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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장마철이지만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과 열대야가 간간이 끼어든다. 장마 지나가면 우리는 여름의 기세에 눌려 지낼 수밖에 없다. 장마는 그런 날들이 오기 전의 짧은 축복이리라. 대구에 내리는 비가 영덕과 포항을 비켜나가기 일쑤다. 비구름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대구와 영덕 포항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분주하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만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화색(和色)이 없다. 짜증스럽고 화난 표정으로 걸음을 서두르는 인총들을 보노라면 적잖게 우울하다. 용케 아는 얼굴이라도 볼라치면 바쁘다는 말을 이내 내뱉는다.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 자동화된 일상의 부품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21세기 대중사회의 그늘이 날로 깊어간다. 이런 장마철에 동화 (童話) 같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까닭은 거기 있다.`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이야기를 기억하시는가?! 열두어 살 무렵 국어책에서 본 듯하다. 놀기만 좋아하고 빈들거리며 살아가던 게으름뱅이가 어느 날 소가 된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하지만, 그의 말소리는 소 울음소리로 바뀐 지 오래다. 고된 노동과 인간소외로 자살을 결심한 게으름뱅이는 먹지 말라는 무를 먹고 인간으로 환생(還生)한다. 이야기의 교훈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이었다.근면 자조 협동, 새마을운동, 조국근대화 같은 구호로 길들여진 지난 세기에 부지런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한국인들이 가난한 까닭을 게으름에서 본 것은 일제 총독부 관리들이나 해방이후 위정자들이나 동일하다. 부모나 조상 탓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는 것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흙수저 금수저 따지지 말고 죽어라 노동하면 언젠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친 버트란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목부터 낯설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까지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공평한 노동이다. 1935년에 집필된 서책에서 러셀은 `누구나` 하루에 3시간만 노동하면 된다고 못을 박는다. 당연히 누구나란 말에 방점이 찍힌다. 왕후장상(王侯將相)도 정신노동자도 육체노동자도 예외 없이 하루 3시간만 노동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3시간 노동하고 남는 시간을 문화와 예술분야로 돌리자는 발상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잉여노동(剩餘動)과 생산을 통한 부의 축적과 극대화한 소비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이라니!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움과 인간성의 발현을 위한 적절한 방책이라는 주장은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누군가는 땀에 흠씬 젖어 노동할 때 누군가는 골프를 치고 해외여행을 즐기며, 산해진미(山海珍味)로 미각을 충족시키고 있다.지구전체 차원에서 하루 3시간 노동을 설파한 러셀의 사유는 실현되지 않았다. 저임금 받으며 장시간 노동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금수저 물고 나와 노동과 무관하게 일평생을 살아가는 족속(族屬)도 있다. 러셀은 이런 부당하고 불의한 현실에 경종을 울린 것이거니와,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21세기에도 이런 부당성은 개선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이 거리와 광장과 지하철에서 만난 분망(奔忙)한 표정의 인총들 사연 아닐까?!19살 청년이 지하철 작업장에서 죽고, 시간에 쫓긴 냉방기 기사가 추락해 죽고, 30대 젊은 검사가 상관의 모욕으로 죽어나가는 한국사회! 보도되지도 않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망과 죽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기실현과 경제적인 독립을 보장하는 노동의 가치는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옥죄는 사회적 불평등과 불의는 장마철 젖은 대기처럼 끈적이며 달라붙는다. 청량한 한줄기 바람은 언제 어디서 불어올 것인가?!

2016-07-08

`브렉시트`와 한국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일주일 지구촌을 뒤흔든 사건은 `브렉시트`다. 1993년 유럽 12개국으로 창설된 유럽연합은 2007년에 28개국으로 확대된다. 2002년부터 영국을 제외한 유럽연합 국가들은 공용화폐 `유로`를 사용하기에 이른다. 작년에는 그리스의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하는 `그렉시트`가 인구에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그리스는 국민투표를 거쳐 유럽연합 잔류를 결정했지만, 영국은 탈퇴를 선택함으로써 지구촌이 들썩거리고 있다.월러스틴과 함께 대표적인 세계주의자로 꼽히는 리프킨은 `유러피언 드림`(2009)에서 21세기 세계의 향방을 정립하고자 한다. 그는 유럽연합과 더불어 북미의 `나프타`, 중남미의 `메르코르수르`, 아프리카의 `아프리카 통일기구`, 동남아시아의 `아세안` 등을 거명한다. 2030년 이후 세계는 지역연합에 기초해 재편성될 것이라고 리프킨은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의미심장하다.국내 언론에서 다루는 브렉시트 문제는 거개가 경제문제에 한정돼 있다. 엔화와 달러화의 급등, 안전자산인 금값의 폭등 혹은 국내 주식시장의 반응에 초점을 맞춘다. 중국의 `일대일로 (一帶一路)` 정책과 러시아의 서방정책 그리고 미국의 유럽과 아시아 정책향방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는 찾기 어렵다. 브렉시트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당면한 몇 가지 사안을 다각도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브렉시트로 불거진 세대갈등과 계층갈등을 숙고해야 한다. 20~40대 젊은 세대와 60대 이상의 나이든 세대의 충돌, 가진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의견대립이 현저했다. 젊고 고학력이면서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은 유럽연합 잔류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탈퇴를 선택한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동조하면서 미래기획을 하는 집단과 거기서 소외되어 과거의 영화(榮華)를 그리워하는 자들의 한판 승부가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였다. 영국의 계층갈등과 세대갈등을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을까?신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밀양이냐 가덕도냐, 하는 소란스런 논란이 떠오른다. 지난 6월 21일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 났다. 10조원에 이르는 예산이 소요되는 대형 국책사업에 `티케이`와 `피케이`가 사활을 걸고 맞장 뜬 사건. 표면적으로는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든 필요에 따라 부상 (浮上) 가능성이 큰 국책사업. 국민 세금으로 지어질 공항을 두고 전개된 정치권의 패거리 싸움은 매우 고약하다.국가예산을 제 주머니의 푼돈정도로 여기는 정치인들과 정파(政派)의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는 끝장내야 한다. 세계적인 불황의 늪에서 국민들이 낸 세금을 특정지역과 집단을 위해 써도 좋다는 타락한 의식은 종식(終熄)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문학관` 건립사업 역시 같은 전철(前轍)을 답습하고 있다. 문학과 문학가가 아니라, 문학관과 거기 따른 부대이득에 혈안이 된 자들과 지자체의 물고물리는 이전투구(泥田鬪狗)는 끔찍하다.브렉시트로 확인된 지구촌의 거리는 상상 이상으로 가까운 것이었다. 하기야 `코파아메리카 2016`과 `유로 2016`이 실시간 중계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지금과 여기서 발생하고 전개되는 모든 사건이 똑똑한 전화기로 매순간 생중계되는 21세기 아닌가! 그런 마당에 우리는 여전히 지역과 관계와 이해관계와 정파에 묶여 살아간다. 최소한도의 미래전망이나 반성적 사유도 없이.브렉시트로 세계주의에는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자본의 앞잡이로 기능하고 있는 영미중심의 강요된 세계화와 천민자본주의가 끝장나기를 희망한다. 그럼에도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은 우리 내부를 돌아보게 하는 동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날선 모순의 해결책을 찾는 비상(非常)한 노력이 절실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2016-07-01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얼마 전 서울에서 열리는 월례(月例) 발표회에 다녀왔다. 학회장을 맡고 있는 후배가 발제를 권하기도 했고, 평소에 고민하던 문제이기도 해서 모처럼 발품을 팔았다.`한국 인문학의 미래와 대학 구조조정`, 이것이 당일 콜로키움 주제였다. 여기에는 상당히 거창한 문제제기와 가능성 타진이 함축돼 있다. 내가 제기한 몇 가지 문제를 놓고 토론만 한다 해도, 몇날며칠은 걸릴 것이고, 책자로 나와도 몇 권은 소요될 것이다.거두절미하고, 두 가지만 생각해보자. 첫 번째는 한국 인문학의 자생성이다. 장구한 세월 구축해왔다고 우리가 믿는 (혹은 믿고 싶은) 한국 인문학의 뿌리에 자생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아니어도 좋다. 사회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예술이든 종교든 모든 영역에 이른바 `자생성` 내지 독자성이란 게 있느냐 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동학(東學)은 예외로 하자!) 한국의 학문이 독자적인 생존능력과 독창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지만, 어느 학문 영역에도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독자적인 담론이자 이론체계다!” 할 것이 있나 싶다. 장구한 세월 외부에서 수입한 이론이나 담론체계를 손봐서 살아오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전에는 중국을,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일본을, 그리고 2016년 지금까지는 미국을 베껴오지 않았느냐고 나는 묻는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언제까지 베낄 것이냐`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교육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대학 구조조정 문제다. 단순화하자면, 대학정원이 신입생에 비해 과다하기 때문에 부실대학은 정리하고, 취업 안 되는 인문사회계열 정원 줄이겠다는 얘기다. 전자는 동의할 만하다. 하지만 부실사학 교주(校主)들의 재산권을 보전해주겠다는 발상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익을 남길 때 그들은 우리와 이익을 함께 했는가. 국민세금으로 배부른 교주들의 배를 불리고 등을 덥혀줄 이유가 있는가?!인문사회계열 정원 줄여서 공대에 몰아주겠다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오늘날 대학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은 교육부다.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를 내세워 부실사학을 양산(量産)하고, 2년제 전문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격상시킨 장본인이 교육부 아닌가. 아직도 개선되지 않은 이공계 기피현상을 극복하지 못한 현실에서 이공계 증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은 단견(短見)이 아닐 수 없다.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면 축대가 튼튼해지겠는가?!2016년 시점에서 한국대학은 모순과 부조리의 총체적인 복합체다. 소설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대학생들이 허다하다. 장편은커녕 단편소설마저 읽기 버거운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75분 동안 진행되는 수업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강단의 절망감은 형언(形言)하기 어렵다. 대학이 어떤 곳인지,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대학생이 된 청춘이 너무 많다.지난세기 60-70년대 `우골탑신화`를 기억하는 낡은 세대의 추억을 잊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대학은 직장인 양성소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는 현실이 2016년이다. 그것을 입증하는 사건이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對局)이었다. 불과 20년을 내다보지 못한 교육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이 앞으로 한국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망칠 것인가, 두려움이 앞선다. 그들이 취업률 운운하며 대학에 칼날을 들이대는 현실이 안타깝고 두렵다.인공지능 시대와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는 상황을 돌이키지 않고 교육부가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대학 구조조정은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다시 칼춤을 출 것이고, 학생과 학부모들만 희생양이 될 것은 자명하다. 아아! 교육의 신이여, 강림(降臨)하소서!

2016-06-24

혼자만을 위한 식탁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그것은 어렴풋한 기억이다. 간유리로 보이는 사물처럼 뿌옇고 막연하다. 하지만 이미지만큼은 생생하다. 식탁 가득 음식을 차려놓은 여인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뭐, 어때! 나 혼자만을 위한 식탁을 차리는 게!” 아마 화면(畵面) 속의 여인은 그렇게 말했던 듯하다. 항상 함께 했던 `그`의 존재는 지워지고 오롯하게 남은 여인의 화사(華奢)한 얼굴이 선하다. 오래 전 보았던 텔레비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다. 혼자 사는 1인 가구가 500만을 넘었다는 방송보도가 얼마 전에 나왔다. 30년 전에 비해 8배 이상 늘었다는 보도와 함께 10가구 가운데 3가구가 1인 가구라는 통계도 나왔다. 한국사회의 변화속도는 가히 `넘사벽`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수준이다. 2005년 동성동본 금혼폐지 이전에 적잖은 청춘남녀가 전근대적인 풍속 때문에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요즘 대학가에 넘쳐나는 동거습속은 얼마나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인가?불과 30여 년 전에는 낯설었던 1인 가구가 한국가정의 주류(主流)를 형성하게 됐음은 경이로운 현상이다. 가공할 속도의 시대에도 한국인들은 구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의 단적(端的)인 예가 이른바 `명절증후군`이다. 언제 시집가고 장가갈 것인지를 묻는 집안 어른들 때문에 괴로운 청춘들의 이야기는 너무 흔하다. 세태풍속의 변화와 내 자식과 손자들은 무관하다는 무의식(無意識)의 범람이 지배하는 한국사회.1인 가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1인용 식탁을 양산(量産)하게 돼 있다. 그렇다면 시장에서도 1인용 식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사정은 영 딴판이다. 적어도 3~4인 가구 기준으로 식재료가 판매된다. 사자니 남아서 버려야 하고, 안 사자니 그럴 수 없는 지경이다. 1987년 쾰른 거리시장에서 수박을 8등분해서 파는 것을 보고 경악(驚愕)한 일이 있다. 1인용 판매를 본 적이 없는 토종 한국인의 망양지탄(望洋之嘆)이라니!수박 1통의 가격은 8등분한 수박 1통과 동일했다. 많이 산다고 해서 깎아주지도 않고, 적게 산다고 해서 손해 보지 않는 그들의 염량세태(炎凉世態). 이제야 그런 풍속도가 온전히 이해되는 것이다. 당시 도이칠란트에는 1인 가구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훗날에야 깨달은 셈이다. 유럽이나 미국을 보면 일본이 보이고,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이는 것이 역사발전 단계인가? 여하튼 1인 가구가 시대의 대세(大勢)로 자리 잡은 것은 명백하다.문제는 1인 가구의 세대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는 것이다. 작게는 식재료에서부터 크게는 사회적 편견의 해소(解消)가 필요하다. 왜 혼자 사는지를 묻기 전에 혼자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 우리 사회의 1인 가구는 20~30대에 국한(局限)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고독사(孤獨死)로 세상과 작별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정확한 통계수치조차 없는 해괴한 나라 아닌가?여기 더해서 미혼모(未婚母)라든가, 이혼한 남녀, 가출 청소년, 사회 부적응자(不適應者)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배려가 필요한 영역은 헤아리기 어렵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얕은 인식에서 기인하는 편 가르기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사안(事案)을 들여다봄이 온당할 것이다. 그날 1인용 식탁에 차려진 풍성한 음식을 보면서 나는 쓸쓸했다. 역시 누군가 옆에 있어야 제격일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시공간과 인과율마저 무너져 내리는 `인터스텔라`의 시대에 살면서 아직도 19세기 암흑천지에서 배회하는 영혼들의 아우성이 오늘도 하늘을 찌른다.

2016-06-17

밀양과 가덕도 사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선택이 멈추면 인생도 끝이다. 그만큼 우리 삶은 선택의 연속(連續)이다.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인간의 생은 마지막 날까지 지속된다. 버스에 한 자리만 비어 있으면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자리만 비어도 선택해야 한다. 그 정도로 선택은 축복이자 고민(苦悶)의 원천이다. 그래서 자의식(自意識)이 미약하거나 사소한 선택에도 괴로운 사람은 남에게 선택권을 넘긴다. 다수결에 순응하겠다는 얘기다. 요즘 신공항 얘기로 밀양과 가덕도가 시끌벅적하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나온 이야기가 급기야 종점(終點)으로 치닫는 모양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 문제는 마침표를 대하는 사람들의 내면세계다. 신공항 부지 타당성 조사가 끝나면 어느 한 곳은 환호성을 지를 터이고, 다른 쪽은 고개를 숙일 터. 그런데 최종결론이 나기도 전에 불복(不服)하느니 어쩌니 하는 얘기들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2005년 11월 2일에 있은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일명 방폐장)` 부지선정을 보자.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겠지만, 전국 4개 예비지역을 두고 벌인 주민투표가 치열하게 전개됐다. 경주시가 89.5%의 찬성률로 군산과 영덕, 포항을 누르고 최종부지로 선정됐다. 환호하던 경주 시민들과 풀이 죽은 여타 주민들의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하지만 경주 시민들은 방폐장 건설로 얼마나 행복하고 부유해졌는지, 묻고 싶다.`님비현상` 때문에 중앙정부가 부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현상금을 걸어야 했던 방폐장 사업. 돈을 내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돈이 없다면 위험시설이나 혐오시설을 짓지 못하게 하는 볼썽사나운 풍경이 되풀이되는 현실. 신공항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밀양과 가덕도가 마치 티케이와 피케이를 나누는 것처럼 진영싸움이 점입가경(漸入佳境)이기 때문이다. 양자대결이 과열되어 이대로 가다가는 파열음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원칙을 확인했으면 한다. 첫째, 밀양과 가덕도의 양자택일(兩者擇一) 전에 김해공항 확대방안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해 보았는지 묻고 싶다. 밀양이든 가덕도든 김해공항보다 나은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공항 인프라를 확충하고, 새로 투입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필요한 부지를 구입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라 믿는다. 만일 이런 판단이 옳다면 공항부지 선정은 즉시 중단돼야 할 것이다.둘째, 결과에 승복(承服)하는 것이다. 밀양도 가덕도도 모두 대한민국 영토 안에 있다. 우리 국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후손들에게 넘겨주자는 일에 토를 달지는 못할 것이다. 결과에 군말 없이 동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셋째,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공정한 판단을 흐려서는 안 된다. 권력을 소유한 특정집단이나 정파의 유-불리를 따져서는 결과의 공정성이 의심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최대한 공정한 규칙에 따라야 할 것이다.넷째, 공항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우리의 몸보다는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두 어깨가 천하보다 무겁다!”는 장자(莊子)의 말을 새길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우리가 의지해서 살아가는 육신(肉身)이다. 그것을 위한 공항이고 정치며 지역정서라는 얘기다. 눈앞의 크고 작은 이해관계에 함몰(陷沒)돼 진정으로 귀하고 값진 것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결정적으로 부언(附言)하자면, 결론이 나면 의연하고 당당하게 결론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순리(順理)고 아름다운 미덕이므로! 선택은 쉼 없이 우리를 찾고 또 찾아올 것이므로.

2016-06-10

기억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잊지 않도록 혹은 잊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기억의 작용이다. 오래 기억하는 사람은 따라서 더 고통 받거나 혹은 더 많은 행운을 누린다. 망각하고 싶지만 잊어버리지 못하면 괴로운 노릇일 테고, 요긴한 것을 오래 담고 있음은 축복일 것이다. 인생은 이런 모순의 양극단(兩極端)을 진자(振子)처럼 요동치며 마지막 날까지 흔들리는 것일 게다. 그런데 아주 예외적인 일과 사람과 관계는 기억함이 좋을 듯하다. 벌써 오래 전 일처럼 들리지만, 안중근 의사와 긴토캉(김두한)을 헷갈린 연예인이 구설수(口舌數)에 올랐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하고 반응하는 사람들과 뭐, 그만 일을 가지고 젊은이를 닦달하느냐는 부류(部類)의 인간들로 패가 갈렸다. 결론을 서두르면 나는 전자(前者)에 속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의 것은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문제는 사람마다 그 `최소한의 것`이라는 범주(範疇)가 많이 다르다는 데 있다. 사적(私的)인 영역이나 친밀한 범위 내의 것을 최소한의 범주에 넣는 사람이 있다. 거시적(巨視的)인 것과 역사적(歷史的)인 것의 범위(範圍)를 꼽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범주화를 전연 염두(念頭)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리라는 데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속도(速度)와 연관되어 있다.작년과 올해가 그 양상을 달리하는, 과장(誇張)하면 어제와 오늘이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시간대에 우리는 산다. 몇 년 전 일도 기억나지 않는데, 소중한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어찌 기억하겠는가?! 이것이 연예인을 옹호하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분초(分秒)를 다투면서 시간이 나노의 범주까지 쪼개진 시점에서 역사적이고 거시적인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현대인은 달력을 보지 않는다. 그가 들여다보는 `똑똑한 전화기`에는 언제나 지금과 여기만 나와 있다. 달력에 담긴 24절기(節氣)와 국경일과 역사적인 사건은 전화기(電話機)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늘 현재에 주목(注目)한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과거 역시 사라진 지 오래다. 현재에 함몰(陷沒)된 현대인에게 어찌 미래기획과 과거역사를 물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거기가 나의 문제의식(問題意識)이 출발하는 지점이다.끝없는 현재를 잉태(孕胎)하는 무수한 과거와 무수한 현재에 기초하는 무한한 미래는 기실 하나의 연속선(連續線)에 자리한다. 우리가 의식하든 말든 그것은 자명(自明)하다. 시간은 분절적(分節的)이지만 연속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택적 기억과 기억의 창고를 경영하는 인간은 분절적으로 시간을 인식하지만, 어떤 사람은 시간의 연속성에 기초하여 역사와 만나려 한다. 그에게 안중근과 김두한을 동렬(同列)에 세우는 것은 불경(不敬)한 노릇이다.얼마 전 경북대에 대동제가 있었다. 그 첫날이 지난달 18일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건사하는 주막(酒幕)에 가지 않은 지가 오래여서 올해도 그러했으되, 부아가 치밀었다. 불과 36년 전에 있은 광주항쟁의 그날에 학교에 술판을 벌이며 아무런 추모행사도 갖지 않는 청년들의 집단적 무의식(無意識)에 소름이 돋았다. 1980년을 기억하지 않는 청춘들이 거점 국립대 학생들인데, 연예인이 1909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철종 13년인 1862년에 출간된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한탄한다. “우리 프랑스에서는 어떤 일이고 간에 180일만 지나면 모두 망각된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38일만 지나면 모든 것이 망각된다는 `다이나믹 코리아`! 무려 6개월 동안 지속되는 자국민(自國民)들의 기억력에 분노했던 위고가 나는 새삼스러웠다. 구양봉의 여인이 병사(病死)하고, 서독은 사막의 객잔을 태우고 표표히 사라진다. 그 역시 잊고 싶은 것이다. 세상일은 취생몽사주 없이도 더러는 망각되는 모양이다.

2016-06-03

굿하는 할머니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겨우내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던 할머니는 석 달 열흘이 넘도록 부재(不在)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봄날 홀연히 돌아온 할머니였다. 허리 통증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 하신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홀로 키워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할머니였다. 언젠가 그녀에게 신이 내렸고, 그날부터 강신무(降神巫)가 되었다는 할머니. 그렇게 수십 년 세월을 느티나무처럼 버티며 견뎌온 세월이었다고 했다. 5월이라 봄이라지만 섭씨 30도의 대기(大氣)는 태양으로 달궈져 있다. 어깨에 띠를 두르고 뒷집 할머니가 신명나게 소리를 뽑는다. 장구와 징, 꽹과리 같은 무구(巫具)가 할머니의 신명을 돕는다. 팔순 넘긴 할머니를 땡볕 아래로 불러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겨울 이후 거동(擧動)이 더뎌진 할머니를 저토록 활기차고 강인하게 인도하는 것은 또 무엇일까. 할머니의 굿은 아침나절에 시작하여 점심을 거쳐 오후가 되어서야 끝났다.무당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안향(1243~1306)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슨 대단한 학문이나 되는 듯 성리학을 고려에 이식(移植)한 안향. 중국에서 수입한 학문으로 신흥국가 조선이 성립되어 장장 500년 세월을 이어갔다. 그 첫머리에 안향이 있었다. 그가 어느 고을 원님으로 부임하여 첫 번째 행한 거룩한 사업이 무당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무속(巫俗)은 모두 사악하고 거짓되니 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조선의 금과옥조(金科玉條)였던 억불숭유의 토대를 놓았던 인물 안향. 그러나 장구한 세월 성리학만을 떠받들고 추종했던 왕조는 쓸쓸하게 몰락한다. 그 왕조의 우울한 끄트머리를 장식했던 갑오농민전쟁과 을미사변의 주인공 민비 민자영. 명성황후라 불리는 민자영이 특히 굿을 좋아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무너져 내리는 이씨의 종묘사직을 지키려 온갖 수단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가 의지한 최후의 보루 무당과 굿은 무엇인가!지난 세기 60~70년대 한국에는 다시 미신타파(迷信打破)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진다. 그와 반비례하여 외래종교인 기독교의 교세(敎勢)는 날로 번창해간다. 무당과 박수의 자식들이라 하여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견뎌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날들로 기억된다. 군부독재가 종식(終熄)되고, 우리의 전래적(傳來的)이고 토속적(土俗的)인 것들에 대한 성찰이 일상화되기 시작한 90년대에 이르러서야 무속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박기복 감독의 기록영화 `영매(靈媒)`는 강신무와 세습무(世襲巫)를 다룬 역작(力作)이다. 인간과 신을 매개한다 하여 무당을 `영매`로 승화(昇華)시킨 박기복. 그리하여 영화관은 눈물과 한숨의 바다였던 기억이 오늘도 새롭다. 탐진치(貪瞋痴)에서 발원하는 수비뇌고(愁悲惱苦)와 생로병사를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중생을 위해 헌신하는 영매들 아닌가!알파고와 사물 인터넷 그리고 3차원 복사기가 등장한 인공지능 시대에도 영매의 구실은 여전하다. 인간의 육체적인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기계를 만들어내다가 이제는 정신적인 노고(苦)마저 덜겠다는 것이 인공지능 아닌가. 시대의 추이(推移)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그 본질로 한다. 따라서 인공지능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大勢)로 자리매김할 것이 자명(自明)하다. 그런 시대에도 영매들의 엄존(儼存)은 나를 숙연하게 한다.할머니가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맏아들과 낮술을 먹게 되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 대신 그녀의 질부(姪婦)가 술상을 봐주었다. 질부라 해도 네 살이나 더 많은 파파 할머니였다. 그분들과 대면한 자리에서 나는 무녀의 기상(氣象)을 볼 수 없었다. 그저 나이 들고 병약한 노구의 내 어머니뻘 되는 노파가 있을 뿐이었다. 할머니의 조속한 쾌유(快癒)를 빌면서 소략한 주연을 마친 봄날이 어느덧 종언(終焉)을 고하는 시간! 아아, 봄날이 간다!

2016-05-27

글은 어떻게 쓰는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젊은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유수(有數)의 문학상을 받았다. 노벨 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것이다. 영연방 작가에게는 `맨부커상`을, 비영연방 작가와 역자에게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여하는데, 한국 작가로는 한강이 첫 번째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채식주의자`는 읽지 못했으나, `몽고반점`을 읽고 그녀의 글쓰기에 적잖게 매료(魅了)된 적이 있었다.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는 것은 자못 유쾌하고 행복한 일이다. 연말만 되면 혹여 고은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心焦思)하는 한국인들이 적잖고 보면 더욱 기쁜 일이다. 그런데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극작가는 어떻게 글을 쓰는 것일까. 핵심(核心)을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인다. 한강의 수상소감과 남편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말에서 해답의 단서(端緖)를 찾을 수 있다.첫째 가는 덕목(德目)은 글을 쓰는 작가의 문제의식일 것이다. 어떤 글을 써서 자신과 독자에게 내놓을 것인지, 그것을 고민하는 작가의 심도(深度) 있는 사유와 인식 그리고 차원 높은 문제제기가 1차적인 관건(關鍵)이라 믿는다. 한강은 `채식주의자`를 “인간의 폭력성과 인간이 과연 완전히 결백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 작품”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두 가지 문제의식을 추출(抽出)한다.그 하나는 인간의 폭력성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것이며, 그 둘은 인간존재의 결백성(潔白性)이 얼마나 완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양자 공히 상당히 추상적이고 난삽(難澁)하여 쉽지 않은 사유와 인식론적 노력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긴다. 소설의 재미는 있지만 깊이가 턱없이 부족한 소설이 넘쳐나는 시대에 이런 진지한 문제제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이다.좋은 글을 쓰는 두 번째 미덕은 퇴고(推敲)에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의 장인정신이라 생각한다. 한강의 글쓰기에 대해 홍용희는 말한다. “한강은 한 줄 한 줄 혼신(渾身)을 다해서 몸이 아플 만큼 쓰는 체질이다. 그렇게 열심히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고치는 과정은 옆에서 보기에 굉장히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글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장인정신, 끝없는 반성과 수정의 되풀이를 보여주는 헌신성은 시시포스를 연상케 한다.시시포스가 `도로(徒勞)`의 헛된 수고로움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면, 한강은 다듬고 또 다듬어 벽옥(碧玉)을 갈무리하는 장인을 닮았다. 서둘러 쓰지 않되, 그런 글마저 이리 보고 다시 살피는 인내와 자기결벽의 도저(到底)한 결과가 비평가와 독자를 사로잡은 비결이라 생각한다. 어느 글이고 고치고 다시 손을 보면 최초의 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우리는 백거이나 밀턴의 좋은 선례를 가지고 있다.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혼불` 10권을 썼다는 작가 최명희나, 근면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는 김훈 소설가나 좋은 글을 남기려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있기에 한국어도 세계적인 문학어로 재탄생하는 계기(繼起)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의 글쓰기가 아니라 자아와 세계와 인간을 천착(穿鑿)하는 느리고도 진지한 성찰이 한국문학의 깊이와 폭을 심화 확대하기를 기대한다.한강은 `맨부커상`을 받음으로써 나처럼 글로 살아가는 인간을 경계하는 종요로운 구실을 하지 않았는가 한다. 문제의식도 치열하지 않고, 글쓰기 형식도 신통치 않으며, 퇴고의 수고로움을 마다하는 어쭙잖은 글쟁이를 깨우치는 죽비(竹扉)가 된 듯하다. 이로써 나는 재삼재사 숙고하고 살피며 바지런한 글쓰기로 `후생가외`의 기여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역시 글이란 작가의 열렬함과 고단함을 먹고 사는 것이다. 한강의 수상을 새삼 축하한다!

2016-05-20

바깥에서 찾는 사람들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수피우화`를 읽으면서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다.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친밀함이 살갑게 다가온 때문이다. 논리 정연하고 사변적이되 수다스러운 철학자들을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날려버리는 수피의 지혜. 이슬람의 수피는 유대의 랍비나 불가(佛家)의 조사(祖師)처럼 도저한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가리킨다. `수피(Sufi)`는 양털을 뜻하는 어휘 `수프(Suf)`에서 나왔다. 수피가 양털로 짠 외투를 입고 청빈한 생활을 한 데서 어원이 만들어진 듯하다.성스러운 여성이자 수피였던 라비아가 바늘을 잃어버린다. 그녀는 오두막 바깥에서 바늘을 찾는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라비아를 도와 바늘을 찾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어두워졌는데도 바늘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가 바늘을 잃어버린 장소를 묻는다. 라비아는 집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황당해한다. 그녀는 안보다 바깥이 더 밝기 때문에 밖에서 바늘을 찾고 있다고 덧붙인다.라비아의 답변에 허망(虛妄)해진 사람들이 비아냥거린다. 그녀의 응수를 보자.“그대들 자신을 돌아보라. 그대들 또한 밖에서 찾고 있지 않았던가. 그대들이 찾고 있던 것은 사실 안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더냐. 그대들은 진리와 구원(救援)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안에서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지만 그대들은 바깥에서만 그것을 찾지 않았더냐. 바깥이 밝으니까, 밖은 쉽게 볼 수 있으니까, 바깥에서 찾고 있었던 게 아닌가.”라비아의 말은 명쾌하다. 우리가 구하는 진리와 구원은 우리 바깥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서 노자의 사유(思惟) 한 자락이 기시감처럼 떠오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인가?!“사립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고, 창문을 열지 않아도 하늘의 도리를 본다. 멀리 가면 갈수록 그 앎은 작아지나니. 그러므로 성인은 행하지 않고도 알며, 보지 않아도 밝고, 하지 않아도 이룬다.”(도덕경·제47장)`무위자연`을 설파한 노자는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를 천하 주유(周遊)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고자 한다. 사물과 관계가 `스스로 그러하도록 놓아두라`는 달관한 사상가 노자의 그윽함이 감촉(感觸)되는 장면이다.수피나 노자가 아니더라도 다산(茶山) 또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신유박해`로 강진에 유배(流配)된 다산은 한양과 흑산도의 가족과 서신으로 교통한다. 한양의 아들들과 섬으로 유배된 둘째 형님 약전과 편지하며 내면을 토로(吐露)했던 다산. 그것을 한 권으로 묶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크고 작은 깨달음과 통렬한 비판으로 충만하다. 정조의 신료(臣僚)였던 정약용이 조선 지식인들의 사대주의를 비판한 것에 눈길이 간다.청나라에서 내려주는 서책으로만 정신적 자양(滋養)을 삼았던 무비판적인 조선의 지식인들이라니! 중국인들의 사유와 인식을 앞 다퉈 베껴댔던 조선의 매판적(買辦的)인 관료와 지식인 계층에 대한 다산의 신랄(辛辣)한 비판은 정곡(正鵠)을 찌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본유학의 전통과 비교할 때 자생적이고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기반을 완전히 상실한 조선유학의 근거 없음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실로 비난에 가까운 것이었다.문제는 그런 방법론 내지 세계관이 21세기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 지식인들의 작업이라고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외국의 이론을 직수입해서 지식 소매상 노릇을 선점(先占)하는 것이다. 이런 뿌리 깊은 지식 사대주의는 천석고황 수준이어서 난치병이 아닌지 생각한다.최소한도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이 있다면 남의 나라 지식인과 지식을 베끼고 전수(傳受)하고 팔아먹는 일은 이제 그만둘 때도 됐다. 모자라고 아쉽더라도 독자적이고 고유한 것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방법을 찾을 일이다. 집 안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이집 저집 두드리며 찾아다니는 것은 보기에도 민망할뿐더러, 성과도 미미(微微)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에게 소용되는 것은 우리 내부에서 참을성 있게 찾고 또 찾을 일이다.

2016-05-13

세상에서 숫자가 사라진다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한 가지 가정(假定)을 해보자. 이 세상에서 어느날 갑자기 숫자가 모조리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실 숫자는 물이나 공기처럼 생활 깊숙이 밀착되어 있어서 그 종요로움을 잊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다. 생물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생명유지 활동에 필수적인 것이 물과 공기다. 사회-경제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정신적-지적 활동에서 그런 구실을 하는 것이 숫자다. 숫자를 빼놓고는 우리는 하루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는다고 하자. 의사의 모든 소견(所見)은 숫자로 기록된다. 키와 몸무게, 시력과 청력,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 혈압과 심전도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항목들이 숫자로 빼곡하게 정리되어 의사의 판단을 기다린다. 알프레드 크로스비는 `수량화혁명`에서 유럽이 근대를 열어젖힌 원동력을 `수`와 `양`에서 보았다. 고대와 중세의 질적(質的)인 세계관에서 근대의 양적(量的)인 세계로 빠르게 전환한 유럽의 승리를 포착한다.대학을 필두로 그는 근대로 이행하는 전제조건으로 시간을 가시적(可視的)인 현상으로 확립한 기계시계, 기억력에 의지했던 음악을 오선악보로 혁신한 아르스 노바, 채무와 이익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복식부기, 인쇄술을 통한 인체해부도와 해도(海圖)의 광범한 보급 등을 거명한다. 그 모든 것의 세계 저류(低流)를 관통한 것이 수량화혁명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의 논지에서 `오리엔탈리즘`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착목 자체는 설득력 있다.한국인들은 어릴 적에는 수학도사라 불리지만, 대학에만 들어가면 쩔쩔 맨다. 초중고교에서 한국인이 배우는 수학이란 거의 계산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공식(公式)을 암기(暗記)하고 적절한 수준에서 계산을 반복하는 방식이 개선되지 않는다. 0(零)을 비롯한 수의 본질을 알지 못한 채 계산에만 몰두한다. 당연히 암산은(속셈은) 빠르지만 수의 본령(本領)에는 이르지 못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본보기를 들어보자.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수를 생각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는지?!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붓다다! 그이는 `무량대수(無量大數)`라는 개념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무량대수는 문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필자는 무량대수보다 더 큰 수를 알고 있다. 정말이다. 그것은 무량대수에 1을 더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느 학생이 무량대수에 2를 더하겠다고 해서 필자에게 군밤을 맞은 일이 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다.붓다는 수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수에 1을 더하면 더 큰 수가 되고 이것은 무한반복 가능하다는 수의 기본적인 속성(屬性)! 그래서 그런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의 본향(本鄕)은 아라비아가 아니라 인도(印度)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발명된 숫자가 기원후 458년 무렵 `명수법(命數法)`과 동반(同伴)하여 아라비아와 중동, 북아프리카의 무어를 거쳐 에스파냐에 도달하는데 무려 800년이 소요(所要)됐다고 한다.요즘엔 아라비아 숫자 대신 인도-아라비아 숫자라는 용어가 선호(選好)된다. 수의 나라답게 인도 출신 수학자도 많고, 수학분야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자도 적잖게 배출하는 나라가 인도다. 숫자는 피타고라스학파의 경우에는 수비학과 결부되어 밀교 (密敎) 수준까지 진척되었다. 그것은 숫자에 담긴 의미가 철학과 사상을 넘어 종교의 영역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첫머리의 `피보나치수열`을 상기하시라.조금만 신경 쓰면 재미나고도 유쾌하게 숫자와 수학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 터인데, 입시만 보고 달리는 한국교육은 여전히 죽만 쑨다. 숫자와 관련한 허다(許多)한 서적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간되고, 영화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건만 표피적(表皮的)인 드라마와 노래와 춤에 빠져든 이 나라에서는 고급한 취향의 지적 (知的) 오락 개발에는 무능하고 무심하다. 언젠가 숫자와 수학과 생활을 결합하는 한국형 문학과 예술과 철학이 나오기 바란다.

2016-04-29

새로운 시대정신을 위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끝났다. 많은 언론사가 절대적으로 틀린 예측결과를 사과하는데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틀려도 유만부동(類萬不同) 아니었는가? 그렇게 틀린 여론조사로 민심을 예단(豫斷)했으니, 망신살이 뻗쳐도 단단히 뻗친 셈이다. 언론사의 체면치레는 조만간 끝날 것이다. 언제 그랬느냐 하고 그들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길 떠날 것이다. 근면한 살육자(殺戮者) 하이에나처럼! 문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21세기를 살아갈 내재적인 동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제기가 관건(關鍵)이다. 본래 선거는 미래권력을 선출하는 행위다. 물론 선거에는 회고적(回顧的)인 의미도 담겨 있지만, 선거의 핵심은 미래를 지향한다.2016년 4월 한국의 정치지형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20세기 중후반을 누비던 인사들이 주축이다. 60~70대가 주역을 맡고, 그 아래 세대가 조연과 단역으로 나오는 재미없는 드라마가 한국정치다. 통렬한 풍자(諷刺)와 신랄한 비판, 그리고 상큼한 대안제시가 사라진 정치판은 개그 콘서트보다 못하다.이쯤에서 우리는 미래로 가는 길을 물어야 한다. 21세기가 어느새 15년이나 지났건만 한국정치는 1970~80년대에 매몰(埋沒)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人工知能)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산업화 시대의 그늘에 갇혀 산다. 첨단 과학기술의 세례(洗禮)를 날마다 경험하지만 우리의 사유와 인식, 그리고 경험은 흑백 가정용 전화기 시대에 묶여 있다.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내용이 바뀌면 형식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우리는 어떤 내용으로 21세기를 채워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 준비하지도 않는다. 그저 외부에서 주어지는 지식과 정보를 답습(踏襲)하고 소화하는데 열중한다. 소련을 필두로 한 실존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崩壞)한 지 25년 세월이 흘러갔다. 동서 도이칠란트가 재통일되고, 유럽연합이 자연국경을 포기하고 출범했다. `흑묘백묘론`으로 시작한 중국은 `도광양회`를 거쳐 `대국굴기`를 지나 `돌돌핍인`의 지경으로 우뚝 일어서고 있다.그런데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되어 있고, 우리는 반도(半島) 아닌 섬에서 살고 있다. 대륙을 향한 상상력은커녕 분단극복을 위한 그 어떤 진실한 노력도 없다. 세계적인 불황과 경기침체로 `헬조선` 담론(談論)이 일상화되었지만, 그것의 대안(代案)은 여전히 부재중이다. 여기서 필요한 학문이 인문학이며 그 가운데서도 역사학(歷史學)이다.“역사가는 돌아앉은 예언가”라는 말이 있다. 그런 형안(炯眼)을 가진 역사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역사교수나 역사교사는 많아도 역사가는 없다. “역사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만 배운다!”는 속설을 입증하는 소논문만 판치는 세상 아닌가? 시대를 통찰하고 미래를 통관하는 장쾌(壯快)한 시각을 가진 신진기예가 배출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막막하다.지역과 세대와 수저를 넘어서는 탁월한 담론이 나오고, 그것을 둘러싼 치열(熾烈)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5천년 문화민족을 자랑하는 우린데, 어찌하여 세계적인 사상가나 철학자, 역사가 하나 없단 말인가! 안으로는 우리 민족과 국가의 명운(命運)과 어린것들을 사유하고, 밖으로는 전 지구적인 삶의 양상과 미래를 기획(企劃)하는 현인(賢人)의 등장을 고대한다. 그나 그녀가 아니라, 그들이라면 훨씬 더 유쾌할 것이다.20세기 담론과 정치철학, 그리고 행동방식으로 21세기를 살아감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는 핵심이 그것이다. 세계의 변방(邊方)이나 주변부에서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오르려는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치열하게 시공간을 사유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깨어있는 인문학자, 역사가와 철학자의 등장을 고대(苦待)하는 시각이다.

2016-04-22

쓸모없음의 쓸모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빛과 소금이 되어라! 어릴 적부터 자주 들은 말이다. 필자는 어떤 특정종교 신자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의미를 되새길 따름이다. 어둠에 광명을 안겨주는 빛과 인체에 필수적인 소금이 된다는 것에 담긴 함의! 빛과 소금이 사라진 세계를 떠올리면 간명하다. 항상 어둠만 지배하는 세상과 싱거움으로 가득한 식탁은 어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계와 소금이 부재하는 음식을 연상함은 괴로운 일이다.빛과 소금은 그야말로 최상의 쓸모를 대변한다. 공기와 물도 절대적으로 유용하지만, 우리는 빛과 소금의 쓸모에 더 익숙하다. 그래서 사람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들으면서 성장한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 혹은 어떤 사람에게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는 명령이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하는 부모나 교사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 상황일 터이고. 그런데 과연 그러해야 하는가?!`장자`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대목으로 명성이 높은 장석이 제자를 데리고 쓸모 있는 나무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제(齊)나라로 향하던 장석은 곡원 지방에 이르러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로 큰 사당나무를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무 미련 없이 길을 재촉한다. 보다 못한 제자가 길을 막는다. 이렇게 좋은 재목(材木)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장석은 단호하게 제자를 나무란다. 이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라고!“이 나무로 배를 만들면 금방 가라앉고, 널로 쓰면 곧 썩을 걸세.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지고, 문으로 쓰면 진액이 흐르고, 기둥으로 쓰려 해도 좀이 생기네. 결국 이 나무는 아무데도 쓸모가 없어서 이렇게 장수를 누린 것이야!” (`장자`, `내편` 가운데 `인간세`)만일 장석이 본 사당나무가 쓸모가 있었다면 그것은 훨씬 오래 전에 베어져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사당나무는 쓸모없음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천수를 다하고 있었던 셈이다. `새옹지마(塞翁之馬)`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그런데 `장자` `외편`의 `산목(山木)`에서 우리는 정반대 상황과 대면한다. 장석이 제자를 데리고 옛 친구를 찾아간다. 장석을 반갑게 맞이한 친구는 하인을 불러 거위를 잡도록 한다. 하인은 잘 우는 거위와 못 우는 거위 가운데 어느 것을 잡을지 묻는다. 거위는 본디 집을 지키는 구실도 해야 했으므로 주인은 못 우는 거위를 잡으라고 명을 내린다. 여기서 장석의 제자는 혼란에 휩싸여 장석에게 묻는다.“사당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천수를 누렸는데, 이제는 울지 못하는 거위가 죽음을 당했으니 저는 장차 어찌 해야 합니까?!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리기도 하고, 또 죽임을 당하기도 하니 대체 무엇이 올바른 방법입니까?”장자의 대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경계에 자리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중용의 경지`라고나 할까, 그런 경계를 장자는 말한다. 그런데 21세기 한국사회의 어느 부모가 장자의 이런 경지를 자식들에게 설파하고 있는가?!일컬어 `실용주의`라고 할 것인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경지인지도 모른다. 도저한 깨달음의 경지이거나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초월하는 범상한 기인의 경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다. 언제나 쓸모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능하고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일찍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만큼 일찍 세상과 작별하는 법이다.“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들기 마련이다!” 천재와 미인이 박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너무 일찍 만개하면 범용한 세상의 미움과 질시가 하늘을 찌르는 법이다. 양생(養生)의 토대는 어중간함에 있을지도 모른다. 군영(群英)들의 화사함이 앞을 다투는 시절의 오래된 상념이 문득 머리를 쳐드는 시간이다. 천재는 경배하여 먼저 길을 내주면 그만이다! 사태의 진상이 그럴진대 왜 우리는 천재를 박대(薄待)하는가?! 비루(鄙陋)한 인간들의 허랑 방탕이여!

2016-04-15

근절(根絶)의 어려움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모든 것이 솟구치는 시절. 대지에 뿌리 내린 것이라면 하나같이 봉기(蜂起)하는 계절. 저 양양(揚揚)한 기세는 그야말로 욱일승천(旭日昇天)이다. 아침저녁으로 표정을 바꾸는 초목의 약동은 봄의 환희를 웅변한다. 예전에는 꽃이 피어나는 순서가 있었다. 동백이 피어나고 영춘화가 세상과 만나면 매화와 산수유가 뒤를 잇는다. 그 다음 살구와 명자꽃이 피고 개나리와 목련이 얼굴을 내민다. 그 무렵이 지나면 벚꽃이 세상을 환하게 하고, 진달래와 싸리 등속이 단아(端雅)하고 처연(悽然)하게 고개를 든다. 키 작은 민들레와 냉이, 제비꽃도 뒤질세라 여린 몸을 열어 하늘을 우러른다. 그러다가 수수꽃다리가 번지면서 봄은 절정으로 치닫는 것이다.그러던 풍경이 언제부턴가 일순 (一瞬) 뒤바뀌어 백화쟁명이 되고 말았다. 매화와 산수유가 피고 질 무렵 만산홍화가 줄지어 개화한다. 꽃들에게도 질서가 사라져버린 불고염치의 시대가 도래(到來)한 것이다. 개화를 향한 무한경쟁 시대에 이 나라 초목도 발 벗고 나선 셈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명리와 출세만 바라보고 질주하는 인간군상의 집단군무가 세상을 혼탁하게 한 것이 어찌 어제오늘의 일이겠는가?!아마 그들의 욕망도 시초(始初)에는 작고 여린 것이었을 터다. 자그마한 소망이 하나 둘씩 차곡차곡 쌓여가면서 제어 (制御) 불가능한 규모로 확대재생산 되지 않았을까. 노자(子)는 이것을 정갈한 비유로 설명한다. “9층 누대(臺)도 한 삽의 흙에서 비롯되고, 아름드리 거목도 미소(微小)한 것에서 생겨나며,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모든 것의 시작이 미미(微微)하고 하잘것없는 것이었음을 웅변하는 명구(名句)다.나의 봄도 노자의 가르침과 멀지 않다. 작년에 앞마당에 민들레가 일시에 피어나 민들레 정원이 되었다. 노란색 민들레꽃은 보기에도 그만이어서 그들의 번창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민들레의 생명력이 얼마나 질긴지 확인하는 것은 커다란 수고를 동반한다. 지천에 널린 민들레 수효를 줄이고자 몇날며칠 고생해도 그들의 집착(執着)은 상상을 넘는 차원에 있었다. 거기서 알게 된 생명의 강인(强靭)함은 그야말로 충격(衝擊)과 공포였다.겉에 드러난 민들레의 잎과 줄기 혹은 상당 부분의 뿌리를 제거해도 민들레는 죽지 않는다. 약간의 뿌리만 대지에 내리고 있으면 언제 잘려나갔느냐 시위(示威)라도 하듯 민들레는 다시 우뚝 피어나는 것이었다. 지상의 이파리와 꽃대보다 훨씬 강력하고 긴 뿌리에 의지하는 민들레의 생명력이라니.거기서 `근절`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은 자명한 이치다. “뿌리를 잘라낸다”는 것을 뜻하는 근절. 원하지 않는 풀, 불원초(不願草)를 없애고자 한다면 근절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가 항용 맞닥뜨리는 크고 작은 욕망과 오류는 민들레처럼 작은 홀씨 하나에서 비롯한다. 그것이 적절한 생장조건과 만나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번져나가는 것이다.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눈먼 정치가들의 탐욕도 그런 양상으로 번성하는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근절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데 있다. 불원초는 적절한 선에서 이파리와 꽃 심지어는 일부의 뿌리까지 쉽게 내준다. 퇴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후의 생명 저지선(沮止線)은 양보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도만 남기고 그저 물러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마치 우리의 음습(陰濕)한 욕망이 근절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올봄에도 나는 며칠을 민들레와 이름 모르는 불원초 근절에 돌입(突入)했다. 그들과 씨름하면서 나의 저급한 욕망과 세상의 근절되지 않는 허다한 욕망과 그것의 충돌을 생각한다. 언젠가 세월이 더 흐르면 불원초를 근절하겠다는 나의 욕망마저 근절될지 모르겠다. 아직은 호미와 삽을 들고 설치는 꼴을 보이고 있으니, 철이 덜 든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에는 직박구리들이 화사한 벚꽃을 탐식(貪食)하고 있다. 봄이다. 흐드러진 봄날이 간다.

2016-04-08

바둑을 두다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나는 어릴 적부터 바둑을 두었다. 외숙(外叔)이 아마 5급 정도 되는 기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분에게 바둑을 배운 것이다. 아홉 점을 깔고도 무수하게 죽어나가는 나의 대마(大馬)를 볼 때마다 가슴 서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느 정도 기초를 배우고 난 다음에는 정석과 포석(布石)을 다룬 서책을 읽으며 기력향상을 시도했다. 그때 나온 바둑서적은 대개 일본 기사들의 책을 번역하거나, 그들의 대국(對局) 해설집이었다.중국에서 시작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바둑. 하지만 바둑은 종주국 중국에서 오래도록 망각돼 있었고, 이런 정황은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을 계승한 장수왕은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는 고구려 승려 도림을 첩자로 만들어 백제에 파견한다. 개로왕은 도림의 꾐에 빠져 국사(國事)를 내팽개치고 바둑에 빠져든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옛말이 적용된 사례다.그래서인지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바둑을 잡기에 넣는데 익숙하다. 이른바 `주색잡기(酒色雜技)`에서 바둑과 장기를 잡기의 대명사처럼 되뇌어왔던 것이다. 그런 바둑을 일본인들은 `도(道)`의 경지로까지 승격시킨다. 이른바 `기도`의 탄생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시작돼서 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차`문화의 융성과 맥을 같이 한다. `다도(茶道)`라는 말이 얼마나 지난 세기 90년대 한반도를 강타했던가?! 바둑 역시 같은 경로를 거쳐 역수입된다.한국의 대표적인 고수(高手)들, 조남철-김인-윤기현-조훈현으로 이어지는 국수(國手)의 맥은 일본 유학파들이었다. 한국토종 기사 서봉수는 국수라기보다 명인(名人)으로 곧잘 불린다. 여하튼 이창호라는 불세출의 기사가 출현하기 전까지 한국바둑은 일본바둑에 전면적으로 의지해서 성장했다. 이것은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최근자료에 따르면 1765년 출간된 `기론(碁論)`이 한국바둑의 최고기보라 한다. 이것 역시 치밀한 고증을 거쳐야 할 작업이다.그런데 일본은 이미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1588년 어전시합이란 명목으로 바둑 전국대회를 개최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때 우승한 승려 닛카이에게 풍신수길은 `본인방(本因坊)`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했는데, 25대 본인방으로 등극한 이가 조치훈 9단이다. 400년이 넘도록 지켜온 본인방의 전통을 가진 나라가 일본이다. 각설하고, 이런 식으로 일본은 바둑과 차 문화를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린 당사자로 이름을 올린 바 있다.임금 앞에서 두는 이른바 `어성기` 기록 역시 빼놓지 않고 가지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서기` 30권이 720년에 완성되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50권이 1145년에 집필된 점을 고려하시기 바란다. 중국과 한국을 젖혀두고 일본이 오래도록 바둑 종주국 행세를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물론 세계 바둑계를 석권하는 기사들은 한국과 중국기원 소속이다. 그러나 바둑의 역사와 기록은 여전히 일본이 가히 독보적(獨步的)이다.얼마 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人工知能)의 가공(可恐)할 지적 능력에 놀라워했다. 거기서부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혹은 전쟁까지 상상하는 일이 생겨났다. 영화에서는 `터미네이터`(1984)가 그런 세계를 이미 오래 전에 열어젖히지 않았던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구체적인 직업까지 거명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교육은 어떠한가?!우리는 유치원 이전부터 영어와 수학 암산 같은 지식 교육으로 어린것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학원으로 향하는 5~6세 아동부터 20살 재수생까지 그들은 판에 박은 암기공부에 절망하고 있다. 미래학자들의 진단(診斷)에 따르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공부에 몸과 마음을 혹사당하고 돈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교육이 어제처럼 자행(恣行)되고 있는 것이다. 바둑을 두면서 조만간 불어 닥칠 미증유의 변화와 대학입시와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2016-04-01

봄날의 대학풍경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해마다 봄이면 학교는 소음과 환락의 광장이 된다. 신입생 환영회, 동아리 모임, 고등학교 동창회 같은 행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예전에 만연(漫然)했던 신입생 길들이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교내 도처에서 술과 이야기로 늦은 시각까지 청춘을 노래한다.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통과의례일 것이다. 초중등 장장 12년 동안 억눌린 육신과 영혼의 해방을 향수(享受)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한국의 입시제도가 낳은 기형적인 풍경이다.대학생들이 해방과 자유를 노래하며 어지럽힌 캠퍼스를 말없이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청소를 담당한 분들이다. 분수가 딸린 `일청담` 호수에서, 녹지(地)가 살아남은 학내 곳곳에서 그이들은 오늘도 청소한다. 오로지 입시 하나만 보고 자라온 청춘들은 가정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소란스러운 어린이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한국의 대학생들!그들은 거리낌 없이 강의실과 연구실 앞에서 소리치고, 전화 받으며, 떠들어댄다. 그들이 머물면서 생겨난 쓰레기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들은 당연한 권리나 되는 것처럼 아무데나 쓰레기와 오물(汚物)을 버린다. 목련과 명자꽃, 매화와 산수유가 흐드러진 대학은 쓰레기장이 되어간다. 벚꽃이 만개(滿開)하는 시점이면 여기에 대구 시민들이 가세한다. 학교는 완전한 유희공간이자 쓰레기장으로 변한다.오늘날 한국의 대학에서 진리나 정의 혹은 자유를 추구하는 학생은 전멸했다. 한국 대학생들은 부모가 원하는 직장을 얻기 위해서 모여든 예비 직장인들이다. 직장인 양성소인 대학은 자유, 정의, 진리 같은 추상적인 가치(價値)를 버리도록 강요받는다. 응용학문을 가르치는 경영대학과 공과대학, 정보통신대학 등에 소속된 교수들은 교양 교과목 폐지를 부르짖는다. 취업에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요체다.가파르게 상승하는 청년실업과 심각한 대졸실업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은 학생들을 취업시키는 기관만은 아니다. 대학에 부여된 기본적인 책무 가운데 하나는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며, 그 둘은 민주적인 시민의 소양(素養)을 길러주는 것이고, 그 셋은 인간의 본원적인 가치와 의미를 사유하도록 인도(引導)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한국의 황색언론들은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중요한 잣대로 들이댄다.언론사의 평가기준에 맞춰서 교육부도 뒤질세라 칼춤을 춘다. 1995년에 있은 규제완화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준칙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둔갑한다. 그 사품에 허다한 대학들이 난립하고, 2년제 대학들이 4년제로 승격돼 학력저하를 불렀다. 그것이 결과한 쓰라린 폐해를 감당하는 교육부 관료나 정치가는 하나도 없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구호는 허울 만으로만 존재한다. 코앞의 몇 년 세월도 내다보지 못하는 탁상행정이라니!대학생들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며칠만 방치하면 학교는 그야말로 아수라판이 된다. 그래서다. 우리가 청소하는 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런 연유(緣由)에서다. 남들이 버린 오물을 묵묵히 치우는 그분들이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그렇게 치우면 된다. 하지만 앞선 세대가 만들어낸 시대의 쓰레기는 어찌할 것인가?! 대학 자율화 이름으로 양산(量産)된 허울만의 대학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버리는 자 따로 있고 치우는 자 따로 있는 세상은 혼탁하다. 권력을 누리는 자 따로 있고, 그로 인한 폐해를 감당해야 하는 자 따로 있는 세상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21세기 대명천지를 살면서 여전히 낙후(後)한 관료제와 행정 서비스와 무너져가는 대학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시대의 쓰레기, 세대의 쓰레기, 무지와 이기와 탐욕의 쓰레기는 이제 그만 만들었으면 한다. 천지가 약동하는 봄에 이런 소박한 바람을 꿈꾼다.

2016-03-25

장자(莊子)와 곤줄박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아침을 준비하다가 창밖의 기척이 느껴진다. 눈 들어 보니 곤줄박이가 창안으로 들어오려고 날갯짓한다. 닫힌 유리창이 곤줄박이를 들여보내줄 리 없다. 하지만 곤줄박이는 자꾸만 날개를 파닥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포기하는가 싶더니 곤줄박이는 거실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다시 날갯짓하면서 곤줄박이는 창안으로 들어오려 한다. 얇고 투명(透明)하지만 견고한 거실 유리문이 곤줄박이를 막는다. 하릴없이 돌아서 날아가는 곤줄박이.무엇이 곤줄박이의 눈과 마음을 끌어당긴 것일까. 자신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거주공간을 욕망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인가 먹을 것이 있었든지 혹은 둥지 틀기에 좋은 장소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도로(徒勞)에 가까운 허망한 날갯짓은 설명할 수 없다. 하기야 언젠가 복숭아 과수원에 버려진 종이상자에 구슬보다 조금 큰 알을 낳아 품고 있는 박새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의 담대함이라니!지금 나는 연구실 창안에 있다. 봄볕이 따사로운 산책길을 따라 인총(人叢)들이 한가로이 걸음을 옮긴다. 안에 있는 나는 밖을 느끼지 못한다. 곤줄박이처럼 유리창에 날개를 부딪쳐가며 밖을 연모(戀慕)할 수는 없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릴 수도 없다. 낯선 행동이거나 금지되어 있거나 위험하기 때문이다. 창밖 세상을 몸소 느끼려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의 곤줄박이는 그것을 모른다.안에 있는 사람은 밖을 그리워하고, 밖에 있는 자는 안을 지향한다. 무식한 자는 지식을 탐하고, 부자는 권력을 꿈꾸며, 권력자는 돈을 욕망한다. 일찍이 장자는 `내편`양생주에서 지식의 폐해를 갈파(喝破)했다.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이 무한한 지식을 갈구하는 행위가 위태롭다고 말한 것이다. 지식은 돈과 권력으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무한한 재화와 권력을 욕망하는 것은 결국 재난과 파멸을 동반하기 마련이다.전국시대 동란(動亂)의 시공간을 살면서 장자가 느낀 것은 허망한 권력과 은자(隱者)의 생존방식이었다. 권력자의 호오(好惡)에 따라 문득 상실되는 권력의 신기루(蜃氣樓)! 그것과 결부된 사자성어 `예미도중`은 장자의 흉중을 웅변한다.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너머로 숨어버린 노자와 달리 저잣거리에 은둔하면서 유유자적했던 장자. 재상자리를 주겠다는 권력자의 제안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한 패기와 지혜의 장자.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여기저기 권력과 연관된 자들의 다채로운 행태가 이목을 사로잡는다. 나는 그들에게 권력의 요체(要諦)와 쓰임을 묻고 싶다.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권력추구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돈과 지식 혹은 경륜(經綸)을 어디에 쓰려고 저토록 무진 애를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세상을 위해 나섰다면 시대의 등불 노자와 장자가 숨어버린 뜻은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곤줄박이는 끝내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창밖에서 그것을 빤히 보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버린 것이다. 멧비둘기들 역시 애초의 희망을 관철(貫徹)하지 못했다. 둥지를 틀만한 장소가 아니었음을 간과(看過)하고 무작정 일을 시작한 탓이다. 열심히 하면 결과도 좋아지리라 여긴다면 어리석은 자일 터. 일에는 순서와 요령과 집중력이 소요되는 까닭이다. 지식, 권력, 돈과 결부한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리라.평생 최고의 지식인으로 살았지만 장자는 빈한(貧寒)했다. 빈한했지만 장자는 돈과 권력을 탐하지 않았고, 그로써 천수를 누렸다. 지극히 제한적인 시공을 향수하는 인생의 유한함을 몸소 실천한 장자. 숱한 일화와 우화로 시대를 밝힌 무한 상상력의 소유자 장자. 그를 떠올리며 부평초(浮萍草)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이 나라 정치인들을 생각한다. 곤줄박이와 멧비둘기의 허망과 실패가 어디서 발원하는지 숙고했으면 한다.

2016-03-18

망명 권하는 사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빙허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1921)에는 시대의 단면을 관통하는 풍속도(風俗圖)가 그려져 있다. 불학무식하지만 조신(操身)한 아내와 동경 유학까지 마친 엘리트 남편의 소통부재 상황이 그것이다. 결혼한 지 7~8년 지났건만 남편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이다. 중학을 마치고 동경으로 유학 가서 대학을 졸업한 남편에게 아내가 기대하는 것은 흐뭇한 돈벌이다. 그러나 장구한 세월 공부에 시간과 노력을 쏟은 남편은 허구한 날 술만 마신다.남편이 날마다 술을 마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온갖 궁리와 고민을 거듭하지만 그가 도달한 최종지점은 절망과 환멸이다. 공부했다는 조선인들이 벌이는 명예와 지위 다툼, 무익한 선악논쟁, 주야장창 분열(分裂)과 투쟁으로 얼룩진 조선사회.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지나간 지 겨우 이태 만에 경성에서 벌어진 남루(樓)한 풍경이다. 때로는 밖에서 열렬하게, 때로는 두문불출 하면서 남편은 갖가지 해결방도를 추구한다. 하지만 결론은 `술`이다.사회란 것이 자신에게 술을 권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술을 먹는 것은 “몸은 괴로워도 마음은 괴롭지 않기 때문이고, 조선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정꾼 노릇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끝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다시 세월이 흐른 다음 두 사람은 어찌 됐을까, 궁금하다. 본성이 선량한 두 사람을 가르는 심연은 `사회`에 대한 관점이다. 아내가 지향하는 윤택한 삶과 남편이 지향하는 번듯한 사회의 간극(間隙). 그것을 요약하는 어휘가 `사회`다. 사회는 부부가 살아가고 있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을 시공간 배경으로 한다. 개인과 가정의 범주에 머물러 있는 아내와 지식인으로 식민지 조선사회를 고민하는 남편의 시선(視線)이 어긋나 있는 것이다.`지금`과 `여기`를 바라보는 눈은 `취향`의 문제처럼 복잡하다. 동일한 사안을 두고 판단하는 인간의 기준은 천차만별이다. 그것은 각자의 세계관과 역사관, 그리고 자의식에서 발원한다. `술 권하는 사회`에서 빙허가 주인공의 말을 빌려서 일갈하는 대목은 찌르는 듯 아프다.얼마 전 39명의 야당 의원들이 192시간 이어간 `필리버스터`가 끝나자마자 여당이`테러방지법`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통과시켰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법률이라는데 왜 야당 의원들이 기를 쓰면서 법안통과를 저지하려 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이튿날 8만이 넘는 한국인들이 `카카오톡` 같은 `사회연결망 서비스(SNS)`를 버리고 `텔레그람`으로 `망명(亡命)`했다는 사실이다.식민지 조선시대도 아닌데 대한민국에서 망명객이 줄을 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만일 누군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보셨는가! 21세기 대명천지에 온 국민을 사찰(査察)과 감시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법률이 가결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의 휴대전화가 감청(監聽)될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여당 인사들도 적잖게 사이버 망명을 했다는 소식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국가를 구성하는 근간은 국민이다. 국민은 국가의 소유자산이 아니라 천부인권(天賦人權)을 가진 고귀한 생명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알고 있는 헌법 제1조 1항과 2항을 인용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백성이 주인인 나라이되, 모든 사람의 입에 쌀이 들어가는 나라가 민주 공화국이다. 그들이 위임한 한시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 정부와 여당이다.헌법 제17조와 18조를 인용한다.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 `테러방지법`은 법률이며, 그것은 헌법 아래 자리한다. `하위법`으로 `상위법`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위헌소지가 있다. 텔레그람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이 평안한 소통과 통신의 자유를 누리기 바란다. 그리고`사회`로 인한 남편과 아내의 소통 불가능한 상황이 조속히 종결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6-03-11

항일시인 윤동주와 일본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은 아마 윤동주일 것이다. 소월(素月) 김정식이나 미당 서정주를 애호하는 독자들도 적잖을 테지만. 소월의 정한(情恨)과 미당의 친일(親日)은 나름의 한계를 가진다. 나는 육사(陸史) 이원록 시인을 제일 사랑한다. 이육사-윤동주 시인은 간악한 일제강점기를 의연하게 견뎌낸다. 그들로 한국 문학사는 암흑기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얼마 전 일본 후쿠오카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일본인들이 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 자리에 윤동주 시비(詩碑)를 세우려 하는 것이다. 내년은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인데, 일본인들은 그날을 시비로 기리고자 하는 게다. 한국인도 애송하는 `서시`를 함께 읽고 동주를 사모하고 기리는 일본인들이라니! 각박한 염량세태(炎凉世態)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시인과 역사를 일본인들이 추억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일본인들의 문학사랑은 남다른 구석이 있다. 대략 800만 정도의 일본인들이 전통적인 단시(短詩) `하이쿠(俳句)`를 즐긴다는 통계가 있다. 명치시대를 살다간 하이쿠의 명인 다쿠보쿠는 오늘날까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짧은 만화영화 `언어의 정원`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일본의 전통 시가집인 `만엽집`이다. 이밖에도 선승(禪僧)들의 선시나 중국에서 전래된 각종 한시(漢詩)를 애호하거나 창작하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작년에 중국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소주(蘇州)를 찾아갔다가 `한산사(寒山寺)`에 몰려든 일본인 관광객들과 마주쳤다. 50대 이상으로 이뤄진 일본인 관광객들이 한산사에서 주목하는 것은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었다. 단 한 편의 시로 중국 문학사에 등재된 장계의 7언 고시 `풍교야박`은 일본의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15년 전까지만 해도 윤동주의 시도 일본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고 전한다.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는 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두는 정황(情況)까지 서술하면서 시인의 사인(死因)을 밝히는 것이 일본인들의 소명(召命)이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일본과 일본인은 더러 생뚱맞게 어긋나곤 한다.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맹방(盟邦) 미국과 미국인의 형상이 어긋나는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동주와 장계 두 시인의 예에서 나는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실감한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어떤 국어 교과서에도 일본과 중국의 시인이나 작품은 소개돼 있지 않았다. 뜬금없이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나 `별` 혹은 스토우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같은 서양문학을 배운 기억이 새롭다. 지근거리(至近距離)의 중국과 일본문학은 치지도외(置之度外)하고 구미의 문학을 가르친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궁금하다.한반도는 근본적으로 한문-유교-도교-불교 문화권에 속한다. 남북한과 중국-대만 그리고 일본은 동일한 문화권에서 상호 교류하면서 장구(長久)한 세월을 살아왔다. 이런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권 공유는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커다란 자산이자 전통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를 배우고 익혀야 한다.때마침 이준익 감독의 `동주`가 상영되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귀향`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합의”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욕보인 정부는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런 시점에 동주 시비를 건립하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이라니!죽는 날까지 맑음과 곧음과 보편적 사랑을 설파했던 동주와 반일투쟁에 평생을 헌신했던 백마 타고 온 육사. 우리에게 영원한 정신적 자양과 성찰의 근거를 만든 두 시인을 초봄에 사유한다. 반면에 연변의 용정에 자리한 윤동주 박물관과 서툰 중국어로 번역된 낯선 시편(詩篇)들이 널브러져 있는 풍경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항일시인 윤동주가 아니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되는 윤동주! 이 나라 문화 책임자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새삼스럽다.

2016-03-04

싸움의 미학과 화해의 미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 배치로 나라안팎이 어수선하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그것에 대응하는 한국정부의 움직임이 전광석화(電光石火) 같다. 필연적으로 예정된 수순을 따라가는 바둑 기사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다. 여기에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야심과 거기 편승하려는 아베의 일본이 동조(同調)한다. 한반도 북단과 중국 및 러시아가 가세하는 동조세력의 규합 역시 불 보듯 자명(自明)해진다. 그것이 국제정세이자 외교다.며칠 전 언론은 북한이 제4차 핵실험 직전에 미국과 평화협정을 위한 비공식 접촉을 보도하고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촉발한 북미접촉은 한국 보수언론에게 민감한 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을 배제(排除)한 북한과 미국의 비밀접촉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접촉하기 전에 강력한 대북제재가 우선이라는 것이 그들의 사유근저에 자리한다. 문제는 남북대화 창구가 완전 차단된 시점에서 북미접촉 보도가 나왔다는 점이다.지난 17일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평화협정을 동시에 추진하자”고 제안한 이후인 21일 북미접촉설이 불거져 나온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식적으로 미국정부는 한반도 비핵화가 북미 평화협정에 우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국제정세라는 것이 언제나 언행일치(言行一致)를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留念)해야 한다. 어느 나라건 자국의 최대이익을 위해 실행하는 것이 외교이기 때문이다.지난 23일 사드배치를 위한 한미 약정체결 연기(延期)는 곱씹어볼만한 대목이다. 왕이 외교부장과 케리 국무장관 회담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약정체결 연기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쯤 되면 한국 외교부와 국방부는 숙고해야 하지 않을까?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배치라는 초강수를 둔 지금 미국과 중국의 동향(動向)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생각해야 한다. 분단 당사자를 놔둔 채 강대국에 민족의 운명을 떠넘기지 않았는지, 생각할 일이다.지난 세기(世紀) 1980년대 동구(東歐) 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지어 몰락하고, 1991년 말에는 소련마저 무너져버린다. 세계정세의 급변 와중(渦中)에서 한국의 살길을 북방외교(北方外交)에서 찾은 이가 노태우 대통령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에게 손가락질 하지만 그가 이룩한 중국과 러시아 수교는 한국의 외교와 경제 및 국방에 활력을 불어넣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은 한국 수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다.우리는 중국과 러시아와 교류하면서 세계적인 변화를 수용한 반면 북한은 미국과 수교하지 못함으로써 정치 경제적 고립무원(孤立無援)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어언 4반세기가 흘렀다. 미국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쿠바와 이란과 화해와 교류의 마당을 열었다. 지구촌 최강국 미국과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한 듯하다. 북한이 미국과 수교하고 현재의 무력갈등과 대결국면을 해소(解消)한다면 우리로서도 마냥 반대할 일만은 아니다.어차피 우리는 통일한국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통일비용을 최소화(最小化)하는 것이 절실하다.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살림을 통일비용으로 지불하는 것은 고통으로 점철되기 십상이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개혁과 개방에 나서도록 견인(牽引)하고, 화해와 협력으로 민족 동질성 회복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과제다. 북한과 미국의 접촉과 중국의 입장을 매양 반대하고 나서는 것은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상황이 이런데도 보수언론은 우리만 빼고 북한과 미국이 만나면 어쩌나, 그것만 걱정한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민족통일이라는 견지(見地)에서 미래를 기획하는 장쾌(壯快)한 시각을 가져야 할 때다. 한반도가 일촉즉발 위기상황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외교와 국제정세는 여자들 머리채 싸움이나 촌사람 신문타령 하는 한가한 여흥이 아니다. 근시안 보수 언론들의 자세전환을 촉구한다.

2016-02-26

경비원을 해고하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만 55세 정년하면 끝나는 인생이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정년을 늘리는 추세(趨勢)라지만 청년백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판국에 `오륙도`소리 듣기도 저어된다. “오십 육세까지 회사 봉급 타먹으면 도둑놈”이란 뜻이다. 거기서부터 중년 남성들의 고뇌가 발원한다. 30년 가까이 봉직(奉職)한 회사를 나와 갈 곳이 없는 것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려 봐야 오라는 데는 없고, 결국 등산이 시작된다. 등산객 대열에 합류한다.나의 선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퇴직하고 집에만 계시다보니 허구한 날 잔소리만 늘어서 모친과 말다툼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 두 분을 구원한 것은 등산도 자식도 친구도 아니었다. 아파트 경비 일이었다. 선친은 이틀에 한 번 꼴로 24시간 근무를 해야 하는 고달픈 경비원이 되셨다고 했다. 쉬시는 날에는 밀린 잠을 주무셔야 했기에 두 분 사이의 말다툼은 아예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약간의 용돈도 가능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一擧兩得)!그 무렵 나는 베를린의 야경꾼이었다. 도이칠란트 정부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유능하지도 못했고, 부모님 신세를 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輾轉)하다가 찾아낸 것이 야경 일이었다. 금요일 저녁 8시부터 토요일 아침 7시까지, 토요일 저녁 7시부터 일요일 아침 7시까지! 그렇게 23시간 야경을 하면 세 식구 생활비가 마련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안양에서 동방의 밤을, 자식은 베를린에서 서방의 밤을 지킨 셈이다.야경꾼 노릇하면서 나는 베를린 장벽 붕괴(崩壞)와 실존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동서 도이칠란트의 재통일 같은 유럽의 격변(激變)을 목도했다. 주말마다 폴란드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도이칠란트의 질 좋은 생필품을 싹쓸이하고, 동도이칠란트에서 무작정 월경(越境)한 간호사의 지친 얼굴이 아직도 선연하다.어제 아침 포털에 `아파트 경비원 해고를 둘러싼 법정다툼`이란 기사가 올라왔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을 해고하고 자동시스템을 설치하려다가 주민들이 반발했다는 것이다. 주민들 사이에 경비원 해고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법정으로까지 비화(飛火)됐다는 기사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다. 가구마다 월 7만원이 절감된단다. 그걸 위해서 60-70대 경비원들을 몰아내려는 것이다.무인경비시스템 설비사업에 대기업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이 자꾸만 쫓겨나간다. 가진 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돈도 힘도 없는 민초들이 거리로 내밀리는 것이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 7만원. 경비원들의 업무는 경비 이외에도 택배보관과 전달, 아파트 주변청소와 화단정리, 폐지정리와 공병수거 등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자 어른들이다. 형편이 넉넉한 분들도 있겠지만, 대개는 나의 선친처럼 주머니사정이 여의치 않은 경우다.기계화도 좋고 자동화(自動化)도 오케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잘려나가는 우리의 가까운 이웃을 돌이켜봤으면 좋겠다. 하기야 공동체는 고사하고 이웃도 어른도 없는 황량(荒凉)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 아닌가?! 조만간 우리도 노인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고, 자식은커녕 친구도 돌아보지 않는 세태와 직면(直面)할 것이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판단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충실한 앞잡이로 길들여졌으니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그럼에도 나는 희망한다. 최소한도의 인간다움과 여유로움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남편 내 새끼가 귀한 것처럼 이웃집의 남편과 자식들도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이다. 백세시대를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태에 살면서 그것에 담긴 함의(含意)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미소(微小)한 존재임을 기억하는 일이다. 길지 않은 세월, 더러는 베풀면서 살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드는 아침이다.

2016-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