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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라지는 것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날마다 산책을 하는 이 들판은 지금 모내기가 한창이지만,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의 막바지인 보리누름이다.녹음이 시작되는 초여름에 삼베를 널어놓은 것처럼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이제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채우려고 논에도 이모작으로 보리나 밀을 갈았다. 그것을 베어서 타작을 하고 벼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연중 가장 바쁜 농번기가 바로 이맘때였다. 학교마다 가정실습이란 명목으로 휴교를 해서 아이들까지 일손을 돕게 했다.겨울을 나고 봄을 거쳐 초여름에 이르는 보리밭 풍경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그와 함께 아낙네들이 보리밭의 김을 매는 모습,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 광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구통을 뉘어놓고 보릿단을 태질해서 떨어낸 낱알을 도리께로 몽글리던 보리타작도 사라진 풍습이 되었다. 그 때 불렀던 ‘옹헤야’ 같은 농요는 문화유산으로나 남았다. 우물물에 만 보리밥에다 풋고추나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던 점심도 옛날이 되었다.한 술의 쌀밥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벼농사도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소를 몰아 쟁기질과 써레질을 하고,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낫으로 베어서 탈곡을 하던 모든 과정이 기계화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모를 심던 풍경 대신 이앙기 몇 대가 두어 주일이면 드넓은 들판의 모내기를 다 해치운다.들판에 울려 퍼지던 모심기노래도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논둑에 둘러앉아서 참이나 점심을 먹던 풍경도 없어졌다. 여남은 살 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들판까지 젖을 먹이러 오던 것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다.농사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매기였다. 보리밭 콩밭 김매기가 주로 아낙네들의 일이라면 벼논의 김매기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세 벌은 매어야 하는데, 한여름에 뙤약볕에 열손가락으로 논바닥을 긁어서 김을 매노라면 볏잎에 온통 얼굴이 긁히고 베적삼을 땀으로 적시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참 편리하게도 모를 심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서 아예 잡초가 나지 않으니 벼논의 김매기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벼논에서 사라진 것은 잡초만이 아니다. 그 흔하던 물방개, 소금쟁이, 장구애비, 물자라, 게아재비, 물장군 같은 물벌레들이 사라지고 종아리에 달라붙던 거머리도 사라졌다. 밤 들판의 반딧불이가 사라진 건 벌써 옛날이고 미꾸라지와 개구리도 드문 존재가 되었다.시멘트로 된 수로에는 미꾸라지가 살 수 없고 땅속에서 월동을 하는 개구리도 트랙터 로타리작업 등으로 멸종 위기에 놓인 것이다. 여름 들판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던 제비도 보이지 않고 메뚜기나 여치 같은 풀벌레도 눈에 띄게 줄었다.현대화된 기계영농으로 사람의 손이 거의 안 갈 정도로 벼농사가 수월해지고 쌀이 남아돌 정도로 풍족해진 것은 좋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은 없지 않다.

2024-05-23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외교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최근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에 대해 ‘대통령 배우자의 첫 단독 외교’라는 말이 비난의 불똥이 튀어 외교(外交)의 의미를 되내어 본다.외교는 주로 군사적 또는 정부 간 협상을 다루는 정무 외교와 경제 외교가 주된 것이지만 근래에는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등의 가치를 내걸고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여 국가 간 공감대를 엮어나가는 공공 외교(Public Diplomacy)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즉 다른 나라의 국민 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이해와 신뢰를 높여나가는 보이지 않는 외교도 중요하다. K-팝이나 K-드라마 같은 인기가 국격을 높여주고 방산 무기와 AI 산업 특화도 우리나라를 세계적 관심으로 ‘힘 있는 나라’의 반열에 올려놓아 많은 국가가 우리와 좋은 관계 맺기를 희망한다.22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딸, 게바라 마치 박사가 “미국의 반대에도 쿠바와 수교를 맺어준 한국을 쿠바 국민은 환영하며 앞으로 한국의 선진 기술이 쿠바 산업 발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과 쿠바는 지난 2월에 전격 수교했었다.우리의 외교가 미·중·일·러시아의 4강에 편중되어 온 것은 지정학적 이유가 컸지마는 이제는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까지 우호를 쌓아가고 있다. 따라서 강대국의 논리에 맞추어 나가는 약한 나라에서 한 단계씩 우리의 길을 개척하는 힘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국격(國格)이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이 말은 중국의 당서(唐書)인 노탄전(盧坦傳)에 나오는 말이며, 평소에는 만만하게 보여도 내면의 강인함, 즉 타인에게 겸손하고 예의 있게 행동하면 존경받는다는 뜻이다.이제 우리나라도 힘을 갖고 평화와 안정을 누리며 국제기구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태 한국 외교의 고질병이었던,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의 눈치 보는 것에서 벗어나 주의 깊게 정세를 읽고 정확한 판단으로 이겨나가야 한다.얼마 전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취임식에 미·영·EU는 불참했으나 우리는 러시아 대사를 보냈고, 타이완의 라이칭더 총통의 취임식에는 정부 측 인사를 보내지 않았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을 염두에 두었을 테다.외교의 임무는 국가 이익 즉, 자유 독립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니만큼 줄타기 외교도 해야 한다. 그러나 내유(內柔)까지 되면 곤란하다. 특히 내분은 패망의 지름길이다. 내강(內剛) 즉,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마음속으로는 꿋꿋하여 결코 약하지 않아야 된다. 우리는 형제라고 하는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위협도 받고 대법원까지 해킹당했는데, 정치권의 분열과 민심의 이반까지도 일어나고 있으니 너무 몰랑하게 보이는가? 7년 전 중국을 국빈 방문한 대통령이 ‘혼밥’을 먹고, 한국 기자들이 중국 경호원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것도 속이 강건하지 못한 탓일까…. 부끄럽다.앞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따라 미군 철수나 감축이 행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으니 국가 안보를 위한 외교 역량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기다.

2024-05-23

‘안동호의 손님’ 쇠제비갈매기를 보셨나요

어제 본지 1면에 실린 ‘안동호 쇠제비 갈매기 부부’ 사진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수컷 갈매기가 새끼를 품은 암컷에게 먹이를 전달하는 모습은, 이들이 알에서 깨어난 새끼를 얼마나 힘들고 소중하게 키우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한다. 쇠제비갈매기(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제비모양의 작은 갈매기)는 암컷이 알과 새끼를 품고 있을 동안 부지런히 먹이사냥을 해서 암컷에게 전달하고, 암컷은 이를 새끼들에게 먹인다.이들은 원래 낙동강 하구 모래밭(삼각주)에서 주로 번식했지만, 4대강 사업으로 강 하구 생태계가 훼손되면서 지난 2013년 봄부터 안동호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 본지 권광순기자(현 조선일보 기자)가 이 장면을 특종보도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안동시는 쇠제비갈매기를 수위 변화나 포식자(수달, 수리부엉이 등)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영구적인 인공모래섬 2개를 만드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해 왔다. 쇠제비갈매기 서식지 보호 노력이 12년째 이어지면서 안동호를 찾는 무리는 처음 40~50마리에서 최근엔 100마리 이상으로 늘었다.올해는 지난달 6일 120여 마리가 안동호를 찾았고, 짝짓기·둥지틀기·포란(抱卵) 과정을 거쳐 5월 10일 인공모래섬에서 처음으로 새끼가 알에서 깨어났다. 모두 23개 둥지에서 2~3일 간격으로 태어난 새끼는 모두 62마리로, 현재 인공 모래섬은 병아리사육장처럼 시끌벅적하다. 이들이 4월에 안동호를 찾는 것은 이때가 빙어 산란기여서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새끼들은 부화한지 20일 정도 지나면 부모로부터 독립해 비행할 수 있기 때문에, 7월이 되면 이들은 안동호를 떠난다.안동시가 지난해 정부지원을 받아 서식지 인근 섬에 따로 탐방인프라(고배율 관찰 망원경 등)를 구축했기 때문에, 최근에는 전국적인 탐조 관광객들이 유람선을 타고 쇠제비갈매기 모습을 비롯해 호수경관을 즐기고 있다. 안동댐 축조로 재산권행사나 안개 피해가 심한 안동시민들이 해마다 찾아오는 쇠제비갈매기로 인해 다소 위안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다.

2024-05-23

대구의 개방성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는 오래전부터 분지형 도시로 소문나 있는 곳이다. 분지란 산지로 둘러싸인 평평한 지형을 두고 하는 말인데 대구는 분지형 도시의 대표적 도시로 손꼽힌다.그러면서 분지형 도시에 덧붙여 대구를 폐쇄성이 강한 도시라고 얘기하는 이가 많다. 분지형 지형과 도시 폐쇄성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들을 수 없다.지리학자들은 70%가 산지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도시가 형성된 상당수 지역이 분지에 해당한다고 설명한다. 대표적 도시로 서울을 꼽는다. 도시의 폐쇄성과 분지라는 지형과는 이론적으로 상관관계가 없다는 뜻이다.그런데도 여전히 대구를 정치성향 등과 비교해 폐쇄성이 강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도시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좀 더 개방적 도시로 바뀌어야 대구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대구시가 내년부터 신규 공무원 임용시험 시 적용하던 거주 조건을 폐지했다. 지금까지 대구시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려면 응시자가 시험일 현재 대구시에 거주하거나 과거에 3년 이상 대구에 거주해야 하는 조건이 붙었다. 전국 광역시도가 공통으로 적용하던 거주 조건인데 대구시가 가장 먼저 이를 폐지한 것이다.이에 대해 대구시는 지역의 폐쇄성 극복과 공직사회의 개방성 강화를 위한 조치라 설명했다. 이번 조치로 전국 각지에서 인재가 유입되고 공직사회의 다양성과 경쟁력이 확보되는 계기가 될 거라고도 했다.홍준표 대구시장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대구굴기(大邱5D1B起)다. “대구가 다시 힘차게 우뚝 일어난다”는 뜻이다. 전국 3대 도시 명성을 되찾는 굴기에는 개방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조치는 그런 점에서 잘한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23

도레이 구미 투자, 지방정부 노력이 낸 성과다

도레이 그룹은 탄소섬유 분야 세계 1위의 일본기업이다. 도레이와 도레이첨단소재가 또다시 첨단소재 분야 글로벌 생산기지로 구미를 선택했다. 산자부와 경북도, 구미시가 22일 도레이와 함께 첨단소재 분야에 대한 투자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투자 규모는 총 5000억원으로 탄소섬유, 아라미드섬유, 정보통신 소재용 필름, 이차전지 분리막 등의 생산시설을 구축한다.도레이는 지난해 10월 구미 4공단에 탄소섬유 3호기 기공식을 가지고 2025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설비작업을 진행 중이다. 설비구축이 완료되면 구미에서는 연산 8000t 규모의 초고성능 탄소섬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도레이는 한일국교 정상화 이전인 1963년부터 한국에 진출해 60년 동안 섬유 분야에 5조원의 누적 투자를 한 대표적 외국인 기업이다. 한·일 관계라는 정치적 변수에도 꾸준히 투자해 외국 기업 국내 투자의 모범사례로 주목받아 왔다.잘 알다시피 국내 기업들도 값싼 인건비를 찾아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로 떠나는 상황에 외국 기업이 지속적으로 지방의 작은 도시인 구미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생산과 공급 측면에서 유리한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지방자치단체의 투자유치 노력과 오랜 신뢰가 이어져온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도레이의 이번 투자에 앞서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김장호 구미시장이 수차례 일본으로 건너가 도레이그룹 회장 등을 만나 구미 투자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아키히로 도레이 회장에게 감사의 뜻으로 구미시가 명예 구미시민증을 전달하는 행사도 가졌다. 도레이의 구미투자에 대한 보답으로 행·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도레이는 구미지역에 도레이첨단 소재 본사와 5개 공장을 두고 있으며 종업원만 1800명에 달한다. 일자리 창출은 물론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바가 적지 않다.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기업의 투자를 지방으로 이끄는 데는 지방자치단체의 열정과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도레이의 통큰 구미 투자를 모범 사례로 삼아야 한다.

2024-05-23

일그러진 영웅, 김호중

홍석봉 언론인 김천이 낳은 인기 트로트 가수 김호중이 음주 교통사고로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교통사고를 낸 뒤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음주운전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매니저는 자신이 운전대를 잡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그러나 사고 발생 열흘 만에 음주 사실을 시인했다. 형사 처벌이 불가피해 보인다.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김호중은 음주 운전을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자숙의 시간을 갖겠다고도 했다. 소속사도 거짓말 해명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후폭풍은 거셌다. 미스터트롯 갤러리는 김호중의 엄정한 수사를 요청하는 입장문을 냈다. 누리꾼들은 “너무 뻔뻔하다” “구속돼야 마땅하다” 등 반응을 보이며 질책했다. 검찰총장까지 나섰다. ‘운전자 바꿔치기, 허위진술 교사·종용 등은 사법방해 행위’라며 구속사유 반영을 지시했다. 경찰은 음주, 뺑소니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여론이 나빠지자 15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김호중 팬카페도 ‘책임을 통감하며, 사죄의 말씀과 용서를 구한다’며 고개 숙였다.김호중은 그동안 “술잔에 입은 댔지만 마시진 않았다”며 누가 봐도 구차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했다. 음주 운전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다. 차량 블랙박스 메모리 칩은 소속사 직원이 제거했다. 이 와중에 경남 창원에서 대형 콘서트까지 열었다. 그러면서 “모든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국민과 법과 공권력을 기만했다.범죄를 저지르고도 부인하는 정치인 등 지도자들의 그릇된 행태를 떠올리게 했다. 뒤틀린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잘못을 잡아떼고 은폐 및 조작하려다 결국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사고 후의 대형 콘서트와 거물급 변호사 선임까지 입방아에 올랐다. 대중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다. 가수 생활에 치명상을 입었다.잘못을 저지르고도 발뺌하려 한 대가치곤 혹독하다. 물론 콘서트 등의 막대한 취소 위약금을 고려, 부인했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더라도 잘못됐다. 사고 후에도 바로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더라면 이만큼 사태가 확산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부적절한 대응이 사태를 키웠다.일그러진 영웅이 됐다. 김호중은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주위의 도움으로 성악을 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트롯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 스타가 됐다. ‘개천 용’으로 성공신화를 써가던 중이었다. 김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김천시와 시민들은 ‘김호중 소리길’을 조성할 정도로 각별한 사랑을 보였다. 그런 그가 지역민과 팬들의 사랑과 기대를 외면했다. 그의 빗나간 처신과 행보에 일부 누리꾼들은 사생활까지 파헤치며 인간 까뭉개기에 나서고 있다. 도를 지나쳤다는 지적이 일었다. 사회 일각에선 전도양양한 가수의 추락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적지않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이들은 그만큼 자기관리에 엄격해야 한다. 김호중이 법적 처벌을 받고 잘못을 뉘우치며 다시 무대에 설 수 있길 기대한다. 사랑받는 트롯 가수로 돌아와 국민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길 바란다.

2024-05-23

손목터널 증후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손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군 중 많이 걸리는 질환 중 하나가 손목터널 증후군이다. 정중신경은 목에서 나온 신경이 합쳐지고 분리되면서 나오는 가지가 팔의 오금 쪽을 지나 아래팔 가운데 부분을 타고 손바닥을 지나간다. 다시 그 가지는 엄지 검지 중지와 약지 반을 지나간다. 정중신경이 손목 손바닥 근위부에서 다양한 이유로 눌리면 증상이 생긴다.기본적으로 손바닥 쪽에 통증이 발생하고 저리거나 시린 증상이 나타난다. 잘 때 혈액순환이 안되어 손이 아파서 깰 수도 있고 저리거나 시린 증상이 더 심해진다. 오래되면 엄지 두덩 쪽의 살이 빠지는 위축이 생길 수도 있고 손가락의 근육 위축으로 손가락 사용이 뻑뻑해지고 힘들어진다. 검사는 간단하게 할 수 있는데 손바닥 쪽 손목주름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어느 정도 강도로 두드리면 손바닥이 저리거나 불편한 증상이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팔렌검사라고 하는데 양 손목을 구부린 채로 서로 맞닿게 두고 1분간 기다릴 경우 정중신경의 경로에 따라 마비가 나타난다. 그리고 추나 기법을 할 때 환자를 눕힌 뒤 경추를 반대쪽으로 돌려 신경을 팽팽하게 만들고 손바닥을 지나가는 정중신경을 압박하면 증상이 나타난다.진단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대부분은 손을 과사용하는 직업에서 나타난다. 컴퓨터를 많이 사용하는 사무직이나 컴퓨터 관련 직종들, 미용업을 하시는 분들 식당에서 물건을 많이 나르는 일을 하는 여성들에게도 많이 생긴다. 요즘은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해서 정중신경이 압박되기도 한다.손바닥을 지나가는 힘줄과 건초에 염증이 생겨 부으면 손바닥을 가로로 지나가는 횡 인대막에 눌려서 증상이 발생하기도 하고 갱글리온이나 시스트 같은 것이 내부에서 생겨서 신경을 압박하기도 한다. 이유야 어떻든 정중신경이 압박되어 생기는 증상으로 구조적인 문제와 더불어 직업도 원인이 되어 쉽게 낫지 않는다. 심한 사람은 잠을 못잘 정도로 고통을 받는 질환으로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치료는 추나 치료와 초음파로 직접 보면서 환부 근처에 바로 약침을 주사하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 추나는 경추와 어깨 팔꿈치까지 교정을 하는 것으로 틀어져 있던 관절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정중신경의 주행경로가 정상이 되어 불편한 증상이 감소한다. 그리고 초음파로 정중신경을 직접 확인을 화면서 눌려 있는 곳에 약침을 주입해 눌려 있는 곳의 공간을 확보하고 씻어줘 눌리는 것을 줄이고 염증을 빨리 제거하면 일반 치료보다 몇 배 빨리 좋아진다. 그 외 부항과 침 치료가 같이 병행 되어야 하고 잘 때 저림이 너무 심한 사람은 혈액순환을 개선시키는 한약을 복용하면 훨씬 빨리 치료가 된다.사람에 따라 다르나 심하지 않은 경우는 추나와 초음파로 치료하면 5회, 10회 안쪽으로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심한 경우라도 신경손상이 없다면 10회 정도의 치료로 많이 좋아진다. 너무 오래 되면 손가락 근육의 위축이 오게 되고 신경 손상도 동반되어 치료가 오래 걸리고 심하면 손을 사용하기가 힘드니 너무 오래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다.

2024-05-22

뿌리와 날개1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간 모두의 집에는 텃밭과 꽃밭엔 물론, 마당에도 풀이 잔뜩 자라있었다. 모자를 챙겨쓰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장화로 바꿔 입을 겨를 없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로 풀을 뽑는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몸을 구부려 풀을 뽑다가 억세지도 않은 것 같은 풀줄기에 스친 손바닥이 아렸다. 그제야 장갑을 찾으러 툇마루에 올라 걸터앉았다. 한 10여분이나 되었을까. 잠깐 사이에 이마며 뒷덜미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숨을 몰아본다. 연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쥐어뜯으니 풀은 뿌리째 뽑히지 않았다. 이제껏 한 일은 도로아미타불. 다시 호미를 찾아 본격적으로 마당으로 나선다. 사람 사는 집이라면 최소한 마당에만은 풀이 없어야 한다. 몇 주 동안 집을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삼키며 개망초 줄기를 움켜쥐어 뽑고, 뿌리를 캐낸다. 주저앉은 채 온 마당을 돌아가며 크게 자란 풀을 대강 감추었다. 댓돌 아래 꽃밭엔 연분홍 메꽃이 보라색 초롱이 무더기져 피어 있다. 지난 달 꽃씨를 뿌린 자리엔 연한 떡잎들이 오종종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꽃모종 가까이의 풀까지 없애고서야 허리를 폈다.텃밭은 그나마 풀이 덜 자랐다. 채소 모종을 심으면서 비닐을 꼼꼼히 깔아준 덕분이다. 대신 채소들은 무성히 자랐다. 오롱조롱 빨간 딸기를 맺고 있는 딸기 모종을 뒤져 딸기를 따 입에 넣으니 달다. 다시 하나 더 따려고 보니 벌레가 주위에 가득하니 있다가 부산스럽게 흩어진다. 달디단 딸기향에 모여들었나 보다. 그래 익은 딸기는 너희들 먹어라. 그 옆자리에 심은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아선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줄기 아래엔 토마토가 제법 달려 있다. 내일 꼭 다시 와서 토마토와 고추에 지지대를 세워주어 하늘 보고 쑥쑥 커서 맘껏 열매 맺도록 해야겠다.자주색 콜라비의 단단하고 둥근 줄기가 땅 위에 솟아 있는 걸 봤다. 우리가 먹는 부위가 뿌리가 아니라 줄기임을 알았다. 며칠 전 남편이 케일잎이 많이 컸더라며 따오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실은 콜라비잎이었다. 꽤 큰 콜라비 하나를 뽑았더니 둥근 줄기 아래에 무뿌리같이 생긴 뿌리가 있다. 그 옆에 심은 오이 무더기도 뒤적여보니 제법 굵은 오이도 두어 개 달려 땄다.마당과 텃밭을 대강 돌보고서야 집 앞 우물가 꽃밭을 둘러본다. 토끼풀이 무성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포기한 곳에 어디서 꽃씨가 날아와서 자리를 잡았나 노란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고혹적으로 붉은 꽃양귀비도 적당히 섞여있어 돌보지 않은 주인장을 무색케 한다. 고맙기도 해라. 작년 심은 장미 두 그루는 담장을 기어올라 바싹 붙어 꽤나 많은 붉은 꽃을 매달고 있다. 보리수나무엔 빨간 열매가 튼실하다. 블루베리도 열매를 맺었고, 손자의 석류도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는 꼭 석류를 보여주고 싶다.무심히 풀을 뽑는다. 가끔은 도 닦듯이 풀 뽑는다는 옛 친구의 말을 새기면서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풀을 뽑는다. 보기 싫고 성가시니, 텃밭의 채소를 방해하므로 뽑을 뿐이다. 성찰할 틈도 겨를도 없다. 그러나 천재적 사상가는 달랐다.

2024-05-22

망종(芒種)과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아홉 번째가 망종(芒種)이다. 태양의 황경이 75도에 위치하며, 2024년에는 6월 5일(음력 4월 29일)이다. 음력으로는 5월의 절기다. 망종은 소만(小滿)과 하지(夏至) 사이다.망종(芒種)은 바야흐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보리가 익어가고 매화가 열매 맺기를 시작하는 때다. 산에는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다. 밭 근처에서는 오동나무꽃, 이팝나무꽃,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또한 감나무에 꽃이 핀다. 인동꽃, 다래꽃, 달래꽃도 피어난다. 사마귀나 반딧불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뜨거운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서 가뭄이 지속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망종(芒種)이란 벼나 보리처럼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합한 시기라는 의미다. 여기서 ‘망(芒)’은 벼나 보리처럼 까끄라기를 말하며 ‘종(種)’은 그러한 작물을 뜻하는 바, 곧 밀과 보리를 수확하고 벼를 심을 때라는 것이다. 망종은 고생스럽고 힘든 농번기이지만, 지난날 높고 험난한 보릿고개로부터 해방되는 날이기도 했다. 또한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할 정도로 일 년 중 가장 바쁜 때다. ‘보리는 망종 삼일 전까지 베라’라는 말이 있는데, 망종을 넘기면 보리가 바람에 쓰러지는 수가 많으니 이를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다. 보리는 익어서 늦기 전에 거두어 들어야 하고, 미처 모내기를 못했다면 마무리해야 했다. 조, 기장, 콩, 옥수수, 고구마 등을 심고 양파, 마늘, 감자를 수확하는 것도 이 시기다.우리 속담에 ‘망종 넘은 보리, 스물 넘은 비바리’는 시기가 지난 것은 값어치가 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망종 보리와 여자의 나이를 빗대 속되게 표현한 것이다. ‘망종 날씨가 궂거나 비가 오면 그해 풍년이 든다’ 또는 ‘망종 날에 우박 내리면 시절이 좋다’라는 말이 있어 한 해 농사가 풍년일까 흉년일까를 날씨로 점을 쳐 보았다.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6월 6일이 현충일인 이유는 망종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옛 기록에 따르면 고려 현종 5년(1014년), 당시 거란과의 여요전쟁(麗遼戰爭)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사망하자, 망종 날이면 유해를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날 병사들의 유해를 매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들은 망종을 가장 좋은 날로 여기고, 조상들의 보살핌에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주로 이 시기에 지냈던 것은 전사한 장병들의 제사를 망종(芒種)에 지낸 전통을 고려한 것이었다. 1956년 6·25전쟁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현충일을 제정할 당시의 6월 6일이 망종이었다. 6·25전쟁을 상기하며 옛 풍습에 따라 호국영령의 합동 위령제를 올리기로 한 날인 6월 6을 현충일로 정하고 1956년부터 시행했다.망종은 오월(午月)이 시작하는 절기다. 오(午)는 명리에서 화(火) 기운이 있어 오화(午火)라고 부른다. 오화(午火)는 망종의 뜨거운 여름 햇살을 의미하는 지지(地支)다. 사주에 오화가 있으면 망종의 날씨처럼 뜨겁고 화끈한 기운이 있다고 본다.오(午)는 오화(午火) 또는 도화(桃花)라고 불린다. 본래 복숭아꽃, 복사꽃을 지칭하므로 도화살(桃花殺)이라 한다. 예전에는 도화살이 있으면 끼가 많고 음란하고 색정이 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도화살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개성과 끼를 발산하는 재주 많은 모습 때문에 방송이나 연예계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요즘은 긍정적인 시각으로 해석한다. 오월생은 대체로 활동적인 사람이 많지만,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고 있고 삶의 질이 낮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외형은 부드러워 보이지만, 내면은 까다롭고 알 수 없는 자신 만의 생각에 늘 젖어 있다. 공동체 생활보다는 독신주의가 많다. 그래서 내면의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하염없이 겉도는 단점도 있다.그러나 세상의 모순된 현실을 변화시키고, 소외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도 있다. 자신 만의 이념을 가지고 겉으로는 사회와 잘 어우러져 살고 있는 듯해도 속으로는 항상 외로움이 많은 것이 흠이다. 때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지위나 감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전한(前漢)의 회남왕 유안(劉安·기원전 179~122)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 권5 ‘시칙(時則)’에 보면 중하(中夏)의 달, 즉 5월(음력)에는 초요(招搖·북두칠성 자루 끝에 있는 별)가 오(午) 방향을 가리킨다. 이 달의 방위는 남쪽이며, 수는 7이다. 맛은 쓴맛이며, 냄새는 그을린 내다.천자는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말을 타며 햇병아리 고기에 곁들인 기장을 맛보고 복숭아를 먹는데, 이를 먼저 종묘에 올린 다음 먹는다. 백성이 쪽풀을 베어 옷감에 물들이거나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드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한다. 이때는 초목이 아직 완전히 다 자라지 않았기에 한창 자라고 있는 초목을 상하게 하지 못하려는 조치였다.예로부터 통치자는 백성의 삶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정령(政令)을 시행하였다. 계절에 맞지 않는 정령을 시행하면 오곡이 익지 않고 온갖 해충이 발생하여 나라에 기근이 들기 때문이다. 백성은 물과 같아서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 정치를 사사로움이 없게 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군자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자신의 가난함을 잊는다. 그러므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다.

2024-05-22

밥 할 줄 아나

정미영 수필가 만개한 포항 흥해 이팝나무 군락지에 들어선다. 우리 조상들은 이팝나무 아래에서 정성껏 치성을 드리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었다.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드문드문 피면 가뭄의 피해가 있으며, 꽃이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온다고 믿었다. 밥은 우리네 삶의 축이다. 생명 유지를 위한 기반으로 식량은 중요했기에,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했던 것이리라.고봉처럼 피어난 이팝꽃에서 밥에 대한 추억을 읽는다. 눈보다 마음이 먼저 쉼 없이 훑어내려 간다. 먹먹하게 뭉쳐져 있던 기억이 머뭇거림 없이 시나브로 풀어헤쳐진다. 첫눈 내리던 날, 외할머니 장례식을 치렀다. 돌아가시기 두 주일 전쯤 할머니를 뵈러 갔다. 보름째 곡기를 끊고 마실 것만 겨우 드신다고 했다. 친정어머니가 내 이름을 말하며 할머니에게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노환으로 고생하던 중에 눈까지 침침한데도 나를 알아보고는 말씀을 드문드문 건네셨다.“니, 밥 할 줄 아나?”느닷없는 말에 한순간 긴장이 풀렸다.“할매는, 내 결혼한지가 언젠데…. 밥 굶고 살까봐 걱정하노.”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뼈만 앙상한 할머니의 두 손을 맞잡고 말끝을 흐렸다.사람은 일생을 정리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을 가질까. 아마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일이나 마음 아팠던 일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밥 먹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생의 소실점을 앞에 두고서도 밥 생각을 하셨나 보다.할머니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거친 고단한 세대였다. 너도나도 배곯던 시절, 식구들과 하얀 쌀밥을 배부르게 먹어보는 것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궁핍한 살림에 밥은커녕 굶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당신 자녀 사남매와 고만고만한 친척아이까지 키웠으니, 먹거리는 늘 부족했다. 할머니의 꿈은 손수 마련한 몇 뙈기의 논에 벼농사를 지어 김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고봉으로 퍼 담아 자식들에게 먹여 보는 것이었다.할머니는 끝내 논을 소유해 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평생 밭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텃밭에 묻히셨다. 논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으니 손수 거둬들인 쌀로 밥을 짓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을 수 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삶의 끄트머리에서조차 쌀밥에 대한 생각의 끈을 놓지 않으셨나 보다.나는 어릴 적 외가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 집에 잠시 맡겨졌다. 처음 얼마 동안은 엄마를 찾으며 울었지만 생활에 차츰 적응하면서부터는 분주했다. 고양이를 쫓아다니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장독대 옆의 무궁화 꽃 그림자가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콩밭 매는 할머니 옆에서 실컷 흙장난을 하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흘러 밥때가 되었다.할머니는 가마솥에 밥을 지으셨다. 향나무 아래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다가 솥에 붓고, 청솔가지를 아궁이 속에 넣어 불을 지피셨다. 밥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다 지쳐 허기진 배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우고 마당으로 나와 놀고 다시 부엌으로 가기를 두세 번 하면, “이제 밥 다 됐데이.”할머니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무척이나 반가웠다.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서 있던 할머니! 나를 키웠던 그 무렵 생각이 나셨던 것일까. 손녀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지만, 가난했던 시절에 제대로 챙겨 먹이지 못했다고 가슴 한편에 항상 애처로움으로 묻어두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삼오날 할머니 산소에 갔다. 옷가지를 태우고 외가 터를 둘러보다가 찌그러진 부엌문을 조심스럽게 밀쳤다. 검게 그을린 아궁이는 제 할 일을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괜스레 사금파리 한 조각을 집어 그 속에 던져 넣었다. 아궁이는 놀란 듯 먼지를 풀풀 날렸다.바람이 불자, 이팝나무가 하얀 꽃비를 흩뿌린다. 그 모습이 꼭,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뽀얀 쌀밥을 내게 보내는 것 같아 두 손 가득 받아본다.

2024-05-22

5월 23일은 일본의 ‘키스 데이’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키스(Kiss)란 상대의 신체 일부에 입을 맞춤으로써 사랑, 존경, 우애를 표현하는 행위다.가톨릭 최고 성직자 교황은 자신이 거주하는 바티칸 시국을 떠나 외국을 방문할 때면 비행기에서 내려 땅에 입을 맞추기도 한다. 이는 방문국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입맞춤으로 이해된다.유명한 키스는 또 있다.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여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 남성 해군과 여성 간호사가 키스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된 인간의 희열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20세기 사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일 터.비단 교황의 키스와 종전(終戰)의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키스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엄마와 아기의 뽀뽀, 막 연애를 시작한 젊은 커플의 정열적 키스, 존경의 뜻을 담아 스승의 손등에 하는 입맞춤 모두 나름의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게 분명하다.5월 23일은 일본의 키스 데이다. 유래가 재밌다. 1946년 5월 23일.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제목은 ‘20살의 청춘(はたちの9752春)’. 거기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촬영돼 담긴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적극적 애정 표현에 서툴던 시대. 그렇기에 영화 속 키스 장면을 보며 가슴 설렌 관객이 적지 않았고, 그날을 기념까지 하게 된 것이라고.1년 중 특정한 하루를 지정해 ‘무슨무슨 데이’라고 칭하는 게 익숙한 시대다. 키스 데이 역시 그런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한국에는 키스 데이가 없냐고? 물론 있다. 오는 6월 14일이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려 키스를 아낄 필요가 있을까. 애정 표현은 자주, 그리고 많이 할수록 좋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5-22

흘려보낸 부부의 날

장규열 고문 함께 오래도 살았다. 달콤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다짐하며 둘이서 건너온 날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다한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당신과 나는 어쩐 영문일까. 헤아릴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상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부비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신통한 것이 부부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아이들마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상이 신묘막측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화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가운데 빚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정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욱이 고맙고도 미안하다.둘이서 만들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 한다. 부부의 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가.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하나는 어차피 못 이룰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으로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그치지 말고 침범하지도 않으며. 사랑은 꺼져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아이들 탓에 산다는 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마음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야 식었겠지만 샘솟는 호기심은 그래도 있지 않은가. 치열한 시샘은 잊었더라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은 살려 두었겠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이웃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한다.서로만 바라보기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 부부의 날을 한 번쯤 기억했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모르는 척하며 살아왔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늦었지만, 부부의 날을 축하합니다!

2024-05-22

경북도 소상공인 구하기, 실질 성과로 답해야

경북도에 의하면 도내에는 소상공인 사업체가 36만7000개로 경북 전체 기업 38만3000개의 96%를 차지하는 것으로 조사돼 있다. 종사자는 52만9000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55%다. 이처럼 이들 소상공인은 경북지역 서민경제의 근간이자 핵심 주체다. 하지만 이들의 61.6%가 매출액 1억 미만이며 38%는 5000만원 미만의 영세업체다.코로나19 이후 시작된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등으로 서민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특히 영세 소상공인의 경영난은 심각한 수준이다. 장사가 되지 않아 문을 닫는 소상공인이 늘고 있고, 그들이 갚아야 할 대출금이 연체되거나 못 갚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다.경북신용보증재단의 보증으로 금융권의 돈을 빌린 뒤 갚지 못하는 보증순사고액 증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경북지역 보증순사고액은 2021년 470억원이던 것이 2022년에는 584억원으로 증가했고, 지난해는 1503억원으로 급증했다. 전국 도지역 중 최고다.경북도가 지역경제의 근간이 되는 소상공인의 어려움 해소와 육성을 위해 경북도 소상공인 육성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소상공인의 경영환경 개선과 중장기 비전 제시를 통해 서민경제 회복과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계획이다.8대 전략과제로 소상공인에 대한 저금리 대체상환 보증을 확대하고, 소상공인 소통을 위한 앱 구축, 소상공인 자녀 출산지원, 영세 소상공인 역량 강화 프로그램 운영 등을 실시한다고 밝혔다.자료에서 드러났지만 소상공인은 지역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주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지속된 불황으로 많은 소상공인들이 지금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당장 빚더미에 앉아야 할 형편이다. 어디가서 호소할 때도 의지할 곳도 없다.경북도가 밝힌 소상공인 육성 정책이 그들의 어려움을 잘 헤아려 용기를 주고 사업 의욕을 살리는 약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정책이 아니라 정책이 실핏줄처럼 현장으로 잘 스며들 수 있도록 섬세하게 운영돼야 한다. 행정의 역량이 성과로 대답할 수 있어야 칭찬을 들을 수 있다.

2024-05-22

“포스코의 탄소중립 실현은 포항시민의 숙제”

포항환경연대가 최근 포항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기업, 관련기관, 노동조합, 언론계 등이 참여하는 ‘탄소 중립·수소환원제철 포럼’ 결성을 제안해 주목받고 있다. 포항환경연대는 지난 4월 출범할 당시 “수소환원제철과 탄소중립 달성은 포스코가 포항에 존치할지 떠날지를 결정하게 하는 문제다. 포스코의 탄소중립은 포항 시민 전체가 나서서 해결할 숙제”라고 언급했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사실 ‘탄소배출 제로’를 달성하기 위한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소 건립은 우리나라 철강기업의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당장 유럽연합은 2026년부터 철강, 알루미늄 등 6대 품목에 대해 탄소국경세를 적용한다. 탄소국경세를 1톤당 100달러로 적용할 경우, 우리나라 철강기업들은 2030년에 수출대금 30% 이상을 국경세로 내야 한다. 한국무역협회의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 2022년 우리나라가 유럽연합에 수출하는 철강 수출액은 48억 유로(약 7조 원)에 이른다.포스코는 현재 수소환원제철공장 3기를 짓기 위해 포항제철소 동쪽 앞바다 135만㎡(41만평)를 메우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1기 공장은 2033년 준공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포스코는 지난 1월 포항제철소에 수소환원제철 개발센터를 열어, 포스코 고유의 수소환원제철공법(하이렉스) 연구와 설비 구축, 시험조업 업무를 수행하면서 상용화 가능성을 검증하고 있다.수소환원제철소가 로드맵대로 건설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포항지역 일부 시민단체가 “바다를 메우면 해양생태계가 오염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비용도 큰 부담이다. 사실상 제철소를 새로 짓는 작업이어서 2030년부터 2050년까지 수십조원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해외 철강강국들은 정부차원에서 천문학적인 지원을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생색내기용 지원에 그치고 있다.포항환경연대가 제안한 ‘탄소중립·수소환원제철 포럼’이 하루빨리 결성돼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과제나 장애요인에 대해 해법을 제시해 주길 바란다.

2024-05-22

독서경영과 성장하는 기업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손에 책을 놓지 않은 민족은 역사적 생존과 강한 나라로 간다. 전쟁영웅 나폴레옹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전 등 전기를 즐겨 읽고 리더십과 전략에 대한 영감을 얻고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우리는 한 달에 몇 권의 책을 읽는가. 일 년에 한 권 읽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휘호를 남겼다. 글이란 읽을수록 사리를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다. 두 권 읽은 사람이 한 권 읽은 사람을 지배한다. 억만 장자 빌게이츠도 유년시절부터 책이 친구였고 책과 함께 하며 하버드 대학 1년 중퇴 후 기적의 역사를 썼다. 책 속에 지식을 얻고 지식에 생각을 더하면 지혜가 되고 가치 있는 기업문화로 간다.한 때 기업이 독서경영으로 바람 불은 시기가 있었다. 포스코에 독서를 중시하는 CEO가 부임하면서 독서경영이 시작되었다. 한국독서경영연구원장 H씨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코칭을 받으면서 체계적인 독서활동을 하게 되었다. 인문학에 경영을 잇는 직책보임자의 인문학강좌와 부서에 독서 도우미도 생겼다. 이어령 교수의 자문을 받아 뭔가 깨달았다는 의미의 ‘유레카’를 응용한 포레카를 만들었고 첫 문을 열 때 ‘사람은 아기가 엄마 배 속에 잉태 할 때 본능적으로 웅크리는 자세의 혼자 생각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생각하는 공간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했다. 이후 지역마다 포레카를 만들고 다양한 책을 비치하여 직원들이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책을 읽고 생각을 넣은 지식과 지혜를 업무에 녹여 일의 효율성을 높여 나갔다.직장인이 읽는 추천도서 20권이 권장되고 부서마다 독서 디자이너가 도우미 역할을 했다. 적절한 책을 선정하여 읽고 토론하며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켜 나간다. 책을 통해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조직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부서마다 도서를 정하고 읽은 내용을 발표하고 독서 디자이너가 요약 정리한다. 정리된 지식을 어떻게 현업에 접목 할 것인지 토론하고 운영방안을 정립한다. 현업에 적용 후 다양한 반응에 대한 성공사례를 공유하고 요약된 지식과 지혜를 지식경영시스템에 등록하여 누구든 쉽게 활용하고 일에 접목한다.기업에서 독서경영의 필요한 조건은 경영진의 관심과 리더십, 독서를 장려하고 독서문화를 조성하는 일이다. 또한 적절한 도서 선택과 독서 활동을 지원하는 인프라가 필요하다. 성공한 기업은 독서를 통해 직원들의 지식과 역량을 향상시키며 일에 접목하여 효율을 높이거나 문제해결에 활용하기도 한다. 독서를 일상적인 업무의 일부로 통합하고 지식공유를 장려하여 조직 전체의 성과를 향상시키는 역할을 한다. 책을 놓지 않는 기업이 망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성공하는 것도 직원들의 손에 책을 놓지 않는 기업문화가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독서에서 지식을 얻고 생각을 넣어 지혜를 만들고 일에 접목하는 기업은 성장하는 기업이 된다.

2024-05-21

한국 시조문학의 산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과 어우러진 풍경은 정겨움을 자아내게 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쉼과 여유를 보여주는 듯하고, 멈춘 듯 흐르는 강물따라 수면에 비춰지는 정경은 한가롭기만 하다. 하늘과 산이 내려앉고 건물이나 사람의 모습까지 얼비치는 강물은 고요히 흐르면서 한 편의 시나 수필을 쓰는 듯하다. 강물을 바라보면 물결따라 마음이 흐르는 것 같고, 깊은 강이 소리 없이(深江無聲) 흐르는 것처럼 한결같이 깊어지며 소리 없이 살아가는 삶의 깊이가 강물 속에서 들리는 듯하다.경남 진주시를 관통하는 남강이 휘돌아가는 가좌산 기슭에는 마치 강물이 소리 없이 깊어진 듯한 문향이 한옥의 아취 속에서 창연하게 피어나고 있다. 강물이 쌓이고 쌓여 깊이를 얻듯이, 수많은 근현대의 서책과 시조집, 문예지, 문인들의 육필, 편지, 서화작품 등이 모이고 더해져 마치 문학의 유장한 강줄기를 이룬 듯하다. 그것도 700여년 면면히 이어진, 우리 겨레의 얼과 숨결이 오롯이 담긴 시조 장르의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과 유물이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정리돼 있으니, 가히 시조문학의 산실(産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그곳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전문 문학관인 ‘한국시조문학관’이다. 고려말~조선시대에 간결하게 다듬어져 성행된 고유의 정형시-시조를 새롭게 부흥하고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시조시인인 김정희 선생이 11년 전 남편과 함께 사비를 들여 건립됐다.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여 금계국이 피어나는 자연 속에 모두 한옥 4채로 구성된 한국시조문학관은, 시조의 역사와 변천·홍보·다양한 문학행사를 열면서 시조문학의 발전과 깊이를 더해가는 곳이다.즉, 시조의 근현대의 사료적 가치를 집대성해 놓은 주시설인 시경루(詩境樓), 신라의 향가에 연원을 둔 고시조와 별곡, 무곡, 가사 등 시조의 근본과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수류화개(水流花開), 진주와 경남지역의 향토문학 근대 문인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숙소로도 이용되는 보문산방(寶文山房) 등의 공간이 전시·열람·체험·교육·세미나 등으로 시조세계의 지평을 넓히고 전통문학을 지키고 가꿔가는 ‘한민족 시의 보고(寶庫)’로 자리매김해가고 있다.과연 빼곡하게 들어찬 시조집과 문예지를 비롯 김소월의 필적과 미당선생의 빛 바랜 편지, 엽서 등과 문인들의 시서작품을 직접 보니, 오랜 세월 자료를 모으고 보관하며 준비와 구상, 정리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내공과 안목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한국문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시조가 외래문화에 떠밀리고 일반인들에게 멀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구순이 지났음에도 시조문학의 융성에 온 힘을 쏟고 계시는 김 관장님을 직접 뵈니 경외심마저 들었다고나 할까?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이나 유럽 등지의 문화대국에는 겨레시가 있기 마련이지만, 대대로 이어온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문인들과 지자체의 몫일 것이다. 짧고도 명확한 서사구조를 가진 시조를 일상 속에서 즐겨 지으면서 현대인의 감성을 표현하고, 시조 백일장·시화전·낭송대회 등 창의적인 전환의 모색으로 타 장르와의 융합을 통한 다양한 콘텐츠를 창출하여 시조의 대중화, 세계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2024-05-21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② 규동의 기도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단편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말한다. “한정된 짤막한 시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소설이란 문학 장르 중 가장 짧은 형식인 ‘엽편소설’ 역시 그렇다. 원고지 25매 안팎의 문장으로 세상과 사람,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꿈과 환멸을 드러내기 위해선 본질을 보여주기 위한 ‘긴장’과 ‘에너지’가 필수. 문학을 통한 세계 해석과 심미적 위안이 사라진 21세기. 경북 포항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며 괜찮은 소설을 쓰기 위해 악전고투 중인 작가 김강(52)이 ‘엽편소설 연재’라는 간단찮은 도전을 본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진행한다. 격주로 게재될 김강의 엽편소설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진지하게 탐구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을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 문학과 소설이 가진 사회적 힘을 신뢰하는 독자들의 관심과 질책을 더불어 기대한다. - 편집자 주 그날 신(神)이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수십 억 명으로부터 올라오는 기도들 중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들을 수 없어 그저 흘려보내는 것이 공평하다 여겼다. 간혹 제사장들이 골라낸 기도를 듣기도 하고 답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일, 드문 일이었다.아니, 지들이 기도를 하면 내가 들어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지들한테 기도하라 그랬어? 찬양하라 그랬지, 숭배하라 그랬지. 내 뜻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도 의미 없지. 내 뜻을 이해하든 말든, 내가 신경 쓸 것은 아니지. 내가 행하는 모든 것 그 중 어느 하나 지들의 생각에, 지들의 기준에 부합하는가 안 하는가에 나는 관심이 없단 말이지. 나는 행하고 지들은 받아들이고 그런 거잖아. 그런데 쟤들은 왜 그러는 걸까?평소 주위 몇몇이 인간들의 기도에, 인간들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주십사 청하면 신은 이렇게 답했었다. 예전에는 그들의 기도를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누군가 물었다.그때야 인간들이 몇 명 되지 않았잖아. 그러니 들을만 했지. 한꺼번에 다 들을 수는 없어도 찬찬히 살펴보고 듣고 또 답을 주고 하는 것이 나름 재미있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재미가 없어졌어. 일단 시끄러워. 인간들이 많아지니까 그렇겠지. 그렇다고 예전처럼 엎을 수도 없고. 지금 하는 꼴을 봐서는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지들끼리 숫자를 조절할 것 같기도 하니 말이야. 게다가 누구한테 하는 기도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하나고 주소도 하나인데 수신자명이 다 달라. 그리고 기도가 너무 길어. 이건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데,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뭐,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안 들으면 되니까. 그런데 답을 안 준다고 욕하는 놈들도 있단 말이지. 아니, 내가 답을 주겠다 약속한 적 있나? 아아, 자꾸 묻지마. 짜증나니까.이랬던 신이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기도에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 계절의 변화, 낮과 밤, 인구 연령의 변화, 인구의 이동, 남반구와 북반구, 기술의 변화 등의 여러 요인이 기도의 양과 흐름에 영향을 준다. 이런 요인들이 얽혀 최고 지점과 최저 지점을 반복하는 유형의 파동을 만든다. 인류의 수가 어느 정도에 이른 후부터는 기도의 파동은 일정한 유형을 유지해 왔다.그런데 그날은 모든 인자들이 파동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지구를 뒤덮은 전염성 질환에다 북반구는 최악의 한파로, 남반구는 겪어보지 못한 고온으로 제법 많은 인간들이 생명을 잃었고, 그들 대부분이 기도에 익숙한 연령이었고, 가장 규칙적이고 열렬한 기도를 하던 두 그룹은 서로 싸우느라 신을 잊어버렸고, 가상공간의 기도들은 SNS 계정이 없는 신에게 닿지 못했다. 기도의 파동은 아래로 향해갔다.그날은 북반구 인구가 가장 많이 밀집해 있는 지역의 깊은 밤이 일 년 중 가장 오래도록 지속되는 날이었다. 그 중 가장 깊은 시각 새벽 세 시 반에 규동이 소리 내어 기도를 했다. 신의 유일한 이름으로, 네 개의 음절만으로. 3차까지 이어진 회식 후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며.“신이시여, 행복하게 해 주소서.”신은 그날 규동의 기도를 들었다.다음날 신의 사자 A가 규동의 직장으로 규동을 찾아왔다. 유리 칸막이 넘어 면역화학검사기에 혈액 샘플을 넣고 있는 규동을 발견하고는 곧장 규동에게로 향했다. 칸막이를 돌아 규동의 앞에 서려던 순간 사자는 유니폼을 입은 사람에게 제지를 당했고 그는 사자를 데리고 데스크 앞으로 갔다. 사자는 엉겁결에 누군가의 이름과 주민번호를 대야만했다.“대기실에 앉아 기다리시면 이름을 부를 겁니다.”사자는 한동안 대기실에 앉아있었어야 했고 유니폼을 입은 이가 이끄는 대로 진료실에 들어갔고 우물쭈물 앉아 있는 사자의 얼굴을 보던 의사가 사자의 결막을 확인했다.“빈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검사하고 결과 나오면 다시 뵐게요.”의사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사자는 규동과 대면할 수 있었다.“음, 오른쪽 팔을 이리 내밀어 이 쿠션 위에 편하게 놓으십시오.”“어떻게 하면 행복해 지겠느냐?”규동은 사자의 말에 사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사자의 윗팔에 고무줄을 감았다.“자, 주먹을 쥐시구요.”사자는 규동의 말에 따라 주먹을 쥐었다. 소독솜으로 사자의 팔을 몇 번 문지른 규동이 채혈바늘로 사자의 팔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사자는 팔을 빼며 일어섰다.“뭐하는 것이냐?”“검사를 하려면 피를 뽑아야지요,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시 앉으세요. 최대한 안 아프게 해드릴게요.”“어젯밤 행복을 빌지 않았더냐? 나는 신이 보낸 사자다. 네게 행복을 물으러 왔다. 누구의 행복이냐? 너의 행복은 무엇이냐?”규동의 기도를 들은 그날 신은 급하게 사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규동의 기도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인간의 기도를 들었고 웬만하면 들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규동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 사자들에게 물었다. 신의 무관심을 충실히 따르던 사자들이었다. 최근의 인간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들은, 그러나 최근이나 옛날이나 혹은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시절이나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으니까.부를 가져다주면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황금을 쏟아주면 되는 것이냐? 안 됩니다. 황금은 바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횡재는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세금도 많이 내야 할 겁니다. 그러면 행복이 사라질 것입니다. 차라리 그에게 신선한 생각과 가능한 상상력을 주십시오. 요즘 인간 세계에서는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이 곧 부를 뜻합니다. 안 됩니다. 어느 세월에 상상하고 생각하여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마음대로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권력을 주시지요. 권력이라,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이냐? 저 헤라클래스처럼.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헤라클래스의 힘을 가진 자가 힘을 쓸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 자는 권력을 가진 자의 종이 될 뿐입니다. 요즘 세상은 부가 곧 권력이고 기술이 곤 권력입니다. 부와 기술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 녀석들이!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냐?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그때 사자 A가 앞으로 나섰다.먼저 다시 인간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신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그나마 가끔씩 인간 세상을 둘러보던 사자 A였다.신께 한 말씀 올리려합니다. 살펴보건데 이 기도의 해법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첫째, 행복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희는 명확한 기준 혹은 예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준 혹은 예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도를 올린 그자의 행복과 같은 것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어찌어찌 신께서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더라도 그 행복의 유지 보수까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신께서 넓고 깊은 사랑으로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그가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제는 그의 행복이 다른 인간의 불행을 전제로 한다면 그 또한 안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그 인간의 기도가 구체적이지 못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심지어 목적어도 없습니다. 누구를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건지.말을 마친 사자 A는 약간 어깨를 으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오오, 다른 사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긴 소매 끝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한동안 물끄러미 사자 A를 바라보던 신이 입을 열었다.그래서? 그래서 어쩌자고? 가만 보면 넌 말은 많은데 답이 없더라. 어쩌란 말이냐. 하지 말자는 말이야?사자들은 치켜세운 엄지손가락을 소매 안으로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약간의 미소와 함께.제 말씀은….아, 필요 없고, 너, 내려가 봐. 내려가서 물어. 뭘 바라는지, 뭘 해주면 행복할 건지. 그 인간에게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규동은 채혈 주사기를 들고 사자 A를 쳐다보았다.“어허, 이놈이 빨리 말하지 못하느냐? 너, 이 녀석, 행복이 뭔지는 아는 것이냐?”“잠시만요.”규동은 한참 동안 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전자 의무 기록지를 살폈다.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고 자판을 두드려 진료실로 메모를 보냈다.‘아무개 환자, 채혈 거부, 횡설수설. 7층 정신건강의학과 진료 요망.’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5-21

MB의 포항방문에 대한 기자의 斷想

심충택 논설위원 이명박 전 대통령(MB)이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고향인 포항시 흥해읍 덕실마을을 1박 2일 일정으로 방문했다. 유년시절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추억이 그리워 찾았다고 한다. 그의 고향집은 초가집 두 채가 있는 전형적인 옛날 시골가옥이다. MB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대통령 재임 중에도 ‘낙서를 하다가 무의식적으로 포항을 쓸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정은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대통령 퇴임직후인 2013년 겨울 덕실마을을 찾은 후 11년 만의 고향 나들이다.MB의 고향방문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 백인규 포항시의회 의장, 김정재 국회의원, 이상휘·이달희 국회의원 당선인 등도 함께했다. 고향주민들은 덕실마을에 있는 경주이씨 재실(이상재) 기념식수와 풍물놀이 행사를 주최하면서 MB 일행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MB도 주민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안부를 물으면서 향수를 달랬다. 고향방문 이틀째인 17일에는 자신이 어린시절 다녔던 교회를 둘러보고, 지역 경제인들과 점심을 같이했다. 그 후 친구인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의 박사학위(포스텍 명예공학박사) 수여식에 참석한 후 KTX를 타고 서울로 갔다.언론이 MB의 고향방문에 관심을 쏟은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의 행보와 비교가 되는 탓도 있다. 그가 사면이후 공개석상에 모습을 비춘 것은 지난 4·10 총선일 서울의 한 투표장을 찾은 이후 한 달이 넘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긴 채 한 명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조용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는 이번 고향방문에서도 대통령 재임시절의 업적이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다만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이강덕 포항시장이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원전 수출, G20정상회의 개최, 영일만항 개항, KTX포항 노선 개통, 블루밸리국가산단 조성 등을 예로들며 고마움을 표시한 정도다. MB 재임시절인 2009년 9월 첫삽을 뜬 블루밸리국가산단(포항시 남구 구룡포읍·동해면·장기면일대)의 경우, 철강산업에 의존했던 포항을 신산업의 국제무대로 이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곳이다. 포항은 현재 이곳을 이차전지·수소산업 중심의 미래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이차전지 산업의 대명사인 에코프로그룹은 이곳에 2028년까지 2조원을 투자하기로 했다.MB와 관련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현대 정주영 회장이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정 회장은 당시 “(이명박은) 평사원 일을 시켰는데 과장 일을 했고, 과장 일을 시켰는데 부장 일을 했다. 부장을 시켰는데 사장 일을 해 내더라”고 했다. 팔순이 넘긴 했지만,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었던 MB가 국민과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다. 예를들어 이번 고향방문에서 “의과대학과 종합병원이 들어서야 포항이 발전한다”고 한 말은 포항시민들에게 큰 힘이 됐다. 전직 국가원수가 정치적인 현안이 있을 때마다 개입하는 것은 문제가 많지만, 이번 MB의 포항방문처럼 여생을 고향사랑과 국민통합을 위해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다.

2024-05-21

영부인(令夫人)

우정구 논설위원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는 대통령이나 수상 등 국가 최고 실권자의 아내를 호칭하는 말이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영부인이다. 대통령의 아내가 유고 시에는 대통령의 딸이나 누이 등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는 것이 국제적 관례다.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부인과 결혼생활을 끝냈을 때 그의 딸이 영부인 역할을 맡았다. 우리나라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 육영수 여사가 총상으로 사망하자 딸인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영부인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아내를 높여 호칭하는 말이다. 남의 자식을 높여 부를 때 우리는 영식, 영애라고도 부른다.대통령 부인에게는 특별히 주어진 권한은 없다. 그러나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대통령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인식되기에 국민의 관심이 항상 뒤따라 다닌다. 과거 영부인들을 살펴보면 역할도 제각각이다.박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는 내조형이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 항상 앞장서면서 대통령에게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희호 김대중 전 대통령 영부인은 전략적 내조형으로 통한다. 2002년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기조연설도 했다.영부인에게는 권한은 없으나 그들의 역할에 따라 평가는 다양하게 나온다. 그들의 행동이 대통령의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의 인도 방문을 두고 외교냐 관광이냐를 두고 뒤늦게 정치권의 공방이 뜨겁다. 사실 여부를 떠나 대통령 영부인의 처신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과거 경험으로 보아 영부인의 내조는 몸을 낮추고 대통령이 미처 못하는 그늘진 곳을 찾는 봉사활동이 국민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21

상임위 배정의 제1잣대는 ‘현안해결 역량’

22대 국회 개원(30일)을 앞두고 TK(대구경북) 지역 당선인들의 상임위원회 배정에 관심이 쏠린다. 상임위 배정은 당선인들의 1·2·3지망을 받아 원내지도부가 조율해서 결정한다. 그저께(20일) 국민의힘이 희망 상임위원회 신청을 마감한 결과, TK지역에서는 특정 위원회에 지원이 몰린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위 지원 당선인이 6명으로 가장 많았고, 산자위와 정무위 4명, 농해수위 3명 순이었다. 국토위는 의원들의 지원경쟁이 가장 치열한 상임위다. 국토교통부와 한국도로공사 등이 소관기관이어서 SOC사업(도로·철도 건설) 유치와 예산 확보가 용이하다. 통합신공항과 달빛고속철도, 영일만대교 등 TK지역의 굵직한 현안을 다루는 상임위다. 이번 총선에서 3선 고지에 오른 김정재 의원(포항북)이 국토위를 희망했다. 김 의원은 21대 국회에서 국토위 여당 간사를 맡았다. 3선 의원은 유력한 상임위원장 후보다.산자위도 인기 상임위다. 지역 내 산단 조성, 산업별 특화단지 지정부터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지원 입법에 주력할 수 있다. 주호영(대구 수성갑)·이인선(대구 수성을)·구자근(구미갑) 의원과 조지연(경산) 당선인이 지원했다. 정무위는 최근 인기 상임위로 부상하고 있다. 피감기관인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 현안이 주로 기업규제이기 때문에, 대기업 접촉이 잦은 상임위다. 지역구에 설정된 과도한 규제를 해소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농해수위는 비수도권과 영남권 출신이 많은 여당에서 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송언석(김천) 의원을 비롯한 일부 중진 의원이 상임위 배정을 당에 위임하기는 했지만, 인기상임위에 지원자가 몰리면서 자체 교통정리가 불가피하게 됐다. TK지역 각 지자체에 쌓여 있는 다양한 현안 해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각 상임위에 의원들이 적절하게 배정돼야 한다. 의원들에게도 상임위 활동 성적은 다음 총선 공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전문성을 고려해 상임위를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4-05-21

지역 미래 달린 TK 통합론, 갈 길이 바쁘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다시 불을 지핀 대구경북통합론에 대한 지역의 관심이 상당하다.22대 국회 출범을 앞둔 시점에서 의제의 명분이 설득력 있고, 지방소멸이라는 국가적 난제에 대응하는 효과성에 대한 공감대가 높은 때문으로 짐작이 된다. 특히 2019년 민선 7기 시절 시작했던 대구경북특별자치단체 추진 때와는 내용 면에서 크게 달라 주목도도 높다.홍 시장은 대구경북의 통합은 현재 정부-광역-기초 3단계인 행정체계를 2단계로 줄인다는 점에서 과거 논의 때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 단계를 줄임으로써 불필요한 기구를 없애고 예산절감과 행정력의 신속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 지사는 이번 통합 논의를 통해 미국 연방제 수준의 통합 자치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국방·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이양받아 완전한 지방자치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허울뿐인 지방자치를 멈추겠다는 뜻이다.이런 두 광역단체장의 생각에 윤석열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이번 TK통합론의 성사 여부는 전국적 관심이다. 이상민 행안부장관과 우동기 지방시대위원장, 양 광역단체장이 대구에서 만나 이와 관련한 논의를 벌일 것으로 보여 그 결과에 따라 시도통합론은 타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홍 시장은 행정통합의 로드맵으로 올해 내 시도의회 의결, 내년 상반기 중 대구경북행정통합 법안 통과, 2026년 지방선거 때 통합단체장 선출 등을 제시했다. 지난번 실패한 TK통합 추진과정을 반면교사 삼아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무엇보다 지역민에 대한 이해를 구하는 데 역점을 둬야 한다. 날로 비대해지는 수도권에 대응하는 지역의 생존전략임을 널리 알려야 한다. 지역의 미래가 달린 선택으로 500만명 한반도 제2의 도시를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정부가 균형발전을 국정과제로 삼고 있지만 수도권 집중은 멈출지 모른다. 이대로 가면 지방은 모두 소멸한다. 인구가 경쟁력인 시대에 맞춰 다시 내건 TK통합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2024-05-21

인간에게 지구만큼 너그러운 별은 없다

김규인 수필가 초속 36m의 강풍이 분다. 고층 건물의 창문이 산산조각 나고 거리엔 쓰러진 나무와 송전선이 어지럽게 널린다. 건물에서 떨어진 물건이 자동차를 때리고, 지붕이 뜯겨나간 호텔은 물에 잠긴다. 미국 텍사스는 90만, 루이지애나는 20만 가구의 정전이 발생하고 최대 900㎜의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된다. 인명 피해는 늘어나고 학교는 휴교한다.중국 허난성 일대에선 시속 100km를 넘는 강풍이 발생한다. 최대 시속 133km에 달하는 국지성 돌풍까지 일어난다. 허난성 정저우시의 노점에서 식사하던 사람들이 강풍에 밀려가고 넘어진 가로등에 깔려 행인이 숨진다. 중국 기상 당국은 기온이 35도까지 올라 대류가 불안정해서 강풍이 일어난 거라고 말한다.케냐와 브라질에선 홍수, 베트남에선 가뭄이, 동남아는 폭염이 일어난다. 지구 곳곳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가 속출한다.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는 너무 더워서 학교는 휴교하고 각국은 발생한 재해를 복구하기에 바쁘다. 홍수와 가뭄과 폭염 등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기상현상이 자주 일어난다.우리나라에선 비가 내리는 것이 바뀐다. 2022년 서울에선 시간당 141.5mm의 많은 비가 내렸고, 2023년 청주에선 400년 만에 한 번 올 법한 큰비가 내렸다. 시간당 강수량이 72mm 이상인 극한호우가 내리는 날이 늘어난다. 올해 5월에 강원도에는 눈이 내리더니 다음날은 29도의 높은 기온을 나타낸다.지구온난화로 애써 지은 농작물이 물에 떠내려가고 가뭄이 든 곳은 말라 죽는다. 그나마 남은 것은 바람에 날려간다. 농산물 생산량이 감소하니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 그런데도 우리가 버린 음식물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음식물은 썩으면서 발생한 가스로 다시 지구를 뜨겁게 달군다.건물이 무너지고 농작물이 쓸려가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만 신경 쓰는 사람들.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고, 녹은 물은 그만큼 육지를 잠식한다. 지구 환경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데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는지. 서서히 데워지는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사람들은 이러한 지구의 아픔에 아직도 무감각하다.골프공 크기의 우박이 자동차의 유리창을 박살 내고 사람을 향해 달려든다. 이제는 제발 정신 차리라고 지구가 실력 행사를 한다. 더 이상 지구를 괴롭히지 말라고 몸으로 말하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아직도 욕심을 채우기에 바쁘다. 얼마나 더 채워야 욕심을 멈추고 지속 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까.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인류 공통의 문제에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포유류가 멸종하느냐 계속 번영을 누리는 가는 지금 우리의 손에 달렸다. 내 자식들이 계속 아름다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돌보자. 우리는 이미 후손들의 터전을 불모지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사람들이 살아갈 터전을 지키자. 인류가 지구를 버리고 이사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받기만 한 지구에 이제는 우리가 뭔가를 해야 한다. 인간에게 지구만큼 너그러운 별은 어디에도 없다.

2024-05-20

지속가능발전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통계청은 올해 3월 21일 ‘한국의 SDG(지속가능발전목표) 이행보고서 2024’를 발표하였다. 2022년 1월에 제정된 ‘지속가능발전 기본법’에서 ‘지속가능성’이란 현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미래 세대가 사용할 경제·사회·환경 등의 자원을 낭비하거나 여건을 저하(低下)시키지 아니하고 이들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이 법에서 ‘지속가능발전’이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포용적 사회, 깨끗하고 안정적인 환경이 ‘지속가능성’에 기초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발전이라고 정의하였다.이렇게 ‘지속가능발전’이란 것이 매우 이상적이고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가 반드시 추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지난 2015년 국제연합총회에서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지속가능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17개의 목표를 채택하였고, 이 목표 아래 총 169개 세부목표와 231개 지표를 도입하였다.17개 목표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빈곤퇴치(목표1), 농업과 먹거리(목표2), 건강과 웰빙(목표3), 양질의 교육(목표4), 성평등(목표5), 물과 위생(목표6), 깨끗한 에너지(목표7),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성장(목표8), 산업혁신과 사회기반시설(목표9), 불평등 완화(목표10), 지속가능한 도시와 공동체(목표11), 책임감있는 생산과 소비(목표12), 기후위기대응(목표13), 수생태계보전(목표14), 육상생태계 보전(목표15), 인권, 정의, 평화(목표16), SDG를 위한 파트너십(목표17) 등이다. 이들 17개 목표가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달성되지 못하면 ‘지속가능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그리고 17개 목표(SDGs)의 달성 정도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 ‘지속가능발전지표(SDIs)’를 도입하였다. 이 지표는 목표달성을 위한 진행상황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하고, 정책 결정자들이 어떤 분야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 수 있게 해준다.이해를 돕기 위해 ‘지속가능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목표(SDGs)에 대응한 지표(SDIs)를 예시로 들어보자. 빈곤퇴치(목표1)의 경우는 ‘앞으로 빈곤 상태에 처할 위험이 높은가?’, 성평등(목표5)의 경우는 ‘부부간 자녀간 남녀 차별이 없고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눠서 하는가?’이다. 물과 위생(목표6)의 경우는 ‘마실 수 있는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는가?’, 기후위기대응(목표13)의 경우는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실천하는가?’, SDG를 위한 파트너십(목표17)의 경우는 ‘가족 간 대화를 통해 여러 문제를 함께 알고 함께 풀어가는가?’ 등이다. 실제 이들 ‘지표’를 기준으로 ‘가정의 지속가능성’ 상태를 나쁨, 보통, 좋음 등 3단계로 평가해 보면 ‘보통’이나 ‘나쁨’이 대부분일 것이다. 더구나 비수도권으로 침체한 인구소멸지역이 많고, 맑은 물 확보가 어렵고,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산불 등의 피해가 높아지는 대구경북지역은 ‘지속가능성’ 상태가 ‘좋음’으로 평가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024-05-20

박목월의 미발굴 작품집에 거는 기대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경주에 발을 디딜 때마다, 천년고도의 황토 빛이 저녁노을과 함께 내 눈동자에 스며온다. “아베요 오늘이 아베 젯날”이라고 하얀 이밥 한 그릇 제상에 올려두고 기제사를 드리는 만술아비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반월성을 휘돌아 바람에 번진다. 박목월은 왜 이토록 신라 천년의 경주의 말씨를 보듬었을까? 리듬과 운율이라는 순수시의 비장을 그는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50년대 이미지즘의 시가 순수시와 함께 이 땅에 밀려오면서 표현에 공헌하지 않는 말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대신 표현의 순수성을 유지했던 시인의 심성이었다. 이는 민요적 리듬의 효과를 노리는 동시에 이미지즘을 추구한 몸에 밴 감각적 시쓰기의 결과였으리라. 박목월은 ‘눌담’, ‘적막한 식욕’, ‘치모’, ‘만술아비의 축문’, ‘이별가’ 등에서 방언 어휘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운율과 가락을 깔아두었다. ‘이별가’에서 외치는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에 보이는 ‘뭐락카노’는 경주의 악센트를 제거하고는 아무런 이미지의 맛을 건져낼 수가 없다. 단순히 향토성이니 경상도 정체성을 담아낸 시로만 규정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경상도 악센트다.‘만술아비의 축문’에서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베도 알지러요” 대목의 방언적 형상을 온전히 해석하지 못한 평론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듯이 박목월의 ‘불국사(佛國寺)’라는 시에서 ‘흐는히’라는 시어의 해독을 방언적인 표현이라고 가정하면서 “흥건히” 혹은 “몹시 그리워 동경하여”의 사투리로 해석한 평론가도 있었다. “흰 달빛/자하문//달 안개/물소리//대웅전/큰 보살//바람소리/솔소리//범영루/뜬 그림자//흐는히/젖는데//흰 달빛/자하문//바람소리/물소리”. 박목월 ‘불국사’ 전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시 형식과 운율에 대해서는 정교한 해석들이 이어져 왔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조화한 풍경화같은 불국사의 전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운율적 표현 양식의 특징으로 3음절 대련 형식의 형식적 미학의 품격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수미상관의 구조적 여백이 불국사의 전경과 함께 적절하게 조화를 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설명적인 이미지를 배제하고 “허사가 거의 없는 실사로 현상학의 판단 중지”(김춘수 ‘시의 위상’ 77쪽) 상태로 장면을 훌륭하게 제시한 명작이다.그런데 문제는 ‘흐는히’라는 시어에 대한 해석이다. 이 단어는 표준어 사전에 없는 단어인데 동시에 경주방언이라고 단정할 근거도 없다. 그러면 ‘흐는히’라는 낱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흔흔하다’라는 표준어형을 마치 방언처럼 음절을 재조정한 방언표준형이라고나 할까? 경주방언에서는 유성음 사이에 흔히 ‘ㅎ’이 탈락되는데 여기에 ‘ㄴ’을 밀어 넣어 마치 표준어인 양 방언을 사용한 결과인 듯하다.최근 시인이 돌아가신 지 46년 만에 시인의 맏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아버지의 비공개 육필시 166편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순수 이미지즘 시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함께 시인 자신의 시적 변화의 궤적을 연구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이번에 공개된 시편 가운데 ‘용설란’이라는 시에서는 제주 토종의 용설난을 의인화하였다. 어김없이 ‘사투리’를 사용하였다.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이라고 표현하면서 “파도소리에 뜰이 흔들리는 /(중략)/ 반쯤 안개에 살아나는 제주도.// 말 辯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 한라산.// 어눌한 사투리로 가까스로 몸매를/ 빚어,// 안개에 반쯤 풀리고/ 안개에 반쯤 살아나는 용설란.” 이 시에서는 제주방언에 남아 있는 아래아를 사용하여 “말 辯의 깃자락에 소나기가 묻어오는” 아래아를 텍스트로 옮겨내고 있다. “그 낭낭한 모음의/ 하늘./”에서의 ‘하늘’은 제주의 하늘이 아니다. 제주의 하늘은 아래아 하늘인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섬세함을 유성호 교수는 “고향에 와서도 고향을 떠나고 타향에 가서도 고향을 발견하는 이중성”이라고 설명했으나 이것은 오류이다. 제주 용설란에서 발견한 ‘낭낭한 모음’은 ‘아래아’가 살아있는 제주의 방언이다. 시인은 어설프고 어눌하지만 제주의 사투리로 제주의 용설란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이처럼 위대한 시인의 작품을 비평가들이 자칫 잘못 평가하여 시 작품의 본의를 허문 경우가 적지 않다. 박목월의 미발굴 작품집이 6월쯤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2024-05-20

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이슬람의 탄생은 동방 오리엔트를 설명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역사다. 최근 세계 갈등의 불씨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는 주지하다시피 하나의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슬람이란 말 뜻 역시 ‘아살라마’(asalama), 즉 ‘복종하겠나이다’이다. 불교에서 ‘나무아미타불’에서 ‘나무’, 즉 ‘귀의하겠나이다’와 비슷한 의미다.7세기 초,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끊임없는 전쟁으로 육로와 해로의 실크로드가 사실상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막히면 돌아가고, 팬 곳은 채운 후 흐르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전쟁터를 피해 아라비아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상로가 개발되자 메카와 메디나가 중심도시로 주목받는다.이때 무함마드가 등장했다. 570년 그는 메카의 명문가 꾸레이시 가문에서 태어나 623년까지 62년을 살았다. 유복자로 태어나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곁을 떠났고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힘겹게 대상 활동을 했다. 당시 혼란한 사회와 처한 삶에 대한 회의가 일었다. 이때 기독교와 유대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늘 명상에 잠겼다. 붓다가 그랬듯 고집멸도(苦集滅道), 생로병사(生老病死), 괴로움과 번뇌 등 인간 사회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에 몰두했을 법하다. 나이 40세가 되던 해인 610년 하느님(알라)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 메카의 히라 동굴에서 대천사 가브리엘을 만나면서, 이후 예언자가 된다. 예언자, 즉 유대교 전통에서 나온 개념으로 신의 뜻을 전달하는 대변인, ‘신의 입’을 뜻한다. 이로써 하늘, 즉 절대적인 신을 인간 세상의 잣대로 표현하는 우상숭배 타파, 평등과 평화를 강조하는 이슬람교를 완성한다. 어느 종교든 태생기에는 시대에서 파생된 의붓자식이자 이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이 순식간에 퍼진 것은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비잔티움과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영향이 컸다. 622년 무함마드는 이들을 피해 추종자들과 함께 메디나로 이주해 절치부심 초석을 다진다. 이때를 헤지라(Hegira-이동), 즉 ‘이주의 날’로 정해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한다.부족 간 분쟁을 평정하고 이슬람 공동체로 결속을 다진 무함마드는 메카를 정복해 교세 확장에 획기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전쟁에서 종교적인 색채를 첨가해 이슬람을 형성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 즉 지하드로 인식하게 했고, 결국 지금까지 그 정신이 내려오고 있다.무함마드도 인간인지라, 632년 메카로 순례하러 가던 도중 열사병에 걸려 객사했다. 그러나 예수처럼 3일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았다.‘한 손에 칼, 한 손에 쿠란’, 많이 들어본 소리다. 결론적으로 이 말은 서구 시각에서 조작한 것이다. 이슬람은 정복지라 해도 결코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포용 정책을 폈다. 무엇보다 무함마드는 용기와 더불어 공평하게 정책을 펼치면서 점령지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특히 입상진의(立像盡意), 즉 형상을 만들어 뜻을 강조해 전달하는 로마 가톨릭과는 경계를 분명히 했다. 포교를 위해 아이콘을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무함마드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경이다.이렇게 기독교 사촌 이슬람은 전성기를 맞는다. 사촌이라 함은 이슬람 역시 히브리 성서에 근거한 종교란 뜻이다. 같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심판, 종말론 등 기본적 종교관의 골격을 공유하고 있어서다.이슬람은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가톨릭의 아리우스파와 맥을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철저한 일원론적 유일신 사상을 확립했다. 삼위일체가 가톨릭, 정교, 개신교의 기본 교리라면 이슬람은 아담에서 아브라함, 다윗,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성경의 선지자는 신이 보낸 인간 예언자일 뿐이며, 무함마드는 ‘봉인’ 곧 마지막 예언자라고 한다. 그 때문에 복음을 완성하는 사명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현세에서 선악의 행위에 따라 최후의 날 신의 심판을 받는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처럼 구원과 응징으로 나누는 내세관은 천국의 법에 따라 움직인다. 성서 종교(아브라함)의 개념 자체가 유대교의 야훼, 기독교의 하느님, 이슬람의 알라는 같은 창조주를 지칭한다. 하나의 창조주라는 개념과 종말론, 메시아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음에 올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데 대한 해석에 따라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나뉜다.현세에 일어나는 종교 갈등은 인류 욕망의 찌꺼기다. 인간과 민족, 국가의 이해에 따라 폭력을 생산하고, 스스로 희생당하기도 한다. 그때의 잣대로 오늘을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예수가 30세에 세례를 받아 가르침을 시작했고(누가복음 3장), 부처는 35세에 정각(正覺), 즉 깨달음을 얻었다면, 무함마드는 40세에 계시를 받았다. 이 일련의 간격, 5는 어떤 의미일까. 세속에서 풀 수 없는 형이상(形而上) 의미가 담겨 있을 법하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대사다.“인간은 생을 살려고 태어난 것이지 다음 생을 준비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미뤄야 할 행복은 없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5-20

늙어가는 대도시… 부산 이어 대구도 ‘초고령’

부산에 이어 대구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비수도권 대도시들이 수도권 집중화로 인해 청년들이 떠나면서 맥없이 늙어가고 있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베이비붐 세대(1959~1964년생)의 노년기 진입도 한몫했다.행정안전부 통계에 의하면, 4월 말 기준 대구의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47만5318명으로 전체 인구(236만8670명)의 20.1%를 차지했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14.0%를 넘으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도(道) 단위 비수도권 지자체들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지 오래됐다. 비수도권 지자체의 고령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UN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늙은 최고령 국가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노년층이 늘면 자연적 온갖 사회병리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대구시가 초고령사회 진입에 대응하기 위해 ‘고령친화도시 조성’을 본격 추진한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가장 급한 게 노인간호와 일자리 문제다. 대구시가 실시한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서도 노인 정책 현안 1, 2위로 ‘돌봄’(38.7%)과 ‘일자리’(38.3%)가 꼽혔다. 국가나 지자체 모두 이 문제해결을 위해 각종 정책(재가요양·돌봄, 재택의료서비스 확대, 노인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확대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노인문제는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이제 대도시까지 늙어가면서 국가 전체적으로는 일할 연령층이 줄어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것도 시간문제가 됐다.이러한 사회적 재앙을 막으려면 출생률을 끌어올리는 방법밖에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지난주 TK 행정통합을 추진하기로 한 것도 인구소멸 문제 때문이다. 저출생, 지방소멸의 근본 원인인 수도권 일극주의를 막기 위해 시·도통합을 통해 국토를 다극체제로 재편하겠다는 생각이다. 인구의 지역분산을 유도하는 정부의 혁신적인 발상과 정책 없이는 지방소멸을 막을 수단이 없다.

2024-05-20

대구시, 탄소중립 선도도시로 거듭나길

탄소중립은 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여 실질 배출량을 0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지구촌은 탄소의 과잉 배출로 지구 평균온도가 지속적으로 상승해 여러 가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있다. 지구적 재앙을 줄이기 위해 전 세계 70여 개국이 탄소중립에 참여하고 있고, 우리도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로 발표한 바 있다.지구온난화를 막는 데는 국가뿐 아니라 도시의 역할도 크다. 우리나라도 여러 도시가 탄소중립 정책을 펴고 있지만 대구시는 그 중 앞선 도시로 꼽힌다. 지난 2022년 대구시는 총사업비 13조원을 들여 탄소중립도시 대전환을 선언하고 구체적인 전략도 발표했다.그 일환의 하나로 추진하는 친환경 사업이 성과를 냈다는 소식이다. 대구시가 매립가스를 차세대 고부가가치 친환경 에너지인 수소로 전환하는 데 국내 최초로 성공했다고 한다. 앞으로 이를 기반으로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는 SAF(동식물성 지방, 폐기물 등을 원료로 생산하는 항공유) 생산실증에도 도전하겠다고 하니 성과에 따라 탄소중립도시로서 이미지 대전환도 가능할 전망이다.중소벤처기업부가 지원하고 대구시는 실증연구 플랜트부지 제공, 매립가스 공급, 행정지원 형태로 참여하고 기술은 (주)인투코어테크놀리지가 맡고 있다. 대구시의 수소생산 실증의 성공은 천연가스 활용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일이다.대구시는 2006년부터 쓰레기 매립장에서 발생하는 매립가스를 포집해 지역난방 목적의 중질연료로 공급하는 매립가스 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매립장 악취 저감과 매립장 사업료 수입 66억원, 탄소배출권 판매 수입 562억원을 창출한 바 있다.이번 수소생산 실증연구의 성공과 향후 SAF 실증연구 도전은 대구지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물론 이를 활용한 경제적 실익도 적지 않을 전망이다.탄소중립은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지구촌 국가와 인류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대구시가 탄소중립의 실천적 도시로 모범이 되는 성과를 이루길 바란다.

2024-05-20

한동훈의 책읽기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오렌지색 이어폰을 귀에 꽂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낯익은 중년 사내 하나가 카메라에 잡혔다. 어린아이건 나이를 먹은 사람이건 독서는 비판받거나 힐난 받을 행위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 될 일이지.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최근 서울의 한 도서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편안한 복장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의 제목이 뭔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인지를 보도하는 기사는 나쁠 것 없었다.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다. 한 전 위원장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마구잡이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 입에 담기 낯 뜨거운 욕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직장 잃고 집에서 쫓겨난 노숙자의 폼 잡기 같다”란 반응엔 할 말을 잃게 된다. 책읽기는 실직하고 아내에게 구박받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인가?2차대전 시기 연합군의 최고위급 장교이자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는 이런 말을 남겼다.“책을 태우는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말라. 오류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은폐함으로써 오류 자체를 은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짤막한 문장엔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세계와 인간의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책읽기’란 뜻이 담겼다.‘책은 사람이 만들지만, 그 사람을 만든 건 책’이라는 이야기에 고개 끄덕일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냐? 이미 인류의 역사를 통해 증명됐으니까. 그러므로 한동훈의 책읽기에는 죄가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은 사람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라도 마찬가지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5-20

보수의 성찰, 반성, 그리고 혁신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국민의힘이 길을 잃었다. 총선 3연패에도 성찰과 반성에 인색하다. 중환자가 수술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진통제만 먹고 있다. 집권당이 되자 변화에 둔감하고 민심도 모른다. 이대로 가면 다음 지선과 대선도 필패다. 보수의 사활은 민심에 부응하여 혁신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그럼에도 구원 투수로 나선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은 총선 패인으로 외연확장에 따른 내부 결속력 약화를 지적하면서 “보수의 정체성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중환자를 치료해야 할 의사의 진단이 거의 돌팔이 수준이다. 참패의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고, 비대위원 7명 중 6명을 친윤으로 임명했다. 비상 상황에 대한 인식과 대처가 이처럼 안이하니 미래가 암담하다.국민의힘은 죽어야 산다. 민심을 받들어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환골탈태하는 것만이 살 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혁신 보수’로 거듭나는 일이다. 변화된 시대에 변하지 않는 ‘수구 보수’는 생존할 수 없다. 보수는 위기 때마다 가면을 쓰고 변신하는 흉내만 내다가 오히려 더 큰 화를 자초했다. 이번에도 중도 확장에 실패한 것은 ‘혁신의 가면’은 썼지만 ‘혁신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국민의힘은 민심에 민감한 ‘열린 보수’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성공한 지구적 보수는 ‘실용’과 ‘통합’을 중시한 ‘열린 보수’인데 ‘닫힌 보수’를 고집했으니 참패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의 가치는 개인의 자유를 배려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통합의 구현에 있다. 약자의 좌절과 분노를 헤아리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따듯한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나아가 수직적 당·정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당이 대통령의 시녀가 되면 민심과 유리된다. 물론 대통령이 당을 허수아비로 만들지 않아야겠지만, 당도 ‘윤심’만 살피는 예스맨(yes man)이 되어서는 안 된다. 권력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는 무기력한 여당을 누가 신뢰하겠는가. 대통령의 부당한 요구에는 분명히 ‘노(no)’라고 거부할 수 있어야 유능한 정당이다.이와 관련하여 국민의힘은 ‘영남당’과 ‘고령당’의 한계를 벗어나는 혁신이 시급하다. 반공과 산업화 신화에 안주해서 지지층이 노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수포당(수도권을 포기한 정당), 4포당(40대를 포기한 정당)이 되었다. 영국 보수당은 디즈레일리(B. Disraeli)의 과감한 정당개혁, 처칠(W. Churchill)의 ‘젊은 보수’와 같은 혁신정책으로 위기를 극복해왔다. 보수가 더욱 젊어지고 영남을 벗어날 때 비로소 떠난 민심이 돌아올 수 있다.보수는 수구(守舊)가 아니다. 고루한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를 개척하는 실용성 있는 나침판이 되어야 한다. 권위는 없으면서 권위주의를 고집하는 ‘꼰대당’은 시대착오다. 보수의 생명력은 실용적 변화와 혁신에 있다. 암환자가 진통제 처방으로 회생될 수는 없다. 중병에 걸려 있는 보수가 살길은 오직 처절한 반성을 통한 과감한 혁신뿐이다.

2024-05-20

금쪽같은 내 가수 김호중?

금같이 귀한 자식을 ‘금쪽같은 내 새끼’라고 하는데, 티브이 프로그램 제목이기도 하다. 방송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하거나 폭력을 휘두르는 등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이를 금쪽이라고 부른다. 아동 전문가 오은영 박사가 맞춤 솔루션을 제공해 금쪽이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부모의 올바른 훈육 부재와 과잉된 감싸기가 문제 행동을 키운 사례가 대부분이다. 꾸짖어야 할 때도 예뻐만 하다 보니 아이가 자기감정과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뛴다. ‘금쪽이’는 문제 아동을 지칭하지만 시청자들은 ‘내 새끼 지상주의’로 아이를 망치고 있는 부모를 먼저 떠올린다.금쪽같은 가수가 있다. 강남의 한 유흥주점에서 나와 차를 몰고 가던 중 택시와 추돌사고를 낸 후 도망쳤다. 매니저와 운전자 바꿔치기를 하고,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제거해 증거 인멸까지 시도한 정황이 포착됐다. 경찰에 자수한 매니저는 자신이 운전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 조사 결과 운전자는 바로 그 금쪽이, 김호중임이 밝혀졌다.음주 뺑소니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소속사는 조직적인 은폐를 시도했다. 김호중 측 주장은 너무 구차해 폭소가 터질 정도였다. “술잔에 입만 댔을 뿐 술은 마시지 않았다”, “매니저가 운전했다”, “대리운전을 이용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아티스트가 피곤해 해서 대리운전을 맡겼다”, “공황장애가 와 사고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해명할수록 엉망진창이었다. 눈물겨운 ‘김호중 구하기’가 ‘팀킬’이 되고 있는 가관이 우스웠다.소속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티스트를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누가 보면 김호중이 민주투사나 정의로운 내부고발자라도 되는 줄 알겠다. 예정된 공연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엔 변함이 없었고, 팬덤의 감싸기는 더 극성이었다.“얼마나 지쳤으면 그랬을까. 눈물이 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엄청난 스케줄에 힘들었겠다는 생각뿐이다”… JMS를 결사옹위하는 사이비 신도들을 보는 듯하다. 팬클럽 명의로 구호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했지만 거절당하는 망신도 당했다.몰상식하고 맹목적인 팬덤을 방패삼아 소속사는 법과 대중을 농락하며 패악질을 부렸다. 가장 비겁한 건 그 지경이 되도록 팬덤과 소속사의 암막 뒤에 숨어 침묵하고 있던 김호중이었다.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퇴역군인 프랭크는 명문 사립교 베어드의 징계위원회에 찰리의 보호자로 참석한다. 그는 양심을 지킨 찰리를 변호하고, 비열한 고자질쟁이가 되기를 선택한 조지를 꾸짖으며 일갈한다. “일이 꼬이면 어떤 놈은 도망가고 어떤 놈은 남지. 여기 그 화형불에 맞서는 찰리가 있고, 아빠의 커다란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조지가 저기 있네.”팬의 말마따나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른다. 하지만 반성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수치심과 두려운 손가락질 앞으로 나아가는 이가 있는 반면 뉘우칠 용기조차 없이 스스로 파놓은 구덩이 안에서 눈과 귀를 닫은 채 그 협소한 가짜 평화에 평생을 머무는 이가 있다. 그게 지옥인 줄도 모르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김호중은 이미 불법도박 전력이 있고, 과거 그로부터 상습 폭행을 당했다는 전 여자친구와 진실공방을 벌였으며, 이번에 그가 다녀온 유흥주점은 속칭 ‘텐카페’로 불리는 룸살롱이다.소속사는 검찰총장 직무대행까지 맡은 바 있는 조남관 전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했었다. 전관예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아티스트를 지키겠다더니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갈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심판마저 피하진 못할 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을 무력하게 하고 양심과 정의, 도덕이라는 사회적 신뢰를 비웃는 이들에게 휘두를 대중의 회초리는 비판과 불매, 철저한 외면, 그러면서 잊지 않는 것이다. ‘트바로티’가 아니라 ‘비겁한 금쪽이 김호중’으로 내내 기억하는 것이다.거짓은 더 큰 거짓을 부르고 거짓이 태산처럼 쌓이면 결국 그 거짓 세상에서 가짜 인생을 살다가 먼 훗날 자신이 허깨비였음을 알고 가슴 치며 절규하리라. 그때는 이미 늦다.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관용이 우리 사회에 아직 있다고 믿는다. 순간을 피하고 비겁한 겁쟁이로 평생 살 것인가 잘못 앞에 무릎 꿇고 남은 생애 동안 더 나은 사람으로 살 것인가. 소속사와 팬덤에 묻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는 게 성인이다.

2024-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