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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술 소비 운동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에 대구 문화방송 ‘시인의 저녁’에 출연한 문무학 시인이 예술 소비 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을 남겼다. 한 달에 한 권의 시집이나 소설책을 구입하고, 극장이나 미술관, 음악회를 한번은 가보자는 얘기였다. 만일 시민들이 그렇게 한다면, 대구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의 생계가 해결될 것이라는 확언도 덧붙였다.참 좋은 말씀이란 생각이 든다. 한 달에 5만 원쯤 소비하여 얻어지는 이득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을 위해 지출하는 시민은 시와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술적 취향과 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여 시대에 필요한 교양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된다.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들은 생계로 인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청춘남녀 가운데 예술과 문학에 투신할 인재들도 나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유쾌한 일인가. 시와 소설, 희곡 같은 문학을 구하지 않고, 예술작품과 대면할 기회를 찾지 않는 인생은 좁고 누추할 수밖에 없다.요즘 ‘케이(K)’라는 글자가 문화-예술 영역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케이푸드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 그리고 음식이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얘기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문학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케이’와 연관된 영역은 대중성을 확보한 특정 영역과 집단에 힘입어 제한적인 인기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불고, 인기도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다. 일시적인 관심과 열기는 생명이 짧기 마련이다. 강하고 든든한 밑거름을 부여해줄 수 있는 너르고 단단한 저변이 필요하다.깊고도 넓은 문화와 예술, 문학에 기초하는 대중예술이야말로 오랜 세월 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은 자명하다. 젊은이들이 즐겨 보는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같은 매체를 살찌울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대양을 준비하자는 얘기다. 모든 예술에는 서사(敍事)가 필요하다. 전후 맥락이 통하고, 시대에 적절한 설득력과 미래기획이 담긴 서사. 건강하고 힘 있는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첫걸음이 예술 소비 운동이다.우리가 한 달에 소비하는 커피 10잔의 비용이 대구와 경북,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예술과 문학을 살찌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민들이 카페나 도서관, 거리나 광장에서 문학과 예술, 문화를 토론하며 대화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막힌 것인가! 그것이 주식과 부동산, 먹을 것과 입을 것,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대신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어느새 원로가 되어버린 문무학 시인의 백발과 주름살을 보면서, 열렬히 사셨음에도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구나, 생각한다. 그의 아름답고 절실한 바람이 조속한 시일 안에 꼭 실현되었으면 한다.

2021-09-14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요즘 포털사이트에는 올라오지 않는 것이 없다. 각종 뉴스와 오락을 비롯해 인간이 구하는 온갖 내용이 여기저기서 손짓한다. 얼마 전부터 ‘책’의 골자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어차피 책과 시작한 인생살이, 책으로 끝날 공산이 크기에 관심이 가는 터.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삽화까지 곁들인 소개란이 제법이다.글을 읽으면서 아, 이 책은 사서 읽어야겠군, 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광고와 비슷하면서도 광고를 넘는 출판사들의 내공이 절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런 글 가운데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네이비실 군사훈련 과정 가운데 침대를 정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이 훈련생들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한다.침대를 정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잠들었던 공간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은 사소하지 않다. 자신이 만들어낸 지난 밤의 흔적을 정리-정돈하는 것과 그것을 배제한 채 다른 일과에 착수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우리 일상은 생산공정의 일관작업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인생에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은 소소한 일상의 반복에 토대를 두고 조용히 진행된다. 잠자고 밥 먹고 씻고 일하고 사람 만나고 쉬고, 이런 일상의 무수한 순환에 기초하여 인간의 평생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의 흐름에서 어느 한 가지가 빠지거나 소홀해진다면 그다음 일과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늦잠에서 깨어난 아침 풍경을 떠올려보면 자명해진다. 흐트러진 잠자리를 내팽개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서둘러 옷을 걸치고, 일터로 황망하게 달려 나가는 사람에게 평온하고 생산적이며 안정적인 하루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다. 침대를 잘 정리한다는 것은 그 하루의 일상을 차분하고 여유로운 상태에서 시작하는 일을 뜻한다.침대 정리라는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자신의 신변조차 허투루 넘어가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그깟 일로 사람을 평가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범하고 담대하며 그릇이 큰 인간은 그런 시덥잖은 일은 두루뭉수리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일찍이 노자는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싹에서 생겨나고, 구층 누각도 삼태기 하나의 흙에서 비롯되며, 천릿길도 발아래서 시작한다”는 말을 남겼다. 크고 중요한 모든 것의 출발은 하나같이 작고 미소한 것이다. 사소한 일상 혹은 습관 하나 통제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가 혹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거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면하는 아주 작은 일상에서 자기에게 보여주는 성실한 자세는 다가올 먼 미래에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다. 일컬어 ‘수적천석(水滴穿石)’ 아니겠는가?!

2021-09-07

어떤 인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철없던 시절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을 읽다가 아쉬움에 잠기곤 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나온다는 초록색이 고왔던 우산의 주인 아사코. 왜 선생은 아사코와 작별해야 했을까. 아사코와 이뤄진 세 번의 만남은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소녀에서 처녀로 다시 가정주부로 선생을 만난 아사코.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적막했다.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사만 해대는 아사코의 비애 같은 것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왜 선생은 굳이 아사코를 마지막까지 만나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굳이 만날 필연의 까닭이 있었던가!얼마 전 졸업생이 ‘파안재’를 찾았다. 그는 1년에 두어 번 내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 언젠가 우리가 만난 세월을 돌이키니 30년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묶어주는 인연의 끈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한두 번만으로 인연이 다하는데, 누구는 장구한 세월,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인연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내게는 50년 된 친구도 있고, 30년 넘게 이어오는 벗들도 적잖다. 어느 때는 가족보다 더 깊고 편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오래도록 이어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설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이른바 인과율로도 해석 가능한 논리가 연기설이다.내가 있으므로 그대가 있고, 내가 소멸하므로 그대 또한 소멸한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대가 소멸하기에 나 역시 소멸한다. 나와 제삼자의 관계에서 출발은 언제나 ‘나’다. 내가 진정한 자아, 참된 자아일 경우에만 나와 제삼자의 관계, 인연이 시작된다. 30년 세월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나와 졸업생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것이리라.만남의 사이가 조금 뜨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짧은 안부 인사로 안녕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는 내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사제’ 관계라 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스승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승을 참칭(僭稱)함은 정신적 범죄와 다르지 않다.붓다가 설한 인연의 시간에서 사제 관계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연유다. 붓다에 따르면, 부부가 7천 겁, 부모 자식이 8천 겁, 형제가 9천 겁, 사제가 1만 겁이다. 신생(新生)의 불교가 우뚝 서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인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 제자를 둔 붓다와 저잣거리의 비속한 인간인 나를 동렬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가을장마 사이에 찾아온 졸업생과 늦도록 술잔 주고받으며 인생의 장면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을 맛본 유쾌한 하루였다. 신이여, 그를 축복하소서!

2021-08-31

팔고(八苦)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윤동주의 ‘팔복(八福)’을 읽노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되풀이되다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팔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도였던 시인이 ‘팔복’의 원천을 ‘마태복음’ 5장에서 찾았을 것은 자명하다.‘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 알게 된 사실은 불교에서 여덟 가지 고통, ‘팔고’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에 다른 네 가지가 더 있다는 얘기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고통이 애별리고, 밉고 싫은데 자꾸만 만나야 하는 고통이 원증회고다. 인간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얻고자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괴로운 것이 구부득고다. 팔고의 마지막 괴로움은 오온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다. ‘색즉시공’이 가리키는 ‘색’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수), 그것이 불러오는 생각(상)과 거기서 발원하는 행동(행)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식)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그 모든 것에 괴로움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인간계는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기본적인 네 가지 고통 말고도 후자의 또 다른 괴로움 네 가지가 중층적으로 엮어져 있다. 만일 고타마 붓다가 ‘원증회고’를 설했다면, 정말로 놀랄 일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평등, 형제애를 몸소 실천한 분이 싫고도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을 설하다니?! 애별리고만큼이나 원증회고는 우리를 괴롭힌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을 날마다 대면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구부득고는 21세기 한국인들을 좌절시키는 괴로움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아파트 공화국 시민으로 아파트 한 채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심란하겠는가! 남들 타고 다니는 화려한 외제 자동차는 또 어떤가! 명품 가방과 핸드백 혹은 고가의 보석류를 갈망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노자의 ‘도덕경’ 44장을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而長久)”내가 생각기로, 가장 커다란 고통은 역시 오온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색’이 불러오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과정과 결과는 언제나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을 가리키는 가장 명료한 근거는 분명 즉자적인 욕망과 욕망을 달성하려는 구체적인 실현방식일 것이다.윤동주는 생에 내재한 이질적인 요소인 ‘슬픔’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 욕망하는 자들의 실현 불가능한 현실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도로서 ‘슬픔’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영원히’ 슬픈 족속으로 인간을 규정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2021-08-24

아, 아프가니스탄!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년 만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한다. 요즘 외신은 아프가니스탄 관련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우리와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쾰른에서 어학 과정을 다닐 때 도이칠란트 남성과 혼인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중년 여성과 ‘사전’에 관해 이야기한 일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독일어 사전이 없어서 답답하고 힘들다고 그녀는 말했다.멀고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구나, 하는 기억만 아직도 남아있다. 외국인들을 가장 많이 만나서 이야기한 시공간은 어학 과정 다닐 때였다. 30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도이칠란트 체류 외국인들이었다. 한반도 남단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의 문제에 어렴풋하게나마 눈을 떴던 것이 그 무렵 일이다.아프가니스탄은 대단한 요충지에 있다. 동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 북으로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앙아시아 한가운데 있으면서, 인도 아대륙과 접경하고 있으며, 중동의 강경파 이슬람원리주의가 득세하는 이란과도 이웃한다. 구소련의 세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중국의 신강(新疆)과 국경이 닿아 있다.그런 까닭인지 모르지만, 세계열강의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욕망은 유구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과 연관돼 있다. 1979년 12월 소련은 이슬람원리주의 무장세력인 무자헤딘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10년 동안 소련은 100조원에 이르는 전비(戰費)와 5만의 병력손상을 입은 채 철군한다. 대영제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랜 세월 경험한 쓰라린 패배의 교훈을 새기지 못한 까닭이다.이번에는 미국이다. 2001년 미국은 9·11 테러 배후 조종자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탈레반을 압박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은 대규모 공습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2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미국은 쫓기듯 황망하게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단행하고 있다. 영화 ‘모가디슈’에서 목숨을 걸고 소말리아를 탈출하던 사람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19세기 대영제국과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이어 21세기 유일 강대국 미국마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한 원인은 무엇인가?! 분석가들은 아프가니스탄의 가혹한 기후, 거친 산악 지형과 토착 세력의 완강한 저항 따위를 꼽는다. 험준한 산악에 의지하여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펼치는 저항 세력에 막혀 침략자들은 패퇴를 반복해온 셈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결과한 것은 사망 24만, 난민 500만, 전비 1,100조원으로 드러났다.인도차이나반도가 도미노처럼 공산화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시작한 베트남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듯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실패한 첨병이 되고 말았다. 21세기 세계는 특정 제국의 일방적인 지배와 점령이 아니라 우의와 친선에 기초한 평화가 이뤄졌으면 한다.

2021-08-17

하루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밤새 울어대는 벌레와 지렁이들의 합창으로 선잠에서 깨어난다. 처서 전후부터 울기 시작하는 지렁이의 맑은 음색도 좋지만, 가을 초입을 알리는 풀벌레 울음소리도 그에 못지않다. 어제 아침나절 서울의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새벽녘의 기억이 잠시 상념에 잠기게 한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토록 다른 세상과 만난다는 일이 낯설다. 그것도 같은 나라 같은 하늘 아래서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하루라는 시간이 제법 길구나,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시간에는 상대성이 개입한다. 상황에 따라서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것이 시간이다.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의 찰나 같은 짧음과 지겹고 싫은 관계에서 느껴지는 영겁의 장구함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미인과 함께하는 시간의 짧음과 뜨거운 화덕 위에서 맛보는 기나긴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성을 말한 바 있다.같은 시간을 달리 경험하는 인간을 생각하면 무상하다는 어휘가 떠오른다. 늘 그러하지 않다는,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 폐부를 찌른다. ‘붓다 연대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자명한 사실 하나. 우리 기분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 단순하고 명쾌하게 인간의 기분과 감정 상태를 규정한다. 항상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무시로 변하는 감정과 기분!여기서 우리는 항심이나 항상성을 연상한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과 일관성을 유지해나가는 성질 말이다. 자신의 기분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언제나 같은 마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거움과 자신을 향한 엄중함이 상존(常存)하는 내면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의 어려움이 손에 닿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동서양 지혜를 다룬 서책마다 등장하는 공통의 문장 있다.“늘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는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어제의 위대한 승리와 환희가 오늘과 내일도 가능하지 않다는 가르침. 하지만 욕망의 화신인 인간은 어제의 축복과 광희(狂喜)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거기서 좌절과 실의가 생겨난다. 실패는 망각하고, 성공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선택적 기억의 수인(囚人)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허우적대면서….언젠가 김범수의 ‘하루’가 레코드 가게와 방송을 초토화한 적이 있다. 거리에도 광장에도 지하철에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하루’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따라 부를 수도 없이 어렵고 신비로운 노래 ‘하루’. 고통스러운 이별을 발라드풍으로 애절하게 노래하는 가수의 절규가 저물어가는 하오의 먼지 풀풀 일어나는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풍경. 거기서 되풀이되는 하루와 또 다른 하루의 균질한 시간의 경과.똑같은 색깔과 향기와 무게로 하루가 겹쳐지고 포개지는 날들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청춘의 상실과 비련은 눈물겹다. 그래도 내일은 다른 얼굴의 하루가 되기를!

2021-08-10

소원

김규종경북대 교수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소원 한두 가지는 있는 법. 도선사 명부전 오르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거기 올려진 무수한 작은 돌멩이를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간절한 소원을 담아 올려놓은 돌멩이들. 염천의 작열(炸裂)하는 태양 아래 온몸을 드러낸 채 천둥벌거숭이로 소원을 갈구하는 인간군상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자처럼 용감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연꽃처럼 깨끗했던 청춘의 날들에 내 소원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신혼여행 길에서 맞은 동해 일출을 보면서 나는 소원을 간절하게 희구했다. 한 주에 한 번꼴로 일출을 볼 수 있다던 커피 상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졌던 그 날의 기막힌 일출. 고교시절 배운 의유당의 ‘동명일기’가 절로 떠올랐던 장관(壯觀)의 일출!새털처럼 수많았던 날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동안에도 내게는 소원이 있었다.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서 아, 역시 조폭이 멋지네, 하고 생각했다. 새파랗던 20대에 시인이 되지 못했음을 한탄하던 백면서생이 어느덧 물리적 폭력을 열망하는 30대가 된 것이다. 40대에 우연히 마주친 트럭 운전사의 고독한 얼굴에서 읽히는 자유인의 표상이 흐뭇해서 1만2천킬로미터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트럭 운전사가 돼보리라 하는 꿈도 있었다.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 대통령 한답시고 들먹거리는 시점이 오자 소원도 모습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을 바꿔보자! 세상을 바꿀 힘은 글에 있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50대에 내가 품은 소원은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문필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은 공책을 구해서 날마다 소원을 만년필로 정성껏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간다. 아직도 내게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예전의 소원과 많이 다른 것이다.조직 폭력배의 멋과 낭만도 아니고, 트럭 운전사의 자유분방함도 아니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바람도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며, 내게 주어진 배역은 소소한 단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 먼저 바꾸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자명한 이치도 깨달았던 때문이다. 아니,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은 채 굴러갈 것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이 허망한 노릇이리라. 그것이 사적(私的)인 소소한 것이든, 만고에 길이 빛날 장쾌한 것이든, 각자(各自)의 소원에는 고유한 빛깔과 향기가 있다. 소원은 지극히 바라는 꿈 같은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으되 죽어버린 사람은 꿈이 없다. 그래서다. 면담을 신청한 학생들에게 꿈을 묻는 까닭은 거기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바라는 직장이나 회사를 말한다. 배운 것이 ‘장래희망’이니,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이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서역정토(西域淨土)로 먼 길 떠난 모친 송별하는 길에서 만난 숱한 돌멩이에 새겨진 꿈을 보면서 기원한다. ‘부디 그대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환한 햇살 아래 능소화(凌9704花)와 비비추, 어여쁘게 부시다.

2021-08-03

두 여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삼복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의 징후가 감지된다. 그것도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게 미심쩍기 그지없다. 그런 와중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문명은 30년 남았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나니 불안이 증폭된다. 그는 기후변화와 함께 핵무기, 자원고갈, 불평등을 인류문명 종말의 4대 이유라고 단언한다.2050년에 인류는 다이아몬드의 공언(公言)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모친상을 치르면서 마주친 두 여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다. 30년 후의 세상과 인류도 중요하지만, 지금과 여기의 사람과 관계도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면서 현재를 저당잡곤 했다. 거창한 기획과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현재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버릇 때문이다.불시에 찾아온 모친의 별세는 우리 형제들과 가족 전체를 망연자실하게 하였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코로나19도 고려하면서 역할을 분담한다. 그러다가 맞이한 사람이 상조회사의 중년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가입한 상조회사에 근무하는 여성 상조 전문가. 그분은 우리가 궁금해하고 모르는, 상조와 관련한 모든 문제를 소상하게 일러주고 충고해주었다.어머니의 입관까지 그이의 몫이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성스레 채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굿바이’에 등장하는 ‘납관사’가 절로 떠올랐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는 사자(死者)들의 육신을 정성껏 씻고 닦아서 살아생전 이상의 정갈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하는 사람. 그런 구실까지 도맡아 진행하는 여성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어머니가 세상과 작별하기 19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생극 공원묘지에 누워계셨다. 우리는 가족회의에서 개장(改葬)과 화장, 그리고 가족 납골묘로 의견을 모았다. 부친 산소의 개장과 화장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동생이 알아낸 전문가 역시 이 분야에서 18년 근무한 중년 여성 베테랑이었다. 몹시 습하고 더운 날 아침에 처음 본 그분은 남성들을 진두지휘해가며 아버지의 유골을 세세하게 수습하였다.이마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냐고 물었다. 누군가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한다. 일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법성게’에 나오는 ‘불수자성수연성’ 아닐까, 생각한다.헌신적이고 성실한 두 여성의 도움을 받아 지난 일요일 가족 납골묘에 두 분의 유골을 모셨다. 어떤 안도감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고마운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도움과 헌신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하루가 지나간다.

2021-07-27

회갑기념논문집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사노라면 문득 옛일을 돌이키거나 그리워하는 경우가 있다.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쓴 논문을 찾았기로 그런 정황에 빠져든다. 1920년대 소련 희곡을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유학을 떠난 두 번째 해에 쾰른에서 사흘 연속 알바를 하게 되었다. 견본시장에서 화재와 도둑을 방지하는 야경꾼 노릇을 한 것이다.사흘 일해서 당시 돈으로 400마르크, 한화(韓貨)로 18만원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행복한 마음에 대학 인근 책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불가코프 희곡전집’과 ‘러시아-독일어 사전’같은 책을 사들인다.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이전의 한국에서 러시아문학 관련 서적을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러시아희곡을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형편이어서 서책 구하기가 난제였다.지도교수는 “여기서 공부하면 어떠냐?!”고 물으셨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오늘날처럼 러시아 자료가 풍성했다면 필시 나는 유학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학을 나간 결정적인 이유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현대 중문학이나 브레히트 연구자들도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코프 희곡전집은 감동 이상으로 다가왔다.희곡 ‘투르빈씨네의 나날들(Dni Turninych)’을 읽다가 어느 날 난관에 봉착한다. ‘독서백편(讀書百篇)’을 수없이 되풀이해도 ‘의자현(義自現)’이 되지 않는 것이다.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래, 불가코프가 키예프 출신이잖아. 필시 러시아어가 아니고, 우크라이나어일 가능성도 있겠군.’ 그런 생각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그길로 쾰른 대학 슬라브학부 도서관을 찾아 두 권으로 출간된 ‘러시아-우크라이나어’ 사전을 빌려 복사한다. 당시 도이칠란트에서는 복사는 원하는 사람이 하되, 제본은 제본 전문가가 해주는 식이었다. 적잖은 돈을 들여 두툼하고 큼지막한 사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렇게 풀렸다.희곡에서 불가코프는 러시아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를 곳곳에서 활용하였다. 작품을 읽고 난 소회는 뿌듯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활의 첫 번째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논문을 마칠 무렵 서울에서 연락이 온다. 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을 낼 터이니, 논문 한 편 보내라는 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났을 때 찾아든 기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나는 느낌표로 바꿨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런 생생한 쾌감과 즐거움은 찾아오지 않았다.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은 그렇게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싫든 좋든 추억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추억이 우리를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인도하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백세시대’가 보편화한 오늘날 ‘회갑기념논문집’을 출간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오후에 만난 색바랜 논문을 읽다가 홀연 찾아든 소회가 감상에 젖도록 한다. 창밖에 매미 크게 운다.

2021-07-20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우연찮은 기회에 접했던 ‘화엄일승법계도’. 의상(義湘)은 화엄종의 대가이자 스승인 지엄(智嚴)스님의 지시에 따라 ‘화엄경’ 80권을 줄여서 ‘대승장’을 저술한다. 하지만 지엄은 각고의 노력으로 의상이 지은 ‘대승장’을 화로에 던져 불살라버린다. 하지만 화로에는 210글자가 불타지 않고 남는다. 지엄이 그것을 의상에게 주어 문리(文理)가 통하도록 한 것이 7언 30행 210자로 전해지는 ‘화엄일승법계도’ 혹은 ‘법성게(法性偈)’다.얼마 전에 210자 전체의 뜻을 이해하고, 모든 문장을 한문으로 기억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15분 내외의 시간을 들여 ‘화엄일승법계도’를 써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블로그에도 ‘법성원융무이상’으로 시작하는 ‘법성게’를 소재로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것을 마무리한 것이 어저께 일이다. 마지막 문장은 ‘구래부동명위불’이다.좋은 글이나 시구 혹은 표현은 기억해야 제맛이 나는 모양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통째로 기억하기 전에도 몇몇 문장은 기억한 일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 같은 구절이 그렇다. ‘하나에 전부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는 것과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하나와 전체, 티끌과 우주를 관통하는 지적 통찰!분별이 심해지는 탓에 분별하되, 차별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나이 먹는다는 일은 이래서 우울하다. 대상을 시시콜콜 따지고 분류하면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한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그리로 향한다. 공자가 ‘이순(耳順)’을 설파한 것에는 까닭이 있는 게다.‘화엄일승법계도’ 가운데 특히 마음에 와닿는 글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 따라 이룬다는 의미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한사코 지키려고 하거나, 그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왜냐면 타고난 본성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며,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의상은 그 반대를 설파한 것이다. 타고난 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연이라는 말이다. 인연을 다른 말로 풀면 연기(緣起)가 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기에 저것도 소멸한다는 인과율이다. 우리의 생성 원인도 인연이자 연기이며 인과율이다. 부모님의 인연 따라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현대인은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대상이나 관계를 결정하려고 한다. 강력한 본성이나 특출한 능력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볼멘소리와 투쟁과 아수라판이 벌어진다. 성취되지 못한 욕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본성을 누르고 인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고 인연이 오기를 차분히 기다려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창밖 천둥소리가 비구름 부른다.

2021-07-13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7월 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1921년 7월 초하루 상해에서 13명의 대표와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100년의 역사를 맞은 것이다. 2021년 7월 중국 공산당에는 9천200만의 당원이 가입돼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정치집단이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72년째 중국을 지배해오고 있다.1949년 이후 공산당은 지도자들에 따라 세 시기로 나뉜다. 모택동이 대표하는 첫 번째 시기는 1949년부터 1976년까지다. 영국을 뛰어넘어 미국을 잡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던 시기다. 하지만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대약진운동으로 최대 4천만에 이르는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아울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으로 150만에 이르는 사람이 죽고, 360만의 박해자가 나온 참담한 시기였다.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하면서 시작된 두 번째 시기는 ‘도광양회’로 표현된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했던 시기다. 등소평의 뒤를 이은 강택민과 호금도 역시 은인자중 힘을 길러갔던 개혁과 개방의 시기다. 이 시기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주선 신주(神舟)와 우주정거장 천궁(天宮)의 발사 성공과 2008년 북경 올림픽이다.2013년부터 권력 최고봉에 오른 습근평의 시대가 세 번째 시기다. 습근평은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2018년 국가주석 3연임 금지를 헌법에서 삭제하여 황제 등극을 기정사실로 만든다. ‘도광양회’ 대신에 그가 도입한 외교정책은 ‘전랑(戰狼)외교’로 불린다. ‘늑대 전사’라는 의미를 담은 전랑외교에 따라 중국은 힘을 앞세워 다른 나라들을 상대하고 있다.습근평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년인 2049년에 ‘중국몽’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의 실현 방도로 ‘일대일로(一帶一路)’ 제시된다. 21세기판 실크로드로 중화민족의 야망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려는 것이 ‘일대일로’의 핵심이다. 홍콩의 민주화운동 억압과 신장-위구르와 티베트의 무자비한 탄압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이 시점에서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것이 ‘중화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뚝한 민족으로 중국 민족을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 중화 민족주의 고갱이다. 민족주의는 수세에 몰리는 때에는 해당 민족을 구원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토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그것이 공격적이고 약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면 주변 세계와 불화와 반목을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극단적인 대립과 충돌 양상을 불러온다.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주의와 제3 제국이 불러온 2차 세계대전과 그 참상을 돌이켜 보라.중국이 요즘 미국과 벌이는 일련의 대결과 충돌 양상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 1위 자리는 타민족들과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임을 중국 공산당과 습근평 주석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21-07-06

자전과 공전

김규종 경북대 교수 황망하게 상을 치르고, 초제(初祭) 모시고 여드레 만에 돌아온 집 마당에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공사판의 어지러움이 완연하다. 한 달을 넘긴 공사가 이제는 정리되었으면 한다. 하기야 상당 기간 세차장을 찾지 못한 탓에 승용차도 말이 아니어서 도중에 세차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터.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게 실상 적잖다.저녁이 다가올 무렵 가방 하나 둘러매고 길을 나선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들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오늘은 허청허청 발걸음이 무디다. ‘그래, 넌 이제부터 너의 내부에 강고한 의지처를 찾아야 한다.’ 헤어지기 전에 막내 누이에게 전한 말이다.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모친과 함께한 누이이기에 상실이 누구보다 크다. 차라리 누이를 위로하라!오늘따라 트럭들이 누런 먼지 풀풀 날리며 질주한다. ‘그래, 농번기 아닌가. 내가 잠시 피하면 그만 아닌가.’ 구름장에 가려진 저녁해가 살며시 얼굴 내밀고, 먼 곳에서 뻐꾸기 운다. 한사코 달려드는 하루살이 무리와 떼로 날아가는 오리가 요란하다. 우렁이들은 어린 모의 줄기에 알을 낳아 후예를 기르고 있다. 창공에 여객기 한 대 날아간다.노란 루드베키아가 하얀 망초와 곳곳에 얼려 화사한 정취 선사한다. 아쉬운 낚시꾼 하나가 청도천을 배회한다.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왜가리와 학이 귀소(歸巢) 서두른다. 그들에게 손 흔들다가 잠시 상념에 든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지구별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을 텐데, 왜 나는 그걸 느끼지 못할까.’뉘엿뉘엿 넘어가는 서녘의 태양에 작별 인사하니 해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붉은 구름장만이 그곳에 태양계 주인이 있었음을 웅변한다. 지구는 시속 1,609킬로미터로 자전하며, 107,160킬로미터로 공전한다고 한다. 시속 16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속도감이 상당하다. 그것의 10배로 지구는 스스로 돌고 있다.자전의 66.6배 속도로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우주선 속도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광활하고 허허로운 우주공간을 팽이 돌 듯 날아가는 푸른 지구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왜 우리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필시 인간이 감촉하기에 지구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 아닐까?!수많은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세운다. 자신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구는 오늘도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다. 우리도 언젠가 홀연 불귀의 객이 되리라는 자명한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 깊이 침윤된 채 그것들의 수인(囚人)으로 존재한다.만약에 우리가 지구별의 미미한 구성원의 하나일 뿐이고, 타자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삶은 짧게 주어진 위대한 축복이자 기적이기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밀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검붉은 저녁노을이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2021-06-29

어머니를 보내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토요일 한가로운 오후의 적막을 깨뜨리는 전화 수신음! 뭔가, 이런 시각에 나의 고막을 어지럽히는 소리는?! 동생의 갈라지고 긴장된 목소리가 많은 것을 암시한다. “그래 알았어! 정리하고 바로 올라갈게. 이따가 서울에서 보자.” 잠시 망연한 상태에서 생각을 수습한다. ‘그래, 올 것이 왔지만, 너무 이르군. 예상치 못한 타격이야.’삶은 언제나 느닷없이 문제를 던진다. 해결 능력과 무관하게 불쑥 난제를 던지고 가버린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새침한 얼굴로 시간과 인생은 흘러간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대응책은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아니던가?!언제나 예외는 있다. 19년 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부음이 그랬고, 이번 어머니의 별세가 또 그러하다. 88세 ‘미수(米壽)’라서 형제-손자들 모여 잔치해드린 게 열흘 남짓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젊었던 시절 아버지가 떠나셨을 때는 천붕(天崩) 같은 슬픔과 설움이 밀어닥쳤더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오랜 세월 꿋꿋하게 버티신 어머니였기에 이르단 느낌은 있지만, 마음의 붕괴는 없다. 다만 어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뜻깊게 보내드리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절집 큰스님들 말씀에 귀를 기울이셨던 어머니. 어머니께 고타마 붓다의 의미심장한 설법과 삶의 본령을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해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것이다.남편과 자식과 손자들 걱정으로 늘 괴로워했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에게 깊은 연민을 품었더랬다. 그래서 몇 번은 작심하고 말씀을 드리기도 했다. “어머니, 이제는 저희와 애들 걱정은 내려놓고, 어머니 인생과 다가올 죽음을 생각해보시면 어떠세요?!”어머니는 내 생각에 반대하셨다. 그것은 당신의 인생에 대한 자신감과 우월의식 그리고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자식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었을 터다. 부모 자식의 인연이 무려 8천 겁이라는데, 장구한 세월의 인연이 축적돼 현생에서 마주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으로 살아온 날들에 대한 반추는 여러 색깔로 현현한다.강렬한 의지와 욕망과 진취적 기상이 남달랐던 어머니. 그래서 남처럼 성취하지 못한 꿈과 욕망으로 괴로워했던 어머니. 이제, 그런 건 내려놓으시고, 어머니 자신의 삶이 어떤 의미와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버지와 우리 자식들과 맺어온 인연의 의미와 향기를 성찰하면 어떠시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어머니.누구에게나 고유한 삶의 방식과 생활양식이 있기 마련이라, 나는 어머니에게 차마 강권하지는 못하였다. 내가 개입할 성질의 인생을 어머니는 살아오지도 살고 싶지도 않았던 터다. 어찌 감히 간섭하겠는가?! 다만, 이제는 말씀드리고 싶다. “정말 다 내려놓고 편히 먼 길 떠나세요. 당당하게 염라 만나서 화통하게 웃으시며 어머니 일생을 이야기하세요. 어머니, 고생 참 많이 하셨어요! 편히 쉬세요!”

2021-06-22

버림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애초 보름 예정으로 시작한 집수리 공사가 한 달을 넘기게 되었다. 2층 베란다에 창유리 끼우고, 들뜬 외벽 보강 정도 생각했는데, 7년 넘긴 목조주택은 곳곳에서 사람의 손을 부르고 있었다. 하기야 시간과 더불어 쇠락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잠시 생각한다.공사를 지휘하는 박 대목(大木)은 마당의 조경도 손보았으면 한다. 주밀(綢密)하게 서 있는 크고 작은 나무가 분위기를 상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워진 나는 왕벚나무를 전지한다. 벌써 몇 차례 가지를 쳐냈으나, 왕성한 번식욕과 과시욕을 제어하기에 역부족이다.대문 좌우에 번성한 황매와 장미 그리고 조팝나무에도 전지가위가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쓰지 않는 닭장이 눈에 거슬린다. 닭장 거주자였던 청계 9마리는 재작년 전남대 교환교수로 나가기 전에 이웃에게 넘겨주었다. 빈 닭장은 창고로 사용해왔던 터다. 그것이 거슬려 철거하기로 한다. 여분의 공간이 생겨난 마당이 한결 널찍하고 시원하다.내부에도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오랜 세월 입지도 쓰지도 않는 물건이 지천으로 넘쳐났다. 이번 기회에 낱낱이 들여다보고 버리기로 한다. 아쉬울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 그렇게 버리자고 마음먹고 정리하기 시작하니 일곱 부대가 쉽게 나온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었으나, 따로 살았던 사물이 자리를 비운 것이다. 퇴락한 추억과 완전하게 작별한 기분이다.물건을 정리하다 든 생각은 채움보다 버림이 어렵고 쓸모 있다는 게다. 이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누가 주었는지, 언제 받았는지, 무슨 쓸모가 있는지 가물가물한 사물의 연이은 행렬. 다용도실과 옷장, 책상과 장식장, 주방에서 나온 물건들에 담긴 나의 다채로운 욕망은 찬란하되 누추한 것이었다. 처연한 인간의 탐욕이여!덕분에 오래 묵은 과실주와 안 쓰던 물품이 본연의 자리를 꿰차고 의젓하게 앉았다. 더러는 돌아보고, 더러는 살펴서 쓰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옛것이 오래도록 자리를 차지하면 새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 오래되고 낡은 것은 버려야 비로소 새로운 것이 자리 잡고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터다.우리 내면의 오래되고 익숙한 습관과 사고방식도 오래된 물건과 매한가지다. 반성과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행동과 사유는 인간의 생기와 미래기획을 좀먹는다. 어제와 그제처럼 영위되는 오늘과 내일의 삶은 짙게 낀 이끼처럼 눅눅하고 축축하기 마련이다. 버리지 않은 혹은 버리지 못한 물건은 우리의 견고한 자기방어와 관련이 있다.시간과 더불어 축적된 자신만의 생활방식은 안전하고 아늑하며 편리하다. 그것을 매너리즘이라 한다. 매너리즘은 낡고 둔탁하지만, 익숙한 옷이나 물건처럼 우리를 아늑하게 인도한다. 그런 평안함과 익숙함이 우리를 타성과 습관의 눅눅한 늪지대로 인도한다. 거기서 우리는 환경과 습속의 수인(囚人)이 되어 사멸의 길에 접어든다. 버릴 것은 버릴 일이다!

2021-06-15

대학 무상교육을 실행하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은 누구일까?! 온갖 고난과 난관을 돌파하지만 끝내 위로받지 못한 장발장인가, 법률의 주구로 스스로 목숨을 버려야 했던 자베르인가, 아니면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다가 그를 대신해 총 맞고 죽은 에포닌인가?! 단언컨대 미혼모이자 코제트의 엄마인 팡틴이 제일 불쌍하다.팡틴은 바람둥이 애인 톨로미에스에게 버림받고 홀로 코제트를 기르다 악질적인 테나르디에 부부에게 아이를 맡기고 공장에 들어간다. 200년 전 프랑스는 오늘날 대한민국처럼 미혼모를 박대했다. 미혼모에 문맹인 팡틴은 공장에서 쫓겨나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다가 아이 때문에 머리털을 자르고, 생니를 뽑다가 끝내 거리의 여자로 전락한다.만약 그녀가 문맹이 아니었다면, 인생 행로는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무상으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죄악’이라고 주장한 위고는 초등학교 무상교육을 관철한다. 1880년대 일이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조선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을 당시 프랑스는 초등학교 의무교육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대학과 대학원도 무상으로 교육한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 가운데 16개국이 대학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대학교육을 개인의 선택과 비용으로 치러야 하는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과 일본 정도다. 내가 유학했던 도이칠란트는 1945년 제2차 대전으로 나라 전체가 폭삭 망해버린 그 이듬해인 1946년부터 전면적인 대학 무상교육에 돌입한다.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의 그들이 대학 무상교육을 실행한 까닭은 교육이야말로 그들의 미래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변변한 부존자원이 없는 도이칠란트의 미래 먹을거리는 오직 교육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들은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모든 외국 유학생들까지 무상으로 교육했다. 나는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많은 국민이 부실한 사립대학 문제와 무상교육에 필요한 재원을 걱정한다. 천만번 옳은 말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부실 사립대학은 ‘사립학교법’을 시급히 재정비하여 퇴출하거나, 공영형 사립대학으로 재편해야 한다. 국가가 대학교육을 전면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면 분명히 타개할 방도가 있으리라 생각한다.재정적인 면은 훨씬 수월하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에 따르면 대학 무상교육에 필요한 재정은 연간 12조원 정도라고 한다. 지난 2006년부터 작년까지 15년 동안 정부는 200조가 넘는 돈을 출산장려대책에 쏟아부었다. 결과는 참담하다. 작년에는 사망자 숫자가 신생아 숫자를 능가하는 ‘데드크로스’까지 발생했다.애먼 일에 헛돈 쓰지 말고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면 대학 무상교육은 분명히 가능하다. 무상교육으로 젊은이들과 학부모들의 큰 시름 덜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훌륭한 출산 장려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부와 교육부는 거시적이고 대승적인 판단을 했으면 한다.

2021-06-08

보는 것과 듣는 것

김규종 경북대 교수 봄날이 저문다. 불후의 명곡 ‘봄날은 간다’가 귓전을 쨍하니 울리는 시점이다. 왔으니 가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하되 봄이 오는 것은 반갑지만, 가는 것은 아쉽다. 우리에게 ‘보는 것(봄)’의 향연을 차고 넘치도록 선사한 화사한 봄날이 퇴장을 준비하는 시절이다. 하기야 소만(小滿)은 벌써 지났고, 6월 5일은 망종(芒種)이다.너른 들을 걷다가 어디선가 새 울음소리 들린다. 유심히 들여다보아도 소리는 들리지만,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저런 새소리를 금방 구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숨 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문득 물 위를 걷듯 달리듯 뛰듯 분망하게 돌아다니는 꼬마물떼새 두 마리. 청아하고 높은 음색의 소리 주인공은 그들이다.작고 여윈 녀석들에게서 저리 높고 맑은소리 나오는구나, 생각하니 형상과 소리의 부조화와 불협화가 떠온다. 크고 두터운 생명의 소리는 낮고 둔탁하며 위압적이다. 작고 여린 생명체의 소리는 날카로우며 앳된 서정과 동행이다. 그런데 홀연히 들려온 저들의 소리는 예상과 달랐으니, 형상과 소리의 어긋남이다.보는 것과 들리는 것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불협화는 유쾌함과 당혹감을 선사한다. 당연한 기대치를 단박에 박살 내는 현장감을 뭐라 해야 할 것인가! 묵직하고 살집 좋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날카롭고 새된 목소리를 들을라치면 경이로울 때도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기에 예단은 언제나 금물이다.대상을 인식할 때 동원하는 최초의 감각기관은 눈이다. 시각이야말로 정보를 수신하고 판단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수단이다. 오감 가운데 으뜸이 시각인 것은 당연지사. 오죽하면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법전(法典) ‘경국대전’에서도 최악의 장애를 ‘맹인(盲人)’으로 판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하지만 보는 것, 즉 외관(外觀)은 우리를 속인다. 조선 선비 이직의 말처럼 ‘겉 희고 속 검은 이’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외모에 정신을 놓고 실패를 경험한다. 시각을 보완하는 가장 적절한 감관(感官)이 청각인 까닭은 거기 있다. 소리를 듣고 대상을 온전하게 판단하는 것이다.얼굴이 모두 다른 것처럼 누구에게나 고유한 목소리가 있다. 소리에는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과 성품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각에 압도된 나머지 청각신호에 대체로 태무심(殆無心)하다. 봄날은 보는 것의 나날들이다. 그 봄날이 간다. 보는 것의 시간이 흘러가면 열매 맺는 계절, 여름이 다가온다. 이 시기에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시각이 아닌 청각이다.요즘 부쩍 꾀꼬리와 소쩍새 울어대고, 개구리는 밤늦도록 울면서 시절을 알린다. 저런 낱낱의 생명체에게 허여된 시절이 오고 가면서 자연의 순환과 우주 운항은 어김없이 진행된다. 이제 여름의 노래에 귀 기울일 때다!

2021-06-01

집을 수리하면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중량 목구조로 신축한 지 어언 7년. 벽면이 들뜨고, 그 사이로 습기 들어오고, 유리창 없는 베란다에는 비바람으로 물이 고이기도 한다. 손을 볼 때가 온 것이다. 와중에 참새들이 극성하여 지붕 틈새마다 둥지 틀고 새끼 키운다고 야단이다. 수소문한 끝에 정직하고 성실한 시공자를 만나게 됐다.“전체적으로 최소 2천500에서 3천 정도 생각하셔야 합니다.”“네?! 승용차 한 대 값이네요!”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애초 집을 지으면서 신중하게 숙고해야 할 것인데, 워낙 단과반이 체질이라 속도전으로 임한 것이 화근이다. “저는 야맵니다!” 그 말 한마디에 훅 가는 바람에 여기까지 왔다. 시골에 목조주택을 신축하는 일은 적잖은 배포와 과단성이 필요하다. 나는 전광석화처럼 밀고 갔다.짜장과 짬뽕 사이의 선택이 어려운 것처럼 건축업자 선택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로움을 단박에 던져버리고 “잘해봅시다!” 한 마디로 일사천리 밀어붙인 것이다. 뭐, 그렇다고 크게 후회하지는 않는다. 농촌에서 누릴 수 있는 삶의 행복은 빼놓지 않고 향수(享受)한 까닭이다. 하지만 집도 사람처럼 늙는다.늙고 낡아가는 집을 방치하면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게 된다. 노자는 그것을 가리켜 “합포지목 생어호말(合抱之木 生於毫末) 아름드리나무도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이번에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 다시 손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여러 근심 물리치고 “해봅시다!” 하고 수리를 결정했다.꼼꼼하고 매사에 치밀한 성품의 박 대목은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을 자상하게 설명해주고, 마당의 초목 재배치까지 일러준다. 내가 가꿔온 마당을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른 것이어서 나로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사 와서 심은 여러 나무며 풀이 제멋대로 자라고, 그것을 제때 손보지 않은 탓에 혼란하다는 것이다.집을 손보면서 집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어 누추해지기 전에 요모조모 뜯어보고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도 누추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만큼 앞서서 질주하는데, 나만 낡은 것을 고집함도 희극적인 일이다. 수구와 보수가 희화화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시대착오적인 것을 전통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유연한 자세로 대상을 보고, 변해가는 세태를 주목하면서 나의 삶과 자세를 반추해보는 일은 늦게 늙는 기본이다. 나이 들어서도 천방지축 시대를 앞서가려는 것도 우습지만, 앞장선 사람들을 꽁무니에서 손가락질하는 것도 차마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21세기에 가마나 당나귀 타고 나들이하겠다는 것과 무에 다른가?!집수리가 말끔하게 끝나면 마당 정리는 스스로 감당하려 한다. 방아쇠 손가락만 아니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습하고 더운 주말 오후가 서서히 저문다. 창밖에 새 운다.

2021-05-25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김규종경북대 교수지난 5월 11일은 세 번째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다. 1894년 3월 20일 (음력) 봉기한 동학 농민들은 조선의 낙후한 봉건 체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두 번째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은 그해 4월 7일 (양력 5월 11일) 황토현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려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도 우리를 비추는 등불이다.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정읍)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4월 27일 전주에 입성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여 5월 5일 아산에 청병 3천이 상륙한다. 호시탐탐 조선 침략을 노리던 일본은 5월 6일 인천에 4천 병력을 투입한다. 내정 문제가 국제전쟁으로 비화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벌어지게 된 형국이다.전봉준은 조선 정부와 서둘러 27개 조목의 ‘폐정개혁안’을 맺고 화의한다. 그 가운데 14개 조목이 전하는데, 크게 두 갈래다. 그 하나는 왕의 총명을 가리고 국권을 농락하는 무리를 몰아내고, 탐관오리를 처단하라는 국정 쇄신이고, 그 둘은 민생고를 해결하라는 방책이다. 수령과 관장(官長)들의 적폐를 일소하고, 각종 부역과 세금을 낮추라는 것이다.권력을 가진 자들이 이런 요구를 순순히 들어줄 리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동학 농민군은 전라도에 집강소 53개를 설치하여 직접 개혁에 나선다. 이에 전라감사 김학진이 포용적인 자세를 보여 ‘폐정개혁안’ 12항이 합의되기에 이른다.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과 유림의 징벌, 노비문서 소각, 칠반천인(七班賤人)과 백정의 차별철폐, 청상과부의 재혼 허가, 토지 분작(分作) 등이 ‘폐정개혁안’에 담긴다.신분제로 인한 적폐의 누적과 그것이 양산해내는 탐관오리와 유림의 징벌, 최하층 인민의 존중은 조선왕조를 지탱해온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노비문서를 태우고, 과부의 재혼을 허가하며, 토지를 평균하여 분작한다는 것은 혁명 이상을 담고 있다. 1392년 성립하여 장장 500년 세월을 이어온 늙고 쇠락한 왕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 자명하다.나는 토지의 평균 분작에 특히 주의한다. 토지를 경작하는 자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천명한 것은 획기적인 사변이기 때문이다. 지주와 소작인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오랜 불평등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는 대목 ‘토지의 평균 분작’이다. 얼마 전 ‘한국토지주택공사 LH’ 비리로 다시 불거져 나온 부재지주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동학농민혁명으로 더 크게 들려오는 듯하다.예나 지금이나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이라는 명제는 국가의 첫 번째 존립 조건이다. “백성의 믿음이 없다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어느 국가든 정권이든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동학농민혁명은 오늘도 명명백백하게 웅변하고 있다.

2021-05-11

이순신과 영화 ‘명량’

김규종 경북대 교수2021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생 476주년 되는 날이다. 조선왕조 518년 사직을 돌아보면 세종과 이순신이 선두에 있다.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약관 21세에 왕위에 올라 훈민정음을 비롯한 문물 정비로 조선의 기틀을 놓은 이도(李7979) 세종. 조선 초기 정비되지 않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져 후세 왕들의 모범이 된 인물 이도. 그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늦깎이로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은 몇 차례 난관을 뚫고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거북선을 건조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이후 전공을 세운 그는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 총사령관에 오른다. 그 후 이순신의 행적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하던 그는 전함 12척으로 적선 133척과 맞붙어 승리하는 ‘명량대첩’을 진두지휘한다.2014년 7월 30일 개봉된 ‘명량’은 1천762만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사를 다시 쓰게 한다. 왜 ‘명량’에 수많은 관객이 몰렸을까, 하는 의문은 같은 해 4월 16일 온 국민을 낙담과 절망으로 몰고 간 ‘세월호 대참사’가 대답한다. 안산 단원고교 250명 학생을 포함한 305명의 귀한 생명을 수장(水葬)시킨 씻을 수 없는 ‘국가범죄’가 21세기 첨단정보통신 국가에서 발발한 것이다.실시간 중계된 ‘세월호 대참사’는 우리에게 국가의 부재와 권력자의 실종이라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빤히 보이는 배에, 서서히 침몰하는 배 안에 갇혀 죽음을 맞아야 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우리는 치를 떨어야 했다. 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또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도록 만들었던 해양 참사가 우리를 바닥 모를 추락으로 인도했다.‘명량’에서 이순신은 ‘충’에 관해 맏아들 ‘회’와 나누는 대화에서 결연히 말한다.“충(忠)은 의리(義理)다. 의리는 왕이 아니라 백성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은 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누란지위의 백성을 지켜낸 이순신의 ‘충’은 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었다. 417년 전 이순신의 생각과 실천이 임진왜란의 극복으로 나타났다면, 2014년 4월의 세월호 참사는 충이 없는 대통령의 권력 유희였다. 현대국가 존립의 첫 번째 근거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을 하지 못한다면, 국가는 국가로 불리지 못한다. 국민을 학살한 전두환 일당의 권력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까닭이 거기 있다.국가의 이름으로 국난극복의 선두에 섰으되, 파직과 고문을 겪어야 했던 이순신. 모친상도 치르지 못한 채 백의종군에 임해야 했던 이순신.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결과를 끌어낸 이순신. 그런 지도자를 염원했던 사람들이 ‘명량’에 환호했다.충무공의 탄신을 맞이하여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는 난관의 중심에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 자리해야 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떠올리는 것이다.

2021-04-27

4·19와 ‘진달래’

김규종 경북대 교수올해도 어김없이 4·19가 돌아왔다. 요즘은 4·19 혁명기념일로 부르지만, 내게는 4·19가 익숙하다. 마치 5·18 광주 민중항쟁이나 5·18 광주 민주화운동보다 5·18에 친숙한 것처럼. 벌써 61년 전 일이 된 4·19. 나처럼 나잇살 먹은 인간에게도 60년 세월은 무겁게 다가온다. 하물며 요즘 20~30대 청춘들이야 무슨 말을 더하랴!어떤 친구가 4·19 무렵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와 ‘노찾사’ 가수 김은희를 소개한다.“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련(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이호우 시조시인의 여동생이자 현대시를 썼던 이영도. 훗날 유치환과 주고받은 연서로 세상에 알려진 시인. 경북대 교수 몇 사람과 청도에 있는 두 시인의 고택을 찾았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허리춤까지 자라난 무성한 풀과 허물어져 가는 벽체와 달려드는 모기떼 등쌀에 쫓기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새마을운동’의 출발지를 자랑하는 일 말고는 문화와 예술에 담을 쌓고 살아가는 청도군수와 주민들….여하튼 이영도의 ‘진달래’와 김은희의 노래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 후로 해마다 4·19가 오면 ‘진달래’를 틀어놓고 지내기 일쑤였다. 오늘 그 일이 다시 생각나 김은희 공연 실황을 찾아보았다. 1992년 ‘학전 소극장’에서 김은희 ‘진달래’는 시퍼렇게 살아서 극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처연하고 애절하여 우리의 내장 깊은 곳을 파고드는 김은희의 놀라운 가창력!다시 세월이 흐른 2013년 12월 ‘윤선애와 친구들’ 공연에 동참한 김은희의 ‘진달래’를 들어본다. 20년 세월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무게를 가까스로 견디고 앉은 김은희 ‘진달래’는 그저 단아한 소품으로 고요했다. 그렇다! 모든 것을 무화(無化)하는 거대한 시간의 수레바퀴 아래 김은희의 처절한 통곡은 여유로운 노랫가락으로 쓸쓸하고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하기야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시간 아니었던가! 그래서일까, ‘패왕별희’의 정접의(程蝶衣)가 40년 가까이 변치 않는 목소리로 우희(虞姬)를 노래함은 영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이 먹은 김은희를 이제는 조용히 놓아 보내기로 한다. 1960년이든, 1992년이든, 2013년이든, 2021년이든 혁명은 언제나 청정하고 청청(靑靑)해야 하기에. 세월과 더불어 늙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혁명과 변혁의 사변뿐이리.어김없이 찾아온 4·19를 맞자니 흘러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스럽게 솟구친다. 그러나 그리움이 퇴색하지 않으려면 그것을 현재화해야 한다. 4·19에 새겨진 영혼과 정신을 반추하면서 그날 쓰러져간 영령들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4·19를 살리는 길은 4·19와 함께하는 일이 유일한 방도임을 확인하는 아침나절이 깊어간다.

2021-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