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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하오리까?!

등록일 2016-07-29 02:01 게재일 2016-07-2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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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도가의 창시자인 태상노군의 `도덕경`은 세상을 뒤집어보는 관점의 정수(精髓)를 보여준다. 예컨대 `도덕경` 제18장에 이런 구절이 있다.

“대도폐 유인의(大道廢 有仁義), 육친불화 유자효(六親不和 有慈孝), 국가혼란 유충신(國家昏亂 有忠臣).”

현대어로 번역하면 “대도가 없어지니 인과 의가 나오고, 육친이 불화하니 자애와 효도가 있으며, 국가가 혼란하니 충신이 생겨난다.”

놀라운 역설 혹은 아이러니 아닌가.

인과 의는 고대 동양, 특히 유가(儒家)에서 숭상해마지 않은 덕목인데, 그것의 출현을 커다란 도의 사멸에서 보고 있으니 말이다. 부자와 부부, 형제의 혈연관계에 기초한 육친의 덕목이 자애와 효도인데, 그것의 발원을 불화에서 독서함은 낯설게 하기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충신이 나타나는 현상을 국가의 혼란에서 독서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과 지극한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태상노군의 사유를 유추하면 인간세상을 관류(貫流)하는 근본으로 대도(大道)가 올바르게 작동한다면 인의 (仁義) 같은 덕목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부자와 부부, 형과 아우가 본분을 다한다면 자애와 효도가 무슨 쓸모가 있겠느냐, 그런 생각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면 충신이 나올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찜통더위와 열대야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엄습하는 요즘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다. 권부의 핵심에 있는 자들의 국정농단이 국민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기 때문이다. 양파껍질마냥 들춰지는 그자들의 비리를 볼라치면 이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지, 한숨이 앞선다.

노자의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국가가 너무나도 안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오리(汚吏)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막힌 역발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근자에 다시 읽은 사마천의 `사기열전`가운데 `순리(循吏)`로 이름 높았던 석사(石奢) 이야기가 생각난다.

전국시대 초나라 소왕의 재상이었던 석사. 그는 지방순행 중에 살인사건과 대면한다. 살인자를 추적한 끝에 잡고 보니 자신의 아버지였다. 아비를 놓아주고 난 다음 석사는 스스로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소왕에게 사람을 보내 고한다.

“아비를 처형하고 정사(政事)를 바로잡음은 불효이며, 아비의 죄를 용서하고 방면함은 불충입니다. 부디 저를 벌하여 주소서!”

소왕은 석사의 사정을 듣고 그 죄를 묻지 않으려 한다. 죄인을 잡지 못한 것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니 예전처럼 국사를 보필하라 명한다. 그러나 석사는 소왕의 명을 거역하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부자의 정을 앞세우자니 국가가 흔들리고, 국가를 내세우자니 천륜(天倫)을 거역해야 하는 막다른 상황에서 석사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양자(兩者)를 살리되 스스로를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다.

독자 여러분이 석사의 상황이라면 어찌 하시겠는가. `부지지정`을 따르시겠는가, 아니면 `우국충정`에 헌신하시겠는가. 혹은 석사와 같은 고난의 선택을 취하시겠는가.

대도가 사라진 지 오래건만 인과 의가 죽어 없어지고, 육친은 불화하지만 자애도 효성도 말라버린 시대. 나라가 지극히 어지러운 시절임에도 충신을 찾기 어려운 시대상황을 보면서 `도덕경`과 `사기열전`을 떠올림은 열대야를 식혀줄 청량한 한 줄기 바람을 대망(待望)하는 서민의 심경 아니겠는가.

그러하되, 머지않아 가을은 또 찾아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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