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취업과 전공

등록일 2016-07-22 02:01 게재일 2016-07-22 18면
스크랩버튼
▲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다. 고용이 불안정한 시간제나 저임금 일자리가 있다지만 취업을 권장할 수는 없다. 10% 내외의 청년 실업률은 이제 붙박이로 고정된 형국이고, 체감 실업률은 30%를 상회(上廻)한다. 청년실업 문제는 비단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실행된 이후 세계적인 풍속도가 됐다. 이른바 1%와 99%의 양극화가 일상화된 세계 곳곳에서 청년들의 신음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교육을 통한 경제적 안정이나 신분상승을 갈망하는 상황에서 대졸실업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지난 세기 1960~1970년대 우골탑 신화를 기억하는 세대에게 대학은 출세의 사다리였으니 말이다. 1981년에 단행된 대학졸업정원제와 1996년 대학설립준칙주의의 여파(餘波)가 대학과 대졸자 과잉의 진원지다. 미래를 주도면밀하게 기획하고 과거를 성찰하지 않은 탁상행정의 쓰라린 결과를 우리는 오늘도 확인하고 있다.

상당수 대학생들이 취업과 전공의 단절에서 기인(起因)하는 고통을 호소한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착잡해진다. `문송합니다!`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인문사회계열 소속 학생들의 심리적 하중이 무겁게 다가온다. 한때 잘나갔던 경영대학 학생들마저 불확실한 미래로 괴로워하는 현실을 볼라치면 풍요의 21세기가 신기루인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전공과 취업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대립각은 강의실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문학과 예술, 역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눈을 맞출 학생들이 점점 줄어든다. 장편소설은커녕 단편이나 단막극 하나 읽기도 버거워하는 대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예술과 역사에 각인된 지난 시대의 흥미진진한 사연들과 인간군상은 더 이상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에 새겨진 마드리드 시민들의 비참한 운명은 알파고의 21세기에는 지나치게 낡아 버린 골동품에 다름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동양고전 `논어`, `도덕경`, `장자`, `사기`는 물론이려니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오셀로`, 괴테의 `파우스트` 역시 찬밥이다. 자격증을 얻기 위한 한자공부 혹은 토익점수를 위한 영문학 공부가 고작이다.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 움직이는 청춘들의 느릿한 동공(瞳孔)이 안타까운 요즘이다. 인문대 학생들은 경영학부로 몰리고, 경영학부 학생들은 행정학부나 공대까지 넘실거린다.

교수가 죽고 대학이 죽고 학문이 죽은 21세기 대한민국 교육현장은 우울하다. 오로지 취업이라는 외길을 향해 질주하는 청춘남녀를 기다리는 취업의 질곡(桎梏)! 그런데 문제는 거기가 끝이 아니란 사실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입사한 청춘들은 이내 기업과 기업문화와 업무에 질려버리기 일쑤다. 자신이 바라마지 않았던 직장 초년생의 풍경과 너무나 다른 기업현장. 그들은 다시 일탈과 출구를 찾기 시작한다.

해마다 끈질기게 되풀이되는 시행착오의 대물림이 아무런 반성적 울림 없이 지속되는 대학의 살풍경은 적잖게 참담하다. 죽어라 하고 전공을 공부해보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입학하자마자 취업이나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풍속도는 바꿔야 한다. 비싼 등록금과 시간적-정신적 피로를 동반한 대학졸업장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이런 문제 하나 온전하게 풀지 못하는 교육부의 대학정책은 암담하다.

대학은 직장인 양성소가 `더`이상 아니다. 21세기 기업이 바라는 인재상은 대학에 없다. 차라리 기업이 바라는 인재를 기업이 육성하는 편이 빠를지 모른다. 학문의 보급과 전파의 최후 전진기지로 작용하지 못하는 대학은 문 닫아야 한다. 취업과 전공이 상호 모순적인 대립관계가 아니라, 선순환하는 상보작용으로 결합되어야 하리라 믿는다. 창밖의 매미가 나의 견해에 동조하듯 크게 울어댄다.

破顔齋(파안재)에서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