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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춘 음악회

봄 마중을 나갔다. 온화해진 햇살이 걷기에 좋은 날씨라며 수목원으로 발길을 이끌었다. 산 정상에 위치한 경북수목원을 향해 구불구불 길을 오르며 한 구비 돌아설 때마다 겨울 나목의 가지 끝이 물을 가득 올려놓았는지 발그레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차에 몇 명이 탔는지 확인을 했고, 주차 후에는 열 체크와 방명록도 적어야 입장이 가능했다. 주말이 아닌 평일 오후라 우리 말고 서너 명의 산책자들을 넓은 숲에 흩어놓으니 조용했다. 습지원에 들어서니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바삐 지저귀는 새소리가 요란하다. 새소리 사이로 가만가만 피아노소리가 들렸다.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였다.(사실 익숙한듯하나 작곡가도 제목도 몰라 검색찬스 썼다는 건 비밀!)겨울 숲은 잎을 발밑으로 일찌감치 보내고 난 가지뿐이라 속이 훤히 드러난다. 습지 사이를 연결한 다리 난간에 십이지신상 조각이 앉아있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아챘다. 꽃과 잎이 풍성한 계절에만 찾아와 꽃과 향기에만 취했었던 탓이다. 휑한 가지뿐인 나무의 발치에 써 놓은 이름표가 눈에 띄었다. 만첩빈도리, 화살나무, 곰의말채나무를 떠듬거리며 가로수원으로 발길을 옮겼다.그사이 들려오는 가락이 경쾌하게 곡을 바꿨다. 비발디의 사계 중 한 곡인데 ‘봄’인지 ‘가을’인지 헷갈렸다. 스마트폰이 식물학자이자 음악선생이다. ‘가을’이 아니라 ‘봄’이라고 짚어주었다. 버드나무는 비발디 곡에 취해 가지 끝이 노르스름해졌고 뾰족한 봉오리를 가득 달고서 ‘나 목련이오.’하는 백목련이 키를 높이고 있다. 이름을 들어봄직한 나무들이 있는 유실수원을 지나니 경상북도 시군별 나무와 꽃을 모아놓은 동산이 나타났다. 주로 소나무와 은행나무가 시군목 이었고 꽃은 장미가 많았다. 3월에는 산수유가 시화인 의성군에 갔다가, 안동시의 매화와 예천군의 목련까지 한꺼번에 보고 와야겠다.연구동 근처로 가니 비닐하우스 안에서 무엇을 키우는지 물소리가 졸졸졸 흘렀다. 그때 알람브라궁전의 추억이 타레가의 스페니쉬기타 연주로 물소리에 섞여들었다. 타레가가 알람브라궁전의 수많은 분수가 만들어낸 물소리를 기타로 표현했다는 그 곡이 오늘의 숲에서 연주되니 좋은 선곡이었다.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으며 무궁화원으로 들어섰다. 예전에 처음 이 곳을 방문했을 때 키 낮은 묘목이던 것이 이젠 우리키를 훨씬 넘어서 의젓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그늘을 만들 정도로 자라있었다. 한 그루에는 새집도 한 채 들여놨다. 연못을 지나 손님을 기다리는 데크들을 지나니 옴나무, 황금, 지모, 여로, 세잎양지꽃, 이런 이름의 나무와 꽃도 있었구나 싶어 받아 적었다. 딸을 낳으면 심었다던 벽오동, 몸피가 특이한 복자기, 사람주나무, 죽단화, 낙상홍을 지나 눈을 맞고 섰던 기자 이름 같기도 한 박태기나무, 갯사상자, 수크령, 윷놀이가 아니라 윤노리나무, 열대우림에 자랄 것 같은 정글나무도 있었고, 포도는 학명이 그레이프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뜰보리수는 자태가 우아해 우리 집 뜰에 옮겨 심고 싶었고, 여느 소나무보다 잎이 통통한 잎인 금송, 어떤 꽃이 필까 궁금해지는 팥꽃나무(찾아보니 꽃 색깔이 팥 색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토끼와 친구였던 계수나무, 덜꿩나무는 꿩하고 인연이 있는 거 아닐까 궁금해하다보니 산을 내려왔다.김순희수필가숨고르기 하며 거닐었던 길은 늘씬한 몸매의 메타세콰이아가 파란 하늘이 더 높아보이게 만들었다. 길에는 마사토가 깔려 있어 밟는 소리가 음악소리이다. 사박사박 사람들이 겨우내 밟지 않아서인지 더 폭신했다. 구름을 가득 품었던 연못은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연못 가운데 있는 독도는 인공섬이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어 한 계절은 외롭지 않았다.겨울이 숲에게 주는 휴식 시간 겨울, 꽃 사진 찍느라 바빴던 다른 계절에 들리지 않았던 클래식 연주가 잔잔히 들려 숲을 감상하기에 더 좋았다. 숲의 속내를 들여다본 산책이었다. 화가 모네가 같은 장소를 시간에 따라 연작으로 그렸던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려준 겨울 수목원이었다.

2021-01-31

나만의 낱말 사전

거리두기 하는 시기라 보드게임도 비대면으로 모였다. 줌이라는 앱을 누르니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오늘 함께 할 게임은 라온 확장 편, 내게 주어진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낱말을 만들어서 가지고 있던 것을 먼저 다 클리어 하면 승리한다.1분 안에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 60초. 두 번째로 내가 할 차례가 돌아올 때는 다른 사람이 만든 낱말과 내가 가진 자음 모음을 합쳐서 만들어야 하니 1분이 1초 같은 긴박감이 차올랐다. ㅂ이 두 개 보여서 얼른 ‘비바리’를 외치니, 그런 단어도 있냐고 세 명 모두 물어 본다. 한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고서야 넘어갔다. 고교, 교기, 코로나 같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낱말들을 30대 그녀들은 처음 듣는다고 했다.‘고교얄개’라는 영화가 히트를 쳤고, ‘고교생 일기’라는 드라마가 하는 날에는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기도 했었는데 이들은 처음 듣나보다. 코로나는 코로나19 이전에도 사용하던 낱말인데도 평소에 잘 쓰지 않아서인지 뜨악해했다. 새로운 낱말이라며 따로 적어두기까지 했다.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것처럼 쓰는 말들도 함께 나이를 먹는구나 싶었다.동아리 회원이 비바리를 발견해서 신나하는 모습에 내 어린 시절의 낱말이 겹쳐졌다. 중1 어느 날, 책에서 ‘흐드러지다’란 표현을 처음 읽었다. 도라지꽃이 흐드러진 풍경을 묘사한 장면을 보고 그 새로운 낱말에 반했다. 그날 이후 흐드러지다를 써먹고 싶어서 친구와 수다 떨다가도, 일기장에도 마구 끼워 넣었다. 흐드러지다에 어울리는 문장을 만들어 연습장에 적어두었다가 아무 때나 꺼내 썼다.며칠 전 군위로 가족여행을 갔다. 연구실에만 박혀있던 큰아이가 달리는 차안에서 간만에 수다를 떨었다. 방을 옮기는 선배의 원룸을 함께 보러 갔다가 그전에 머물던 이가 두고 간 침대와 옷걸이 같은 가구가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계약하라고 부추겼다고 했다. 듣고 있던 남편이 “침대 허른 거 아이가?” 큰아이는 킥킥대며 침대가 혓바닥도 아니고 헐었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허른’이라는 말을 나는 값싼 침대로 들었는데 한 세대를 넘어가니 첨 듣는 낱말이 되어버렸다.김순희수필가도착해 겨울 산수유가 흐드러진 돌담길을 걸었다. 한밤마을이라고 찾아갔는데 밤나무는 눈에 띄지 않고 집집마다 빨간 산수유가 쪼글해진 채로 매달려있었다. 돌담을 따라 자연스럽게 돌아들어가니 현재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라 아무집이나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 중 남천고택이 열려 있었다. 너른 마당에 들어가 인증샷을 찍었다. 가까이 있는 문화재 대율리 대청도 담장이 없으니 누구나 구경해도 되는 곳이었다.아들이 갑자기 군위가 무슨 뜻일까요 한다. 다니러가면서도 그 뜻까지 헤아리지 않았던 터라 검색찬스를 썼다. 군위(軍威), 군의 위력, 위신이라고 나온다. 방을 같이 쓰던 선배가 포항이 무슨 뜻이냐고 묻더라고 한다. 자신은 이과생이라 그런지 지명에 대해 풀어서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그 선배는 문과생이면서 교차 지원해 공대에 온 특이한 경우였다. 포구 포(浦)에 항구 항(港)이니 포구항구에서 왔구나 하며 풀이해주더란다. 사실 우리가 사는 포항(浦項)은 그 항구 항(港)이 아니라 항목 항(項)을 쓰는 줄 큰아이의 선배는 몰랐나 보다. 그래도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는 젊은이가 있다니 기특했다.‘미식예찬’이란 책에서 작가는 당신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당신이 어떤 낱말을 사용하는지 적어보라. 그러면 당신이 얇은 낱말책의 신세대인지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책을 간직한 쉰세대인지 알게 될 것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낱말 책이 저절로 두꺼워지진 않는다. 수집해서 입으로 되뇌고 또박또박 마음에 적어 넣어야 두툼해진다.아들이 사용하는 말과 동아리회원들이 알려주는 새 낱말도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주워 담는다. 순발력도 재치도 앞서는 신세대들과의 다음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쉰세대의 안간힘이다.

2021-01-24

책갈피

읽은 책을 꺼내 넘기니 책이 저 혼자 알아서 한 쪽을 펼쳐 준다. 구멍 뚫린 영화 티켓이 사이에 껴 있다. 그 영화를 보았을 즈음에 읽은 책이라고 내게 귀띔하고 있다. 또 다른 책을 펼치면 언젠가 친구랑 먹었던 점심값 영수증이 들어있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명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신문의 칼럼이, 새로운 종이돈에 밀려 사라진 천 원짜리가, 도서관 옆자리에서 친구가 건네던 쪽지가 책 속에서 튀어나와 지나간 그날의 추억을 들려준다. 책갈피는 문득문득 지나간 일을 들려주는 일기장이다.오랜만에 간송 전형필 일대기를 꺼내니 하얀 입장권이 그 속에 잠자고 있다. 터키 여행 중에 데린구유 지하도시 입장권을 보고 순간 머리가 띵했다. 여느 입장권에 있는 사진 하나 없이 하얀 바탕에 지명 하나만 달랑 적어 놓은 터키 정부의 자신감을 보고 한동안 감탄했었다. 데린구유의 멋진 모습을 떠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부심이 그 하얀 백지 입장권이 말해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티켓은 가방 속 어딘가에 구겨 넣었지만 그 표만은 버리지 않고 여행길에 읽던 책 사이에 끼워 내가 읽은 만큼을 표시했었다.나는 책갈피를 사거나 선물 받고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격이 꼼꼼하지 못해 어디에 놔두었는지 정작 필요할 때는 내 손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영수증이나 메모지가 책갈피를 대신한다. 책을 다 읽고는 받을 때 아무 생각 없었던 것처럼 무심히 넣어둔 채 덮어 버린다. 오랜만에 책갈피를 보니 그 날, 그 여행길, 그 영화, 그 기찻길이 펼쳐진다. 지난 일기장을 넘겨보는 것 같다.지난 가을, 친구들과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가방에서 어젯밤 읽은 수필집을 꺼냈다. 동행한 친구들에게 밑줄 친 문장을 읽어주며 내가 느낀 기쁨을 전하려고 했다. 책장을 넘기자 책갈피가 끼인 곳이 펼쳐졌다. 순간,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의 손이 책갈피로 향했다. “이거 내꺼지 싶은데?” 하며 손때 묻은 꽃무늬 책갈피를 앞뒤로 넘기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책갈피를 얼른 빼앗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머지 친구는 박장대소를 했다.김순희수필가도서관에서 한옥에 관한 책을 빌렸었다. 책을 펼치자 그 사이에서 문제의 책갈피가 들어 있었다. 예쁜 꽃그림이 있고, 뒷면에 숫자가 있는 걸 보니 누군가 달력의 그림을 오려서 만든 수제 책갈피였다. 귀퉁이가 낡은 것을 보니 오래 간직한 듯 했다. 이런 센스 있는 사람이 누굴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것이라 책만 반납하고 책갈피는 내가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 그 주인을 만나다니, 친구는 꽃그림이 있는 달력을 보면 자주 오려서 책갈피를 만들어 둔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전시장에 갈 때면 팸플릿을 꼭 챙긴다. 화사한 그림이 나오도록 오려서 독서회 회원들에겐 책갈피로, 지인들에게는 선물상자 속에 메모장으로 썼다.연말에 달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명화나 꽃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이면 넉넉히 챙긴다. 2020년 달력 중에는 친정집 달력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 김창렬 화백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딸이 좋다고 너스레를 떠니 금방 벗겨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달력에 숫자를 보는 게 목적이 아니니 1년 동안 걸어두고 보다가 해가 지나면 달라고 했더니, 잊지 않으시고 챙겨 보내셨다. 몇 장은 작은 액자에 넣어 친구에게, 몇 장은 책갈피를 만들어 새해 만나는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한다. 며칠 전 김창렬 화가가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책갈피를 만든다. 가위를 들고 하나씩 오릴 때마다 받을 사람 이름을 떠올리며 혼자 행복해 한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내가 더 기쁜 작업이다.수필집에 있던 낡은 꽃그림 그것은 내가 지켜냈다. 지금도 그 책갈피는 내 일기장 한 쪽을 장식하고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내가 만든 꽃갈피 하나씩 챙겨 넣으려 한다. 누군가에게로 가서 그 사람을 미소 짓게 할 수만 있다면 그때 내가 훔친 책갈피 값을 치르는 일일 터이니.

2021-01-17

진덕여왕릉에 오르다

새해 첫 나들이를 갔다. 코로나19가 더 번지는 바람에 사람 없는 곳을 찾다보니 인적드문 곳에 위치한 진덕여왕릉이 좋았다. 경주의 수 많은 유적지를 방문했던 우리도 이곳을 잘 몰랐고, 대중들조차 관심이 적은 곳이라 조용할 것이라 짐작했다. 역시 진입로부터 경주 시내가 아닌 한적한 동네로 접어들었다.반대 편에 차가 오면 길 한 쪽으로 피해서 기다려야 하는 시골길을 몇 번 구불거리니 길 끝에 주차장이 나타났다. 맞은 편 소나무 숲으로 오솔길이 나 있었다. 조용하고 가벼운 운동을 할 만한 곳으로 잘 고른 선택이었다.산책길에 우리뿐인가 했더니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났다. 큰 개를 데리고, 또 마라톤 복장으로, 손을 꼭 잡은 커플은 옷까지 맞춰입고 길을 오른다. 산에서는 서로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는게 일상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이내 사라졌다.우리가 진덕여왕릉에 오른 시간은 해거름 때였다. 능 주변에 소나무가 둘러서 있을거란 짐작에 나무사이로 드리운 햇살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역시나 한낮에 반짝였던 햇살이 오후에는 소나무 사이로 레이스커튼처럼 스며있었다. 어른어른거리는 햇살 사이로 봉긋한 능이 보였다. 발길을 멈추고 숨소리도 죽여가며 장관을 감상했다. 고요한 장면이 주는 행복이었다. 눈에 한껏 담은 다음에 그제서야 연신 카메라로 순간을 저장하기 위해 셔터를 눌렀다.오후 내내 능에 햇볕이 내려앉았다. 둘레를 천천히 거닐며 호석을 감상한다. 판에 새겨놓은 십이지신상이 세월에 깎여서 호랑이인지 토끼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올해가 소띠 해이니 소를 찾아볼까 하고 들여다보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28대 진덕여왕은 그 유명한 27대 선덕여왕의 대를 이은 두 번째 여왕이며 성골로는 마지막 왕이다. 자녀가 없어서 사촌동생이 물려받았던 것이다. 선덕여왕릉은 여러번 둘러보았었다. 능을 오르는 숲길에 소나무들이 늘어서있는 모습이나 산 중턱에 위치한 분위기가 거의 진덕여왕릉과 비슷했다. 선덕여왕릉의 둘레에는 모양이 다른 자연석을 이리저리 끼워 맞춰 만든 호석의 초기 형식이었다. 진덕여왕은 재위 8년만에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에 나와있는데 호석의 모습이 너무 발전된 형식이었다.선덕여왕, 진덕여왕, 그 다음 왕인 김춘추의 능인 무열왕릉에는 호석이 없다. 그 다음 왕이 누군가, 문무대왕릉은 경주 양북면 앞 바다에 있으니 호석이 있을리 없다. 호석을 보려고 더 찾은 31대왕은 신문왕이다. 신문왕의 호석은 자연석을 다듬어 반듯하게 만든 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렸을 뿐 아직 넓은 판에 십이지신을 새긴 것은 보이지 않았다. 33대 성덕왕의 능에 드디어 십이지신상이 나타났다. 그러니 28대 진덕여왕의 능을 만들 즈음에 유행할 형식이 아닌 호석이었다.김순희 수필가또 십이지신상의 조각 수법도 경주에 남아 있는 8기의 능묘 가운데서 가장 빈약하여, 진덕여왕의 능묘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둘레돌에 일정한 간격으로 박석을 깔고 그 밖에 난간을 세웠었으나, 지금은 없어진 부재가 상당히 많다.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후대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과연 이 능이 진덕여왕이 맞을까?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능을 보수하며 바꿨나? 기록에는 “진덕여왕이 왕위에 있은 지 8년에 죽으니, 시호를 진덕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사량부는 경주시의 남쪽 흥륜사(興輪寺) 터가 있는 일대로 추정되어 현재의 현곡리와는 정반대의 위치가 된다. 이 곳에 누운 분은 과연 누구일까, 잠시 다니러 온 우리가 그 비밀을 알기엔 너무 큰 그림이었다.가벼운 산책을 나왔다가 역사의 깊은 곳까지 나들이를 가버렸다. 따스한 눈길을 보내던 햇살도 저물어 길을 잃기 전에 현실세계로 돌아오려고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길 끝까지 안내를 해주느라 소나무가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봄에 또 오겠다며 눈인사를 나눴다.

2021-01-10

별이 빛나는 밤에

아들 둘에게 ‘별이 빛나는 밤에’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물었다. 큰아이는 ‘이문세’라고 했고, 그림을 배운 둘째는 고흐라고 했다. 큰아이에게 너도 라디오를 듣냐고 했더니 그 세대는 아니지만 문득 떠올랐다고 하니 별밤지기 이문세의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별밤을 오래 들었던 엄마의 어깨너머로 들은 추억담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여고시절을 별밤과 함께 보냈다. 야자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듣다가 집에 오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아 또 들었다. 숙제를 할 때도 소설을 읽을 때도 내 생활의 OST처럼 들려오는 소리였다. 물론 내가 들은 것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아닌 포항MBC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지만.엽서를 써서 보내놓고 내 엽서가 읽혀지길 기대하며 라디오에 귀를 붙이고 들었다. 반 친구들을 소개하는 내용을 써서 보낸 것이 방송을 타면 그 다음날 아침 교실은 엽서이야기로 채워졌다. 예쁜 엽서를 뽑아 전시회도 했었다. 한 번 뽑혀 보겠다고 마음먹고 아이디어 짜는 데만 며칠을 보냈다. 친구들의 캐릭터를 고양이로 바꿨다. 느릿한 잠꾸러기 고양이, 하이틴 로맨스만 파는 고양이, 손톱을 물어뜯는 고양이, 그리고 열심히 라디오에 덕질하는 고양이 나. 관제엽서 두 장을 세로로 붙여서 네 마리 고양이를 그렸다. 파스텔에 물을 묻힌 붓을 문질러서 그리면 수채화느낌이 나는 그림이 된다. 그리고 옆에 재미난 설명을 붙였다.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요일 오후에 대문이 열리면서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전보가 왔다는 것이다. 우체부 아저씨 복장이 아닌 평복이어서 긴가민가했다. 예쁜 엽서전에서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전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다. 봉투도 없이 길게 찢어진 종이에 타이프로 쳐서 온 내용은 은상을 받았으니 몇날며칠까지 시상식에 참여하란 소리였다. 너무 아쉽지만 학교 가는 날이라 못 갔다.김순희수필가지나고 보면 그때 갈 걸, 무려 시상자가 조용필이었다는데 말이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하루쯤 빠져도 내 인생에 아무탈도 없을 일이었는데, 시상식에 가는 것이 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었는데 그땐 몰랐었다. 주말에 방송국에 가서 상을 전해 받았다. 표창장과 부상으로 커다란 헤드폰을 주었다. 용필오빠의 사인도 들어있었다. 잦은 이사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물건들. 별밤을 방송하는 DJ를 별밤지기라고 한다. 이는 이문세가 DJ 시절 한 청취자가 ‘등대지기’라는 말에서 창안하여 엽서로 제안한 것으로 이문세가 수용한 것이라고 한다. 1969년 3월 17일에 처음 편성되었으며 무려 52년째 방송 중인 MBC의 최장수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상상이 잘 안 가지만, 처음 편성 당시에는 청소년 교양 진작 차원의 명사와의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3대 별밤지기로 당시부터 유명 DJ였던 이종환이 들어서면서 음악 방송으로 전환했다.당시 이문세의 별명은 ‘밤의 문교부장관’이었지만 포항에서는 아쉽게도 공개방송을 들려주는 날만 서울방송이 들렸을 뿐이다. 그래도 이문세는 별밤지기이면서 내 학창시절을 채운 음악 자체였다. 이문세 4집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으면 앞뒷면이 자동으로 돌아가며 밤샘 공부에 동행 해 주었다. ‘어허야 둥기둥기’가 나오면 한 바퀴 다 돌았구나 싶었다.이문세 콘서트를 포항에서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두 장의 표를 예매했다. 같은 세대를 살았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다들 시간이 안 맞았다. 이틀 전까지도 함께 갈 친구가 없었다. 슬그머니 남편에게 당신을 위해 준비한 표라고 하며 가자고 꼬셨다. 흔쾌히 따라 나섰다. 나는 내내 서서 몸을 흔들며 괴성을 질렀고, 남편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공연을 찍는다며 내 옆자리를 피했다. 공연 시작 전에 문자를 보내면 문세 오빠가 공연도중 읽어준다 해서 나도 보냈고 내 사연이 읽혔다. 노래제목 소녀를 숙녀로 보내서 누군지 얼굴을 보아야겠다고 해서다. 창피했지만 더 즐거운 추억으로 곱씹게 되었다. 별이 유난히 빛나는 오늘 밤에 문세오빠 노래를 꺼내 듣는다.

2021-01-03

폐교에서

기억의 첫 장은 골목에서 시작된다. 근대문화역사거리로 되살아난 골목에는 옛날을 떠올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걷다보니 머릿속에서 스러져가던 풍경이 하나씩 깨어난다. 골목 끝에 추억을 파는 상점이 있어 쫀드기 하나 집어 든다. 쫄깃쫄깃한 옛 맛을 씹으며 언덕을 오르니 야트막한 동산 위에서 허름한 건물이 구룡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잃을 것도 지킬 것도 없기에 폐교의 문은 항상 열려있다. 하릴없는 바람이 붙잡고 흔들어보는 국기 게양대를 바라보며 조회라도 하는 걸까, 운동장에는 작물들이 삐뚤빼뚤 줄을 맞추고 있다. 아이들의 수다는 다 어디로 날아갔는지 느티나무 위에서 참새들만 재잘거린다. 빈 책상이 점점 늘어 학교가 문을 닫기까지 참새는 출석부에 이름 한 줄 채우지 못했다. 첨성대모형을 바라보며 별처럼 반짝이는 꿈을 키우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떠났을까.‘끼익!’ 교무실 문을 열자 우당탕거리며 자리에 앉는 아이들의 환영이 스쳐간다. 벽에 기우뚱 기댄 뜀틀과 먼지를 뒤집어쓴 구름판 위에 줄다리기 밧줄이 축 늘어져있다. 아이들의 마지막 낙서를 붙잡고 있는 칠판 앞에서 생활기록부를 툭 건들자 사진 몇 장이 떨어진다. 촌스런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는 언니들, 두 줄이 선명한 하늘색 운동복을 입고 손등에 1등 도장을 찍기 위해 달리는 주자들, 가을볕에 그을린 그들의 운동회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초점이 흐려서인지 인물보다 많은 수를 뽑았는지 앨범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사진은 여태껏 오지 않은 주인을 기다린다.내 마음속에도 학교가 있었다. 걸음이 느린 내게 운동장은 뜀박질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그네 타는 아이의 흔들림, 지구본을 열심히 돌리는 친구의 발동작, 아침조회 때 미끄럼틀 너머에서 철거덕철거덕 내달리던 기차. 쉬는 시간이면 그것들을 스케치북 위에 담았다. 단풍이 들면 온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에 올라 몰래 훔친 언니의 물감으로 달력 뒷장에다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때부터 나는 화가가 되는 꿈을 한 장 한 장 꾸었다.어렸을 적에는 꿈을 꾸면 그것이 내게로 다가올 거라고 믿었다. 오늘 벌어야 내일 끼니를 거르지 않던 20대, 결혼 후 반복되는 일상을 버리지도 못했다. 길고 지루한 정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 무작정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배우고 읽으며, 하루를 서두르면서 살다보니 내 마음의 학교도 문을 닫았다. 어릴 적 저축해두었던 꿈을 곶감 빼 먹듯 사는 것이 인생이지만 지금이라도 꿈을 키우지 않는다면 다시 되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끝나기 전에 불씨를 되살려야 했다.‘삐그덕!’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창고에는 하나씩 버린 것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뒤죽박죽 쌓여있었다. 게시판에는 ‘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탈색된 그림이 활짝 웃고 있었다. 스케치북과 연필을 찾아 입으로 호호 불었다. 구석에 드러누워 있는 구름판을 꺼내 놓고 몇 발짝 물러났다. 도움닫기를 하자 야무진 꿈들이 부스스 깨어나 기지개를 켰다. 매년 전시회를 여는 화가, 베스트셀러 작가, 여백이 없는 여권을 가진 여행가. 생각만 해도 행복한 꿈들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의 학교 문을 열어 펄럭이는 깃발을 게양대에 올렸다.김순희 수필가운동장에서 사방을 둘러본다. 하늘은 각도기 전체를 다 써야 할 만큼 넓다. 수평선은 전교생이 두 팔을 뻗어도 모자랄 만큼 길다. 탁 트인 하늘과 바다를 보며 저만한 꿈을 키운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폐교가 모교가 된 그들도 나처럼 문득 뒤를 돌아보다가 빛바랜 꿈을 꺼내 닦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기억의 첫 장이 있는 골목을 찾아 추억의 조각을 주워 마음의 책갈피에 간직할 것이다.어린 시절에는 밥보다 별을 많이 먹었다. 평상에 누워 따먹는 밤하늘의 별은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꿈이었다. 되살아난 골목을 걷는 사람들도 반짝이는 꿈을 발견했으면 좋겠다. 다들 학교는 졸업했지만, 인생학교는 걸음을 멈추는 날까지 재학 중이기에.

2020-12-27

화양연화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울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 달 전 즈음, 교회에서는 뒷산에서 가져온 키 큰 소나무에 솜과 색종이 고리를 연결해서 둘렀다. 트리 장식이 첫 순서였다. 발표회 준비를 하기 위해 방과 후에 교회에 모여 연습도 했다. 언니 오빠들은 전지를 여러 장 눌러 만든 차트에 성가의 가사를 적었다. 창밖을 보라, 기쁘다 구주 오셨네, 저~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뭇천사 내려와…. 하루에 노래 한 곡 이상은 익혀야 발표회에 율동곡으로 또 합창곡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크리스마스이브가 D-day였다. 무대가 열리는 날은 동네잔치나 마찬가지였다. 예수쟁이가 아닌 어른들도 모두 구경하러 오시니 뒷자리에 서서 보아야 할 정도로 예배당이 꽉 찼더랬다. 어린 반 친구들이 무대 첫인사를 하면 천으로 된 막이 스르르 열린다. 이 막을 열고닫는 일은 언니들의 몫이다. 작은 교회라 일인삼역은 기본이었다.초등학생 때는 발랄한 율동곡을 담당하다가 중 1이 된 그해에는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역할을 했다. 친구들과 함께 엄마 치마저고리 입고 십자가 대형으로 앉아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에 맞춰 춤을 추었다. 양손에는 촛불을 들고 하는 나름 고난도 기술을 필요로 하는 율동이었다. 지금도 그때 사진을 보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옆 사람에게 촛불이 붙을까 조심하며 애쓰는 중1의 우리들이 보여 웃음이 절로 났다. 우리보다 큰 언니 오빠들의 연극이 마지막 무대였다. 돌아온 탕자를 연기한 오빠의 손에 담배가 있어서 저걸 피워도 되나 싶어 끝나고 무대 뒤로 가서 그 오빠에게 걱정을 늘어놓았더랬다. 싱겁게도 담배로 보였던 것은 하얀 모나미 볼펜 깍지였다.김순희수필가동네 어르신들 격려의 박수소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그 자리에서 선물교환을 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추위가 더해지고 통로에 톱밥 난로에 열기가 더해져 우리 볼은 더욱 빨갛게 들떴다. 낮에 교회로 올 때 선물 하나씩 포장을 해서 와야 했다. 누가 어떤 선물을 고를지 모르니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끝까지 긴장하며 즐기는 밤이었다. 커다란 상자를 골랐는데 그 속에 러시아 인형처럼 작은 상자를 겹겹이 넣어 마지막 상자에 달랑 볼펜 한 자루가 들어있기도 했고, 작고 가벼워 보여도 맘에 쏙 드는 앙고라 장갑이 툭 튀어나오기도 했으니까. 언니 오빠들의 우스갯소리까지 더해 크리스마스이브가 이브다운 밤이었다.그렇게 밤이 늦도록 놀다 보면 권사님들이 떡국을 끓여서 들통에 담아 내오셨다. 김이 술술 나는 국을 한 대접씩 나눠 먹고 조를 짜서 동네별로 새벽송을 다녔다. 교회 앞 강 건너 무릉 3동에 갈 때는 돌다리를 건넜던, 무지 아련한 추억도 있다. 저 아래 동네인 검암에서 골마를 지나 덕마까지 오며 대문도 없이 살았던 집집이 들어가 크리스마스 송가를 부르면, 한잠 들었던 집에 불이 켜지며 어설프게 겉옷을 걸치고 나와서 과일이나 사탕, 쌀을 한 됫박 안겨주고 들어가셨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크리스마스 행사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스케치북으로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케치북에 캐럴 싱어즈가 왔다고 말하라고 쓰여 있다. 자막엔 성가대라고 했지만, 성가대와 새벽송을 부르는 건 좀 다른 느낌이다. 새벽송을 듣고 소소한 것을 나누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아 내 기억은 어릴 적 고향의 그 날로 시간여행을 다녀왔다.그때의 그 친구들이 2019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서울역 근처 힐튼호텔에서 만났다. 나 같은 소시민이 누릴 호사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때 교회 선생님이 호텔맨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뷔페로 점심을 먹고, 선생님이 마련해준 자리에서 선물교환을 하고 한 해의 좋았던 기억을 나누고 힘들었던 일을 서로 위로했다. 같은 추억을 가진 친구들과 새로운 기억 하나를 추가했다. 내년에도 이렇게 만나자 했었다. 코로나가 이렇게 일상을 삼킬 줄 몰랐던 시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였다.

2020-12-20

오래된 책을 사다

아들과 산책을 나갔다. 동네 산책로는 마스크 낀 사람들로 늘 붐벼 차를 타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갔다. 김병례 작가는 산책을 책을 산 것으로 표현했다. 자신처럼 매일매일 나가는 것은 월간지를 구독하는 것이고, 나처럼 계절마다 찾아가는 것은 계간지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계간지 중에 오래된 책을 사러 나갔다. 이 동네를 들어서려면 먼저 은행나무 가로수를 지나고, 소나무가 솟을대문처럼 터널을 이룬 길을 지나야 나온다. 몇백 년의 세월을 지닌 아름드리 나무들이 성큼성큼 그늘을 만들어 준다.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정자나무가 책의 서문이 되어 알려준다. 여기가 이언적 선생이 살았던 마을이라고.옥산서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세심대로 향했다. 포장하지 않은 흙길에 아들과 나의 발소리만 사박사박, 딱따구리 녀석이 머리 위에서 나무를 쪼아대고 있다. 카메라를 들이미니 포로록 다른 나무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길옆으로 자계천이 따라붙는다. 가뭄이라 그런지 수량이 더 줄어 졸졸 낮은 목소리를 낸다.물 떨어지는 소리가 좀 더 커지는가 싶으면서 너럭바위가 펼쳐진다. 이곳을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닦는 곳이라고 세심대라 부른다. 이언적 선생이 사시는 동안 주변의 산과 계곡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사산오대(四山五臺)라 하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세심대이다. 읽은 책을 겹겹이 쌓아 놓은 듯한 책바위가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바위에 이황 선생의 글씨로 ‘세심대’를 새겨넣었다. 그 옆으로 용추 폭포가 물소리를 증폭시킨다. 폭포 아래 용소를 건너는 외나무다리가 놓였다. 아들 손을 잡고 오래전 이 다리를 건너간 선생의 산책로를 따라 독락당으로 향했다.동네 골목길을 지난다. 집집마다 주소를 세심로 00번지라 적혔다. 동네 이름도 세심마을이라고 명패를 달았다. 까치밥을 단 감나무와 봄을 미리 준비한 매화나무를 구경하다 보니 금방 독락당 주차장이 나타났다. 버스 주차장 앞에 가게 이름은 ‘자옥슈퍼’다. 자옥산에서 따온 듯하다. 산 이름도 이언적 선생이 붙인 것이다. 독락당의 백미는 계정에서 보는 경치다. ‘계정’이라는 명패는 한석봉 선생의 글씨다. 봄, 여름, 가을에 지인들과 올라앉아 마루에 앉아 한나절 이곳을 지나는 바람을 즐기고 책도 읽었다. 그래서 오늘은 자계천에서 계정 뒤로 지는 노을을 보려 한다. 자계천으로 내려섰다. 돌다리를 건너며 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라앉은 가을 나뭇잎 사이로 송사리가 분분히 노닌다. 그 위로 기와를 얹은 한옥이 까치발을 들어 물속에 모습을 비춰 매무새를 다듬는다. 물고기들이 계정에 올라 풍류를 즐긴다.계정은 건물에 붙여 달아낸 누각이다. 바위의 모양이 들쑥날쑥하니 기둥의 길이도 제각각이다. 돌의 모양에 따라 나무기둥 밑을 깎아서 앉히는 그랭이 공법을 썼다. 살창을 내어 물소리와 계곡 풍경을 집안으로 들여놓은 선생의 기발함을 누각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건물이 냇물에 한 발 내딛고 있어 난간에서 내려다보면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건너편 앞산도 한 걸음 더 가까워져 손에 닿을 거리다.김순희수필가자계천에서 바라보니 굴뚝과 아궁이는 계정 밖에 나와 있었다. 난간 밑 벽체에 제비집처럼 매달아 놓았다. 세상에 아궁이가 저런 곳에 달렸구나, 세상에 이런 굴뚝도 있구나. 한옥의 설계도는 대목수의 머릿속에만 있다더니 선조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지 계절마다 간간이 넘겨보는 산책자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한참을 물소리에 젖어서, 계정의 아늑함에 물들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아들과 독락당 담장과 담장이 만든 골목을 걸었다. 비스듬히 누운 향나무가 매력적인 사진을 만드는 곳이다. 가만히 한 컷 찍다 보니 발아래 빨간 산수유 열매가 떨어져 있다. 담 안에서 키를 키운 산수유의 품이 담 밖으로까지 뻗었다. 오늘의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오래전 미리 발간한 이언적 선생의 고서적의 품이 참으로 넓다. 오후의 산책만으로 그 뜻을 다 헤아리기 힘들어 월마다 구독해 펼쳐 봐야겠다.

2020-12-13

견문록

서늘해지며 여행을 다녔다. 하늘은 푸르고 사람이 걷기에 안성맞춤인 바람이 불어와 다니기에 더 좋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겨울바람으로 한 단계 높여도 차를 타고 다니니 어디든 나설 수 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해외여행은 못하는 터라 당일치기 국내 여행으로 일정을 잡았다. 영양을 서너 번, 경주는 옆집 드나들 듯했고, 그림 전시회와 사진전까지 마스크를 쓰고서도 잘도 다녔다. 그리고 여행기를 글로 남겼다.우리 민족이 지금에 와서야 여행을 즐긴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해외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듣고 본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중 상당수는 사라졌지만, 일부는 현재까지도 전한다. 빈왕록, 표해록, 제목만 듣고 무엇에 관한 책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열하일기를 더하면 여행의 기록인지 알게 된다. 빈왕록은 고려 중기에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느낀 바를 이승휴가 시로 정리한 것이고, 표해록은 고향 나주로 가려고 탐라(제주)를 출항했다가 중국으로 표류한 최부의 기록이다.견문록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인도를 여행한 선배들과는 달리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오는 새로운 인도 여행로를 개척했으며, 그 여행기 또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세계 유일한 기록이고, 대당서역기 등에서 누락 되거나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고자 했다는 점 등에서 귀중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여행기 중에 그나마 우리에게 알려진 책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정도이다. 지인들에게 읽어본 여행기가 있느냐 질문했을 때 나온 대답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책이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하멜표류기, 돈키호테, 걸리버 여행기(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풍자소설이니 여행기라고 하기보다 기행문 형식이라 해야 맞다.) 등속이었다.나 또한 열하일기만 읽어보았을 뿐이다. 조선 정조 때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로 ‘호질’, ‘허생전’은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도 아는 이야기이다.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도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여정의 모든 일화를 기록으로 남긴 박지원은 여행 보따리에 글을 쓰기 위한 도구가 제일 많았다고 하니 기록에 대한 그의 철저함이 엿보인다.조성원 작가는 우리나라 고전 작가의 대표 박지원을 돈키호테를 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와 비교했다. 여행과 연행이라는 형식의 비슷한 점과 돈키호테에게 산초가 있다면 열하일기의 박지원에게는 장복과 창대의 익살스러움과 의리가 잘 묘사되어 있어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표현의 자유로움과 주인공의 인간적인 매력과 더불어 ‘철학’이 있다는 유사함도 있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반면에, 열하일기는 우리에게조차 덜 알려진 상황이 안타까울 뿐이다.김순희수필가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고 한다. 그러니 발로 뛰며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한 방법인 것이다. 나는 여행 짐을 싸면 일주일 단위로 책 한 권, 그 이상의 여정일 때 또 한 권을 더 가져간다. 소설이나 가벼운 내용보다 고전 같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챙긴다. 짐 가방이 무거운데도 책을 넣어가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의 불면증 때문이다. 여행의 피로감이 밀려올수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마다 책을 펼쳐 읽다 보면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터키에서 버스로 8시간을 이동할 때 고미숙의 열하일기를 읽어냈고, 와이파이도 제대로 열리지 않는 스페인의 밤은 돈키호테와 함께 했었다. 다음에 서서 하는 독서의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의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을 들고 가서 혜초와 심오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다.앞선 이들의 여행기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도종환 시인의 처음 가는 길이란 시를 읊조려 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뿐이다. (중략) 자기 전 생애를 끌고 넘은 이들이 있다. 순탄하기만 한 길 아니다. 낯설고 절박한 세계에 닿아서 길인 것이다.

2020-12-06

하하와 베케

베란다를 트지 않기로 했다. 20년 된 아파트를 고치기로 하고 어디까지 손을 봐야 할까. 처음 시작은 싱크대였다. 오래 사용하다 보니 서랍에 손잡이가 빠져버렸고, 필름지도 벗겨져 원래 요리를 즐기지 않던 내가 더 부엌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또 책꽂이가 방마다 있으면서도 더이상 꽂을 자리가 없어서 서재도 새로 꾸미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해 도배와 장판, 화장실도 새로 하기로 하니 주위에서 시작한 김에 베란다도 확장하라고 부추겼다.남편은 일어나자마자 베란다로 나간다. 꽃밭을 보러 가는 것이다. 아파트에 꽃밭이라니 거창하지만 거실에서 베란다로 나가면 화분이 쪼로롬이 반긴다. 봄 가을로 피는 재스민, 신혼 초부터 들여와 팔뚝만 해진 알로에, 100년에 한 번 꽃이 핀다는 소철이 천정까지 키를 높였고, 올망졸망 서로 키재기 하는 다육이와 난(蘭) 화분이 꽃 없이 잎만 올리고 있다. 그 옆에 봄에 새로 들여놓은 커피나무가 귀티나게 앉았다. 이 녀석들과 하나씩 눈인사를 하며 물을 주는 일이 남편의 첫 일과이다. 마당쇠가 마당 쓸듯이.작은 공간이지만 아파트에도 마당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 부부의 결론이었다. 트는 대신에 베란다로 나가는 새시를 새로 하는 걸로 갈무리했다. 커튼은 레이스로 달아 커피나무와 재스민이 어른어른 비쳐서 정원이 거실까지 확장된 기분이 들게 했다. 작은 정원이 주는 위안이다.영국인들은 정원을 가꾸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자기가 꾸민 정원에서 마시는 오후의 홍차, 삶의 여유이다. 런던근교에 라우샴가든이라는 300년 전에 만든 풍경식 정원이 있다. 수목이 가진 고유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최소한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이 풍경식 정원이라고 한다. 산책로를 따라가며 나무와 어울리는 조각이 군데군데 놓였고, 키가 큰 나무가 햇살에 그늘을 길게 늘일 때 반려견과 함께 거닐며 위로받는 곳이다. 그 정원을 둘러싼 담장이 하하(Haha)이다. 이름이 독특해서 자꾸 불러보게 된다. 부를 때마다 웃게 되는 힘이 있다. 정원을 가꾸며 나온 돌을 쌓아 만든 돌담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울타리가 풍경 속에 묻혀서 멀리서 보면 담장이 보이지 않아 담장 밖의 소들이 풀을 뜯는 게 정원의 일부분처럼 보이기도 한다.제주에 하하와 비슷한 담이 있다. 베케이다. 쟁기질하거나 밭을 매다가 돌이 나오면 하나둘씩 쌓다 보니 담장이 된,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만들어 놓은 농사의 일부분이고 문화이다. 돌에 이끼가 가득 피어서 푸른색이었다. 돌 틈 사이에 풍란이 비집고 들어가 앉았고 넝쿨 식물이 담을 넘나들었다. 그 담을 따라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아주 좁은 골목 비슷한 길을 올레라고 한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로 봄꽃도 오고 갈바람도 들어온다. 서귀포에 베케라는 정원식 카페가 있다. 조금은 허물어진 베케를 향해 통창이 있어 손님들이 마주 앉기보다 베케를 향해 앉는다. 제주 습지에 잘 자라는 풀과 꽃을 심고 가꾸어 커피를 들고 나가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아버지가 감귤밭으로 일궈 농사짓던 곳이라 창고였던 건물도 다 허물지 않고 산책로에 남겨놓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아버지의 흔적을 느낀다고 한다.김순희수필가도시에서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언어를 듣다 보면 이웃이란 낱말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정원을 꾸미는 일이 나 자신뿐 아니라 이웃과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 실린 거인의 정원이 떠올랐다. 담을 높이 쌓고 혼자만 아름다운 정원을 즐기려고 하자 그 정원은 1년 내내 겨울만 계속되었다는. 허물어진 틈 사이로 아이들의 발길이 닿자마자 정원에 새가 돌아오고 꽃이 가득 피어났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였다.우리 집 베란다가 하하와 베케이다. 봄부터 키운 땡초 세 그루가 가을걷이를 하려는 듯 잎끝을 말고 있다. 여름부터 가을 내내 혀끝이 알싸한 맛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따 먹고, 한두 개는 빨갛게 익혀서 꽃처럼 바라보기도 했더랬다. 화분으로 둘러싼 우리 집 담장, 사계절이 들고나는 베란다를 허물지 않고 놔두길 참 잘했다.

2020-11-29

식혜 대 식해

안동 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시골 접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짠지와 나박썰기 한 무가 동동 뜨는 김치를 먹으며 살았더랬다. 내게 김치는 국물이 시원한 동치미였고 배추에 고춧가루 버무린 양념을 묻힌 건 짠지였다. 또 한 가지, 말간 국물에 밥알이 동동 뜨는 건 감주이고 고춧가루와 생강 맛이 나는 음료수는 식혜였다. 칼칼한 안동식혜.제사가 많던 우리 집은 겨울이면 늘 식혜가 숭늉처럼 밥상물림에 따라나왔다. 할아버지 상에는 강정과 함께였고, 우리에게는 인절미 구운 것이 떨어지면 생고구마를 깎아서 함께 차려졌다. 늦은 밤 속이 출출하던 참에 살얼음이 살살 낀 식혜 한 그릇을 마시면 겨울밤이 더 든든했다.식혜의 역사를 알아보니 이랬다. 안동은 양반이 많이 사는 곳이라 제사가 많다. 좋은 재료로 조상님을 모시는 기름진 음식을 만들었다. 만들며 또 제사 후에 잘 못 먹던 고기와 생선 등을 먹게 되니 속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소화제 역할을 하는 음식이 필요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게 안동식혜라는 것이다. 보통 식혜는 그냥 밥풀이 동동 뜨는데 안동식혜는 고춧가루 넣고 맵게 생강도 첨가한다. 거기에 무채도 들어가니 소화제로서 그저 그만이다.조상님들이 간만에 고기를 먹는 후손들이 배앓이를 할까 봐 소화가 잘 되게끔 배려해서 만든 음식이다. 매운 고추와 생강이 소금만 들어간 제사음식의 밍밍함을 눌러 준다. 더불어 채 썰어 넣은 무는 소화제 역할이다. 접실에서는 저녁 늦게 무를 깎아 먹는 습관도 있었는데 생무를 먹고 나면 트림이 잘 나온다. 소화가 잘 된다는 뜻이다. 안동식혜와 같이 음식을 먹으면 아무리 먹어도 체하거나 속이 불편하질 않다. 안동 사람들은 안동식혜가 나와야 음식이 다 나온 걸로 알 정도다.안동식혜를 처음 보는 사람은 아마도 먹기가 쉽지가 않다. 비주얼은 물김치 비스무리하지만 찬이 아니라 음료수이기 때문에 기대하는 맛이 감주에 가깝다. 그러니 첫입에 인상을 찌푸리고 만다. 남편도 처가에 와서 장모가 권하는 손길에 못 이겨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워낙 식성이 좋은 사람이라 조금씩 먹다 보니 이젠 한 그릇 비워내, 친정엄마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경지에 이르렀다.김순희수필가안동의 카페 메뉴판에는 안동식혜도 있다. 포항 대부분 식당에 반찬으로 밥식해가 오르는 것처럼. 밥풀이 많이 보여 ‘밥’ 자가 앞에 붙어 있다. 가자미나 홀때기를 주로 넣고 삭힌 발효음식이다. 식해는 주로 함경도, 강원도, 경북 등 동해 지역에서 널리 발달했다. 소금 생산이 많은 서해 지역이 생선을 소금으로 절여 염장 발효한 ‘젓갈 문화권’이라면, 상대적으로 소금이 귀한 동해는 쌀이나 기장, 조 등 곡물로 발효시킨 ‘식해 문화권’이다.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다니러 가면, 휴일 새벽에 아들을 깨워 감포항에 나가셨다. 배에서 금방 내린 생선을 사기 위해서였다. 멸치로 젓갈을 담고 가자미로는 식해를 만들어 단지에 넣고 방 윗목에 헌 이불을 덮어 놓았다. 발효가 잘되게 하는 방법이었다.포항하고도 한참 더 들어가는 장기면으로 시집온 지 3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 식해를 반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남편이 안동식혜 한 잔을 호로록 비워내는 거에 비해 나는 노력이 부족하다. 비린내가 날 것이다며 입에 대지도 않은 탓에 아직도 식해의 깊은 맛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 식해뿐만 아니라 다들 좋아하는 회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니 집에서 생선 굽는 비린내는 거의 풍기지 않는다.어릴 때부터 먹지 않았던 탓인지 조개구이를 저녁으로 먹었던 날에 밤새 배앓이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회가 풀코스로 나오는 곳에서 대접을 받았던 날에는 먹는 중에 체하기도 했다. 생선이 귀한 식혜 문화권 사람이 식해 문화권에 들어와 겪는 시차 적응 현상이다. 30년을 채우면 나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2020-11-22

꽃지 순례

노란 꽃비가 내린다. 바람이 쓰윽 지날 때마다 화라락 은행잎의 비행이 시작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들의 비행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쏴아, 바람이 또 분다. 겨울을 준비하려고 옷을 벗는 은행나무의 바스락거림 연주가 울려 퍼진다. 오늘 또 길을 나서야겠다.몇 해를 벼르고 별러 영양군 입압면의 서석지를 찾아갔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반은 나무에 머물고, 반은 떨어져 발밑을 덮고 있을 때가 장관이라 지난해, 지지난해까지 사진을 찾아보며 가장 절정인 때를 골랐다. 하지만 서석지 주차장에 들어서며 알았다. 일주일 전에 왔어야 했다는 걸. 400번의 가을을 그 자리에서 맞았을 텐데 올해는 더 일찍 옷을 벗었다. 하늘 향해 높게 뻗은 가지에는 한 잎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올라 그 풍성한 노란빛의 수런거림을 오후 내내 듣다 오려고 했던 계획은 날아가 버렸다. 서석지 못 안에 이미 연주를 끝낸 노란빛이 가득했다.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그다음 찾아간 곳은 경주 통일전 가로수길이다. 7번 국도를 달리다 통일전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지난 주말이 절정이었다. 쭉 뻗은 가로수가 가슴을 트이게 하고 넓게 펼쳐진 통일전 마당이 또 한 번 눈을 시원하게 한다. 잔디도 노랗게 단풍 색으로 변했고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들 또한 갈색이라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은행나무 가로수와 들판의 이중주가 아름다운 곳이다. 가장 늦게 물드는 곳이 경주 운곡서원이다. 햇살의 양이 적어서 서석지와 통일전 은행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조금씩 노란색을 띠기 시작한다. 같은 길에 선 나무 중에도 하루 종일 해를 보는 나무는 노래져도 건너편 건물 그늘에 가려진 나무는 열흘 이상 늦게 물든다. 하지만 조금 늦다뿐이지 은행나무의 그 노란빛은 같다. 한껏 노란 물이 올랐을 무렵에는 서원을 오르는 계단부터 은행잎으로 덮인다. 해질 무렵이면 찍사들의 삼각대가 쭈욱 둘러서 한복을 입은 모델까지 세워놓고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해질녁 서원의 공기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햇살이 큰 나무 사이로 조금 남은 빛을 흘려보내서 실크 커튼을 드리운 듯하다. 바람이 살짝 불기라도 하면 보는 이들의 탄성에 셔터 소리가 묻히기도 한다. 오래된 기와에 떨어지는 노란 잎, 대나무 담장을 뚫고 들려오는 냇물 소리, 운곡산방의 차 따르는 소리까지 어울려 웅장한 협주곡이 완성된다. 가을 끝자락이 들려주는 음악에 취해 어둑해질 때까지 나무 밑을 서성인다.이곳 말고도 은행이 찬란한 곳으로 가까이는 오어사, 조금 멀리 대구의 도동서원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영천 임고서원에 들러 금관처럼 생긴 은행나무에 취해봐도 좋다. 경주 도리마을은 은행잎이 다 진 다음에 가도 좋은 곳이라 볼 수 있는 기간이 길다.김순희 수필가누가 나무를 제일 사랑하지? 라는 질문에 시인은 봄은 나무에 예쁜 나뭇잎 옷을 입혀 주고, 여름은 나무에 하얗고 노랗고 빨간 꽃을 피워 주며, 가을은 맛있는 과일을 주고 화려한 단풍을 입혀 준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진 겨울이 나무를 제일 사랑한다고 하며 말을 끝맺는다. 나무들에게 휴식을 주니까. 은행나무가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시인은 겨울이 나무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거라고 일러준다.은행나무는 오래 한자리를 지킨다. 수백 년은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함부로 대할 게 아니라 나무님이라고 치켜세워 주어야겠다. 오랜 연륜 탓인가 버려야 할 시기를 알고 어김없이 늦가을이면 잎을 내려놓는다. 오래 멀리 가는 방법을 터득한 은행나무들의 루틴이다.종교인들은 종교활동의 하나로 발생지나 순교지를 따라 성지순례를 한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맛있다는 빵집을 찾아가 맛보는 빵지순례를 한다. 나는 계절 따라 피는 꽃이나 숲을 찾아다닌다. 꽃지순례이다. 11월에는 은행나무의 비행을 보러 다녔다. 그런 내게 은행나무가 말한다. 바람이 분다, 떨어져야겠다고.

2020-11-15

한옥교회에 노닐다

어릴 적 예배당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동네에서 가장 신식 건물이었고 피아노는 구경도 못 해본 우리에게 오르간을 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이 항상 열려있어서 방과 후에 들러 언니들에게서 배운 젓가락 행진곡의 앞부분을 눌러보곤 했다. 심지어 교육관에 탁구대가 펼쳐져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도시에서 이사 오신 목사님은 내 또래의 딸이 있어서 뒤로 둘러맨 가방이나 정갈하게 깎은 연필이 가지런히 들어간 자석필통은 우리의 부러움을 샀다.밤하늘의 별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영천 보현산 천문대의 자락에는 그 시절 예배당보다 더 오래된 교회가 있다. 한옥으로 지은 자천교회이다. 내가 다닌 예배당은 오른쪽은 남자들이 왼쪽은 여자들이 앉았다. 어른들이 그렇게 나눠 앉았기에 이름표가 없어도 그렇게 앉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자천교회는 중간에 가림막이 있어서 서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예배를 드린다. 하지만 앞에 선 목사님 자리에서 보면 가림막이 느껴지지 않고 양쪽의 성도들이 다 보이니 건물을 지은 사람의 지혜가 돋보이는 설계이다. 뒤쪽에 온돌방이 있어서 아기와 함께 온 사람이나 의자가 불편하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암울한 시기였던 1904년, 영천에 희망을 만들어 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권헌중 훈장이다. 경북 경주에서 서당 훈장을 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본에 항거하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경주를 벗어나 청송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이후 1898년 대구로 내려가기 위해 노귀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외국인 선교사 제임스 아담스를 만난다.그는 대구로 내려가지 않고 이곳 영천에서 초가를 구매한 뒤 정착했다. 초가를 서당 겸 예배당으로 활용하며 지내던 중 교인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계획한다. 그래서 건축된 것이 1904년에 지어진 16칸 한옥교회 자천교회이다. 그러나 예배당 건축이 쉬운 것만 아니었다. 유교 사회인 이곳에서 반대가 심하게 일어나 교회건축은 중단되었고 이에 권헌중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어주기로 하고 예배당 건축에 대한 동의를 받아낸다.김순희수필가영천의 한옥 기술자는 아이디어를 내어 2면 8간의 한옥 2채를 붙이는 방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한다. 그래서 이 건물은 좌우가 서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하게 됐다. 건물 4면 모두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높아진 지붕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하여 실내에는 4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쳐다보노라면 아늑함이 할머니네 아랫목과 같다. 1913년 권헌중 장로는 근대식 교육기관인 신성학원을 설립한다. 지금은 자천교회의 교육관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한옥교회와 한옥 교육관이 있는 곳은 이곳 영천뿐이라고 한다. 신성 학교는 요즘 처치스테이(Church Stay)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은 야외결혼식장으로도 활용할 것이라 한다.자천교회 예배당의 일화가 하나 있는데, 6·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영천에 주둔한 북한군에게 폭격을 시도할 때 성도들이 지붕에 올라가 ‘CHURCH’ 라는 글을 새겨 예배당은 폭격을 피했다고 한다. 예배당 온돌방 옆에 있는 굴뚝이 나지막한 것은 굴뚝에서 나는 밥 짓는 연기에 마음 아파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배려라고 한다.학당 건물 벽에는 태극기가 걸렸는데 실제로 3·1 운동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그 옆에 교회 설립에 참여한 분들의 부조가 있는데 동산병원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만들어 기증했다고 한다. 태극기 옆에 십자가가 섰다. 휘어진 나무로 된 모습이 십자가에 예수님의 형상이 없는데도 그 모양 자체가 구부러진 게 예수님의 모습 같아 마음이 아릿하다. 한옥교회에서 풍기는 온화함과 참 잘 어울리는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앞에서,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 두고 함께 들어가 남녀가 따로 앉아 드리는 예배. 100년을 간직한 전통을 1천년이 지나도록 볼 수 있기를 기도한다.

2020-11-08

기차와 향나무

경주 불국사역에는 무궁화호만 지난다. 멀리서 바라보면 전통 기와를 얌전히 이고 있어서 새로 만들어진 역에서 느낄 수 없는 세월이 느껴진다. 가을 햇살이 그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조그마한 역이지만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지 작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함께 간 친구는 불국사란 이름이 붙은 역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불국사 근처에는 시장 이름도 불국사시장, 밀면집도 불국사를 앞에 달고 장사를 하고, 길 이름도 불국로라 붙였다. 불국사의 그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고려말 조선 초의 문인 ‘이행’은 소를 타고 여행을 했다. 그는 달 밝은 밤이면 술 한 병 옆에 차고 소 등에 걸터앉아 느릿느릿 산수를 거닐었다. 소보다는 말이 빠르지만 모든 것은 천천히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라고 읊조렸다. 빠르기로 치면 KTX 열차가 제일이지만 달빛에 비친 아름다운 자연을 찬찬히 보기엔 소를 탄 것처럼 무궁화 열차만 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옛날에 사라진 비둘기호의 전설은 뒤로 미뤄두고 말이다. 느림의 미학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며 천천히 자연을 감상하는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스스로를 슬로우시티라고 이름 붙이는 곳이 늘어났다.경주는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느리게 여행하기에 좋은 곳이다. 그 처음 시작이 불국사역이다. 몇 해 전 포항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갔었다. 부산 구포역을 거쳐 순천까지 가는 열차였다. 새벽에 출발해서 해운대를 지날 때쯤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다. 그 장면을 보려고 일부러 무궁화호를 탔었다. 그해를 마지막으로 해운대 노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서 지금은 그 레일 위로 관광열차가 다닌다.불국사역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지만, 조선 시대 전통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1918년 11월 기차 운행이 시작된 불국사역은 올해로 102년을 맞았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코레일이 2013년 철도기념물로 지정하기도 했다. 불국사역은 부산~울산~경주~포항을 잇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36차례 운행 중이며, 피서철과 여행 성수기에는 2000여 명이 불국사역을 찾는다. 기차를 타려고 역사를 나가니 레일 앞에 향나무 몇 그루가 우리를 반긴다. 기차가 처음 달리던 날 심었다고 이름표를 달았다. 5~10년 된 것을 심었다고 하니 불국사역보다 나이가 많다. 우둘투둘한 몸피에 이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어서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위엄이 느껴졌다.“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에 키 작은 소나무 하나…”, 이규석의 ‘기차와 소나무’라는 곡이다. 노래 속에 소나무는 휙 지나치는 기차라도 볼 텐데 불국사역에 향나무는 곧 기차를 보지 못하게 된다. 동해남부선(총 142㎞·경주구간 52.4㎞) 복선화와 철도 이설사업으로 2021년 말이면 지금의 철도가 폐쇄돼 불국사역의 역할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열차 여행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불국사역을 살리자(불사조-불국사를 사수하는 조직모임)는 취지의 서명운동이 지난해 5월부터 진행 중이라고 한다.김순희수필가거기에 이름을 올려 힘을 보태야겠다. 나도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었다. 느리게 역마다 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이렇게 부르는 노랫말을 “독사 껍질 벗겨 그녀에 목에 걸면 그녀는 깜짝 놀라…”로 바꿔 돌림노래로 부르며.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까르르 웃게 되는 기차의 추억이다.향나무가 들려주는 100년의 이야기에 취해 있자니 기차가 들어온다. 호계역에서 달려온 기차는 젊은 연인들을 내려놓고 경주역을 향해 뒷모습을 남기며 가을 속으로 사라져 간다.향나무 아래 코스모스 꽃밭을 배경으로 기차의 꼬리를 넣어 한 컷의 사진을 남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불국사역의 무궁화호 모습도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남을 테니. 기차역에는 사람과 기차가 드나드는 게 제모습이다. 향나무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그 자리를 지키길 기도하며 역을 빠져나왔다.

2020-11-01

꽃밭을 지키는 탑

“저~기, 꽃도 아이고 나무도 아이고 붉은색 보이지요? 거기시더.”영산서원을 구경하고 난 뒤 해설사에게 근처에 탑이 두 개 있다는 이정표를 봤는데 어디쯤 있냐고 물었다. 언덕에 자리한 서원이라 마당에서 마을과 들판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가을 햇살이 하도 눈이 부셔서 손양산을 하고서 들을 ‘주욱’ 훑었다. 어딘지 헤매는 우리에게 손짓으로 알려준 곳에 꽃밭이 있었다. 모양은 나무인데 키가 낮고 색이 붉기도 하고 분홍빛도 어우러져 진짜 꽃밭처럼 느껴졌다. 그 밭 언저리에 언뜻 탑이 보였다. 그것은 삼층탑이고 거기서 다리를 건너면 오층탑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셨다.차를 몰고 가까이 갈수록 꽃밭의 형체가 드러났다. 시골집 마당 가에 많이 심는 댑싸리였다. 보통은 연두색이다가 베어서 빗자루를 만들어 마당을 쓰는 용도로 썼던 그 풀이다. 핑크뮬리처럼 색이 고와서인지 이미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많았고, 한적한 시골 동네에 차가 끊이지 않고 들어왔다. 분홍빛에 묻혀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였다.꽃밭 너머에 삼층탑이 섰다. 저 멀리 당간지주도 덩그러니 놓였다. 댑싸리 지나 풀밭을 헤치고 가까이 갔다. 탑의 여러 곳이 깨지고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12지신상을 한 면에 3구씩 새겼다. 탑신의 1층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 밑면에는 물을 뺄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고,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이 탑은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이곳에 ‘북악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요즘 들어 영양에 자주 갔다. 길이 새로 난 덕분에 멀기만 하던 영양이 내 곁으로 성큼 다가온 덕분이다. 영덕에서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면 20여 분만에 톨게이트에 내려서라고 하니 포항에서 한 시간 좀 더 가면 된다. 육지 안의 섬이라고 할 만큼 깊은 산 속에 자리한 곳이라 다소 낯설다는 느낌이 드는데 의외로 오래된 종택을 비롯해 국가지정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이 가운데 특히 탑과 관련한 문화재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보통 탑이라고 하면 산을 올라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양군의 경우 대부분 마을이나 길가에 탑이 있어 접근성 면에서 좋다. 탑이 있다는 것은 곧 영양 지역에 사찰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오늘은 두 개의 탑을 보러 갔다. 밭 가운데 자리한 영양 현리 삼층석탑과 모전석탑 계열의 현이동모전오층석탑이다.분홍 댑싸리 밭을 나와 다리를 건너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탑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현리 2교의 반대편이자, 현동교를 지나면 이내 현이동모전오층석탑 만날 수 있다. 작은 사찰 내에 자리한 이 탑은 듬직한 형 같아서 건너편의 삼층석탑을 보살피려 내려다보고 있다.일월산에서 발원해 흐르는 반변천 가에 탑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강가의 고가차도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있어, 그 강을 따라 내려가면 국보 제187호 봉감모전오층석탑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양에는 하천변에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김순희수필가절이 사람을 불러들이던 현리에 이제 탑만 남았다. 핑크 댑싸리가 절의 역할을 대신한다. 나와 남편 말고 탑에 관심을 갖는 이가 거의 없었다. 모두 꽃밭 언저리만 맴돌다 이내 차를 돌려 마을을 떠났다. 여기 탑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댑싸리를 삼층탑 둘레까지 심고 꽃밭 입구에 오층탑의 위치를 표시해 두면 좋겠다. 우리가 탑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분홍 댑싸리를 득템 했듯, 댑싸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천년을 그 자리에서 천년의 풍상을 겪은 탑이 전하는 구수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행운을 건질 수 있게 말이다. 그러면 댑싸리가 탑을 더 오래 지키는 파수꾼이 되겠지. 탑과 분홍 댑싸리가 함께 나오도록 카메라를 높이 들고 한 장의 추억을 찍었다.

2020-10-25

홍옥정과

어린 시절, 나는 과수원집 손녀였다. 과수원은 낙동강 지류가 바로 가까이 있는 모래밭이라 물 빠짐이 좋아 과일 농사가 잘 되는 땅이었다. 사과나무가 많았고 자두 몇 그루, 복숭아 서너 골, 나무 사이에 땅콩이나 잎채소가 심겨져 있어 계절마다 밥상이 풍요로웠다.사과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다. 단맛이 많고 익을 때까지도 푸른 인도, 초록빛이 단풍들듯 노랗게 익는 고리땡은 할머니가 좋아하셨다. 육질이 단단해서 겨울 내내 언니와 나의 주전부리가 됐던 국광, 사과 맛이 한참 그리울 때 제일 먼저 수학했던 풋사과 아오리, 빠알갛고 앙증맞은 얼굴로 저절로 손이 가게 만들어 따먹게 유혹하는 홍옥이 있었다.지금쯤 과일 가게 맨 앞줄에 나앉은 건 홍옥이다. 아주 잠깐 보이는가 싶게 자취를 감춰버리기에 보일 때 얼른 사야 한다. 뽀드득 소리 나게 옷에 슥슥 닦아서 한 입 베어 물면 입속 가득 새콤함이 퍼진다.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우리 과수원에 있던 그 많은 품종 중에 지금은 홍옥이 살아남았다. 국광은 부사나 새로이 개발된 더 아삭하고 단맛이 강한 더 큰 사과로 대체된듯하다. 홍옥은 그 특유의 빨강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잃지 않았다. 십여 년 전, 중국 여행길에 도장을 새겨주는 곳에 들렀었다. 이름을 새겨준다며 도장 재료를 고르라고 했다. 보석이나 나무 돌 같은 여러 소재가 있었다. 그중에 홍옥이라는 붉은 도장이 눈에 쏙 들어왔다. 이름도 반갑고 그 붉은 색이 ‘나를 데려 가세요.’라고 눈짓을 했기 때문이다. 빠알간 홍옥에 내 이름을 새겨서 데려왔다.홍옥을 또 만난 곳은 영덕 언니네이다. 어머님 제사에 쓸 쑥떡을 만들어 놓았으니 가지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얼른 달려가니 거실에 어여쁜 다과상이 차려졌다. 나만을 위한 차림이었다. 대접은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입이 떡 벌어져 그 아름다움에 한참 취했다. 이렇게 예쁜 것을 먹어서 없애버리면 안 될 것 같이 고왔다.그 중앙에 활짝 피기 바로 전의 장미 모습의 정과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홍옥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언니의 설명이 없다면 주재료가 홍옥인 줄 몰랐을 것이다. 홍옥이 장미로 변신하는 과정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홍로나 붉은빛이 나는 다른 사과로 해 보았지만 색깔이 안 나, 홍옥이 잠깐 나올 때 자주 과일 가게를 살펴서 사야 한다.빤질빤질 빨간 홍옥을 4/1쪽으로 잘라 씨를 발라내고 얇게 저며 설탕을 켜켜이 뿌린다. 하루쯤 절이면 딱딱하던 것이 호리호리해진다. 노골노골해진 사과를 소쿠리에 건져 설탕물을 빼준다. 건조기에 살짝 말리면 일이 빠르고 수월해진다. 약간 꼬득꼬득 해지면 꽃으로 접는다. 꽃모양으로 네다섯 조각을 이어붙인다. 큰 꽃은 더 많이 붙이면 된다. 홍옥이 가을에 2-3주 잠깐 나오고 마니 일 년 쓸 것을 만들어 냉동 보관하다 오늘처럼 손님이 오면 꺼내서 사용한단다. 경숙 언니는 살림꾼이다. 홍옥정과와 함께 차에 곁들이는 것이 많다. 연근정과, 금귤정과, 호두곶감말이, 여러 과일 모양의 화과자와 양갱, 약과와 유과, 추석이 얼마 전이라고 꽃송편까지 새로 쪄서 내놓았다. 색색깔의 과일 몇 가지에 작은 수반에 꽃도 꽂았다.김순희수필가돌아오는 내게 떡 상자 말고 한 보따리를 안겨주었다. 떡 찍어 먹으라고 직접 만든 조청 한 통과 곁들여 낼 호박식혜는 대여섯 시간을 달여서 만든 것이다. 남편 도시락 반찬 하라고 비트를 넣어 핑크빛이 도는 무연근 피클도 한 통 얹어준다. 한 살림이다.언니의 살림 솜씨를 따라 할 자신은 없다. 손이 야무져서 음식이든 싱크대든 손만 대면 다른 사람과 다른 경지의 것을 만들어 낸다. 타고난 DNA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을 보면 물어보고 집에 와서 꼭 따라 해보는 언니의 실천력이 지금의 명인을 만들었다. 나이를 잊게 만드는 열정이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격하게 반응하고 좋은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성품에 어디든 환영받는 언니다. 언니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려고 마음 냉동고를 하나 샀다.

2020-10-18

느티나무 가로수 길 끝에

낙동강이 만들어 준 습지는 예로부터 농사지을 넓은 들을 선물했다. 대로를 달려가다 구미 해평면 마을 길로 접어들면 갈냄새 풍기는 들판 사이로 ‘느티나무 숲 가로수 길’이란 이정표가 먼저 우릴 반긴다. 여기서부터 가을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하는 듯하다. 길 양옆으로 느티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려 터널을 만들었다. 터널 속으로 들어가니 나무줄기와 줄기 사이로 누런 들판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서 더욱 낭만적인 풍경이 완성되었다. 3km 넘게 가로수가 이어져 있어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길이다. 달리던 차의 속도를 늦추었다. 차창을 내려 심호흡을 하며 깊숙이 가을을 마셔 본다.‘용수골 못’을 지나자 느티나무 사이에 간간이 벚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눈에 띄기도 한다. 그러다 길이 가팔라지며 가로수의 수종이 소나무로 변했다. 창을 활짝 열고 이번엔 솔 향기를 맡으며 구불구불 한참을 더 오르면 길 끝에 냉산(冷山)이 품고 있는 고즈넉한 도리사(桃李寺)가 나타난다.고구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와서 창건한 도리사,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도화상이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겨울인데도 복숭아꽃(桃)과 오얏꽃(李)이 만발해 있는 것을 보고 상서로운 곳이라 생각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근처 도개면 신라불교초전지의 전시관에는 아도화상이 복숭아 꽃그늘 아래에서 참선하는 형상을 재현해 놓았다. 도리사는 법당인 적멸보궁에 불상이 없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구법 중 모셔온 부처님의 사리를 5곳에 나눠 봉안한 곳이 5대 적멸보궁으로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그리고 통도사가 있는데 최근에는 대구 용연사, 건봉사, 구미 도리사까지 합쳐서 8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성지로 인정되는 곳이다. 법당 뒤로 난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다. 뒤쪽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조성해 법당 안에서 사리탑을 향해 예배를 올린다. 법당에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서대라는 전망대가 있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절 주변 소나무 숲에 벤치와 평상이 셀 수 없을 만치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사람들이 법당이 아니라 소나무 아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음을 풀어놓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라고 휴식처를 만들어 놓은 듯하다.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구포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장려하고 도리사에서 바라본 낙동강은 수려하다.”라고 했다. 서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물이 수려하게 흐르고 구미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이곳에 올라 아도화상이 서쪽 황악산을 손으로 바로 가리켰다는 곳에 절을 세우면 불교가 흥할 것이라고 말한 곳이 ‘직지사’가 되었다. 12시 방향에 금오산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가산산성, 팔공산 자락이 있다.김순희수필가극락전 앞에 특이한 모양의 탑이 우리를 돌계단으로 안내한다. 내려가니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좌선대가 보였다. 아도화상이 널따란 바위에 앉은 모습을 상상하려는데 할머니가 손녀의 손을 잡고 오르락 내리락 하며 놀고 있었다. 그걸 웃으며 지켜보는 내외를 보며, 스님이 거기에 올라 참선을 한 곳인데 저렇게 함부로 오르내려도 되나 싶었다. 아이들이 그러하더라도 타일러야 할 것을 함께 웃고 즐기는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다. 문화재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아쉽다.신라 최초의 가람이자 구미 시티투어버스 코스로 지정된 도리사. 일교차가 심한 요즘에는 산자락 밑으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다니 가을 가람이 중생들의 발길을 끌어당긴다. 늦가을에 향 축제를 연다는 도리사, 아도화상이 큰 병이 든 성국공주를 위해 기도를 올려 낫게 한 후로 집안에 환자가 있거든 아도화상에게 향을 피우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향이 해평면 들에 퍼진 것인지 절의 일주문이 느티나무 숲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다. 신라 때부터 지금껏 한자리를 지켜온 도리사의 품이 온 들판을 감싸고도 남는 크기였다. 아기단풍의 색이 짙어질 무렵 한 번 더 찾아가 오랜 세월을 간직한 그 향을 음미해 보아야겠다.

2020-10-11

시절인연

중학생이 된 그해 여름, 나는 묵계에 갔다. 남후면 개곡 예배당에서 안동 시내로 와서 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한참을 걸어서 반대 방향에 있는 길안면 묵계 교회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한나절을 흔들리고 나서야 도착했다. 작은 교회 두 곳이 연합해서 중고등부 수련회를 이곳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2박 3일이지만 오고 가는 시간이 대부분인 일정이었다. 그 교회에서 내려다보이는 앞들에는 강이라고 하기엔 뭣하고 내라고 하기엔 폭이 넓은 물이 흘렀다. 돌다리도 떠내려갔는지 바지를 둥둥 걷고 신발과 성경을 들고 건너가서 만휴정 계곡 너럭바위에 올라서 예배를 드린 기억도 있다.중학교 이후 묵계리를 다시 찾은 것은 결혼 후였다. 포항에서 본가인 안동을 가려면 죽장을 지나 구불구불한 국도를 달려 묵계리를 지나야 안동 길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추석, 설을 포함해 1년에 두 번 이상은 지나다니는데 가끔은 차를 세우고 묵계서원과 만휴정을 거닐면 매번 방문객이라고는 우리뿐이었다.어느 해 겨울, 글동무들과 안동 고택에서 하루를 묵고 돌아오며 만휴정에 들렀다. 너럭바위를 흐르는 폭포가 하얗게 얼어 장관이었다. 하회마을, 봉정사는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지만, 묵계서원과 만휴정은 지인들도 처음 듣는 곳이라 안동 곳곳에 숨겨진 보물이 많구나 하며 내 고향 칭찬을 했다. 더불어 이런 좋은 곳을 알고 데려 와줘 고맙다는 말도 얹어주니 더 으쓱했다. 그때도 한적하기만 해 계곡에 우리 발소리만 울렸었다. 지인 여러 무리를 계절 따라 이곳으로 데려와 산책만 해도 모두 고즈넉함에 반해버리곤 했었다. 나만 아는 그런 숨겨진 보물로 남아있을 줄 알았다.지금은 강산이 네 번은 바뀌어 맨발로 건넜던 곳에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가 놓였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높은 인기 덕분인지 관광객들을 위한 주차장도 생겼다. 아무 때나 가도 사람들로 북적이고 이병헌과 김태리가 독립운동하듯 ‘러브 합시다’ 하며 악수를 나눴던 다리 앞에는 인증샷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묵계서원도 따라 유명해졌다. 옛 건물 그대로에 카페가 생겼고 ‘꼬마 도령 놀이터’라는 프로그램도 생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서원 마루에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몇 안 되는데 이곳은 오래전부터 문이 열려있어서 나처럼 지나는 길에도 읍청루에 올라서 옛 선비들이 느꼈던 정취를 마음껏 맛보게 해주었다.김순희 수필가만휴정은 ‘만년에 휴식을 취할 곳’이라는 뜻으로 묵계의 깊은 산골짜기 송암 폭포 위에 있다. 산수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자다. 영화 ‘미인도’, KBS ‘공주의 남자’ 촬영 배경이 될만한 경치이다.지난 2015년에 보백당 종가에서 특별한 보물이 발견됐다. 1868년 ‘연시례(延諡禮)’를 지냈던 기록이 있는 일기를 찾아낸 것이다. 2017년에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 서세 500주년을 맞아 ‘연시례 재현행사’가 묵계서원에서 열렸다. 연시례는 임금이 내린 시호, 교지를 지역유림과 관원들이 축하하면서 맞이하는 의식이다. 일기에는 시호를 청하는 내용과 서원·사당 수리, 행사에 대한 논의 등 연시례에 관한 모든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지금까지 임금이 내린 시호를 받은 선현들은 많았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부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보백당선생 연시시 일기(寶白堂先生 延諡時 日記)’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지난해 가을에 수련회를 함께 간 친구들을 이곳에 데려갔다. 드라마의 그 유명한 장소가 여기였다는 것은 몰랐다고 한다. 나만 따라오라고 큰소리치며 만휴정으로 향했다. 가을 단풍에 물든 계곡은 더 아름다웠고 친구들의 탄성에 물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교회 옆 묵계서원 마당에서 투호 놀이를 하고 누각 읍청루에 올라 기둥 사이에 시절이 걸어놓은 풍경을 사진에 가득 담았다. 주차장 마당에 동네 주민들이 사과를 내놓고 팔았다. 단풍만큼 붉은 사과를 한 상자씩 싣고 내년에 또 안동에서 보자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좋은 곳은 친구들과 나눌 때 더 좋은 추억으로 간직된다.

2020-10-04

행복의 조각보

내 행복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몇 해 전 남편과 해인사에 갔을 때였다. 가을이 왔다고 절 주변 담장 밑에는 애기단풍을 중심으로 많은 꽃이 피어 도란거리고 있었다. 꽃향기를 느끼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그곳의 많은 것 중에 내 눈에 뜨인 것은 엽서 꾸러미였다. 갖가지 꽃과 곤충, 풍경을 담은 엽서들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전통 보자기 그림이었다. 엽서 속의 그림을 보니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가 떠올랐다. 그들이 혹시 우리나라 조각보의 문양들을 커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이다. 자투리 천을 활용하는 생활 지혜의 소산이므로 주로 일반 서민층에서 널리 쓰였다.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 조각보는 공을 들인 만큼 복을 불러들이고, 조각을 많이 이을수록 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운반하는데 간편하게 쓰인다. 또한, 예절과 격식을 갖추는 의례용으로도 사용된다.보자기에 무언가를 싼다는 것은 복을 싸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복(福)이라고도 하고, 보(褓), 보자(褓子), 또는 지방에 따라 보재기, 포대기, 밥수건, 밥뿌재라고도 부른다. 보재기, 밥뿌재…, 참 정겹다.서로 다른 자투리들을 이어서 쓸모 있는 보자기를 만든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 기쁘게 하고 슬프게도 한다. 엽서의 조각보 속에 내 삶이 보였다.오늘도 남편은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왔다. 요즘 따라 술자리가 잦다. 제발 좀 쉬엄쉬엄 마시라고 했더니, 안 취했다며 시치미를 뗀다. 한술 더 떠 몸에 좋지 않은 술이라 빨리 마셔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잠들어 버린다. 취하기만 하면 잠드는 것이 그의 술버릇이다. 집에 손님이 와 있어도 소파에 살짝 기대어 코를 골며 잠을 청한다. 시아버님 말씀이 재미있다. “야야, 얼매나 순하노. 잘 먹재 잘 자재. 키우기 그저 그만 아이가.”그 말에 나는 그만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웃음 끝에 내 행복의 조각보는 또 한 뼘 넓어진다.김순희수필가나는 목욕 갈 때 친정엄마와 함께 간다. 엄마와 함께 가면 친정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큰동생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진급한 이야기, 작은동생이 새로 안마의자를 사준 것, 이모들의 소소한 다툼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내 등을 밀어주신다. 꼼꼼하게 내 몸 구석구석 씻어주면서 살이 쪘으니 다이어트 하라고 하신다. 그 말이 잔소리 같기도 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엄마와 함께 몸을 씻으면서 마음도 편히 쉬고 온다. 이 또한 내겐 행복이다,내 삶의 조각보에 또 다른 고운 무늬를 더해주는 사람은 친구이다. 늦은 오후에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비도 오고, 외출하고 돌아와서 저녁밥 하기 싫은 걸 어찌 용케도 알았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 이름 친구! 친구는 또 다른 이름의 가족이다.지인이 유기묘를 데려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다기에 한 마리 데려와 키우기, 은규샘과 수목원 산책하기, 남편과 가까운 곳에 답사하기, 퀴즈프로 보면서 문제 맞히기, 두 문제 맞히고 옆에 앉은 아들에게 뻐기기…. 한 조각 한 조각 수명과 복을 기워 가는 조각보처럼 내 행복도 작은 기쁨과 사연들로 채워 가야겠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으로 만들지만 내 행복의 조각보를 이어주는 것들은 소중한 삶 그 자체이다.돌아가신 어머님이 재봉틀로 박아 만든 밥뿌재가 하나 있다. 가족 누군가의 옷 자투리에서 나온 것들로 기운 것이다. 오래 사용하셔서 색이 바래 처음의 색깔을 다 잃었다. 어머님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 더 좋다. 나도 어머니의 삶의 한 조각을 채운 맏며느리이니 이 조각보는 내가 간직해도 될 것이다. 고이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

2020-09-27

초록등대

등대 여권을 받았다. 조카와 군산의 근대역사박물관에 들어가니 입구에 3층 높이의 하얀 등대가 버티고 섰다. 파란 지붕을 얹은 것이 그리스의 어느 섬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박물관에 어떤 것이 있는지 동선을 보려고 팸플릿을 받으러 갔다. 안내데스크에서 초록색 표지의 딱딱한 여권 모양의 수첩도 손에 쥐어 주었다. 펴보니 전국에 있는 등대 지도와 그중에 어떤 곳엔 도장을 찍을 수 있고 완성하면 기념품도 주는 이벤트였다.포항에는 오래된 대보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이 있으니 집에 돌아가면 얼른 달려가 여권에 확인도장을 두 개나 받아야지, 방학을 이용해 남해의 섬에 홀로선 등대도 접수하리라 다짐을 했다. 하지만 삶이 언제나 계획대로 되던가.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자리 잡은 등대박물관을 오늘에야 찾았다. 구룡포 읍내를 지나서 가야 하는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효과인지 신항만 도로에서 내려서자 막히기 시작한 길은 읍내 전체가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항구를 빠져나오니 새로 난 길은 한산하게 뚫려 달리기 좋았다. 파란 하늘이 손에 닿을 듯 다가오고 옆으로 바다가 내내 같이 달렸다.해맞이광장도 주말이라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국립등대박물관은 관람객이 거의 없어 우리 차지였다. 체온 측정 후 방문자 명단을 작성하고 유물관에 입장하니 입구에 엽서를 만드는 코너를 따로 마련해두었다. 등대박물관 스탬프 15가지와 항로 표지 스탬프 10개로 하얀 엽서에 나만의 무늬를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인어공주, 조가비, 물고기 한 마리, 대보등대, 상생의 손을 찍어 내 엽서를 완성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이 좋아할 등대 모양 접기, 등대 탁본 등 체험거리도 다양했다. 등대 학교입학이라는 팸플릿을 들고 더 안으로 들어갔다.세계 최초의 등대인 파로스 등대는 BC 28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세워졌고 우리나라 역사서에 등대가 처음 등장한 것은 삼국유사였다. 아유타국 지금의 인도에서 온 신부를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맞이하는 장면이다. 횃불로 배를 안내했다고 하니 등대의 옛 모습이다.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등대를 구성하는 것들이 전시돼 있다. 우리나라 곳곳의 등대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이 이제는 제 역할을 다하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오래전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등대에 오르내린 대원의 등대일지도 보이고, 그때 받은 월급 명세서도 있었다. 손으로 쓴 월급 명세서 여백에 받은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 항목을 조목조목 적어놨다. 중학등록금 8000원, 주식, 부식, 병원. 몇 가지 되지도 않았는데 곗돈 380원이 모자란다고 적혀있다. 등대원의 힘겨운 삶이 고스란히 보인다. 등대지기란 노래를 들으면 아련해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유물관을 나오니 오래되고 소박한 옛 박물관이 역사관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에 호랑이 형상이 늠름하게 앉았고 하얀 등대가 점잖게 섰다. 1903년에 지은 대보 등대이다. 100년 넘은 역사를 간직한 지금은 호미곶등대로 부른다. 오래전 이곳에 와서 달팽이 모양의 계단을 밟고 올라봤던 기억이 있다. 박물관의 여러 곳이 닫힌 상태고 체험관은 공사 중이라 들어갈 수없었지만 홈페이지를 보니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어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또 한 번 와봐야지 했다.김순희 수필가등대박물관 앞바다에 초록 등대가 있다. 우현 표지인 빨간색과 좌현 표지인 흰색은 어느 항구에서나 자주 보지만 초록은 드물다. 근처에 암초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신호이다. 신호등에 초록 불이 켜지면 사람이든 차든 길이 열린다는 뜻인데 바다에서는 조심조심해서 가라는 당부를 초록 등대로 말해준다.초록 등대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복잡한 구룡포 읍내 쪽이 아닌 임곡 방향으로 잡았다. 동해라 일몰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해질녘의 바다의 노을은 구름과 함께 나름의 시를 써서 보여주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오며 나는 바다만큼 아름다운 글을 쓰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저장했다.

202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