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유튜브 예찬론

등록일 2022-04-03 18:31 게재일 2022-04-04 19면
스크랩버튼
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새로운 옷이나 물품이 유행하기 전에 남보다 빨리 사거나 시험해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가장 늦게 어쩔 수 없는 얼굴로 따라오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부유(浮遊)하며 살아간다. 물질적인 부나 정신적인 여유 또는 대담성이 완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최후의 모히칸이 되기도 싫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중간자로 살아가는 일은 가장 평안하고 안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언제부턴가 유튜브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오래전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로 저녁 시간을 넉넉하게 보낼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기타를 치며 노래하거나 상념에 잠기거나 명상하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히 얻어걸린 유튜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기계를 잘 알거나, 적극적으로 알고 싶은 기질도 없어서 최소한으로 유튜브를 만나면서도 기실 놀라운 바가 적잖다.

나한테 유튜브는 명탐정 ‘셜록 홈스’ 연작이나 중단편 소설을 듣는 수단이다. 따로 시간을 내서 읽겠다는 강박증 없이 다른 일 하면서 귀만 열어두면 가능한 노릇 아닌가?!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한밤의 적요(寂寥)를 나직하게 깨뜨리며 들려오는 낭송자들의 정감 어린 목소리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준다. 아하, 참 멋진 신세계로군! 혼잣말한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가 돌연 알게 된 사실이 유튜브의 세력 확장이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유튜브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던 터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군, 하는 자탄이 절로 나온다. 그들도 나처럼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혹은 신문과 작별하고 유튜브에 의지하여 많은 걸 얻고 있었다. 사람마다 취향과 필요에 따라서 접하는 내용만 다를 뿐, 매체 활용도와 충성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이 드러난다.

얼마 전 피천득 선생의 유명한 수필 ‘인연’을 들으며 감회에 젖는다. 꼬마 아사코와 처녀 아사코를 거쳐 일본인 2세의 아내가 된 주부 아사코와 세 번 만남으로써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수필가. 마치 단편소설의 장면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 이다음에 이런 집에서 살아요!” 하고 아사코가 속삭였을 때, 연두색이 고왔던 아사코의 우산을 보았을 때, 왜 그는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더욱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했다는 넋두리다. 그러니까 달착지근한 추억은 가슴에 간직하되, 쓰라린 작별 장면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한 것이라 결론 내린 셈이다. 저런 이기주의자의 사무치는 회한과 그리움의 잠꼬대에 오랜 세월 붙들려 살았군,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강렬하게 아사코를 마음에 두었다면 어째서 말하지 못했을까?!

식민지 조선의 유약한 서생 수필가가 인생의 황혼 무렵에 느닷없이 도달한 깨우침이란 게 저런 것이었나, 하는 걸 새삼 알려준 유튜브를 예찬하고 싶은 게다. 인연은 함부로 맺어서도, 함부로 걷어차도 아니 되는 것 아닌가?! ‘불수자성수연성’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리라.

破顔齋(파안재)에서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