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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밀푀유

등록일 2020-05-24 18:44 게재일 2020-05-25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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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써 온 일기장을 꺼내니 스물네 권이었다. 삶의 추억이 겹겹이 쌓였다.

사십 년 넘게 일기를 썼다. 매일매일 성경 한 장을 읽고, 한 구절을 기록하고 잠시 기도하는 걸 몇 년째 계속 했다. 오래 쌓은 시간은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진이 났을 때 무엇을 챙겨서 나가야 하나? 친구는 두 아이의 어릴 적 앨범을 들고 뛰쳐나갈 거라고 했다. 가까운 경주에 경고장처럼 지진이 나고 다음 해 빚쟁이 쳐들어오듯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그 순간에 집에 머물지 않아서 무얼 챙겨야 하나 고민도 필요 없었지만 이제는 친구처럼 나도 대피용 작은 배낭을 챙기기로 하고, 무얼 넣어야 하나 생각했다. 어릴 적 아이들 사진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이니 몇 장 골랐다. 그 다음은 뭘까, 차곡차곡 모아 간직해온 일기장이 떠올랐다.

40년 전에 쓴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새마을 일기’ 라는 제목이 시대가 언제쯤인지 짐작하게 만든다. 6학년 2반 42번이었던 내 일기장이다.

1981년 6월 27일 토요일 날씨 흐림. 아침인사(0), 저녁인사(0)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했는지도 기록에 남겨야 했나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썼다. 같은 반 친구 수미가 쓴 쪽지편지로 인해 찬호, 시열이, 세광이와 벌어진 사건과 아이들 표정을 자세히 묘사했다. 국어, 자연, 사회, 산수 시험을 치던 날, 인숙이네 토마토 밭에 갔던 일,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예습 검사를 하셨고 숙제를 하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을 때렸고 다 한 아이들의 이름은 칠판에 적으셨다. 언니가 수박을 좋아해 내가 수박돼지라 불렀고, 남학생과 여학생으로 나눠 야구경기를 해서 진 것이 억울해 강가에서 몇 날을 연습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빨간 날이 아니지만 그 해 제헌절은 공휴일이어서 외갓집에 다녀왔고, 성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중계하지 않는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를 그때는 텔레비전에서 중계하기도 했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이 누렇게 변한 일기장을 타고 2020년 봄으로 시간 여행을 왔다.

초등학교부터 사춘기 중학생의 방황과 여고생의 고민이 한 장 한 장 포개져 있다. 대학노트에 적은 일기장은 아르바이트하며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일기장마다 첫 페이지에는 무슨 날에 누가 선물한 것인지, 마지막 장에는 친구들의 주소록과 생일을 음력으로 또박또박 기록했고, 그 옆 장에는 소망을 적는 곳도 있어서 해마다 바뀌는 내 꿈의 변천사도 알 수 있다.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다 보니 손에 세월의 먼지가 까맣게 묻어나온다. 살며시 넘기는데도 출판사 이름이 적힌 겉지가 바스러져 아치럽다. 스물네 권의 책으로 묶인 추억의 밀푀유, 사이사이에 쪽지 편지가 껴 있기도 하고 그 시절의 영수증이 해사하게 웃으며 튀어나와 자꾸만 내 손목을 끌어 그 시절로 데려 갔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그 일기 중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빨간 볼펜으로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빨간 도장도 찍혔다. 숙제장과 시험지에 선생님이 그려준 빨간 동그라미를 받으려고 억지로 착하게 굴었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선생님은 그날 자신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일을 하나 해내고 있었다. 일기장에 ‘참 잘 했어요’라는 메모로, 또 선생님 이름의 목도장으로 내 삶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준 거였다.

일기장은 내 어린 시절 기록부터 차곡차곡 쌓아 온 천장이 넘는 시간의 이파리들이다. 천 겹의 잎사귀라는 뜻의 ‘밀푀유’는 밀가루반죽을 여러 겹으로 층층이 쌓아 바삭하게 구운 프랑스식 과자이다. 밀푀유처럼 바스락거리는 일기장을 넘기며 추억을 씹다보니 온몸이 녹진해진다.

지금은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다 오늘의 흔적을 남긴다. 블로그에 사진까지 더해 8년 동안 쓰다가 스마트폰을 장만한 후에는 카카오스토리로 일기를 쓴다. 이렇게 무엇을 써서 간직하는 것은 미래에 나를 위한 빨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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