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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갸~ 작약 보러 갈래?

등록일 2021-05-30 20:13 게재일 2021-05-31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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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런 작약으로 테이블이 환해진다.

꽃 한 송이를 선물 받았다. 환하게 피어난 함박꽃이다. 이슬이 송글송글 맺힌 꽃에서 봄 향기가 묻어났다. 결혼하던 해 봄, 시댁에서 잠을 깬 아침이었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새벽 밭일을 나가신 어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아침밥을 준비 중이었다. 아버님이 “아가~”하시며 뭔가를 들고 부엌에 들어오셨다. 함지박처럼 크게 웃으며 피어난 작약꽃이었다.

시댁 마당에는 작약이 두 무더기로 핀다. 분홍 잎 속에 하얀 솜털 같은 잎이 보송한 꽃은 대문 옆에, 보라색 모란을 닮은 작약은 거실 앞마당에 심었다.

이웃에서 한 뿌리씩 얻어와 꾸미신 정원이다. 그 몽우리 중에 먼저 핀 첫 송이를 꺾어 내게 건네신 것이다. 밭에서 돌아오신 어머니는 “나는 평생 한 번도 못 받은 걸, 니는 우에 받았노”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지 사 년이 지났다. 네 번째 봄이 오고 분홍 작약이 먼저 꽃문을 열었다. 어린이날에 시댁에 가니 아버님은 몇 송이 꺾어 거실 화병에 두고 즐기셨다. 집에 돌아갈 때 가져가서 한껏 보라 하셨다. 꽃 몽우리를 만지니 손이 끈적하다. 그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개미들이 줄지어 송이를 오르내린다. 개미까지 데려갈까 봐 몇 송이 꺾어 함지박 가득 물을 받아서 가지 채로 담궈 뒀다.

우리 집 거실에서도 작약은 자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2주가 지나도록 마지막 몽우리까지 다 피워냈다. 먼저 핀 꽃들의 끝이 마르기 시작했다. 석가탄신일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남편이 “자갸, 작약 보러 갈래?” 어디를 가자는 거냐 했더니 묻지 말고 따라나서라 했다. 차에 올라 내비게이션에 신녕이라고 입력했다. 포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작약으로 가득한 동네가 있었다.

신녕면 화남리 194-1번지 일대가 작약 농사를 하는 곳이었다. 3~4년 지난 뿌리가 한약 재료가 되니 특용작물로 키우고 있었다. 꽃은 향기가 좋아 차로 만들어 마시면 시원한 맛이 나서 가슴이 뻥 뚫리는 행복감을 준다고 했다. 축농증과 비염에도 효과가 있다 하여 싱싱한 꽃을 콧속에 넣고 잠을 자면 더 좋다고 한다. 뿌리를 달여먹으면 좋은 여러 병증 중에 생리통과 현기증, 두통에 좋다는 동의보감의 글귀가 귀에 박힌다. 나에게 맞는 약재였다. 쌍화탕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는 작약의 뿌리는 한방에서 혈맥을 통하게 하며 속을 완화하고 나쁜 피를 풀어주는 약재로 이용한다.

작약의 꽃은 크고 탐스러워 ‘함박꽃’이라고 불리며, 결혼식 꽃장식과 신부 꽃다발로 많이 쓴다. 어릴 적 학교 가는 길에 미경이네 작약밭이 있었다. 선생님 교탁 위 꽃병에 주번이 되는 날에 꽃을 가져가야 했다. 할아버지가 산에서 진달래나 조팝꽃을 꺾어주실 때도 있었다. 그날은 학교 가는 길에 내가 당번이라는 게 생각이 났고, 미경이네 작약밭에 몰래 들어가 한 송이를 훔쳤다. 함지박만 해서 한 송이만으로도 교실이 환했다. 나중에 미경이에게 고백하자 뿌리를 약재로 쓰려고 꽃은 따줘야 한다고 괜찮다고 했다. 사실 근처에 작약밭이 거기뿐이라 고백하지 않아도 뻔히 드러날 일이었다.

경북 영천시 신녕면에서는 2018년부터 5월 15일부터 19일까지 작약꽃 한마당 행사를 개최하여 작약 품종 전시, 작약꽃 따기 체험, 꽃차 만들기 체험을 진행했다. 지난해는 행사가 취소됐고, 올해는 드라이브-스루로 꽃만 보고 가라고 했다. 꽃밭 사이를 거닐다 보니 향기가 은은하게 번졌다. 경주 서악동, 영양 서석지 근처 동네에는 오늘 낼이, 평창은 6월 첫 주에 핀다고 소식을 보내왔다.

깊은 산속, 너덜지대에는 야생 백작약이 간혹 눈에 뜨인단다. ‘간혹’이란 말이 의미하듯 수가 줄어서 보호종이 되었다. 너덜은 너덜겅의 준말로 많은 돌이 깔려 있는 산비탈을 가리키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백작약이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으로 피한 것 같아서 마음이 싸하다. 자기에게 약이 되는 꽃이라 작약인가, 농담을 건네자 함지박처럼 남편이 웃는다. 약이 되긴 되었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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