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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용이 사는 마을

구룡소를 돌아 구룡포로 향했다. 근대문화역사거리에 자리한 ‘우전’ 향이 좋은 찻집으로 가는 여정이다. 봄비가 내리는 곡우 즈음 딴 첫 잎을 비가 주인공인 여름에 천천히 우리기로 했다. 호미곶 둘레길은 드라이브하기에 아름다운데 7월이 시작될 때 특히 어여쁘다. 노란 부채 같은 꽃을 한껏 펼쳐 든 모감주나무 가로수 덕분이다. 장맛비가 활짝 핀 꽃잎을 떨구어 길이 노랗게 물들었다. 모감주 군락지 위로 보슬비가 오락가락하니 물안개도 피어오른다.근대문화역사거리의 밤은 고요하다. 낮 동안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거리도 찻집도 우리만의 것이 된다. 우전이 연둣빛으로 우러나는 향만이 사위를 채운다. 찻잔에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 두 개의 산이 둘레를 감싸고 산을 향해 기러기 떼가 날아간다. 찻잔 중심에 어부가 나룻배에 노를 젓고 있다. 차를 따르면 연한 물빛이 호수에 가득 차올라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우전이 향을 더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보따리가 필요하다. 동해에는 오래전부터 살았던, 아마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머물며 바다를 지키고 있는 용의 전설들이 가득하다. 아홉 마리의 용이 헤엄치며 놀았던 동해면 구룡소, 열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다, 한 마리는 끝내 오르지 못하고 떨어진, 그래서 구룡포라는 이름이 된 곳, 오늘 이곳에서 우전의 향을 깊게 한 용 이야기는 감포의 사용굴 단용굴에 사는 다섯 마리 용의 전설이다. 동해에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길동무해서 걷는다는 해파랑길 코스 중에 감포 깍지길에 숨어 있는 명소이다.사룡굴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청룡, 백룡, 적룡, 흑룡 등 네 마리가 살았고, 단용굴에는 감포 마을을 지키는 황룡이 살고 있었다. 연기를 좋아해 향로가 되고 싶었던 황룡은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 좋은 연기를 피워 줄 수 있는 향로가 되고 싶었다. 용 한 마리가 연꽃 봉우리를 물고 있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떠올랐다.이들 다섯 마리 용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켰고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쳐 보호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뜻이 동해에 사는 용들에게 흩뿌려져 임진왜란 때는 이 용굴 속에서 많은 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강제 징용당해 붙들려 갈 뻔했던 오누이가 이 속에 숨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이곳은 또 다른 전설이 있다. 하늘나라에서 죄를 지어 추방된 용이 용굴에서 옥황상제가 다시 불러줄 때를 기다리며 수양을 하고 있었다. 늠름한 용의 모습에 반해버린 바다 곰이 수양하는 용을 위해 이무기들을 물리치면서 굴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노릇을 했다. 또 바다 곰은 용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등 천 일이나 밤낮없이 자맥질하며 보살폈다. 그러나 옥황상제의 용서를 받은 용은 바다 곰을 외면하고 승천해 버렸다. 바다 곰은 하늘만 바라보며 누운 채 식음을 전폐하고 기다리다 그대로 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진심을 다해 용 이야기 한 부분을 장식한 곰바위도 찾아보라는 당부도 곁들였다.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옛 기록에는 이밖에도 용에 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처용가로 잘 알려진 처용은 동해 용왕의 일곱 아들 중 하나이다. 수로부인이 용에게 납치됐을 때 백성들은 ‘해가(海歌)’라는 노래를 함께 불러 수로부인을 구해 냈다. 용에 관한 기록이 이처럼 많은 것은 우리나라가 오래전부터 농경 문화권에 속해 왔다는 사실과 관계가 깊다. 용은 바다나 강, 연못, 늪 같은 물속에 살며 비와 바람 같은 여러 가지 기상 현상을 관장한다는 신격화된 상상의 동물이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회오리바람의 모습이 승천하는 용과 같다고 해서 용오름 현상이 용을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용의 전설까지 녹여서 차를 마시고 찻집을 나서니 밤이 깊었다. 근대문화역사거리에 깔린 조명이 용의 비늘같이 반짝이며 우리 발길을 안내한다. 밤마실을 끝내고 돌아가는 발걸음까지 지켜주는 듯했다. /김순희(수필가)

2021-07-11

등대가 부는 피리

무엇이든 오래된 곳으로 가자 하니 잠시 생각하던 남편이 알겠다는 듯 차를 몰았다.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에 찍힌 목적지는 감포항이었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꺼내 보았나? 어제, 그제 나는 감포항을 그린 그림을 보고 왔다. 경주예술의전당에 화가 손수택이 그린 ‘감포 풍경’이 전시 중이다. 고흐전을 보러 갔다가 맞은편 전시실에 또 다른 전시회가 있다 해서 우연히 옮긴 발걸음 끝에 발견한 작품이었다. 초가지붕이 바닷가 산자락으로 다닥다닥 붙어선 1958년의 감포항이 나를 그림 앞에 한참 머물게 했다. 그때도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던 번성한 항구였구나 싶어 몇 채나 되나 눈대중으로 가늠해보았다.그림 속 초가는 다 사라진 항구에 다다랐다. ‘소나무가 펼쳐진 끝자락’이란 뜻의 송대말 등대였다. 겉모습부터가 특별한 한옥의 모습이다. 수령이 몇백 년은 돼 보이는 소나무 사이로 기와지붕에 탑 모양의 등대를 머리에 인 등대가 보였다. 포항에 사는 덕분에 등대는 아무 때고 만나지지만 한옥으로 지어진 것은 처음이다. 송대말은 해송 군락지이다. 이곳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사진 찍기 좋은 녹색 명소’로 지정했다는 명패 앞에서 나도 사진을 찍었다.등대 둘레에 데크를 따라 바다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오래전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했던 이들의 사진이 붙었다. 1943년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이, 1944년에는 검은 제복의 동료끼리, 1972년에는 단발머리 감포중학교 여학생들이 흑백사진으로 이곳에 소풍을 왔었다고 알려준다. 1986년의 등대와 감포항의 모습에는 색깔이 덧입혀져 감포항의 지난 세월을 함께 전해준다.등대 아래에 바닷가는 바위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파도의 간지럼을 타느라 하얗게 까르르 거렸다. 그렇게 밀려온 파도는 바위 사이를 드나들 수 있고, 튜브를 탄 아이들은 안전하게 떠내려가지 않게 막아주는 턱이 놓인 풀장이 있었다. 수년 전 남편은 친구들과 이곳에 와 물놀이를 했다고 했다. 자연 풀장인가 했더니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주상절리 바위와 바위 사이에 시멘트 구조물을 세워 축양장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어민들이 잡아 온 가자미, 전복, 광어, 고래, 돔 등을 보관했다. 담을 높게 만들어 물개도 키웠고 지붕을 만들어 덮어 뒀다. 축양장 위쪽 바위에는 화양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다다미방 열 칸을 만들어 바다와 솔숲으로 이어진 길을 오가며 망망대해를 감상했다. 정자에 앉아 횟감을 골라 먹으며 한국 색시에게 수발을 들게 했다. 그 여인이 ‘아리’라는 여인이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하야시는 해방되자 본국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배가 떠나려는 순간, 그녀의 오빠가 나타났고 아리는 총으로 하야시를 쐈다. 오누이는 독립운동 중이었고 그동안 시중을 들며 번 돈은 독립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아픈 이야기가 이곳에 전한다.일본인들은 축양장 해산물을 일본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선박사고가 잇따르자 암초 위에 등간(燈竿)을 설치했다. 그들이 물러난 뒤 감포 어업협동조합원들은 새로운 등간을 설치했다. 감포항을 이용하는 선박이 날로 늘어나 정부는 1955년 어민들의 안전을 위해 송대말에 무인등대를 점등했다. 2001년 12월에 유인등대로 변경된 후, 해양수산부가 다시 2018년 11월에 무인으로 전환했다. 경주시는 이제 송대말 등대를 해양역사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 중이다. 올 10월이면 사람들에게 개방할 것이라 한다.감포라는 명칭은 지형이 감(甘)자 모양으로 생겼고 또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 하여 감은포라 부르다가 음이 축약되어 감포가 되었다. 송대말 등대에서 감포항구를 내려다보면 다섯 개의 등대가 한 눈에 담긴다. 이름의 유래를 담아 항구에 감은사 탑을 음각한 등대를 두 개 세웠다. 하얀 등대에 감은사 삼층탑을 파냈더니 그 속에 파란 바다가 들어앉는다. 다른 방향에서 보면 푸른 하늘이 들어오기도 해 구름 떼가 넘실대기도 한다. 뻥 뚫린 삼층탑 사이로 휘익 바람이 지난다. 만파식적의 음파가 송대말 등대까지 들려온다. 마음이 평온해진다. /김순희(수필가)

2021-07-04

팝콘수국

밤마실을 다녀오는 길, 신항만 도로에서 우리 동네로 내려서자 하늘이 잘 보였다. 핑크빛 달이 둥실 떴다. 오늘이 보름이었지.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차의 속도를 줄였다. 아파트 가까이 갈수록 달이 건물 사이로 숨어버린다. 도시인들을 낯설어하는 어여쁜 달을 조금 더 보고 싶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달에 취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열어보니 톡방마다 달 사진이 올라왔다. 망원렌즈로 가까이 당겨 찍었는지 토끼들이 밟아놓은 자취가 선명한 분홍 달이 수다방마다 휘영청 떠올랐다. 스트로베리 문이라 이름 붙여진 달이다. 여러 사진 중에 유독 동그란 달이 오늘 발견한 수국의 색을 닮았다.수국을 보러 간 이는 홍차 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다. 오늘 같은 날 차를 달여놓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즐기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분이 있어서 모이게 됐다. 요즘 집을 리모델링 중이라며 가진 물건 정리도 할 겸 마구 나눠주신다. 족자 하나를 꺼내시며 그린 화가의 사연과 그 그림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동화처럼 들려주어서 차향과 이야기에 취하게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눈빛에 사연이 가득 고여있어 삶이 참 풍부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그림값으로 차 한잔 대접하려고 지인의 집 근처 카페에 가자고 했다. 야생화 가득한 정원을 가진 집이다. 논길을 따라 길을 잡으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것도 논과 밭 가에 찻집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하셨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5분 거리에 있는 곳인데도 오늘 처음 와본다고 해서 비밀의 숲을 찾아가는 파랑새가 된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늦은 오후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인데 오늘은 우리들만의 정원이 되어주었다. 함께 간 두 사람 모두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꽃이 길을 안내하는 오솔길을 걸으며 내내 탄성을 터뜨렸다. 꽃 이름이 무얼까 검색도 하고 사진을 찍느라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오후의 정원에서 풍기는 향에 취해 말소리도 부쩍 줄었다.하지(夏至) 무렵은 수국의 계절이다. 정원 곳곳에 수국이 한창이었다. 문 앞에 푸른 빛의 수국이 손님을 맞고, 정원 중앙에 사과나무 밑에는 연분홍빛의 아나벨수국이 수런거렸다. ‘어머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감탄 속에 신기한 색의 수국 한그루를 발견했다. 짙은 인디안핑크 같기도 하고 회색이 살짝 섞인 것도 같은 오묘한 색이었다.다들 와서 보라고 불렀다. 꽃잎의 생김새도 여느 수국의 모양이 아니었다. 꼬글꼬글한 입들이 모여 도란거리는 모습이 앙증맞은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무릎을 굽혀 꽃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장의 꽃잎이 네 갈래로 안으로 오목하니 말려들어 다부지게 오므린 아기의 손 모양이다. 그 안에 이슬을 가득 담으려는 건가. 한참을 들여다보며 넋을 놓았다. 이런 색은 누가 만들어 냈을까 궁금해 꽃을 가꾸는 친구에게 이름을 물으니 팝콘수국이라고 했다.밤이 깊을수록 달 사진이 톡방에 더 많이 떠올랐다. 볼수록 자태와 색깔이 팝콘수국과 닮았다. 달 사진 사이에 팝콘수국의 사진을 올렸다. ‘오늘 보름달과 닮았지요?’하니, 다들 놀라워했다. 팝콘수국이란 꽃도 처음 보고 그 모습이 보름달과 닮아있어서 더 그랬다. 수국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머물렀기에 라틴어로 ‘물그릇’이란 뜻을 간직했다. 이름에 어울리게 작가들은 초여름 비가 오는 날을 묘사할 때 수국을 등장시켜 시인에겐 푸른 은유가 되고 수필가에겐 분홍색 복선이 되기도 한다.달이 음력 오월 보름의 하늘로 마실을 나오는 날에 맞춰 분홍빛 수국이 환하게 떠올랐다. 연두색 연서(戀書)를 써서 쪽지로 접어 수국 가지 속에 숨겨놓았다가 오늘 환하게 펼쳐 보이려고 달과 힘을 합쳤다. 달의 인력이 밀물과 썰물을 만들다 남은 힘으로 팝콘이 툭툭 터지듯 수국에 가득 담긴 물을 끌어당겨 꽃잎을 틔웠다. ‘뻥이오~’ 하는 예고도 소리 소문도 없이 밤하늘 가득 팝콘수국이 폈다. /김순희(수필가)

2021-06-27

순례자의 길

어머~스앵님~, 그랜드캐니언 갈 필요 없겠어요. 여기 너무 멋져요! 미국 여행을 다녀온 영어 선생님이 해파랑길 15코스 중 발산리 근처 길을 걸으며 쏟아낸 탄성이다. 파도치는 그랜드캐니언은 없을 테니 여기가 더 아름다운 풍경일 거라며 나도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이 코스는 길이 바다를 품은 것인가 하노라면 어느새 바다가 길을 품고서 파도를 밀어와 발길을 움켜잡는 곳이다. 찰삭이는 파도가 발길에 닿을까 말까 하는 구간, 굽어지는 길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저기를 돌면 무엇이 나타날까 궁금하게 만들어 걷는 이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곤 한다. 바다가 내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발걸음이 잰걸음이 된다.오래전 나는 대만의 예류지질공원을 다녀왔다. 해안가에 자리한 바위가 멀리서 보면 버섯들이 오종종 모인 듯한 특이한 풍경이었다.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 괴석들이 두런거리고 둘러앉았다. 숭숭 구멍이 뚫린 생강바위가 있고, 촛불을 밝혀야 할 거 같은 촛대바위도 있지만, 관광객을 길게 줄 세우는 바위는 따로 있었다. 파라오 여왕이 머리를 틀어올린 모습 같은 여왕바위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한없이 서서 사람들의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가능했다.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을까 했는데, 그랜드캐니언의 웅장한 벽면 하나를 옮겨오고, 대만 예류지질공원의 기암괴석을 한 부분을 오려 붙여 포항시 동해면 발산리 바다 바로 옆에 멋진 풍경을 걸어놓았다. 오래전 층층이 쌓인 바위에 파도와 바람과 시간이 합작해서 만든 걸작품이었다.이 길을 나에게 알려준 사람은 남편이다. 한 달에 한 번 산악회 친구들과 걷는 걸 즐기는데, 2월엔 해파랑길 14~16코스를 걸었다. 다녀와서 나와 걷고 싶은 구간이 있다며 따뜻한 기운이 움트는 초봄에 처음 그곳에 데려갔었다. 파도는 어린아이가 찰방거리는 것처럼 조용히 속삭였고 바위섬마다 갈매기가 앉았다 날곤 하며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 그림 속에 어린 딸을 데리고 무릎까지 옷을 걷어 올린 엄마 아빠가 해초를 따고 있어 더없이 평온한 주말 오후 풍경을 완성했다.첫눈에 반한 나는 그다음 주에 또 가자고 졸랐다. 시댁에 다녀오는 오후 늦게 한 번 더 걸었다. 넓적한 돌을 맞대고 붙여 만든 아주 예쁜 길이다. 둘레길 대부분이 나무 데크를 이어붙여 완성했는데 여기는 징검다리의 돌 사이를 당기다 너무 힘껏 당겨 붙어버린, 그래서 ‘이쪽으로 걷기만 하면 해파랑길이 이어집니다.’ 하고 길이 일러주는 것 같다. 걷다가 바다가 암벽에 그려놓은 서사시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바다 건너편의 제철소 뒤로 저무는 해를 배웅했다.왼쪽이 바다라면 오른편은 산으로 이어졌다. 산과 바다 사이로 난 길을 여름비가 나리는 오늘 아침에 찾아가니, 바람이 파도를 끌고 길 위를 자꾸만 침범했다. 돌길에 손바닥만 한 연못을 만들어 하늘을 들이고, 고동 따개비들을 흩뿌려놓았다. 파도가 더 심해지면 돌아오자고 하며 널따란 해파랑길로 조심조심 나아갔다. 바닷가엔 바람이 많다고 일찍이 소문을 들은 풀꽃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한철 지난 찔레꽃이 더 샛노란 수술을 뽐내며 납작하게 엎드렸다. 집 근처에 찔레는 덩굴의 키를 좀 더 높이려 애쓰는데 바닷가 녀석들은 크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인동초도 그 틈에 섞여 잔향을 풍기고, 땅채송화도 낮은 키로 노랗게 길을 덮었다.오래전 순례자들은 걷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길 위에서 내딛는 걸음마다 지나치는 자연을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고서 배웠다. 침식작용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에 자기 몸을 조금씩 내어주는 바위, 높이 올라가기보다 옆에 친구들 손을 꼭 잡고 서로 온기를 나누며 엎드린 바닷가 풀꽃, 그들은 오래 멀리 가기 위한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삶은 순응하는 것이라고 걷는 이에게 온몸으로 알려준다. 우리는 가만히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위와 꽃에 그려진 묵직한 경전에 귀 기울였다. /김순희(수필가)

2021-06-20

서숲

“아우 보래이/사람 한 평생/이러쿵 살아도/(중략)/그렁 저렁/그저 살믄/오늘같이 기계(杞溪)장도 서고, (중략)/그저 살믄/오늘 같은 날/지게 목발/받쳐 놓고/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한잔 술로/소회도 풀잖는가”- 박목월 ‘기계 장날’주말마다 남편과 길을 나선다. 내가 어디라고 콕 집어 가자 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남편이 길을 잡았다. 목월 시인이 노래한 기계장터로 차를 밀어 넣으니 장날도 아닌데 사과 상자를 펼쳐놓고 아주머니가 흥정 중이었다. 손가락을 다친 것인지 깁스를 하고서도 사과를 팔려고 내게 맛을 보라고 권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한 상자 차에 실었다.기계장터를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로 초등학교를 지나니 소나무가 병마용의 군사처럼 둘러선 숲이 보였다. 여름 강렬한 햇살을 모두 가릴 만큼 빽빽이 선 모습이 늠름했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고 쉬려고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우리도 그늘로 들어갔다.예전에 서숲에 왔을 때는 돌보는 손길이 없는지 소나무 사이를 걷기에는 풀이 우거져 힘들었다. 누군가 표고버섯 농사를 하는지 소나무 아래 가득 나무 등걸을 맛대어 놓았었다. 지금은 오솔길이 소나무 사이를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모양새였다.걸으면서 쫓아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는 케에르 케고르의 말이 소나무 사이에 걸렸다. 맨발로 걸으라고 부추겼다. 신발을 신고 한 바퀴 크게 돌았으니 양말도 벗고 걷기로 했다. 가다 힘들면 돌아오자고 하면서 자신 있게 벗자마자 발이 아팠다. 신발에 의지해 걸을 땐 멀리 숲 전체를 관람하며 백로가 내려앉는 하늘도 올려다보며 힘차게 내 딛었었다. 하지만 발밑에 마사토의 작은 조각이 몇 개인지 오롯이 느껴지는 지금은 발밑만 보고 걸어야 했다. 앞서가던 남편이 “길이 이레 길았나?” 한다. 숲 전체를 도는데 30분도 안 걸렸었는데 맨발로는 발 씻는 자리가 저기 보이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찬찬히 흙길을 밟자니 청설모가 까놓은 잣 껍질이 흩어져 있다. 소나무만 있는 줄 알았던 숲에 잣나무도 몇 그루 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더 가니 대나무 숲이 서숲 둘레를 깜쌌다. 빨리 지나칠 땐 들리지 않던 새들의 조잘거림이 대나무 숲 가득했다. 매실을 가득 매달고 선 매화나무가 옆으로 기울어지기 직전이었고, 산비둘기 소리도 더 구성지게 들렸다.겨우겨우 걷는 우리 옆으로 힘차게 맨발로 걷는 분이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하니, 걸음을 멈추고 초보자는 큰길 건너 소나무 숲길이 발이 덜 아프다며 그리 가보라, 길 가장자리로 걸으면 돌이 좀 작아 편하다, 자신은 300일째 걸음이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었다. 멀어져 가면서 우리도 맨발로 오래 걷기를 성공하길 바란다고 손을 흔들었다. 처음 만나는 우리의 건강까지 바라는 그 진심이 느껴져 끝까지 완주했다.맨발로 걷느라 고생한 두 발을 부드러운 손으로 씻어주라고 써있는 세족공간에 앉았다. 발게진 발바닥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여름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이는 느낌이 발끝에 전해졌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양말 신발 차례로 신었다. 한 발 한 발이 포삭포삭 몰캉몰캉거렸다. 땅 위를 살포시 떠 가는 느낌이었다.안동 김씨가 서림으로 바람을 막았다면 서숲은 경주 이씨 문중의 땅이다. 소나무숲에 쌓여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동네 안쪽에 도원정사가 자리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협동길36번길 21-9 두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도원정사는 경주 이씨 기계 입향조인 조선 중기 유학자 도원 이말동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해 1928년에 후손들이 세운 누각이다. 누각 아래 배롱나무 붉은 꽃이 연못에 비칠 때 가면 더 좋으니 여름이 끝나기 전 한 번 더 방문하기로 하고 숲을 나왔다. 도원은 비록 은둔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제방을 쌓고 인공 숲을 만들게 했다. 기계 서숲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의성에 서림이 있다면 기계에는 서숲이 있다. /김순희(수필가)

2021-06-13

숲이 전하는 소나타

숲에서 듣는 빗소리는 녹색 소나타이다. 올해는 며칠에 한 번씩 비님이 오시니 푸른 연주를 듣기 위해 내 발길이 자꾸만 숲으로 향한다. 첫 방문 때 보이지 않던 나무가 두 번째엔 눈에 띄었고, 맑은 날에 미미하던 으름덩굴 꽃 향이 빗소리에 묻어오니 더 진했다. 며칠 전 찾아간 가로숲은 미나리냉이가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초록 융단에 별을 박은 듯했다.‘의로운 성’이라 이름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별처럼 많았던 곳이 어디일까?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 마을’이 있는 곳이 의성이다.사촌마을은 풍수상 명당으로서 딱 하나가 부족했다. 마을 뒷산으로 문필봉이 떡 버티고 서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서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오른쪽 지형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우백호가 없었다. 그래서 풍수를 위해 방풍림을 심었는데 지금 이 숲이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된 ‘사촌리 가로숲’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하여 ‘서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가로숲이라는 이름은 들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조성한 숲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다. 간혹 길을 의미하는 ‘가로(街路)’로 잘못 알기도 한다. 원래의 이름은 마을 남서편의 바위 언덕을 가리고 마을 서편의 긴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어 ‘가리쑤’라고 불렀다. 이곳은 물길이 짧고 모래가 많아 비가 오면 물이 한꺼번에 흐르고 금방 땅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어서 물길도 보호하고 바람도 막아 마을 터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숲을 만들었다. 이 숲이 우거지자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과 홍수를 막아주어 사촌마을은 살기 좋은 터전이 되었다.사촌 가로숲에는 오래 사는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팽나무를 심었다. 그 사이에 키를 맞추고 선 아카시아도 아름드리로 자라 향기를 바람에 실어 마을로 보낸다. 마을을 이룰 때 심은 나무들이 이제 수령이 600년에 이른다. 길이 1㎞에 폭은 45m 정도의 숲 사이를 흐르는 물길은 큰비가 오면 하천 바닥에 흙이 많이 쌓이고 나무들도 자주 유실되었기 때문에 숲과 하천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예전에는 1년에 한 번씩 인근 10리 안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흙을 걷어 내고 숲을 돌보았다고 한다. 숲의 소유는 마을을 일군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이며, 관리는 199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의성군으로 넘어갔다. 마을에 서림계 문서인 ‘서림 계문부(西林契文簿) 병인년(1926) 5월 일’과 ‘임원록(1987)’이 남아 있다.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난다고 했는데, 신라 시대 한 명, 조선 시대 류성룡이 있었다. 아직 한 분이 남았다. 큰 인물이 태어나면 항상 전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서애 어머니가 서애를 낳기 위해 친정집에서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가 와서 가로숲에서 해산했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서애의 경우 외가에서 태어났다.사촌마을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1392년으로 안동 김씨인 김자첨이 안동의 회곡에서 이주해 오면서이다. 오래된 마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마을에는 지은 지 100여 년의 한옥들만 보인다. 그 이유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 마을을 왜군들이 불태웠고, 구한말에는 명성황후 시해 후 이곳에서 병신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을 불태우는 바람에 황폐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사촌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은 1582년에 지은 만취당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진다. 만취당에는 만년송이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 소나무 이름을 붙였지만,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병신의병도 모두 지켜본 증인이다.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니 세 번째 정승이 의병 그들이라고 내게 전한다. 가로숲에서 들려오는 녹색 소나타가 만년송을 흔든다. /김순희(수필가)

2021-06-06

자갸~ 작약 보러 갈래?

꽃 한 송이를 선물 받았다. 환하게 피어난 함박꽃이다.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꽃에서 봄 향기가 묻어났다. 결혼하던 해 봄, 시댁에서 잠을 깬 아침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새벽 밭일을 나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아침밥을 준비 중이었다. 아버님이 “아가~”하시며 뭔가를 들고 부엌에 들어오셨다. 함지박처럼 크게 웃으며 피어난 작약꽃이었다.시댁 마당에는 작약이 두 무더기로 핀다. 분홍 잎 속에 하얀 솜털 같은 잎이 보송한 꽃은 대문 옆에, 보라색 모란을 닮은 작약은 거실 앞마당에 심었다.이웃에서 한 뿌리씩 얻어와 꾸미신 정원이다. 그 몽우리 중에 먼저 핀 첫 송이를 꺾어 내게 건네신 것이다. 밭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나는 평생 한 번도 못 받은 걸, 니는 우에 받았노”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어머니가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지 사 년이 지났다. 네 번째 봄이 오고 분홍 작약이 먼저 꽃문을 열었다. 어린이날에 시댁에 가니 아버님은 몇 송이 꺾어 거실 화병에 두고 즐기셨다.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가서 한껏 보라 하셨다. 꽃 몽우리를 만지니 손이 끈적하다. 그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개미들이 줄지어 송이를 오르내린다. 개미까지 데려갈까 봐 몇 송이 꺾어 함지박 가득 물을 받아서 가지 채로 담궈 뒀다.우리 집 거실에서도 작약은 자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2주가 지나도록 마지막 몽우리까지 다 피워냈다. 먼저 핀 꽃들의 끝이 마르기 시작했다. 석가탄신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남편이 “자갸, 작약 보러 갈래?” 어디를 가자는 거냐 했더니 묻지 말고 따라나서라 했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신녕이라고 입력했다. 포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작약으로 가득한 동네가 있었다.신녕면 화남리 194-1번지 일대가 작약 농사를 하는 곳이었다. 3~4년 지난 뿌리가 한약 재료가 되니 특용작물로 키우고 있었다. 꽃은 향기가 좋아 차로 만들어 마시면 시원한 맛이 나서 가슴이 뻥 뚫리는 행복감을 준다고 했다. 축농증과 비염에도 효과가 있다 하여 싱싱한 꽃을 콧속에 넣고 잠을 자면 더 좋다고 한다. 뿌리를 달여먹으면 좋은 여러 병증 중에 생리통과 현기증, 두통에 좋다는 동의보감의 글귀가 귀에 박힌다. 나에게 맞는 약재였다. 쌍화탕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는 작약의 뿌리는 한방에서 혈맥을 통하게 하며 속을 완화하고 나쁜 피를 풀어주는 약재로 이용한다.작약의 꽃은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이라고 불리며, 결혼식 꽃장식과 신부 꽃다발로 많이 쓴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미경이네 작약밭이 있었다. 선생님 교탁 위 꽃병에 주번이 되는 날에 꽃을 가져가야 했다. 할아버지가 산에서 진달래나 조팝꽃을 꺾어주실 때도 있었다. 그날은 학교 가는 길에 내가 당번이라는 게 생각이 났고, 미경이네 작약밭에 몰래 들어가 한 송이를 훔쳤다. 함지박만 해서 한 송이만으로도 교실이 환했다. 나중에 미경이에게 고백하자 뿌리를 약재로 쓰려고 꽃은 따줘야 한다고 괜찮다고 했다. 사실 근처에 작약밭이 거기뿐이라 고백하지 않아도 뻔히 드러날 일이었다.경북 영천시 신녕면에서는 2018년부터 5월 15일부터 19일까지 작약꽃 한마당 행사를 개최하여 작약 품종 전시, 작약꽃 따기 체험, 꽃차 만들기 체험을 진행했다. 지난해는 행사가 취소됐고, 올해는 드라이브-스루로 꽃만 보고 가라고 했다. 꽃밭 사이를 거닐다 보니 향기가 은은하게 번졌다. 경주 서악동, 영양 서석지 근처 동네에는 오늘 낼이, 평창은 6월 첫 주에 핀다고 소식을 보내왔다.깊은 산속, 너덜지대에는 야생 백작약이 간혹 눈에 뜨인단다. ‘간혹’이란 말이 의미하듯 수가 줄어서 보호종이 되었다. 너덜은 너덜겅의 준말로 많은 돌이 깔려 있는 산비탈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백작약이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으로 피한 것 같아서 마음이 싸하다. 자기에게 약이 되는 꽃이라 작약인가, 농담을 건네자 함지박처럼 남편이 웃는다. 약이 되긴 되었네. /김순희(수필가)

2021-05-30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쌤, 우리 아파트에 라일락이 피었어요. 놀러 오세요~.” 동료로 만나 친구로 지내는 E선생님이 보낸 사진과 인사말이었다. 사진을 클릭해서 보니 라일락이 아니라 등꽃이었다. 내가 보기에 등나무꽃처럼 보인다 하니 몇 년을 잘못 알고 있었다며 웃었다. 보랏빛처럼 맑은 사람이다.‘흰눈’이라는 시가 있다. 공광규 시인이 봄꽃을 노래한 것을 그림책 작가 주리가 콜라보로 만나 시를 그림으로 피어나게 했다. 겨울에 내리다 못 다 내린 눈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못 다 내린 눈이 벚나무, 이팝나무, 아까시, 산딸나무, 쥐똥나무 울타리와 찔레꽃 위에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을 때 할머니 머리에 가만가만 앉는다는 옛날이야기 같은 시이다.봄이 오면 출발선의 첫 테이프를 하얀 꽃들이 끊는다. 그러다 노랑 개나리가 언듯 고개를 내밀다 5월이 오면 분홍색의 물결이 뜰과 산을 덮는다. 아버님 뜰에는 내가 시집오기 전에 옆집에서 한 뿌리 얻어다 심은 산작약이 뭉싯거리고, 담장마다 얼굴을 내민 미스킴라일락의 볼이 발그레하다.요며칠 등꽃이 피는 계절이라 집 근처 초등학교 마당을 찾아다녔다. 운동장 둘레 콘크리트 벤치에 꽃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는 대개 등나무이다. 수도산 밑에 자리한 포항초등학교의 등꽃은 막 피기 시작했던 날인지 향기가 수도산 등산로까지 따라오더니, 항구초등학교의 넝쿨은 만개해서인지 그 아래에 서 있어도 그닥 많은 향이 나지 않았다. 대신 풍성한 송이들이 바닷바람에 종소리를 보라보라하게 들려 주었다.영주로 출장 가는 길, 영덕에서 시작되는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고속도로가 으레 그렇듯이 산을 깎아 길을 낸 도로다. 그 길을 따라 온통 연보라 꽃등이 내걸렸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등꽃향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연보라 꽃등 행렬은 영주에 내려설 때까지 이어진다. 저 많은 등나무를 일부러 심었을라나, 산속에 자생하는 것일까? 고속도로가 깊은 산과 산을 뚫고 다리를 놓아 지나가게 해놓았으니 길이 생기기 전부터 토박이로 살던 등나무였을 것이다. 등나무는 아파트 벤치 위에나 학교 교정에만 있는 뜰 안에 꽃인 줄 알았는데, 딱 등꽃의 계절에 이 길을 지나니 등나무의 고향이 산이었단 걸 깨닫는다.영광여중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동네를 산책했다. 오래전 영주역이 있던 자리여서인지 골목길 담벼락에 기차 그림과 80년 역사가 그대로 덧입혀진 관사가 아직 기적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영광중학교 운동장에 점심 먹은 배를 꺼치는 소년들의 소란함이 가득했다. 교훈이 크게 보여 읽으며 지나다 보니 운동장 한구석에 보라빛 그늘이 한들거렸다. 등나무 벤치였다. 멋진 그늘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달콤한 향기로 손을 흔들어도, 자신들이 더 빛나는 꽃이라는 듯한 녀석도 등꽃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과객인 나라도 얼른 사진을 찍어주어 등나무의 절정을 기록했다.문헌의 기록을 보니 등나무의 나이가 상당하다. 영조 41년(1764년)에 신하들이 걷기가 불편한 임금을 위하여 만년 등이라는 등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고려도경’에는 종이가 모두 닥나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등나무 섬유를 써도 된다고 나와 있어 옛날부터 생활용품으로 많이 쓰였다.경주 현곡면 오류리에는 용등이라는 신기하게 생긴 늙은 등나무 두 그루가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때 이 마을에 두 자매가 사모한 청년이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다는 소문에 얼싸안고 연못에 빠져 죽어 그 넋이 한 나무처럼 서로 엉켜 자라 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청년은 죽지 않고 돌아와 자매의 사연을 듣고 역시 연못에 몸을 던져서 팽나무로 환생해 서로 얼싸안은 듯 휘감고 수백 년을 자라왔다고 한다.사연을 가득 담은 등나무는 이산 저산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궁궐 안까지 자취를 남겼다며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연보라색으로 환하게 웃는다. 분홍분홍하던 봄이 보랏빛으로 깊어간다. /김순희(수필가)

2021-05-16

고방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멀리 사는 할머니를 불러오고, 과묵한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게 만든다. 온 가족이 자신을 향하게 해 놓고 옹알옹알 시를 뱉어낸다.아이들의 몸은 이야기 가득한 언어의 창고다. 수많은 낱말이 뒤섞여 복잡하기만 한 저장고에서 매주 한 편의 시를 끄집어내 주는 일이 내 몫이다. 아이들이 교실에 도착하기 십 분 전에 미리 칠판에 초성 찾기 할 자음 두 개를 적어준다. 잠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2학년과 힘이 넘쳐나는 3학년 친구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중력을 발휘한다.낱말을 찾아내는 친구들에게는 ☆을 주는데, 그것을 모아 선물을 받을 수 있어서 아이들은 눈과 손에 불을 켠다. 선물이라고 해야 문구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우개, 공깃돌, 퍼즐 같은 천 원이 넘지 않는 가격의 소품이다. 다만 여러 아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을 받은 세 명이 선물을 고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니 받는 영광을 쟁취하려고 온몸을 쓴다. 자신의 몸 속 여러 방에서 낱말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무진장 노력한다.어릴 적 우리 집에는 방이 많았다. 부모님이 쓰시는 안방, 마루를 사이에 두고 갓 시집온 숙모와 삼촌 사이에 남동생이 끼어서 자고 싶어 했던 건넛방. 건넛방과 벽을 사이에 둔 뒷방까지가 안채에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랑채에 기거하셨고 나와 언니는 사랑채 윗방에 지냈다. 식구들이 잠자는 방 말고도 디딜방아가 차지한 방과 소들이 허연 하품을 하는 외양간, 그 옆에는 짚이며 땔감이 가득 쌓인 헛간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기에 우리 집이 최고의 장소였다.그중에 내가 자주 숨어든 곳은 고방이라 불리던 창고였다. 문을 열면 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곡식을 담는 그릇들이다. 내 키보다 높은 시렁에는 채반에 갖가지 나물 말린 것과 계절 과일이 숨겨 있었다. 바닥에는 아이 하나가 다 들어가고도 남는 단지가 둥글둥글 앉았고, 그 위 광주리에는 이름은 분명 있지만 내가 모를 뿐인 나물 말린 것들도 수북이 담겨 있다. 한쪽에는 콩이며 팥이 든 자루가 서로 기대고 있어서 내가 한 귀퉁이에 숨으면 감쪽같아서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그곳은 할머니의 보물창고였다. 손님들 손에 들려온 과자 종합선물세트는 우리가 한꺼번에 다 먹어치울까 봐 높이 올려두고는 어르고 달랠 때 하나씩 선을 보여주셨다. 내가 몰래 들어가 맛난 걸 찾아내려고 해도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무서운 도깨비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 오래 머물기 힘들었다. 언니와 같이 들어가 뒤져봐도 어느 단지에 또 어느 상자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있는지 찾아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하지만 고방 주인인 할머니는 들어가자마자 금방 곶감이나 유과를 손에 들고나오셨다. 보기에 엉망으로 뒤섞인 내용물들이 할머니 눈엔 훤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어지러워 보이는 그곳에 할머니는 나름의 법칙으로 곡식과 과일과 달콤이들을 숨겨놓으셨다.아이들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잘도 시를 꺼내놓았다. 그 시들을 수업시간만 음미하고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한 편 한 편 엮어서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고 싶었다. 교실에서 연필로 쓴 시를 집으로 보내면 부모님들이 읽어보고 휴대폰에 써서 내게로 다시 보내진다. 모은 시를 한 권으로 만드는 게 내 몫이다.아이들의 시집을 편집하느라 한 달을 고스란히 집중했다. 강의가 끝나는 날 하얀 표지의 ‘보물창고’를 받아든 아이들에게 자기 시 한 편씩 낭송하게 했다. 공책이 아닌 시집에 인쇄된 자신의 시를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또랑또랑했다. 책을 받아본 부모님들이 문자로 전화로 감동을 전해왔다. 아이들의 시가 시인의 시 같다고 까르르 웃어넘기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귀에 와 닿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고방에서 꺼내주던 과자의 달콤한 향 같은 것이 온몸에 퍼져갔다. 아이들이 나를 그리운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김순희(수필가)

2021-05-02

오래된 고전을 왜 우리냐구?

빨강 머리 앤 카페에서 모였다. 오늘 토론할 책이 ‘빨강 머리 앤’이기에 이리로 정했다. 월포해수욕장에 자리 잡은 이 카페 이름은 ‘커피선’이지만 가게 안에 온통 앤의 굿즈들이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입구부터 여행 가방을 든 앤의 까만 실루엣이 우리를 반긴다. 가방 안에 커피콩이 가득 들었다.빨강 머리 앤 애니메이션은 나보다 열 살 어리다. 캐나다의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에 글로 탄생시킨 것을 일본 후지 TV에서 그림으로 우리에게 펼쳐놓았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주인공의 모습을 삽화로 책에 그려 넣어 출판했기에 세계 어느 곳에서 읽은 사람이라도 똑같은 노란 머리의 빨간 마후라를 한 어린 왕자의 모습으로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그 역할을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에게 했다. 이 카페에는 그 앤의 모습이 가득하다.고아 소녀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초록 지붕의 커스버트 남매의 집으로 오는 장면이 소설의 첫 장면이다. 소심한 모태솔로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사과꽃이 흐드러진 가로수길을 지나는 장면은 압권이다. 고작 200미터 정도의 길이인 김유신 묘 입구가 벚꽃길의 최고 명소인데, 500미터가 이어진 길이라고 하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수다쟁이 앤이 한동안 가슴이 아픈 듯 먹먹해서 입을 다물만했을 것이다.어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빨강 머리 앤을 왜 독서토론까지 하느냐고 물었다. 고전이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란 농담이 있다. 그 농담에 다 같이 웃는 것은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일단 제목과 줄거리는 들려오는 풍문으로 들어 알고, 두께가 주는 중압감과 바쁘다는 핑계로 거실 책장에 비싼 장식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도 빨강 머리 앤은 술술 읽기 쉬우니 다들 읽었겠지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어릴 적 TV에서 방영한 것을 보았을 뿐 원작을 읽지 않았다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2021년 토론 목록에 명작읽기 코너를 만들고 키다리 아저씨와 빨강 머리 앤을 넣었다.나는 드라마도 새로운 것보다 좋았던 것을 몇 번 더 우려서 보는 곰탕 스타일이다. 처음 볼 땐 스토리 위주로 보고 두 번째엔 캐릭터가 보이고, 서너 번 더 보면 처음에 이런 장면이 있었나 싶은 느낌이 들고 처음엔 들리지 않던 대사가 살아서 귀에 꽂힌다.빨강 머리 앤도 이번에 읽으니, 몽고메리가 그 시대 사람들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곳곳에 있었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 ‘어린아이들을 축복하는 그리스도’라는 석판화를 보고 앤이 화가가 예수님 얼굴을 저렇게 슬프게 그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세상의 많은 예수님 그림이 전부 저래요 한다. 아시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백인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부터가 아이러니다.앤이 처음 교회 간 날, 장로님은 기도하는 게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고 했다. 하나님이 너무 멀리 계셔서 기도를 드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나도 늘 앤처럼 느끼던 바라 그 문장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해인가, 우리 교회 장로님 중에 한 분의 기도가 진심처럼 느껴진 날이 있었다. 그 장로님은 자신이 담근 젓갈이 잘 익었으니 예수님이 오셔서 맛보고 가셨으면 좋겠다, 베란다 화분에 난이 꽃을 피웠다며 향기로운 예수님 생각이 난다고도 했다. 사실 많은 기도가 귓가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는데 비해 예수님을 가까이 사는 친구처럼 대하는 그 기도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앤이 그려진 벽화 아래서 토론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카페를 나오기 전 굿즈 하나씩도 사서 나왔다. 우리 집에는 작은 시계를 들고 선 앤의 옆모습 나무인형을 데려왔다. 그동안 책꽂이 한 칸을 채울 만큼의 다양한 앤을 데려 왔지만, 앞으로도 쭉 들일 참이다. 새로운 번역이 나오면 사서 또 읽고 밑줄을 그을 것이다. 덕질의 즐거움이 이런 것일 테니. /김순희(수필가)

2021-04-25

피어날 때 오라

봄꽃들이 이어달리기 중이다. 매화가 첫 스타트를 끊자마자 살구꽃도 바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누군가 골목길에 하얀 꽃잎이 떨어져 있어서 벌써 목련이 피었나 싶어 달려가 보니 프링글스였다고 해서 웃었더니 며칠 뒤 목련이 담장 위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벚꽃이 뭉싯뭉싯 길거리를 누비는가 했는데 사과꽃이 뒤를 쫓았다.봄꽃 이어달리기의 최고 유망주는 참꽃이다. 그 꽃을 품은 곳, 몇 년을 벼르다 또 코로나가 느닷없이 닥쳐 며칠 더 고민하다 찾아간 곳이 비슬산이었다. 산 정상이 참꽃 군락지라 우리 동네 뒷산의 진달래보다 몇 주는 늦게 핀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매일 올라가 보면 피기 시작하는 것도 절정일 때도 다 볼 수 있지만, 마음을 내서 가야 하는 거리라 가장 아름다운 날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맘때면 되겠지하며 나선 길이다.2020년 4월 셋째 주말, 도심에서 벗어나 산 입구부터 연두의 물결이다. 차창을 열고 산의 냄새를 맡으며 달리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참꽃이 목적이지만 그냥 이렇게 찾아가는 길까지 드라이브 코스부터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게 했다. 한참을 봄빛에 취해 오르니 주차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정상까지 모두 차를 끌고 가지 말고 중턱에 놓고 가란 뜻이다.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걸어서 천천히 산을 훑으며 오르는 것, 다음은 셔틀버스와 전기차가 있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표를 예매하니 벌써 우리 앞에 많은 손님이 있어서 한 시간 후에 표가 최선이었다. 표를 사놓고 공영주차장 옆으로 난 등산로를 둘러보기로 했다. 연달래가 이제 왔느냐고 몇 잎 남은 꽃으로 아쉬운 눈인사를 했다. 지난가을 떨어져 쌓인 나무들의 비늘이 만든 푹신한 길을 걷다 보니 훌쩍 시간이 지나 전기차를 탈 시간이었다.셔틀버스도 좋지만 우린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전기차를 탔다. 구불구불 산길을 돌 때마다 짙은 분홍빛의 참꽃들이 골짜기 여기저기 모여 있었다. 함께 간 언니의 탄성을 들었는지 봄의 물을 올려 새순을 틔운 나무들도 몸을 흔들었다. 어느덧 차는 산꼭대기에 자리한 대견사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절 마당 가장자리는 너럭바위로 이어진 절벽이었다. 그 위에 파란 하늘을 이고 삼층탑이 앉았다. 뭉게구름 한 점 탑에 걸어놓고 인증샷을 마구 찍었다. 어느 방향이나 절경이다.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걸 준비했나 싶은 맑은 날씨였다.절 뒤로 난 계단을 올랐다. 올라서자마자 떡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산정상에 찐분홍 참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큰 나무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오로지 키 낮은 참꽃들만 어깨를 맞대고 있어서 하나님이 비슬산 정상을 칠하실 때에 분홍 물감 하나만 준비해도 되어 좋았을 것 같다. 마음껏 꽃분홍물을 흩뿌리셨다. 그 사이로 등산객들을 위한 나무 데크길이 나 있어서 분홍 물결 사이를 헤엄쳐 다녔다. 한껏 참꽃의 분홍향을 들이마셨다. 두어 시간 꽃밭에 노닐다 보니 볼이 발그레해진 기분이 들었다. 좋다 좋아 읊조리며 이 좋은 풍경을 매년 보러 오자는 다짐을 했었다.밤새 비가 나린다. 하루하루 꽃 피는 모습이 다른 요즘, 빗소리에 꽃이 질까 잠을 설쳤다. 올해는 달성군에서 비슬산의 참꽃 군락지에 CCTV를 설치해 매일 더 피어나는 꽃송이들의 질주를 생중계로 보여주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붉은 것이 주말에 다니러 가면 절정이겠다 싶었다. 그런데 밤새 올봄 마지막 한파가 닥쳤다. 눈뜨자마자 유튜브를 켜서 참꽃이 어찌 되었나 살피니 붉던 산자락이 희끄무레하다. 아무리 화무십일홍이라지만 그렇게 붉던 어제의 꽃들이 추위를 못 견디고 다 스러지다니. 목적지를 잃어버렸다.지난해보다 일주일 이상 다른 꽃들이 피는 것을 보고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말이다. 올봄은 한발 먼저 온다고 다른 꽃들이 귀띔하는 걸 귀담아 마음 담아 들었어야 했다. 스러진 참꽃이 CCTV 화면을 통해 내년에 다시 오겠노라 작별 인사로 까만 손을 흔든다. 필 때 오라니깐 하며. /김순희(수필가)

2021-04-18

도래쑥

쑥전을 부쳤다. 남편의 도시락에 넣어 보낼 반찬이다. 쑥이 넉넉하니 쑥국도 같이 끓였다. 집안 가득 향기가 번진다. 어제 진평왕릉 나들이에서 건져 올린 전리품이다.벚꽃의 찬란함을 시기한 봄비가 밤새 내리더니 아침 하늘엔 구름이 가득 폈다. 능선이 낮아 하늘 보기에 안성맞춤인 경주로 소풍을 나갔다. 경주 사는 단영 언니를 카톡으로 불러냈다. 자신이 자주 가는 곳이 있으니 그곳에서 보자고 한다. 마침 백률사에서 아침기도를 끝냈다며 절 앞 사거리쯤에서 기다릴 테니 어서 오라며 전화를 했다. 언니는 통행이 많은 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켠 채 나에게 자신의 위치를 열심히 설명했다. 차창을 내리고 서 있는지 언니의 말 사이로 차가 달려왔다가 또 어디론가 급히 내달린다. 그 소리가 자꾸만 몽돌 바닷가에 파도가 차르르 밀려왔다 되돌아 나가는 소리 같다. 언니의 길 안내가 파도의 리듬처럼 들려 가슴이 설렜다.언니 뒤를 따라 넓은 들 사이로 차를 몰았다. 하늘빛이 좋아 한눈팔고 싶어 천천히 갔다. 목적지는 진평왕릉 앞 카페였다. 왕릉이 하도 좋아 틈만 나면 이곳에 오게 된다는 언니, 자신이 전생에 진평왕의 애첩이었을 거라는 말에 함께 웃었다. 카페 2층에서 내려다보니 능이 얌전히 엎드린 소의 등 같다.능을 한 바퀴 돌았다. 오래 왕위를 지켰던 왕의 인심인지 주차장은 무료로 개방해 놓았다. 물이 왕릉까지 들어올까 싶어 둘레에 파놓은 수로 위로 작은 다리가 놓였다. 다리를 건너자 멀리에 왕버드나무가 구부러진 허리를 미처 펴지 못한 채 봄을 맞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팽나무가 섰다. 그 옆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왕을 보필하는 장군처럼 버티고 섰다.경주 능의 주위에는 대부분 소나무가 경계를 선다.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릉은 소나무 숲속에 있고, 석탈해 능 주위에도 오릉에도 모두 소나무가 몸을 기울이며 수백 년 자리를 지켰다. 아마도 숲과 경계를 짓기 위해 둘레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이것을 도래솔이라 한다. 도래는 ‘둥근 물건의 둘레’란 뜻이고, 거의 다 소나무를 심어 둘레솔이라 했고 그러다 도래솔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도래솔을 심은 뜻은 이승과 저승의 가리개 역할이 크다. 조상이 이승을 보지 않게 하여 걱정을 덜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가셨는데 저승에서 더이상 이승을 보지 말고 편히 쉬시라는 뜻이다. 권력의 과시이기도 하고, 돌아가셨으니 더이상 이승의 권력을 넘보지 말라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진평왕릉 주변엔 소나무 숲이 없어서인지 도래솔은 없다. 능 주변을 걷다 보니 발아래 온통 쑥이다. 봄비를 먹고 뽀얀 쑥이 쑤욱 올라왔다. 쑥밭이다. 누가 일부러 가꾼 듯이 참하게 자랐다. 우연히 찾은 터라 칼도 바구니도 없으니 다른 날 다시 와야지 하며 그날은 산책만 했다.며칠 뒤, 친구들과 다시 진평왕릉 나들이를 갔다. 오후 햇살이 왕버드나무의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능 주변을 서성였다. 한 친구는 사진 삼매경에, 또 한 친구는 낮게 엎드린 제비꽃과 노란 양지꽃에 빠져 허리를 굽혔다. 나와 또 한 친구는 칼로 쑥을 뜯었다.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나비가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듯 능 주위를 따라 쑥을 뜯었다. 며칠 봄볕에 몸을 불린 것인지 도톰해진 쑥이 몇 분 만에 비닐봉지에 차올랐다.그 쑥이 오늘 남편의 도시락을 풍성하게 만들고 우리 집안 가득 봄향기로 채웠다. 손에 쑥물이 가득 밴 친구는 쑥국을 끓여 집에서 군 생활을 하는 아들을 먹이겠다고 한다. 겨울을 나고 봄에 올라온 첫 쑥은 약이 되니 먹는 이의 몸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진평왕이 살아생전 쑥국을 즐기셨나, 선덕여왕이 쑥버무리를 좋아했나, 진덕여왕이 쑥전을 해달라 졸라서인가. 능 둘레에 단군을 낳은 웅녀가 마늘과 함께 먹었던 쑥이 천지다.도래솔 대신 도래쑥이다. 다음 봄에도 그다음 해에도 도래쑥이 이곳으로 나를 부를 테니 내 쑥밭이라 미리 찜해둔다. /김순희 수필가

2021-04-11

고향의 봄

‘겉바속촉’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그런 사자성어가 어딨냐고 따지고 덤비는 이가 없길). 튀김이나 마카롱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는 뜻인데, 봄은 겉촉속촉이다. 가지 끝에 물을 올리는 버드나무도 말랑해졌고, 따스한 기온에 몸을 부풀어 올린 꽃들도 한껏 물을 머금었다. 거기다 몇 주째 주말마다 봄비가 내려 더 촉촉해졌다.비가 부슬거리는 지난 주말에는 의성 산수유 마을에 갔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던 노오란 길을 우리도 거닐어 보기로 했다. 영화 속에 흐르는 마을의 사계절이 보는 내내 탄성을 지르게 했고 이곳으로 발길을 옮기게 했다. 마을 한참 전부터 산수유가 길 안내를 한다. 집집마다 뒷마당에 한 그루씩 품었고 길가 가로수도 노랗게 불을 켠듯한 자태로 오래 그 자리를 지킨 듯 몸피가 제법 굵다. 산수유 마을답다.영화 속 주인공 혜원은 도시에서 바싹 마른 채 고향으로 내려온다. 늦은 밤 산짐승 소리에 무서워 전화 목록을 펼치는데 한 페이지가 다 차지 않는 주소록조차 바스락 소리를 낸다. 무섭다 외롭다 말하지 않아도 고향 친구 재하는 다 안다는 듯이 하얀 강아지를 품에 안겨준다. 퉁퉁 싫은 소리 하는 고모도 밥상을 차려서 허기를 달래주는 고향 마을이다.봄엔 노는 손이 없다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고사리와 재피 순을 따러 가는 길은 산수유 산책로이다. 3km 넘게 길게 이어진 노란 길이다. 초록 마늘밭을 옆에 두고 마을의 수호신처럼 키워서 내 키의 세 배 높이다. 올려다보니 가을에 익은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인 가지도 있다. 빨강과 노랑의 협주다. 비가 내려 더 좋다. 우산을 받치고 걸으니 빗소리가 산수유 숲에 들이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된다. 아 좋다~. 비가 와서 더 좋다. 비 오니 걷는 사람들의 숫자도 줄었고, 그래서 우리들만의 산책이라 산수유 골짜기가 다 우리 것이다. 노란 꽃잎에 빗방울이 조롱조롱 열린다.고향은 모든 게 달다. 먼저 내려와 이미 고향 공기에 촉촉해진 친구가 농사지은 토마토도 마트에서 산 것보다 달고, 엄마가 알려준 방법으로 담근 막걸리가 익길 기다리는 시간도 달다. 그 장면은 목월 시인의 술 익는 마을이 떠올라 더 노골노골해진다. 살구꽃 핀 마을은 다 고향 같다는데 산수유 핀 곳도 다 고향이다. 영화의 배경으로 남자 주인공이 구여친을 배웅하는 곳은 의성 가까이 화본역이다. 그 외에도 고운사, 빙계 계곡 등 의성의 곳곳이 나온다. 담장 밑에서 꾸벅거리는 동네 할머니와 닭 한 마리 던져주시는 아저씨, 도망간 엄마 이야기를 무심하게 내뱉는 동네 아줌마 역할까지 의성 가까이 안동에서 연극 하시는 분들이라고 했다.의성은 내 고향 안동 옆 동네다. 우리 차가 내가 나온 초등학교 언저리를 지날 때는 마음이 몸 어디에 붙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풍 갔던 암산 보트장, 학교 앞을 흐르던 강과 철길, 40년 사이 큰 길이 몇 개나 생겨서 산천은 변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 뒤부터 뒤꿈치까지 더듬이를 세웠다.뭐니 뭐니해도 촉촉하게 만드는 것의 최고봉은 맛난 걸 먹는 거다. 혜원은 배추로 전을 부쳐서 젓가락으로 찢어 먹는다. 내 친정엄마가 비 오는 날이면 해 주던 음식이다. 안동을 오래전에 떠난 나도 겨울이면 달큰한 배추전으로 속을 달랜다. 산수유로 눈을 적신 우리 일행은 안동 갈비 골목으로 달려갔다. 마블링이 선명한 고기를 굽노라면 시래기 된장국과 갈비찜이 서비스로 나온다. 된장국에서 냉이 향이 그윽하다. 서비스로 나온 음식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다.영화 속 엄마는 딸에게 고향을 만들어주었다. 도시에서 바싹 마른 몸과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줄 고향을. 사계절을 의성 사곡면에서 보낸 혜원은 겉도 속도 촉촉해지자 다시 공부할 용기를 얻는다. 함께 놀러 간 경숙 언니는 오늘 산수유를 보아 촉촉해졌으니 다음 주는 아이들에게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고향은 봄이다. /김순희(수필가)

2021-04-04

목련꽃 그늘 아래서

하루를 꽃그늘 아래서 보냈다. 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노랫말처럼 목련이 키를 한껏 키운 곳으로 소풍을 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가 열심히 수 놓은 꽃잎들이 봄기운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 목월 시인이 이것을 보고 썼구나. 이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가 쓴 편지를 읽고 있으면 새의 날개옷 같은 하얀 꽃잎이 편지처럼 나리겠지.불국사 주차장에서 동리목월문학관으로 가는 길, 연못 위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입구에 자목련 세 그루는 아직 입을 다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새 같다고 하니 함께 간 E는 촛불을 켠 것 같다 하고, S는 꽃등 같다고 거들었다. 자목련이 아직 새의 부리같이 꽃잎을 맞은편을 향해 지저귄다. 오늘이 절정인 백목련이 환하게 웃는다. 다리를 건너니 양쪽에서 가지를 뻗어 나와 하늘을 덮었다. 목련 이불이다.목월 시인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주라서 그런가. 키 큰 목련이 유독 많다. 작정하고 목련 투어를 나선 날이니 한 곳을 더 찾아갔다. 오래전 4월 5일, 아직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때에 남편을 만나고 첫 야외데이트 날에 경주 남산을 올랐었다. 포석정에 주차를 하고 오르는 산책로는 길이 좋아 이야기하며 걷기 안성맞춤이다. 산 중턱 너럭바위에서 싸간 김밥과 커피를 마시고선 반대편 통일전으로 내려왔다. 그날 통일전에 들어가니 목련이 많이도 심겨 있었고 그 꽃들이 막 피기 시작해서인지 넓은 뜰에 향기가 그윽하게 번졌다. 목련도 향기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그곳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목련이 폈을까, 올해 꽃이 빨리 와서 이미 져버리진 않았나, 그 사이 정원수가 바뀐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며 들어섰다. 내 걱정이 쓸데없다는 듯 기와를 인 담장 옆으로 흐드러지게 목련이 일렁거렸다. 키가 아주 높진 않아서 꽃 속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반들거리게 닦아 놓은 정자에 오르니 경주의 자랑거리인 능선이 멀리 보이며 들 풍경이 환하게 펼쳐졌다. 목련 나무가 발아래 있어서 올려다보는 것과 또 다른 감흥을 느끼게 했다.수백 장의 사진을 찍은 우리는 이제 카메라는 내려놓고 마루에 철퍼덕 우리도 내려놓았다. 평일에 통일전을 찾는 이가 거의 없어서 넓은 정원이 다 우리 것이었다. 꽃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봄바람을 즐겼다.그러다 목련꽃 그늘 아래 섰으니 우리도 시 한 편을 읊어 보자고 했다. 내내 흥얼거린 4월의 노래가 목월 시인의 시이니 읽어주겠다고 하니까 “무슨 노래요?” 한다. 검색해서 들려주었더니 함께 간 두 여인이 처음 듣는 노래라는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나, 음악 시간에 불러본 적 없느냐 했더니 없단다. 나보다 열세 살 어린 그들의 교과서와 내 것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대신 ‘오~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아야’ 이 곡으로 수행평가를 했단다.초등 4학년 담임이 풍금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들려주신 날, 노래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그 자리에서 다 외워버렸다. 중학교 합창 대회 때는 ‘카프리섬’과 ‘오 솔레미오’를 연습했더랬다. 음악 시간에는 음악실로 이동해서 선생님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가곡을 배웠고, 그때 듣고 배운 것들로 평생을 읊조린다.아들에게 학창시절 음악 시간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자습이었다고 한다. 음악 선생님도 그닥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고 하니 미술도 저 먼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체육까지 하지 말라면 남학생들이 들고일어날까 봐 그나마 공 하나 던져주면 신이 났었다고 한다. 그러니 ‘4월의 노래’도 목련화도 듣느니 처음이란다. 아들이 나이 들며 목련 나무 아래서 흥얼거릴 가곡이 있으려나 싶어 안타까웠다.아직 3월인데 아파트 화단에 목련꽃은 벌써 지고 연두 잎이 돋았다. 더 북쪽인 서울에도 목련이 핀다니 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가 이젠 ‘3월의 노래’로 바꿔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해 본다. /김순희(수필가)

2021-03-28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사진관에 맡겼다. 큰아이 백일 즈음부터 촬영한 홈비디오 카메라가 어느 날부터 작동이 멈춰버렸다. 20년이 지나니 고장이 난 것이다. 새로운 영상을 찍을 수도 없지만 가장 큰 일이 아기 손바닥만한 8mm 테이프에 담아 둔 큰아이의 추억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방송국에서 CD로 구워준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듣고 문의했더니 기간이 끝나버렸고 어쩌나 하며 시간만 더 흘렀다.지난 여름, 자격증 시험을 치는 아들이 증명사진이 필요해 집 주위 사진관에 갔더니 문을 닫았다. 그 많던 사진관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번째로 내비게이션을 켜서 찾아간 곳이 그나마 아직도 영업 중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아들을 카메라 앞에 보내놓고 한숨을 돌렸다.내가 아들 나이였을 때는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관에 들르는 게 정해진 루틴이었다. 며칠 후에 함께 간 친구들 수만큼 뽑은 사진 한 뭉치를 받아들고 찻집에 모여서 또다시 여행 간 장소로 시간여행을 떠나 깔깔거렸었다. 그 사진을 접착식 앨범에 정리하며 초점이 흐리게 나온 사진도, 여행의 설렘만큼 흔들린 사진도 버리지 못하고 끼워두었다. 이제는 사진을 찍고 기다려서 인화지에 뽑는 일이 자주 없다 보니 사진관이라는 장소도 동네에서 삭제되어 버렸다.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하다가 패스트푸드점에 밀려나 구석으로 몰리다가 그마저도 벅찬 일인지 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증명사진을 찍고 나자 한 시간 정도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찾으면서 혹시나 하고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파일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다. 맡기러 곧 가겠다고 하고 또 몇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더 있다가는 저 사진관마저 사라질까 싶어 얼른 챙겨다 맡겼다. 일주일 후에 usb에 저장한 것을 찾아왔다. 테이프 4개가 손가락만한 저장함에 옮겨지는 값이 사진값의 열배도 넘는 가격이었지만 영영 못 보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네 식구가 화면 앞에 앉았다. 27년 전의 큰아이가 옹알이를 하며 보행기를 탄 채로 27년 전의 어린 내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닌다. 흰머리 하나 없는 젊은 남편이 웃는다. 아직은 총각인 시동생이 조카를 어르기도 한다. 몇 년 전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어머님이 밝게 웃으시며 손자와 눈을 맞추신다. “할아버지는 지금이랑 똑같네요. 와~어머니, 저 때는 가늘가늘하네요. 큭큭큭. 같이 근무한 선생님들과 나보다 1년 늦게 결혼한 은주선생님네 집들이 간 날인지 여리디여린 아가씨들이 큰아들과 눈을 맞추려 까꿍까꿍을 외쳤다.백일 즈음부터 네 살까지의 기록이었다. 큰아이의 성장기록만 담겨있으려니 했는데, 아버님 환갑잔치에 오신 고모님과 주름살 하나 없는 시누이, 삼십 대 중반인 조카들이 대여섯쯤으로 어려진 아이가 되어 화면 속을 날아다녔다. 마지막 파일엔 내가 태어나 자란 안동 고향 집에 다니러 간 날도 있었다.어제저녁, 막냇동생 내외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놀러 왔다. 올케에게 스무 살 시절의 동생을 보여주었다. 안동 고향 집에 함께 갔던 것이다. 신작로 저 끝에서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막내를 보고 가족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치매로 정신을 놓은 할머니가 안동포를 가지고 나와 지금 내 나이보다 젊은 친정엄마에게 양쪽에서 잡아당기자고 하셨다. 그러는 사이 백일이던 큰아이는 높은 계단을 혼자서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는 개구쟁이가 되어있다.등장인물 모두 머리 스타일은 촌스럽고 옷매무새는 어색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배밀이 하다가 기는 걸 배우느라 병치레하며 병원에 입원해 주삿바늘을 꽂은 모습조차도 웃으며 볼 수 있어서 아름다웠다. 머리에 저장된 기억들이 흐려지는 27년 동안에도 영상 속에 우리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무엇을 오래 저장하는 일은 다 아름답다. /김순희(수필가)

2021-03-21

소나무 숲에 숨어서

가야지 가야지 하며 못 가 본 곳이었다. 경주에 터를 잡은 선배를 만나러 갔던 날, 늦은 점심을 먹고 어디로 갈까 하길래 관광객은 모르는 곳에 데려가 달라 했다. 그랬더니 데려간 곳이 선도산이었다. 꼬불꼬불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는 동네 골목길을 따라 오르니 도봉서당이 나타났다. 오후의 햇살이 산으로 둘러싸여 우묵한 곳에 자리한 탑을 비춰 주고 있었다.주차장 위로 닥나무가 훤칠하니 서 있었다. 그 옆에 삼층석탑이 우두커니 섰다. 문화재에 대해 모르는 이가 보기에도 탑의 모양이 어딘가 이상했다. 문화재 안내판의 내용을 읽어보니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때도 석공의 기술이 다 좋지는 않았나 보다. 오늘의 목적이 이 탑이 아니었으니 해지기 전 서둘러 산으로 발길을 재촉했다.동네 이름이 서악이다. 서쪽에 있는 돌산이라는 뜻이니 저 산 어딘가에 돌을 숨겨놓았을 것이다. 선배가 마애삼존여래입상을 보여주겠다며 소나무 오솔길 사이로 난 임도로 우리를 안내했고,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이어진 길을 무작정 따라 올랐다. 처음 걸을 땐 등산 초보자도 걸을 만했는데 그늘이 없어지고 가파른 길만 계속되니 30분 만에 산멀미가 찾아왔다. 어지러워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해 아쉽지만, 운동 열심히 해서 다시 오자하고 삼존불은 보지 못 하고 발길을 돌렸다.내려올 때는 숨이 덜 차,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소나무 숲에 가만히 엎드린 능이 보였다. 한두 개가 아니라 십여 개의 능이 삼층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모습이었다. 능 사이로 걸었다. 경주는 어디를 가나 능이 보이는 곳이다. 거리에 붙은 출산장려정책 포스터에도 능과 임산부의 불룩한 배를 형상화해서 천년을 이어온, 천년을 이어갈 책임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었다.하지만 능을 이렇게 가까이 돌며 걸을 수 있는 곳이 몇 안 된다. 위에 능부터 주인의 이름을 보니 그 유명한 진흥왕릉이었다. 화랑도를 국가조직으로 공인하고, 황룡사 건립하여 신라의 국력 과시. 한강 유역 모두 장악, 대가야 병합, 함흥평야 진출 등 신라 최대의 영토를 개척해서 진흥왕 순수비를 곳곳에 세운 왕이다.  그 밑에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의 능이 차례로 있어서 사이를 오가며 내려왔다. 그 끝에 바위에 구멍이 뚫린 청동기 유적도 있어서 아이들과 와서 보면 좋을 곳이었다. 다만 신라 시대 능 옆에 번듯하게 비석이 놓인 조선 시대 묘가 있어서 이건 뭐지 싶은 풍경도 있다.네 개의 왕릉 맞은편에도 그 안에 누가 누운 자리인지 모르지만, 능이 십여 개 더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산책길 중간중간에 벤치가 놓여있으니 두런두런거릴 수 있어서 더 좋은 소풍 장소였다.이곳에 다녀온 후 만나는 이마다 산책할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고 자랑했다. 진흥왕릉에 가 보았냐고 물으니 다들 그 아래 무열왕릉은 알아도 진흥왕릉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네이버 지도에서 검색하던 H가 “여기 가을에 구절초 축제하는 거기 같은데.” 한다. 예전엔 삼층탑 앞에 절이 있어서 사람들을 불러들였을 테지만 지금은 봄에 작약꽃을 피워서, 가을엔 만발한 구절초가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 이끈다. 꽃 앞에서 인증샷을 찍으면서도 소나무 사이에 엎드린 능을 알아채진 못했던 것이다.몇 해 전, 독서회 회원들과 옥산서원에 봄 소풍을 갔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계곡을 옆에 끼고 서원을 향해 걷는데, 한 회원이 여름마다 아이들 데리고 물놀이 왔던 곳이라며 화들짝 웃는다. 나두나두 하며 두 명이 합세했다. 매 해 물놀이를 하면서도 서원 건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문화재가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말해주는 듯했다.오월이 오면 작약을 보러 한 번, 시월에는 구절초를 만나러 또 한 번 서악동에 가야겠다. 꽃과 함께 소나무 숲에 엎드린 능의 주인들과 역사 이야기도 나누면서 산책길을 돌아야겠다. /김순희(수필가)

2021-03-14

선비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관동팔경을 돌아보는 것은 선비들의 버킷리스트였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꼭 가고 싶었던 곳이라 만 19세가 되면 짐을 꾸려서 강원도로 향했다. 젊어서 못 떠나면 40대 중반의 문인이 되어 길을 나서기도 했고, 그때도 못 떠나면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 길에 나도 서 보았다.관동이란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큰 고개를 넘어 여행하는 선비들이 챙겨 갔던 것은 해시계와 나침반과 작은 지도였다. 그리고 멋진 경치를 보고 그림과 시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야 하기에 여행용 문방구류도 필수였다. 한양에서도 걸어서 한 달 이상 걸리는 여행길이라 아주 작게 만든 벼루와 먹과 붓으로 무게를 줄이고 짐은 되도록 가벼이 가져갔을 것이다. 지금 나는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걸어서가 아닌 선비들이 천리마라고 깜짝 놀랄 자동차를 타고 팔경 중 하나인 울진에 있는 망양정으로 향했다.팔경을 한반도 지도를 놓고 보면 위에서부터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고성의 삼일포(三日浦)는 북한에 있다. 그 아래에 고성의 청간정(淸澗亭)은 둘째가 근무한 부대가 고성에 있어서 면회 시간에 맞추느라 들렀다. 조선 선비들도 금강산을 둘러보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 아래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삼척의 죽서루(竹西樓)는 수학여행으로 가 보았다.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은 가까워 몇 번 다니러 갔지만, 그곳에서 가까운 망양정은 이번이 초행길이다.강원도로 가는 국도에서 내려서니 왕피천을 따라가라고 내비게이션이 길 안내를 한다. 입장료도 없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언덕을 200m쯤 오르니 날아갈 듯한 누각이 나타났다. 왕피천이 동해를 만나 강의 이름을 반납하고 태평양의 품에 안기는 곳에 위치한 망양정이다. 관동팔경 중에 최고의 경치라 칭찬을 받을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정자의 기둥은 풍경을 품은 액자의 프레임이다. 옛사람들은 그 안에 산과 강과 바다를 함께 넣어 걸어놓고 즐겼다. 품이 아주 넓었다. 그 품에 앉아서 바다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한껏 들이켰다.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바람 소리길’이 나왔다. 망양정에서 울진대종이 매달린 종루까지 가는 길에 대나무숲 사이로 풍경을 문처럼 매달아 놓아 바람이 지날 때마다 협주가 시작된다. 댕그렁댕그렁, 사그락사그락. 천천히 걸으며 힐링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계단에 앉아 소리에 마음을 기울였다.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관동팔경을 하나하나 설명해놓은 입간판이 있다. 선비들의 그림으로 예전 풍경을 보여주고 바로 옆에 현재의 사진으로 이렇게 변했어요 하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여덟 곳 중에 북한에 있어서 가 보지 못한 두 곳의 풍경이 보지 못해서인지 더 절경으로 보여 통일이 되면 꼭 가야겠다고 내 버킷리스트에 저장했다.이렇게 경치가 좋아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 이유는 여기가 송강 정철이 노래했던 그 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평해현에 있던 것을 울진 현령이 거긴 월송정이 있으니 하나만 나눠달라 철종에게 읍소해서 옮긴 것이라 한다.동해안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망양휴게소가 나온다. 동해안의 휴게소는 음식 맛집이기보다 대부분 뷰 맛집이다. 특히 망양휴게소는 바다로 통창을 내놔서 바다 위에 앉아 있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전망대도 있어서 그곳에 망원경으로 더 먼 곳의 수평선을 볼 수도 있다. 이 자리가 송강 정철이 바라보았던 관동팔경이라는 설이 있어서 지나는 길에 꼭 들러 정철이 되어 본다.산을 즐기고 기록한 유산록(遊山錄)은 선비들의 여행 후기였다. 70여 편의 유산록을 참고하여 국립춘천박물관은 정선과 김홍도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의 그림 위에 상상을 덧입혀 관동팔경을 영상으로 만들었다. 음악과 어우러진 풍경이 살아 움직였다. 그 옆에 슬그머니 내 유산록 한 구절을 내려놓는다. /김순희(수필가)

2021-03-07

잃어버린 것을 기리며

인터넷 서점에서 시집 한 권을 샀다. 시집이 딱딱하다. 책이 고체이니 딱딱한 게 당연하겠지만 손에 딱 잡히는 시집들과 다르게 유독 뻐덕했다. 책장을 넘기기도 쉽지 않았다. 글도 딱딱한데 글을 안고 있는 종이가 더 단단해 양손으로 버텨야만 했다. 종이책은 눈으로 한 번 읽고, 손끝으로 또 읽는다. 느껴지는 촉감과 넘길 때마다 ‘사락사락’ 방안의 공기까지 넘기는 그 맛이 전자책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할 맛이다.동네 서점에 가서 손으로 펼쳐보고 사야 실패가 없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서점을 다 잃어버려서 직접 손맛을 보고, 서문 한 구절 읽고 사는 일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동네서점을 간직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독자인 내 잘못이다. 오늘, 박물관 하나를 또 잃었다. 직원의 말로는 지난 해 중순께라고 했지만 나는 모르고 있었으니 오늘 잃어버린 거다. 입구에 ‘임대’라고 써진 종이가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경주 오르골소리박물관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남편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유적지를 자주 찾아다니던 어느 날, ‘오르골’이라 적힌 이정표가 휙 스쳐지나갔다. 경주에 오르골 박물관이? 얼른 내비게이션에 찾아보았다. 경주IC 부근이라고 나왔다. 차를 돌려 안내에 따라 찾아갔다. 고속도로 전 마지막 휴게소가 보이자 목적지 부근이라고 말하고는 내비게이션이 안내를 종료 했고, 눈앞에 톨게이트가 나타났다. 많은 차가 드나드는 곳이라 다시 돌아가는 길이 만만찮아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그날은 발길을 돌렸다.얼마 후, 독서회 회원들과 휴게소 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며 근처에 박물관이 있느냐고 물으니 휴게소 안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랬구나, 왠지 휴게소에서 내비게이션이 멈춰서 오류인가 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전문 해설사가 우릴 맞았다. 박물관 안은 다소 서늘했다. 대부분 오르골이 나무로 만들어진 탓에 20℃정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나무가 틀어져 버린단다. 설명을 따라 오르골 하나하나를 경험했다.18세기 말 스위스에서 탄생한 최초의 오르골은 다양한 길이를 한 빗 모양의 금속편에 회전하는 원통 돌기를 튕겨 맑은 소리를 내는 실린더 식이었다. 감았던 태엽이 풀리며 울리는 음들이 100년 된 소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맑은 소리가 흘렀다.박물관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고전 영화 속 우아한 여주인공이 양쪽에 섰다. 백설 공주에 나오는 키 작은 등장인물 같기도 한 것이 중앙을 장식해 놀이공원에 온 듯한 분위기이다.전 세계에 60대도 채 남아있지 않다는 1907년 벨기에산 ‘댄스 오르간’이었다. 댄스파티에 악단 대신 큰소리를 내도록 크게 만든 오르골이었다. 디스크식 오르골과 마찬가지로 구멍 뚫린 천공용지를 갈아 끼우면 다양한 멜로디가 연주되는 원리였다. 파이프와 북 등 오케스트라가 있어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함께 간 회원 중에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흥에 겨워 춤을 추었고, 다들 귀족의 티파티에 초대 받은 듯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됐다.유령 피아노, 에디슨이 발명했다는 축음기부터 각종 축음기 등이 한가득 전시돼 있었다. 나팔꽃모양의 관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흑백영화처럼 흘러나왔다. 그 방문 이후 친구들을 데리고 한 번, 학교 동기들과 또 한 번, 아쉽게 지나쳤던 남편과 가족들을 데리고 또 갔다. 일 년에 한 번은 가서 오래 간직한 소리들을 내 마음에 간직하려 했다. 그 박물관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일기나 편지를 보관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공기, 습도, 관리하는 인원에 넓은 공간까지 필요해 개인이 오래 간직하기엔 버거운 일이었을 거라 짐작이 간다. 사라져버린 박물관 앞에서 다시 듣기 힘든 우아한 댄스오르간 소리가 듣고 싶어 녹화해둔 영상을 들으며 더 많은 이가 찾아오도록 했었어야 했다는 늦은 후회를 했다. 무엇을 오래 간직한다는 것은 많은 이의 뜻과 신이 함께 해야 한다는 걸 또 느낀다. 두 손을 모아 본다. /김순희(수필가)

2021-02-21

플라타너스가 말을 걸다

플라타너스는 가지가 잘려 나간 자리에 흉터를 만들지 않는다. 안으로 상처를 말아 넣어서 잘린 단면이 사라지게 한다. 흉터를 볼 때마다 떨어져 나간 가지가 생각나 가슴 아플까봐 그러는 것 같다.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듯 플라타너스는 어린 시절 내게 위로가 돼주었다.방송반이던 나는 매일 아침 명상시간에 읽을 내용을 그 전날 한 편씩 일지에 옮겨 적었다. 그날은 담임이 세 편이나 쓰게 했다. 청소 당번 아이들이 검사를 맡고 교실을 떠났고, 친구 미정이만 복도에서 내가 다 옮겨 적고 나오길 기다렸다. 어슬렁거리지 말고 집에 가라는 선생님의 큰소리에 우물쭈물하던 미정이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집에 혼자 갈 길이 심심할 것 같아 내 글씨가 점점 휘갈겨졌다. 마지막 장을 옮겨 적을 때, 이층 오학년 교실은 내 연필 긁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선생님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만 쓰고 앞으로 나오라 했다. 한참 전부터 굳게 다문 입으로 서류 같은 걸 살피며 내겐 눈길도 주지 않더니 말이다. 내 책상에서 교탁까지 걷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뭔지는 모르지만 뒷머리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 걸 느꼈다.그는 내게 다짜고짜 돈은 왜 훔쳤냐 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내 표정에 화를 내며 출석부로 머리를 쳤다. 두려운 마음에 애써 참았지만 눈물이 볼 위로 굴렀다. 뭐지, 무슨 돈, 어디서 훔쳤단 말인가. 숙직실에 걸린 선생님 옷에서 300원을 왜 훔쳤냐 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고, 그는 훔치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다그쳤다. 몇 번인지 때리고 다시 묻기를 반복했다. 손목시계를 흔들며 뺨도 몇 대나 때렸고 그때마다 나는 교탁에서 멀어졌다 끌려 왔다. 억울함에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나는 300원을 훔칠 정도로 궁하지 않았다. 매를 맞는 간간히 훔칠 이유가 없는 내 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다가 설핏 고개를 드니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플라타너스가 뉘엿뉘엿 지는 해를 아쉬워하며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밖이 환할 때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혼자 감당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훔쳤노라고 거짓말을 했고, 그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이젠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운동장엔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퉁퉁 부은 얼굴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던 아이들의 눈빛이 내 등에 꽂히는 걸 느꼈다. 눈시울 붉은 해가 교실 뒤로 뒷걸음을 치고 플라타너스만이 위로하는 듯 교문 앞까지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나를 따라왔다.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울었다. 이불호청이 젖었다 다시 마를 때쯤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들어 오셨다. 벌게진 내 눈을 보고 무슨 일이냐 물으셨고 할아버지가 혼내줘요, 난 억울하다고 울먹였다. 한참을 듣기만 하던 할아버지는 “거 참 무슨 일이고.” 달래는 것도 위로도 아닌 그 한 마디뿐이었다. 선생님이란 이름이 부모보다 높았던 시절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날들이 흘러갔지만 나는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오랫동안 혼자였다.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멀찍이 떨어져 품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에 숨어 있었다. 그런 나에게 나무는 방울 모양의 열매를 떨궈주며 말을 걸어왔다. 버즘같은 껍질을 벗겨내며 잊어버리라고 하는 듯했다.나는 바보같이 나중에 선생님을 찾아가야지 했다. 내게 왜 그랬냐고, 왜 괴롭혔냐고, 궁금한 모든 것을 따지리라 다짐했었다. 사십 년이 흐른 지금 알았다. 나에게는 아직도 노을이 질 때면 가슴이 아리며 잊지 못할 일이지만 늙어버린 그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지금도 초등학교 운동장엔 나를 위로해주던 플라타너스가 서있다. 어른 손바닥 같은 잎을 누군가의 발 앞에 떨어뜨리며 위로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김순희 수필가

2021-02-14

오후의 홍차

오후 4시, 홍차를 주문했다. 홍차 세계에 오래전 입문한 S가 문외한인 나에게는 스리랑카에서 자란 우바를, 함께 간 M에게는 중국산 기문을, 자신은 인도산 다아즐링을 시켰다. 이렇게 세 가지 세계 3대 홍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홍차 전문 카페답게 실내는 앤틱하게 꾸며 놨다.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에 손님이 우리밖에 없기도 해서 돌아다니며 소품들을 구경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린 그림, 노란 조명이 켜진 장식장, 차가 담긴 모양이 다양한 틴 케이스가 한쪽 벽면을 장식해서 하나하나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했다.그러는 사이 따뜻한 털옷을 입은 티팟이 홍차를 품고 우리 테이블에 놓였다. 먼저 찻빛이 싱싱하고 홍차의 샴페인이라 불리는 다아즐링을 맛보았다. 시간을 길게 우렸는지 떫은맛이 약간 느껴졌다. 함께 곁들여 나온 스콘을 한입 머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 다음으로 루비처럼 진하고 붉은 색이 돋보이는 우바를 음미했다. 내 취향은 우바였다. 그 다음엔 영국인들을 매료시킨 동양적인 향의 기문을 기품 있는 찻잔에 따랐다. 투명한 적색의 깊은 맛이 느껴졌다. 이 차도 좋았다. 차를 마시는 오후 내내 오래된 가구와 레이스 장식의 조명 아래에서 오묘한 홍차의 전설을 들었다. 들으며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라는 영국홍차문화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왜 오후에 홍차를 마실까 궁금했다.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인들은 식사할 때만 차를 마셨다고 한다. 안나 마리아라는 공작부인이 점심은 먹었고 저녁은 아직 먼 오후 4시 전후에 매우 허기를 느꼈고, 참다못해 하녀에게 홍차 한 잔과 간단한 음식을 요청해 먹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애프터눈 티의 기원이 되었고 최상류층 귀족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이 관습의 시작이었다는 설이다. 1890년쯤 수입량도 충분히 늘어나게 되고 가격도 많이 낮아져 부자들의 애프터눈 티 문화를 부러워하던 서민들도 이 무렵이 되어서는 홍차를 부담 없이 마시면서 애프터눈 티 문화를 마음껏 즐기게 된다. 영국에 차가 처음 소개된 지 거의 250년 만에 홍차는 진정으로 영국 국민들을 위한 일상음료가 되었다. 헨리 제임스라는 작가는 “애프터눈 티 라고 불리는 모임에서 보내는 시간 보다 더 아늑한 순간은 삶에서 그다지 많지 않다”라고 적었다. 홍차하면 떠오르는 ‘얼 그레이’라는 단어도 ‘그레이 백작’이라는 뜻으로 총리를 지낸 영국 정치가 이름에서 따왔다. 총리부터 일반 사람들까지 모든 영국인이 즐기던 영국 애프터눈 티 문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서서히 영국인의 일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홍차를 엄청나게 마시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차와 티 푸드를 여유롭게 즐기기에는 현대의 삶이 너무 바쁘고 팍팍해진 탓이었다.김순희수필가우리도 오래전부터 스스로 홍차를 만들어 마시던 민족이었다. 선덕여왕 때부터 이미 차 재배를 한 하동 차도 녹차가 아니라 발효차인 홍차라고 한다. 일상다반사라는 말은 차를 마시는 일이 밥 먹듯 늘 있는 예사로운 일이라는 뜻이다. 명절 때 차례(茶禮)를 지낸다. 원래 차를 올리던 의식인데 차례가 어느 정도 보편화하면서 이 차를 구하기 어려우니까 술로 대신한 거라고 한다.“언니, 저는 나중에 영국할머니들처럼 늙고 싶어요.” 영국할머니가 어떻게 사는데 M이 그런 말을 할까 궁금했다. 유학 가서 어렵게 공부하느라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없던 그녀가 진짜 오랜만에 카페에서 친구와 한국말로 수다를 떨던 오후, 하얀 머리의 할머니 세 분이 차를 마시며 두런거리다, 뜨개질도 하다,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있기도 하며 오후를 마음껏 즐기더란다. 그날만 특별히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매일 찾아오는 오후 그 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는 삶이 부러웠단다.지인들과 영국할머니들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감미로운 차향이 우리를 스리랑카로 인도로 중국으로 또 영국 어느 골목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붉은 홍차에 오후의 해 그림자가 드리운다.

2021-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