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사람 하나 만나고 헤어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 그런 의미를 곧바로 깨우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별리(別離)의 각별한 고통을 경험한 뒤에 불현듯 찾아왔다.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이해하며 부대끼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가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리지 않고 일상을 영위한다는 데 있다.
내가 이상엽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5월 일이다. 여느 때처럼 저녁 8시 뉴스를 보려고 도이칠란트 국영방송 ARD 앞에 앉은 나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천연색 화면이 흑백으로 바뀌고, 소리가 사라지더니 한국 여학생 하나가 화염에 휩싸인 채 무슨 말을 절규하는 것이다. 7∼8초 정도 지났을까?! 사위(四圍)가 깜깜해지고 내 몸과 마음은 먹통이었다. ‘저게 뭐지, 어떻게 저런 일이 생긴 거야?!’
다음날 베를린 자유대학 건물에서 이상엽과 마주쳤다. “이상엽씨, 데모 안 해?!” 내가 물었다. “선배님이 성명서 써주시면 조직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당시 베를린 자유대학 한인 학생회는 150명 정도 유학생을 바탕으로 5인 집단 지도체제였다. 야경꾼으로 생계와 학비를 벌던 나는 초안을 잡고, 일터에서 집으로 전화했다. 그렇게 성명서는 마련되었다.
1996년 12월 31일 나는 이상엽과 마주 앉았다. 교환교수로 베를린에 머물던 나는 니체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그와 선술집에서 해가 바뀌는 시간을 함께한 것이다. 보기 드문 한파(寒波)가 도이칠란트 전역을 휘감았던 시절 눈보라를 뚫고 둘이 거리를 질주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런 삼복염천의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에 그런 시공간과 인연은 각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화살처럼 직진한다. 시간은 영원한 원운동의 본령이다. 시간은 인간의 기억에 따라 진자운동을 거듭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의 시공간 기억 속에 살아간다. 어느 때부턴지 이상엽은 나의 아끼는 동료이자 후배 교수이며 연구자가 되어 있었다. 나보다 아홉 살 아래인 그를 보노라면 언제나 경이로웠다. 밝은 얼굴과 맑고 투명한 웃음소리를 간직한 그가 ‘어린 왕자’처럼 내게 다가왔던 때문이다.
그가 담도암 수술을 받은 것은 2019년 9월 30일이었다. 암의 급습을 받은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칠게 날뛰는 암과 대적(對敵)하면서 그는 당당하고 경이롭게 싸웠다. 마치 그의 선배이자 우상이며 경외의 대상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2020년 5월 25일 만난 그날도 그는 환하게 웃었더랬다. 작년 2월에 마주한 그의 모습 역시 그러했다. 그랬던 이상엽이 내 곁을 떠나갔다. 그를 조문한 밤에 하늘은 청명했고 대기는 음습했다.
몇 번이고 가능했을 이상엽과 나의 대면은 영정사진으로 이뤄졌다. 그를 만날 용기도, 떠나보낼 마음도 준비하지 못한 용렬함이 후회스럽다. 누군가와 영영 작별하려면 용기 내서 손을 내밀고 만나야 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먼 길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