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관료의 폭언으로 나라가 소란스럽다. 고고도 미사일, 사드를 배치하는 문제로 호떡집에 불난 형국인데 정말 혼란스럽다. 거기에 대구공항을 이전한다는 소식이 보태진다. 사드와 대구공항이 아니더라도 각종 비리 사건들과 크고 작은 스캔들로 시끌벅적한 나라였다. 오죽하면 `역동적인 대한민국` 아닌가?
교육부 관료의 발언 가운데서 나는 구의역에서 죽은 청년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열아홉 살 청춘이 황망하게 맞이했을 죽음의 나락이 어떠했을까. 컵라면 하나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악착같은 이승을 서둘러 떠나야 했을 그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관료는 말한다. “그런 죽음을 동정하는 것은 사실, 위선 아닌가요?”
불행한 사건의 피해자를 동정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와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지구촌 저편에서 일어나는 참사에도 연대와 도움을 전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나 2015년 네팔 지진에 우리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과 연대는 인간적인 정리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달포 전에 일어난 구의역 사고로 목숨을 잃은 19세 청년을 동정하는 행위에서 위선을 보는 교육부 관료의 언행은 자못 섬뜩하다.
그의 사유를 유추하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로 죽어간 300여 희생자를 동정하는 행위 역시 위선이다. 240명 단원고 학생들 뿐 아니라, 허다한 사연을 안고 불귀의 객이 된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눈물 흘리고 공분하는 것도 위선적인 행위란 얘기다. 창졸간(倉卒間)에 아들딸 잃어버리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피눈물에 가슴 아파하고 공감하며 동정하는 것이 위선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런지, 묻고 싶다.
그가 소속된 정부부서가 하필이면 교육부다. 이 나라 교육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管掌)하는 최고 행정기관의 고위직이 그의 본분이었다. 일국의 교육행정을 기획하는 책임자가 허망하게 죽어간 청춘들에 대한 동정과 예의를 위선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반도는 물론이려니와 지구촌이란 공동체의 삶에서 기본은 관계에 있다.
관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제도나 법령뿐 아니라, 공감과 교류 그리고 연대에 있다. 나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전달할 사회적 관계가 있는 사람은 살아나갈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그것을 공유할 사회적 관계망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견딜 수 있다. 그것이 공감과 연대의 힘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나고 힘 있는 자라 하더라도 사회적 고립 속에서 버틸 수 없다. `왕따`를 사람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은 거기 있다.
오늘날 한국의 교육과 입시제도는 무한경쟁을 기본질료로 삼는다. 1등만 기억하는 승자독식의 경기규칙이 지배하는 교육과 입시제도. 거기서 발원하는 탈학교 행렬과 자살학생들의 끝없는 대열! 그런데 그와 같은 교육과 입시를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내 아들과 딸의 1% 소속을 확신하는 교육부 관료들의 작품 아닌가. 입시와 교육을 통한 신분제 사회를 기획하는 자들의 섬뜩한 음모는 아닌가? 그런 의구심마저 든다.
관료는 국가의 기둥이자 공복이다. 국민의 종복인 관료는 국가발전과 국민행복을 위해 진력함으로써 존립근거가 확보된다. 교육 관료가 99% 국민을 개돼지로 인식하는 나라는 미래는커녕 현재도 없다. 교육을 백년지대계로 생각하는 한국인들에게 이번 사건은 충격을 넘어 공포 자체다. 이참에 1%를 자임하는 관료들의 근본적인 자질과 품성을 근본적으로 다잡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