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인이다.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그 순간 멀리 사는 할머니를 불러오고, 과묵한 할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게 만든다. 온 가족이 자신을 향하게 해 놓고 옹알옹알 시를 뱉어낸다.
아이들의 몸은 이야기 가득한 언어의 창고다. 수많은 낱말이 뒤섞여 복잡하기만 한 저장고에서 매주 한 편의 시를 끄집어내 주는 일이 내 몫이다. 아이들이 교실에 도착하기 십 분 전에 미리 칠판에 초성 찾기 할 자음 두 개를 적어준다. 잠시도 가만히 있기 힘든 2학년과 힘이 넘쳐나는 3학년 친구들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집중력을 발휘한다.
낱말을 찾아내는 친구들에게는 ☆을 주는데, 그것을 모아 선물을 받을 수 있어서 아이들은 눈과 손에 불을 켠다. 선물이라고 해야 문구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우개, 공깃돌, 퍼즐 같은 천 원이 넘지 않는 가격의 소품이다. 다만 여러 아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을 받은 세 명이 선물을 고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니 받는 영광을 쟁취하려고 온몸을 쓴다. 자신의 몸 속 여러 방에서 낱말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방이 많았다. 부모님이 쓰시는 안방, 마루를 사이에 두고 갓 시집온 숙모와 삼촌 사이에 남동생이 끼어서 자고 싶어 했던 건넛방. 건넛방과 벽을 사이에 둔 뒷방까지가 안채에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사랑채에 기거하셨고 나와 언니는 사랑채 윗방에 지냈다. 식구들이 잠자는 방 말고도 디딜방아가 차지한 방과 소들이 허연 하품을 하는 외양간, 그 옆에는 짚이며 땔감이 가득 쌓인 헛간도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숨바꼭질하기에 우리 집이 최고의 장소였다.
그중에 내가 자주 숨어든 곳은 고방이라 불리던 창고였다. 문을 열면 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곡식을 담는 그릇들이다. 내 키보다 높은 시렁에는 채반에 갖가지 나물 말린 것과 계절 과일이 숨겨 있었다. 바닥에는 아이 하나가 다 들어가고도 남는 단지가 둥글둥글 앉았고, 그 위 광주리에는 이름은 분명 있지만 내가 모를 뿐인 나물 말린 것들도 수북이 담겨 있다. 한쪽에는 콩이며 팥이 든 자루가 서로 기대고 있어서 내가 한 귀퉁이에 숨으면 감쪽같아서 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곳은 할머니의 보물창고였다. 손님들 손에 들려온 과자 종합선물세트는 우리가 한꺼번에 다 먹어치울까 봐 높이 올려두고는 어르고 달랠 때 하나씩 선을 보여주셨다. 내가 몰래 들어가 맛난 걸 찾아내려고 해도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무서운 도깨비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 오래 머물기 힘들었다. 언니와 같이 들어가 뒤져봐도 어느 단지에 또 어느 상자에 달콤한 과자가 들어있는지 찾아내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고방 주인인 할머니는 들어가자마자 금방 곶감이나 유과를 손에 들고나오셨다. 보기에 엉망으로 뒤섞인 내용물들이 할머니 눈엔 훤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어지러워 보이는 그곳에 할머니는 나름의 법칙으로 곡식과 과일과 달콤이들을 숨겨놓으셨다.
아이들도 자기만의 방법으로 잘도 시를 꺼내놓았다. 그 시들을 수업시간만 음미하고 흘려보내기가 아까웠다. 한 편 한 편 엮어서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고 싶었다. 교실에서 연필로 쓴 시를 집으로 보내면 부모님들이 읽어보고 휴대폰에 써서 내게로 다시 보내진다. 모은 시를 한 권으로 만드는 게 내 몫이다.
아이들의 시집을 편집하느라 한 달을 고스란히 집중했다. 강의가 끝나는 날 하얀 표지의 ‘보물창고’를 받아든 아이들에게 자기 시 한 편씩 낭송하게 했다. 공책이 아닌 시집에 인쇄된 자신의 시를 읽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또랑또랑했다. 책을 받아본 부모님들이 문자로 전화로 감동을 전해왔다. 아이들의 시가 시인의 시 같다고 까르르 웃어넘기는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귀에 와 닿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고방에서 꺼내주던 과자의 달콤한 향 같은 것이 온몸에 퍼져갔다. 아이들이 나를 그리운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