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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늘에서 시를 읊다

등록일 2020-08-23 19:45 게재일 2020-08-2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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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와 사람이 한 풍경이 되다.
배롱나무와 사람이 한 풍경이 되다.

병산서원 대청마루에 올랐다. 입교당 뒤창을 통해 보이는 배롱나무가 붉게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지난밤에 내린 빗물에 꽃잎이 화라락 떨어져 나무그늘도 붉어 졌다. 꽃그늘 아래 선 친구의 뒷모습을 찍었다. 자연과 사람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사당인 존덕사 앞에 진분홍색 꽃이 피는 풍광에 반해 일부러 병산서원을 한여름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도 그 행렬의 한 자락을 차지하려고 여름 한가운데인 8월에 찾아 갔다. 이곳에 배롱나무는 노거수로서 2008년 4월 7일 경상북도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여름에 접어들 무렵 친구가 뜬금없이, “이제 필만 한 꽃은 대충 다 폈지?” 하고 물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피는 꽃의 종류가 가장 많을 때가 바로 여름인데 말이다. 농촌에서 자란 그 친구에게 벼꽃은 언제 피라고 그러냐고 되묻자, 생각 못 했다며 웃는다. 움츠린 겨울 끝에 오는 봄에 그것도 잎도 없이 꽃이 먼저 피는 벚꽃이나 개나리 진달래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도 모습도 많은 사람이 기억한다. 화전놀이도 봄에, 벚꽃놀이도 봄에 하니 말이다. 반면에 짙은 녹음의 그늘에서 피는 꽃들의 노력은 잊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름에 피는 꽃 이름으로 하는 놀이는 예전에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지자체마다 꽃 축제가 제법 생기고 있기는 하다.

여름 내내 피었다 지는 배롱나무는 9월까지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 한다. 그 붉고 아름다운 모습이 자줏빛 장미를 닮았다고 ‘자미화’ 라 불리기도 한다. 또 매끈매끈한 줄기를 긁으면 가지가 흔들린다고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사대부들의 사랑을 받아 서원과 양반 댁 정원에 많이 심었다. 또 오래 피고 지는 모습이 정진하며 자신을 닦는 스님들의 삶과 닮아 사찰에도 많이 심겼다. 전국 유명한 절을 여름에 방문하면 마당 중앙이나 또 연못가에 어김없이 붉은 배롱나무가 점잖게 앉아있을 것이다. 이렇듯 배롱나무는 고귀한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였다.

전해지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선비가 마당에 백일홍이 붉게 피자 자랑삼아 친구들을 불렀다. 서로 앞 다투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백일홍을 노래할 때 마당을 쓸고 있던 글을 모르는 마당쇠의 귀에도 들렸다 한다. 그 싯구에 ‘백일홍백일홍’ 하는 소리가 ‘베롱베롱’으로 들려서 저 나무가 배롱나무구나 했다는 설이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서원을 알리는 안내장에도 배롱나무가 한껏 꽃을 피운 여름사진이 내걸렸다. 하늘 위에서 찍은 장면을 보면 건물 담장마다 붉은 꽃 장식을 한 듯하다. 찾아간 시간이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라 우리 일행만 남고 다들 돌아간 뒤였다. 그 넓은 공간이 모두 우리차지였다. 사람들이 들어서는 입구부터 만대루 앞에 작게 파놓은 연못에도 꽃잎이 드리워져 있다.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즈려밟으며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

병산서원은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재이다. 마루에 퍼질러 앉아 여름을 노래하는 붉은 꽃 읽기 삼매경에 빠지기 좋은 공간이다. 류성룡(柳成龍)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이곳에 1614년경 존덕사를 건립하면서 심은 여섯 그루의 나무들이 시작이라고 전한다. 함께 간 친구와 창을 통해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오래도록 내다보았다.

대청에서 보이는 장판각은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바닥 밑을 띄우고 습기로부터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강당인 입교당 대청에서 뒤창을 통해서 늘 감독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했다.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간직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장판각의 목판도 그 앞에 선 배롱나무도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었으니 말이다.

네모난 창틀이 멋진 액자가 되어 여름 풍경을 완성한다. 400년 전 이곳에서 글을 익혔던 선비들의 시선으로 한 계절 피었다 지는 꽃잎을 오래 바라본다. 병산을 휘감고 흐르는 낙동강의 물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어우러져 낭랑하게 내 귓전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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