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대학사회에 균열이 생겨나더니 이제는 단절의 심연마저 깊어지는 형국이다. 25년째 대학에 몸담아오면서 이렇게 넓어진 틈새와 태무심(殆無心)을 본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90년대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 같은 걸 간직했던 듯싶다. 각자 다른 향기와 빛깔과 무게를 가진 희망이었지만, 그래도 바람 같은 것이 있었다. `87체제`가 그 첫머리를 아직 끝내지 못했을 무렵 대학에 부임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분단된 동서 도이칠란트가 하나 되는 장면을 베를린 한복판에서 목도(目睹)한 나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고르바초프에게 100억 마르크(50억 달러)를 넘겨주고 분단에서 통일로 넘어가는 장면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좌든 우든, 극우든 극좌든 “피는 이념보다 강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도이칠란트 정객들의 인식과 실천은 놀라웠다. 그런 결실의 이면(裏面)에 빌리 브란트로 대표되는 `동방정책`이 자리하고 있음은 재언의 여지가 없다.
그 나라와 8시간 시차를 가진 조국으로 귀환한 내가 희망의 미래를 전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90년대의 허다한 아수라판과 격변과 사건사고를 기억한다. “우리가 남이가”에서 시작하여 성수대교와 삼풍아파트 붕괴를 거쳐 상인동 지하철 폭발사고를 지나 IMF 사태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믿고 살아온 지난 세기 90년대였다. 그것은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상을 상실하지 않은 성장하는 대한민국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1997년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2002년 노무현의 승리를 기억한다. 거기 어디서부터 희망의 끈이 조금씩 풀려버린 듯하다. 대북송금 수사, 이라크 파병, 미군기지 평택이전, 한미자유무역협정, 그리고 대연정 제안에 이르기까지. 전사(戰士)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의 거리가 괴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그 지점까지도 나는 장밋빛 미래기획을 놓지 않았다. 절망하고 좌절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탄탄한 육신과 영혼을 가진 조국과 자아가 있었으므로.
“부자 되세요!”라는 슬로건과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가 불티나게 팔리는 나라로 곤두박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원되는 물신의 나라로 급속히 탈바꿈했다. 미국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각료들 모아 선전해대는 나라꼴이라니. 천안함사태와 개성공단 가동 중단, 4대강사업, 자원외교 비리, 방위산업 비리가 하루가 멀다않고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막장 드라마가 준비되고 있었다.
지난 25년을 돌이켜 보면서 새삼 대학사회의 단절과 절망을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거대담론이 시대정신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행복했다. 누군가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쳤을 때 우리는 분노했다. IMF가 닥쳤을 때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라크 파병과 미군기지 이전문제가 불거졌을 때, 광우병 파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절규했다. 그리고 싸웠다. 지금 대학사회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고 있다.
각종 프로젝트와 대형 국책사업에 교수들이 대거 동원된다. `문송합니다`의 주인공 인문대학마저 교육부의 `코어사업` 사정권에 포획됐다. `해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의 간극(間隙)은 이내 망각된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사업일정에 무신경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국책사업으로 인한 긴장된 피로와 성과주의는 거대담론의 파장과 달리 교수들의 내면세계에 적잖은 우울과 상처와 앙금을 남긴다.
한국 대학에는 거대담론주의자들이 설 땅이 없다. 4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시대 전환기 21세기 한국 대학에 거대담론이 없다. 크고 작은 이해관계의 충돌과 사사로운 정의가 똬리를 틀고 간간이 깊은 한숨을 토해낼 뿐이다. 오래 전에 생긴 균열이 단절로 굳어진 대학의 미래향방은 어디일까, 자문한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단절의 끝이 지나면 새로운 지평이 시나브로 열리는 것일까. 그러하되 마당의 매화나무 꽃눈은 팽팽하게 부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