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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인을 위한 변명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한자어로 `시(詩)`를 보면 절(寺)에서 하는 말(言)이다. 구도자인 스님의 언어로 이해 가능하다. 참선수양에 기초한 선종(禪宗)의 영향이 강한 한국 불교에서 본다면 불가(佛家)의 언어는 소략하리라. 수다스러운 스님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화두 혹은 공안(公案)을 붙들고 맹렬하게 면벽 수도하는 수도승의 모습을 떠올리면 좋을 터. 진리의 요체는 간결함에 있고, `돈오돈수`를 깨달음의 방편(方便)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장황함은 문득 낯설다.시의 본질은 간결함 속에 깊이와 다채로움의 함축에 있다. 예외적인 형식, 예컨대 산문시나 서사시는 별도로 하고 말이다. 깊이 있는 성찰과 지성을 다채로운 언어 형식으로 간결하게 드러냄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여기에 시를 쓰는 고단함이 자리한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동료교수 가운데 시인이 있으면, 나는 교수 대신 언제나 시인이란 호칭을 쓴다. 교수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시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요즘 시인들의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 주관성의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주변적인 일상이나 사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나 이육사, 한용운과 김남주, 박노해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시는 독자들과 멀어진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강제노역에 가깝다. 시가 어렵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본디 시를 읽지 않는다. 시집을 사지도 않고, 시인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현대 한국사회의 거칢은 여기서 발원한다.언어는 인간사유의 창고이며, 소통의 기초적인 수단이자 실천의 기반이다. 언어로 자신의 사유와 인식을 정확하고 자유자재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뒤흔들게 되면 사회는 거칠고 황막해진다. 그래서다.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시를 읽고 느끼며 써보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 시를 읽고 음미하면서 정서와 인식을 함양하는 사람들의 사회는 따스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가 가능하다.우리 조상들이 남긴 45자 내외의 시조(時調)나 일본 대중들이 즐겼다는 `하이쿠`는 오늘날까지도 적잖은 의미를 던진다. 단순한 형식과 단출한 내용을 담은 시조와 하이쿠에서 깊이 있는 성찰과 대면하는 일은 실로 유쾌한 일이다. 그런데 시조나 하이쿠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 수능시험에서 필요한 최소한도의 문제풀기 능력만 지참한 채 대학생이 되고, 그런 상태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차고 넘쳐나는 대한민국.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봄바람 소리 이젠의 귓가에 말방울 소리.” 일본의 하이쿠 시인 히로세 이젠의 하이쿠다. 봄바람은 겨울바람이나 여름의 태풍처럼 거세지 않은 미풍(微風)이 주류다. 하여 그 바람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계절에 민감한 시인의 귀는 봄바람 소리에서 말방울 소리를 듣는다. 누구의 귀에도 들리는 `짤랑짤랑` 하는 명징한 소리로 들려오는 봄바람. 감수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감촉의 시인 히로세 이젠의 절창이다.하지만 대학생들은 이 시의 본질과 풍류(風流)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던 걸음 멈추고 봄바람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물론 말방울 소리도 헤아려본 적이 없다. 자연과 무관하게 시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범벅된 도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무감각한 세대. 문제는 그런 거칠고 둔탁한 서정의 변화와 발흥을 위해 기성세대가 해주는 게 없다는 사실이다. 먹고사는 게 급선문데, 시 나부랭이가 뭐 대수냐, 하는 인식에 갇혀있는 한국의 거친 기성세대.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나라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사회적 인식은 고사하고 배고프고 등골 써늘한 직업인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노릇은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시인을 사랑하고 시를 읽어야 한다. 시에서 구원과 희망과 미래의 별빛을 독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여, 정유년의 밝히는 찬연한 횃불이 되기를!

2017-02-03

누구에게 충성할 것인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윤동주 시인이 남긴 `참회록` 1연이다. 시인은 녹슨 동경(銅鏡)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욕된 자태를 독서한다. 이제는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왕조의 후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시인. 오래도록 닦지 않아서 파랗게 녹슨 구리거울에 비쳐진 얼굴은 흐릿하기도 하고 나이에 비해 늙고 초췌해 보인다. 그것을 자조(自嘲)하는 청년시인.왕조의 유물이면 응당 박물관에 있어야 할 터. 거기서 치욕을 읽어내는 시인의 내면풍경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기독교인의 원죄의식과 부끄러움이라는 두 가지 어휘를 끼고 살았던 윤동주. 시인은 한반도 어디, 어느 무렵쯤 있었을 왕조를 사유한다. 근사치(近似値)는 조선왕조였을 터. 반도를 떠나 용정 `명동촌`을 떠돌아야 했던 집안의 장손 동주. 식민지 청년문사를 자조와 회한으로 인도하는 동인(動因)은 무엇이었을까.조선왕조의 신민(臣民)은 국왕에게 충성했다. 그러나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한 조선의 궁극적인 힘은 충이 아니라, 효에서 나왔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왕가의 인식저변에 깔린 것은 종묘사직이었고, 그것은 왕가가 끝난다면 국가도 소멸한다는 생각이었다. 불이 나더라도 조상들의 신주단지만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것이 양반들의 행태였다. 그래서일까?! 국난이 닥쳤을 때 조선을 구한 주체는 왕가도 양반도 아닌 불학무식한 민(중)이었다.`국뽕`이라 일컬어지는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이 큰아들 회에게 말한다. “충은 군왕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죽이려 했고, 끊임없이 의심의 눈으로 통제사를 바라보는 암군(暗君)을 향한 충성에 문제를 제기한 아들 회. 그에 대한 순신의 간결한 대답이 백성을 향한 충이다. 국왕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고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16세기 인간 이순신의 사유는 그러했다. 그럼에도 조선은 망하고야 말았다. 나는 그 원인을 이순신의 충이 아니라, 사적(私的)인 관계의 충에서 본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이순신 사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야기한 자들의 사유와 실천의 근간에 자리한 것은 민이 아닌, 군왕을 향한 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영달과 가문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었다. 국가와 민과 지도층의 충과 의리 대신 가문과 군왕과 신하의 거래가 똬리를 튼 것이다.신년벽두에 새삼 충을 생각하는 것은 그 잘난 머리와 실력을 가졌다는 자들의 대통령 1인을 향한 충과 그 이득에 문득 아득해진 까닭이다. 숱한 교수와 박사와 사시합격자들이 위증(僞證)을 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하는 자리와 이득과 패거리주의에 끝내 절망하는 것이다. 입만 벌리면 국가와 민족을 말하던 자들의 마지막 모습이 돈과 권력에 귀착하지 않았는가!보수와 수구세력과 그 추종자들이 구두선(口頭禪)처럼 뇌까리는 애국과 애족은 어디 갔는가. 안보와 민생을 외쳤던 자들의 궁극적인 지향은 무엇이었는가. 부패와 무능과 타락과 패거리주의로 점철된 보수와 수구세력의 분탕질을 보면서 동주의 시를 떠올린다. 만 24년 1개월에 썼다는 처절한 시 `참회록`. 그 새파란 나이에 윤동주는 그런 고백을 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삶을 살았던가. 한국의 보수와 수구가 자랑스러운 자들에게 나는 묻는다.동주의 `참회록`을 읽고 그 뜻을 헤아린 적이 있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맑고 투명한 시인의 생애에서 솟구치는 고독과 설움과 성찰의 메시지를 꿈에라도 돌이킨 적이 있었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수치의 굴레로부터 해방되고자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가?! 시인의 성찰이 새삼스런 냉랭한 겨울 아침이다.

2017-01-20

블랙리스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시드니 포와티에 주연영화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은 흑백의 결혼문제를 다룬다. 교양 있고 지성적인 흑인의사와 청순하고 재기발랄한 백인처녀가 맺어질 수 있겠느냐, 하는 줄거리가 핵심이다. 영화가 개봉된 때는 미국에서 흑인이 백인과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공식적으로 부여된 원년인 1967년이었다. 공교로운 일치다. 하지만 불과 1년 후 인종차별에 저항하고 인종화합에 앞장섰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다.`검은` 색과 `검은` 것에 대한 백인들의 혐오와 공포가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아메리카의 흑인들은 제국주의가 불러온 것이다. 값싼 노예노동으로 최대의 이윤을 챙기려 했던 백인들의 더러운 욕망이 야기한 인신매매의 결과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생각했고, 그런 관념은 남북전쟁(1861~1865) 이후에도 뿌리깊이 살아남았다. 언론에 보도되는 백인경찰의 비무장 흑인청년 살해나 구타는 연원이 깊고도 너른 것이다.밤과 어둠, 암흑에 대한 동물적인 두려움과 기피가 검은색에 불온한 딱지를 붙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계몽주의와 과학기술혁명, 민주주의 확산 이후에도 검은색과 검은 피부에 대한 혐오가 지속됨은 인간의 본능이 진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 조상들은 양자의 대결보다는 조화를 찾으려 한 듯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했던 선비가 있었지만,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고 백로를 비난한 선비도 있었으니 말이다.기억에 남는 명구(名句)는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이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주장이다. 거기 담긴 함의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중국 인민들의 배만 채워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중국굴기의 단초를 제공한 등소평의 유연한 사고는 배움직하다. 그것을 나는 바꿔 말한다. “나는 원칙을 타협하지는 않지만, 타협한다는 원칙은 가지고 있다.” 원칙고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 아닌가?!나라안팎을 엉망으로 들쑤시는 `최박게이트` 때문에 정유년 벽두부터 우울하다. 근자에 회자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심사가 더욱 편하지 않다. 1만명에 달한다는 문화-예술계 인사의 목록에도 끼지 못했으니 “내가 이러려고 국립대 교수질을 했나”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청와대와 정부의 관제행사와 사업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예외 없이 얽었다니 기가 막힌다. 반대자들의 사상검증을 광명천지 21세기에 감행한 시대의 희화(戱畵)가 아닐 수 없다.1천만 관객의 `변호인`(2013)과 `광해`(2012)마저 그 사슬에 걸려들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외국인과 재외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에서 `천안함 프로젝트`(2013)와 `변호인`, `광해`를 금지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에 권부 실세들이 반감을 가지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국민들의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받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열등감과 열패감,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한 치기어린 사감(私憾)의 발로일 테니까.`광해`까지 상영을 금지한 것은 뜻밖일지 모르겠다. 500년 전 환란의 시대를 살다가 비운을 맞이하여 군왕의 호칭마저 빼앗긴 광해! `광해`는 조선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21세기 국민들이 바라는 최고 지도자의 덕목을 환하게 밝힌다. 그것은 가난하고 헐벗고 주린 백성들을 위한 정책집행과 자주적인 외교를 실행하는 것으로 요약 가능하다. 옹졸하고 졸렬하며 무능하고 부패하며 타락한 권력자와 부역자들의 금지와 칼질이 참 고약하다.국가권력의 실행이란 반대자들을 포용하는 것에 요체가 있다. 권력자와 생각과 정서와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적으로 돌리는 짓이야말로 유아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은 행위다. 그런 자들이 만들어내고 유포한 블랙리스트가 득세하는 암울한 시기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어쩌면 블랙리스트의 대상영역과 범위가 확장될지도 모를 일이라 한다. 그 어느 곳에 내 이름자가 오롯 자리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7-01-13

시대 전환기의 길을 찾아서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언제부턴가 각종 언론에 4차 산업혁명에 관한 기사가 하나둘 실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인공지능과 로봇, 사물(事物)인터넷, 빅 데이터와 3D 인쇄기, 자율주행차와 드론 같은 품목이 인구(人口)에 회자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로봇이 등장해서 크고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페퍼(Pepper)가 그중 하나다. 페퍼는 소프트뱅크가 제작해 2015년 6월부터 판매하기 시작한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 Humanoid)이다. 페퍼의 키는 1m 21cm이며 몸무게는 29kg이다. 페퍼는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로 상대방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다. 기쁨과 슬픔 같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한숨을 쉬거나 목소리를 조절하기도 한다.페퍼는 감정표현 외에도 인공지능과 통신기능을 탑재(搭載)하여 인터넷으로 뉴스와 날씨를 분석하고, 노인들의 체조를 돕거나, 퀴즈 프로그램을 함께 할 수 있다. 페퍼는 미국으로 진출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쇼핑매장과 실리콘벨리에서 근무한다고 전한다. 고객이 원하는 물건의 위치를 알려주고 안내해주는 구실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다.로봇이란 용어는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로보타(robota)`에서 나왔다. 따라서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체코의 소설가 카렐 차페크(Karel Capek)가 1921년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이라는 희곡에서 처음 사용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로봇은 1977년에 제작된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R2-D2다.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25년이면 인공지능-로봇이 대체할 일자리가 전체 일자리 가운데 60%를 상회할 것이라 한다. 단순노무직과 농림어업분야의 인공지능-로봇 대체비율은 90% 내외까지 상승한다. 고도의 전문직은 상대적으로 대체비율이 낮지만, 2050년 무렵에는 이른바 `초(超)지능`이 등장하여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세계가 다가올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상황이 이럴진대 2017년 신년벽두 대한민국의 사회-정치적인 지형은 어떠한가?! 지난 세기 군부독재의 하고많은 적폐(積弊)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온 국민과 나라가 고통 받고 있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면서 털어냈어야 할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가 우리의 발목과 영혼을 붙잡고 끝없이 흔들어대고 있다. 거리와 광장의 촛불이 불타오른 원인은 거기 있다!불의한 자들이 패권(覇權)을 장악하고 끼리끼리 해먹는 전근대의 악습과 악폐가 근절되지 않은 퀴퀴한 대한민국. 그것을 일거에 해소하고자 천만 개의 촛불이 광장과 거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어둠을 밝힌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젊은이들을 근심하고, 나이든 분들을 염려하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국민을 첫 번째로 고뇌하는 지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2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룩한 유일국가 대한민국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2016~17년.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변혁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하는 본원적인 문제를 숙고해야 하는 시점에 우리는 서있다. 추악한 과거와 작별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래와 만날 방도를 사유해야할 시점과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각별한 시대 전환기에서 나는 주장한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기득권세력과 작별하자! 민주와 민권에 입각한 미래기획은 사악하고 타락한 과거와 작별한 연후에 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하자. 1% 기득권집단과 싸우는 99% 민중의 땀과 피, 한숨과 절망을 웃음과 희망과 두둑한 주머니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 청년실업과 노인빈곤, 자살자들의 행렬과 자영업자들의 줄도산을 기억하고, 권력과 결탁한 재벌들의 행악질을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 이제 정유년 새해와 더불어 우리 힘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국민을 따사롭게 보듬을 시각이다!

2017-01-06

권력의 노예, 권력의 포로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한 조각 빵을 훔치려다 19년 옥살이를 해야 했던 장발장. 절도와 가택침입죄로 5년, 네 차례 탈옥기도로 14년, 도합 19년의 수형(受刑) 생활. 위고가 예수 탄생 이후 최대의 역사적 사변이라 격찬했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죄수 장발장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가 여덟이나 되는 굶주린 조카들 때문에 절도(竊盜)를 감행한 때는 1795년 겨울, 수감된 것은 이듬해 초, 가석방된 시기는 1815년이었다. 대혁명 발발 이후 26년 만에 그는 출옥한다. 혁명은 위대했으되, 시간과 더불어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나의 세대가 꼬박 바뀌는 동안 지배질서는 눈곱만큼도 요동(搖動)하지 않은 것이다. 낭만주의자이자 학술원 회원이었던 위고가 주목하는 지점이 여기다. 어째서 혁명은 최하층 민중 장발장과 그의 불우한 이웃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레미제라블`의 요체(要諦) 가운데 하나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의 문제제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는가?!위고는 1815년 출옥한 장발장의 행적(行蹟)을 따르면서 1832년 6월 5~6일 봉기까지 그려냄으로써 격변의 시대를 조명한다. 시대와 불화하면서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와 자베르 경감, 그리고 코제트와 조우하면서 인생의 비의를 깨달아간다. 소설 곳곳에서 위고는 자신의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데, 국민의회 의원 지(G)와 주교의 대화는 특히 흥미롭다. 루이16세의 처형과 사형제도, 혁명의 폭력성에 대한 양자(兩者)의 대화는 긴장과 역동성으로 가득하다.무엇보다 독자는 자베르와 장발장의 악연(惡緣)과 대결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위고는 그들을 선명하게 구분한다. `법률의 포로捕虜)` 장발장과 `법률의 노예(奴隸)` 자베르. 우연한 범법(犯法)으로 법률의 포로가 됐다가 법률로부터 해방되는 장발장. 타고난 법률의 노예이자 가진 자들의 충견(忠犬)으로 살아오다 장발장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 자살하는 자베르.우리는 2016년 11월과 12월 세계사적인 대변혁의 주인공으로 나날을 살아간다. 한국인들은 한낱 보잘것없는 60대 여성의 농단으로 불거진 한국사회의 난맥상을 극복해 변혁과 혁명의 역사에 획을 더하고자 한다. 그 최초의 빌미를 제공한 자는 `권력의 노예`이자 현직 대통령이다. 이른 시절부터 권력에 복무해온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뼛속까지 권력에 노예화한 인간으로 평생을 살아온 인간의 무표정한 원형질(原形質)과 우리는 대면하고 있다.권력의 노예를 자유자재로 부려온 `권력의 포로`는 지금 수인(囚人)이 되어 자신의 범죄사실을 모두 부인(否認)한다. 모든 것이 허위(虛僞)고 가짜이며 조작됐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노예는 권력의 포로가 자행한 농단이 1% 미만이라고 강변(强辯)한다. 권력의 노예와 권력의 포로가 내뱉는 언어와 사기행각에 온 국민의 일상이 희화화(戱畵化)된 21세기 대한민국. 이 지점부터 우리의 형안(炯眼)이 절실하다. 어디로 어떻게 출구를 찾아 나설 것인가, 그것이 관건이다.1832년 6월 파리봉기는 처절하게 실패한다. 민중은 문을 닫아걸고 혁명가들을 방기(放棄)한다. 민중은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는 법. 2016년 한국인들이 어디까지 움직일 것인가, 여기에 세계시민들의 눈과 귀가 쏠려있다. 기막힌 역사의 소용돌이를 극복하는 시민혁명의 길과 우회로(迂廻路) 앞에서 회군(回軍)한 87체제의 도돌이표 앞에 우리는 서있다.곧 병신년이 가고 정유년이 오고, 이어서 2018년 무술년이다. 위태로운 잔나비 칼춤의 끝을 용감한 수탉이 목 놓아 노래하고, 충직한 개가 새로운 시대의 서막(序幕)을 든든히 지키는 첨병(尖兵)이 된다. 그러하되 사악(邪惡)한 시대의 종언과 부역자 무리의 잔당은 쉽게 그 자리를 놓지 않는 법. 하여 우리는 병신년 마지막 날까지 권력의 노예와 포로들이 현란하게 벌이는 칼춤의 향연을 주시(注視)할 노릇이다. 그러하되 정유(丁酉)의 봄은 과히 멀지 않다.

2016-12-30

재벌들의 돈벌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재벌들은 이재(理財)에 밝다. 지난 12월 17일 서울시내 신규특허 면세점 사업자로 롯데 월드타워, 신세계 센트럴시티, 현대 무역센터가 선정됐다. 이로써 기존의 롯데 소공과 코엑스, 신라 서울, 동화, 호텔신라, 한화, 현대산업개발, 두산 등 13곳의 면세점이 각축을 벌일 전망이라고 한다. 면세점들 가운데 롯데와 호텔신라, 한화와 현대산업개발, 두산과 신세계, 현대백화점 등 7곳이 재벌 대기업에 속한다. 이래도 괜찮은지 의문이다.신규 면세점 사업권은 일단락됐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 중론(衆論)이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국정농단`사건과 관련해 최씨가 면세점 사업에 개입한 의혹을 가지고 검찰과 특검수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씨를 조사한 검찰은 신규면세점 추가특허 특혜의혹과 관련하여 기획재정부와 관세청, 롯데와 SK그룹도 압수수색했다. 향후 특검에서도 면세점 특허심사 로비-특혜의혹을 조사할 것이라 한다.검찰과 특검의 수사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시내 면세점 신규사업자 선정이 예정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나 관세청은 일정을 강행했다. 관세청은 면세점 결정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면 허가를 취소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최악의 경우 서울시내 면세점 신규사업자로 선정됐지만 특허권이 취소될 수 있기 때문에 특검수사 결과가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 국한(局限)되지 않는다.대기업이 선단식(船團式) 경영으로 일반 중견기업과 중소기업을 압박하면서 갑을관계로 한국경제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지난 세기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시절 행정부와 밀착하여 각종 특혜와 지원, 로비와 정경유착으로 오늘의 부(富)를 이룬 것이 한국의 재벌이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그들의 돈벌이를 용인(容認)한 것은 국부(國富)의 확장이라는 긍정적인 면과 암울한 시대의 반민주적인 분위기 탓이었다.정주영 같은 탁월한 경영인이자 기업가가 한국경제의 견인차(牽引車) 구실을 해낸 적도 있다. 한국 근대화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경제인으로 정주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적잖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절대다수 재벌 총수들은 각종 불법-초법-무법-탈법-위법-범법으로 기업의 외형과 자산을 불려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 18일 기업의 외면과 정부의 무관심 곳에서 삼성반도체-LCD직업병 피해자 가운데 78번째 사망자가 있었다.돈벌이에도 격(格)이 있어야 한다. 기업을 뜻하는 `엔터프라이즈`에는 모험심과 진취적 기상 같은 의미도 들어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를 마다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이 기업가의 기본자세다. 그런 기업가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다. 편의점과 빵집, 커피에 이르기까지 골목상권마저 쥐락펴락하는 재벌기업들의 치사하고 뻔뻔한 작태(作態)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래서 국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을 수 없다.자연생태계에도 먹이사슬 구조라는 것이 있다. 각자 생의 영역을 확보하고 그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자나 호랑이가 토끼나 쥐를 잡아먹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그것은 여우나 늑대가 할 짓이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들은 보란 듯 중소-중견기업들의 팔목을 잡아 비튼다. 그들에게서 상도의(商道義)를 찾는 것은 한국에서 `오로라`찾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반세기가 넘도록 유지된 정경유착에 있다.우리는 `최순실 게이트`라는 미증유의 현상과 직면하고 있다. 사태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정부권력과 재벌자본이 음습(陰濕)하게 결탁했다는 사실이다. 재벌과 권력이 유착하여 국민세금과 미래기획과 개천의 용꿈을 거덜 내는 후안무치하고 방약무인(傍若無人)한 범죄행위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이제라도 재벌들은 최소한의 품위와 품격을 가지고 돈을 벌었으면 한다.

2016-12-23

가문과 국가 사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의병장 이인영(1868-1909)을 아시는지. 그는 1895년 민비시해와 단발령 등에 반발해 유인석, 이강년과 합세해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벌인다. 1896년 여름 고종이 의병 해산령을 내리자 문경에 은둔한다. 강원도 원주에서 2천여 의병을 일으킨 이은찬 등이 그를 지휘자로 모시려 간곡히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병을 구실로 거절한다. 이은찬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지는 천붕지복(天崩地覆)을 당해 국가의 일이 오히려 화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가벼운데 어찌 공사(公事)를 미루려 하시오”라며 결단을 촉구한다. 1907년 7월 25일 그는 부친에게 작별 인사하고 원주에서 의병원수부를 설치한 뒤 관동창의 대장이 됐다. 같은 해 11월에 그는 `13도 창의대진소원수부`를 설치하고 총대장이 된다.수도진공작전을 펼치던 그는 1908년 1월 28일 부친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허위 군사장을 불러 군무를 위탁하고 총대장직을 사임한다. 삼년상이 끝나면 다시 합세하겠다는 뜻을 알리고 그날로 문경으로 달려간다. 여기서부터 나의 궁금증이 시작한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어쩌자고 그는 영면(永眠)한 부친에게 돌아간 것일까?!그에 따르면, 부모의 상(喪)을 치르는 것은 나라의 규칙인데 이를 행하지 않으면 불효요, 불효하는 자는 금수(禽獸)와 같아서 신하가 될 수 없으니 그것이 불충이다. 효에서 출발해 충에 이르는 논리가 강직하다. 효자가 아니면 충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가? 내가 알고 있는 한 충무공은 혼군(昏君) 선조의 우행으로 백의종군 하는 길에 어머니의 부음을 접한다. 그러나 그는 모친의 묘소로 달려가지 않는다. 누란지위(卵之危)의 국가를 걱정한 것이다.나는 이 문제를 개인의 선택 내지 가문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한 사유에서 결과가 달라진 것이다. 동학농민군을 도살(屠殺)하도록 일본군을 끌어들인 민자영의 논리는 왕실이 있고 나서야 국가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효와 가문이 선행돼야 충과 나라가 존재한다는 이인영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국가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음과 무게의 경중을 가늠함에 차이가 남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일본이 막부시대를 거두고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워 명치유신을 단행할 때 앞장섰던 자들은 가문이 아니라 국가를 먼저 생각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린 손문의 의기는 가문이나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조국과 백성들의 운명과 미래였다. 엇비슷한 시기를 살다간 민자영이나 이인영의 사유와는 한참 거리가 있다.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촛불시위로 광장 민주주의가 살아나고 있다. 농단(斷)의 핵심이나 주변에서 이득을 챙긴 자들의 머릿속에는 국민이나 미래는 아예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오직 지금과 여기에서 얻어낼 이권이며, 그것은 오롯 개인과 가문의 이득이다. 나라의 운명이 어찌 되든, 4·16 세월호 대참사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든 수수방관(袖手傍觀) 모르쇠로 일관한다. 하기야 승냥이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어찌 구하겠는가?!국민의 함성과 분노로 횃불과 촛불로 일궈낸 민주주의의 결실을 탐하는 자들이 고개 들고 있다. `조중동`은 야권 지도자들을 이간질하느라 눈이 벌겋고, 여기저기 숟가락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조만간 종편들도 가진 자들의 편에서 나팔수가 될 것은 자명하다. 그들에게는 조국과 민족과 통일과 미래기획이 없다. 그저 아귀처럼 뜯어낼 고깃점만 있으면 족하니까.그러나 이번에는 1987년 항쟁과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30년 전 어리숙한 백성이 아니라, 스마트기기로 중무장한 지식대중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 나간 가문과 영혼 없는 개인을 위한 희생양이 아니다. 그러니 명심하라. 그대들, 역사와 민중 앞에 거리낌 없이 침을 뱉는 무리들은 명심하라. 참혹한 응분의 대가가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2016-12-16

노래방에 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1990년대 초반 노래방을 처음 찾았을 때 감회(感懷)가 떠오른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넣으면 한 곡을 부를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함께 유학했던 친구와 번갈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이런 기계도 있구나, 싶었다. 그때 나는 얼마 가지 않아서 노래방이 몰락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엉터리 추측이었고, 노래방은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도구로 제 구실을 하고 있다. 기쁨과 슬픔을 표출할 때 노래는 상당히 요긴한 방편(方便)이기 때문이다.학창시절에 배운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하나는 조상들이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겼다는 것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그런 대목이 있다고 배웠다. 그런 까닭일까, 현대 한국인들 역시 음주가무에 능하다.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 무관하게 공영방송에서는 여전히 `전국노래자랑`프로그램이 목하(目下) 성황 중에 방영되고 있다. 각종 공중파는 이에 질세라 허다한 가요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다. 노래 못해서 목이라도 맨 사람들 같기도 하다.엊그제 오랜만에 노래방에 들렀다. 재작년 `세월호 대참사`가 일어난 후 나는 만 1년 넘도록 노래방 출입을 하지 않았다. 단원고 학생들과 참사 희생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동행했던 사람들이 불편하다고 불평이었다. 하지만 나는 1년 넘도록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분들은 얼마나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노래방에서 내가 부르는 노래들은 애상이 깊이 각인된 우울하고 구슬픈 곡들이다. 속도가 빠르고 경쾌하며 밝은 노래는 거의 불러본 적이 없는 듯하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달아오른 노래방 분위기를 처참하게 박살내는 원흉(元兇)이 되곤 한다. 그런데 어찌하랴?! 그런 노래들 말고는 부를 줄 아는 노래도, 부르고 싶은 노래도 없는 것을! “최신의 노래가 최대의 갈채를 받는다!”는 격언도 있다지만 이 나이에 무슨 신곡이란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노래를 부르다 문득 목소리와 감정의 노쇠를 느낀다. 술기운을 빌려서 고성을 내지르곤 했는데, 신통치 않은 소리에서 허약해진 기미가 느껴진다. 온몸으로 발산했던 감정의 폭과 깊이가 좁아지고 얕아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하, 이것도 변해가는 모양이구나, 하는 나지막한 탄성(歎聲)이 절로 나온다. 나이와 더불어 찾아오는 감정의 둔화와 평정심의 강화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열패감 같은 것의 감촉이라니.나이 듦은 평정한 감정과 성숙한 지혜를 동반한다고들 말한다. 좋은 일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자신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출하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짐짓 아닌 척하면서 불쾌한 감정을 감추거나, 즐거운 표정을 일부러 은폐하는 것은 그다지 온당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럿이 모여 각자의 개성과 감흥(感興)을 드러내는 자리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리라.그럼에도 노래방에서 느낀 소회는 `나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구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문화적 도구를 상실(喪失)해야 하는구나, 생각하니 아쉽기도 하다. 이런저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상을 엮어나가는 삶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길 것만 같다. 슬픔과 우수 혹은 애수와 처연(悽然)함이 찾아온다 해도 그런 감정을 드러낼 방책 하나가 멀어지고 있음은 무척이나 아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보낼 것은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오랜만에 찾아든 노래방에서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화사(華奢)하고 빛났던 지난날을 돌이키면서 적잖게 쓸쓸하고 허전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지금이 가장 젊은 시절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혹시 알겠는가?! 느닷없이 예전의 풍부한 정감(情感)과 소리가 홀연히 나를 찾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하되 아쉽고 서운했던 시간이었다. 아, 옛날이여!

2016-12-09

감시와 망명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카톡방이 검열된다는 소식에 분개(憤慨)해 텔레그램으로 망명(亡命)한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고 카톡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가족과 친구와 지인들의 `단톡방`은 여전히 성업 (盛業) 중이다. 그럼에도 텔레그램 망명을 선택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동의 없이 나의 언어와 사유와 관계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다. 남의 대화를 훔쳐보는 짓은 여자화장실에 `몰카`를 설치한 관음증환자와 다를 바 없다.나만의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인간관계가 매우 단출한 사람들도 텔레그램으로 망명해온다. 그럴 땐 묻고 싶어진다. “무엇 때문에 망명하셨나요?” 그들의 대답이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성싶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은밀하고 음험하게 엿보고 있다는 끔찍한 생각 때문에 정신적 망명도생(亡命圖生)을 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권부(權府)와 정보당국은 무엇 때문에 국민들의 사생활에 이토록 역겨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固有)한 영역을 가지고 싶어 한다. 나만의 비밀과 추억과 사연과 관계를 오롯이 향수(享受)하고 싶은 것이 본성이다. 거기에는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개입할 수 없다. 아내든 자식이든 애인이든 형제든 친구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작고 하잘것없어 보이는 비밀이라도 소중히 간직하려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무슨 권한이 있어서 하이에나마냥 남의 비밀에 더러운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는단 말인가?!권부와 하수들이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수신호(手信號)를 하고 음험한 눈길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아무 거리낄 것 없는 사람들도 견딜 수 없는 역겨움과 환멸과 구역질이 솟구칠 밖에 없다. 현 정권이 국민들의 일상을 낱낱이 감시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도 지속적이며 노골적이고 파렴치(破廉恥)한 방식으로 말이다. 국민들을 감시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헌법에 명시된 `통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야만적인 짓이다.헌법 제18조는 국민이 `통신-전화-전신 등으로 의사나 정보를 전달 또는 교환할 때 그 내용이 공권력에 의해 침해당하지 않는 자유`를 명시(明示)하고 있다. 그럼에도 정보당국이 끈질기게 국민들의 전화를 도·감청하고, 카톡을 뒤지고, 밴드와 페이스북까지 검열하려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어떤 법적인 권리가 있어서 헌법마저 유린하려 드는 것인가?! 허다한 국민을 텔레그램으로 망명시킨 것은 결국 권부와 정권과 그 졸개 하수인들 짓이다.국민들을 이중인격자로 전락시키는 권력과 정부는 불의(不義)하다. 위대한 이중인격자 톨스토이가 아내를 위한 일기와 자신의 내면을 토로(吐露)한 별개의 일기를 써야 했던 것은 100년도 더된 일이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세계최강 정보통신을 자랑한다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권부와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는다는 것은 우울을 넘어 짜증과 분노가 치미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자신이 없으면 권력을 내놓고 산뜻하고 우아하게 내려오라!추하고 역겹게 남의 뒤나 캐면서 음습(陰濕)한 곳에서 뒷조사나 하고 국민세금을 봉급으로 축내는 짓은 그만두어야 한다. 친구들과 유쾌한 농담과 질펀한 음담(淫談)과 뒷담화로 저녁한때를 보내려는 장삼이사(張三李四) 백성들을 의심하는 권력이 어디 쓸모가 있겠는가! 정당하고 자신만만하며 제대로 작동하는 권력과 권부와 정부와 정보기관은 그런 참람(僭濫)한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의심과 의혹을 흉중에 담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얼마 전 텔레그램으로 망명한 수줍고 소심한 동료를 보면서 느낀 소회(所懷)는 이런 것이었다. 어째서 그마저 망명해야 했는가?! 무엇이었을까, 그로 하여금 망명하도록 한 것은?! 과연 이것이 나라인가?! 광장과 거리와 지하철에서 활짝 피어나는 참여 민주주의 열기를 확인하면서 더럽고 역겨운 감시와 우울한 망명을 생각한다. 이제 그만들 했으면 한다, 제발!

2016-12-02

영화 `신해혁명`과 여인의 욕망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성룡의 100번째 영화라 화제가 되었던 `신해혁명`. 중국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작되고 보급된 영화 `신해혁명`.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청나라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신해혁명.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신해혁명`이다. 중국 각처는 물론이려니와 미국과 유럽, 말레이시아 등 중국의 국부 (國父) 손문이 거처했던 곳과 혁명세력의 활동공간이 영화의 무대로 등장한다.영화는 허다한 전장과 숱한 인총(人叢)들의 죽이고 죽어가는 섬뜩한 장면들로 시종일관 혼란스럽고 소란하다. 한 나라의 명운(命運)과 민족적 명암이 뒤바뀌는 역사적 전변을 다루는 영화가 어찌 요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되 영화의 대결과 갈등구조는 상당히 단출하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선통제)의 어머니 태후(太后)와 그 추종세력, 손문과 동맹회를 주축으로 하는 혁명세력, 원세개가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권력욕망 세력의 갈등과 각축.서태후에게 황제자리를 명받은 부의의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고, 따라서 그 아비인 순친왕 재풍의 섭정(攝政)이 불가피했다. 그러나 영화는 극적인 효과를 거두려고 어미인 태후를 전면에 배치한다. 태후의 생각과 판단은 간명하다. “황족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국가도 있다!” 고종의 비(妃)였던 민자영의 생각과 판박이다. “나라와 종묘사직의 근간(根幹)은 왕족이다!” 나라의 근간을 지배자와 그 일족에서 보았던 전근대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사유.2천년 이상 지속돼온 왕조를 타파하고 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손문의 사유와 인식이 태후와 그 일족의 생각과 현저한 대립을 이룬다. 공화국이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나라다. 그것은 특정한 가문과 집안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원세개는 이들 세력 사이에서 교묘하게 사적인 이익과 권력을 편취한다. 그리하여 태후에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음을 강조하면서 퇴위(退位)를 종용한다.손문은 1912년 1월 1일 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지만, 2월 12일 선통제가 퇴위하자 그 다음날 손문은 대총통 자리에서 내려온다. 청조(淸朝)가 종언을 고하는 즉시 대총통 자리를 내놓겠다는 약속을 지킨 손문. 그 자리를 꿰차는 원세개. 영화 `신해혁명`의 관심은 오롯 손문과 동맹회원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과 우정과 역사인식에 맞춰져 있다.영화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태후의 욕망이었다. 황실의 여인으로 태후는 철도를 국유화하여 그것을 영국, 미국, 도이칠란트 같은 제국주의 열강(列强)에게 팔아넘기려 획책한다. 황실의 재정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그녀가 취한 정책은 공공재를 사취(詐取)하여 황제와 그 일족의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국가와 백성보다 황제와 가문을 훨씬 중시하는 전근대의 행적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민주공화국이 왕국보다 우월한 까닭은 그것이 왕과 그 일족이 누렸던 특권을 철폐하고 천부인권(天賦人權)과 평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형제애를 전면에 내세운 프랑스 대혁명의 영혼과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국가라는 공동운명체에 승선한 사람들은 모두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어느 개인이나 그를 둘러싼 패거리 몇몇에게 특권과 이익이 가능한 나라는 결단코 민주공화국이 아니다.2016년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초대형 국가재난은 민주공화국에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인 21세기 세계최강 정보통신 대한민국에서 이런 희화적이고 전근대적인 사태라니?! 몇몇 여인들의 욕망과 거기 편승한 허다한 승냥이들 무리가 요절내버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전통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민초들의 저항과 투쟁의 함성이 여인들의 욕망과 거기 부역한 자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탄핵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16-11-25

미국대선과 클린턴의 교훈

▲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인문학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수많은 언론 매체에서 클린턴 당선을 예측했으나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막말과 추문으로 얼룩진 트럼프 후보가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종 차별주의자, 공격적인 성충동과 무분별한 돌출행각으로 악명 높은 트럼프가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미국은 물론이려니와 유럽 여러 나라도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상의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허다한 매체와 선거 전문가들이 트럼프의 당선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뒤집어 생각하면 어째서 클린턴이 패했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하는 셈이다. 재선(再選) 대통령의 아내이자, 국무장관 경력의 클린턴이 질래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 무참하게 깨진 원인을 생각한다는 얘기다. 그 가운데 나는 딱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강력한 맞수의 대결이라는 구경거리를 선사했다.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의 후보경선이 그것이다. 재벌집안 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산과 억 소리 나는 강연료 수입, 월 스트리트와 밀착한 후보 클린턴. 서민 출신이자 변변찮은 정치적인 경력과 노령(齡)의 악재를 딛고 후보에 도전한 샌더스. 민주당 경선은 가진 자들을 대변하는 클린턴과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샌더스의 충돌로 연일(連日) 화제를 모았다.경선의 승자는 클린턴이었다. 그 이후 민주당 샌더스 지지자들은 냉담해지기 시작한다. 부동산 재벌 트럼프와 부부 강연재벌 클린턴 사이의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월 스트리트의 큰 손들에게 정치자금을 받는 클린턴을 지지해야 할 어떤 명분도 의지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다. 정당보다 후보자 개인의 미덕과 장점이 선거판에 영향을 미친다.지난 미국 대선의 투표율은 56.9%였다. 43%에 이르는 미국인 유권자가 선거에 불참했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투표권을 가진 미국인 전체의 30%도 안 되는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되었다는 얘기다. 어째서 이렇게 취약한 대표성만을 확보하게 되었을까. `진흙밭의 개싸움(泥田鬪狗)`처럼 진행된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은 끝없이 표류하고 흔들렸다. 왜 클린턴을 찍어야 하는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이들은 투표에 대거 불참했다.이 지점에서 2002년 한국대선을 떠올려보자. 당시 대세론의 이회창 후보와 무명(無名)의 노무현 후보가 맞붙었다. 노무현은 정몽준과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다. 그러나 투표전날 밤 정몽준은 단일화를 철회한다. 그 순간부터 휴대전화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거리에서 정몽준을 한 시간 기다렸다 빈 손으로 돌아서는 노무현의 얼굴에서 지지자들은 강력한 위기감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밤새 휴대전화로 투표를 독려하기에 이른다.선거란 후보자가 얼마나 많은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나오게 하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 한 표라도 더 얻는 사람이 독식하는 현행 선거법 아래서는 이런 상황이 가속화한다. 하지만 클린턴에게는 민주당 지지자들을 투표소로 불러 모을만한 아무런 매력도 동력(動力)도 없었다. 그저 나이 들고 욕심 많은 여성 정치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트럼프에 대한 공포도 지지자들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패배는 정해진 것이었다. 클린턴의 교훈이다.한국에서 불타오르는 광장 민주주의를 보면서 국민들이 가진 위대한 역량과 미래 가능성을 확인한다. 저렇게 성숙한 시민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우리 후손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감마저 든다. 우리는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 새롭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곧 닥쳐올 한겨울 칼바람을 이겨낼 우리 국민들의 든든하고 미더운 정치의식에 고개 숙인다.

2016-11-18

분노에 대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 1연).수주(樹州) 변영로(1897~1961)의 절창(絶唱)이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의 목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를 떠올리며 지은 시다. 강낭콩과 양귀비의 대비(對比)도 그렇지만 푸른 물결과 붉은 마음이 어우러져 대조적인 색채와 함께 조화를 선사한다. 하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첫 번째 구절이다. 종교보다 깊은 거룩한 분노! 시인은 어떤 분노를 생각했을까?! 거룩한 분노는 어떤 형상과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오래전부터 있었다.인간의 욕망과 감정을 체계화해 일컫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나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분노는 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선인(先人)은 수오지심(羞惡之心)에서 분노가 촉발된다고 보았다. 수오지심은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일컫는다. 분노가 수오지심을 근원으로 삼는다면, 논개는 왜적의 침략과 행악질에서 남다른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낀 여성이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만큼의 분노를 몸소 실천궁행 (實踐躬行) 했으니 말이다.그런데 시인은 분노를 형용하는 수식어 `거룩한`을 덧붙여 놓았다.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만든 신(神)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보다 더 깊은 `거룩한` 분노. 나는 그것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망국의 한이나 왜적의 침략을 몸소 경험하지 못한 때문이려니와 시인의 감수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에도 근거는 있을 터. 하되 1922년에 발표한 `논개`에는 실패로 돌아간 3·1 만세운동의 안타까운 회한(悔恨)이 서려있던 것은 아닐까?!2016년 11월 대한민국은 분노로 들끓고 있다. 거리와 광장에서 분노의 함성이 들린다. 대구와 부산, 광주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중소도시와 촌구석에서도 분노의 목소리와 장탄식이 끊이지 않는다. 이참에 회자(膾炙)되는 구절이 “이게 나라냐”하는 것이다. 불과 다섯 글자로 드러난 민심의 표출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칼바람이 지구촌을 강타하는 시점에 터져 나오는 “이게 나라냐” 하는 분노.급기야 중고생들마저 `혁명정권`을 현수막에 내걸었다. “중고생이 앞장서서 혁명정권 세워내자!” 햐, 이건 또 뭐냐, 하는 분노와 한숨이 터진다. 10대 초중반 되는 아이들마저 거리로 내모는 정권의 참상이 분노를 부른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중무장한 대통령과 그 졸개들이 무당의 추임새에 맞춰 작두 위에서 칼춤 추는 나라! 어쩌다 이 나라를 저런 망나니들에게 넘겨서 어린것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나, 하는 자괴심에서 생겨나는 한숨!나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분노하고 절망하며 탄식하는 이들에게 `거룩하기`를 권하고자 한다. 시인이 노래한 `종교보다도 깊은` 거룩한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세(世)의 구원과 영생(永生)을 기원한다는 종교보다도 더 깊은 분노의 염(念)을 골수에 새긴다면 이런 망국적인 정권과 하수인들의 재등장은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끝장내야 할 때 끝장내지 못하면 질질 끌려 다니는 법이다.그들의 행악질을 역사의 관 속에 묻고 대못 쳐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해야 우리 후손에게 재앙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인처럼 거룩한 분노를 간직해야 한다. `성스럽고 위대한` 분노를 국민 모두 새겨서 2016년 11월을 축제와 승리의 마당으로 인도해야 하리라. 그것이 미완의 3·1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시인의 `논개`를 되살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노하라! 하지만 거룩하게 분노하라!

2016-11-11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상강(霜降) 지나고도 밋밋하던 날씨가 부쩍 차갑다. 춥다하기에는 이르고, 쌀쌀하다 하기에는 냉한 기운이 제법이다. 길을 걷다가 양버즘나무 이파리를 주워든다. 상기도 초록을 잃지 않은 이파리가 색 바랜 낙엽들 속에 처연했다. 낙엽으로 지기에는 너무 이른 상실이 가슴속 깊이 다가온다. `세월호`에서 스러져간 250명 어린 녀석들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어쩌다가 우리는 그 많은 아이들을 죽였는가?! 나이든 축들의 무한반성이 절실한 참사 아니었나?!나라 곳곳이 폐허(廢墟)가 되어간다. 인공지능과 3차원 인쇄기, 로봇과 사물 인터넷, 빅데이터가 빛처럼 빠르게 일상화되는 21세기.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눈부시게 현현(顯現)하는 2016년에 대한민국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다. `혼(魂)이 비정상인 무녀(巫女)`가 칼춤 추고 그 무당의 진언(眞言)에 의지해 권력을 휘두른 대통령!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대한민국의 `혼을 정상으로` 돌리겠다는 대통령을 떠받들던 자들의 끝 모를 행악질.필시 그들은 생각할 것이다.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총명한 아들 솔로몬에게 자경(自警)하려는 뜻에서 구한 지혜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어떤 위대한 승리와 장엄한 업적과 빛나는 명성도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같은 이치로 우울한 패배와 졸렬(拙劣)한 수치와 저급한 실패 또한 시간이 흐르면 망각되는 법! 아마도 그들은 생각하리라. “38일만 지나면 모든 걸 잊어버리는 궁민(窮民)을 믿어보자!”허나, 요즘은 스마트폰 세상이다. 어제는 어제로 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스마트폰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나온다. `촛불시위`에 참가한 여성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눈물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가 애도(哀悼)하는 `민주공화국`을 위하여 수만의 촛불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환하게 타올랐다. 권력자는 그 의미를 알고나 있을까?!`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이란 “백성이 주인이며, 모든 사람들의 입에 쌀이 들어가는 나라”다. 그러나 보라! 2016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지, 생각하고 돌아보라. 백성들은 그저 지나가는 길손이거나 적선을 바라는 거지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담뱃값을 2천원 올려도 감읍(感泣)하고 받아들이는 개돼지 하인배가 아닌가?! 누가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는가, 살펴보라. 찌질한 궁민들이 낸 세금으로 그들이 무슨 짓을 해댔는지 돌이켜보라.잘 만들어진 각본에 따라 꼭두각시나 괴뢰(傀儡)처럼 권부(權府)의 시중이나 들던 자들을 상전으로 모셨던 그자들은 되뇔지 모른다.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그렇게 날려버린 허다한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동학농민전쟁, 3·1만세운동, 4·19혁명, 5·18광주항쟁, 87년 민주화 대투쟁을 우리는 낱낱이 기억한다. 얼마나 많은 청춘들을 민주공화국의 제단(祭壇)에 바쳤는지, 우리 모두는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기대하지 말라!“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이것은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을 위한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승냥이들과 악어들과 이리떼를 위한 언어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한시권력에 의지해 민주주의를 짓밟고 시민들의 영혼을 도륙(屠戮)한 망나니들을 위한 언어는 더욱 아니다. 이것은 민주공화국을 위해 산화(散華)해 간 고귀한 영령들을 위한 언어다. 부패 무능 타락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권력자와 하수인들의 한시적인 지배가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의 언어다.양버즘나무 낙엽을 보면서 계절의 순환과 권력의 무상(無常)을 독서한다. 다가올 엄동설한과 냉기 가득한 북풍한설과 칼바람을 떠올린다. 하되, 시련이 없으면 따사로운 봄날의 훈풍과 훈향은 기꺼운 것으로 오지 않으리. 하여 우리는 굳게 믿는다.“그것 또한 지나가리니!”

2016-11-04

알아준다는 것!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다른 사람을 아는 것과 알아준다는 것은 별개(別個)의 사안이다. 안다 함은 정보나 인식에 근거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다. 알아준다 함은 아는 것에서 나아가 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함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인정심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어린아이가 까닭 없이 울 때에는 인정심리 기제가 작동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왜 날 버려두는 거야?”여기 문제적인 인물이 있다. 공자다! 그의 사유와 인식은 첫 머리부터 범상치 않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니 그 또한 군자 아니겠는가?!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논어, 학이 편)” 나는 이것이 `군자삼락(君子三)`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문구라고 생각한다. 노나라를 떠나 십여 년 천하를 철환했으나 아무도 자신의 쓰임새를 인정해주지 않은 비정(非情)한 세태에 답한 공자의 의기(意氣)와 자신감 아닌가?!나이 삼십에 홀로서기에 도달했던 공자가 35세에 노나라의 환란으로 제나라로 피신한다.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있던 경공이 정사(政事)의 요체를 묻는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합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안연 편) 군주와 신하가 제 노릇을 다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오, 아비와 자식이 근본을 다하면 가정이 평안해질 것이라는 간명한 답변. 청년 공자의 지성이 번뜩이는 장면이다.하지만 경공은 재상 안자(안영)의 반대로 공자를 기용하지 못한다. 공자가 주창하는 법도가 너무 번거롭고 어려워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는 안자의 진언(進言)을 경공은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가 내세운 예법은 500년 전 서주(西周)의 케케묵은 구습(舊習)이었다. 오래 전에 흘러가버린 강물로 오늘의 발을 씻으려 했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 여기서 우리는 시대착오적인 보수주의자 공자의 면모를 확인한다.그러하되 공자는 더 나아간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학이 편)” 남에게 인정받기를 꾀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그들을 수용하고 인정하라는 적극적인 자세를 강조한다. 어디 그뿐이랴!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능력이 없음을 근심하라.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헌문 편)” 이 정도 배짱과 자신감을 가졌던 인간 공자!권력자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보다 그릇된 것은 내가 그들을 알지 못함이오, 나의 무능이라고 갈파했던 공자. 2천500년 전 그의 생각은 이른바 광속의 2016년에도 적용 가능하지 않을까. 내 남 할 것 없이 권력자와 부자에게 잘 보여 한 자리 하려는 부박한 세상에서 꼿꼿하게 뻗대는 사람 한 둘 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나를 알아주기 전에 내가 먼저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는 천박한 세태가 지배하는 `헬조선`의 만화경!작은 고기조각이나 뼛조각 물고 승냥이처럼 울부짖으며 호가호위하는 환관과 비선의 나라. 그 한 줌의 무리에게 아부하고 권력자의 치질을 빨아주며 (`장자`, 열어구) 돈주머니와 벼슬자리에 환호작약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헬조선`. 멀쩡한 농민 죽여 놓고 사인 (死因) 찾겠다고 시신에 칼질을 해대려는 후안무치한 무뢰배들의 천국.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는 청년들을 절망과 한숨의 나락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들의 파라다이스!막돼먹은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상상이상의 고통이다. 부패와 타락과 무능과 패거리주의로 무장한 일군의 야수들에게 수족과 영혼을 저당 잡힌 채 눈만 껌벅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공자는 이런 시국에는 몸을 숨기라고 했지만, 광명천지 21세기에 어디로 잠적한단 말인가?! 이러매 눈 감고 다시 생각할 밖에!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근심하지 아니하는 도저한 경계를 찾아봄이 어떠한가?!

2016-10-28

복세편살 나시나길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만약 독자 가운데 위의 여덟 글자의 뜻을 아는 분이 있다면 행복한 가정의 부모라 확신해도 좋을 듯하다. 요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이걸 모르면 간첩이란 소릴 들어도 무방(無妨)할 정도로 흔한 표현이라고 하니까.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나는 시팔 나의 길을 간다” 후자에는 쌍시옷이 들어가지만 신문이 공공재임을 감안해 순화(醇化)했음을 밝혀둔다. 한글로 만들어진 사자성어 두 개를 대하면서 느껴지는 소회(所懷)가 몇 가지 있어 적는다.`복잡한 세상`의 함의는 어린 청춘들의 눈으로 봐도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가 만만찮다는 점이다.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오는 각종비리와 추문과 절망과 탄식이 인터넷 포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성적비관이나 학교폭력 내지 부적응으로 자살하거나 학교를 떠나는 어린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교육현장에서 어떤 구원도 희망의 빛도 찾지 못하는 것이 어린것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 아닌가.고등학생들이 뼈 빠지게 공부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취업관문 내지 절벽이다.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 대기업의 사내보유금이 사상최고를 기록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대학 신입생 가운데 상당수가 입학하자마자 영어학원이나 스펙 쌓기에 몰두한다. 결국 대학은 기업에 종속된 예비 직장인 양성소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사실을 빤히 아는 `고딩`들 아닌가?!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죽어나간 고등학생들 숫자만 250명인 나라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헬조선`담론은 2016년 대한민국의 `지금`과 `여기`를 가장 명쾌하게 투시한다. 미래를 향한 청춘들의 꿈이 완전 실종된 나라에서 선택은 자명(自明)하다. 그것이 `편하게 살자!`는 말로 드러난다. 아무리 힘들게 애쓰고 공들여도 결국 `금수저`와 `흙수저`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것들은 이미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것이다.그 다음의 욕설을 동반한 강렬한 구어(口語)는 세태반영의 절정이다. 여담(餘談)이지만, 2013년 타계한 김열규 교수는 `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2003)에서 욕에 담긴 의미를 살핀다. 그는 욕을 “역사성과 사회성을 갖는 무형(無形)으로서 한국문화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버릴 수 없는 요소!”라고 갈파한다. 어쩌면 흉중에 겹겹이 쌓인 분노와 울분과 설움과 절망을 욕으로 발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淨化)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도 욕의 미덕일지 모른다.요즘 어린 세대들은 `시발`이나 `시팔` 같은 상스런 욕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그것은 한국사회에 내재한 폭력성과 조야함의 민낯을 그대로 재연(再演)하는 기제다. 온갖 비속어(卑俗語)와 욕설로 묻혀버린 한국어가 순화되는 날, 그날이 언제 올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게 욕을 해대면서도 우리 어린것들은 `나의 길`을 말한다. 어린 나이에 이미 나의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선사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무한책임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낀다.삶의 깊이와 너비를 아직 온전하게 측량하지도 가늠하지도 못할 나이에 `나의 길`을 운운하는 고등학생들의 처지가 못내 안쓰럽다. 마치 굳은 암석이나 빙하처럼 냉혹한 세상은 등 돌리고 저만치 서 있는데, 아이들은 속수무책 (束手無策) 두 손을 비비고 있는 이 나라 형세가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하되 청춘들이여, 아직은 희망의 끈을 놓을 때가 아니다! 한줄기 희미한 빛이라도 있거든 그 길로 용감하게 전진할 일이다! 그들을 구원해 주소서, 신이여!

2016-10-21

중산층의 붕괴와 조건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요즘 언론에 간간이 보도되는 사안(事案) 가운데 하나가 중산층의 붕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7년 중산층 비율은 74%였으나, 2016년 10월 기준 69%로 5% 이상 감소했다고 한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국민의 비율은 47%에 불과하다. 한국의 통계야 고무줄처럼 들쭉날쭉하니 신뢰할 수 없다지만, 50% 아래로 떨어진 중산층 비율은 적잖게 충격적이다. 중산층의 조건을 생각해보면 통계치가 허수(虛數)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조건은 이렇다. 부채 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월 급여 500만원 이상, 배기량 2000cc 이상 중형차, 예금 잔고 1억 이상, 1년에 해외여행 1회 이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적인 조건이다. 돈에서 시작하여 돈으로 끝나는 것이 한국인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조건이다. 참으로 적나라하게 우악스럽고 거칠며 속악(俗惡)하여 우울하기까지 하다.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을 보자.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직접 즐기는 운동이 있을 것,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을 것, 자기만의 요리 실력이 있을 것, 공분(公憤)에 참여할 것, 약자를 돕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등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중산층 기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불법과 불의, 부당함에 저항하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중산층의 조건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들 나라 중산층이다.우리는 아직 1960~70년대 `잘 살아보세!` 하는 구시대 유물의 사유와 인식의 틀에 갇혀 있다. 행복과 성공의 척도(尺度)를 물질적 성취로 판단한다. 이럴진대 사회전체가 돈으로 몰려든다. 한마디로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나라와 궁민(窮民)이 되고 만 것이다. 물적인 욕망의 추구는 그 끝을 알지 못한다. 현대와 같은 대량 소비사회에서 그와 같은 욕망은 영원히 채울 수 없는 `탄탈로스`의 조갈증과 다르지 않다.한국사회에 만연한 욕망과 타락의 징후는 지난 정권에서 기초가 마련됐다. 유명한 `747전략`으로 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슬로건은 “부자 되세요!”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구호 아닌가! 2009년 이후 베스트셀러는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같은 투자전략을 담은 책이었다. 부자가 되려고 너나 할 것 없이 주식과 부동산에 달려들었다. 문제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돈이었고, 돈 없는 사람들은 하나둘 중산층 대열에서 탈락했다.아직도 한국인들은 돈이 고프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러다보니 돈 이외의 문제는 부차적이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유럽과 미국의 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족이나 여유로운 삶의 미덕과 정의(正義)는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중고생들마저 10억을 준다면 감옥살이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점입가경 목불인견 (目不忍見) 설상가상이다. 이제 돌아보면서 살 때도 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가난하고 일자리 없고, 비정규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이웃을 배려하면서 살아갈 때도 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나와 내 가족이 소중하다면, 이웃과 그들의 가족도 그만큼 소중하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논리는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싶다. 인간다운 염치(廉恥)와 도덕성을 내면에 간직하고 시대와 역사와 인과율(因果律)을 사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묻고 싶다.이런 기본적인 덕목이 배제된 중산층의 몰락이라면 나는 동의하겠다. 영혼 없고 불의한 욕망의 화신(化身)이 중산층이라면 그들의 몰락을 쌍수(雙手) 들어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번쯤 돌아보면 어떨까, 우리가 걸어온 길을! 그리고 잠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중산층의 붕괴나 몰락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중산층의 조건을 재정립하는 일이 시급한 2016년 한국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2016-10-14

시인의 죽음, 농민의 죽음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1837년 2월 10일 러시아 최초의 계관시인 푸쉬킨이 죽었다. 니콜라이 1세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시인은 감시와 추적에 시달린다. 정치경찰 벤켄도르프, 문단권력자이자 극작가 쿠콜리니크, 주 러시아 네덜란드 공사 단테스 같은 자들이 승냥이처럼 푸쉬킨 주위를 배회했다. 그자들은 하나같이 니콜라이 황제의 자동인형이었다. 시인을 모욕하고 분노케 하여 마침내 그로 하여금 결투를 신청하도록 유도한 단테스.2016년 9월 25일 보성의 농민 백남기가 운명했다. 향년 70세. 2015년 11월 14일 어리석은 국가에 저항하는 민중총궐기에 참여한 그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차가운 길거리에 내동이쳐진다. 그 후 317일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9월 25일 불귀의 객이 되고만 것이다. 국가 공권력의 대명사라 할 경찰은 백남기 농민을 겨냥하여 물대포를 직수하였다. 그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그러나 보라.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가 농민과 그 유가족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국가는 이미 죽은 농민의 시신에 칼을 들이대고자 한다. 명확한 사인을 규명한다는 미명 아래, 과학수사라는 명분으로 칠십 노인의 차디찬 육신에 칼질을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농민이 어떻게 죽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농민을 부검하지 않아도 그를 죽인 것은 경찰이고 국가라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179년 전 시인의 죽음은 치밀한 각본에 따른 연출이었다. 니콜라이 연출, 단테스 주연, 벤켄도르프와 쿠콜리니크 조연. 그리고 희생자는 계관시인 푸쉬킨이었다. 그의 아내 나탈리야 곤차로바를 궁정연회에 초대하고자 니콜라이는 시인을 자신의 시종보로 임명한다. 러시아인들에게 황제보다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인을 향한 황제와 측근들의 시기와 질투, 음모는 나날이 커져갔고, 급기야 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2015년 11월 14일 왜 백남기 농민은 노구를 이끌고 민중총궐기에 참가했을까?! 국가와 그 대표자들의 부패와 무능과 타락과 패거리주의를 경고하고, 민중의 분노와 절망을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 아니었던가?! `헬조선`이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에 통곡하던 농민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수수방관하는 촌로가 아니라, 민중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처절한 나라의 현실을 바로 잡아보고자 차가운 거리로 나아간 것이었다.불의하고 타락한 자들이 줄줄이 고관대작의 지위에 오르고, 바른말하고 행실 올바른 사람들은 거리로 내몰리는 나라. 40~50대에 실직하여 생계형 창업을 하고 이내 망해버리는 나라. 70~80대 노인들이 거리거리마다 폐지와 빈병을 주워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나라. 명절 때마다 해외로 나가는 여행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나라. 백주대낮에 국가권력을 돈과 바꿔먹는 검사와 판사의 나라. 십 년 넘도록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 대한민국.백남기 농민은 이런 참담하고 또 참람한 나라 형편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탄에 빠진 국가와 민중을 구하겠다는 따사로운 일념으로 궐기한 것이다. 그러나 부패하고 타락한 국가는 그를 향해 차가운 물줄기를 쏟아냈다. 얼음보다 차가운 길거리에 쓰러진 그를 향해 연신 물줄기가 발사되었다. 제 나라 백성을 죽이겠다는 심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더란 말인가?!푸쉬킨의 시신을 도둑질하려던 권력자들의 음모는 페테르부르크의 분노한 시민들의 봉기로 저지되었다. 10만의 시민들이 그를 추모하며 장례행렬에 동참했다. 백남기 농민의 시신에 칼질을 하려는 국가권력에 한국의 시민들이 저항하고 있다. 그로 하여금 저승에서라도 영면하도록 수많은 시민들이 두 눈 부릅뜨고 국가에 항거하고 있다. 시인은 죽어서 문학으로, 농민은 죽어서 따사로운 눈길과 마음으로 민족과 국가를 보듬을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2016-10-07

`김영란법` 시행에 즈음하여!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지난 28일자로 한국 초유의 `김영란법`이 실행에 들어갔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부패와 타락을 방지하고 극복하자는 취지다. 기술과 인지, 유희와 오락에서 한국은 선진국 반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 기초과학과 교육, 교양과 민도(民度)는 여전히 아쉬운 수준이지만 말이다. 그런 한국의 전통적인 병폐가 물적 욕망에 기초한 부패다.대중강연에서 종종 나는 한국사회의 걸림돌로 네 가지를 거론한다. 부패와 무능, 타락과 패거리주의다. 일부 파당과 패거리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독점하면서 보이는 부패와 무능과 타락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라와 민족은 겉치레로만 작용하는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각자의 가문과 개인의 영달과 물질적 성공에 눈이 빨간 자들이다.각종 불법과 무법, 탈법과 초법, 위법과 범법이 그들의 일상이 되었다. 근자에 인구에 회자되는 검사와 판사들의 행악질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도 아는 내용이다. 10억을 준다면 감옥에 가겠다는 고등학생이 47%, 중학생 33%, 초등학생이 16%에 이른다. 돈이라면 범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풍조가 만연해있는 한국사회!이토록 타락하고 부패한 나라와 국민의 영혼을 부분적으로나마 정갈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김영란법의 취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연히 환영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한두 가지는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대저 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람들은 평범한 민초들이 아니라, 가진 자들 무리다. 권력자들, 기업가들, 정치가들, 비리관련 공무원들이다.김영란법은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민족도 팔아먹을 태세가 되어 있는 자들을 최우선적으로 겨냥해야 한다. 법은 모름지기 크고 강하고 힘센 자들을 향한 날카로운 무기로 작동해야 마땅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3-5-10만원 단위로 세분되는 허다한 경우의 수다.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자질구레한 가지치기!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한다. “그 정사(정치)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그 백성은 점점 더 순박해지고, 그 정사가 살피고 다시 살핀다면 백성들은 점점 더 일그러질 것이다. 기정민민 기민순순 기정찰찰 기민결결(其政悶悶 其民淳淳 其政察察 其民缺缺).” (58장)가정에서 엄마가 아이들을 지나치게 통제하다보면 아이들은 겉보기에는 순종하지만 언제나 나쁜 궁리를 하기 마련이다. 외려 아이들의 자유와 자율을 보장해주면 아이들은 알아서 제 일을 스스로 챙겨나가는 법이다. 얼마짜리 밥과 선물과 경조사비를 써야 한다는 식의 법률적 통제로 한국인들을 옥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短見)으로 보인다.부패와 타락과 무능과 패거리주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동의하겠다. 하지만 우리나라 법망(法網)은 언제나 `유전무죄 무전유죄`였으며 크고 강한 자들은 아예 그물에 걸리지도 않는다. `국제통화기금` 사태가 왔을 때 직장에서 맨 먼저 잘려나간 이들은 일용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김영란법이 이런 식의 재연(再演)이 아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법 앞의 평등을 주장하려면, 법에 저촉될 만한 일을 한 사람들부터 제대로 수사하여 벌주면 그만이다. 온갖 부패와 타락의 당사자들이 장관임용 후보자가 되어 청문회에 계속 얼굴 내미는 추악한 작태가 반복되는 현실 아닌가?! 범법자들만 골라서 후보자로 세우는 청와대의 능력도 비상(非常)하지만 그런 작태가 끝없이 용인되는 나라도 어처구니없지 않은가?!아주 좁은 그물코로 멸치 몇 마리 잡고 생색내는 법이 아니라 정말로 썩어 문드러진 부패공화국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김영란법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16-09-30

지진과 정보통신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2016년 9월 12일 월요일 밤 8시 33분은 잊기 어려운 시간으로 남을 듯하다. 그 시각 나는 대학원동 2층 연구실에 있었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건물전체가 요동쳤다. 보던 책을 덮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20년 묵은 대학원동은 설계부터 시공과 준공에 이르기까지 부실로 점철된 5층 콘크리트 건물이다. 학과 도서실에 불이 환하다. 창밖에서 대학원생들을 부른다.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는 청춘들. 건물의 요동은 멈췄지만 마음의 동요와 다리의 후들거림은 쉬 멎지 않는다. 그날 밤 경험한 지진은 강도 5.8의 본진이었다. 강도 5.1의 지진이 발생한 7시 44분에 산책하던 나는 지진을 감지하지 못했더랬다.대학원생들과 함께 일청담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여기저기 연락해 보았다. 휴대전화는 먹통이었고, 카톡 역시 작동하지 않았다. 인터넷 연결도 끊긴 상태여서 답답하고 울적한 심사였다. 함께 자리한 4명 가운데 긴급재난문자를 받은 사람은 단 하나. 상당시간이 흘러서야 통화도 카톡도 인터넷도 연결되었다.지난여름 더위와 폭우가 기승을 부릴 때 더러 긴급재난문지를 받았다. 7월 22일 폭염주의보, 8월 17일과 20일 폭염경보, 9월 3일 호우경보가 그것이다. 2015년부터 `소방방재청`을 대신해 `국민안전처`가 재난문자를 보내온 것으로 기억한다. 대표적인 본보기가 작년 6월 6일에 발송한 `메르스 예방수칙`이다.“자주 손 씻기, 기침과 재채기 시 입과 코 가리기, 발열 및 호흡기 증상자와 접촉 피하기 등”을 내용으로 한 재난문자. 이것은 매우 진화한 내용이다. 애초에 그들이 보낸 수칙은 `낙타고기 익혀서 먹기`였으니 말이다. 국민들의 고통경감이나 안전보장보다는 웃음으로 국민들의 정신보건과 위생을 책임지는 부서가 `국민안전처`아니었나?!여기 보태진 것이 세계 1위라고 자랑해대는 정보통신의 불통이다. 엄중한 자연재해가 발생했는데 그 잘난 세계 1위 정보통신이 먹통이라니?! 국민의 생명과 재산과 직결된 위급상황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한 세계1위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1%로 아랍에미리트, 싱가포르와 함께 세계 1위다. 스마트폰 보급률 80%를 넘긴 나라는 세계적으로 13개국이며, 중국은 79%, 미국은 72%의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터넷 속도 세계1위와 함께 정보통신 강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문제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의 쓰임새에 있다.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신속한 시간에 제공하는 것이 정보통신의 1차적인 존립근거다. 이른바 정보화 시대와 그것을 선도하는 나라에 살면서 정작 그 쓰임새에 이르러 효용이 없다면 정보통신을 어디에 쓰겠는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노래를 듣고, 게임하고 물건 사고 시시덕거리는 용도로만 스마트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위급한 시점에 스마트폰이 작동하지 않을 때 그 난감함이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국민안전처`는 돌아봐야 한다. 소를 잃더라도 외양간은 고쳐야 한다. 외양간을 고쳐야 소를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긴급재난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국민 스스로 깨우치도록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인 안내와 홍보, 예방에 진력하기 바란다.

2016-09-23

덕혜옹주와 `덕혜옹주`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중국에는 역사적으로 4명의 미인이 있었다 한다. 침어(浸魚) 서시, 낙안(雁) 왕소군, 폐월(閉月) 초선, 수화(羞花) 양옥환이 그들이다. 경국지색으로 이름난 그들이기에 오왕 부차, 동탁과 여포, 당 현종 등이 그들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트로이 멸망의 씨앗 역시 헬레네의 아름다움에 빠진 파리스의 선택이었으니 어찌하랴?! 왕소군과 관련해서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지은 오언고시의 한 구절만 인구에 회자된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영화 `덕혜옹주`를 보고 나서 찜찜했다.`덕혜옹주`는 남녀의 내밀한 심사 깊은 곳까지 파헤치는데 능기가 있는 허진호 감독 영화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호우시절` (2009) 같은 작품목록이 떠오른다. 멜로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가 미모와 연기를 겸비한 손예진과 손잡고 찍은 영화가 `덕혜옹주`다. 고종의 마지막 혈육으로 남은 조선왕조 최후의 옹주 이덕혜(1912~1989) 이야기.영화는 첫머리에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비록 작은 글씨지만 사실관계 왜곡이 있음을 밝히고 시작한다. 영화가 충실하게 추적하는 것은 인간 덕혜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옹주다. 개인사적으로 보면 덕혜옹주는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7살 나이에 아버지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1921년 4월부터 일출소학교에 입학해 일본식 교육을 받는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일제의 뜻에 따라 일본유학 길에 오른다.1929년 어머니인 양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2년 뒤 그녀는 36대 대마도주인 24세의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게 된다. 이것은 당연히 일본 제국주의가 획책한 정략결혼이었다. 1932년에 덕혜옹주는 딸을 순산하지만, 병세는 지속적으로 악화한다. 소 다케유키는 1946년 그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고, 1955년에 이혼한다. 1962년 귀국이 허락되어 1987년 창덕궁 수강재에서 77년의 생을 마감한다.옹주의 일대기를 보면 영화에서 다루는 그녀의 삶과 일치점을 찾기 어렵다. 허진호는 어린 시절 덕혜의 남편이자 고종의 부마(駙馬)가 될 뻔했던 김장한을 등장시켜 처음부터 끝까지 덕혜와 관계를 맺도록 한다. 옹주의 일생일대 호위무사로 그려지는 김장한. 감독은 덕혜옹주로 하여금 반일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감동적인 대중연설까지 감행하도록 한다. 패망한 나라의 옹주와 왕자들이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처럼 그려낸다.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고종의 후예들이 치열하게 망국을 극복하고자 했다면, 1945년 해방정국에서 그들은 대대적으로 환영받았을 것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왕조의 부활이라든가,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환을 대놓고 주장하지 않았다. 시대변화에 눈감은 채 사멸한 왕조의 뒷자락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간 그들을 민초들은 외면한 것이다.열두 살이면 관람할 수 있는 `덕혜옹주`는 5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런 추세라면 600만 관객도 가능해 보인다. 나이든 관객도 그렇지만, 영상매체에 익숙한 어린것들이 왜곡된 역사를 배울까 저어된다. 저토록 도도하고 자부심에 넘치는 옹주가 일본에 저항했다면 얼마나 가슴 뿌듯하겠는가?! 정말 사실이라면! 하지만 `최종병기 활`(2011)처럼 `덕혜옹주`는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우리는 패배한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광개토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정복과 승리가 아니라, 평양성 함락과 조선왕조 패망에서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승리한 역사는 도취를 낳고, 패배한 역사는 교훈을 준다.`조선상고사`에서 단재 선생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再生)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패배하고 능욕당한 역사를 되살려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크고 빛나는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2016-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