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꽃그늘 아래서 보냈다. 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노랫말처럼 목련이 키를 한껏 키운 곳으로 소풍을 갔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가 열심히 수 놓은 꽃잎들이 봄기운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 목월 시인이 이것을 보고 썼구나. 이 그늘 아래서 젊은 베르테르가 쓴 편지를 읽고 있으면 새의 날개옷 같은 하얀 꽃잎이 편지처럼 나리겠지.
불국사 주차장에서 동리목월문학관으로 가는 길, 연못 위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입구에 자목련 세 그루는 아직 입을 다 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새 같다고 하니 함께 간 E는 촛불을 켠 것 같다 하고, S는 꽃등 같다고 거들었다. 자목련이 아직 새의 부리같이 꽃잎을 맞은편을 향해 지저귄다. 오늘이 절정인 백목련이 환하게 웃는다. 다리를 건너니 양쪽에서 가지를 뻗어 나와 하늘을 덮었다. 목련 이불이다.
목월 시인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경주라서 그런가. 키 큰 목련이 유독 많다. 작정하고 목련 투어를 나선 날이니 한 곳을 더 찾아갔다. 오래전 4월 5일, 아직 식목일이 공휴일이던 때에 남편을 만나고 첫 야외데이트 날에 경주 남산을 올랐었다. 포석정에 주차를 하고 오르는 산책로는 길이 좋아 이야기하며 걷기 안성맞춤이다. 산 중턱 너럭바위에서 싸간 김밥과 커피를 마시고선 반대편 통일전으로 내려왔다. 그날 통일전에 들어가니 목련이 많이도 심겨 있었고 그 꽃들이 막 피기 시작해서인지 넓은 뜰에 향기가 그윽하게 번졌다. 목련도 향기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곳을 30년 만에 다시 찾았다. 목련이 폈을까, 올해 꽃이 빨리 와서 이미 져버리진 않았나, 그 사이 정원수가 바뀐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며 들어섰다. 내 걱정이 쓸데없다는 듯 기와를 인 담장 옆으로 흐드러지게 목련이 일렁거렸다. 키가 아주 높진 않아서 꽃 속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반들거리게 닦아 놓은 정자에 오르니 경주의 자랑거리인 능선이 멀리 보이며 들 풍경이 환하게 펼쳐졌다. 목련 나무가 발아래 있어서 올려다보는 것과 또 다른 감흥을 느끼게 했다.
수백 장의 사진을 찍은 우리는 이제 카메라는 내려놓고 마루에 철퍼덕 우리도 내려놓았다. 평일에 통일전을 찾는 이가 거의 없어서 넓은 정원이 다 우리 것이었다. 꽃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봄바람을 즐겼다.
그러다 목련꽃 그늘 아래 섰으니 우리도 시 한 편을 읊어 보자고 했다. 내내 흥얼거린 4월의 노래가 목월 시인의 시이니 읽어주겠다고 하니까 “무슨 노래요?” 한다. 검색해서 들려주었더니 함께 간 두 여인이 처음 듣는 노래라는 것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나, 음악 시간에 불러본 적 없느냐 했더니 없단다. 나보다 열세 살 어린 그들의 교과서와 내 것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대신 ‘오~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아야’ 이 곡으로 수행평가를 했단다.
초등 4학년 담임이 풍금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들려주신 날, 노래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그 자리에서 다 외워버렸다. 중학교 합창 대회 때는 ‘카프리섬’과 ‘오 솔레미오’를 연습했더랬다. 음악 시간에는 음악실로 이동해서 선생님의 피아노 소리에 맞춰 가곡을 배웠고, 그때 듣고 배운 것들로 평생을 읊조린다.
아들에게 학창시절 음악 시간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자습이었다고 한다. 음악 선생님도 그닥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고 하니 미술도 저 먼 나라 이야기였을 것이다. 체육까지 하지 말라면 남학생들이 들고일어날까 봐 그나마 공 하나 던져주면 신이 났었다고 한다. 그러니 ‘4월의 노래’도 목련화도 듣느니 처음이란다. 아들이 나이 들며 목련 나무 아래서 흥얼거릴 가곡이 있으려나 싶어 안타까웠다.
아직 3월인데 아파트 화단에 목련꽃은 벌써 지고 연두 잎이 돋았다. 더 북쪽인 서울에도 목련이 핀다니 목월 시인의 ‘4월의 노래’가 이젠 ‘3월의 노래’로 바꿔야 하나 하는 걱정을 해 본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