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서숲

등록일 2021-06-13 18:32 게재일 2021-06-14 16면
스크랩버튼
시냇물처럼 흐르는 소나무 오솔길.

“아우 보래이/사람 한 평생/이러쿵 살아도/(중략)/그렁 저렁/그저 살믄/오늘같이 기계(杞溪)장도 서고, (중략)/그저 살믄/오늘 같은 날/지게 목발/받쳐 놓고/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한잔 술로/소회도 풀잖는가”- 박목월 ‘기계 장날’

주말마다 남편과 길을 나선다. 내가 어디라고 콕 집어 가자 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남편이 길을 잡았다. 목월 시인이 노래한 기계장터로 차를 밀어 넣으니 장날도 아닌데 사과 상자를 펼쳐놓고 아주머니가 흥정 중이었다. 손가락을 다친 것인지 깁스를 하고서도 사과를 팔려고 내게 맛을 보라고 권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한 상자 차에 실었다.

기계장터를 좌측으로 돌아 들어가는 길로 초등학교를 지나니 소나무가 병마용의 군사처럼 둘러선 숲이 보였다. 여름 강렬한 햇살을 모두 가릴 만큼 빽빽이 선 모습이 늠름했다. 주말이라 많은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고 쉬려고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우리도 그늘로 들어갔다.

예전에 서숲에 왔을 때는 돌보는 손길이 없는지 소나무 사이를 걷기에는 풀이 우거져 힘들었다. 누군가 표고버섯 농사를 하는지 소나무 아래 가득 나무 등걸을 맛대어 놓았었다. 지금은 오솔길이 소나무 사이를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모양새였다.

걸으면서 쫓아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생각이란 하나도 없다는 케에르 케고르의 말이 소나무 사이에 걸렸다. 맨발로 걸으라고 부추겼다. 신발을 신고 한 바퀴 크게 돌았으니 양말도 벗고 걷기로 했다. 가다 힘들면 돌아오자고 하면서 자신 있게 벗자마자 발이 아팠다. 신발에 의지해 걸을 땐 멀리 숲 전체를 관람하며 백로가 내려앉는 하늘도 올려다보며 힘차게 내 딛었었다. 하지만 발밑에 마사토의 작은 조각이 몇 개인지 오롯이 느껴지는 지금은 발밑만 보고 걸어야 했다. 앞서가던 남편이 “길이 이레 길았나?” 한다. 숲 전체를 도는데 30분도 안 걸렸었는데 맨발로는 발 씻는 자리가 저기 보이는데도 한참이나 걸렸다.

찬찬히 흙길을 밟자니 청설모가 까놓은 잣 껍질이 흩어져 있다. 소나무만 있는 줄 알았던 숲에 잣나무도 몇 그루 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더 가니 대나무 숲이 서숲 둘레를 깜쌌다. 빨리 지나칠 땐 들리지 않던 새들의 조잘거림이 대나무 숲 가득했다. 매실을 가득 매달고 선 매화나무가 옆으로 기울어지기 직전이었고, 산비둘기 소리도 더 구성지게 들렸다.

겨우겨우 걷는 우리 옆으로 힘차게 맨발로 걷는 분이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하니, 걸음을 멈추고 초보자는 큰길 건너 소나무 숲길이 발이 덜 아프다며 그리 가보라, 길 가장자리로 걸으면 돌이 좀 작아 편하다, 자신은 300일째 걸음이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며 웃었다. 멀어져 가면서 우리도 맨발로 오래 걷기를 성공하길 바란다고 손을 흔들었다. 처음 만나는 우리의 건강까지 바라는 그 진심이 느껴져 끝까지 완주했다.

맨발로 걷느라 고생한 두 발을 부드러운 손으로 씻어주라고 써있는 세족공간에 앉았다. 발게진 발바닥을 흐르는 물에 씻었다. 여름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이는 느낌이 발끝에 전해졌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양말 신발 차례로 신었다. 한 발 한 발이 포삭포삭 몰캉몰캉거렸다. 땅 위를 살포시 떠 가는 느낌이었다.

안동 김씨가 서림으로 바람을 막았다면 서숲은 경주 이씨 문중의 땅이다. 소나무숲에 쌓여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동네 안쪽에 도원정사가 자리했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 협동길36번길 21-9 두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도원정사는 경주 이씨 기계 입향조인 조선 중기 유학자 도원 이말동의 높은 학문을 기리기 위해 1928년에 후손들이 세운 누각이다. 누각 아래 배롱나무 붉은 꽃이 연못에 비칠 때 가면 더 좋으니 여름이 끝나기 전 한 번 더 방문하기로 하고 숲을 나왔다. 도원은 비록 은둔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마을 주민들을 설득해 제방을 쌓고 인공 숲을 만들게 했다. 기계 서숲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의성에 서림이 있다면 기계에는 서숲이 있다. /김순희(수필가)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