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의 범인을 놓쳐도 한 명의 무고한 이가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미국 대법관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의 말이다. 법으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다 공정하고 신중하라는 메시지이다.
며칠 전 포항 지진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청구 민사 소송 결과를 보고서 새삼 이 문구가 생각났다. 물론 재판관들은 양심에 따라 재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 선고 결과에 의견을 달리하고 수용을 거부한다. 나의 평가가 편견에 기반 한 것이라는 비판의 소리를 재판부로부터 들을 수도 있지만 백번 양보 해 생각해도 판결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심에서 200~3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뒤엎고 이번에 한 푼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왜 이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까. 참으로 궁금했다. 180도 정 반대의 판결이 나왔으면 그 이유도 타당해야 하고 받아들이는 측도 수긍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난 판결문을 몇 번에 걸쳐 읽어보고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쪽으로 결론 낼 수밖에 없었다.
50만 포항시민들을 충격으로 빠뜨린 이 판결은 과연 정당했는가. 그동안 포항지진특별법 제정 등에 앞장서며 포항촉발지진의 전 과정을 목도했던 필자가 판결문을 입수,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품었던 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판결문 그 어디에도 시민의 간절함과 고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간의 활동을 토대로 도저히 반론을 하지 않을 수 없어 펜을 들었다.
정부의 예산으로 사업이 진행될 경우, 통상적으로 ‘갑’은 정부의 공무원이 된다.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사업 감시와 감독 권한이 해당 공무원에게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항 지진 발생 이후 지진 안정화 사업을 진행하면서 주민 대표로 활동한 경험을 통해 이 시스템을 체득했고 실감할 수 있었다. 포항지진 사업은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의 공무원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 그들은 권한을 행사했다.
포항지열발전기술개발 사업을 진행하면서 지진 발생 위험에 대한 사실을 해당 공무원이 몰랐다고도 할 수 없다. 사업 제안서를 살펴보면, 한국어로는 ‘미소진동’이라고 표현했지만, 영어로는 지진을 의미하는 ‘micro-seismicity’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2심 판결문에서 ‘미소지진’이라는 용어 대신 ‘미소진동’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미 피고 측 주장을 대변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지진 위험이 있는 사업임을 고려할 때, 정부 관계 공무원들은 사업 진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한 경각심과 긴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 재판부는 공무원들이 적절히 감시하고 감독했는지를 검토하고, 책임 차원에서 확인해야 했다.
재판부가 밝힌 과실 내용을 여러 번 읽어볼수록, 원고 측의 주장보다 피고 측 공무원의 과실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담론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 점도 씁쓸했다. 백번 양보해 부지 선전에서 활성 단층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인정하자. 그러나 생산정과 투입정을 시추하는 과정에서 머드로스(mud loss)가 발생한 부분은 어떻게 봐야 하나. 이 머드로스 현상은 단층이 존재한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재판부는 공무원들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증언을 통해 검증했어야 했다.
포항지진은 감사원 등 정부기관을 통해서도 인재였음을 인정받았다. 관계 부처와 관계자들의 과실만 20여 건이나 적시됐다. 정부를 대변하는 피고 측 변호사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큰 과실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재판부도 인용했다. 너무나 너그러운 판결이다. 지열 사업을 진행한 넥스지오 콘소시엄 관계자와 정부 관계 공무원들이 지진 발생 위험을 차단하고 방지하기 위한 행동도 단발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사업 전후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발생하는 지진 위험을 초래하는 과실을 검증해야 했음에도 이를 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또 미소진동 관리 방안과 관련, 정부 관계자들과 상의할 법적 내용이 아니라는 피고 측 변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미소진동 관리 방안을 당국의 허가 없이 변경한 점에 대해 지적하면서도, 지진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가볍게 해석한 점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특히 지진계의 부실 운영도 중대한 과실이 아니라고 판단, 필자를 놀라게 했다. 지진 위험을 관리하는 전 과정이 서로 연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분리하여 큰 과실이 없다고 판단한 것은 피고 측에 유리한 입장에서 판결문이 작성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미소진동 관리 방안, 즉 교통신호등 체계의 운영에서는 지진 규모 2 이상이 발생할 경우 포항시에 통보하는 조항이 있다. 사회적 수용성이다. 그러나 지진 진행 정부 관계 공무원들은 이런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정부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3차 수리자극에서 규모 3.1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정부 공무원들이 포항시와 포항 시민들에게 지열 발전소가 일으킨 지진이라고 통보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분을 따져야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새로운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고의로 은폐하지 않았다고 하며 면죄부를 줬다. 정부 공무원들의 감시 및 감독을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고의성의 기준으로 이루어지니, 평가의 잣대가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내용도 있다. 피고 측은 지열발전소 운영 측은 많은 양의 물을 투입하지 않았으며, 외국 사례에 비해 매우 적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어느 나라의 기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다. 재판부는 이 또한 피고 측에 유리한 학자인 맥가(A.McGarr)이론의 범위 내에서 진행,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는 원고 측인 정부 조사단과 정부 진상위원회의 주장, 그리고 세계 지열학회와 지진학회, 세계적으로 저명한 논문의 입장과 이론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포항 지진은 단순히 물 투입량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물 투입에 따라 지하에서 지진이 발생할 응력이 축적된 상태에서 일어난 촉발 지진으로 규정되었다. 1차부터 4차까지의 수리 자극을 하는 동안 지진을 일으킬 응력이 축적된 상태에서 5차 수리 자극이 촉발하여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주장이 맞선다면 시민 50여 만명의 고통이 걸린 재판이었던 만큼 재판부는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불러 이 조항을 더 세밀하게 들여 봤어야 했다. 무엇 때문에 1차례 변론과 3여 개 월 만에 서둘러 선고했는지 난망하다.
이번에 재판부는 인간의 잘못으로 발생한 촉발 지진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잘못이 크지 않다고 했다. 이걸 모순이라고 하지 않으면 뭘 모순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재판부는 판결이 100% 완전하지 않으니 대법원에서 다시 판결을 받아보라는 친절한 안내를 제공하는 자비로운 모습까지 보였다. 자신감이 결여된 판결이므로 지진으로 인한 상처와 억울함을 치유하기 위해 더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보라는 것으로 밖에 해석이 안됐다. 포항지진으로 50여 만명이 고통을 받았고, 아직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어디에서 위로받아야 하는가, 항소심 재판부에 묻고 싶다.
/양만재 포항지역사회복지연구소 소장·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