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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구 사람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금요일 대구 문화방송 ‘시인의 저녁’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장이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대구 사람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면 어떻겠는가?’는 문제 제기. 지금까지 대구 사람들이 생각해온 기준은 혈연, 지연, 학연에 얽힌 것이라 한다. 시대가 바뀌고, 들고 나는 사람이 늘어나는 시대에 이런 기준을 재고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그가 제시한 기준 가운데 내가 동의한 대목은 이러하다. 대구에서 나고 자라 여기에 뿌리 내린 사람은 당연히 대구 사람이다. 그러나 직장이나 다른 목적으로 대구에 이주한 사람 가운데 대구에 기여하고 대구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대구 사람에 넣자. 대구를 떠난 ‘출향(出鄕) 인사’ 가운데서도 대구를 그리워하고 대구를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도 대구 사람 범주에 포함하자는 것이다.그의 제안은 설득력 있게 들렸다. 지금까지 30년 대구에 살면서 나는 여러 번 대구 사람의 정체성 때문에 말다툼을 했다. “말투가 여기 사람 아니네에?!”, 하면서 끼워주지 않는 부류가 대다수였다. “아니 여기서 일하고 봉급 받아 생활하는 나 같은 사람이 대구 사람 아니면, 누가 대구 사람이죠?!”하는 나의 항변은 늘 간단히 무시됐다. 나 또한 더는 우기지 않기로 했고, 앞으로도 그럴 요량이다.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왜들 그렇게 말투에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중고등학교를 대구에서 마치고 타지로 나간 사람들은 같은 말투 하나로 이내 대구 사람이 된다. 하지만 타지에서 굳어진 말투를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대구에서 오래 살아도 대구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참 이상하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요즘 젊은 세대는 대구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들도 언젠가는 대구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듯하다.서울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해 대구로 내려온 상당수 정치인은 언제나 대구 사람이다. 그들이 서울에 집이 몇 채 있는지, 매주 서울에 가든지 말든지, 1년에 며칠이나 대구에 머무는지 하는 문제는 아예 무시한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무장돼 있거나, 그런 생각에 익숙한 대구 사람들이 무섭다. 여기서 출발하는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남이가!” 철학이다. 말투 하나로 그들은 언제나 정치적-이념적 동지가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한다.4차 산업혁명이 한창이라는데, 대구는 툰드라의 정치적·이념적 동토가 해동되지 않은 곳이다. 젊은이들이 왜 대구를 떠나려 하는지, 관심조차 없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은 사람끼리 열심히 하면 된다는 저 강력한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우리끼리’라는 말은 매혹적이지만,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그것은 우리만의 틀에 갇혀 배제와 적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자신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거기에 순혈(純血)의 철옹성을 쌓고 안주한다. 그들은 성 바깥의 풍경이나 변화에 무심하다. 세상과 세계가 어떻게 바뀌는지에도 무관심하다. 그저 우리끼리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당신은 정녕 대구 사람인가?!

2021-11-16

첫눈

김규종 경북대 교수 9월의 궂은 나날이 가고, 10월의 화려한 가을날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축복처럼 보태진 11월의 며칠 동안 화사하고 기막힌 가을의 끝이 신속하게 사라진다. 입동(立冬)이 지나고 불어오는 찬 바람 속에서 첫눈의 기억이 아련하게 찾아든다. 첫눈은 언제나 무한한 설렘과 기대와 함께 찾아온다. 어느 날 홀연히 첫눈은 갑작스레 환한 얼굴로 지상으로 하강한다.아주 어렸을 때 첫눈이 오면 마구 뛰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동네방네 뛰어다니곤 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은 분명하다. 누가 시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어느 깊은 곳에서 그렇게 하도록 인도하는 어떤 힘이 있었을 터였다. 그런 시절이 아스라히 사라진 지금도 그 시절은 언제나 그리워진다.얼마 전에 폴란드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를 보면서 기억에서 떠나보냈던 첫눈이 새삼스레 떠오는 것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일어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사고를 소재로 만든 영화 ‘첫눈이 사라졌다’. 영화는 우리를 낭만과 기대로 가득한 환희의 시공간이 아니라,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의 과거과 현재를 돌이키도록 한다.1945년 8월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앞으로도 이런 가공할 재앙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 영화의 끝은 아주 아름답고 풍성하다. 하얀 폭설로 작은 도시 하나가 완전히 뒤덮여가는 환상적인 장면으로 가득하다.첫눈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요, 하는 물음에 예기치 않음, 기다림, 설렘이라 답하는 사람에게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를 들려줬다. 사실 이 노래를 들은 것은 나도 이번이 처음이다. 노래를 듣지 않고 지나간 세월이 제법 길다. 엔진 오일 교환하러 들른 정비공장에서 우연히 알게 된 시디에 실려있던 노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아, 이런 노래가 있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찾아들었다. 노랫말도 곡도 대단한 노래를 여태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집으로 오는 길에 자꾸만 들어도 질리지 않는 절창(絶唱). 4년 전이라는 노래의 생성연대를 돌이키노라니, 세월이 참 무상하게 흘러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떠온다.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는 떠나가거나 찾아오는 주체는 언제나 남성이었는데, 이번 노래에서는 노래하는 여성이 연인을 찾겠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21세기 변해버린 세상과 인연과 관계를 잠시 떠올린다. 남성에게 의지하는 나약하고 순종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찾아 담대하게 나아가는 신여성의 모습이 듣기에도 좋았다.그래서 올해 첫눈이 언제 내릴 것인지, 내기를 걸었다. 학부 다닐 때 무려 3년 연속 첫눈 오는 날을 맞췄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술 한잔 내기로 했다. 첫눈이 내리는 그날이 오면 뽀드득 소리를 내면서 하얀 보도를 오래도록 걷고 싶다. 첫눈이 오면!

2021-11-09

구룡포에서 보낸 하룻밤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바다는 언제나 그리운 곳이다. 내지에 살면서 바다를 그리워함은 인지상정이다. 섬사람들이 뭍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뭍에 사는 사람은 섬사람만큼 뭍이 그립지 않으며,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언제나 바다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다. 익숙함은 타성과 습관의 나락에 떨어져 망각과 상실과 만나는 법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고 주장한다.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오아시스를 찾는 목마른 나그네처럼 집착한다. 대상을 소유하겠다는 열망에 그는 온몸과 마음을 불사른다. 바라던 대상이 마침내 손에 들어오면, 그의 성취감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그의 내면에는 싫증과 권태가 슬며시 똬리를 튼다. 익숙함이 주는 진부함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이 그를 다시 찾아온다.세상과 인간을 염세한 쇼펜하우어의 놀라운 통찰이다. 짧은 문장 하나로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 하지만 이런 명제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예외 때문이다. 주어진 관계와 물질과 인식의 범위 안에서 만족하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라는 어마어마한 수양과 깨우침은 아니더라도 말이다.그런 생각을 담고 마주한 구룡포의 풍경은 따사로웠다. 주말을 맞아 인파로 넘쳐나는 포구에서 오랜만에 흠뻑 마시는 갯내음과 바닷바람이 내장을 서늘하게 뚫고 지나간다. 오래 잊고 지냈던 시간이었군, 하는 잔상이 스치듯 지나간다. 생선회와 대게를 파는 가게의 번다함과 왁자지껄한 소음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하다. 일상에 지칠 때 항구에 펼쳐지는 어물전을 찾으면 영혼과 정신이 일신되지 않는가?!정겨운 대화와 주고받는 술잔과 활발한 저작(咀嚼)과 웃음소리가 실내를 채운다. 어느새 찾아든 저녁이 짙은 그림자로 사위를 감싼 후에야 술자리가 막을 내린다.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를 어린애들처럼 걸으며 마주한 등댓불이 눈과 마음을 대낮처럼 비춘다. 등대지기의 고단한 일상에 의지하는 고기잡이배며 여객선이며 화물선의 일꾼들이 떠오른다. 밤을 다퉈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선의 경적! 그들은 어디에 닻을 내릴 것인가!밤하늘의 별과 선잠에서 깨어나 우짖는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삼삼오오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오늘 밤에는 과업과 관계와 일상에서 놓여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떠오르는 혹부리영감. 오래전 수련원 옆에 점방을 냈던 혹부리영감의 자랑스러운 딸의 얼굴이 설핏 떠오른다. 어렵게 공부시킨 딸의 성적표를 보여주며 이것저것 묻던 영감은 그사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아, 무참한 세월이여!오온(五蘊)이 모두 공하다는 관자재보살의 논리를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얘기가 늦도록 우리 주위를 떠돈다. 장엄한 아침 해와 더불어 깊은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가?! 하늘의 별이 바람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포구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2021-11-02

일본과 중국의 문학을 읽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10월 23일은 서리 내린다는 상강(霜降)이었다. 상강 절기를 며칠 앞두고 내린 된서리와 무서리 때문에 일부 언론은 앞다투어 ‘가을의 실종과 겨울의 도래’를 재잘거렸다. 어디 그뿐인가?! 한반도에 봄과 가을이 완전히 실종된 것처럼 호들갑 떠는 자들도 적잖았다. 여기 동조하는 생각 없는 사람들을 보노라니 부아가 치미는 것이었다. 대체 왜들 저러는 걸까?!자연은 일탈하는 듯하다가도 슬며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법이다. 우주 운항의 법칙이 어느 날 돌변함은 지구 종말이 다가왔다는 신호탄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지경까지 이른 상황은 아니다. 한두 가지 변화로 전체를 예단함은 오류와 제휴하는 첩경이다. 그래서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하는 영어 속담도 있는 게다.각설하고, 상강 무렵이면 떠오르는 한시(漢詩)가 있다.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가 남긴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칠언 고시 스물여덟 글자로 가을의 서정과 나그네의 우수에 찬 심사를 그림처럼 포착하는 솜씨는 달인의 경지와 멀지 않다. 나이 50이 넘어 과거에 두 번째 낙방한 우울한 마음을 서리 내리는 시절과 절묘하게 배합한 ‘풍교야박’.원문을 보자. “月落烏啼霜滿天 (월락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 (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외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 (야반종성도객선)” 우리말로 바꿔본다.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서리가 하늘에 가득하구나. 강가의 단풍나무는 고깃배의 등불과 마주 보고 쓸쓸하게 잠들어 있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는 한밤중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배까지 들려 오는구나.” 여러분은 이 시를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시는가?!첫 줄에서는 깜장의 까마귀와 서리의 흰색이 대비되고, 서리 가득한 한밤중에 들리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중첩된다. 소리와 색깔의 공감각이 문득 화합한다. 둘째 줄에서는 단풍나무와 고깃배의 등불이 붉은색으로 마주하고 있다. 여기서 방점은 ‘쓸쓸하게’ 혹은 ‘슬프게’라는 부사어에 있다. 조락을 목전에 둔 단풍과 하릴없는 고깃배의 등불이 화답하듯 어울려 잠든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세 번째 줄에서는 장면이 고소성 밖 한산사로 일신된다. 장소변화는 정황의 급변을 불러온다. 그것이 네 번째 줄에 고스란히 담긴다. 시인이 잠들어 있는 나룻배에 들려 오는 한밤중의 종소리. 그는 지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전전반측(輾轉反側) 불면의 밤과 대면하고 있다. 고향의 늙은 처와 장성한 자식들을 바라볼 면목이 없는 것이다.나는 ‘풍교야박’을 소주의 풍교에서 만났다. 그때 일본 관광객들이 시에 보여준 친근함은 놀라웠다. 그들은 중학교 국어책에서 ‘풍교야박’을 배웠다 한다. 우리는 어떤가. 단 한 편의 중국인과 일본인 작가의 시나 소설, 희곡도 초중등 국어 교과서에 없을 것이다. 21세기를 살면서 좌우에 포진한 나라의 문학에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가?!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는 대한민국이다. 이제라도 그들의 시와 소설, 희곡을 넉넉한 마음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2021-10-26

메타버스와 디지털 격차

김규종 경북대 교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용과 주근깨 공주’를 보고 느끼는 점이 많았다. 모든 연령대가 함께 볼 수 있는 만화영화지만, 어른들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에 영화관에 들어온 아이는 한 명이었다. 아이는 영화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교차함에 따라 몰입도에 차이를 보였다. 가상세계에 완전히 몰두하되, 현실세계에는 시큰둥했다.호소다 마모루의 2009년 만화영화 ‘썸머 워즈’를 보고 아주 놀란 적이 있다. OZ라는 가상세계를 일본 농촌의 대가족과 연결하는 내공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저런 상상력을 가진 감독이 여전히 일본에 있구나, 하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 것이다. 12년이 지난 2021년에 그가 보여주는 가상세계는 훨씬 진화한 공간으로 다가온다.감독은 ‘메타버스’를 영화의 전면에 배치한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은 상처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으면서 세상과 단절한 여고생 스즈. 제한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좋아하는 노래도 못하던 스즈. 그런데 메타버스의 가상공간 U에 접속하자마자 스즈는 놀라운 가창력을 가진 아바타로 재탄생한다.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벨’이란 아이디로 새롭게 탄생하여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스즈. 가상공간 U의 가입자는 50억! 순식간에 1∼2억의 가입자를 매료시키는 벨. 여기서 스즈와 벨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일본의 평범한 고교생 스즈와 가상공간을 매혹하는 새로운 스타 벨의 정체성이 뒤섞여진다는 얘기다.가상공간에서 만나는 용의 상처와 고통을 동정하는 스즈는 실제 현실에서 그를 찾아내려 한다. 스즈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현실의 ‘케이’를 만나고, 그를 보호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가상공간과 현실세계의 조화롭고 경이로운 만남이다. 아바타의 세계를 현실로 인도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인간다움의 영역을 확장하는 호소다 마모루!만화영화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깊은 한숨이 나온다. ‘썸머 워즈’에서 가상공간과 실제 현실은 따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이번에 ‘용과 주근깨 공주에서 두 공간은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서로 이어져 있다는 차별성을 보여준다. 가상공간의 경이로운 진화가 이루어진 셈이다.‘메타버스’는 단순한 3차원 가상공간이 아니라, 가상공간과 현실이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공간이며, 현실과 가상세계의 교차점이 삼차원 기술로 구현된 세계라는 말이 실감 나는 영화가 ‘용과 주근깨 공주’다. 저런 세계가 바로 옆에서 펼쳐지고 있건만, 한국의 노인들은 그저 그런 드라마와 빤한 노래자랑에 열광하며 세월을 보낸다.공공장소에서 울려 퍼지는 전화기도 끌 줄 모르는 노인들. 그들이 조만간 경험하게 될 디지털 격차가 두렵다. 메타버스가 일상화하는 시점이 온다면, 세대 간의 상호이해와 소통이 얼마나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더 늦기 전에 노인 세대를 위한 디지털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1-10-19

대선과 정치인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2022년 3월 9일 치러지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후보를 선출하느라 부산하다. 일찍이 공자는 정치는 발라야 한다고 설파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정자정야(政者正也)’가 그것이다.노나라 재상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대답한다.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선생이 백성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습니까.” 2천500년 전 공자의 말로써,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단순명쾌한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정치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통치행위이기에 정치인이 정도(正道)를 걸어야 함은 자명하다. 위정자가 정도를 걷는다면 그를 따르는 국민 역시 올바른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에게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바른 인간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바르지 않고 거짓되며 사특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그런데 요즘 대선정국에서 언론에 노출되는 예비후보들을 볼라치면 낯이 뜨거워진다. 비리와 부정과 의혹과 막말로 얼룩진 후보가 한둘이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그런 자들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이다. 왜 이런가?! 언론이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확고한 반증이다. 언론이 자신에게 주어진 공론장을 통해 인물과 정책을 전혀 검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언론은 공정과 신속, 정확을 바탕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공적 기구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구독자 숫자에 함몰되어 공정과 정확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 결과 정체가 모호한 수많은 1인 유튜버들과 혹세무민하는 인사들만 득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 오히려 그들에 편승하여 조회 숫자를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본연의 사명을 망각해버린 꼴이다.2020년 기준 대한민국은 국민총생산 세계 10위, 국방력 세계 6위의 경제-군사 강국이다. 여기에 문화의 힘까지 보태져 선진국 대열에 당당하게 들어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선진국 모임인 G7 정상회담에 작년과 올해 연이어 초대받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크고 중요하며 대단한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나온 인물들의 면면은 적잖게 아쉽다.미국과 중국의 사활을 건 패권 경쟁, 일본의 지속적인 우경화, 경색된 남북한 관계처럼 외교·안보 분야 역시 녹록지 않은 도전이다. 예비후보 가운데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내공을 쌓은 사람은 드물다. 세계 곳곳에서 한류 바람이 드세게 부는데, 정작 외교도 모르고, 경험도 없는 자들이 득세하는 형국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지금 국민은 특정 인물과 정당에 쏠려 있다. 확증편향에 기댄 집단적 선택이 강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의 혜안은 늘 놀라웠다.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짊어질 지도자를 고르리라 믿는다.이제 대한민국은 새우가 아니라, 최소한 돌고래 이상의 힘과 경륜을 갖춘 나라다. 그런 나라의 격에 맞는 대통령을 뽑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시대적 과제다.

2021-10-12

10월의 길목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우물쭈물하다 보니 10월이 코앞이다. 한 해의 4분의 3이 스러지고, 마지막 사분기가 얼굴을 내밀려는 참이다. 참 빠르구나, 하는 볼멘소리가 튀어나올 판이다. 시간은 절대적으로 흘러가지만, 그 속성은 상대적이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간은 무연하고 냉정하게 전진 운동한다. 시간은 불가역적이어서 역행하는 법이 없다.시간은 절대성을 가진 비정한 속성의 소유자이되, 그 본성 가운데 하나는 지극한 상대성을 본질로 한다. 똑같은 길이의 시간이라 해도 그것을 감촉하는 인간의 내면에 따라 시간의 길이가 다르게 측정된다. 원증회고(怨憎會苦)로 강제된 만남의 시간과 애별리고(愛別離苦)로 인한 이별의 짧은 시간은 길이가 사뭇 다르다.휴일 하오의 토평(土平) 너른 들에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벼가 머리를 숙이며 바람에 사각사각 소리 내며 흔들린다. 생명을 다한 연밭의 큼지막한 연잎들이 누렇게 시들어간다. 빨간 우렁이알들은 다가올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을 알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다.철모르고 피어나는 사위질빵과 개망초, 여뀌가 바람에 살랑이고, 먹을 것을 찾는 백로 무리의 울음소리 허공에 들린다. 창공을 홀로 날아가는 가창오리의 귀소(歸巢)가 쓸쓸하고, 알맹이 없는 우렁이 껍데기 문득 망연하다. 이제 막 자라나는 호박의 여린 이파리와 제철 만난 갈대와 억새꽃이 얼려 춤춘다.잿빛 구름장으로 뒤덮인 창공에는 굉음을 내며 하늘길 질주하는 비행기 대열이 길손의 발길 붙든다. 아, 저 길은 서울 쪽이고, 저 길은 부산 쪽이네, 혼잣말하는 사이 굉음이 사라진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사이와 거리가 제법이다. 들리지 아니하면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듣지 못하는 것이 육근(六根)의 기본 원리라지만, 새삼스러운 시절이다.어떤 생명은 가을에서 봄으로 달리고, 어느 것은 겨울을 대비한다. 가을바람 속에서 혹자는 지나간 여름을 추억하고, 누군가는 다가올 겨울의 설한풍을 예감한다. 서로 다른 시공간 감각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과 인연을 만들고 살아간다. 거기서 옳고 그름을 나누고 분별함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그만 아닌가?!아주 젊은 날, 세상과 일대일로 정면 대결하려 했던 그 기막힌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아주 아름다웠던, 극히 무모해서 두렵기까지 했던 그 시절을 모두 보내고 백로와 추분에 어울리는 나이를 먹은 지금, 지난날들을 새삼 돌이켜보는 것이다. 하지와 소서 대서는 물론 삼복의 찌는 듯한 열기로 세상과 맞섰던 기막힌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생명에 내재한 생로병사의 이치를 너무도 늦게 체득한 자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러하되 어쩌랴?! 삶의 본성과 주어진 숙명이 그러할진대 무던히 수긍하고 받아들일 일이다. 10월은 또 10월대로 아름답고 풍요로울 터. 따사롭고 온유한 얼굴로 10월을 맞이하려 한다. 어서 오너라, 너 10월이여!

2021-09-28

예술 소비 운동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에 대구 문화방송 ‘시인의 저녁’에 출연한 문무학 시인이 예술 소비 운동을 전개하자는 말을 남겼다. 한 달에 한 권의 시집이나 소설책을 구입하고, 극장이나 미술관, 음악회를 한번은 가보자는 얘기였다. 만일 시민들이 그렇게 한다면, 대구에서 활동하는 가난한 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의 생계가 해결될 것이라는 확언도 덧붙였다.참 좋은 말씀이란 생각이 든다. 한 달에 5만 원쯤 소비하여 얻어지는 이득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을 위해 지출하는 시민은 시와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리하여 예술적 취향과 문화적 소양을 함양하여 시대에 필요한 교양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갖추게 된다.시인과 소설가, 배우와 화가, 음악가들은 생계로 인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청춘남녀 가운데 예술과 문학에 투신할 인재들도 나올 것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유쾌한 일인가. 시와 소설, 희곡 같은 문학을 구하지 않고, 예술작품과 대면할 기회를 찾지 않는 인생은 좁고 누추할 수밖에 없다.요즘 ‘케이(K)’라는 글자가 문화-예술 영역에서 대단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케이푸드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 그리고 음식이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는 얘기다. 좋은 일이다. 그렇다 해서 대한민국이 문화와 예술 그리고 문학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케이’와 연관된 영역은 대중성을 확보한 특정 영역과 집단에 힘입어 제한적인 인기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바람은 언제나 부지불식간에 불고, 인기도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다. 일시적인 관심과 열기는 생명이 짧기 마련이다. 강하고 든든한 밑거름을 부여해줄 수 있는 너르고 단단한 저변이 필요하다.깊고도 넓은 문화와 예술, 문학에 기초하는 대중예술이야말로 오랜 세월 강고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은 자명하다. 젊은이들이 즐겨 보는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같은 매체를 살찌울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대양을 준비하자는 얘기다. 모든 예술에는 서사(敍事)가 필요하다. 전후 맥락이 통하고, 시대에 적절한 설득력과 미래기획이 담긴 서사. 건강하고 힘 있는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첫걸음이 예술 소비 운동이다.우리가 한 달에 소비하는 커피 10잔의 비용이 대구와 경북,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의 예술과 문학을 살찌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시민들이 카페나 도서관, 거리나 광장에서 문학과 예술, 문화를 토론하며 대화하는 장면은 얼마나 기막힌 것인가! 그것이 주식과 부동산, 먹을 것과 입을 것,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대신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어느새 원로가 되어버린 문무학 시인의 백발과 주름살을 보면서, 열렬히 사셨음에도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구나, 생각한다. 그의 아름답고 절실한 바람이 조속한 시일 안에 꼭 실현되었으면 한다.

2021-09-14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요즘 포털사이트에는 올라오지 않는 것이 없다. 각종 뉴스와 오락을 비롯해 인간이 구하는 온갖 내용이 여기저기서 손짓한다. 얼마 전부터 ‘책’의 골자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어차피 책과 시작한 인생살이, 책으로 끝날 공산이 크기에 관심이 가는 터.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면서 삽화까지 곁들인 소개란이 제법이다.글을 읽으면서 아, 이 책은 사서 읽어야겠군, 하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광고와 비슷하면서도 광고를 넘는 출판사들의 내공이 절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런 글 가운데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미국의 네이비실 군사훈련 과정 가운데 침대를 정리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이 훈련생들의 첫 번째 과제라고 한다.침대를 정리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잠들었던 공간을 말끔하게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은 사소하지 않다. 자신이 만들어낸 지난 밤의 흔적을 정리-정돈하는 것과 그것을 배제한 채 다른 일과에 착수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우리 일상은 생산공정의 일관작업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인생에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삶은 소소한 일상의 반복에 토대를 두고 조용히 진행된다. 잠자고 밥 먹고 씻고 일하고 사람 만나고 쉬고, 이런 일상의 무수한 순환에 기초하여 인간의 평생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의 흐름에서 어느 한 가지가 빠지거나 소홀해진다면 그다음 일과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늦잠에서 깨어난 아침 풍경을 떠올려보면 자명해진다. 흐트러진 잠자리를 내팽개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서둘러 옷을 걸치고, 일터로 황망하게 달려 나가는 사람에게 평온하고 생산적이며 안정적인 하루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다. 침대를 잘 정리한다는 것은 그 하루의 일상을 차분하고 여유로운 상태에서 시작하는 일을 뜻한다.침대 정리라는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자신의 신변조차 허투루 넘어가는 인간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은 그깟 일로 사람을 평가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대범하고 담대하며 그릇이 큰 인간은 그런 시덥잖은 일은 두루뭉수리로 넘어갈 수 있지 않겠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일찍이 노자는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싹에서 생겨나고, 구층 누각도 삼태기 하나의 흙에서 비롯되며, 천릿길도 발아래서 시작한다”는 말을 남겼다. 크고 중요한 모든 것의 출발은 하나같이 작고 미소한 것이다. 사소한 일상 혹은 습관 하나 통제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가 혹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그래서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거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대면하는 아주 작은 일상에서 자기에게 보여주는 성실한 자세는 다가올 먼 미래에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다. 일컬어 ‘수적천석(水滴穿石)’ 아니겠는가?!

2021-09-07

어떤 인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철없던 시절 피천득 선생의 글 ‘인연’을 읽다가 아쉬움에 잠기곤 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 나온다는 초록색이 고왔던 우산의 주인 아사코. 왜 선생은 아사코와 작별해야 했을까. 아사코와 이뤄진 세 번의 만남은 각기 다른 색깔과 향기로 다가온다. 소녀에서 처녀로 다시 가정주부로 선생을 만난 아사코. 그들의 마지막은 너무도 적막했다.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사만 해대는 아사코의 비애 같은 것이 여과 없이 전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만남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선생은 회고한다. 왜 선생은 굳이 아사코를 마지막까지 만나야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남의 아내가 된 여자를 굳이 만날 필연의 까닭이 있었던가!얼마 전 졸업생이 ‘파안재’를 찾았다. 그는 1년에 두어 번 내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간다. 언젠가 우리가 만난 세월을 돌이키니 30년에 이르는 시간이었다. 우리를 묶어주는 인연의 끈이 무엇인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한두 번만으로 인연이 다하는데, 누구는 장구한 세월,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차이가 생겨나는 인연의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내게는 50년 된 친구도 있고, 30년 넘게 이어오는 벗들도 적잖다. 어느 때는 가족보다 더 깊고 편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도 있다. 무엇이 우리를 오래도록 이어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연’을 생각하는 것이다. 붓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설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 이른바 인과율로도 해석 가능한 논리가 연기설이다.내가 있으므로 그대가 있고, 내가 소멸하므로 그대 또한 소멸한다. 그대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대가 소멸하기에 나 역시 소멸한다. 나와 제삼자의 관계에서 출발은 언제나 ‘나’다. 내가 진정한 자아, 참된 자아일 경우에만 나와 제삼자의 관계, 인연이 시작된다. 30년 세월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나와 졸업생 사이의 관계는 그런 것이리라.만남의 사이가 조금 뜨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전화를 주고받는다. 짧은 안부 인사로 안녕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그는 내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사제’ 관계라 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스승 자격도 없는 자가 스승을 참칭(僭稱)함은 정신적 범죄와 다르지 않다.붓다가 설한 인연의 시간에서 사제 관계가 가장 긴 것은 그런 연유다. 붓다에 따르면, 부부가 7천 겁, 부모 자식이 8천 겁, 형제가 9천 겁, 사제가 1만 겁이다. 신생(新生)의 불교가 우뚝 서도록 갖은 노력을 기울인 제자들을 향한 붓다의 사랑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 제자를 둔 붓다와 저잣거리의 비속한 인간인 나를 동렬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가을장마 사이에 찾아온 졸업생과 늦도록 술잔 주고받으며 인생의 장면 하나를 만드는 즐거움을 맛본 유쾌한 하루였다. 신이여, 그를 축복하소서!

2021-08-31

팔고(八苦)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윤동주의 ‘팔복(八福)’을 읽노라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되풀이되다가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나기 때문이다. 윤동주의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려는 지향이 ‘팔복’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도였던 시인이 ‘팔복’의 원천을 ‘마태복음’ 5장에서 찾았을 것은 자명하다.‘반야심경 마음공부’에서 알게 된 사실은 불교에서 여덟 가지 고통, ‘팔고’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에 다른 네 가지가 더 있다는 얘기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가 그것이다.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고통이 애별리고, 밉고 싫은데 자꾸만 만나야 하는 고통이 원증회고다. 인간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다.얻고자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없기에 괴로운 것이 구부득고다. 팔고의 마지막 괴로움은 오온에서 비롯되는 괴로움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다. ‘색즉시공’이 가리키는 ‘색’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수), 그것이 불러오는 생각(상)과 거기서 발원하는 행동(행)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식) 다섯 가지를 가리킨다. 그 모든 것에 괴로움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인간계는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기본적인 네 가지 고통 말고도 후자의 또 다른 괴로움 네 가지가 중층적으로 엮어져 있다. 만일 고타마 붓다가 ‘원증회고’를 설했다면, 정말로 놀랄 일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와 평등, 형제애를 몸소 실천한 분이 싫고도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을 설하다니?! 애별리고만큼이나 원증회고는 우리를 괴롭힌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대상을 날마다 대면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구부득고는 21세기 한국인들을 좌절시키는 괴로움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아파트 공화국 시민으로 아파트 한 채 없는 사람들은 얼마나 심란하겠는가! 남들 타고 다니는 화려한 외제 자동차는 또 어떤가! 명품 가방과 핸드백 혹은 고가의 보석류를 갈망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이런 사람들은 노자의 ‘도덕경’ 44장을 읽고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而長久)”내가 생각기로, 가장 커다란 고통은 역시 오온에서 발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색’이 불러오는 수상행식(受想行識)의 과정과 결과는 언제나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을 가리키는 가장 명료한 근거는 분명 즉자적인 욕망과 욕망을 달성하려는 구체적인 실현방식일 것이다.윤동주는 생에 내재한 이질적인 요소인 ‘슬픔’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 욕망하는 자들의 실현 불가능한 현실태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도로서 ‘슬픔’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영원히’ 슬픈 족속으로 인간을 규정한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2021-08-24

아, 아프가니스탄!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년 만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완전히 철수한다고 한다. 요즘 외신은 아프가니스탄 관련 기사로 도배되다시피 하고 있다. 우리와는 특별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나라 아프가니스탄.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쾰른에서 어학 과정을 다닐 때 도이칠란트 남성과 혼인한 아프가니스탄 출신 중년 여성과 ‘사전’에 관해 이야기한 일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독일어 사전이 없어서 답답하고 힘들다고 그녀는 말했다.멀고 낯선 나라에서 온 사람이구나, 하는 기억만 아직도 남아있다. 외국인들을 가장 많이 만나서 이야기한 시공간은 어학 과정 다닐 때였다. 30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도이칠란트 체류 외국인들이었다. 한반도 남단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세계의 문제에 어렴풋하게나마 눈을 떴던 것이 그 무렵 일이다.아프가니스탄은 대단한 요충지에 있다. 동으로는 파키스탄과 중국, 북으로는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서쪽으로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앙아시아 한가운데 있으면서, 인도 아대륙과 접경하고 있으며, 중동의 강경파 이슬람원리주의가 득세하는 이란과도 이웃한다. 구소련의 세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중국의 신강(新疆)과 국경이 닿아 있다.그런 까닭인지 모르지만, 세계열강의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욕망은 유구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가니스탄은 소련과 연관돼 있다. 1979년 12월 소련은 이슬람원리주의 무장세력인 무자헤딘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10년 동안 소련은 100조원에 이르는 전비(戰費)와 5만의 병력손상을 입은 채 철군한다. 대영제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오랜 세월 경험한 쓰라린 패배의 교훈을 새기지 못한 까닭이다.이번에는 미국이다. 2001년 미국은 9·11 테러 배후 조종자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고 탈레반을 압박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한다.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은 대규모 공습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 20년 세월이 흐른 지금 미국은 쫓기듯 황망하게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단행하고 있다. 영화 ‘모가디슈’에서 목숨을 걸고 소말리아를 탈출하던 사람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19세기 대영제국과 20세기 후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이어 21세기 유일 강대국 미국마저 아프가니스탄에서 패퇴한 원인은 무엇인가?! 분석가들은 아프가니스탄의 가혹한 기후, 거친 산악 지형과 토착 세력의 완강한 저항 따위를 꼽는다. 험준한 산악에 의지하여 끈질기게 게릴라전을 펼치는 저항 세력에 막혀 침략자들은 패퇴를 반복해온 셈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결과한 것은 사망 24만, 난민 500만, 전비 1,100조원으로 드러났다.인도차이나반도가 도미노처럼 공산화할 것이라는 불안에서 시작한 베트남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듯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실패한 첨병이 되고 말았다. 21세기 세계는 특정 제국의 일방적인 지배와 점령이 아니라 우의와 친선에 기초한 평화가 이뤄졌으면 한다.

2021-08-17

하루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밤새 울어대는 벌레와 지렁이들의 합창으로 선잠에서 깨어난다. 처서 전후부터 울기 시작하는 지렁이의 맑은 음색도 좋지만, 가을 초입을 알리는 풀벌레 울음소리도 그에 못지않다. 어제 아침나절 서울의 후텁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새벽녘의 기억이 잠시 상념에 잠기게 한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이토록 다른 세상과 만난다는 일이 낯설다. 그것도 같은 나라 같은 하늘 아래서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하루라는 시간이 제법 길구나, 하는 생각이 찾아온다. 누구나 경험하지만, 시간에는 상대성이 개입한다. 상황에 따라서 길게도 짧게도 느껴지는 것이 시간이다. 마음 설레게 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의 찰나 같은 짧음과 지겹고 싫은 관계에서 느껴지는 영겁의 장구함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인슈타인도 미인과 함께하는 시간의 짧음과 뜨거운 화덕 위에서 맛보는 기나긴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상대성을 말한 바 있다.같은 시간을 달리 경험하는 인간을 생각하면 무상하다는 어휘가 떠오른다. 늘 그러하지 않다는, 변화무쌍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이 폐부를 찌른다. ‘붓다 연대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자명한 사실 하나. 우리 기분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는 것이다.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 단순하고 명쾌하게 인간의 기분과 감정 상태를 규정한다. 항상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무시로 변하는 감정과 기분!여기서 우리는 항심이나 항상성을 연상한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과 일관성을 유지해나가는 성질 말이다. 자신의 기분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언제나 같은 마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일희일비하지 않는 무거움과 자신을 향한 엄중함이 상존(常存)하는 내면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의 어려움이 손에 닿을 것 같다. 그래서일까. 동서양 지혜를 다룬 서책마다 등장하는 공통의 문장 있다.“늘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는 “그것 또한 지나가리라.” 어제의 위대한 승리와 환희가 오늘과 내일도 가능하지 않다는 가르침. 하지만 욕망의 화신인 인간은 어제의 축복과 광희(狂喜)가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거기서 좌절과 실의가 생겨난다. 실패는 망각하고, 성공은 오래 간직하고 싶은 선택적 기억의 수인(囚人)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허우적대면서….언젠가 김범수의 ‘하루’가 레코드 가게와 방송을 초토화한 적이 있다. 거리에도 광장에도 지하철에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하루’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따라 부를 수도 없이 어렵고 신비로운 노래 ‘하루’. 고통스러운 이별을 발라드풍으로 애절하게 노래하는 가수의 절규가 저물어가는 하오의 먼지 풀풀 일어나는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풍경. 거기서 되풀이되는 하루와 또 다른 하루의 균질한 시간의 경과.똑같은 색깔과 향기와 무게로 하루가 겹쳐지고 포개지는 날들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청춘의 상실과 비련은 눈물겹다. 그래도 내일은 다른 얼굴의 하루가 되기를!

2021-08-10

소원

김규종경북대 교수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소원 한두 가지는 있는 법. 도선사 명부전 오르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거기 올려진 무수한 작은 돌멩이를 보자니 마음이 짠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말든 간절한 소원을 담아 올려놓은 돌멩이들. 염천의 작열(炸裂)하는 태양 아래 온몸을 드러낸 채 천둥벌거숭이로 소원을 갈구하는 인간군상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사자처럼 용감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연꽃처럼 깨끗했던 청춘의 날들에 내 소원은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신혼여행 길에서 맞은 동해 일출을 보면서 나는 소원을 간절하게 희구했다. 한 주에 한 번꼴로 일출을 볼 수 있다던 커피 상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졌던 그 날의 기막힌 일출. 고교시절 배운 의유당의 ‘동명일기’가 절로 떠올랐던 장관(壯觀)의 일출!새털처럼 수많았던 날들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동안에도 내게는 소원이 있었다.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서 아, 역시 조폭이 멋지네, 하고 생각했다. 새파랗던 20대에 시인이 되지 못했음을 한탄하던 백면서생이 어느덧 물리적 폭력을 열망하는 30대가 된 것이다. 40대에 우연히 마주친 트럭 운전사의 고독한 얼굴에서 읽히는 자유인의 표상이 흐뭇해서 1만2천킬로미터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트럭 운전사가 돼보리라 하는 꿈도 있었다.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자들이 대통령 한답시고 들먹거리는 시점이 오자 소원도 모습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을 바꿔보자! 세상을 바꿀 힘은 글에 있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50대에 내가 품은 소원은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문필가’가 되는 것이었다. 작은 공책을 구해서 날마다 소원을 만년필로 정성껏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간다. 아직도 내게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예전의 소원과 많이 다른 것이다.조직 폭력배의 멋과 낭만도 아니고, 트럭 운전사의 자유분방함도 아니며,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바람도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며, 내게 주어진 배역은 소소한 단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 먼저 바꾸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자명한 이치도 깨달았던 때문이다. 아니,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은 채 굴러갈 것이기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는 것이 허망한 노릇이리라. 그것이 사적(私的)인 소소한 것이든, 만고에 길이 빛날 장쾌한 것이든, 각자(各自)의 소원에는 고유한 빛깔과 향기가 있다. 소원은 지극히 바라는 꿈 같은 것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살아 있으되 죽어버린 사람은 꿈이 없다. 그래서다. 면담을 신청한 학생들에게 꿈을 묻는 까닭은 거기 있다. 하지만 그들은 바라는 직장이나 회사를 말한다. 배운 것이 ‘장래희망’이니, 무슨 말을 보태겠는가?! 이제는 꿈도 꾸지 못하는 서역정토(西域淨土)로 먼 길 떠난 모친 송별하는 길에서 만난 숱한 돌멩이에 새겨진 꿈을 보면서 기원한다. ‘부디 그대들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환한 햇살 아래 능소화(凌9704花)와 비비추, 어여쁘게 부시다.

2021-08-03

두 여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삼복더위가 예사롭지 않다.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의 징후가 감지된다. 그것도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지구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게 미심쩍기 그지없다. 그런 와중에 캘리포니아 대학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문명은 30년 남았다”고 폭탄선언을 하고 나니 불안이 증폭된다. 그는 기후변화와 함께 핵무기, 자원고갈, 불평등을 인류문명 종말의 4대 이유라고 단언한다.2050년에 인류는 다이아몬드의 공언(公言)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할 것인가! 하지만 나는 모친상을 치르면서 마주친 두 여자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하겠다. 30년 후의 세상과 인류도 중요하지만, 지금과 여기의 사람과 관계도 의미심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미래’를 꿈꾸고 준비하면서 현재를 저당잡곤 했다. 거창한 기획과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현재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버릇 때문이다.불시에 찾아온 모친의 별세는 우리 형제들과 가족 전체를 망연자실하게 하였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코로나19도 고려하면서 역할을 분담한다. 그러다가 맞이한 사람이 상조회사의 중년 여성이었다. 어머니가 가입한 상조회사에 근무하는 여성 상조 전문가. 그분은 우리가 궁금해하고 모르는, 상조와 관련한 모든 문제를 소상하게 일러주고 충고해주었다.어머니의 입관까지 그이의 몫이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정성스레 채비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굿바이’에 등장하는 ‘납관사’가 절로 떠올랐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는 사자(死者)들의 육신을 정성껏 씻고 닦아서 살아생전 이상의 정갈하고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하는 사람. 그런 구실까지 도맡아 진행하는 여성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자연스럽게 ‘고맙습니다!’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어머니가 세상과 작별하기 19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는 생극 공원묘지에 누워계셨다. 우리는 가족회의에서 개장(改葬)과 화장, 그리고 가족 납골묘로 의견을 모았다. 부친 산소의 개장과 화장을 전담할 사람이 필요했다. 동생이 알아낸 전문가 역시 이 분야에서 18년 근무한 중년 여성 베테랑이었다. 몹시 습하고 더운 날 아침에 처음 본 그분은 남성들을 진두지휘해가며 아버지의 유골을 세세하게 수습하였다.이마에 구슬땀을 흘려가며 작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냐고 물었다. 누군가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고 한다. 일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법성게’에 나오는 ‘불수자성수연성’ 아닐까, 생각한다.헌신적이고 성실한 두 여성의 도움을 받아 지난 일요일 가족 납골묘에 두 분의 유골을 모셨다. 어떤 안도감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고마운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도움과 헌신으로 가까스로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찾아드는 하루가 지나간다.

2021-07-27

회갑기념논문집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사노라면 문득 옛일을 돌이키거나 그리워하는 경우가 있다.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전에 쓴 논문을 찾았기로 그런 정황에 빠져든다. 1920년대 소련 희곡을 공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유학을 떠난 두 번째 해에 쾰른에서 사흘 연속 알바를 하게 되었다. 견본시장에서 화재와 도둑을 방지하는 야경꾼 노릇을 한 것이다.사흘 일해서 당시 돈으로 400마르크, 한화(韓貨)로 18만원 정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행복한 마음에 대학 인근 책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불가코프 희곡전집’과 ‘러시아-독일어 사전’같은 책을 사들인다.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이전의 한국에서 러시아문학 관련 서적을 구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러시아희곡을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형편이어서 서책 구하기가 난제였다.지도교수는 “여기서 공부하면 어떠냐?!”고 물으셨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 오늘날처럼 러시아 자료가 풍성했다면 필시 나는 유학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유학을 나간 결정적인 이유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을 현대 중문학이나 브레히트 연구자들도 어느 정도 공감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불가코프 희곡전집은 감동 이상으로 다가왔다.희곡 ‘투르빈씨네의 나날들(Dni Turninych)’을 읽다가 어느 날 난관에 봉착한다. ‘독서백편(讀書百篇)’을 수없이 되풀이해도 ‘의자현(義自現)’이 되지 않는 것이다. ‘궁즉통(窮卽通)’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그래, 불가코프가 키예프 출신이잖아. 필시 러시아어가 아니고, 우크라이나어일 가능성도 있겠군.’ 그런 생각이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그길로 쾰른 대학 슬라브학부 도서관을 찾아 두 권으로 출간된 ‘러시아-우크라이나어’ 사전을 빌려 복사한다. 당시 도이칠란트에서는 복사는 원하는 사람이 하되, 제본은 제본 전문가가 해주는 식이었다. 적잖은 돈을 들여 두툼하고 큼지막한 사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렇게 풀렸다.희곡에서 불가코프는 러시아어, 독일어, 우크라이나어를 곳곳에서 활용하였다. 작품을 읽고 난 소회는 뿌듯함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활의 첫 번째 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논문을 마칠 무렵 서울에서 연락이 온다. 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을 낼 터이니, 논문 한 편 보내라는 것이다.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났을 때 찾아든 기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래서였을까! 논문의 마지막 마침표를 나는 느낌표로 바꿨다. 그 후로 오랫동안 그런 생생한 쾌감과 즐거움은 찾아오지 않았다.지도교수의 ‘회갑기념논문집’은 그렇게 강렬한 추억으로 남았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싫든 좋든 추억을 남기기 마련이다. 그런 추억이 우리를 살아가도록 강력하게 인도하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백세시대’가 보편화한 오늘날 ‘회갑기념논문집’을 출간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오후에 만난 색바랜 논문을 읽다가 홀연 찾아든 소회가 감상에 젖도록 한다. 창밖에 매미 크게 운다.

2021-07-20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김규종 경북대 교수 우연찮은 기회에 접했던 ‘화엄일승법계도’. 의상(義湘)은 화엄종의 대가이자 스승인 지엄(智嚴)스님의 지시에 따라 ‘화엄경’ 80권을 줄여서 ‘대승장’을 저술한다. 하지만 지엄은 각고의 노력으로 의상이 지은 ‘대승장’을 화로에 던져 불살라버린다. 하지만 화로에는 210글자가 불타지 않고 남는다. 지엄이 그것을 의상에게 주어 문리(文理)가 통하도록 한 것이 7언 30행 210자로 전해지는 ‘화엄일승법계도’ 혹은 ‘법성게(法性偈)’다.얼마 전에 210자 전체의 뜻을 이해하고, 모든 문장을 한문으로 기억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침에 15분 내외의 시간을 들여 ‘화엄일승법계도’를 써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블로그에도 ‘법성원융무이상’으로 시작하는 ‘법성게’를 소재로 글을 남기기 시작한다. 그것을 마무리한 것이 어저께 일이다. 마지막 문장은 ‘구래부동명위불’이다.좋은 글이나 시구 혹은 표현은 기억해야 제맛이 나는 모양이다. ‘화엄일승법계도’를 통째로 기억하기 전에도 몇몇 문장은 기억한 일이 있다. ‘일중일체다중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 같은 구절이 그렇다. ‘하나에 전부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는 것과 ‘티끌 하나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표현이 그러하다. 하나와 전체, 티끌과 우주를 관통하는 지적 통찰!분별이 심해지는 탓에 분별하되, 차별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나이 먹는다는 일은 이래서 우울하다. 대상을 시시콜콜 따지고 분류하면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선과 악을 분별한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음이 그리로 향한다. 공자가 ‘이순(耳順)’을 설파한 것에는 까닭이 있는 게다.‘화엄일승법계도’ 가운데 특히 마음에 와닿는 글은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본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 따라 이룬다는 의미다. 누구나 타고난 저마다의 본성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한사코 지키려고 하거나, 그것에 의지하고자 한다. 왜냐면 타고난 본성은 우리를 편안하게 하며,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의상은 그 반대를 설파한 것이다. 타고난 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연이라는 말이다. 인연을 다른 말로 풀면 연기(緣起)가 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기에 저것도 소멸한다는 인과율이다. 우리의 생성 원인도 인연이자 연기이며 인과율이다. 부모님의 인연 따라 우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현대인은 자신의 의지와 욕망으로 대상이나 관계를 결정하려고 한다. 강력한 본성이나 특출한 능력 가진 사람들이 그러하다. 상황이 그러다 보니 볼멘소리와 투쟁과 아수라판이 벌어진다. 성취되지 못한 욕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본성을 누르고 인연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사랑이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욕심을 내려놓고 인연이 오기를 차분히 기다려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창밖 천둥소리가 비구름 부른다.

2021-07-13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7월 1일은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1921년 7월 초하루 상해에서 13명의 대표와 50여 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이 100년의 역사를 맞은 것이다. 2021년 7월 중국 공산당에는 9천200만의 당원이 가입돼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정치집단이 중국 공산당이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72년째 중국을 지배해오고 있다.1949년 이후 공산당은 지도자들에 따라 세 시기로 나뉜다. 모택동이 대표하는 첫 번째 시기는 1949년부터 1976년까지다. 영국을 뛰어넘어 미국을 잡겠다는 구호를 내세웠던 시기다. 하지만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대약진운동으로 최대 4천만에 이르는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아울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으로 150만에 이르는 사람이 죽고, 360만의 박해자가 나온 참담한 시기였다.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주창하면서 시작된 두 번째 시기는 ‘도광양회’로 표현된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했던 시기다. 등소평의 뒤를 이은 강택민과 호금도 역시 은인자중 힘을 길러갔던 개혁과 개방의 시기다. 이 시기를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우주선 신주(神舟)와 우주정거장 천궁(天宮)의 발사 성공과 2008년 북경 올림픽이다.2013년부터 권력 최고봉에 오른 습근평의 시대가 세 번째 시기다. 습근평은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여 2018년 국가주석 3연임 금지를 헌법에서 삭제하여 황제 등극을 기정사실로 만든다. ‘도광양회’ 대신에 그가 도입한 외교정책은 ‘전랑(戰狼)외교’로 불린다. ‘늑대 전사’라는 의미를 담은 전랑외교에 따라 중국은 힘을 앞세워 다른 나라들을 상대하고 있다.습근평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0주년인 2049년에 ‘중국몽’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의 실현 방도로 ‘일대일로(一帶一路)’ 제시된다. 21세기판 실크로드로 중화민족의 야망을 세계 전역으로 확산하려는 것이 ‘일대일로’의 핵심이다. 홍콩의 민주화운동 억압과 신장-위구르와 티베트의 무자비한 탄압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이 시점에서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것이 ‘중화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세계에서 가장 우뚝한 민족으로 중국 민족을 자리매김하겠다는 것이 중화 민족주의 고갱이다. 민족주의는 수세에 몰리는 때에는 해당 민족을 구원하고 독립을 쟁취하는 토대로 작동한다. 하지만 그것이 공격적이고 약탈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면 주변 세계와 불화와 반목을 불러일으키고, 급기야는 극단적인 대립과 충돌 양상을 불러온다.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주의와 제3 제국이 불러온 2차 세계대전과 그 참상을 돌이켜 보라.중국이 요즘 미국과 벌이는 일련의 대결과 충돌 양상은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 1위 자리는 타민족들과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임을 중국 공산당과 습근평 주석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21-07-06

자전과 공전

김규종 경북대 교수 황망하게 상을 치르고, 초제(初祭) 모시고 여드레 만에 돌아온 집 마당에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공사판의 어지러움이 완연하다. 한 달을 넘긴 공사가 이제는 정리되었으면 한다. 하기야 상당 기간 세차장을 찾지 못한 탓에 승용차도 말이 아니어서 도중에 세차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터. 사람의 손을 타야 하는 게 실상 적잖다.저녁이 다가올 무렵 가방 하나 둘러매고 길을 나선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들로 걸음을 옮기곤 했다. 오늘은 허청허청 발걸음이 무디다. ‘그래, 넌 이제부터 너의 내부에 강고한 의지처를 찾아야 한다.’ 헤어지기 전에 막내 누이에게 전한 말이다.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모친과 함께한 누이이기에 상실이 누구보다 크다. 차라리 누이를 위로하라!오늘따라 트럭들이 누런 먼지 풀풀 날리며 질주한다. ‘그래, 농번기 아닌가. 내가 잠시 피하면 그만 아닌가.’ 구름장에 가려진 저녁해가 살며시 얼굴 내밀고, 먼 곳에서 뻐꾸기 운다. 한사코 달려드는 하루살이 무리와 떼로 날아가는 오리가 요란하다. 우렁이들은 어린 모의 줄기에 알을 낳아 후예를 기르고 있다. 창공에 여객기 한 대 날아간다.노란 루드베키아가 하얀 망초와 곳곳에 얼려 화사한 정취 선사한다. 아쉬운 낚시꾼 하나가 청도천을 배회한다.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왜가리와 학이 귀소(歸巢) 서두른다. 그들에게 손 흔들다가 잠시 상념에 든다. ‘지금 이 시각에도 우리 지구별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고 있을 텐데, 왜 나는 그걸 느끼지 못할까.’뉘엿뉘엿 넘어가는 서녘의 태양에 작별 인사하니 해는 돌연 자취를 감춘다. 붉은 구름장만이 그곳에 태양계 주인이 있었음을 웅변한다. 지구는 시속 1,609킬로미터로 자전하며, 107,160킬로미터로 공전한다고 한다. 시속 160킬로미터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면 속도감이 상당하다. 그것의 10배로 지구는 스스로 돌고 있다.자전의 66.6배 속도로 지구는 태양을 공전한다. 우주선 속도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광활하고 허허로운 우주공간을 팽이 돌 듯 날아가는 푸른 지구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왜 우리는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필시 인간이 감촉하기에 지구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 아닐까?!수많은 사람이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세운다. 자신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구는 오늘도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다. 우리도 언젠가 홀연 불귀의 객이 되리라는 자명한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에 깊이 침윤된 채 그것들의 수인(囚人)으로 존재한다.만약에 우리가 지구별의 미미한 구성원의 하나일 뿐이고, 타자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안다면! 삶은 짧게 주어진 위대한 축복이자 기적이기에 누구를 미워하거나 밀어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검붉은 저녁노을이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2021-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