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서 듣는 빗소리는 녹색 소나타이다. 올해는 며칠에 한 번씩 비님이 오시니 푸른 연주를 듣기 위해 내 발길이 자꾸만 숲으로 향한다. 첫 방문 때 보이지 않던 나무가 두 번째엔 눈에 띄었고, 맑은 날에 미미하던 으름덩굴 꽃 향이 빗소리에 묻어오니 더 진했다. 며칠 전 찾아간 가로숲은 미나리냉이가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초록 융단에 별을 박은 듯했다.
‘의로운 성’이라 이름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별처럼 많았던 곳이 어디일까?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 마을’이 있는 곳이 의성이다.
사촌마을은 풍수상 명당으로서 딱 하나가 부족했다. 마을 뒷산으로 문필봉이 떡 버티고 서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서 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오른쪽 지형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우백호가 없었다. 그래서 풍수를 위해 방풍림을 심었는데 지금 이 숲이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된 ‘사촌리 가로숲’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하여 ‘서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로숲이라는 이름은 들판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조성한 숲이라서 붙여진 명칭이다. 간혹 길을 의미하는 ‘가로(街路)’로 잘못 알기도 한다. 원래의 이름은 마을 남서편의 바위 언덕을 가리고 마을 서편의 긴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어 ‘가리쑤’라고 불렀다. 이곳은 물길이 짧고 모래가 많아 비가 오면 물이 한꺼번에 흐르고 금방 땅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어서 물길도 보호하고 바람도 막아 마을 터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숲을 만들었다. 이 숲이 우거지자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과 홍수를 막아주어 사촌마을은 살기 좋은 터전이 되었다.
사촌 가로숲에는 오래 사는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팽나무를 심었다. 그 사이에 키를 맞추고 선 아카시아도 아름드리로 자라 향기를 바람에 실어 마을로 보낸다. 마을을 이룰 때 심은 나무들이 이제 수령이 600년에 이른다. 길이 1㎞에 폭은 45m 정도의 숲 사이를 흐르는 물길은 큰비가 오면 하천 바닥에 흙이 많이 쌓이고 나무들도 자주 유실되었기 때문에 숲과 하천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예전에는 1년에 한 번씩 인근 10리 안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흙을 걷어 내고 숲을 돌보았다고 한다. 숲의 소유는 마을을 일군 안동 김씨 도평의공파이며, 관리는 199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후 의성군으로 넘어갔다. 마을에 서림계 문서인 ‘서림 계문부(西林契文簿) 병인년(1926) 5월 일’과 ‘임원록(1987)’이 남아 있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난다고 했는데, 신라 시대 한 명, 조선 시대 류성룡이 있었다. 아직 한 분이 남았다. 큰 인물이 태어나면 항상 전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서애 어머니가 서애를 낳기 위해 친정집에서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가던 중 갑자기 산기가 와서 가로숲에서 해산했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고, 서애의 경우 외가에서 태어났다.
사촌마을이 기록에 나타난 것은 1392년으로 안동 김씨인 김자첨이 안동의 회곡에서 이주해 오면서이다. 오래된 마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마을에는 지은 지 100여 년의 한옥들만 보인다. 그 이유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이 마을을 왜군들이 불태웠고, 구한말에는 명성황후 시해 후 이곳에서 병신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을 불태우는 바람에 황폐화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촌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은 1582년에 지은 만취당으로 부석사 무량수전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사가의 목조건물이라 전해진다. 만취당에는 만년송이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 소나무 이름을 붙였지만,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다. 임진왜란 때 의병과 병신의병도 모두 지켜본 증인이다.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니 세 번째 정승이 의병 그들이라고 내게 전한다. 가로숲에서 들려오는 녹색 소나타가 만년송을 흔든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