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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뜨개질하는 마음

뜨개질을 할 때면 별 다른 걱정이 들지 않는다. 실을 구멍에 넣고 또다른 실을 가져와 한 바퀴를 돌린 후 그저 실 밖을 통과하는 단순 작업의 반복일 뿐인데, 뜨개를 뜨다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는 걸까.뜨개는 대바늘과 코바늘로 나뉜다. 같은 실을 사용할 수 있지만 바늘과 뜨는 기법에 따라 엄연히 다른 작품이 탄생한다. 대바늘은 조금 더 훌렁훌렁하고 부드럽게 떠지기 때문에 주로 스웨터나 목도리를 뜰 때 사용하고, 코바늘은 조금 더 딱딱하고 편편하게 떠지기에 컵 받침대나 수세미 등 작은 소품을 뜰 때 좋다.나는 주로 두 바늘로 편물을 뜨는 대바늘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두 손으로 두 가지 바늘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 움직임이 매끄러운데다, 코 수가 틀리면 바로 수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두 손에 일정한 힘이 고르게 들어가서 더욱 안정적으로 느껴진다.대바늘 뜨개질의 매력은 쭈욱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잡생각이 들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 사소한 일에도 잘 집중하기 어려운데, 뜨개질을 할 때면 신기하게도 쇼파에 몸이 파묻힐 정도로 앉아 뜨개를 뜨고 있다.두 바늘을 교차하여 실을 이어 나가는 동안은 떠오르는 걱정이 잠시 물러 난다. 바늘이 나아가는 것만큼 뜨고 있는 편물이 실시간으로 손에 잡히기에 노력 대비 실적이 크게 느껴진다. 그렇게 가방에 달고 다니는 장식품도 만들고 작은 물건을 넣어 다니는 파우치도 만들고, 얇은 원사를 사용해서 여름에 착용하기 좋은 하늘거리는 스카프도 만든다.바구니에 안온하게 들어가 있는 저 평온한 자세. 엎드린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는 듯 실뭉치를 만지다 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실을 만질 때면 바깥 세상의 뾰족함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는 느낌이랄까.바늘을 손가락으로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뜨는 기법도 다양하다. 잉글리시 니팅은 보통 많이들 사용하는 기법으로, 실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아 뜨는 방법을 말한다. 콘티넨틸 기법은 자신이 주로 사용하지 않은 손에 실을 잡고 뜨는 방식이다. 만일 뜨는 사람이 오른손잡이라면 오른손에 바늘을 잡고 왼손에 실을 잡아 뜬다. 레버 니팅은 손을 지렛대로 사용해 속도를 높이는 기법이다. 바늘을 잡는 자세에 따라 편물의 모양이 미세하게 달라지지만 여러 가지를 해보면서 내 손에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치 손과 실이 하나가 되어 곡을 리드하는 지휘자의 손놀림과 같달까.리듬에 맞춰 생각없이 이것도 뜨고 저것도 뜨다 보면 내 옆엔 내가 만든, 작품들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털뭉치들이 잔뜩 널려 있다. 만들고 남은 자투리 실, 옆선이 울룩불룩 제 멋대로인 편물들, 어딘가 서툴고 부족하지만 직접 만든 물건으로 채워지는 나의 삶을 더욱이 애정 어리게 보게 된다.일반 실에 형형색색의 반짝이가 들어가 있는 실을 합사하여 더 다채로운 색상을 만들어 뜰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원하는 대로 색을 조합해 더욱 독특하게 만들어 볼 수 있고, 이는 기성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또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평소엔 눈 감고도 뜰 수 있던 컵받침 같은 쉬운 것들이 어느 날은 유독 진도가 더디게 떠질 때가 있다. 잔 실수를 계속 하다 길이 한번 잘못 든 실은 간단한 수정만으로도 복구가 되지만, 실수가 계속된다면 결국 그 줄에 있는 전체 코를 전부 다 빼내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바로 인내심이다. 바깥 생활에서 갈고 닦은 인내심을 이 때 발휘해야 한다. 참을 인을 이마에 그린 후, 다시금 처음부터 천천히 나아가는 것. 굳세게 버티어 계속해서 나아가는 노력의 산물이 바로 뜨개인 것이다.뜨개의 또 다른 매력은 정확한 손놀림이다. 실시간으로 늘어나는 편물을 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욕심이 나서 더욱 손놀림이 빨라진다. 실을 꽉 잡아당기며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면 어느새 뜨고 있던 편물의 모양은 이상해진다. 하나의 코가 빠져 있거나 바늘이 다른 구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잠깐의 욕심이 불러온 참사. 지나친 욕심은 늘 이렇게 괴상한 모양을 띠게 마련이다. 그럴 땐 다시 뜨개를 내려 놓고 심호흡을 하며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후우. 몇 초간 멍을 때리다 다시금 실을 팽팽히 잡아당겨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장력을 느껴본다. 그리고 또다시 실을 술렁술렁 넘기며 마음의 가벼움을 느낀다. 실을 정확히 컨트롤하며 편물을 뜨는 것. 세상 일처럼 뜨개 마저도 자꾸만 실수를 하기 마련이지만, 그럴 때마다 이렇게 풀고 다시 나아가다보면 근사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뜨개도, 삶도 말이다.

2024-05-20

한국의 민주주의는 안녕하신가

김진국 고문 민주주의는 튼튼한 제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졌다. 민주주의는 발전만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으로 그렇게 배웠다. 후퇴나 파괴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우리가 민주주의의 교본처럼 생각하는 미국 민주주의의 죽음에 관해 연구한 학자들이 있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시티븐 레비츠키 교수와 대니얼 지블랫 교수다. 이들은 뉴욕 타임스에 ‘트럼프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가’라는 칼럼을 기고해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이것을 발전시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책에 이어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라는 책을 냈다.이들의 지적이 주목받는 건 민주주의 파괴가 군대 같은 무력이 아니라 투표장을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미국 같은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 그것도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극렬한 소수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가 당연한 체제로 생각하고, 우리가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으로 생각한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이들은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원래 불안하다고 한다. 선거 결과에 대해 승복하지 않으면 균열이 생긴다고 한다. 이들의 지적을 새겨보면 한국은 더 위험한 벼랑 끝에 매달려 있다.이명박 전 대통령은 87년 직선제 이후 가장 큰 득표율 차(22.6%p)로 당선됐다. 그러나 야당은 승복하지 않았다. 취임 초부터 촛불집회로 흔들었다. 그것도 전임 노무현 대통령이 준비해 놓은 한미FTA의 마무리가 꼬투리였다. ‘뇌송송 구멍 탁’이라는 선동 문구가 SNS를 타고 전파됐고, 어린 학생들부터 거리로 나섰다. 동력을 받지 못하고 임기를 보냈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의 여파로 대통령직은 거저 줍다시피 했다. 역대 최대 득표 차(557만951표)다. 그러나 임기 내내 주말마다 서울 중심거리에서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세력대결을 벌였다. 반대 진영에 비해 동원 능력과 전파, 설득 능력이 떨어져 힘이 없었을 뿐, 현직 대통령에 대한 불복과 비난은 계속됐다.윤석열 대통령도 반대 진영이 인정하지 않는다. 임기 절반도 지나지 않고 치른 총선에서 ‘탄핵’, ‘임기 단축’을 공공연히 공약으로 내걸 정도다. 국회는 국정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전쟁터다. 선의의 비판은 없다. 전자오락처럼 오로지 상대의 힘을 빼앗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심지어 자기가 먼저 주장한 정책조차 상대측 정부가 추진하면 시비를 걸고, 방해한다.래비츠키 교수의 지적대로 민주주의는 승복해야 굴러간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는 승복과 대화와 타협, 그리고 다시 경쟁하는 선의의 경쟁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지금처럼 누구도 승복하지 않고, 선거가 끝나자마자 다음 선거를 위해 상대를 공격하는, 중단없는 정쟁 구도에서는 살아남을 길이 없다.더구나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전파 속도가 빨라졌다. 극단적인 소수가 여론을 좌지우지한다. 전체 국민에서 차지하는 실제 비율보다 몇 배 강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팟캐스트에서 시작해 유튜브에 이르기까지 소수파의 확성기가 점점 더 커졌다. 이 확성기들은 극단 세력의 자극적인 포퓰리즘에 더 열광한다는 특징이 있다.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킹크랩’에서 실제 세력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길을 찾았다. 그 전에 유시민의 개혁국민정당(개혁당)은 온라인 대화방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했다. 전투적 소수세력의 효용성을 입증한 원조격이다. NL계열이 민주노동당을 장악하는 과정은 소수파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줬다.이제 강력한 ‘전투적 소수’는 ‘노빠’(노무현 지지세력)에서 ‘문빠’(문재인 지지세력)로, ‘개딸’(이재명 지지세력)로 진화하면서 정치권의 공식이 됐다. 지난 총선에서는 조국신당이 새로운 ‘강력한 소수집단’으로 등장했다. 보수는 경쟁력이 비교가 안 된다. 설득력도, 확장성도 없다. 문제는 전투의 승패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존립이다. 지블랫 교수의 걱정거리가 미국보다 한국에 먼저 와 있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5-19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경산 유치 결과를 바라보며

조현일 경산시장 ‘아울렛’어느 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아울렛이란 단어는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재고상품을 싸게 파는 전문점을 ‘아울렛 스토어’로 부르면서 널리 알려졌으며 백화점이나 제조업에서 자사 제품이나 직매입한 상품을 정상가격의 40~70%에 판매하는 상설 소매 점포를 이야기한다. 명품의류에서 구두, 가구 등으로 품목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이랜드 2001 아울렛이 최초다. 너도나도 아울렛이란 상호를 사용하며 가격대가 낮은 제품들이 유통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신세계와 롯데, 현대 등 대기업이 프리미엄 아울렛 15곳과 아울렛 17개 곳 등 32곳의 대형 아울렛을 운영하며 고품질의 제품을 소비자가 이익을 보며 구매하는 공간으로 인식이 바뀌었다.이들 대형 아울렛은 지역 경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일각에서는 지역 자금의 역외 유출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일자리 창출과 생산유발 효과와 부가가치유발 효과를 고려해 지역경제에 효자 노릇을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경산시도 2008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경산지식산업지구가 대기업과 해외자본이 유입될 것으로 전망했으나, 실적이 부진하지 이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 내 정주 여건을 개선해 청년들이 정주할 수 있는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할 대형 명품 아울렛 유치에 나섰다.지난 2020년 9월 경북도와 대기업 등이 참여한 투자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해 2000명 이상의 일자리와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해 인근 청도와 영천 등의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파급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했다.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경산지식산업단지 1단계 산업용지에 물류 유통단지가 들어서는 것은 지정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는 견해를 고집하며 시민들이 실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실망에만 빠지지 않고 유치 염원을 담은 서명운동에 들어가고 서명 부를 관련 부처에 전달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보였고 경산시도 유치 방법을 찾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최근 산업자원부 경제자유구역위원회가 경산지식산업지구 2단계에 유통상업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개발계획 변경안을 승인하며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경산 유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이제 경산시가 할 일이 많아졌다.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입주 대상을 찾아야 하고 참여할 기업과 미래의 잠재고객을 유치할 최고의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산시는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이 건설과 소비지출에 따른 파급 효과로 연간 방문객은 800만 명, 취업유발 효과 1만3651명, 생산유발 효과 1493억 원, 부가가치 유발 효과 509억 원이 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또 산업과 관광, 문화, 쇼핑 기능이 융합된 복합도시 가능해져 경제자유구역의 활성화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식산업지구에 대형 유통업체가 입주하면 특혜 의혹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염려했다.이러한 염려를 불식시키고자 공개 경쟁으로 부지를 분양하고 방문객들의 편의를 위한 문화·복합시설 구축과 다양한 명품 브랜드를 입주시키고 대지건물비율은 낮추고 용적률은 높여 다른 쇼핑몰과의 차별화로 온라인을 애용하는 고객들도 오프라인으로 옮겨 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프리미엄 쇼핑몰로 만들 계획이다.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절차를 제공하지만,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것이다. 특히 사업시행자의 개발이익을 재투자해 창업과 중소기업체 입지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다양한 기업 지원 인프라와 서비스를 제공해 우수 인적자원도 확보할 것이다. 지역주민 우선채용과 지역상품 마켓 조성으로 기업과 지역이 상생하는 효과도 거두어야 한다.민선 8기 경산으로 취임하며 시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경산 유치가 결정될 때까지 발에 구두를 신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앞으로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착공까지 운동화가 발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경산지역에 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입점이 가능해진 것은 실망보다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대형 프리미엄 쇼핑몰의 경산 입점을 위한 개발 변경안의 승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된다. 29만 경산시민의 시정을 책임지는 시장으로 무엇이 최선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작은 충고에도 고마움을 느끼면 민선 8기 목표인 ‘꽃피다 시민 중심, 행복 경산’을 이룰 수 있음을.

2024-05-19

롤러코스터

롤러코스터. 척, 척, 척경사진 레일 위를 천천히 올라간다. 50m 이상의 중턱을 헉헉거리지도 않고 하늘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다. 잠시 정차. 하늘을 유유히 돌다가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아찔한 속도로 땅을 향해 내리꽂는다.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사람,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차마 세상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사람, 혹이나 떨어질까 땀을 쥐고 난간을 꽉 잡은 사람, 다리가 새처럼 덜덜 떨리는 사람, 허벅지가 말 장딴지처럼 잔뜩 긴장해 있는 사람, 공포에 질리면서도 저마다 짜릿한 스릴을 즐긴다. 내 일상은 늘 롤러코스터 위에 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 모든 것이 흔들린다.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나를 빙글빙글 돌려댄다. 진단을 받으니 이석증이란다. 귓속 깊은 곳의 반고리관 안에 이석이라는 물질이 흘러 다녀서 발생한다고 한다. 어떤 이유든 이석이 원래 위치에서 떨어져 나와 반고리관 내부의 액체 속에서 흘러 다니거나 붙어 있게 되면 주위가 돌아가는 듯 어지럼증이 생긴단다.병원을 다녀온 후, 빙빙 도는 현기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빙 돌고 머리가 조여 오는 두통에 시달렸다. 점점 과로나 스트레스와 상관없이 말도 안 되고, 이해할 수도 없는 까닭으로 나를 흔들어댔다. 외출과 과로를 피하고 힘들면 쉬거나 낮잠을 잤다. 하지만 두 달 뒤 친구들과 수다 떠는 중에 갑자기 어지럼증이 왔다. 어떤 자세도 편하지가 않았다. 병원에서 또 이석이 빠졌음을 진단받았다. 이석이 제자리로 돌아가도 증상은 남아 있어 일상생활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빙빙 도는데 나는 세상을 바로 보고 살 수 있을까. 때때로 귀에서 폭우가 내리는 것 같았다. 맑은 날은 잠시, 비바람이 몰아쳤다가 우박이 내렸다가 가끔 천둥도 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상을 견뎌내는 일이 점점 힘들어졌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회의가 귀를 틀어막고 있는 것 같았다.어두운 밤 나 홀로 무중력 공간을 떠돈다. 땅을 향해 발을 뻗어 보지만 지구는 저 멀리서 빙빙 돌아간다. 내가 도는 것인지 지구가 도는 것인지 헷갈린다. 그러다가 지구의 중력을 이탈해 칠흑 같은 우주공간으로 빨려가는 꿈을 꾼다.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남편의 얼굴이 빙빙 돈다. 나의 이석은 왜 이탈하여 온 우주를 돌려대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운 세상이다. 먼 나라에서는 전쟁으로, 가까운 곳에서는 내 잘났느니 네 잘났느니, 눈을 뜨면 먹어야 하는 약은 한 움큼이나 되고 나의 몸과 생각은 시간과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니 어지러울 수 밖에. 때로는 어질머리 나는 세상을 잊고 싶기도 하다.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갈수록 자연에서 배운 성숙과 풍요를 누리며 살고 싶었다. 중후한 노년은커녕 골방에 갇혀 어지러움과 싸우고 있으니, 세상은 직선으로 가고 있는데 난 마치 게임을 하듯 꽈배기를 틀고 있으니. 환각이라면 차라리 깨어날 희망이라도 있을텐데. 일상이 따분하면 사람들은 번지점프를 하거나 놀이기구를 탄다. 현실이 주지 못하는 공포와 쾌감을 느끼려 롤러코스터를 탄다. 느닷없이 치솟고 사정없이 돌려대는 스릴을 즐긴다. 그리고 흔들리는 몸으로 착지한다. 온몸으로 느끼는 안정감도 공포 이후의 카타르시스이다. 여행과 모험의 목적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으로의 복귀이듯. 김경아 작가 살다보면 높은 곳에 오를 때가 많다. 대박을 꿈꾸며 주식에 올라타지만 주가곡선은 너울거리다가 결국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허방이다. 열매가 탐나서 나무를 기어오르다가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다. 꿈을 따러 허공을 서성이며 수없이 허방을 디디는 우리는 착지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래야 다치지 않고 바닥에서 바로 일어날 수 있는데, 그렇게 탄력성을 익혔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양이의 가뿐한 착지는 묘기에 가깝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살기 위한 본능적 몸짓이라고 한다. 나 또한 살기 위한 착지를 꿈꾸지만 고양이 같은 몸짓은 없다.약으로 감각을 마비시키는 처방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래서인지 롤러코스터 위에서 비명을 지르는 저들의 몸짓이 부럽다. 가뿐한 착지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롤러코스터에서 내린다. 잠깐 어지러운 몸을 추스르자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개운하고 시원한 얼굴이다. 흔들리지 않는 저들의 걸음이 가볍고 경쾌하다. 나는 다시 어지러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2024-05-19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찾아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누구나 잊을 수 없는 장면 하나둘은 있는 법이다.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전생의 기억을 송두리째 날리고 난 후에야 예닐곱 살을 먹는다는 얘기도 있다. 윤회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기엔 아주 생생하게 전생을 기억하는 인간도 많다고 한다. 세계 전역에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전생을 낱낱이 기억한다는 기록도 있다.전생을 들먹이지 않아도 ‘메밀꽃 필 무렵’(1936)의 허생원처럼 가슴에 묻어두는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전 서울 달동네에 살 때 보았던 장면이 어제처럼 선연하다. 무척이나 추웠던 어느 겨울날 아침 심부름을 나왔다가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이 길가에 있던 집의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쑥 들어서는 것을 본다.그 집을 나오는 청년의 손아귀에는 붉은색 털실 스웨터가 들려 있었다. 아직 물기가 덜 빠져서 그런지 묵직하게 보이는 스웨터를 들고 그는 달리기 시작한다. 달리면서 그는 연방 좌우를 둘러본다. 이윽고 “도둑이야!” 하는 고함(高喊) 터져 나온다. 몇몇 사람들이 청년을 막아서거나 몸을 붙잡는다. 청년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본다.그의 표정이 기억에 또렷하다. 붙잡혀서 잘 됐다는, 이제 됐다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크게 만족하고 평안한 얼굴의 청년이 아홉 살 난 나를 당혹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도둑질한 청년은 필사적으로 달리지 않았다. 그저 빨리 달리는 시늉을 했을 뿐, 옷을 훔쳐야겠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던 게다.미당(未堂)은 ‘무등(無等)을 보며’에서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썼다. 한국동란이 끝난 이듬해에 시인이 통찰한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현실과 유리된 시인의 관념적 사유와 인식으로 수용한다. 우리가 항용 나직하게 속삭이는 가난이란 말은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9세기 중후반 유럽 문단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빈곤과 무지에서 오는 타락과 방종이다. 찰스 디킨스가 이 주제의 선구자인데,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1838), ‘크리스마스 캐럴’(1843), ‘어려운 시절’(1854), ‘막대한 유산’(1861) 등에서 19세기 초중반 영국 노동자들의 새빨간 가난과 가난이 몰고 오는 폐해를 그려낸다.빅토르 위고의 대작 ‘레미제라블’(1862)의 주제는 청춘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 아니라, 빈곤과 무지가 낳은 타락과 방종이다. 에밀 졸라가 1877년 출간한 ‘목로주점’에서 가난과 무지는 알코올중독과 무도병, 매춘으로 이어지면서 빈곤의 끝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이런 본보기를 우리는 김동인의 ‘감자’(1925)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요즘 언급되는 불평등과 상대적 빈곤은 관념적 사치가 극에 달한 자의 정치적 수사이거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빈곤 문제는 가난의 뿌리를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구두선(口頭禪)이 될 수밖에 없는 뿌리 깊은 것이다.

2024-05-19

대구백화점 80년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백화점이 창업 80년을 기념해 특별사진전을 열고 있다. 대백프라자에서 오는 25일까지 열리는 전시회에는 대구백화점 80년과 대구 중구 100년의 기록 사진들이 전시된다.지역 유일의 향토백화점으로 80년을 이어가고 있는 대구백화점의 과거 모습들과 대구 100년의 모습을 실감나게 볼 수 있는 사진전이다.1944년 대구 중구 삼덕동에서 잡화류를 주로 파는 대구상회로 출발한 대구백화점은 대구경제 성장사를 이야기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대구역사의 증인으로 등장한다. 현대, 신세계, 롯데 등 대기업 백화점들의 대구지역 공략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킨 향토 백화점으로 대구를 상징하는 백화점으로 소개된다.대구백화점을 두고 한 대학교수는 “대구백화점은 생존 그 자체만으로 칭찬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자본력으로 밀고 들어온 대기업의 지역시장 진출에도 향토 백화점으로서 존재감을 유지한 데 대한 칭찬의 말이다.지금은 폐쇄됐으나 동성로 소재 대구백화점 본점은 동성로를 대구 중심 상권으로 이끈 주인공이다. 1969년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백화점 건물을 짓고 대구 최초 정찰제 판매를 시작한 대구백화점은 동성로를 젊음과 패션의 거리로 전국적 명소로 만드는 데 기여한 공로가 크다.대기업의 지역 진출에도 대구백화점이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지역민의 관심과 사랑이다. 전국에서 향토 백화점이 유지되는 곳은 대구가 유일하다. 향토 백화점이란 이름으로 유지되던 모든 곳의 지방백화점은 대기업의 진출로 모두 사라진 게 현실이다.창업 80년 맞는 대구백화점의 저력이 지역의 100년 장수기업으로 이어지길 바란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19

다시 불 지핀 ‘대구경북 통합론’을 주목한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구시와 경북도의 통합을 주장해 한동안 논의가 중단됐던 대구경북 통합론이 새롭게 불을 지피게 될지 주목된다.홍 시장은 지난주 제22대 대구경북 국회의원 당선인과 함께 하는 대구·경북 발전결의회 자리에서 시장 취임 후 처음으로 대구경북 통합 구상을 밝혔다.그는 “최근 중국 쓰찬성 청두시를 방문하면서 2006년 방문 때와 달리 18년 만에 인구가 2500만명 도시로 바뀌었다”고 하면서 “대구와 경북도 통합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그는 또 “대구와 경북 전체를 인구 500만명 광역시로 만드는 것이 대구와 경북이 각각 발전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고 좋을 것”이라는 구상도 설명했다.이에 대해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통합 논의에 적극 찬성”이라 대답하고 “대구경북은 당장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통합을 논의하자”고 화답했다. 또 당선인들에게는 “대구경북 통합 법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대구경북 통합론은 민선 7기부터 활발히 논의된 의제였다. 한때는 대구경북 통합단체장이 선출될 듯한 분위기까지 몰고 갔으나 통합반대 일부 여론과 정치권의 소극적 대응 등 복잡한 사정으로 논의 자체가 중단됐다.민선 8기 들어 대구경북 통합론이 공식 거론된 것은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통합론의 본질은 수도권 공룡화에 대응해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고, 인구소멸에 적극 대응하자는 데 있다. 대구경북뿐 아니라 이 문제는 전국 지방 공동의 담론으로 떠올랐으나 지역 내 이해관계와 중앙정부와 정치권의 소극적 대응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다.홍 시장의 말대로 지금은 인구가 국력인 시대다. 지방의 도시도 인구를 늘리지 않고는 성장의 모멘텀을 찾기 어렵다. 대구와 경북은 한 뿌리란 점에서 통합에 대한 생각은 같다. 통합에 대한 여론수렴과 치밀하고 논리적인 계획이 밑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대구와 경북은 신공항 건설 등 공동의 발전을 논의할 전환점에 서 있다. 다시 불 지핀 통합론이 지역발전의 원동력 되게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4-05-19

시중은행된 대구銀, ‘은행권 메기’로 성장하길

금융위원회가 지난주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대구은행의 시중은행 전환을 의결했다. 지방은행이 시중은행으로 전환된 첫 사례이자, 32년 만에 새로 생겨난 7번째 시중은행이다. 대구은행은 은행권 과점 구도를 깰 ‘메기’로 투입되는 만큼, 경직된 금융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 소비자 입장에서도 시중은행간의 경쟁 활성화로 금리나 수수료 등에서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황병우 대구은행장은 “내부통제와 디지털금융을 통해 금융 시장에 새바람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대구은행은 다음달 주주총회를 거쳐 57년 만(1967년 창사)에 사명을 ‘아이엠(iM)뱅크’로 바꾸고, 지방은행 꼬리표를 뗀다. 대구·경북 지역에선 기존 대구은행 사명을 병기(倂記)할 계획이다. 금융위는 대구은행이 단시일 내에 타 시중은행과 안정적·실효적 경쟁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은행의 전략은 인터넷은행의 효율성을 중심으로 전국 단위 영업망을 확대해 오프라인 대면 영업의 장점도 동시에 챙기는 ‘뉴하이브리드 뱅크’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당장 시중은행과 경쟁하기엔 규모 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선 수도권과 지방은행이 없는 강원·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영업점을 신설할 생각이다. 첫 신설점포는 빠르면 상반기 중 강원도 원주에 낼 계획이다.대구은행이 하루빨리 전국적인 인지도를 확보해 시중은행으로 정착하길 바란다. 경제계를 중심으로 한 대구·경북 지역민들도 하나같이 전국을 무대로 성장기회를 확대해 가는 대구은행을 응원하는 분위기다. 단지 대구은행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은 기존의 지역 지원사업이나 중소기업 여신규모 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구은행에 의존해 왔던 이 지역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에게 소외감이나 금융공백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 금융위가 대구은행 시중은행 전환을 의결하면서 ‘본점은 대구광역시에 둘 것’이라는 조건을 단 것은, 이 지역 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유지하고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지속적으로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2024-05-19

인생 고수로 가는 지름길, SBS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아카시아 향이 짙은 푸르른 5월에는 스승의 은혜를 기리는 ‘스승의 날’이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삼인행(三人行) 필유아사언(必有我師焉), 택기선자이종지(澤其善者而從之), 기불선자이개지(其不善者而改之)”라 했다.이 말은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의 좋은 점을 골라 그것을 따르고, 나보다 못한 사람의 좋지 않은 점을 골라 그것을 바로 잡으라”라는 뜻이다.필자는 운동으로 테니스를 배우고 있는데, 인생이나, 기업이나, 운동이나 모두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기를 충실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테니스 고수로 가는 지름길은 ‘SBS’를 실천해야 한다. SBS는 학습(Study), 준비(Be Ready), 단순함(Simple)의 약자이다.첫째 ‘Study is Best’이다. 이 말은 학습이 최고라는 말로 배우지 않고 테니스를 하는 사람은 요령만 늘어 발전이 없지만, 방법을 제대로 배우면서 노력하는 사람은 실력 향상 속도도 매우 빠르게 된다. 또한 ‘연습만이 살길이다’라는 말처럼 꾸준한 연습이 동반되어야 한다.둘째 ‘Being Ready is Best’이다. 이 말은 준비가 최고라는 말로 테니스 게임에서 상대방이 공을 칠 때 자신은 스플릿 스텝(Split Step)이란 준비 동작을 해야 한다. 이것을 하면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상대방의 볼이 잘 보여 정교한 샷을 구사할 수 있다.셋째 ‘Simple is Best’이다. 이 말은 단순함(간결함)이 최고라는 말로 테니스 포핸드 스트로크를 할 때 테이크 백을 간결하게 하는 것과 발리 시 임팩트를 간결하게 하는 것이 정확성과 파워를 높여주게 된다.우리 인생이나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일상적인 루틴(Routine) 활동과 더불어 성장을 위한 프로젝트(Project)의 연속이어야 한다. 프로젝트는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정 기간 수행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도 SBS가 통한다.첫째 학습(Study)이다. 프로젝트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학습을 통해 습득하고 이해해야 한다. 또한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둘째 준비(Be Ready)다. 프로젝트 수행 단계는 준비, 실행, 마무리로 이루어지는데 준비는 수행 단계 중 가장 첫 단추로 준비를 얼마나 잘하는가가 성공의 열쇠가 된다. 충분히 준비하지 않으면 예기치 않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프로젝트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셋째 단순화(Simple)이다. 프로젝트의 마무리 단계에는 주로 보고서 작성과 결과 발표로 이루어진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시간이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에 보고서는 단순하게 작성하고, 결과 발표는 간결하게 핵심을 전달해야 한다.게임은 외면의 게임과 내면의 게임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상대와 경쟁을 하는 경우가 외면의 게임이라면, 자신을 극복하려는 경우는 내면의 게임이다.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내면의 경기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나 자신과의 게임에서 SBS를 실천하여 즐기는 게임을 하고 인생 고수로 진정한 승리자가 되길 기대해 본다.

2024-05-19

국회가 민주주의의 꽃이 되려면

유영희 작가 작년과 재작년 두 해에 걸쳐 내가 사는 지방 의회에 의정 감시단으로 활동했다. 다음 해 예산을 심의하는 자리였는데, 질문도 잘하고 대안도 제시하는 의원이 있는 반면, 예산 계획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질타만 하는 의원도 있었다. 의장의 태도도 회의 진행에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의장이 균형을 잡아야 회의가 원만하게 진행되고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작은 지방 의회에서도 의장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국회의 운영을 책임지는 국회의장의 자리는 말할 것도 없겠다. 매일 참석한 것은 아니지만 뜻깊은 경험이었다.지난 16일 더불어민주당에서는 22대 1기 2년 임기를 수행할 국회의장 후보로 우원식 의원을 선출했다. 정식 국회의장 선출은 6월 초 국회 개원 후 이루어지므로 지금은 후보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사실상 국회의장이 되는 셈이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선택에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그런 와중에 투표 4일 전, 후보로 나선 정성호, 조정식 두 의원이 추미애로 단일화한다며 갑자기 사퇴하여 국민의 빈축을 샀다.그렇게 추미애 국회의장이 확실한 줄 알았는데 뜻밖에 우원식 의원이 후보로 선출되어 논란이 가중되었다. 이미 4월 29일 여론 조사에서도 추미애 국회의장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예상 밖의 결과에 추미애 강경 지지파들은 당심이 민심을 저버렸다며 탈당까지 하는 등 반발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반대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하는 입장도 있다. 최다선 연장자가 국회의장을 맡았다는 관례를 금과옥조로 받든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하기 어렵다는 말도 이들의 말은 맞다. 우원식도 5선이나 한 국회의원이고 나이는 추미애보다 한 살 많으니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추미애 의원의 강성 캐릭터 때문에, 팽팽한 여야 대치 상태의 현 정국을 잘 이끌어갈지 의문을 가진 사람도 많다.국회의장이 기계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협치 능력은 중요하다. 우원식 후보의 과거 행적을 보니, 2017년 당시 원내대표였을 때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를 인준하는 자리에 협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국민의힘 당색이었던 초록색 넥타이를 매자고 주문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반면, 추미애 의원은, 6선이라고 해도 직전에 의원은 아니어서 불리한 점도 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동의하는 등 예측하기 힘든 모습도 보여 불안하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무엇보다 진행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가 중요하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때 후보 단일화를 한 적이 몇 번 있다. 처음부터 단일화를 염두에 두고 중도 사퇴를 작정하고 출마한 사람도 있었다. 어느 당이라도 이런 행태를 더 이상 국민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같은 당 안에서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이 안 되었다고 탈당한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의회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국회의장 후보로 선출된 우원식 의원에게 기대해본다. 임기 동안 국회의장으로서 민주주의 원칙을 실천하기 바란다.

2024-05-19

국정쇄신을 위한 대통령의 인식 변화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지난 4·10 총선에서 집권 여당의 완패 이후 국정의 쇄신 요구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선거 결과는 윤석열 정부의 2년간의 종합적 평가인 셈이다.민주당과 야권은 여세를 몰아 국정의 총책인 대통령의 국정쇄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국정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인식의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행동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생각이 변해야 태도와 행동의 변화가 따른다고 한다. 총선 한 달 후인 5월 10일 갤럽의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24%에 머물고 67%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전야의 30여%의 지지율에도 못 미치고 중간평가에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결과이다. 그러한데도 총선 직후의 국무회의 시 대통령의 모두 발언이나 5월 9일 대통령의 취임 2주년의 기자회견에서도 대통령의 인식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흔히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입증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정의 난맥상과 그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국정쇄신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먼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자신이 추진하는 국정의 방향은 여전히 옳다고 인식하는데 문제가 있다.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어퍼커트 세레머니는 대선후보의 자신감의 상징이 되었으며 선거전에서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검찰 총장직 사퇴 후 몇 달 후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취임 초부터 매사에 자신에 차있는 듯했다.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는 마음먹은 바를 끝까지 관철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 간주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신감은 남의 말이나 측근의 말을 듣지 않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대통령이 국정방향은 옳은데 국민이나 유권자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와 궤를 같이한다.고물가와 민생문제, 균형추를 잃은 외교 문제, 의사 증원과 의료 대란, 특검 등 법률안 거부권 행사와 의회 경시 등 수많은 실정이 총선 참패를 자초하였다. 대통령이 여전히 국정 방향만은 옳다는 주장은 결코 국민적인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지난 2년간 대통령은 야당지도자뿐 아니라 언론과도 소통을 멀리하였다. 대통령은 이재명 대표와는 범죄 피의자라는 명분으로 만나지 않았다.야당의 지도자가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것은 사실이지만 형 확정 시 까지는 상대를 야당 대표로 인정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는 검사시절의 인식을 탈피하지 못한 결과이다. 필자는 본 란을 통해 여러 번 양자의 빠른 회담을 촉구한 바 있다.한편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자회견마저 회피하였다. 취임 초기의 도어스테핑도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기자들의 갑작스런 질문이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하다. 2022년 8월 취임 100일 특정 보수 언론과의 대통령의 회견도 국정 선전만으로 일관하였다. 지난 총선 패배 후 대통령은 이재명 대표와의 4·29 영수회담에 이어 오랜만에 5·9 기자회견도 가졌다.영수회담이나 기자회견이 대통령의 불가피한 방어적 선택일 뿐이다. 대통령은 소통 공간을 확대해야 국정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인식전환이 시급하다.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과 당정의 관계도 수직적 구도로 인식하고 있다. 대통령은 취임 후 공직뿐 아니라 당 대표선임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대선의 공로자 당대표 이준석은 성폭행범으로 몰려 당을 떠났다. 나경원, 안철수 역시 당직에서 배제되었다. 지지율이 최하위였던 친윤의 김기현만이 당 대표로 발탁되었으나 총선 전 사퇴하였다. 취임 2년이 지났지만 반윤 세력은 당정에서 여전히 배제되고 있다. 내각과 당은 용산 대통령실의 상명하복의 관계만 유지될 뿐이다. 정권 출범 후 황우여 비대위원장까지 5차례의 비대위 체제는 이를 잘 입증한다. 지난 총선 전야의 한동훈 비대위는 전열을 정비할 겨를도 없이 선거에 참패하고 말았다. 대통령의 눈치만 볼 수밖에 없는 당정 수직관계는 당의 자생력만 가로막고 있다. 대통령에게 직언하기 어려운 구도 하에서 당심은 민심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정당 민주주의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변화 없이는 이러한 고질병은 치료될 수 없다.대통령의 인식의 변화만이 국정의 쇄신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현재 20%대의 지지율로는 국정의 동력을 도저히 회복할 수 없다.대통령은 ‘경기중이지만 후반전의 전광판’을 자주 보아야 한다. 22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대통령의 잔여 임기 3년보다 훨씬 길다. 대통령의 레임덕은 이미 시작되었다.여소 야대의 정치구도 하에서 윤석열 정부의 생존 전략은 결국 협치이다. 대통령은 다수 야당이 마련한 법률안에 대한 잦은 거부권 행사만으로 문제를 풀 수 없다. 민주당과의 협력 없이는 원하는 법안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는 상황이다. 지시, 명령, 오만, 독선의 리더십만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대통령은 심기일전하여 대선 시 공약인 ‘원칙과 상식’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자주 노출되는 격노의 정치는 자승자박의 정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거대 야당과의 협치는 대통령의 인식 변화에서 시작한다. 대통령이 생각과 인식을 바꾸면 국정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2024-05-19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거론하기 겁난다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란 지구 생태계가 먼 미래에도 현재대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제반 환경이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구 생태계의 미래 유지 가능성’이다.이 용어는 로마클럽의 1972년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란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이 말은 지구 생태계가 미래에도 과연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지난 2월 8일 영국 BBC 방송은 지난 1년간 평균 기온 상승 폭이 산업화 이전과 비교했을 때 1.5℃를 넘어선 것으로 관측된다고 보도했다. 이런 뉴스를 접하고 이제 더 이상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두려워진다.산업화 이전(1850∼1900년) 보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1.5℃ 상승하는데 남은 시간을 가리키는 동대구역 광장의 ‘기후 시계’는 오늘 현재 ‘5년 74일’을 가리키고 있다. 1.5도까지 남은 시간이 ‘5년 74일’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기후 시계의 수치가 무색하게 지난해 벌써 1.52℃를 넘어섰다고 한다. 1.5℃라는 터닝포인트를 넘으면 기후재앙이 걷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고도 무력하게 한다.인류가 어떻게든 2050년까지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에서 억제하고자 하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을 비롯한 온갖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봄이 되면 목련 피고 개나리 피고 벚꽃 핀다는 꽃 피는 룰이 이제 깨졌다. 지난 봄에는 세 가지 꽃이 동시에 피었다. 작년에 사과꽃이 너무 일찍 피었다가 냉해를 입어 지금 사과 값이 금값이 되었다. 올해는 온·냉해를 입은 참외가 금값이 된 현실은 기후 이변으로 겪는 이상 기온 현상의 한 본보기다. 기후 이변은 이제 지금 나와 함께 있다.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모인 IPCC(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의 2000여 명의 기후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앞으로 100년 이내에 지구 생물종의 70%가 대 멸종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대멸종에 포함된다고 한다.우리는 꿀벌의 갑작스러운 떼죽음과 뉴스에서 각종 생물종들의 멸종 소식들을 자주 들으며 살고 있다. 멸종에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독일은 기후재앙 극복을 위해 탄소중립 방안으로 탈원전부터 추진했는데, 탈석탄발전부터 안 했다고 비난받고 있다.미국은 부시가 교토의정서를 탈퇴하고 트럼프가 파리기후변화협약을 탈퇴했다. 그러나 바이든이 취임한 후 곧바로 파리기후변화협약에 복귀하고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를 제정한 뒤 탄소중립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이끌어냄으로써 인플레이션도 잠재우고 ‘기후산업’이라는 엔진을 통해 새로운 성장시대를 구가하고 있다.EU도 유럽판 IRA를 제정해 미국을 뒤따르고 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우며 막대한 이산화탄소를 내뿜어 지구의 골칫덩어리로 비난받던 중국도 재생에너지 생산 확대를 통해 에너지의 외부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에너지 안보에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이제 중국은 세계 최대 재생에너지 설비를 갖춘 국가가 되었다. 2060년 탄소중립을 선언한 중국은 오히려 2050년에 탄소중립을 달성할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하고 있다.우리나라는 문재인 정권 시절인 2018년 삼척에 210만kW 석탄발전을 허가하고 원자력 발전은 폐기하는 독일 방식을 따랐다. 그런 민주당은 지난 총선 공약으로 2040년까지 석탄발전소 완전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윤석열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목표 30.2%에서 21.6%로 축소하는 등 세계 조류에 역행하며 원자력에 매진하고 있으나 원자력은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들뿐더러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전환정책과는 거리가 멀다.문·윤 두 정권의 정책적 오류와 헛발질은 고스란히 우리나라 산업의 미래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산업계 또한 재생에너지 중심 에너지전환이라는 세계 조류와는 담쌓고 딴 방향으로 가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에너지전환! 화석연료와 완전히 단절하고 재생에너지로 에너지를 대체하고자 하는 시대적 조류에 눈 감은 정부와 산업계, 그리고 그런 현실에 함께 눈감은 국민을 생각하면 미세먼지로 가득한 굴에 갇힌 듯 숨만 막혀 온다.어떻게 이 환란을 벗어나 다시 한번 지속가능성을 논의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희망할 수 있을까?이런 보도가 있다. 국내 태양광 신규 설치용량이 2021년 4.2GW에서 2022년 3.0GW로 2023년엔 2.5GW로 줄었는데, 아마 전 세계에서 태양광 설치량이 줄어드는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일 것이라고.2020년대 전 세계에서 산업, 제조업 역량이 가장 뛰어난 국가가 대한민국이다. 에너지 전환에 당장 뛰어들면 가장 효율적으로 재생에너지로 에너지전환을 선도할 수 있는데도 정치지도자들의 오류와 무능, 산업계의 무책임한 안주와 안일함으로 인해 시대 조류를 역행하며 점점 세계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지속가능성을 거론하기가 정말 두렵다.

2024-05-19

스승, 선생, 교사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이번 5월 15일은 부처님 오신 날과 스승의 날이 겹쳤다.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이며, 제자들로부터 작은 꽃다발이나 손편지 등을 받으며 활짝 웃어야 하는 날인데, 위대한 스승이신 싯달타 부처님 탄신일에 같이 쉬게 되어 축하 받지 못해 섭섭하였을 터이다. 그런데 ‘휴일과 겹쳐 오히려 좋다. 학교에 있었으면 불편했을 텐데’라는 반응도 있다. 축하받을 날에 교단에 서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는 말은 요즘 부쩍 교권 추락이니 교권 침해라는 일들이 학생 인권 보호라는 주장과 서로 엉켜서 가르치는 일이 ‘보람과 희망’을 느낄 여유를 주지 않는 탓이겠다. 작년 서이초등 교사 사망 사건 이후에도 학부모의 교권 침해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우려도 있고 20~30대 젊은 MZ세대 교사들에게 ‘교단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가고 있다고 한다.가르치는 사람을 스승, 선생 또는 교사라고 부른다. 스승은 ‘제자를 가르쳐 이끌어 주는 학문 또는 기예가 높은 사람’으로 가장 높임말이며, 사부(師傅), 존사(尊師)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선생은 옛날에는 학예에 뛰어난 명인들의 존칭이었다. 그런데 ‘먼저 태어나다’는 말이니 먼저 태어나면 많이 배워 나이 적은 사람을 가르쳤다는 의미일까? 중국어도 라오시(老師), 늙은 스승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성 또는 직함의 뒤에 붙여 존대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으니 옛날 임금도 두려워했던 선생의 의미는 퇴색한 듯하고 힘이 드는 직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교사(敎師)는 각급 교육기관에서 일정한 자격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를 칭하는 말이지만 요즘 일반적 의미로는 ‘평교사’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이렇듯 가르침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교원(敎員)이란 명칭이 노동이라는 말과 합치면 명예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선생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직업’이고 스승 또한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것에 삶의 지혜도 알려주는 존경받는 인물이니만큼 국가의 동량을 기르는 중차대한 업무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선생이 바로 서면 교육도 바로 서고, 교육이 바로 서야 나라도 바로 서고 굳건해진다. 사범대학의 사범(師範)은 참된 스승이 되어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라는 것이고, 교육대학은 교육(敎育) 즉, 효를 가르치기 위해 매를 들었다가도 가슴에 품어주는 사랑을 배우라는 곳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밀어준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처럼 가르침의 어려움만 기억하지 말고 인생을 배운다는 마음으로 교단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서울교육청의 ‘보직 교사직’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싫다’가 약 80%이며 과중한 업무와 책임, 낮은 처우(보직, 수당)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으니만큼, 교직 만족도가 낮은 청년 교사의 지원책도 강구되어야 하고, 교육자로서의 권리와 권위를 세워주고 교사를 존중하는 문화를 이끌어야 한다. 사(士·師·事)자가 붙은 직업 중에 의사(醫師)는 스승의 뜻이 있다. 의대 정원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여 스승의 옳은 직무를 다하길 바란다.스승의 날에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당선 감사 인사 현수막은 여러 군데 걸려있지만 스승에 대한 감사 현수막은 거의 보이지 않아 섭섭하다.

2024-05-16

5·16과 5·18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어제가 5월 16일이고 내일은 18일이다.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정변이 있었고,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에서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지금은 5·16을 쿠데타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자를 혁명으로 후자를 폭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형식상으로 볼 때 5·16은 성공한 쿠데타였고 5·18은 진압이 되었으니 실패한 셈이었다. 그 두 사건에 대한 역사적·객관적 평가는 관련 당사자들이 아직도 일부 생존해 있고 논란이 없지 않아 진행 중인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허정내각과 개헌을 거쳐 장면내각이 수립되었지만 국정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10개월 동안 무려 2000여 건의 데모가 발생하고 연인원 100만 명이 넘게 가담을 했다. 매일 7∼8건의 데모가 일어난 셈인데,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국민학생들의 데모가 있는가 하면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경찰들이 데모를 했다. 심지어는 데모를 그만하라는 데모도 있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언론매체들도 사회혼란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어난 것이 5·16 군사정변이었다. 박정희 소장과 육사 출신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로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결성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발표한 ‘혁명공약’은 대강 이러했다. 반공을 국시로 하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것, 국가 자주경제를 재건하고 민생고를 해결한다는 것, 통일을 위한 실력을 배양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후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위의 공약들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평가된다.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과 노태우 9사단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 사태에 반발해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항쟁을 한 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시위가 격해지자 투입된 군 병력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생기고, 격분한 시위 군중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5·16과 5·18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조사와 자료와 평가가 산적해 있지만, 아직은 관련·이해 당사자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는 상태여서 주장과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역사는 격류도 있고 소용돌이도 있는 강과 같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온갖 것들이 섞여들고 부침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을 겪은 세계 최빈국이라는 초라한 강줄기가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대하가 되었다. 더 이상 좁은 틀에 갇혀 아옹다옹할 게 아니라 보다 원대한 시야로 역사의 향방을 통찰해야 할 때이다.

2024-05-16

포항경주공항 국제선 취항, 준비할 때다

경북도와 포항시, 경주시, 한국공항공사 포항경주공항, 경북문화관광공사 등 5개 기관은 지난 14일 경북도청에서 모임을 갖고 2025 APEC 정상회의 경주유치 지원과 포항경주공항 국제선 운항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협약의 골자는 APEC 정상회의 경주유치 지원과 포항경주공항의 국제선 부정기편 취항에 협력하고, APEC 각국 정상회의 방문단의 안전하고 원활한 국내 여행과 입국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포항경주공항의 국제선 취항은 규정과 절차에 따라 진행돼야 할 문제지만 APEC 정상회의 경주유치가 성공한다면 반드시 허가돼야 할 사안이다. 현재 김해국제공항과 대구국제공항에서 부담해야 할 복잡한 공항업무를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상악화와 일정 변경 등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 외국인 방문객에 대한 서비스 지원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2025 APEC 정상회의에는 외국인 관광객 4만여 명을 포함 국내외 1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재 서울과 제주 등 국내로만 운항되는 포항경주공항의 국제선 취항은 국내외 여행객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필수라 할 수 있다.포항경주공항은 지난 2022년 포항공항에서 포항경주공항으로 명칭을 바꾸고 공항 활성화를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 울릉도 공항이 개항되면 위치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포항경주공항은 항공수요 측면에서 가장 많은 혜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무엇보다 지방공항의 활성화는 지방시대를 열어가는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APEC 정상회의가 아니더라도 포항경주공항은 부정기편 운항을 통해 도시 국제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경북도가 국내선 전용공항에 국제선 부정기편 취항 허가를 중앙정부에서 시도지사 승인으로 변경해줄 것을 건의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번 기회에 제도 개선이 있어야 한다.지금은 도시와 도시간이 연결되는 국제화시대다. 지방공항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관심과 제도개선 의지가 중요하다.

2024-05-16

‘메타버스산업의 産室’로 주목받는 경북도

경북도가 최근 정부공모사업인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실증 기반 구축사업’에 최종 선정돼 국비 100억 원을 확보했다. 국비는 관련 중소기업의 마이크로 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기술 지원과 성능 검증, 제품 상용화를 지원하는데 쓰인다. 마이크로 디스플레이는 크기가 1인치 이하로 작지만, 수십에서 수백 배 확대된 큰 화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메타버스(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세계) 디바이스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소비전력이 적어 디지털 카메라, 캠코더, 동영상 안경 등 다양한 제품에 활용된다.구미에 있는 ‘XR(확장현실)디바이스 개발지원센터’를 중심으로 한국광기술원, 경희대, 충남·충북테크노파크가 이 사업에 참여한다.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면 도내 350여 개의 디스플레이 관련 기업이 메타버스 시장 진출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구미지역을 중심으로 올레도스(OLEDoS) 디스플레이 사업 진출을 원하는 중견·중소기업을 지원해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반도체 등 다양한 산업과 융·복합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고 했다.최근들어 TV·스마트폰 등 기존 주력 제품의 성장세가 주춤해 지면서 확장현실(XR)·증강현실(AR)·가상현실(VR) 기기시장이 새로운 미래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올레도스 기반 마이크로 디스플레이는 빠른 응답속도와 높은 색 순도를 갖는 특성이 있어 각종 혼합현실 기기의 영상표시 소자(素子)로 인기를 끌고 있다. 올레도스는 유리 기판 대신 실리콘 기판 위에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증착해 만드는 디스플레이다. 기존 디스플레이보다 더 얇게 만들 수 있으면서도 해상도와 색상 표현력을 향상시킬 수 있어 확장현실 기기에 맞춤형 기술로 꼽힌다.이 사업에는 올해부터 2028년까지 5년간 148억원이 투입된다. 경북도가 이 사업에 성과를 낼 경우, 구미지역에 집중된 관련 중소기업 상당수가 전망이 밝은 반도체 융합 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비 분야로 사업 진출 기회를 얻을 수 있어 기대가 크다.

2024-05-16

윤 대통령, 소신과 뚝심이 필요하다

홍석봉 언론인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이 30% 초반 대에서 게걸음하고 있다. 부정이 긍정 평가보다 두 배가량 높다. 윤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하는 등 자세를 낮췄다. 여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지역 의료 체계 구축’, ‘저출생 대응책’ 등 정국 타개책을 내놨지만, 국민은 심드렁하다.윤 대통령은 경직된 여야관계, 꽉 막힌 국민소통 등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며 국정 추동력을 잃고 있다.윤 대통령이 외쳐온 4대개혁이 국민 저항에 부딪혀 주춤하고 있다. 의사 정원 확대를 두고 의료계와 마찰을 빚고 있고 연금개혁은 지지부진하다.여기에 민주당은 특검과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까지 거론하며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 탄핵까지 들먹인다.윤 대통령이 최근 정치 상황과 이익 집단의 반발 등에 굴하지 않고 2년 전 대통령선거 당시 국민에게 약속한 개혁과제를 묵묵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교육·노동·연금·의료 개혁 등 4대 개혁을 차질없이 추진하겠다는 선언이자 다짐이었다.윤 대통령은 “개혁은 많은 국민에게 이롭지만, 또 누군가는 어떤 기득권을 뺏긴다”면서 “이로움을 누리게 되는 사람들은 별로 인식을 못 하지만 뭔가를 빼앗기는 쪽에서는 정권 퇴진 운동을 하게 된다”고 했다. 표류하는 의료개혁과 낮은 국정지지율에 답답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치권 일각에서 지지율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와 시대적 과제 해결에 집중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취임 초 “개혁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 정치적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공언했었다.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국민 70%의 반대에도 연금개혁을 밀어붙였다. 그는 “단기적인 국내 여론과 국가 이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국익을 선택하겠다”고 했다.애초 국민연금은 ‘낸 돈에 비해 더 받는’ 구조로 설계돼 미래세대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낸 돈보다 덜 받아야 영속성이 있다. 그런데도 공론화위 결론은 반대로 나왔다. 의정갈등도 마찬가지다. 방법엔 문제가 있었지만,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추진하던 의료개혁이었다. 의정갈등은 장기화하고 있다. 국민 피로감만 높아지고 있다.개혁은 기득권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해집단의 양보 없이는 어렵다. 반발은 불가피하다. 이제 겨우 선진국 문턱을 넘어섰나 했는데 우리 경제가 정치·사회의 혼돈으로 다시 뒷걸음치는 모양새다.국민의힘은 22대 총선에 참패했다.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금, 윤 대통령은 국민에게 점수 딸 일도 별로 없어 보인다. 더는 점수를 잃을 일도 없을 듯하다. 방향은 정해졌다. 4대개혁은 국가 과제다. 국가 백년지대계를 위해서도 미룰 수 없다.윤석열 대통령은 더 이상 지지율에 연연하지 말고 4대개혁을 임기 내에 마무리, 후대에 평가받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윤 대통령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소신과 뚝심이 필요하다.

2024-05-16

무자식 상팔자 시대

우정구 논설위원 명심보감에 “하늘은 사람에게 저마다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나게 한다”(天不生 無祿之人)는 말이 있다. 지금보다 먹을 것이 훨씬 부족했던 시절에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산아제한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이라 태어난 자식을 소중히 잘 키워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면 좋을 듯 하다.유교 문화가 널리 퍼졌던 동양권의 나라에서는 부귀다남(富貴多男)이 최고의 행복 가치다. 잘먹고 잘살며 자식이 많아야 하며, 특히 아들이 많으면 다복하다고 생각했다. 대가족 중심사회의 핵심인 혈연중심 사고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보인다.우리나라는 식량문제 해결을 위해 1960년대부터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했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구호가 등장했던 시절이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자녀 둘만 낳자”고 했으며 1980년대는 한 자녀 정책으로 바뀌었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란 구호가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저출산국으로 전락한 지금의 우리 처지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은 자식이 없어 오히려 걱정이 없어 편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과 맥이 통하는 말이다. 자식이 많으면 걱정으로 편한 날이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딩크족이란 부부가 맞벌이하며 자식을 의도적으로 가지지 않는 가정을 말하는데 1980년 후반 미국에서 등장한 가족 형태다. 우리나라에도 번져 저출산국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하는 형태다. 최근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25∼39세 맞벌이 부부의 무려 36%가 무자녀란 통계가 나왔다. 무자식 상팔자 시대가 온 것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5-16

포항시 코스트코 유치에 다 걸었나? 코스트코의 간보기인가!

이부용 경제부 포항시가 미국계 창고형 대형 할인매장 코스트코 유치를 놓고 내부적으로 코스트코 외의 다른 할인매장에 대한 비교 분석조차 실시하지 않아 지역 현안에 대해 안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 실제로 이마트 트레이더스, 롯데마트 맥스 등 다른 창고형 할인점과 비교·분석한 자료가 있냐는 지적에 포항시는“각 마트별 비교 분석자료는 없다”고 답했다. 코스트코 유치 외에는 다른 할인점 유치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포항시 관계자는 시민들이 더 선호하고 지역에 적합한 기업을 유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포항에 있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도 지금 축소하고 있다. 장사가 그만큼 안 된다는 얘기”라며 “포항에 이마트가 두 군데 있다. 상식적으로 시장성이 있었으면 이마트 트레이더스가 벌써 들어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또한“기존에 있는 소매점도 장사가 안 되면 대형 마트 같은 경우는 더 안 되지 않겠느냐”며 “기본적으로 창고형 마트는 물건이 저가여서 인구가 100만 명 이상 정도 돼야 수익이 나온다”고 덧붙였다.지자체가 유치 기업의 수익을 걱정해주는 것은 상생차원에서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기존 대형마트도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코스트코 유치는 더 어려운 일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6월 중순쯤 코스트코 관계자들이 객관적인 여러 데이터를 분석해서 검토를 할 것”이라며 “공무원이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 포항시의 입장은 대형 할인 매장을 적극 유치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실제로 시 관계자는 “시에서 특정 창고형 마트를 지정해 들어오라 마라 할 권한은 없다”며 “입점 조건이 되고 시민들의 요구가 있으니 한번 검토해 달라고 코스트코 사장단이 내방했을 때 요청한 상태”라며 “입점 가능성 여부는 실무진이 와서 검토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다만, 어떤 창고형 마트든지 조건이 맞으면, 허가 기준에 맞춰 살펴볼 것이라고 했다.마트별 비교 분석이나 설문 조사 등도 실시하지 않고 무작정 진행하는 것이, 포항시가 제대로 된 창고형 마트를 유치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한편 코스트코는 호남지역에서 처음으로 인구 26만의 중소도시 전북 익산시에 매장을 내기로 했다. 익산시는 지난 8일 코스트코코리아, 전북특별자치도와 점포 개점을 위한 투자협약(MOU)을 체결했다. 왕궁면에 있는 약 3만7000㎡ 부지에 800억원을 들여 2026년 개장할 예정이다./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

2024-05-15

개팔자 상팔자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차 한잔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뒷자리에서 한 30대 중반쯤 된 여성 네 명이서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들어보니, 그들 일원 중 그날 참석 못한 한 명이 개를 키웠던 모양인데, 그 개가 죽게 되어 모두에게 견(犬) 장례식 일정을 알려온 것이었다. 독신 여성이 반려견과 함께한 세월이 오래니, 가족과 같을 테고, 멤버의 경조사니 당연히 참석해야 하는데, 부의금 금액부터 일정 조율을 어찌할까에 대한 내용이었다.근데, 마침 그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는데, “엄마, 나 지금 대개 중요한 이야기 중이니까 나중에 전화해, 끊어”하고는 가차 없이 확 전화를 끊고는 하던 대화를 마저 이어가는 게 아닌가! 개의 장례식 참석 및 부의금에 대한 논의가 부모의 전화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아…. 세상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우리말에, ‘개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새 산책하다 보면, 개가 걷기 싫다는 시늉만 하면, 바로 달랑 안고 가슴팍 안으로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는 풍경하며, 자칫 성가시게 짖었다는 이유로 발로 차려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동물학대죄로 고소당하는 불상사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옛날에는 섬돌까지만 오를 수 있었지, 감히 마루나 방까지 들어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음식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만 먹은 데다, 정월대보름에는 개보름쇠기라 하여 종일 굶기도 하는 등, 개는 그야말로 네 발 달린 짐승이었을 뿐이었는데.물론 최자의 ‘보한집’에는 주인이 잠든 사이에 온몸에 물을 묻혀 불을 끄고 주인의 생명을 구한 의견(義犬) ‘오수의 개’ 이야기가 전하고 있고, 관련하여 선비들 사이에선 개 전기를 짓는 풍속도 생겨날 만큼 개의 충성심을 찬양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집지킴이이자 충(忠)의 상징으로서 개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서 숭앙받고 그러지는 않았다.그러나 요즘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안아주지 않으면 어리광을 부리거나 떼쓰기도 하고, 사람보다 먼저 침대로 버젓이 가 있는 경우는 물론, 심지어 개가 힘들까봐 멀리 사시는 부모님을 뵈러 가는 일정이나 장거리 여행을 취소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사람 때문에 개를 못 보는 경우는 잘 없어도, 개 때문에 봐야 할 사람을 못 보거나 하는 일들이 이제 다반사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개팔자 ‘상팔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개밥 신세, 개망신, 개살구 등 안 좋은 말에 붙곤 한 ‘개’ 자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유행어처럼 사용되는 ‘개똑똑’, ‘개쩐다’, ‘개이득’ 등이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이처럼 ‘개’가 긍정적인 의미를 획득했다고 해서, 견권(犬權)이 인권(人權)보다 우선시 되어서야 하겠는가.바야흐로 신록의 계절 5월이다. 이달은 근로자의 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처럼 정말 의미 깊은 날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의미깊은 달에는, 비록 개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위안을 주고 기쁨과 행복을 주는 반려동물이더라도 근로자를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고, 은사님들을 떠올리며 따뜻한 정을 나누는, 즉 사람을 우위에 두는, ‘개똑똑’한 사람이 되어 보면 어떨까 싶다.

2024-05-15

손주들과 포항나들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어디로 놀러갈까 물으면 손주들은 십중팔구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포항을 자주 가게 된다. 포항은 바다뿐 아니라 의외로 즐길 거리가 쏠쏠하다. 지난달 내내 주말마다 손주들과 포항엘 갔다 왔다. 예전 아이들이 더 어렸을 적엔 해수욕장의 모래장난 정도였다. 몇 년 전 생긴 스페이스워크도 흥미로워 했다. 최근엔 줄이 길어 포기하고 멀리서 보는 야경으로 대신했다. 포항의 핫스팟 죽도시장은 갈 수 없었다. 손주들과의 포항행에서 죽도시장을 끼울 수 있는 건, 손자 건이 생선회에 입문한 이후였다. 포항여행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우리 부부와 아들내외, 그리고 손주 둘을 데리고 오후 느지막하게 출발하여 회만 먹으러 포항에 간 적도 있다. 송도바닷가에 새로 생긴 수협활어회센터가 조용하고 주차장도 넓은데다가 싱싱한 회를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어서 꽤 괜찮았다.몇 주 전엔 우리 부부가 손주 둘을 데리고 조손동행 포항을 다녀왔다. 손주들에겐 죽도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 아쿠아리움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물속에 손을 집어넣으려 해서 상인들에겐 다소 난처했지만 구경하는 아이들을 말릴 수도 없었다. 횟집골목을 누비며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큰 대야에서 펄떡이는 살아있는 물고기를 실컷 구경하고 나서야 단골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싸고 맛있는 회를 먹고, 전통시장 홍보행사기간이었던가 전통시장상품권을 되받아 얻어서 건어물과 주전부리도 살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죽도시장 건너편에 있는 포항함체험관에 가서는 배 안 곳곳을 오르내리고 누비며 즐거워했다. 손녀 린은 뱃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더니 느닷없이 애국가를 불렀다. 학교 입학해서 배운 모양이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지켜보았다. 진지한 표정과 꼿꼿한 자세로 4절까지 부르는 아이를 보며 나도 어느새 덩달아 엄숙해지고 말았다. 다소 날씨가 쌀쌀한지라 바닷가의 모래장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남편의 제안으로 장기읍성엘 올랐다. 건은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을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만리장성 아니냐며, 성 둘레를 완전히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조심하기를 당부하며 성벽 위를 조손이 손잡고 걸었다. 린은 할아버지와 손잡고 걸으며 “에효, 세상은 넓고도 힘들다”를 연발하며 숨차했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잡을 땐 천상 여자애다.지난 주 토요일, 건을 데리고 포항엘 갔을 땐 영일대해수욕장의 영일대를 보여주고 싶었다. 바다 위에 옛날 궁궐 같은 집이 있다고 했더니 용궁이냐며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정작 누각엔 한 번 오르내리는 것으로 흥미를 못 느낀 듯했다. 오히려 영일대 가다가 만난 마술버스킹 공연을 보며 신나고 우스워했다. 마술사가 벗어놓은 모자에 꼭 돈을 넣어주고 싶다고 해서 거금 만원을 지갑에서 꺼냈다.어제 건이 로봇과학 책을 보더니 로봇박물관에서 실제로 로봇을 보고 싶단다. 검색했더니 포항에 로보라이프뮤지엄이 있었다. 바로 가자고 하는 걸 겨우 주저앉혔다. 오는 주말에 가기로 예약했다. 아이들에게 포항은 꽤나 다양한 흥밋거리의 도시다.

2024-05-15

도심 속 물길, 포항운하

하늘이 맑고 바람이 잔잔하던 어느 봄날, 작은 유람선이 부두를 출발하여 인공적인 물길에 몸체를 들이밀었다. 물길을 가르며 천천히 나아가는 유람선에서 내다본 양옆의 전경은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게만 느껴진다. 운하의 좁은 폭 때문일까, 일상을 영위해가는 송도 사람들의 생생한 표정 때문일까, 오랜만에 타보는 유람선의 흔들림에 마음도 흔들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녹아내릴 듯 쏟아지는 바닷가의 햇살이 따스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녹진하게 풀어져 버린 마음에 포항 송도의 전경은 색다른 생생함으로 다가왔다.포항 송도는 포스코가 포항에 자리 잡고 융성하기 이전에는 이름 그대로 ‘섬’이었던 곳이었다. 울진에서 발원한 형산강과 동해가 만나는 하구,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에 해당되는 곳 안쪽에 형성된 커다란 섬 송도는 소나무가 무성히 자라 방풍림을 이뤄 송도로 불렸다.또한 송도의 끝자락이자 형산강 하구의 동빈내항은 신라 시대부터 물이 얼지 않아 어선을 정박시키기에 좋은 장소로 활용되던 천혜의 부두였다. 이곳은 1732년 포항창이 개설되면서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함경도에 발생한 큰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창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항구로 자리를 잡아가던 포항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의 발전된 어업 기술을 들여오면서 더욱 성장한다. 많은 일본인이 포항에 자리 잡았고 풍부한 수산물을 수탈했으며, 일본인 거리까지 형성하여 불야성을 이뤘었다.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포항은 중요한 군사 항구로 이용되었다.하지만 지금과 같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다. 포항은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고 도시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근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대표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포항 원도심 일대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도심은 상업 및 주거 용지가 매우 부족해져 갔다. 포항은 형산강의 범람 피해를 방지하고 주택부족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송도와 포항내륙을 가르던 형산강 및 주변의 습지대를 매립하는 하천직선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후 송도는 섬이 아닌 내륙으로 편입된다.1970년대 형산강 하구에서 동빈내항으로 이어지는 작은 물길 여럿이 매립으로 인해 막히면서 매립되지 않은 동빈내항의 인근은 점점 오염물이 쌓여갔고 심각한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원도심을 떠나갔고, 원도심 일대는 뒷골목과 같은 슬럼화가 진행되었다.도시 오염의 심각성과 슬럼화, 철강산업의 쇠퇴로 인한 지역경제의 둔화 등 도시문제를 인지한 포항은 2006년 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하나의 돌파구로 시행한다. 이미 사라진 형산강의 옛 물결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지만 포항운하를 건설하여 주변의 생태환경을 복원하고, 심각한 도시 오염의 문제를 해결하고, 슬럼화되어가는 원도심을 재정비하고 나아가 관광산업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스페인 빌바오나 독일의 라인강이 근대 산업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공간을 재구축한 것처럼 포항도 비슷한 도시 공간의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다.2012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대략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길이 1.3킬로미터, 폭 13~25미터 크기의 운하가 남북으로 연결되면서 송도는 이름에 내포된 ‘섬’이란 의미를 되찾았다. 서울의 청계천이 복원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듯이 포항의 사라졌던 형산강 줄기도 그러한 복원과정을 거친 것이다.또한 포스코 전경이 훤히 보이고, 송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운하의 끝자락에 포항운하관이 세워졌다. 독특한 모양의 포항운하관에서는 포항운하가 어떻게 복원되었는지 운하전시관에서 확인해 볼 수 있고, 드넓은 바다의 향취를 카페에 앉아 느낄 볼 수도 있다.하지만 무엇보다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제일이다. 작은 유람선이 운하를 타고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고, 날씨가 좋으면 포항 앞바다까지 나가는 유람선도 확인할 수 있다. 멀리 송도의 유명한 소나무숲도 보이고, 16년만에 제 모습을 찾은 새하얀 송도해수욕장도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재생된 포항 형산강 일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포항운하를 따라 조성된 산책로와 자전거길을 달리고, 온갖 해산물의 풍성한 냄새가 가득한 죽도시장에서 상인들과 흥정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는 포항여객선터미널에서 손을 흔들고, 소나무숲으로 이어지는 송도 송림 테마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하얀 모래가 매력적인 송도해수욕장을 거닐고, 야경이 멋진 포스코의 전경을 바라본다.운하를 따라 흘러가는 유람선에서 바라본 포항의 송도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닷가의 일상과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도심의 일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

2024-05-15

색에 물들다

피귀자 수필가 오래 볼수록 더 반짝이는 것들, 새싹 새순들이 수천의 문을 열고 나와 온 세상을 물들이며 일렁인다. 엷은 연두가 물감 번지듯 땅 위를 점령하기 시작한 봄날 겨우내 거칠었던 손바닥에도 연두물이 얼비친다. 연둣빛 봄풀들과 손 맞춤을 하면 따뜻한 기운이 나긋하게 온몸으로 퍼진다. 여리디 여린 새순들이 점령한 세상, 이보다 더 큰 이벤트가 또 있으랴.연둣빛 물감을 흩뿌린 길이 다소곳이 다리를 뻗고 혈관 같이 뻗은 잔가지에도 서서히 연두 피가 돌기 시작한다. 바닐라향이 그윽한 슈크림 같이 부드러운 색 연두. 더 없이 연연한 색이다. 한때는 보라색에 물든 적도 있었다. 보라색 라일락꽃이 좋았고 파스텔 톤 보라색에 빠져 옷과 장신구도 하나둘 늘어갔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뾰족뾰족 돋아나 천지에 일렁이는 연두에 감전되듯 흠뻑 빠져 들고 말았다. 보고 있으면 귀까지 열리는 하늘의 축복 연두의 향연. 빛을 향해 뻗어가는 연두의 미소가 폭소로 변할 때까지 나이를 잊고 어느 새 봄 처녀가 된다.누구에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 연두가 정점을 찍는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긴다. 보일 듯 말 듯 여릿한 자락을 비집고 그들의 숨소리를 듣는다.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하면 천지는 놀라운 일들이 뒤따르리라. 사랑스러운 봄 들판의 향기가 살랑살랑 흘러나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고 오감이 민감하게 살아나는 봄날, 잠시 표류하던 마음도 이내 자연에 흠뻑 젖어든다.색깔에도 소리가 있다면 연두는 분명 나긋한 소녀의 속삭임이리라. 가랑비같이 가슴을 적시는 저 환한 소리들, 연두는 살랑 바람처럼 유순한 색이다. 꽃샘바람 속에서 감미롭게 살랑대다가 비비적거리는 풀잎들의 소리는 애처로워서 쓰다듬고 싶은 여인의 소리다. 귀 세우고 그 내밀한 소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연둣빛 빗장 안에 갇힌 봄이 더 사랑스럽다.봄의 무게는 연두가, 여름은 초록이 가늠한다. 날마다 조금씩 무게를 더하는 연둣빛 봄의 물결 속에서 기쁨이 넘치다가도 조바심이 인다. 노랑 빛을 머금은 연 연두가 체온이 높아져 뜨거워질수록 초록을 얼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덧씌워지는 초록의 물결 속에 연두는 녹아들고 단풍이 찾아오리니. 또 그렇게 한 해가 여물고.한때 천연 염색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애기똥풀에서 우러난 맑고 진한 노란색에 눈이 활짝 떠졌고 밤의 속껍질에선 중후한 멋이, 질경이의 초록색과 귤껍질과 치자, 보라색 양파껍질에서 우러난 노란색과 붉은색 물이 손수건과 흰색 천을 물들일 때마다 경이롭기까지 했다. 어느 날 삶은 대나무 잎에서 우린 물이 흰 명주 스카프에 스며드는데 숨이 멎을 뻔 했다. 연둣빛이 어찌나 부드럽게 곱던지. 그 후로 댓잎에서 우러나오는 맑고 엷은 연두색이 더 좋아졌다.봄의 노크 소리, 속삭임 같은 무 싹과 여린 새싹채소들은 입 속에서도 환하게 피어오른다. 그 맛은 포근한 이불처럼 혀를 감돌고 부드러운 풀과 나무가 연둣빛을 잉태한 봄을 마음껏 누리게 한다. 행복은 소소한 일상 가운데 있다는 걸 연두색으로 다시 깨친다. 혀끝에 닿는 봄풀냄새가 고향에 온 듯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수시로 변하는 그 모든 빛깔들이 아름답지만, 풀과 나무를 입고 더욱 영롱한 빛깔을 내는 연두는 튀는 색이 아닌, 말랑한 공같이 아기 피부처럼 보드라운 빛이다.무채색이던 얼마 전과 달리 연두 빛으로 물든 오늘, 어제와 오늘을 가만히 되새겨보면, 이 우주에는 온통 이야기로 가득 차있음을 느낀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갈등도 봄 앞에서는 칠흑 같은 동굴이 아니라 연두 빛이었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끝이 있고 나가는 출구가 있는. 갈등을 이겨내고 그 출구를 나서면 예전보다 더 큰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만물이 소생하는 근원의 빛은 단연 연두색이리라. 연두가 데워놓은 세상 속으로 연둣빛 명주 스카프를 두르고 소풍을 나선다. 솔바람과 스카프가 맞물려 하늘하늘 날아오른다. 보리 싹과 연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빛을 더한다. 오감을 활짝 열어 돋고, 피어오르는 연한 살결을 만끽한다. 저절로 미소가 피어오른다. 나긋한 여인 연두의 독주, 우아한 이벤트에 이어 어느새 녹음 속에 서 있다.

2024-05-15

다베이 준코, 에베레스트에 오르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이건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또는 “난 여자라서 이런 건 못해”라는 말이 우스워진 시대가 됐다. 남성 혹은, 여성만의 고유한 영역이란 이제 한국사회에 거의 없다. 금녀의 벽은 이미 무너졌다.육해공군 사관학교의 수석 입학자와 1등 졸업자 중에도 여성이 있고, 육중한 공격용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여성 장교도 생겨났다. 더불어 섬세한 감각과 미적 완성도를 요구하는 고급 요리 시장에서 주목받는 남성 요리사도 흔전만전인 세상이다.하지만, 49년 전엔 그렇지 않았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가파른 절벽에 매달리는 일, 여성이 목숨을 걸고 지구 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른다는 건 전 세계 언론이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바로 49년 전 오늘인 1975년 5월 16일. 일본의 36세 주부 다베이 준코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산에 올랐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조그만 체구와 약한 체력이 콤플렉스였던 여자. 그러나, ‘어떤 산이라도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디면 못 오를 정상이란 없다’는 다베이 준코의 신념은 “여자의 힘으론 난공불락”이라던 8848m의 세계 최고봉보다 높았다.그녀의 도전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1981년엔 몽블랑과 킬리만자로, 이후엔 알래스카의 매킨리와 남극 빈슨 매시프에도 오른 다베이 준코는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완등(完登)한 최초의 여성’으로 역사에 기록됐다.힘겨움과 고통을 이기고 끝끝내 목적한 바를 이루는 열정과 에너지를 남자만 가졌을 리가 없고, 여자만이 독점할 까닭도 없다.다베이 준코를 떠올리며 ‘양성평등의 길’을 함께 걸어갈 젊은이들의 미래에 박수를 보내고픈 날이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5-15

‘대통령 탄핵’ 남발…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그저께(14일) 서울에서 열린 25차 민생토론회에서 “개혁을 하게 되면 많은 국민에게 이롭지만, 누군가는 기득권을 뺏긴다. 뭔가를 빼앗기는 쪽은 정말 정권 퇴진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의대 증원정책에 대한 의료계 집단 반발을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지만, 야권이 최근 ‘채상병 특검법’ 등을 고리로 대통령 탄핵 여론을 조성하는 데 대한 불편한 생각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각종 선거 때마다 ‘정권 퇴진’이나 ‘탄핵’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게 “차라리 대통령이 없는 게 낫다”, “빨리 끌어 내리자”는 식의 막말이 남발된 적은 없다. 정상적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은 공개석상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탄핵 소추나 임기단축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민주당 박찬대 원내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됐을 때보다 지금이 더 심각하다”고 했고,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채상병 사망 수사자료에서 대통령실의 구체적 관여 물증이 나왔다. 수사에 대한 불법적 개입이 확인되면 그건 바로 탄핵 사유”라고 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윤석열 정부가 단행한 검찰 인사와 관련해 대통령 탄핵 수순에 들어선 것 같다고 암시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민주당은 대통령이 채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야 6당 공동 장외투쟁에 돌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탄핵연대’를 통해 과거 촛불시위와 같은 정권퇴진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탄핵정국이 현실화하면 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나 지지율로 봤을 때, 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대통령 파면은 ‘중대한’ 헌법이나 법률 위배가 있어야 가능하다. 직선제로 선출된 대통령은 민주적 정당성을 국민에게 직접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여야 정쟁(政爭)이 있을 때마다 공개적으로 대통령 탄핵을 운운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국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2024-05-15

성년의 날을 생각한다

장규열 고문 수능은 그냥 시험이다. 대입을 위한 최소조건을 견주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걸 놓고 점수발표날이면 온 나라의 언론이 만점자를 찾아 인터뷰를 하고 공부 비결과 장래희망을 물으며 촌극을 빚어왔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의과대학에서 배운 의술로 여자친구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의술은 살리는 기술이다. 물론 의술로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윤리가 있고 히포크라테스가 외친 게 아닌가. 선서의 첫머리에 ‘인류를 위한 봉사에 나의 삶을 바친다’고 새긴다. 그런데 나의 삶을 고사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았다는게 말이 되는가. 또, ‘인간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생각하겠다’면서 타인의 목숨을 끊은 의술이었다면, 수능 만점은 실패한 점수가 아닌가.의정갈등이 최고조다. 의대입학이 인기 만점이다. 의사가 돈을 많이 벌기는 하는가 본데, 의사가 되어 지켜야 할 윤리와 품격은 누가 가르치는가. 솜씨좋은 의사를 명의라 한다면, 품성 높은 의사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의학교육이 지식과 기술을 정교하게 하도록 매진하면서 생명을 높이 존중하여 의술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꼭 의술만 그런 것도 아니다. 경제학을 배워 나라경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정치가가 되어 국민에게 수다한 유익을 끼칠 수도 있지만 정략에 매몰되어 나라를 가라앉게도 하지 않는가. 모든 지식을 가르치는 길에 윤리와 품성을 가장 먼저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 보이지 않는가.마침 ‘성년의 날’이 다가온다. 5월 셋째 월요일을 기념하는 의미는 이제 성인의 나이가 되었음을 기억할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 지녀야 할 책임과 태도를 새겨주려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에 상관없이 어른이 되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소양을 깨우치게 하고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도록 기대함이 아니었을까.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의 유익을 함께 돌아보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대입현장에서 의과대학의 인기가 치솟는 현실은 윤리와 품성을 잊게 만드는 세태를 떠올리게 하여 씁쓸하다. 자본주의 세상에 돈이 필요하지만, 돈만 따라가는 성공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아닌가 하여 우려가 앞선다. 갓 스무살 청년에게 꿈을 길러주어야 하지만 꿈을 돈으로만 계산하도록 가르친다면 문제가 아닐까.상상과 창의를 떠올리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대학에 펼쳐진 전공분야의 숫자만 보아도 누군가 열정과 열심을 품고 일으켰을 분야가 수두룩하다. 세상과 이웃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과 관심의 눈길이 필요한 대목이 수두룩하다. 성년의 날을 맞은 청년들에게 의학은 물론 그 밖에도 평생을 던져 건져야 할 세상의 굽이 굽이가 너무나 많다는 걸 일깨워 주어야 한다. 수능만점이 신기하지만 누구에겐가 가능했을 점수쯤으로 여기는 여유를 가르쳐야 한다. 어렵고 힘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할 넉넉한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2024-05-15

토함산 산사태, 2년 동안 당국은 몰랐나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은 불국사, 석굴암 등이 있는 경북 경주 국립공원 토함산 일대에서 최근 2년 동안 24건의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녹색연합이 밝힌 보고서에 따르면 토함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쪽인 진현동, 마동 등과 동쪽인 문무대왕면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사태가 24곳이나 발생했다는 것. 대표적인 현장은 정상부 동쪽 사면이며 가장 큰 규모로 산사태가 일어난 현장은 문무대왕면 병곡리 일대 해발 630m 지점으로 약 2000평 규모라고 한다.산사태는 지난 2022년 9월 태풍 힌남노가 내습했을 때 집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문화유산이자 국보인 석굴암 위쪽 두 곳에서도 산사태가 발생해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계곡과 경사면에 흙과 암석이 지금도 계속 흘러내리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큰 비가 내리거나 지진 등으로 지반이 흔들리면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어 석굴암의 산사태 위험은 시한폭탄이나 다를 바 없다”고 했다.힌남노는 포항시민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태풍이다. 포항 인덕동 한 아파트단지 지하주차장에 물이 차 차량을 빼러 간 주민 7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태풍이다. 정부가 포항과 경주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안겨준 슈퍼급 태풍이다.놀라운 것은 환경단체가 이같은 사실을 발표하기 전까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전혀 손을 쓰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방치한 것인지 몰랐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언론보도 후 뒤늦게 대책회의에 나섰다는 소식이 실망스럽다.다음달이면 장마철이 본격 시작된다. 가뜩이나 이상기후로 비가 잦은 데다 기상이변에 따른 폭우까지 예상되고 있어 대책 마련이 급하다. 토함산은 소나무, 잣나무 등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침엽수가 많은 곳이라 폭우에 안전치 못하다. 당국이 서둘러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피해가 커질 우려도 있다.토함산의 안전 대진단과 피해 복구로 문화재와 주민의 안전을 지키는 항구적 대책도 이번 기회에 마련돼야 한다.

2024-05-15

빨대 신귀족

강길수 수필가 동네 공원에 핀 커다란 이팝나무 하얀 꽃이 부드러운 목화송이다. 저 흰 목화를 타서 무명을 짜, 옷과 이불을 짓는다면 이 동네 아이들이 다 입고 덮어도 남겠다.한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팝꽃이 ‘보릿고개 배고픔을 참아 넘기는 달램의 이밥’이었다니, 우리네가 지난날 겪은 고난의 삶이 고스란히 꽃 안에 스며 있다. 가슴 아리다. 지난 산업화 시기 건설현장, 공장, 실험실, 기획, 관리, 설계, 사무실, 정부 부처 등 온갖 일터에서 불철주야 피땀 흘리며 보릿고개를 물리치던 근로자들. 그들은 이팝꽃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며 오늘을 살까.70~80년대 산업화 시기 근로자들은 죽기 살기로 일해 나라 곳간을 채웠다. 그들은 ‘잘살아보세!’로 각인된 산업화 시기와 데모, 최루탄으로 얼룩진 민주화 시기의 한가운데를 온몸으로 살아낸 주인공이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를 메운 운동권 학생들에게 근로자들은 일하며 말했었다. ‘저 친구들은 부모 잘 만나 대학생이 되었는데, 하라는 공부는 않고 데모만 해대는구나. 대학 못 간 우리도 있는데! ’라고….국민이 자기 벌이로 애들 키우며 저축하고, 이웃과 서로 도우며 안전하게 사는 사회가 왜 비민주사회인가. 일찍이 링컨 대통령이 정의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는 산업화 시기가 오늘보다 더 가깝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때는 국가와 국민, 민족을 위한 잘 살기 정치였기 때문이다. 한데, 오늘날 민주화 세력을 자칭하는 자들에게는 국가와 국민, 민족이 없다. 자기와 제 편 이익에만 혈안 된 행태가 뻔히 보인다. 대수의 법칙 위반 선거결과 숫자들이 그 증거다.나라가 선진국에 오르는데 근간 역할을 해낸 근로자 눈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진정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솔직히 서민은 지금보다 산업화 시기가 삶의 형평성이 더 높았고, 자유로웠으며, 살기 좋았다. 일부 정치인들이 구금되거나 불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비민주이며 독재라는 주장은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산업화 시기야말로 나라의 진정한 민주화 시기라고 믿는다.합법적인 정권을 독재나 친일파 프레임을 씌워 반대하고 저항하며, 폭력까지 동원해 파괴하려 했던 우리 사회 민주화 운동을 근로자들은 똑똑히 보았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왜 북한과 중국 독재는 입도 뻥긋 못하면서, 동맹국 미국을 극렬히 반대하는 것일까. 일은 않고 무슨 단체에 빌붙다가, 슬그머니 민주화에 숟가락 얹은 무리가 나라 곳간 채울 생각은 없고, 빼먹을 궁리만 한다.5·18이나 세월호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나라 곳간에 빨대를 꽂아 민주화 유공자란 신분 상승을 꾸미는 작업이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빨대 신귀족’을 더 만들겠단다. 합법적 정부를 부정하는 게 민주화란 이상한 등식에 젖은 행태를, 국민은 언제까지 가슴 저리며 바라봐야만 할까.‘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가는 일’이 벌어지는 비극을 국민이 계속 용납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24-05-13

가족의 범주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정의 달은 가정의 중요성을 고취하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개인과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건강가정기본법’에 의해 지정된 것이라 한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등 가정의 구성원을 생각하는 날이 연달아 있는 탓에, 결혼하여 아이가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있는 달이다. 경제적 이유로 5월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리지 않는 청년 세대가 늘어나는 시대에 가정과 가족의 범주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지난주 전공 수업에서 학생들과 김혜진 작가의 ‘딸에 대하여’를 함께 읽었다. 소설은 요양 보호사 어머니의 집에 시간강사이자 동성애자인 딸이 자신의 애인과 함께 들어오며 시작된다. 어머니는 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 어렵고, 시간강사라는 불안정한 직업을 가졌으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딸의 성격에도 걱정이 앞선다. 딸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원망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주인공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하지만 이런 엄마를 향해 딸은 자신과 애인인 레인은 친구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외친다. “가족이 뭔데? 힘이 되고 곁에 있고 그런 거 아냐? 왜 이건 가족이고 저건 가족이 아닌데”라는 딸의 말에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동성애자이자 시간강사인 딸은 우리 사회의 비주류다. 합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정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동성애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기 어려우며, 갈수록 가속화되는 양극화 현상은 청년들에게 결혼에서 출산으로 이어지는 삶의 과정을 포기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부모 가정이나 다문화 가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여전한 편견을 떠올리면,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란 개념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이성애자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그렇지만 우리는 절절한 딸의 앞선 외침처럼 딸과 레인을 가족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점도 알고 있다. 머리로는 ‘딸에 대하여’의 딸과 레인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현실에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소설의 엄마도 그랬다. 젊은 시절 타인을 위해 헌신했던 자신의 환자 젠의 비참한 노후에 분노하지만, 젠과 겹치는 딸의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한다. 자기 딸이 젠과 같은 쓸쓸한 노후를 맞이할지 두려운 것이다.그렇지만 소설에서 결국 엄마는 젠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키며 머리와 마음이 일치하는 삶을 이룬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엄마는 젠의 장례식장에서 조금 다른 일상과 “마주 서 있는 지금”만 생각하자고 다짐한다. 거창한 미래를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제와 한 뼘이라도 다른 내일만 생각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머리와 마음이 일치하는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삶과 마주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가 많아질 때 다양한 가정이 공존하는 진정한 가정의 달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2024-05-13

서정춘의 맛깔나는 전라도 방언시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2009년 10월 23일 ‘문학어의 생명’ 주제로 2009 서울문학인대회가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이사장 김후란)에서 개최되었다. 이날 기조발표자였던 필자는 “모든 창조적인 문학 언어나 방언은 고도의 표현력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며 방언의 효용성을 강조했다. 서정춘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인용하며 “방언의 사용은 표준어라는 규범에서 벗어남으로써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고 또 한껏 무게를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안일한 감상주의나 자아 분열적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당당하게 전라도적 언어풍경의 윤기를 발하게 해주는 문학의 언어는 주술이요, 언어의 위반”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 서정춘의 시에는 순창 토박이말이 맛깔나게 숙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시인의 시선이 지역 정서에 충분히 곰삭아 있어서 궁상스럽지 않다.그의 시 ‘백석 시집에 관한 추억’을 한 번 살펴보자. “아버지는 새 봄맞이 남새밭에 똥 찌끌고 있고/어머니는 어덕배기 구뎅이에 호박씨를 놓고 있고/ 땋머리 정순이는 떽기칼 떽기칼로 나물 캐고 있고./할머니는 복구를 불러서 손자 놈 똥이나 핥아 먹이고/나는/나는/나는/몽당이 손이 몽당손이 아재비를 따라/백석 시집 얻어보러 고개를 넘고”이 시는 ‘봄, 파르티잔’, ‘캘린더 호수’ 시집에 실려 있다. 한국시인협회가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엮은 100명의 시인들이 쓴 방언시집 ‘요엄창 큰 비바리야 냉바리야’에도 실려 있다. 평범한 시골의 일상 풍경이 펼쳐지다가 갑자기 몽당이손 아재비를 따라 백석 시집을 빌려보려고 재를 넘는 시적자아가 등장한다. 농촌 고유의 정취를 진하게 풍기는 방언인 ‘남새밭’은 채소밭, ‘찌끌다’는 끼얹다, ‘어덕배기’는 언덕, ‘떽기칼’은 공식 사전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화살촉처럼 만들어진 칼을 말한다. 이 칼은 농촌에서 부엌의 식칼, 들판의 낫 다음으로 다용도로 많이 사용한 칼이다. ‘몽당손’은 사고로 손가락이 잘린 손이다. 한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정순이가 등장해 여한 없는 하루의 삶을 시작한다. 안분지족이다. 가난이 몸에 익은 문학 소년은 백석시집을 빌려보려 고개를 넘는다. 읍내 서점으로 새 책을 사러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빌리러 가는 길인데도 그 뒷모습은 너무나 행복에 겨워 보인다. 동구 밖에서 깨금박질하다가 이내 꼬불꼬불 산길 돌고 돌아가며 땀방울 훔쳐내곤 하지만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금 우리시대보다 더 가난하고 투박한 삶으로 하루살이를 이어가던 시절의 풍경화다. 그 시절 풍진세상의 농촌 풍경인데도 정겨운 미소와 희망과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서정춘 시인은 군더더기 없는 단어로 함축적인 시를 선보이면서 다양한 이미지와 영상이 연출된다. 특히 전라도 방언을 통해 농촌 풍경과 추억과 친근감을 동시에 재현했다. 마치 ‘TV문학관’이나 ‘전원일기’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느낌을 준다.방언의 풍경 속에는 과거를 호명하는 기호가 삽입된다. ‘꼭지’라는 시의 주인공인 꼭지는 ‘몽당이손 아재비’와 같이 우리의 평범한 이웃사람이다.“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걷다가 또 쉬는데/전봇대 아래 웬 민들레꽃 한 송이/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노랗다./젖배 곯아 노랗다. 이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 떨어져나가듯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이 시 한 복판에 핀 노란 민들레가 시골 풍경화를 불러온다. 노란 민들레에서 못 먹어 부황 든 아이 꼭지의 얼굴을 연상하고 못 얻어먹어 말라비틀어진 젖꼭지를 주전자 뚜껑 꼭지로 상상한다.서정춘 시편의 미학은 절제미와 함축미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류’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하얀 순천의 음결이 섞인 부사 ‘하르르’라는 어휘는 “미풍에 단풍을 휘날리는 가을의 비명이 은닉되어 있”는 것 같다. 비단옷 스치는 듯한 의태어 ‘하르르’가 안겨주는 섬세한 느낌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여울 물소리’를 만나 함께 어우러지며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감각을 자극하며 절묘한 효과를 획득한다. 이렇듯 서정춘은 서정주에 버금갈 만큼 토속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시인이다.

202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