수 있다는 점에 우리의 곤혹이 있다. 이질적인 양자를 사유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내로남불’을 새삼 돌이켜본다. 밤벌레 울음소리 깊어간다.

2022-08-21

헤어진다는 것

김규종 경북대 교수 젊어서는 사람 하나 만나고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 그런 의미를 곧바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별리(別離)의 각별한 고통을 경험한 뒤에 불현듯 찾아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부대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않고 일상을 영위한다는 데 있다.내가 이상엽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5월 일이다. 여느 때처럼 저녁 8시 뉴스를 보려고 도이칠란트 국영방송 ARD 앞에 앉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천연색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고, 소리가 사라지더니 한국 여학생 하나가 화염에 휩싸인 채 무슨 말을 절규하는 것이다. 7∼8초 정도 지났을까?! 사위(四圍)가 깜깜해지고 내 몸과 마음은 먹통이었다. ‘저게 뭐지,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긴 거야?!’다음날 베를린 자유대학 건물에서 이상엽과 마주쳤다. “이상엽씨, 데모 안 해?!” 내가 물었다. “선배님이 성명서 써주시면 조직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 한인 학생회는 150명 정도 유학생을 바탕으로 5인 집단 지도체제였다. 야경꾼으로 생계와 학비를 벌던 나는 초안을 잡고, 일터에서 집으로 전화했다. 그렇게 성명서는 마련되었다.1996년 12월 31일 나는 이상엽과 마주 앉았다. 교환교수로 베를린에 머물던 나는 니체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그와 선술집에서 해가 바뀌는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 보기 드문 한파(寒波)가 도이칠란트 전역을 휘감았던 시절 눈보라를 뚫고 둘이 거리를 질주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런 삼복염천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에 그런 시공간과 인연은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시간은 화살처럼 직진한다. 시간은 영원한 원운동의 본령이다. 시간은 인간의 기억에 따라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시공간 기억 속에 살아간다. 어느 때부턴지 이상엽은 나의 아끼는 동료이자 후배 교수이며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나보다 아홉 살 아래인 그를 보노라면 언제나 경이로웠다. 밝은 얼굴과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를 간직한 그가 ‘어린 왕자’처럼 내게 다가왔던 때문이다.그가 담도암 수술을 받은 것은 2019년 9월 30일이었다. 암의 급습을 받은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칠게 날뛰는 암과 대적(對敵)하면서 그는 당당하고 경이롭게 싸웠다. 마치 그의 선배이자 우상이며 경외의 대상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2020년 5월 25일 만난 그날도 그는 환하게 웃었더랬다. 작년 2월에 마주한 그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그랬던 이상엽이 내 곁을 떠나갔다. 그를 조문한 밤에 하늘은 청명했고 대기는 음습했다.몇 번이고 가능했을 이상엽과 나의 대면은 영정사진으로 이뤄졌다. 그를 만날 용기도, 떠나보낼 마음도 준비하지 못한 용렬함이 후회스럽다. 누군가와 영영 작별하려면 용기 내서 손을 내밀고 만나야 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먼 길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

2022-08-07

장애를 바라보는 이중적인 눈길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가 연일 화제를 뿌리며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우영우’의 폭발적인 인기가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 우영우를 수식하는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신입 변호사’를 생각해보면 상황이 녹록지 않다. 천재성을 가진 자폐 장애인 우영우가 대형 법률회사에 입사하여 좌충우돌하는 게 기둥 줄거리이기 때문이다.그동안 자폐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드라마는 적잖다. 영화 ‘말아톤’ (2005)과 ‘그것만이 내 세상’(2017), ‘증인’(2019)과 드라마 ‘굿닥터’ (2019) 등을 거명할 수 있다. 이런 장애 영화와 드라마를 해외로 확장하면 부지기수(不知其數)가 될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장애인을 따사롭게 보듬는 인권 선진국들은 자폐를 포함한 각종 장애인을 외면하거나 냉대하지 않고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게 받아들여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1988년 할리우드 영화 ‘레인 맨’에 등장하는 레이먼드와 그의 아우 찰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인색한 아버지로 인해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찰스가 거액의 유산 때문에 형 레이먼드와 여행하면서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레이먼드는 ‘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을 겪는 자폐 장애인이다. 한편으로는 천재적인 암기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소통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우영우 역시 자폐에 시달리는 장애인이지만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예쁘기까지 하다. 우리는 우영우를 장애인 취급하기보다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소유한 아름다운 여성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장애와 장애인 문제는 그다지 심각하거나 우울하지 않다. 우리는 여러 사회적 난제를 이겨내는 그녀의 인내력과 빼어난 능력에 감탄하면서 드라마에 공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를 따뜻하고 이해심 있는 태도로 바라보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될지 자못 궁금하다. 전장연의 주장을 보면 우리 사회의 이중적인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사람들은 우영우란 캐릭터를 보면서 함께 공감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으면 누구나 장애인도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드라마를 끄고 현실로 돌아와 출근길에서 장애인이 ‘지하철 타기 선전’을 하면 드라마를 보던 사람들의 마음들은 오간 데 없습니다.”이와 같은 이중성은 한국 사회의 민낯 가운데 하나다. 예전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팠고, 지금은 가까운 친구나 친지가 성공하면 암에 걸릴 지경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생각은 여전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우영우’가 끝나면 장애인의 이동권, 노동권, 탈시설 목소리도 시나브로 잦아들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험난한 세상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2022-07-31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 인터넷에 의미심장한 통계자료가 올라왔다. 한국갤럽이 제시한 ‘우리 사회 차별 정도 인식’의 8개 항목 수치가 그것이다. 구체적인 항목을 열거하면 이렇다. 빈부 차별, 비정규직 차별, 학력-학벌 차별, 장애인 차별, 성 소수자 차별, 국적-인종 차별, 성(性)차별, 나이 차별이다. 여덟 가지 차별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회문제라 할 것이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생각해보고자 한다.차별 정도가 매우 심각하거나 약간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을 보자. 빈부 차별 81%, 비정규직 차별 79%, 학력-학벌 차별 75%, 장애인 차별 72%, 국적-인종 차별 62%, 성 소수자 차별 58%, 나이 차별 54%, 성차별 41%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상위 네 가지 차별의 뿌리는 하나다. 돈에서 발원하는 차별이다. 가장 극심한 차별로 나타난 빈부 차별에서 그 아래의 차별들이 순차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부유한 부모 아래 성장한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사교육을 받고, 이름난 특목고에 진학하여 ‘스카이’에 들어가거나 외국 유학하고 와서 세상에 나서면 남 부러울 게 없다. 그들은 빈부 격차나 비정규직이 겪어야 할 설움과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학력과 학벌에서 오는 차별이나 아침저녁으로 우리 사회의 장애인이 경험해야 하는 온갖 수모와 차별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특수한 신분을 가진 자들의 자식들이니 말이다.2차 대전 후에 독립한 신생국 가운데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지구상의 유일한 국가라는 평가를 듣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수식어인가?! 하지만 저변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사뭇 다르다. 세계 전체에서 빈부 격차가 가장 크다는 미국에 뒤질세라 바로 뒤에서 쫓아가는 나라가 한국이다.돈과 권력과 명예를 모두 움켜잡으려는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나라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이런 배경에 굳건하게 자리하는 것이 각종 차별이며, 그 선두에 빈부 차별이 있다. 그렇다면 정부의 역할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보라. 엊그제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현 정부는 부자와 대기업을 위한 대대적인 세금 손보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직장인을 위한 감세 규모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으로 드러났다.극소수 부자들을 위한 종합부동산세 감면으로 줄어드는 세수가 1조7천억 원인데, 노동하는 직장인들의 감세 규모는 1조6천억 원에 머물고 있다. 대기업들을 위한 법인세율은 현행 25%에서 22%로 낮춰서 이 부문의 세수 역시 6조8천억 원이 줄어들 것이라 한다.2019년 12월 기준으로 종부세를 내는 한국인은 전체 인구 가운데 2.5%다. 국민 가운데 압도적인 절대다수인 97.5%는 종부세를 내고 싶어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2.5%의 부자들을 위한 감세 규모가 국민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직장인들의 감세 규모보다 크다는 것은 빈부 격차에서 유래하는 빈부 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하겠다는 의지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기막힐 만큼 막막하고 답답한 세상 아닐 수 없다.

2022-07-24

제헌절에 즈음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공표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2022년 7월 17일은 74번째 맞이하는 제헌절이었다. 그동안 우리 헌법은 9차례 개정되었는데, 그 가운데 2, 5, 6, 7, 8차의 개정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대통령 1인을 위한 헌법개정이 다섯 번이나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더욱이 마지막 헌법개정은 지난 1987년의 일이었으니, 35년 동안 헌법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영화 ‘1987’에도 나오지만, 1987년 헌법개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와 눈물과 희생이 있었는지, 우리는 안다.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해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최루탄과 맞서 싸운 눈물겨운 투쟁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희대의 사기극을 종식하고자 6월 10일, 18일, 26일의 ‘평화 대행진’에 참여한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은 기억할 만하다.오늘의 대한민국은 1987년 개정된 헌법에 기초하고 있다. 21세기 20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20세기 80년대 헌법에 의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헌법(憲法)은 낡아빠진 ‘헌’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헌법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니 하는 말이다. 동서고금에 유용한 격언이 ‘만상의 본질은 변화’에 있다는 말이다. 변하지 않는 유일자(唯一者)는 사멸한 것이기 때문이다.전투경찰과 백골단의 최루탄과 각목과 쇠파이프에 맞서 꽃병과 투석으로 맞서야 했던 시대에 개정된 헌법이 인공지능 로봇이 활보하는 우리 시대에 얼마나 부응할지는 자명하다.35년 동안 진행된 변화양상을 보노라면 눈앞이 아찔할 정도다. 이동통신과 전자우편, 인터넷과 가상공간, 똑똑한 전화기(스마트폰)의 세계적인 보급이 현저하다. 4차 산업혁명이 눈부시게 현현하는 시대 아닌가?!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이질적인 시공간을 창출한 시점에 우리의 법과 정의 개념은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단순한 권력구조 개편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시대를 인도할 시대정신을 담아낼 담대하고 원대한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앙권력과 이념의 시대에서 지방분권과 실사구시의 시대로, 나와 가족에서 우리와 공동체로, 지역과 세대 갈등에서 국민통합과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할 때다.한국 사회는 누적된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각자도생을 꾀하는 개인과 조직 때문에 사회 전반의 활기와 진취적인 기상이 위축되고 있다. 소소한 이익과 분노로 인한 갈등 요소가 곳곳에서 분출하고, 작은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다. 나아가 동아시아와 세계정세 또한 우리의 치밀한 미래기획과 슬기로운 대처를 요구하고 있다.사정이 이럴진대 이번 제헌절을 맞이하여 국가 운영의 근본적인 틀을 혁신할 수 있는 웅대하고 미래지향적인 방안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시대의 내용은 새로운 형식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분발을 촉구한다.

2022-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