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초 제법 쌀쌀한 도이칠란트의 어느 가을날 나는 킬에서 쾰른으로 향하는 급행열차 안에 있었다. 도이칠란트 북부에 자리한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의 주도(州都)인 킬(Kiel)의 친구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내린 이국(異國)의 풍광과 기후와 언어가 몹시도 낯설었던 기억이 지금도 삼삼하다.
쿠페형태의 서도이칠란트의 열차 한 칸에는 6인이 탑승 정원이었다. 나의 맞은편에는 젊은 도이치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는 군대에 입소하는 대신 대체복무를 하러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당시 분단 상태였던 도이칠란트의 서쪽에서 나고 자란 그는 군복무가 아주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한창 일하고 공부해야 할 나이지만 나라의 부름을 받으면 응당 입대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이국청년의 애수(哀愁)와 분노.
당시 서도이칠란트의 군복무기간은 24개월 안팎이었고, 대체복무 기간은 다소 길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노인 전문병원 같은 사회복지 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다. 총을 잡는 것보다는 그래도 이런 선택이 훨씬 낫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군대는 근본 인명살상을 조직적-체계적으로 연습하는 곳이다. 조국수호나 자주국방을 말하지만 근간에 깔린 것은 어쩔 도리 없는 살생 아닌가!
얼마 전 청주지법에서 입영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장 아무개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나왔다. 장 아무개는 “전쟁준비를 위해 총을 들 수 없다는 종교적 양심에 따라 입영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국방의 의무위반`이란 죄목으로 그를 재판에 넘겼다. 판결을 담당한 이형걸 판사는 “사회봉사나 대체복무 등으로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고도 국가에 기여할 방법이 있으며, 형법적 처벌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시했다.
여기 멈추지 아니하고 이 판사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둘러싼 양심의 자유와 국방의 의무 사이에 갈등이 심각한데도 정부는 대안모색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고 징병제도가 실시된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중대한 헌법적 갈등상황을 방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판사의 이런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2004년 남부지법을 필두로 양심적 병역거부에 무죄를 선고한 이후 하급심에서 무죄선고가 잇따랐고, 유엔 인권이사회도 한국정부에 대체복무제 도입을 권고했음에도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국방부는 현역사병 복무기간의 2배에 달하는 기간 사회복지 시설에서 치매노인이나 중증 장애인 수발 같은 대체복무제 도입방안을 발표한다. 그러나 보수정권이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국민정서를 핑계로 대체복무제를 철회해버린다. 이런 상황은 국회에서도 반복되었다. 17대부터 19대 국회까지 대체복무제 도입을 담은 병역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된 논의 한 번 없이 폐기됐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시작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69년째 제자리걸음이다. 20대 청년들에게 전과자 낙인을 찍어가며 오로지 국방의 의무만을 되새김질하는 국방부와 국회는 세계의 변화와 국제사회의 요구에 눈감고 있다. 2013년 `병무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양심적 병역거부로 감옥에 간 사람은 지구 전체에 5천600여 명인데, 그 가운데 90%가 한국인이라 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해마다 5~600명을 전과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국회의 적극적인 보완입법과 정부의 대안마련이 시급한 당면현안이다. 누구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천부인권을 2016년에도 실현하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안타깝다. 우리만큼이나 치열하게 냉전과 반공과 분단을 경험한 서도이칠란트의 관용과 지혜가 부럽다. 정부와 국회는 이제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