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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돌에 새기는 마음

금오산을 오른다. 제일 먼저 메타세쿼이아가 푸른 숲에 잘 오셨다고 반갑게 길을 안내한다. 양옆으로 늘어서서 그늘을 만들어주니 눈부터 시원해지고 ‘좋다~’라는 소리가 입에서 반사적으로 흐른다. 메타세쿼이아에게 배턴을 이어받은 소나무 산책로,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는지 둘레가 어른 한아름으로도 모자라다. 산새 소리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의 협주곡이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위로한다. 곳곳에 놓인 나무마루에 일찌감치 눌러앉은 가족들, 얕은 물에 뛰노는 아이들 소리가 ASMR이 되어 숲에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금오산이 주는 선물이다.산 좋고 물 좋은 자리에는 늘 정자가 있다. 채미정도 그런 곳에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너머에 흥기문이 보인다. 오래전 이곳에 주인이었던 길재 선생이 거닐었을 그 길에 내 발을 얹어본다. 그가 자란 고향이자 나이 들어 고려의 기울어짐을 바로 세울 힘이 없음을 알고, 어머니와 가족을 거느리고 찾아왔을 때 변함없이 우뚝 솟아 긴 산자락을 펼치고 선생을 안아 준 것은 금오산이었다.금오산은 본래 대본산(大本山)이란 이름이 있었는데 세월 따라 여러 개의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중국 허난성 숭산과 생김새가 비슷한데다 남쪽에 있다 해서 고려 때는 남숭산(南崇山)이라고 불렸는데 북한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둬 남북으로 대칭되는 산의 이름이었다. 지금의 이름인 금오산(金烏山)이란 명칭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한편 중국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이 고장 출신의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의 충절을 기려 옛사람들은 금오산을 일컬어 수양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은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 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채미정을 건립하였다. 뒤편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이, 옆에는 구인재가 자리했다. 길 건너에는 기념관이 있다.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 갈 때도 있다. GOP에 근무하던 군인 아들 면회하러 가는 길에 민통선 내에 있어서 평생 가 볼까 말까 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을 우연히 들렀다. 그곳에서 신라왕이 왜 경기도에 묻혔는지 그때야 새삼 깨닫게 됐다. 둘째 아이가 강원도 고성에 배치되었을 때에는 근처의 송지호 호수와 청간정에 올라 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평생 가보지 않고 살았을 곳이다. 채미정도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구미에 있어서 둘러본 곳이다. 고려 삼은 중에 한 분이라서 더 가봐야지 했다. 삼은 중에 포은 정몽주는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에 서원이 있고, 목은 이색은 경상북도 영해읍 괴시리에 기념관이 있다. 두 곳은 예전에 가 보았기에 채미정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삼은을 다 만나본 것이다.김순희수필가세 사람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인생 말년을 금오산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금오산인’이라 불렀던 야은 길재의 대표 시이다. 이 시조는 채미정 입구 바윗돌에도 새겨져 있다. 고려의 서울이던 개성을 그리며 쓴 ‘회고가’이다. 돌에 새겨놓은 그의 마음이 절절하다. 내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길재 선생의 절절한 마음까지는 이해 못 하면서도 달달 외워서인지 수십 년 후의 내 입에서도 절로 흘러나온다. 오늘 그의 마음에 오래 간직한 충심을 다시 들여다보며 시를 읊조려 본다.

2020-09-13

추희가 여무는 집

친구네 집은 보물섬이다. 방문을 열 때마다 내가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농은 언뜻 보면 무늬가 단순해 만들기 쉬워 보이나 나무에 그냥 자개를 붙여 볼록하게 완성하는 것과 다르게 나무에 미리 여러 모양으로 파내고 자개를 박아서 만든 수공이 많이 든 명품이다. 부엌 찬장에 12인조 양식기도 볼만했다. 그릇 모양도 특이하지만 12명의 재떨이까지 갖추어져 구성 자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나씩 꺼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30년 지기 친구 친정에 오랜만에 놀러 갔다. 외벽에 조그만 타일을 붙인 그 시절엔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났을 법한 이 층 양옥집이다. 거실에는 윗 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어서, 홈드레스를 입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우아하게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부잣집이었다.방에는 내가 제일 궁금해한 물건이 놓였다. 창고 깊숙이 있던 것을 딸 친구가 보고 싶다는 말에 꺼내서 말끔하게 닦아 놓으셨다. 혜경이 아버지 딸 사랑은 예전부터 유별났다. 30년 전에도 같이 근무하던 유치원 앞까지 매일 태워다 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 또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딸의 말이라면 어디선가 달려오는 우주 소년 짱가처럼 든든한 아버지였다. 아니 아빠였다. 혜경인 그때도 지금도 아빠라 부른다.2층방 층고(層高)가 이렇게 낮았던가. 오래된 형광등이 한쪽 눈을 껌뻑거리자 ‘아빠~’ 하는 외마디에 금방 손봐주셨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침을 떼는 형광등. 그 불빛 아래 장 하나가 놓였다. 빠알간 색깔의 자태가 곱다 못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반닫이 같기도 한데 두 짝의 문을 열면 변신로봇처럼 다른 모습이 된다. 재봉틀이었다. 발판을 밟아 재봉질을 하니 손으로 돌리는 앉은뱅이 보다 편한 물건이었다고 자랑을 하셨다.오른쪽 문짝을 여니 서랍이 네 개가 있다. 조그만 서랍 안에 까마득한 이 집의 옛날이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서랍엔 재봉틀에 쓰이는 북과 실, 누군가의 옷을 만들다 남은 천 조각과 크기가 다른 단추들이 가득했다. 두 번째 서랍을 여니 재봉틀의 출생 증명서가 나왔다. ‘드레스 스윙 머신’ 이라고 영어로 써진 이름과 한자로 동양 미싱 주식회사에서 만들었다고 직인이 찍혔다. 뒷면에는 품질보증서 같기도 한 말들이 영어로 적혔다. 그 밑에 또 하나의 설명서가 있었다. KS 인증마크가 붙은 ‘하이콜드냉장고’에 관한 것이었다.김순희수필가다음 서랍엔 올림푸스 카메라 뚜껑이, 뽀빠이가 그려진 동그란 딱지 하나가 나왔다. 별이 일곱 개 있고 923765 숫자까지, 그때는 그 하나하나가 친구 딱지를 이기기 위해 다 쓸모가 있던 것들이었다. 아마 혜경이 동생의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을 추억의 기록이다.빨간 몸체에 하얀 자개를 박아 넣은 재봉틀이다. 누구네 집에서도 못 본 때깔이라 탐나는 물건이었다. 하도 이뻐서 눈을 못 떼는 나와 다르게 혜경인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집안 가득 오래된 물건이 가득해서 늘 보던 거라 그런 듯하다. 저 재봉틀로 포대기를 만들어 친구를 업었다며 그 시절 이야기를 한없이 들려주시는 어머니와 딸 친구가 궁금해하는 구석구석 열어 보여주시는 아버님의 그 손길이 따뜻해서 참 좋았다.한참을 집구경을 끝내고 나오자 늦자두 한 봉지를 건네신다. 추희였다. 몇 해 전 혜경이가 자두 하나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앞뜰에 심은 자두나무가 올해 첫 열매를 거두었다고 담아 주셨다. 따님 주시지했더니, 옆에선 혜경이는 그날 내가 배가 고팠었는지 우연히 맛있게 먹었을 뿐 신맛이 나서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딸의 스쳐 지나는 모습도 놓치지 않고 나무를 키워 열매를 먹이려는 부모님의 사랑이 붉게 익어서 나에게까지 당도했다.오래된 물건들도 새것처럼 닦으며 사는 친구네 부모님이 저 이층집에 오래 머물길 기도했다. 주신 자두를 한 입 깨무니 달콤한 향이 입속 가득 퍼진다.

2020-09-06

맥문동 앞에서 仁을 이루다

해가 지기 전 황성공원 맥문동 군락지를 찾아갔다. 기와가 늠름한 시립도서관 앞에 주차를 하고 산책로로 걸어 들어갔다. 수백 년 된 나무들과 굴곡진 모습의 소나무들 사이로 남은 햇살이 옆으로 드러눕는다. 가지치기를 한 나무 사이로 빛내림이 환상적이다. 그 햇살을 비껴 받은 보랏빛 자태가 곱다.여름의 마지막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랏빛 맥문동이 8월의 경주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그것은 맥문동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묵직한 무게감의 굽은 소나무가 산책로 사이를 채우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더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바람이 불 때는 맥문동이 향기를 내뿜은 듯 사람들을 취하게 한다.황성공원 맥문동 군락지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노을 무렵 방문하면 좋다. 한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고, 사진을 찍기에도 훨씬 좋다. 새벽녘 물안개가 드리워진 모습을 찍으면 금상첨화겠지만 매일 새벽 찾아가도 몇 번 만나기 힘든 장면이다.비스듬히 보랏빛 융단 위로 솟은 소나무가 사람 인(人)자 형상이다.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을 한 성인들의 말을 대변하듯 굵은 소나무들이 서 있다. 맥문동 군락지 옆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으면 심신이 안정되고 저절로 힐링이 되는 이유는 땡볕아래 꽃만 있어서는 느낄 수 없다. 소나무가 하는 역할이 큰 것이다.첫 날은 오래 사귄 벗과 그 꽃길에 들어섰다. 며칠 지나 두 번째로 갈 때는 새로 사귄 벗들과 함께였다. 친구들과 꽃에 취하고 저녁 어스름에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에 취해 꽃길을 거닐었다. 사람 둘이 만나서 친구가 되면 仁(인)이 된다. 仁자는 ‘어질다’나 ‘자애롭다’, ‘인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친구가 되어야지만 어질고 인자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이다.황성공원은 원래 신라시대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젊은 청년들이 만나 친구가 되어 호연지기를 키우던 곳이었다. 지금은 경주 사람들의 휴식처이다. 산책로에는 맨발로 걷는 사람, 운동기구에 앉아 몸을 단련하는 사람, 유모차를 끌며 산책하는 가족들로 늘 수런거린다. 그 위로 수령이 수백 년에 이르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이팝나무·회나무·떡갈나무·살구나무·향나무·상수리나무가 우거져 다람쥐와 청설모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쉽게 만난다.호림정 뒤로 솟아 있는 동산 위에는 높이 16m의 김유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공원 안에는 경주실내체육관, 시립도서관, 공설운동장, 충혼탑, 박목월 시비, 국궁(國弓) 궁도장 호림정 등이 있다. 2년에 한 번씩 짝수 해의 10월 초순에 이곳에서 신라문화제가 열리며, 공설운동장에서는 매년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린다.경주 황성공원은 이제 전국 최고의 맥문동 성지가 됐다. 2015년부터 심은 맥문동이 약 1만5000㎡에 이른다. 맥문동은 여름철 산과 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길 가다 보면 한두 포기 띄엄띄엄 꽃이 피어 있어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맥문동이 군락지를 이루면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백합과에 속하며 늘 푸른 여러해살이 식물이다.김순희수필가높이는 20~30cm 정도 자란다. 꽃말도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 좋은 ‘기쁨의 연속’이다. 맥문동이란 이름은 뿌리의 굵은 부분이 보리와 비슷하다 하여 맥문(麥門)이라 하고, 겨울을 이겨낸다 하여 동(冬)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잎이 난(蘭) 모양이며 뿌리는 한약재로 가래, 기침 등에 사용된다.가을에 접어들면서 보랏빛 꽃은 눈동자가 까만 열매로 변신한다. 꽃대마다 다닥다닥 붙은 구슬이 또한 볼거리이다. 꽃말처럼 여름부터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이다. 그늘에서 잘 자라는 본성 때문에 둥치가 굵은 소나무와 궁합이 딱 맞은 듯하다.보랏빛 꽃물결에 흠뻑 젖었다가 숲을 빠져나왔다. 화랑이 거닐던 그 숲에서 좋은 기운을 받았더니 친구들의 얼굴에 보랏빛 웃음이 활짝 피었다. 仁(인)을 이루었다.

2020-08-30

꽃그늘에서 시를 읊다

병산서원 대청마루에 올랐다. 입교당 뒤창을 통해 보이는 배롱나무가 붉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지난밤에 내린 빗물에 꽃잎이 화라락 떨어져 나무그늘도 붉어 졌다. 꽃그늘 아래 선 친구의 뒷모습을 찍었다. 자연과 사람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사당인 존덕사 앞에 진분홍색 꽃이 피는 풍광에 반해 일부러 병산서원을 한여름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도 그 행렬의 한 자락을 차지하려고 여름 한가운데인 8월에 찾아 갔다. 이곳에 배롱나무는 노거수로서 2008년 4월 7일 경상북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여름에 접어들 무렵 친구가 뜬금없이, “이제 필만 한 꽃은 대충 다 폈지?” 하고 물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피는 꽃의 종류가 가장 많을 때가 바로 여름인데 말이다. 농촌에서 자란 그 친구에게 벼꽃은 언제 피라고 그러냐고 되묻자, 생각 못 했다며 웃는다. 움츠린 겨울 끝에 오는 봄에 그것도 잎도 없이 꽃이 먼저 피는 벚꽃이나 개나리 진달래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도 모습도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화전놀이도 봄에, 벚꽃놀이도 봄에 하니 말이다. 반면에 짙은 녹음의 그늘에서 피는 꽃들의 노력은 잊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름에 피는 꽃 이름으로 하는 놀이는 예전에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지자체마다 꽃 축제가 제법 생기고 있기는 하다.여름 내내 피었다 지는 배롱나무는 9월까지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 한다. 그 붉고 아름다운 모습이 자줏빛 장미를 닮았다고 ‘자미화’ 라 불리기도 한다. 또 매끈매끈한 줄기를 긁으면 가지가 흔들린다고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아 서원과 양반 댁 정원에 많이 심었다. 또 오래 피고 지는 모습이 정진하며 자신을 닦는 스님들의 삶과 닮아 사찰에도 많이 심겼다. 전국 유명한 절을 여름에 방문하면 마당 중앙이나 또 연못가에 어김없이 붉은 배롱나무가 점잖게 앉아있을 것이다. 이렇듯 배롱나무는 고귀한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였다.전해지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선비가 마당에 백일홍이 붉게 피자 자랑삼아 친구들을 불렀다. 서로 앞 다투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백일홍을 노래할 때 마당을 쓸고 있던 글을 모르는 마당쇠의 귀에도 들렸다 한다. 그 싯구에 ‘백일홍백일홍’ 하는 소리가 ‘베롱베롱’으로 들려서 저 나무가 배롱나무구나 했다는 설이다.김순희수필가서원을 알리는 안내장에도 배롱나무가 한껏 꽃을 피운 여름사진이 내걸렸다. 하늘 위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 건물 담장마다 붉은 꽃 장식을 한 듯하다. 찾아간 시간이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라 우리 일행만 남고 다들 돌아간 뒤였다. 그 넓은 공간이 모두 우리차지였다. 사람들이 들어서는 입구부터 만대루 앞에 작게 파놓은 연못에도 꽃잎이 드리워져 있다.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즈려밟으며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병산서원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재이다. 마루에 퍼질러 앉아 여름을 노래하는 붉은 꽃 읽기 삼매경에 빠지기 좋은 공간이다. 류성룡(柳成龍)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이곳에 1614년경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심은 여섯 그루의 나무들이 시작이라고 전한다. 함께 간 친구와 창을 통해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오래도록 내다보았다.대청에서 보이는 장판각은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바닥 밑을 띄우고 습기로부터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강당인 입교당 대청에서 뒤창을 통해서 늘 감독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했다.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간직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장판각의 목판도 그 앞에 선 배롱나무도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었으니 말이다.네모난 창틀이 멋진 액자가 되어 여름 풍경을 완성한다. 400년 전 이곳에서 글을 익혔던 선비들의 시선으로 한 계절 피었다 지는 꽃잎을 오래 바라본다. 병산을 휘감고 흐르는 낙동강의 물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어우러져 낭랑하게 내 귓전에 울렸다.

2020-08-23

접시꽃을 그리다

수채화 교실에서 접시꽃을 그렸다.그림을 그리기 전 날, 그릴 주인공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더 잘 그릴 거 같아서 찾아보았다. 근래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래종이겠거니 했다가 자료를 보니 예상이 빗나간 걸 알았다. 신라 말에 중국에 유학 간 최치원이 ‘촉규화’란 제목으로 접시꽃을 노래한 시가 기록으로 전해진다.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6두품이라 출세하지 못하는 자신을 접시꽃에 비유했다. 중국에서는 접시꽃 잎이 아욱을 닮았다 해서 촉규화라고 했다.또 조선시대에는 어사화라고도 했다. 장원 급제자의 삼일유가(三日遊街)에 쓰였기 때문이다. 장원을 한 급제자가 삼 일 동안 부모님과 친인척,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풍속이다. 유가 행렬의 선두에 있는 인물은 붉은색 천으로 싼 합격증서인 홍패(紅牌)를 들고 가고 그 뒤로 7명의 악사가 풍악을 울리며 홍패를 든 이를 따라가고, 악사의 뒤를 이어 광대와 재인들이 재담을 늘어놓거나 춤을 추면서, 구경꾼들의 시선을 붙든다. 장원 급제자는 녹색의 단령을 입고, 복두(5E5E頭)를 쓰고, 어사화(御史花)를 머리 위에 꽂았는데, 이때 능소화와 더불어 사용한 꽃이 접시꽃이었다. 일반적으로 어사화는 복두 뒤에 꽂고, 명주 실로 잡아 맨 후, 머리 위로 넘겨 명주실을 입에 물었다.악사가 풍악을 울리고, 재인이 재주를 넘고, 춤을 추며 가는 행렬이다 보니, 삼일유가 행렬은 동네 사람들에겐 무척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여인과 아이들은 담장 너머로 행렬을 지켜보고,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들창을 열어 행렬을 구경했다고 한다. 고샅길을 내다보려고 키를 담장 높이까지 키운 접시꽃은 마치 구경에 취해 볼이 발그레한 새색시를 닮았다.경주 첨성대 앞 꽃밭에 접시꽃이 한창이다. 여름이 시작할 때 피기 시작해서 가을이 시작 될 즈음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접시꽃은 우리나라 전국에서 자란다. 화단에서만 가꾸는 것이 아니라 마을의 어귀, 길가 또는 담장의 안쪽과 바깥쪽 가리지 않고 잘 적응하고 자란다. 할머니들이 좋아해서인지 지금쯤 시골 골목길에 들어서면 흙담을 등지고 기대 선 접시꽃을 만나기 마련이다. 봄이나 여름에 씨앗을 심으면 그해에는 잎만 무성하게 영양번식을 하고 이듬해 줄기를 키우면서 꽃이 핀다. 한 번 심으면 저절로 번식해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꽃의 색깔은 진분홍과 흰색 그리고 중간색으로 나타난다. 양지바른 곳에서는 로제트 상태로 겨울을 견디어 내고 이듬해 무성하게 줄기를 곧게 뻗어 잎사귀 사이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열매의 모양이 자동차 바퀴처럼 닮아서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씨앗이 촘촘하게 바퀴의 타이어모양으로 둘러싸여 여물고 마르면 갈라지고 떨어진다. 열매의 둥근 모양이 접시를 닮아서 접시꽃으로 불리어졌다고도 하고 꽃의 모양이 접시와 비슷하게 보여 그리 불린다고도 한다. 줄기, 꽃, 잎, 뿌리를 한약재로 쓴다. 버릴 게 없다. 특히 여성에게 유익하다고 동의보감에도 전한다. 불임을 치료했다고도 하니 보기에도 좋고 사람 몸에도 좋은 꽃이다.김순희수필가수채화 선생님을 따라 붓을 들었다. 세필로 줄기를 먼저 그린다. 줄기에 잔가지를 달고 꽃 몽우리를 봉긋하게 그린다. 물을 더 섞어 잎을 그리고 난 후, 더 짙은 초록색을 찍어 몽우리 끝에 점을 찍어 준다. 이제 꽃을 피울 차례다. 분홍색과 빨강을 적당히 섞어 꽃의 농도를 조절한다. 활짝 핀 모양과 막 피려는 봉오리와 또르르 말려 떨어지기 전의 꽃을 차례로 그렸다. 접시꽃이 화면 가득 피었다.신라시대의 할머니들이 뜰에 심어 천년이 넘도록 우리 곁에서 피어나도록 잘 간직한 접시꽃이다. 꽃도 우리에게 간직되기 위해 색깔도 더 곱게, 온 몸을 영양 가득하게 키워 약재가 되었다. 자연이 아닌 사람이 꽃을 피우는 일이 쉬운 게 아닌 것이 손바닥만 한 종이에 접시꽃을 가득 그리다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더운 여름을 잘 지나가는 묘수가 그림 속에 있었다.

2020-08-09

빵안개의 나라

코로나로 인해 먼 나라 여행은 당분간 어려워졌다. 식사를 오래 거르면 허기가 지듯 여행이 고파서 10년 전 앨범을 들췄다.12시간 비행 끝에 밤늦게 이스탄불공항에 도착, 우리나라와 7시간의 시차가 있다. 현지 가이드가 내일 일정은 새벽 4시 30분에 모닝콜, 5시 30분에 식사, 6시 30분에 출발을 하겠다고 한다. 이게 무슨 이야긴지. 4시 30분부터 강행하는 여행이 어디 있는지. 그런데 그렇게 해도 다들 따라올 거라고 장담했다. 다음날 새벽, 가이드 예언대로 일어나서 씻고 아침밥 먹고, 우리는 지금 차에 앉아 있다. 이게 시차라는 거구나. 서울은 지금 오전 11시 30분이니까 내 몸은 그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패기지 여행의 묘미다.앙카라를 떠나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에 차창 밖 풍경을 찍었다. 터키사람들은 왜 넓은 들판 놔두고 산에 다닥다닥 집을 지었을까? 들판엔 밭이 넓게 펼쳐졌는데 왜 농로가 보이지 않는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사람들이 가이드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물어볼 때마다 참 대답하기 힘들다고 했다. 터키의 역사를 물어봐야 편할 텐데 난 왜 이런 게 궁금할까.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서 그런가. 와우, 들판 풍경이 컴퓨터 배경화면이다. 좋다.터키사람들 사는 집들이 우리나라 산동네 같기도 한 것이 또 부산의 언덕배기 동네를 닮았다. 카파도키아 길가에서 히잡을 쓴 아줌마가 아이를 안고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손을 드니 세워준다. 택시도 아니고 버스가 서는 것이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에서도 손님이 손을 드는 곳이 곧 정류장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내 고향과 닮아 참 정이 간다. 형제의 나라라서 그런가.스머프 집 같은 유적지 구경이 끝나니 배가 고프다. 점심 먹을 장소로 이동. 맨 먼저 스프가 나온다. 닭고기 국물에 콩가루를 푼 것 같은 맛이다. 그리고 당근, 치커리, 샐러드가 나오고 빵이 나온다. 공갈빵같이 구멍을 내면 뜨거운 김이 나오고 빵이 납작해진다. 따뜻해서 빵이 참 맛있다. 주 요리인 케밥이 나왔다. 올리브유에 볶고 소금 간을 해서 밥이 짭짤하다. 반찬이니 짜게 나오는 게 맞는 거겠지만 압력솥에 앉힌 우리 집 현미밥이 그립다. 하루밖에 안 지났건만.터키의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저녁때가 되어가니 집들마다 지붕에 나 있는 굴뚝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한다. 가이드의 말이 빵을 굽는 중이라 그렇다고 했다. 어릴 적 저녁 어스름에 동네 어귀를 들어설 때면 집집마다 밥하느라 마을이 온통 안개에 쌓인 듯 했다. ‘밥안개’였다. 그럼 저것은 터키의 ‘빵안개’인가? 달리는 버스를 세워 빵이 구워지는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김순희수필가터키여행은 인내였다.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터키에 왔더니 버스를 8시간 타고 움직이는 것은 그러려니 한다. 밥이 아닌 빵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러고 나니 그 속에 사는 사람도 그 곳을 여행하는 이도 보이기 시작했다. 길에는 자전거로 여행하는 사람. 걸어서 길을 잇고 있는 사람. 유럽이 가까이 있어서 젊은 사람들은 배낭을 메고, 나이가 들어 연금 타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처럼 관광버스로, 어떤 방법으로든 삶을 살찌우는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여행하는 동안 나는 책 한 권을 읽었다. ‘간송 전형필’, 우리문화지킴이이며 박물관까지 만드신 분의 이야기이다. 터키에 가보니 우리문화에 대해 내가 너무 모른다는 걸 더 느꼈다. 우리에게도 유네스코 등록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데. 공부해야겠다.우리에겐 스토리텔러가 필요하다. 그 작은 트로이를 전 세계 사람들이 찾아와 보게 만드는 것은 스토리의 힘이다. 우리 집 가까이 있는 장기읍성이 트로이 성보다 덩치만으로는 훨씬 크다. 그러니 수원화성은 트로이를 앞서 가야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영화로 소설로 세계인을 우리 동네로 이끌 이야기꾼이 절실하다. 잘 간직하고 널리 알려야 세계의 사람들이 보러 올 것이다. 빵안개 못지않은 밥안개의 나라 한국을 말이다.

2020-08-02

고디국

비님이 오신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눈도 비도 ‘오시네’하며 대접했다. 내 고향에서는 여름 비 오는 날에는 골부리를 주우러 갔다. 맑은 날에는 해거름에 나오기 시작하는 터라 밤에 심지에 불을 켜서 잡아야 하지만 하늘이 흐린 오늘 같은 날엔 낮부터 골부리도 마실을 나온다. 친구들과 비를 맞으며 물이 무릎까지 오는 마을 앞 냇가로 가서 돌을 들춰가며 잡았더랬다.경상도라도 안동에서는 골부리라 하고 포항 가까운 지역에서는 고디라 한다. 충청도는 올갱이, 강원도에서는 달팽이라 부르는 지역도 있고 전라도는 대사리, 표준말은 다슬기라 한다. 부르는 이름이 많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여름에 들어서면서 포항 오천장이 서는 날이면 늘 고디국을 사러 갔다. 특별히 맛있게 끓여서 파는 곳이 있어서 꼭 들렀다. 들깨와 푸성귀를 넣고 끓인다며 별다른 레시피가 없다는 사장님의 말이지만 우리 가족 모두 그 집 고디국의 팬이다.충청도가 고향인 친구가 자랑삼아 올갱이국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줬다. 5월에 고추를 심고나면 중순부터 모내기를 하고나면 소농들은 고추 따기 전까지 크게 할 일이 없어져서 6∼7월은 올갱이를 줍는 시기였단다. 냇가 중에도 햇빛이 뜨듯이 잘 받는 그런 곳에 씨알이 굵은 올갱이가 산다. 물은 너무 깊지도 않아 천렵하기 좋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 곳의 호박돌(아이들도 들춰 볼만한 수박보다 작은 크기의 돌)에 특히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서 그런 돌을 넘기면 올갱이들이 많이 붙어 있다. 손으로 건들기만 해도 떨어져서 잡기 쉽다. 큰 양파망과 세숫대야 하나씩 들고 간다. 물에 엎드려 양파망에 주워 담은 올갱이를 집까지 살려오려면 대야에 담아 와야 하기 때문이다.온가족이 나들이하듯 밥도 싸서 갔단다. 도시락이래야 맨밥을 주먹만 하게 뭉치고 열무김치와 고추장만 싸서 갔다. 줍다 지치면 나와서 새참 먹다 멱도 감으며 추스르다 양파망 가득 올갱이가 차면 돌아왔단다. 해감한 올갱이는 낡은 옷가지를 함께 넣어 바락바락 문질러서 윤이 나게 씻었다. 채반에 물기를 빼면 안테나 달린 얼굴을 빠끔히 내민다. 아는 맛은 항상 미안함을 누르고 솥에 넣고 삶아졌다.온 식구가 둘러앉아 바느질하던 바늘을 소독해서 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눈이 침침해 안 보인다고 물러앉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다 쓰러졌는데도 아침이면 엄마가 만든 올갱이국이 상위에 올랐다. 별 양념없이 된장만 풀어서 집에 있는 푸성귀로 슬렁슬렁 끓인 국이지만 식구들에게는 여름내 보양식이었고, 아버지에게는 특별히 시원한 해장국이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세끼정도 먹을만치만 끓였고 또 며칠 뒤 나가서 잡아오는 식으로 여름내 올갱이국을 먹었다고 한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다슬기에 대하여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식품이라 하였다. 초록을 띠는 엽록소에는 식물 10배의 클로로필이 있다. 간에 좋고 눈을 밝게 한다니 만병통치이다.김순희 수필가포항에서는 고디를 삶은 물에다가 들깨국물을 넣고 특히 정구지(부추)를 많이 넣는다. 음력 정월부터 구월까지 김치를 담서 우리네 밥상을 채워준다 하는 정구지와 밭에서 나는 배추시래기·양파줄기·파 등을 더 넣고 끓이다가 고디 살을 넣으면 국이 완성된다. 여름철에 보리밥과 함께 겻들이면 더욱 별미이다.먼저 내온 버섯무침을 맛보며/ 올갱이 잘 줍던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푸근하던 웃음과 눈매 떠오르고, 올갱이 줍던 그 희고 통통하던 종아리들 생각나고,/ 저녁상 물린 뒤 삶은 올갱이 옷핀으로 빼먹던 생각 나고/ 이빨로 올갱이 꽁지 뚝 땐 다음 단번에 쪽 빨아 먹던 형님들 생각나고/ 나도 따라 해보다가 이 아파 쩔쩔매던 생각도 나다가/ ‘영동에서’ 일부(김사인)영양군 청기면에서는 골부리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영양으로 달려가 종아리 걷고 골부리 잡는 체험을 해볼 작정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도 불러서 말이다.

2020-07-26

담장

세상에 나올 때부터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 우리는 처음부터 담장이 익숙했다.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햇볕이 따뜻하게 데워 놓은 담장에 기대 놀았고, 친구와 담 밑에서 숨바꼭질하며 키를 늘였고, 부지깽이를 든 엄마에게 쫓겨 줄달음치다가 잠시 흙담 모퉁이에서 가쁜 숨을 고르기도 했다. 담장은 골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우리에게 안겨주었다.청송 덕천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햇살에 바랜 흙담이 맨 앞에 서서 구경꾼들을 안내한다. 홍살을 단 솟을대문을 슬며시 밀자 ‘꿔이익’ 닭 울음 닮은 소리를 낸다. 근방에 송소고택만큼 품 넓은 집이 없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렸다는 심호택이 1880년경 호박골에서 본래 살던 덕천리로 이전하면서 지어졌다.너른 마당에 들어서니 제일 먼저 헛담이 우릴 반겼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외출이 잣지 않던 여인들이 뭇 남정네가 앉아 있는 앞을 지나 안채로 가는 게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아녀자를 배려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내외벽인데, 바깥주인이 머무는 사랑채에서는 드나드는 사람들을 살짝 가려 보이지 않게 했다. 병풍을 두르듯, 가리개를 세운 듯 ‘ㄴ’ 자 모양으로 돌아앉은 모습이 수줍은 새색시 같다.이집에는 담이 유독 많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높은 담이 행랑채를 끼고 집 전체를 휘감았고, 남자는 사랑채에 여인네들은 안채에 따로 살게 나누는 흙담이 있고 노소 또한 구분해 놓았다. 남자아이는 일곱 살이면 어미가 사는 안채에서 나와 아버지가 기거하는 작은사랑채와 할아버지 슬하인 큰사랑채에서 글을 배워야 했다. 여자아이는 별채를 따로 두고 신부수업을 시켰다. 별채 담장에 달린 문이 특이하다. 보통의 대문이 집안으로 열리는데 비해 이 대문은 밖에서 잠그고 열 수 있게 설계했다. 시집가기 전에 그 담장 밖으로 함부로 나오지 말라는 뜻이었다.조선의 여성들이 풍성한 치마아래 고쟁이에 속속곳까지 여러 겹의 속옷을 받쳐 입었듯, 이 고택의 솟을대문에서 안방까지 가기 위해서는 여러 문을 거쳐야 한다. 그런 여인에 대한 배려인가, 만석꾼의 여유인가. 사랑채와 안채를 가르는 담장에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랑채에서 보면 여섯 개의 구멍이고 안채에서 보면 세 개의 구멍이다. 셋이 여섯을 이기는 기적이 이 담장에서 일어난다. 여섯 개의 구멍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지만 안채의 세 개의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망원경처럼 사랑채 마당을 살펴볼 수 있다. 옛날 이곳에 살았던 안주인은 세 개의 구멍으로 비껴서 여섯 개의 구멍 앞을 거니는 사돈댁에 다니러 온 아비의 뒤태를 보고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지척에 친정아비를 두고도 부르지 못하니 고된 시집살이에 대해 넋두리를 담장에게 털어 놓으며 수많은 계절을 보냈을 것이다.담을 생각해낸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민들 속의 담은 그들과 달랐다. 분명 ‘내’와 ‘네’는 겉모습이 다르지만 써 놓고 읽으면 같은 소리가 난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우리는 내 집 네 집 구분 없이 드나들었다. 울타리 때문에 친구 집에 못 가는 일은 없었다.김순희수필가공간을 나눈 담장이 많아 자칫 답답하게만 느껴질까 봐 송소고택의 주인장은 지혜를 발휘해 흙담에 꽃을 그려 숨통을 터 주었다. 꽃담은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은근한 맛이 배어난다. 해의 양기와 달의 음기를 불어넣어 꽃을 피우고, 새를 불러들이며, 풍성하게 열려있는 과실을 표현하여 담이 곧 정원이 되었다. 깨진 기와와 돌을 꾹꾹 눌러 박은 소탈한 치장은 조선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설치미술이다. 담장이 긴 이야기책이라면 꽃담은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첩을 닮았다.고택 마당을 돌아 나오니 어느새 배추흰나비 한마리가 담장에 찾아왔다. 기와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날개로 여름을 접었다 폈다하기를 쉼 없이 반복한다. 오래 간직한 고택 담장에 내가 다녀간 이야기를 한켠에 그려 넣는 듯하다.

2020-07-19

타고난 여행자 모감주

문득, 바닷가로 길을 잡았다.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노오랗게 부채 같은 손을 펼쳐든 가로수의 행렬이 마중을 나왔다. 모감주 꽃이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지난밤 내린 비는 산책길을 모감주꽃잎이 만든 황금비로 물이 들였고, 나무가 서 있는 발치에 노란 카펫을 깔아놓았다. 여름나무 영화제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 꽃길을 걸었다.모감주나무는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닳거나 줄어든다는 뜻에서 모감(耗減)이라고 하고,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에 염주나무라고 한다. 노란색 꽃이 하늘에서 아니 나무에서 떨어질 때면 그야말로 황금비를 맞는 기분이다. 그래서 Golden Rain Tree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포항시 동해면 발산리에는 군락지가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곳이 어디인지 찾기 힘들지만 꽃이 피는 6월에서 7월에 만개할 때면 멀리서도 황금빛 꽃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지금이 꽃놀이하기에 가장 좋은 시절이다. 고개를 들어 모감주나무 꽃을 올려다본다. 노란 깃털에 자그마한 꽃들을 줄줄이 달고 있는데 쫑긋 뒤로 젖힌 꽃잎 안에는 붉은 점을 품고 있다. 홍옥 같은 색점이 노란 꽃의 색을 더 짙게 만든다.꽃말은 자유로운 마음, 기다림이다. 모감주의 씨앗이 이런 이름을 낳게 했을 것이다. 초여름의 열매는 피망같이 부풀어 오른다. 공기가 한껏 들어있어 작은 풍선을 나무에 매달은 듯 보인다. 갈색에서 진갈색으로 열매의 껍질은 바짝 말라간다. 그리고 드디어 세 갈래로 갈라진다. 갈라진 한 껍질에는 두서너 개의 씨앗이 붙어 있다. 바람은 씨방을 분리시킨 뒤 날려 보낸다. 씨방의 형태는 바람을 잘 받을 수 있는 구조여서 120미터까지 날아갈 수 있다. 드디어 출항할 때가 다가왔다. 씨방은 바람을 받는 바람개비이자 물에 뜨는 보트이다. 모감주는 이 껍질을 파도에 실어 보내려고 바닷가 근처에 군락지를 이루었다.모감주는 여행자이다. 여행자의 본분을 몸 안에 새겨 넣었는지 여행에 필요한 도구를 안고 태어났다. 껍질은 어느새 열매를 나르는 돛단배가 된다. 모래톱에 정박도 하지만 잠시 뿐이다. 그리고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을 향한다. 가을에 씨앗은 열매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돛단배가 되어 작은 그리움을 담은 까만 눈동자를 싣고 그리운 나라로 간다.모감주 씨앗이 바다를 건너 육지에 도착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겨울 편서풍을 만나야하고 다섯 달 이내에 3500킬로미터를 이동해야 성공한다. 이모든 조건이 맞아야 꽃을 피운다. 하지만 모감주 씨앗은 이 험난한 모험을 선택했고 성공했기에 포항시 동해면 발산리에 자신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군락지의 가지를 잘라 환호동 해맞이 공원 여기저기에 또 바닷가 산책로에 노란 꽃등을 내걸었다. 군락지가 확장된 것이다. 꽃이 혼자 애쓰던 일을 포항 사람들이 거들고 나섰다.김순희수필가천연기념물 제371호로 지정하여 보호받는 모감주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도끼질을 하면 나뭇결 따라 쪼개지는 보통 나무들하고 달리 코르크나무처럼 부서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땔감으로써 가치가 썩 없었을 것이다. 사실 모감주나무는 밀원식물이다. 꽃이 활짝 피면 꿀벌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 그런 가치는 미처 몰랐고 이 나무가 세계적으로 희귀종이라는 것도 미처 몰랐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땔감으로써의 가치 없음이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2018년 9월 평양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 심은 나무도 바로 이 모감주나무였다.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리라 굳게 믿으면서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왕에서 서민까지 묘지의 둘레에 심을 수 있는 나무를 정해 주었다고 하는데 모감주나무는 학덕이 높은 선비의 묘지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 잎과 꽃으로 염료도 만든다니 꽃처럼 어여쁜 옷으로 탄생하리라 상상을 해본다.노란빛의 여행자 모감주의 계절이다. 꽃길만 걸어도 좋은 여름이니 모감주 따라 길을 나서야겠다.

2020-07-12

경상도 사투리를 간직해 주꾸마

“어마야, 이기 무신일이고/가시개로 끄내기를 짜르고/보루박꾸를 열었디마는/모티 있는 꿀캉 지렁도 꺼꿀고/여불때기 메루치 코짱배기에도/양가세 있는 오그락지에도/늙은 호박 몸띠 우에도 노랑 꽃가리분/중략”(구순희 시인의 ‘우끼는 택배’중)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이해 가능한 시이다. 가위로 택배박스를 자르니 꿀과 간장이 뒤집혀있고, 무말랭이와 호박 위에 송화가루 봉지가 멸치에 찔려 노랗게 덮고 있는 것을 묘사했다.백석 시인 또한 고향 사투리로 시를 썼다. ‘여우난곬족’이란 시에는 오리치(오리잡는 도구), 반디젓(밴댕이젓), 술국막질(숨바꼭질), 조아질(공기놀이)같은 시인이 살던 그 시대에 살아 숨 쉬던 말로 써서 지금의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지금 평안도 말이 백석이 노래했던 시와 같지 않고 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기록한 덕분에 평안도 사투리를 읊조릴 수 있다.사투리는 작가들에게 글의 중요한 소재이다. 자기가 나고 자란 곳의 말이기에 작가의 마음을 서술하기에 표준말 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표현일 것이다. 평안도 사투리가 나올 때마다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랬더니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웠다. 사투리란 것이 입말이니 일부러 기록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만다.어느 해 늦가을, 신작로에 나가니 저 아래 점방 근처에 사는 동네 오빠가 저만치 앞서 가는 친구를 향해 손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양아~, 여 유꾸 캤나?” 게릴라전 하는 투사들의 암호 같은 이 말은 “재양아, 너희 집 무를 캤느냐?” 라는 뜻이다. 친구이름을 줄여 양, 너희가 여, 무는 안동 사투리로 유꾸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그 오빠의 말투가 재밌어서 친구들과 며칠을 깔깔거렸었다.내가 살았던 동네에서만 사용하던 말이 하나 더 있다. ‘오케라’, 친구의 말이 진짜냐고 되물을 때 사용한다. “앞 집 얼라가 꼬닥거리다가 질바닥에 온 얼굴을 갈아부쳤단다.”“ 오케라?”“ 얼굴이 그래가 아치라바 몬 보겠다.” 앞 집 애가 까불다가 길바닥에 넘어져 얼굴에 생채기가 생겼다. 진짜? 얼굴이 그렇게 되어 안쓰러워 차마 보기가 안타깝다 이런 뜻이다. 오케라는 오른손처럼 ‘옳다’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싶다. 옳게라 하다가 받침은 떼어먹고 오케라만 발음하게 되었을 거라 짐작한다.‘아치랍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안쓰럽다의 사투리로 나온다. 하지만 안쓰럽다란 말로 퉁치기엔 뜻이 조금 모자란다. 아슬아슬한 것이 위태롭고 조마조마하고 안되 보여서 못 보겠다는 마음을 더 보태야 한다. 그렇게 길게 표현해야 아치랍다의 늬앙스를 다 담을까 말까다. 그래서 글을 쓰다 어느 순간에는 안쓰럽다 안타깝다 대신에 아치랍다라고 써 넣기도 한다. 내 글의 독자는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니까 하고 말이다.김순희수필가‘다라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라서 큰대야로 바꿔 쓰라고 하지만 할머니에서 엄마로 이어져 내게 오기까지 다라이는 큰대야와는 다른 쓰임새였다. 대야는 세수할 때나 쓰지 김장 담그려고 배추 서른 포기를 소금물에 절일 때 쓰지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큰대야는 다라이를 대체하기엔 조금 버겁다. 지분대다(귀찮게 하다), 기지기매지기도 없다(움직임이 없이 조용하다), 불부다(부럽다),쭉담(뜰)…….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사투리가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들을 때마다 하나씩 적어 놓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십상이다.20년 넘게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만 했다. 제사상도 생일상도 시키는 대로 차렸다. 하지만 이제 어머님이 안 계신다. 시부지기(슬그머니) 귀찮은 음식 하나씩 빼 먹기도 하고, 맥지(공연히) 가족들이 좋아한다는 핑계로 새로운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기도 한다. 짜달시리(그다지) 따지는 형제도 없어 이제 집안 대소사는 내 쪼대로(마음대로) 해도 된다. 사투리도 글에 슬쩍 끼워 넣듯이 말이다. 그래도 자꾸만 어머니 말씀이 내 귓가를 맴돈다. “잘한다 잘한다카이 행주에 풀한다드니만.” 꾸중하는 소리도 얼른 받아 적었다.

2020-07-05

맑은 시냇물(淸河)에 흐르는 숲

“유월 하루를 버스에 흔들리며/동해로 갔다//선을 보러가는 길에/날리는 머리카락//청하라는 마을에 천희(千姬)/뭍에 오른 인어는 아직도 가만히 머리카락이 젖어있었다(중략)//지금도 청하라는 마을에는 인어가 살고 있다”(박목월 시인의 ‘청하’ 중에서)산천이 푸른 여름이다. 목월이 어느 해 유월 고향 경주 모량에서 비포장길 덜컹대는 버스를 타고 포항 청하로 천희와 맞선을 보러 왔던 사연을 시로 썼다. 인어가 살고 있다는 청하는 푸른 산, 맑은 물의 고장이라는 이름처럼 바다 같은 푸른 숲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 곳에 머리카락 젖은 인어가 유유히 유영할 듯하다.여러 개의 숲이 있지만 그 중에 관송전을 찾았다. 은행나무 가로수를 따라 들어가니 청하중학교가 나타났다. 해질 무렵이라 학생들이 하교한 후의 교정은 솔바람만 서성일 뿐이었다. 목월의 인어가 어디쯤 숨어있을까 싶어 숲을 기웃거렸다. 소나무 사이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아서 천천히 소나무향을 맡으며 삼림욕을 즐기기에 좋았다. 관송전은 관덕관송전(觀德官松田)의 준말로 솔밭을 의미한다. 조선 세종 때 청하 현감으로 부임한 민인(閔寅)이라는 사람이 바람을 막고, 홍수에 대비하며 관에서 쓰는 목재 조달에 쓰려고 조성했다. 오랜 세월 큰 기여를 했던 숲은 지금의 장관을 연출하기까지 시련도 겪어야 했다. 연산군, 선조, 고종 때 이곳에 부임한 탐관오리가 자신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나무를 함부로 벌채해 숲을 훼손시킨 기록이 남아있다. 세상이 어수선할 시절에는 꼭 소나무가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백성들과 소나무가 똑같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게 우리 민족이 소나무를 특별히 사랑하는 이유 같아서 가슴이 아렸다.원래 이 숲의 동북쪽에 활쏘기 훈련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술로서가 아닌 덕을 품고 과녁을 봐야 한다는 의미를 살려 관덕(觀德)이라 하고, 관송전(官松田)은 이름 그대로 관 소유의 솔밭이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벌채되거나 개간돼 약 10㏊에 달하였던 숲이 현재는 0.8㏊에 500여 그루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숲이 훨씬 넓었다고 하며 현재 학교 주변으로 들어선 건물위치도 전부 숲이었다고 한다.이 숲은 청하중학교를 품는 형상으로 마치 학생들을 감싸 안은 어버이 품처럼 이들에게 맑은 기운을 주기에 충분하다. 청하중학교의 소나무 수령은 80~200년 가까이 된다. 교실 앞에 철쭉은 내 키보다 크게 자랐고, 감나무에 감꽃이 애기손톱만해서 감이 열리면 어떤 크기일지 궁금했다. 여름은 수국의 계절이라고 수줍게 주장하듯이 산수국 여러 그루가 식당 앞에 얌전히 앉았다. 그 외에도 이팝나무, 층층나무, 멀구슬나무, 모감주나무, 벽오동나무 등속의 나무들이 산책로를 따라 길을 안내하고 섬초롱, 금낭화, 참나리, 구절초, 쑥부쟁이, 해국 등 40여 종의 야생화가 150평 규모의 꽃동산을 장식하고 있어서 학생들과 함께 어우러져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숲을 보여준다.김순희수필가청하중학교와 기청산 식물원은 서로 이웃하고 있다. 식물원 주차장과 맞닿은 곳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세워졌다. 생각 없이 숲을 훼손한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 보라고 웅변하는 듯하다.예부터 어른들은 큰 나무 밑에 큰 나무가 자라니 우리 땅 곳곳의 노거수는 반드시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했다. 참 다행인 것은 거대한 숲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러주어야 한다며 관송교육재단이 숲을 인수해 이곳을 잘 보전하고 있어서, 2000년도에는 이 숲이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학교 숲 부문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기도 했다.숲은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미친다. 시인에게 시향을 떠오르게 하고, 젊은이에게는 꿈을 키우게 만든다. 숲(林)이란 한자어를 보면 나무 두 그루가 손을 잡고 섰다. 한 그루 한 그루씩 심어서 숲을 이루라는 천명 같다. 우리가 이룬 그 숲에 인어가 오래 머무를 수 있길 기도한다.

2020-06-28

신나라 레코드

턴테이블을 샀다. 오래전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분리수거 해 버렸는데 쇼핑몰에서 아담한 녀석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다. 굵직하고 낮은 목소리의 올드 팝에 이끌려 가보니 LP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가끔씩 지직거리는 소리가 정겨워 한참을 멈춰 서서 들었다. 쇼핑목록에 없었지만 사지 않으면 눈에 밟힐 거 같아 업어와야만 했다.이 녀석은 자세히 보니, 최첨단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LP판을 돌리는 건 기본이고, CD를 넣는 곳도 있었고 USB도 꽂는 데가 따로 있고, 라디오 채널을 잡는 다이얼이 있어서 소리를 높일 때 사용하기도 했다. 블루투스 기능도 있어서 스마트폰에 저장된 노래도 받아 전해준다. 더 깜찍한 것은 지금은 거의 모든 기기에서 사라진 마그네틱테이프를 재생하는 기능이었다. 턴테이블이 아니라 어벤져스였다.친구 정덕이가 집안 정리한다며 오래된 LP판을 수십 장 가져와서 쓸데 있으면 쓰라고 해서 보관한 것이 산울림, 신승훈, 김현식…. 열 개 정도 된다. 소리로 재생할 기계가 집에 없는데 뭐 하러 들고 왔냐는 남편의 타박에 추억의 책갈피처럼 사용하면 되겠지 했는데 이렇게 턴테이블이 다시 생길지 나도 몰랐었다.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에 나팔 모양을 단 축음기가 있어서 제삿날에 친척들이 모이면 LP음반을 올려 들려주셨다고 한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니 캐나다에 선교사로 나가 오래 사신 용출삼촌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이라고 문자로 보내왔다. 그때 할아버지는 누구의 노래를 들려주셨을까? 기계 하나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기억까지 소환했다.새로 들인 어벤져스를 이용해 보리라. 레코드가게에 가보기로 하고 검색을 했더니 포항에 ‘신나라레코드’란 가게가 있었다. (구)해변레코드란다. 학창시절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라 무지 반가웠다. 좋아하던 가수의 신곡이 발매되자마자 가서 테이프를 샀던 곳이다. 이문세의 4집, 5집을 하도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 났었더랬다. 라디오에 좋아하는 노래가 샘물처럼 흐르면 공테이프에다 퍼 담듯 모았었다. 특히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와 ‘별이 빛나는 밤에’가 자주 찾던 옹달샘들이다.시내 가장 번화가 중앙로 292-1번지에 자리 잡은 레코드가게, 매장이 제법 넓었다. 테이프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몇 개 골라서 물어보면 판매하지 않는다는 게 더 많았다. 연도가 가장 오래된 것을 보니 1977년에 대도레코드사에서 만든 판소리춘향가였다. 인간문화재 박초월 외 여러 분의 사진이 뒤표지에 있고 앞표지는 신성일과 이름을 모르겠는 여배우가 출연한 춘향전의 한 장면이 그려진 포스터였다. 남편 말이 저 사진에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한다.오늘의 국가기념일 음악 테이프도 사왔더니 이건 뭐에 쓰려고 샀냐고 웃었다. 개천절노래 반주,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음악 같은 제목이 길가다 멈춰 서서 국기 강하식을 하던 그때를 떠올리게 해서 샀다. 테이프는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장님의 말이 가진 거라도 잘 간직하세요라는 말로 들려 더욱 사게 됐다.LP판이 벽면 가득했지만 비매품이었다. 또 다른 코너에는 CD가 가득했다. 최근에 나온 아이돌 가수의 앨범은 책 같기도 하고 디자인이 다양해서 팬도 아닌데 소장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들은 레드벨벳의 한정판 앨범을 구입했는데 브로마이드가 사은품으로 딸려왔다.여고시절 드나들던 가게에서 아들과 같이 한나절 놀았다. 내가 좋아했던 노래와 가수 이야기를 해주며 아들이 군대에서 선임이 하도 즐겨 들어서 자기도 좋아하게 된 여자 아이돌 그룹 음악도 나누었다. 노포가 많이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였다.계산대에 고르고 고른 테이프와 CD를 올려놓고 기다리며 보니 두 손이 세월의 먼지가 묻어 새까맣다. 몇 년 전의 먼지일지 그것조차 정겨웠다. 거기 있어줘서 감사해요, 오래 버텨주세요. 사장님께 부탁의 말을 남기고 돌아왔다.

2020-06-21

상서로운 집

영양은 경북에서는 오지 중에 오지이다. 육지 속에 섬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첩첩산중이다. 예전엔 포항에서 가려면 3시간은 걸리니 쉽게 나설 수 없는 곳이었지만 영덕상주간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니 옆 마을이 된 듯하다. 한걸음에 달려갔다.전국에서 가장 공기가 깨끗하고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다. 가는 곳마다 경치 좋은 명승지요, 그 속에 품고 있는 문화재도 많다. 산이 깊으면 물이 많은 것인지 차를 타고 달리는 내내 어디나 내가 흐르고 내에 엎드려 다슬기를 잡는 어르신들이 눈에 뜨였다.오지라 해도 역사가 깊은 곳이다. 신라 때 고은(古隱)이라 불렀으며, 고구려 장수왕 때 잠깐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신라에게 돌아왔고 이후 영양(英陽)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조선시대 대표 정원인 서석지다. 오래전에 찾았을 때에는 없던 주차장이 생겼고, 담장을 새로 단장하는지 7월 2일까지 ‘공사 중’이라는 팻말이 섰다. 그래도 아쉬워 잠시 들어가 봐도 되냐고 물으니 포클레인이 길을 비켜주었다.들어가는 문이 옆으로 놓였다. 왜 이렇게 돌아가게 해 놓았는지는 마당에 들어서면 알게 된다. 마당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하다. 마당 전체가 연못이니 말이다. 마당이 없는 것에 한 번 놀라고 연못의 풍경에 또 놀라게 된다. 여름에 가면 분홍빛 진한 연꽃이 만발해 이 동네가 연꽃을 심은 연못이라는 ‘연당리’라고 이름 붙여진 연유를 알게 된다.반변천 지류의 개울을 이용해 물을 끌어들이고 자연석의 오묘함을 최대한으로 살려 지은 집이다. 근처의 풍광을 외원으로 삼아 조선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멀리 있는 보길도 세연정과 담양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에 들어가는 서석지, 광해군 때 정영방이라는 사람이 만든 조선 전통 정원으로 중요 민속 문화재 제108호이다.정원 풍경의 압권은 400년이 훨씬 넘게 이곳을 지킨 은행나무다. 아마도 서석지 역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담장에 기댄 가지들은 담을 벗어나 마을 입구에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의젓하게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품새다. 벌어진 가지에 은행 알이 떨어져 싹을 틔워 나무에 어린 나무가 자랐다. 자식을 품은 어미의 모습이다. 여름에는 연꽃을 보러 가고 가을에는 금빛 찬란한 은행나무를 보러 이곳에 가야한다.김순희 수필가은행나무를 돌아 연못 북쪽에 자리한 주일재(主一齋, 서재) 앞에 선다. 네모난 단을 만들어 매화(梅),소나무(松),국화(菊),대나무(竹)를 심어 벗하였다. 사우단(四友壇)이다.‘매란국죽’이라 하여 사군자를 뜻할 텐데 난 대신 소나무를 심어 ‘매송국죽’이 되었다. 또한 서석지를 유명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연못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위 같은 돌(瑞石)이다. 울퉁불퉁 솟아난 60여개의 서석들은 때로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상서로운 돌이란 뜻으로 정자의 이름이 되었다. 서석지의 주인공이다. 저마다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연못의 물은 북동쪽 귀퉁이로 흘러 들어와 남서쪽으로 흘러나가도록 되어 있다.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감상하고 이제 경정이라는 현판이 있는 정자에 올라 가 본다. 보는 방향에 따라서 경치가 달리 보인다. 경정(敬亭)의 경은 성리학의 처음과 끝이다.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고 가지런히 하는 것이 경이라고 한다.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시원한 마음이 절로 든다. 몇 해 전 이곳에 올라 지인들과 두런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서늘한 바람과 함께 소나기가 닥쳐왔다. 유월의 한낮의 뜨거움을 식히고 사라진 소나기로 주위가 더 고요해져 마루에 누워 한나절을 즐겼었다.오래된 건물에 들어가는 일은 타임머신을 타는 일이다. 시간은 다르지만 경정에서 글을 읽고 제자를 키우던 주인의 숨결을 느끼며 나도 한순간 조선의 선비가 되어본다. 낭랑한 시 읊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온다.

2020-06-14

26년 된 전자레인지를 버렸다. 콘센트에 꼽혔던 플러그를 뽑을 때마다 뻑뻑하니 쉽게 놓아 주지 않아 힘껏 잡아당기다보니 전선이 살짝 드러나 위험했다. 또 오래 사용하다보니 레인지 속이 데우던 음식이 끓어 넘쳐서 얼룩투성이가 되었다.하지만 쉽게 버리지 못했다. 물건에도 감정이입을 하는 편이라 그렇고 사연이 있는 물건은 더더욱 못 버린다. 이 전자레인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주셨다. 남편과 신혼여행을 다녀와 신접살림을 날 때 필요한 게 무어냐 묻고 싶으셨는지 시동생을 보내 신혼집을 확인하게 하셨다. ‘살림이 뭐 뭐 있드노?’ 하시면서.결혼할 그 즈음 무척 가난했었다. 쥐꼬리보다 작은 월급은 엄마에게 모두 드려 집안 살림에 보태야했기에 차비조차 받아썼다. 아직 학생인 남동생이 둘이라 쪼들리는 엄마는 내 월급으로 결혼 자금 같은 이름으로 모아 둘 형편이 못 됐다. 아버지 혼자 벌어서 다섯 가족이 살아가기에 엄마의 가계부는 늘 숨이 찼다.남편과 사귀기 시작하며 그 달치 월급부터 내가 쓰겠노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몇 달 나와 말을 섞지 않았었다. 불편한 하루하루를 버티며 모은 돈으로 겨우 기본 살림을 장만할 수 있었다.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셋 다 작은 크기로 그것도 한 시즌 지난 이월 상품으로 하니 반 가격에 살 수 있었다. 장농과 삼단서랍장은 번듯한 이름표도 달지 못한 채 실려와 신혼살림의 구색을 맞추고 있었다. 25평 아파트가 휑하니 30평으로 보였다. 그 살림에 어머님이 전자레인지를 보태신 거다. 새로 들어온 며느리에게 가져온 지참금이 적다고 잔소리 하나 없이 부족한 구석을 채워주셨다. 그날 어머님도 똑같은 걸로 시댁에 처음 신문물을 들이셨다. 그렇게 양쪽 집에서 26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다.낡고 선이 드러나도 음식 데우기만 하면 되기에 버리지 말자고 남편을 졸랐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며 리모델링하려고 이사하는 날 과감히 종량제스티커를 붙여서 버려버렸다. 무엇을 간직하려면 누가 뭐라고 해도 버티는 뚝심이 있어야 한다. 내겐 그게 부족했다. 부족한 마음이 후회가 된 것은 며칠 후였다.잠시 머무는 아파트에 이사를 해놓고 시댁에 다니러 갔다. 아버님 댁에 새 전자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고 여쭈니, 며칠 전 그냥 불이 들어오지 않더란다. 고장이 나버린 것이다. 우리 집 것을 버리던 그즈음 어머님 것도 생을 마감해버렸다는 것이다. 우연일 것이다. 그래도 눈이 시큰했다. 만약에 어머니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들이 선물한 전자레인지였다면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어 쓸모가 없어졌더라도 무엇이든 넣어두는 보관함으로 변신시켜서 살려두셨을 것이다. 집안에는 어머님이 그렇게 들였다가 붙박이가 된 물건들이 쌓여있다.김순희수필가골동품이 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태어난 지 오래되어야 하고 희귀한 물건이어야 한다. 두 가지 이유가 달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흔한 물건이라도 오래 쓸고 닦아 보관하면, 시간이 희귀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남들이 다 분리수거 할 때 아끼고 살펴 보관해야 골동품이 되는 것이다. 어머님은 사람도 물건도 아끼는 분이셨다. 어머님이 내게 처음 사주신 선물을 그냥 떠나 보내버린 것이다. 내가 놓아버린 그 끈 끝에 어머니가 계셨다.한 달여 집을 고치는 동안 남편과 나는 새살림 장만에 들떴다. 장농은 붙박이장으로 맞추고, 침대와 소파를 보러 돌아다녔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훌쩍 지나 새집에 입주했다. 집을 새로 단장한다는 소식에 가까이 사는 경희가 전자레인지를 선물했다. 멀리 수원 사는 정원이가 에어프라이어를 보내왔다. 또 다른 끈이 내게로 와 손을 잡는다. 이 소중한 인연의 끈이 끊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을 버티도록 매일 쓸고 닦을 것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 집의 골동품이 되도록.

2020-06-07

기억의 향기

한 자리에서 몇 십 년 음식 장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골이 많이 생길 때까지 지치지 않아야 하고, 제대로 된 맛을 유지해야 하고, 무엇보다 주인장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그 자리를 지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30년 동안 커피를 내려온 가게가 있다. 포항 죽도시장 가까이 상가들이 어깨를 맞댄 거리에 아담한 양옥 한 채가 얌전히 앉았다. 붉은 장미넝쿨을 울타리에 얹고 ‘아라비카’라는 동그란 명찰을 마당가에 세워놓지 않았다면 손끝이 매운 주인이 정원을 잘 꾸며 놓은 가정집으로 보일 뿐이다.가게로 오르는 계단참에는 분홍낮달맞이가 도란거리고, 한 발 올라서니 벌이 열심히 꿀을 따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문지기처럼 지키고 섰다. 하얀 꽃이 미리 진 곳엔 작은 열매가 달렸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열매가 빨갛게 익은 또 한 그루가 손님을 맞는다. 커피나무였다. 나무를 보고 예뻐서 카운터에 선 주인장에게 직접 키운 것이냐 여쭈니 ‘저 혼자 컸지요.’ 한다. 1991년에 카페를 시작할 때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냐는 질문에도 ‘그냥 먹고 살려고 했지요 무슨 큰 뜻이 있었을까요, 하다 보니 좀 더 좋은 맛을 내려고 커피에 대해 공부하게 되고 원두도 직접 골라서 로스팅 하는 법도 배우다보니 지금껏 하고 있다’고 했다.실내는 30년 전 처음 찾았을 때 그대로다. 살림집으로 지은 지 10년 된 건물에 유리창만 달아내 가게를 열었다. 그 후 30년이 지나도록 벽지만 가끔 새로 할 뿐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벽지도 다시 찾아온 손님이 생경해하지 않도록 비슷한 분위기로 한다는 말에 아, 이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구나싶어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카운터 옆 박스형 코너에는 커피를 드립 하는 남자 그림이 걸렸다. 주인장을 그린 그림 같다고 했더니, 서울에 사는 여대생이 잡지에 인터뷰한 모습을 보고 커피로 그림을 그려 보내왔더란다.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 걸어두고 본단다. 그러면서 ‘이 박스가 뭔지 아시죠?’라며 되묻는다. 자세히 보니 지역번호가 표시된 전국지도가 붙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다. 공중전화박스였다. 머지않은 과거에 이곳에 줄을 서서 오지 않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8282라고 삐삐를 쳤었다. 공중전화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없애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어서 우리를 그 기억속의 그날로 데려간다.마침 스피커에서 ‘I love coffee, I love tea’가 울려 퍼졌다. 갈색 진한 커피향기도 따라 울렸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예쁜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릴 잡았다. 안주인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몇 쪽이나 될 만큼 다양한 커피와 티 종류라 취향에 맞는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카페인에 약한 나는 순한 맛으로 골랐다. 요즈음 대부분의 카페와 달리 이집에서 손님은 마냥 제자리에서 수다만 떨어도 커피를 가져다준다. 아주 매력적이다.김순희수필가커피를 내리는 사이 추억여행을 했다. 오래전 같은 자리에서 소개팅을 했다는 L양, 서울에서 포항으로 출장 온 아가씨를 이곳으로 데려와 점수를 딴 K군. O양은 늘 커피 값을 내고 거스름돈으로 교회헌금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빳빳한 새 돈을 은행에서 바꿔와 나가는 손님에게 봉투에 고이 넣어 건네주는 이집만의 좋은 풍습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되도록 새 돈으로 거슬러주려고 한다며 금고에서 꺼내 보여주는 모습에 변함없는 친구를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다.안주인이 내려 준 커피 맛도 변함없다. 나오는 길에 박물관을 방문한 듯 로스팅한 ‘브라질 파젠다 프로그래소’ 알갱이를 기념 굿즈로 샀다. 천장까지 닿아 붉은 커피콩을 한껏 달고 있는 나무가 부러워 묘목 한 그루도 샀다. 다 익은 콩을 심어서 50여일이 지나야 싹이 튼다는데 2년의 시간을 간직한 녀석으로 골라 업어 왔다. 한 잔의 커피와 한 그루의 나무를 안겨준 카페 아라비카는 우리의 청춘이 묻어있는 곳이다.

2020-05-31

내 삶의 밀푀유

사십 년 넘게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성경 한 장을 읽고, 한 구절을 기록하고 잠시 기도하는 걸 몇 년째 계속 했다. 오래 쌓은 시간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지진이 났을 때 무엇을 챙겨서 나가야 하나? 친구는 두 아이의 어릴 적 앨범을 들고 뛰쳐나갈 거라고 했다. 가까운 경주에 경고장처럼 지진이 나고 다음 해 빚쟁이 쳐들어오듯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그 순간에 집에 머물지 않아서 무얼 챙겨야 하나 고민도 필요 없었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나도 대피용 작은 배낭을 챙기기로 하고, 무얼 넣어야 하나 생각했다. 어릴 적 아이들 사진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 몇 장 골랐다. 그 다음은 뭘까, 차곡차곡 모아 간직해온 일기장이 떠올랐다.40년 전에 쓴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새마을 일기’ 라는 제목이 시대가 언제쯤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6학년 2반 42번이었던 내 일기장이다.1981년 6월 27일 토요일 날씨 흐림. 아침인사(0), 저녁인사(0)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했는지도 기록에 남겨야 했나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썼다. 같은 반 친구 수미가 쓴 쪽지편지로 인해 찬호, 시열이, 세광이와 벌어진 사건과 아이들 표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국어, 자연, 사회, 산수 시험을 치던 날, 인숙이네 토마토 밭에 갔던 일,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예습 검사를 하셨고 숙제를 하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을 때렸고 다 한 아이들의 이름은 칠판에 적으셨다. 언니가 수박을 좋아해 내가 수박돼지라 불렀고,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눠 야구경기를 해서 진 것이 억울해 강가에서 몇 날을 연습을 하기도 했다.지금은 빨간 날이 아니지만 그 해 제헌절은 공휴일이어서 외갓집에 다녀왔고, 성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중계하지 않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기도 했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이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타고 2020년 봄으로 시간 여행을 왔다.초등학교부터 사춘기 중학생의 방황과 여고생의 고민이 한 장 한 장 포개져 있다. 대학노트에 적은 일기장은 아르바이트하며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일기장마다 첫 페이지에는 무슨 날에 누가 선물한 것인지, 마지막 장에는 친구들의 주소록과 생일을 음력으로 또박또박 기록했고, 그 옆 장에는 소망을 적는 곳도 있어서 해마다 바뀌는 내 꿈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손에 세월의 먼지가 까맣게 묻어나온다. 살며시 넘기는데도 출판사 이름이 적힌 겉지가 바스러져 아치럽다. 스물네 권의 책으로 묶인 추억의 밀푀유, 사이사이에 쪽지 편지가 껴 있기도 하고 그 시절의 영수증이 해사하게 웃으며 튀어나와 자꾸만 내 손목을 끌어 그 시절로 데려 갔다.김순희수필가그 일기 중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빨간 도장도 찍혔다. 숙제장과 시험지에 선생님이 그려준 빨간 동그라미를 받으려고 억지로 착하게 굴었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선생님은 그날 자신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일기장에 ‘참 잘 했어요’라는 메모로, 또 선생님 이름의 목도장으로 내 삶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일기장은 내 어린 시절 기록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천장이 넘는 시간의 이파리들이다. 천 겹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는 밀가루반죽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바삭하게 구운 프랑스식 과자이다. 밀푀유처럼 바스락거리는 일기장을 넘기며 추억을 씹다보니 온몸이 녹진해진다.지금은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다 오늘의 흔적을 남긴다. 블로그에 사진까지 더해 8년 동안 쓰다가 스마트폰을 장만한 후에는 카카오스토리로 일기를 쓴다. 이렇게 무엇을 써서 간직하는 것은 미래에 나를 위한 빨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는 작업이다.

2020-05-24

장기숲의 봄

이윽고 따스한 햇볕 사이로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봄이 몸 안으로 퍼져간다. 소나무들도 새순을 내밀고, 온 마을에 노랑 이불을 덮으러 나서면 이팝나무도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올린다. 이래서 봄은 ‘동사’이다.봄이 한창인 장기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숲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공간이다. 학교 교문으로 들어서야 하니까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 같으면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두런거렸겠지만 올 해는 햇살만이 교정을 가득 채웠다. 운동장 한편에 200년의 세월 동안 품을 키워온 이팝나무가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이팝나무라고 선뜻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왜냐면 이렇게 큰 키를 보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록이 무성한 오월, 흰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 밑으로 들어가니 그늘이 넓고 편안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인데,‘하얀 눈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했으며,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늦봄에 핀다 해서 ‘입하(立夏)목’ 또는 ‘이암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그렇지 않은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장기숲에는 활엽수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큰키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밑에 탱자나무, 신나무, 산사나무, 꾸지뽕나무 등 작은 키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도록 했다. 그 밑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어찌나 시원한지 발이 시려 오래 담그지 못 했다고 한다. 이처럼 복층 형태로 숲을 가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기가 어려워 숲속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해 동네 사람들도 길을 잃곤 했다고 기록에 전한다.김순희수필가예부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 온 장기는 신라 때부터 중요한 군사기지로 자리했다. 장기읍성에 올라서면 지금은 성 아래 논으로 된 장기들판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나무들로 가득한 장기숲이 있었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숲은 길이가 7리, 너비가 1리 였다고 하며 면적이 지금 단위로 19㏊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에서 내린 왜구 무리들이 거대한 숲의 장벽 앞에서 멈칫한다. 그 순간 요란한 총포 소리와 함께 나무 틈에서 화살이 쏟아져 나온다. 당황한 일부 왜구들은 숲속에 뛰어들었지만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오도가도 못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다 붙잡힌다. 장기숲에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이다.하지만 장기숲은 광복 후 장기중학교 건립과 새마을운동으로 농사짓는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숲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교정에 십여 그루의 거목들이 남아 여기가 숲이었던 시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베어진 나무는 입찰을 통해 매각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숯장사들이 사들여 현장에서 바로 나무를 베어다 숯을 만들었다고 한다.몇 해 전부터 장기면 주민들은 장기숲복원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 뒤 장기숲의 옛 모습이 배경에 있는 ‘추억의 사진전’을 여는 등 숲 복원운동에 적극 나섰다. 숲을 가꾸어 간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또 하나의 마을 숲을 되살린다는 범주가 아니라 지역 문화를 발굴하고 알려 가치를 높여야 다음 세대에도 유효한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니체는 머리가 아프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산책밖에 없다고 했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 쉴 휴(休)자이니 동·서양이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쉬었다. 뭉싯뭉싯 하얀 구름을 얹은 이팝나무를 바라본다. 왜 바라보기만 해도 기운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200년 동안 지녀온 세월의 기운을 내게 주는 걸까. 코로나, 다 지나간다. 걱정 말아라. 장기숲이 나를 위로한다.

2020-05-17

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번 주부터 김순희 작가의 시간을 담은 에세이 ‘무엇을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를 연재한다. 하루하루 쌓아 올린 시간의 추억을 기록하여 이야기로 들려줄 예정이다. 소소한 물건이 유품이 되고, 오래도록 한자리를 지킨 노포의 유래를 기록하고, 역사를 간직한 건축물을 찾아가는 작가의 발걸음이 독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를 기대한다.사람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러 해가 지나도 아직 시댁에는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봄이면 만들어주신 콩잎무침 레시피와 낮은 음성으로 들려준 구성진 말들이 떠난 후에도 우리가족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박인환 시인의 시구절이 입에 맴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인데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일이 쉽지 않다. 무엇이든 정리란 개념자체가 부족한 나는 그냥 쌓아두기만 할뿐이다.그래서 같은 물건을 또 살 때도 있고 뒤적거리다 장 구석에서 보물을 발견하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는 품에 들어온 것은 내다 버리는 게 없었다. 그래서 시댁에 가면 늘 보물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내 나이보다 늙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눈에 뜨여 들춰보는 즐거움을 준다. 발견할 때마다 그 물건의 사연을 어머님이나 남편에게 꼬치꼬치 물었다. 늘 보던 것인 데 자꾸 묻는 내가 더 신기하다고 하면서도 어머님은 끝까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어느 해, 모내기 새참으로 가자미회와 맥주를 내갔다. 잔을 찾다가 86년생 유리컵을 발견했다. 동국대 마크를 달고 있는 저 녀석은 남편의 물건이었다. 4학년 졸업반 체육대회 기념품인 듯하다. 우유회사나 소주 회사에서도 광고용으로 많이 나눠주는 게 컵이라 대충 사용하다 버리기 쉬운 것이 유리컵이다. 그런데도 저 유리컵은 용케 몇 십 년을 살아남았다니 대견스러웠다. 서울에서 자취생활을 끝내고 기차역에서 화물로 짐을 부치고, 손에도 작은 짐을 들고 귀향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깨지지도 버려지지도 않고 투명하게 웃고 있는 유리컵에게 칭찬을 한껏 해주고 싶다.무엇이든 소중히 하니 이젠 정말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시댁에 다니러 가면 어머님은 낮에 준비해둔 거라며 유채나물, 시금치, 파, 머위 같은 다듬어진 채소 한 자루와 고추장아찌를 양념해서 주셨다. 그리고 어머님표 노란 콩잎 무침도 담아 주셨다.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면 버리시지 않고 오래 두고 되새김질 하시는 어머니. 테두리가 하얗게 벗겨졌지만 아직은 파란빛을 간직한 얌전한 찬합에 차곡차곡 많이도 담으셨다.김순희수필가저 그릇은 얼마나 쓰셨나 가만히 살펴보니 ‘신탄진연초제조창’이라고 기념품을 만든 이가 명조체로 써 있고, 1965년 추계 위안회 기념으로 만들었다고 새겨놓았다. 아버님이 젊은 시절 근무한 곳에서 가을 소풍을 다녀온 모양이다. 글씨나 그려진 꽃무늬나 ‘나 오래 된 물건이요.’하고 말하는 듯하다. 저 도시락은 참 오래도록 어머니 손을 탔다. 어머니의 결혼 생활 대부분을 함께 했다. 그동안 아버님의 점심을 담고 회사로 출근을 하고, 어느 날에는 어머님과 건넌들 밭에도 따라갔을 것이다. 누런 호박전을 품고 기름 냄새를 풍기며 새참으로 가족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도 했을 것이다.오래 간직된 그래서 소중해진, 남편보다 한 살 어리고 시동생이 형님이라 부르는 도시락. 어머니가 떠나서 이젠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 없는 데, 나보다 훨씬 오래 시댁살이 한 저 녀석에게서 오늘은 남편의 어린 시절 코딱지 파먹던 이야기 전해 들어야겠다.안동에서 태어난 김순희 작가는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수필부문으로 당선해 등단했다. 수필집으로 ‘작가와 비작가’를 펴냈으며 포항수필사랑 회원이며, 스마트폰 사진전을 하기도 했다.

2020-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