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기획ㆍ특집

‘충효의 고장’ 영천

2월이 다가기전에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가족과 함께 ‘충효의 고장 영천’, ‘관광 영천’의 명소들을 찾아다니며 여행의 참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는 것이 어떨까. 영천에는 우리나라 3대 천문관측소 중의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와 정각 별빛마을, 포은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임고서원, 국내 최고 수준의 시안 미술관, 국내 최대 한약재 거래지역인 영천한약약령시장, 7천평 규모로 산 정상에 자리한 사일관광온천, 계절에 따라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영천댐 등이 가볼만한 곳을 2회에 나눠 게재한다. 편집자 주 보현산 천문대 태양플레이어 망원경 보유 먼저 보현산 천문대를 찾아 겨울철 별자리를 찾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정각리 별빛마을에 들러 상큼한 고로쇠 수액도 맛볼 수 있다. 국내 3대 천문관측소 중 하나인 보현산 천문대는 보현산 정상에 위치해 있어 밤하늘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하여 ‘별빛 나라’로 불리고 있다. 보현산 천문대는 천체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며 우주의 생성과 진화를 연구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국내 최대의 천체망원경(렌즈구경 1.8m)과 태양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태양플레이어 망원경을 보유하고 있다.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100만 배 이상 관측이 가능하고, 12km에 떨어져 있는 100원짜리 동전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해상력이 높다. 천문대에 오르면 탁 트인 전망과 함께 야간 개장 때에는 별도 함께 관측할 수 있어 청소년 견학지로 좋은 곳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망원경을 비롯해 천체관측 시설을 직접 둘러보고 별과 우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4월부터 10월까지, 매월 네 번째 토요일 주간 공개행사를 열고 있다. 행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전화(054-330-1000)로 예약을 해야 한다. 보현산 천문대 방문객센터에 있는 전시관에는 각종 천체사진들이 전시돼있으며, 간단한 기념품들을 구입할 수 있다. 야간에는 천체관측이 이뤄지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일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야간공개 행사는 연 중 보현산 별빛축제 기간 중에 한 차례 열린다. 행사시간은 오후2시부터 밤11시까지다. 부대행사로는 유명가수 축하공연, 불꽃놀이, 별빛 패션쇼, 별빛 가요제, 별빛 퀴즈대회, 심야과학영화상영, 별빛 동요왕 선발대회등도 열린다. 보현산 천문대는 1996년4월 영천시 화북면과 청송군 현서면에 걸쳐 있는 보현산 정상일대 9천122평(3만156평방미터) 부지에 세워졌다.(문의 : 054-330-1000) ◎ 가는 길 영천시내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청송방향으로 약 20km 지나면 자천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자천과 과적차량 검문소를 지나면 천문대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서 우회전해 ‘옥계교’라는 다리를 건너 10여분 정도 가면 왼편으로 정각교회가 보이고, 곧 정각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정각 별빛마을을 가로질러 보현산 천문대(9km)로 향하면 된다.   정각별빛마을 밤하늘 쏟아지는 별빛 감상 이름만 들어도 신비스러운 별빛마을에서는 연중 흐린 날을 제외하곤 머리위로 쏟아지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 이 별빛마을은 보현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사, 양촌, 신리, 절골 등 4개의 부락 산골마을로 보현산 천문대 입구에 있다. 행정동으로는 정각(正覺 : 바르게 깨닫다)리다. 별빛 마을은 해발 1천124.4m의 웅장한 보현산이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솟아 정각리 별빛마을을 감싸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를 관통해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맑은 물은 횡계천으로 향하고 있다. 밤하늘을 쳐다보면 머리위로 얹혀 있는 듯 한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별빛축제가 열리는 기간에는 아마추어 천문캠프가 설치되고 별빛마을 농촌체험이 운영돼 관광객들의 방문이 이어진다. 영천시는 이곳에 20억원을 들여 지상2, 지하1층 연건평 200평 규모로 보현산 천문과학관을 착공, 올해 말 문을 열 예정이다. 천문과학관은 주관측실, 보조관측실, 전체투영실, 천문관측 전시실, 시청각실 등으로 꾸며진다. 천문관측관이 들어서면 관광객들이 연중 천체관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각리 별빛마을에는 모두 55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미나리와 고로쇠 수액, 사과 등이다. 미나리는 14농가가 참여, 매년 3월5일부터 한 달 동안 1억3천200여만 원의 매출을 올리며, 고로쇠 수액은 2월18일부터 40일간 5천100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요즘 이곳을 찾는다면 별빛을 머금고 자란 고로쇠 수액을 구입할 수 있다. 고로쇠 수액은 20리터 한 통에 5만원 정도.(문의 : 허성수 이장, 010-6595-3773)   임고서원 선현들 배향 사설교육기관 임고서원은 위기에 처한 나라의 국운을 바로 세우고자 죽음으로서 절의를 지킨 시대의 충신 ‘정몽주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임고서원은 1553년 조선 명종 8년에 창건해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3년 선조 36년에 중건됐다. 1643년 인조 21년 여헌 장현광과 1727년 영조 3년에 지봉 황보 인을 배향했으나 1871년 고종 8년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됐다. 1965년 복원했고, 1990년대부터는 성역화사업을 추진해 기존 서원 옆에 새로 서원을 세워 큰 규모를 갖추었다. 임고서원 소장전적 및 포은 정몽주 영정이 보물 제1109호, 111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높이 20여m, 둘레 5.95m의 이 은행나무는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됐다. 수관 폭은 동서방향으로 22m, 남북 방향으로 21m에 이르고 있으며, 생육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여기서 서원에 대해 간단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여행 중에 더한 즐거움을 얻게 된다. 어려서 처음 가는 교육기관은 서당이며, 서당에서 기본적인 유학서들인 ‘동몽선습’, ‘격몽요결’, ‘명심보감’ 등을 익힌다. 지금의 사립초등학교라 생각하면 된다. 서당을 마치고 다음으로 진학하는 교육기관이 서원과 향교이다. 서원과 향교는 유학의 선현들을 모시고 후학을 양성하던 똑같은 기능을 하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국가교육기관인 향교는 대성전을 두어 공자를 배향하는데 비해 사설교육기관인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들을 배향했다. 향교나 서원에서는 ‘소학’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을 배웠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과거를 보거나 성균관 입학시험을 보았다. 대원군의 서원(당쟁의 뿌리 역할) 철폐령 이후 남아 있는 오늘날 서원들은 교육기능을 상실한 채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문묘의 기능만 하고 있다.   정몽주 선생 · 조양각 영남 3대 루 중 하나 조양각 ◆정몽주 선생 호는 포은. 1337년 고려 충숙왕 6년에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을 세계관으로 한 고려 말 신진사대부 중 온건파의 수장으로서, 고려를 보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급진파인 이성계 일파와 대립하였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1392년 공양왕 4년 4월4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됐다. 이때 나이 56세였으며, 선혈을 흘린 자리에서 푸른 대나무가 솟아나 이름을 선죽교로 고쳐 부르게 됐다. 이후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를 문충공이라 했다. 포은은 효성이 지극했으며, 생활이 검소했고, 벼슬에 있을 때 청렴, 근신했다. 이방원의 하여가의 답가로 유명한 단심가를 남겼으며, 의창과 5부학당, 향교 등을 세워 빈민구제 및 성리학 보급, 사회윤리 확립, 교육진흥에 힘썼다. 문집으로는 ‘포은집’이 있고, 그의 굳은 충성을 읊은 시조 ‘단심가’가 전해지고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영천IC에서 빠져나와 시청방향으로 진입해 안강, 포항 방면 26번 국도 조교삼거리에서 임고 방면 69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4.5km 정도 가다보면 임고 삼거리가 나오는데 바로 왼편이 임고서원이다. (054-335-2864) 여기서 곧장 가면 보현산 천문대가 보인다. ◆조양각 진주 촉성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루 중 하나인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년)에 성리학의 원조 포은 정몽주 선생과 당시 부사이던 이용, 향내 유림들이 합심해 지은 건물이다. 조양각은 명원루, 서세루라고도 한다. 명원루라는 이름은 당나라의 문장가 한퇴지의 시구(훤히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오는 듯하다)에서 왔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 15년(1637)에 조양각이라는 이름으로 중건했으며, 누각 안에는 포은의 청계석벽을 비롯 율곡, 사가, 노계 등 명현, 풍류객들의 시구가 새겨진 현판 80여개가 걸려 있다.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루 중에 하나이며, 경내에는 백신애 문학비와 황성옛터 노래비, 영천지구 전승비 등이 있다. 계속 /김규동·장병욱기자

2007-02-23

“마고할멈 전설 · 忠婢단량 · 貫目魚등 다양한 역사 간직”

이삼우포항향토사가더 이상 갈 곳 없어 ‘이제 그만’이란 탄식에서 유래된 ‘구만리’청어 관목어에서 비롯된 과메기, 지금은 세계속 먹거리로 발전사랑하는 님 만나려고 마고할멈이 놓은 바닷속 돌다리 ‘교석초’■ 구만리의 유래동해안에 별스럽게 툭 불거져나온 작은 반도 그 끝 부위를 장기곶이라 한다. 고산자는 이 나라의 지형이 호랑이 같다며 이 일원을 호미등(虎尾嶝)이라, 곧 호랑이꼬리짬으로 표현했다.해맞이 공원이 있는 대보면소재지 보천마을 북쪽으로 KBS송신소가 자리하는 언덕배기 전체를 구만등(九萬嶝)이라 한다. 구만리라는 단어 그 자체가 한없이 넓다는 뜻을 품는다. 혹자는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던 지역이라고 龜滿, 혹은 언덕이 질펀하다하여 丘滿이라는 설도 있다. 그 다 일리 있는 풀이이겠지만 ‘이제 그만이구나’라고 외친 한 여인의 절규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 여겨진다.세종때 영의정에 올라 훗날 단종을 보필하던 충신 황보 인 정승 가문이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할 때였다. 단량(丹良)이라는 여종이 정승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을 빠져나와 산 넘고 물 건너 낯선 길 천리를 걸어서 봉화군 닭실마을로 황보 인의 사위 윤당(尹塘)을 찾아가 노잣돈을 마련하여 은신처를 찾아서 이 곳까지 내려온다.이제 더 달아나 숨을 곳이 없는 허허로운 구만등 언덕에 이르러 한숨지으며 외쳤던 절규가 ‘이제 그만이구나’이었다. 이 ‘그만’이 ‘구만’으로 와전되어 이두식 한자표기로 구만(九萬)이라 불려지게 되었다는 설이다.더 나아갈 땅길이 없음에 그녀는 아기를 다시 들쳐 업고 눈을 피해 장곡봉수대(봉화봉 130m)가 있던 고금산(일명 馬峯산) 골짜기 집신골(집성골)로 숨어든다. 그 곳은 해변에서 불과 1㎞ 남짓 떨어진 그리 높지 않은 산이요 깊지도 않는 골이건만 외지고 깊숙하기가 심산유곡 같아서 숨어 살기에 적지였다. 그 곳이 곧 황보 집안의 맥을 다시 잇게 하는 은둔처였으니 4대를 칩거했던 곳이다. 그래서 이름이 집성골[集姓 골]이라 불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그 자리에 대곡(大谷) 저수지가 축조되어 550여 년 전의 그 뼈아픈 흔적들을 물속에 묻어 담고 유유하기만 하다.훗날 세상이 밝아지고 곤혹의 역사가 희석되면서 그 후손들은 장기면 모포리 뇌성산성 뒷자락, 지금의 구룡포 성동(城洞)마을로 이주를 하여 세거(世居)할 터를 잡고 다시금 핏줄을 늘리며 가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숨어 산지 290여년 만에 자유와 명예를 되찾게 된다. ■ 깔구리개와 과메기의 전설대보 마을에는 ‘봄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는 말이며 ‘내밥 먹고 구만등 바람 쐬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3면이 탁 트인 바다요 바람막이 숲도 없는 언덕배기 지형이라 바람거세기가 가히 살마적(殺馬的)인 곳이다.그 구만등 끝자리에 깔구리개라는 작은 포구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종종 깔구리로 고기를 끌어 모아야 했던 풍경들 때문에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그도 보통 고기가 아닌 청어였다. 개는 浦-개 자다. 옛날에는 음력 정월이면 이 연안으로 청어 떼가 몰려오곤 했는데, 몹시도 풍랑이 거친 지역이라 몰려다니던 고기 떼들이 거친 파도에 떠밀려서 이 마을 포구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여서 이를 주민들이 깔구리로 긁어모았던데 연유한다.과거 영일만 호시절 까지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어였었다니 족히 가능한 이야기다.교석초 일원은 암초투성이다. 물밑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난파선도 잘 생기는 별난 자리다. 그래서 풍랑이 거친 날에는 고기떼가 방향을 잘못 잡아 골탕을 먹고서 뭍으로 밀려 나둥그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북새통 속에 어떤 녀석은 해변 나뭇가지에 걸리고 어쩌다 꺾어진 나뭇가지에 눈이 꿰뚫려 걸린 상태로 피둥피둥 건조되기도 하였다. 한자로 쓰니 곧 ‘꿰뚫을 관(貫)’ ‘눈 목(目)’이라, 즉 관목어(貫目魚)가 된 것이다.어느 추운 날 가난한 한 선비 나그네가 이 해변을 거닐다가 그렇게 방치된 고기를 챙겨 주막에 들어가 술을 사 마실 때 안주로 했던 것인데, 그 맛이 특이하고 좋은지라 신상품이 개발되니 이에 관목어(貫目魚)라 이름 한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방언의 습성이 작용하여 ‘과메기’가 된 것이라 한다.그 후 과메기는 발달을 거듭한다. 옛날에는 꽁치가 아닌 청어두름을 부엌 환기창 밖에 걸어두고서 말리게 되어 있었다. 부엌 아궁이에서 나오는 연기가 훈제역할을 하여 방부효과를 내게 하기 위함이요,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면서 건조되게 하기 위함이다.그것도 등이 아래로 향하게 거꾸로 메어 달게 된다. 그래야 온도의 고저에 따라 애간장이 녹아내려서 서서히 몸체에 스며들어 깊고 오묘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惡化(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더니 과메기 원조는 까마득히 사라지고 꽁치과메기가 기승을 부린다. 어쨌거나 경향각지로, 마침내 세계로 까지 판매망이 이루어지고 있다니, 꽁치팔자도 시간문제였나 싶다.깔구리개 앞 바다 속으로는 겉과는 달리 험하기가 설악이나 금강산의 어느 바위산지느러미 능선 같다고 한다. 수중 험한 산봉우리들의 정수리가 해수면위로 노출된 부분이 북쪽 축산을 향해 거대한 디딤돌 놓이듯 돌출 배치되어 있어 교석초(橋石礁)라 한다. 태고적에 마고(麻姑)할멈이 영덕군 축산으로 사랑하는 님을 만나러 가려고 밤새 놓다만 돌다리라는 전설을 갖는다.1907년 9월9일 일본 동경수산대학의 전신이던 수산실습소 실습선 가이요마루(쾌응환·快鷹丸)라는 범선이 이 지점에서 좌초, 조난하면서 교관 1명과 학생 3명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죽은 것을 기념하는 비가 이 일원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있어 그 정황을 짐작케도 한다.이 지점이 겉보기에는 육지의 한 끝이지만 해저지도에 의하면 바다 속으로 울퉁구불 이어지는 큰 산맥이 있어 영덕의 축산과 연결된 형국이라 한다. 바다 속에도 산맥이 있고 분지며 평원이며 단애며 밀림이며 갖가지 형상의 지형이 있게 마련이다.곧 이 해중(海中) 산맥 때문에 동해로 흘러드는 각종의 오염물질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마침내 조개 한 톨 건저 먹을 수 없는 죽은 바다로 변한다는 학설이 있어 우리를 경악케 한다. 환경부 발간 환경백서에 의하면 포항과 경주, 영덕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우행을 지속한다면 불과 20년 이내에 그렇게 된다는 경고다.특히 우리 포항은 해양 도시로 발돋움하여야 할 운명인데 바다가 죽으면 함께 죽어갈 것이 뻔 하기에 걱정이 된다.후손들에게 온전히 물려주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과메기에서 벌어들인 순수입에 해당하는 재원부터 몽땅 바다 살리기 투자로의 전환을 기획하는 것도 불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이제 ‘포항의 역사이야기’ 연제의 그 끝을 본다. 필자가 써 내린 글 들 중에 더러는 誤記(오기)며 文弱(문약)함에도 핀잔 없이 격려와 공감대로 함께해준 애독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향토 사랑의 깊은 정이 확산되므로서 품격 있고 아름다운 포항이 건설되기를 빌어본다.끝

200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