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사진관에 맡겼다. 큰아이 백일 즈음부터 촬영한 홈비디오 카메라가 어느 날부터 작동이 멈춰버렸다. 20년이 지나니 고장이 난 것이다. 새로운 영상을 찍을 수도 없지만 가장 큰 일이 아기 손바닥만한 8mm 테이프에 담아 둔 큰아이의 추억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까운 방송국에서 CD로 구워준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듣고 문의했더니 기간이 끝나버렸고 어쩌나 하며 시간만 더 흘렀다.
지난 여름, 자격증 시험을 치는 아들이 증명사진이 필요해 집 주위 사진관에 갔더니 문을 닫았다. 그 많던 사진관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섯 번째로 내비게이션을 켜서 찾아간 곳이 그나마 아직도 영업 중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아들을 카메라 앞에 보내놓고 한숨을 돌렸다.
내가 아들 나이였을 때는 여행에서 돌아와 사진관에 들르는 게 정해진 루틴이었다. 며칠 후에 함께 간 친구들 수만큼 뽑은 사진 한 뭉치를 받아들고 찻집에 모여서 또다시 여행 간 장소로 시간여행을 떠나 깔깔거렸었다. 그 사진을 접착식 앨범에 정리하며 초점이 흐리게 나온 사진도, 여행의 설렘만큼 흔들린 사진도 버리지 못하고 끼워두었다. 이제는 사진을 찍고 기다려서 인화지에 뽑는 일이 자주 없다 보니 사진관이라는 장소도 동네에서 삭제되어 버렸다.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하다가 패스트푸드점에 밀려나 구석으로 몰리다가 그마저도 벅찬 일인지 다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증명사진을 찍고 나자 한 시간 정도 후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찾으면서 혹시나 하고 오래된 비디오테이프를 파일로 바꿔줄 수 있냐고 물었다. 가능하다고 했다. 맡기러 곧 가겠다고 하고 또 몇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더 있다가는 저 사진관마저 사라질까 싶어 얼른 챙겨다 맡겼다. 일주일 후에 usb에 저장한 것을 찾아왔다. 테이프 4개가 손가락만한 저장함에 옮겨지는 값이 사진값의 열배도 넘는 가격이었지만 영영 못 보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네 식구가 화면 앞에 앉았다. 27년 전의 큰아이가 옹알이를 하며 보행기를 탄 채로 27년 전의 어린 내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닌다. 흰머리 하나 없는 젊은 남편이 웃는다. 아직은 총각인 시동생이 조카를 어르기도 한다. 몇 년 전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어머님이 밝게 웃으시며 손자와 눈을 맞추신다. “할아버지는 지금이랑 똑같네요. 와~어머니, 저 때는 가늘가늘하네요. 큭큭큭. 같이 근무한 선생님들과 나보다 1년 늦게 결혼한 은주선생님네 집들이 간 날인지 여리디여린 아가씨들이 큰아들과 눈을 맞추려 까꿍까꿍을 외쳤다.
백일 즈음부터 네 살까지의 기록이었다. 큰아이의 성장기록만 담겨있으려니 했는데, 아버님 환갑잔치에 오신 고모님과 주름살 하나 없는 시누이, 삼십 대 중반인 조카들이 대여섯쯤으로 어려진 아이가 되어 화면 속을 날아다녔다. 마지막 파일엔 내가 태어나 자란 안동 고향 집에 다니러 간 날도 있었다.
어제저녁, 막냇동생 내외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놀러 왔다. 올케에게 스무 살 시절의 동생을 보여주었다. 안동 고향 집에 함께 갔던 것이다. 신작로 저 끝에서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막내를 보고 가족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치매로 정신을 놓은 할머니가 안동포를 가지고 나와 지금 내 나이보다 젊은 친정엄마에게 양쪽에서 잡아당기자고 하셨다. 그러는 사이 백일이던 큰아이는 높은 계단을 혼자서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리는 개구쟁이가 되어있다.
등장인물 모두 머리 스타일은 촌스럽고 옷매무새는 어색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배밀이 하다가 기는 걸 배우느라 병치레하며 병원에 입원해 주삿바늘을 꽂은 모습조차도 웃으며 볼 수 있어서 아름다웠다. 머리에 저장된 기억들이 흐려지는 27년 동안에도 영상 속에 우리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무엇을 오래 저장하는 일은 다 아름답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