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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리야 보리밥 먹자

분황사 앞마당에 보리가 누렇다. 작물이 자라서 약간의 곡식이 여무는 때인 소만이다. 낮에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줄기마다 꽃을 준비하고, 밤에는 소쩍새가 ‘너그 집에는 모내기했나?’하고 인사를 건넨다. 논에 물이 그득하고 어린 모가 바람에 허리를 흔들며 여름이 오는지 내다본다.소만은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다. 양력 5월 21일께부터 보름간으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이다. 이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보리 베기에 이어 밭농사의 김매기들이 줄을 잇는다.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후에는 냉이가 누렇게 죽어 가며, 말후에는 보리가 익는다고 했다.진아씨와 점심 먹기로 하고 죽도시장에서 만났다. 이밥 반 보리밥 반 섞어서, 딸려 나온 나물 반찬 넣고 된장찌개 두어 숟갈 흩뿌려 비벼 먹는 집이다. 비빈 밥을 상추에 싸서 입안 가득 우물거리다 보면 요 며칠 시름 정도는 잊기도 한다. 속이 허할 때 늘 찾아가는 단골 식당이다.골목이 헷갈려서 내 나름의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 우회전을 하다 보면 나타난다. 정오 즈음엔 줄을 서는 집이니 아점을 먹으면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예전엔 가자미를 껍질이 바싹하게 구워 주더니 최근엔 고등어가 자주 상에 오른다. 집안에 비린내 베는 게 싫어서 생선을 거의 굽지 않는 나에게 주는 과자 선물 같기도 하다. 밥 인심이 좋아 대접에 가득 나와 우리는 늘 조금만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그래도 넉넉히 담아 내온다. 철 따라 반찬이 바뀐다. 오늘은 쪄서 양념을 입힌 꽈리고추 무침이 맛있어서 한 접시 더 달라고 하니 처음 보다 두 배로 담았다. 성의가 고마워 꼭꼭 씹어 비우고 풋고추도 리필 했다.나와 친구들은 보릿고개를 넘어보지 않은 세대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꽁보리밥만 먹어서 질릴 일도 없었다. 부모님 세대까지는 보리를 추수하기 전까지 소나무 속껍질 벗겨서 만든 송기떡과 개떡으로 배고픈 봄을 이어갔다. 보리등겨를 섞으면 보리개떡, 곤드레를 추가하면 곤드레개떡, 쑥을 넣으면 쑥개떡이었다. 지금은 건강식이자 별미 음식이다.초등학교 다니던 때,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면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 선생님은 도시락 검사를 했다.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하얀 쌀밥 사이에 콩이나 배에 줄이 선명한 보리가 뜨문뜨문 섞여야 통과였다. 깜빡하고 이밥만 싸 온 날엔 친구에게 보리 알 몇 개 빌려 박아넣었다. 분단과 분단 사이를 오가며 살피거나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열어 들게 한 후 앞에 서서 휙 둘러보기도 했다. 장려라기보다 강요였다.그땐 도시락 검사만 한 게 아니다. 용의 검사라고 손등에 때가 있는지 손톱은 짧게 깎았는지 보고 혼을 내고 까마귀가 형님 하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월요일에 할 거라고 예고를 하면, 주말에 가마솥에 군불 지펴 데워서 커다란 다라이에 찬물 섞어서 씻었다. 오래 묵은 때를 한참이나 불려 돌로 문질러 때를 억지로 벗겨내야만 했다. 참, 여러 검사가 우리의 학창 시절을 지나갔다.학교에서 집까지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친구들은 도시락을 반만 먹었다고 한다. 반은 남겨서 중간에 고추장 한 숟갈 넣어 도시락을 흔들면, 서로 달라붙어서 섞이지 않는 쌀밥과 달리 보리는 미끌미끌해서 금방 빨갛게 간이 스며 먹기 좋았다. 먹거리가 귀한 시절 주식이자 간식이었던 보리밥이었다. 지금은 압력밥솥으로 간단하게 익히지만, 예전에는 보리를 먼저 삶아 시렁 위에 두었다가 쌀 위에 앉혔다. 번거로운 과정을 매일 했을 어머니들의 수고가 우리 도시락을 채웠었다.그제 친정에 갔더니 엄마가 보리 순을 키우고 계셨다. 가위로 슥슥 잘라 주며 가져가서 샐러드나 전을 부쳐 먹으란다. 엄마는 보리 순을 키우고 나는 보리를 키운다. 종일 노란 털을 고르느라 바쁜 우리 집 막둥이다. 2년 전 보리누름에 우연히 찾아온 녀석이라 보리라고 불렀다. 코로나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 문 앞에 마중 나오는 보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보리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는다. /김순희(수필가)끝

2022-05-29

보물 하나를 보태다

고래불에 처음 간 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하늘로 오르려는 모양의 전망대로 향하는 우리 일행을 휘감았다. 바람 혼자였다면 뚫고 지났을 텐데, 하얀 모래가 덩달아 신이 나서 방파제를 오르고 있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명사 이십 리에 가득한 모래가 하도 고아서 바람을 타고 얕은 담을 넘어 배가 정박한 항구의 영역을 침범했다. 다른 날 또 오리라 다짐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얼마 후, 대학 동기 언니들이 동해를 따라 드라이브하자고 해서 나섰다. 그 말에 바람이 길을 막던 고래불부터 들르자 했다. 날이 좋아서 입구의 구멍 숭숭 뚫린 고래 조형물 위에 사람이 함께 유영하듯 매달렸다. 누가 봐도 고래불 해수욕장이라는 안내문 같다.전망대를 보러 방파제로 향했다. 바닥에 물 위에 햇살이 일렁이는 무늬가 그려져 파란 바다 위를 걷는 듯하다. 그 위에 지난 바람에 슬쩍 담을 넘은 모래가 둔덕처럼 쌓였다. 가만히 보니 바닷가에 오래 살았던 바람이 솜씨를 부려 모래에도 바다의 물결을 그대로 그려 놓았다. 모래에서 샤라락 파도 소리가 들릴까 싶어 몸을 낮춰 사진을 찍었다.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고래 전망대에 올랐다. 빙글빙글 계단을 오르자니 내부 벽에 귀신고래와 망치고래를 그려 놓았다. 몇 발짝 더 오르니 밍크고래가 보이고 범고래도 곧 물을 내 뿜으며 숨을 내쉴 품새다. 향유고래 이름과 설명을 읽다 보니 꼭대기에 다다랐다.고래불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둥그런 모래사장 뒤로 소나무 숲이 검게 보였다. 그 모양이 낮게 엎드린 고래 모습이다. 고려의 학자 목은 이색이 상대산에 올라 고래가 뛰노는 것을 보고 경정이라 하였다. 경정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고래가 뛰노는 벌이다. 고려인의 눈이 되어 바다를 보자니 햇살이 눈이 부셔 손차양을 하고 휘 돌아보니 맞은 편에 빨간 등대가 섰다. 병곡 방파제 테트라포드는 회색 시멘트색인 다른 곳과 달리 빨강 파랑이 뒤섞여 독특했다.조선의 실학자 이규경은 글에 고래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산모에게 미역을 먹도록 하는 이유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전한다. 바닷가에서 한 사람이 헤엄을 치다가 갓 새끼를 낳은 어미 고래가 숨을 들이쉴 때 고래 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고래 뱃속에 미역이 가득 붙어 있고 장부의 좋지 않은 피가 녹아서 물이 되고 있음을 보았다. 간신히 고래 뱃속에서 나와 고래가 미역으로 산후의 보양 삼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 사람들도 비로소 그 좋은 효험을 알아 이후 산후에 미역국을 먹게 되었다는 것이다.첫아이를 낳고 삼 칠 동안 친정엄마가 끓여주시는 미역국을 하루 네다섯 끼를 먹었다. 많이 먹어야 회복이 빠르다고 배가 꺼지기도 전에 상을 내 앞에 밀었다. 옛 어른들 말이 틀린 게 없다며 오래 끓여 깊은 맛이 나는 국물을 들이켰더랬다. 태어나서 엄마 젖을 통해 그렇게 먹었던 미역국을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먹는다. 고래에게 배운 깊은 깨달음을 먹는 것이다.고래불은 영해면 대진해수욕장과 이웃한 해수욕장이다. 울창한 송림에 에워싸여 있으며, 금빛 모래는 몸에 붙지 않아 예로부터 여기서 찜질을 하면 심장 및 순환기 계통 질환에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변 길이가 8km에 이르고, 동해인데도 얕은 수심이라 아이들과 헤엄치기 안성맞춤이다.고래불 가까이 일곱 개의 보물을 간직한 칠보산 자연휴양림이 있다. 찾아가는 길이 구불구불 소나무 가득한 숲길이다. 따로 예약하지 않았기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를 따라 오른다. 여러 코스가 있지만 우리는 전망대까지 걸었다. 시인들의 시를 한 편씩 읽다 보니 정자가 나타났다. 날이 좋아서 푸른 능선 너머로 고래불이 보였다. 하~ 좋다. 밤을 휴양림에서 보낸 사람들은 푸른 고래불에서 뜨는 붉은 일출을 보겠지. 칠보산의 일곱 개 보물에 숲에서 보는 바다라는 풍경 하나를 더해 팔보산이라 이름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김순희(수필가)

2022-05-22

비 오는 숲을 걸었어

봄비가 내린다.이런 날이면 할아버지는 들에 나가 논둑을 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아 금이 가거나 쥐구멍으로 허물어진 둑을 진흙으로 매끄럽게 새로 바르는 것을 논둑 한다고 했다. 삽으로 빗물에 젖은 흙을 떠서 둑에 발라 탁탁 치며 논에 물을 가두는 것이다. 할머니는 얼마 전 씨를 뿌려서 오종종 붙어 자란 모종을 속아 사이를 성글게 아주심기를 하셨다. 촉촉해진 밭에서 무럭 자라길 소원하시며 자신의 몸이 젖는 걸 감수하셨다.어린 나는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빌려온 만화 한 질을 다 읽었다. 창가에 속살거리는 빗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기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되게 가물었다가 소나기 쏟아질 때 마당에 날리던 흙냄새가 아직 어린 나이에도 반가웠다. 연추 끝 물받이에서 모인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 소리 같았다.어른이 된 나는 이런 날 숲에 간다. 매월 둘째 주말에 언니들과 모임을 한다. 아침부터 회색빛으로 낮게 내려온 구름이 만나기로 한 12시가 되자 보슬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멀리 소풍을 가려고 한 계획을 비가 오니 취소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언니, 비 오는 수목원에 가 본 적 있나. 얼마나 좋은 줄 모르죠?” 내 말에 빗길 운전도 익숙하다는 순혜언니 차에 올라 구불구불한 길을 더듬어 경북 수목원으로 향했다.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자 중턱 즈음부터 길도 안개에 묻혀버렸다. 산을 산답게 만드는 나무들도 가지마다 물안개를 머금었는지 차분히 어깨가 내려왔다. 날이 좋은 날에는 산 아래 동네가 개미처럼 보였겠지만 안개 커튼이 드리운 탓에 사방이 온통 뿌옜다.푸르른 5월 수목원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하지만 오늘은 비요일이라 아무도 찾지 않아 그 넓은 곳이 다 우리 차지다. 산책로를 따라 언니들 웃음소리만 가득하다. 뜨거운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서 들고 갔다. 처음 나타난 벤치에 앉아 따뜻함을 나눠 마셨다.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산 기운을 커피에 섞어 마시니 언니들의 입에서 한목소리로 ‘좋다’ 하고 탄성이 터졌다. 숲이 곧 분위기 좋은 카페로 변했다.다시 조금 걷자 부슬거리는 비를 뚫고 달콤한 향이 코끝에 닿았다. 흠흠, 이게 무슨 향일까 두리번거리니 삼엽으름덩굴이 아기 손톱만 한 꽃을 피워 터널을 이루었다. 그 아래 서니 향이 더 진하다. 으름의 꽃 향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이전엔 알지 못했다. 안개에 갇혀 향이 달아나지 못하고 더 오래 머무르는 듯했다. 비에 꽃잎이 떨어진 바닥이 붉다. 햇살에 금방 말라 사라질 것도 봄비에 더 오래 별처럼 발밑을 밝힌다.전망대를 향해 올랐다. 저기 분홍 꽃잔디 사이에 무언가 움직인다고 언니들이 발길을 멈췄다. 산토끼였다. 갈색 털이 비에 젖어 춥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한발 다가가니 풀쩍 달아난다. 살금살금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어느새 숲 저쪽으로 얼른 몸을 감춰버렸다. 비 오는 날엔 사람들이 찾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 토끼의 산책을 우리가 훼방 놓았구나 싶어 미안했다.전망대에 앉았다. 우리 사이로 물안개가 지나는 게 보였다. 손에 잡힐 것 같다. 하지만 바람에 올라탄 안개에 붙잡혀버려 오히려 우리 볼이 촉촉해지고 말았다. 한참 산을 오르는 물안개에 갇혀 모두 말없이 비멍을 때렸다.내려오는 길, 빗물 머금은 불두화에 넋을 잃고, 비에 젖어 보랏빛이 더 진한 팥꽃나무에 한눈팔고, 천천히 걷다 보니 잎새 뒤에 숨어 핀 은방울꽃도 덤으로 발견했다. 팥배나무, 등대꽃나무 같은 처음 듣는 나무의 이름표도 확인하며 걸었다. 그러다 숲속 갤러리에 들러 연구원들이 수목원에 자생하는 꽃을 말려서 만든 액자 구경도 하고, 도서관에서는 서랍 속에 진열된 씨앗 구경도 하고 숲에 어울리는 책도 펼쳐서 읽었다.맑은 날이었으면 한 시간이면 돌아보았을 거리였다. 문 닫을 시간이라는 방송을 듣고 네 시간이 흐른 걸 알았다. 한나절 비 덕분에 숲에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손끝까지 봄을 퍼 올렸다. /김순희 (수필가)

2022-05-15

화석(花石)

오늘 아침 노래 하나가 입에 매달렸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면 왜 산에 메기가 산다는 거지 하다가 멜로디를 놓치곤 했다. ‘라디오에서 김창완 아저씨가 나와 똑같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침에 떠오른 노래가 종일 따라다닌 것, 외국 사람 이름 매기가 물고기 이름 메기가 되어 뒤섞였던 기억이 같았다.매기의 추억을 들으면 초등학교 시절이, 또 어떤 곡을 들으면 중학생 때가, 이 노랜 대학생이 되어 불렀었지. 노래가 지나간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화석(化石)이라고 읊조렸다. 지질학에서 화석이 발견되면 그곳이 고생대 땅이니 중생대 땅이니 나누는 시준화석이 있다고 한다. 시준화석이란 어떤 일정한 층에서만 발견되는 화석속 또는 화석종을 이르는 용어다. 생존 기간이 한정되어 있고 그 분포가 넓어야만 해서 예로부터 고생대의 삼엽충류, 중생대의 암모나이트류, 신생대의 포유류 등이 시준화석으로 이용된다.내 추억의 시준화석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 담임이 풍금을 연주하며 알려준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임병수의 ‘약속’을 들으면 라디오 앞에 엎드린 중학교 3학년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상은의 ‘담다디’를 들으면 교생 실습하던 가을이 내 몸 어딘가 저장돼 있다가 툭 튀어나와 가사 하나 잊히지 않고 따라부르게 한다.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노래가 추억을 소환하는 화석이라는 김창완 아저씨 말이 딱 맞다.이렇게 추억을 불러내는 시준화석이 또 있다. 꽃이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고 폭죽을 터뜨리는 산수유를 보면 비가 오는 날 함께 꽃내 골짜기에 산수유군락지를 함께 보러 갔던 현미씨가 생각나고, 통일전에 매화가 환하게 피면 꽃만큼 진한 향기가 입구부터 그득해 함께 코를 흠흠거렸던 은정씨 목소리가 들리고, 분홍빛 진달래를 보면 비슬산에 함께 올라 꽃길 사이를 누비던 경숙 순혜 언니가 생각난다. 꽃마다 데려다주는 사람이 다르다.5월, 향교산에 이팝꽃이 뽀얗게 얹혔다. 나무 아래서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마다 함박눈이 소복 쌓인듯하고, 늘어진 가지를 눈높이에서 마주하면 수북하던 이밥이 여러 개의 국수 가락으로 갈라져 흔들린다. 이래저래 보릿고개를 넘던 조상님들이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킬만하다.오랜 시간 그곳에 잘 있어 주었다고 2020년 12월에 ‘포항 흥해 향교 이팝나무 군락’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61호(식물-군락)로 지정됐다. 옥성리 흥해 향교와 임허사 주변에 있는 군락지는 향교 건립을 기념해 심은 이팝나무의 씨가 떨어져 번식해 조성됐다. 예로부터 흰쌀밥 모양인 이팝꽃이 많고 적음에 따라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등 선조들의 문화와 연관성도 높아 민속·문화적으로도 가치가 크다는 평가도 받는다.십여 일 흥해 읍내 가로수부터 산까지 하얗게 뒤덮는다. 만개 하기 전에 민재씨와 같이 다니러 가 첫 눈맞춤을 했다. 며칠 뒤 선희씨와 도시락을 싸서 이팝꽃 그늘에서 점심을 먹었다. 삼 일 후 미정과 영희씨가 향교산을 모른다고 해서 가이드로 따라갔다.갈 때마다 꽃그늘 아래에는 어제도 그제도 거기 머물렀다는 듯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들이 가져다 놓은 의자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팝꽃이 그분들을 위로하고 그분들은 숲을 보전했다. 함께 같은 시간을 지나와서인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풍경이다.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다들 어디서 들었는지 상춘객들이 몰린다. 커다란 렌즈를 단 카메라를 들고 꽃을 담느라 꿀벌처럼 나무 주위를 맴돈다. 우리도 계단을 따라 내려가 동네와 만나는 곳에 가지를 드리운 이팝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인증샷을 사진과 글을 나누는 SNS에 올리니 친구 주영이가 내가 선 곳이 자기 친정집 앞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의 친정집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니 반갑다고 했다. 흥해가 고향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내가 그 앞에 서서 꽃을 올려다볼 줄은 몰랐다. 이팝꽃이 피면 이제 소환될 친구가 하나 더 늘었다. /김순희(수필가)

2022-05-08

봄날에 어머니 생각

따르릉, “형수님, 전데요. 엄마가 독사에 물려서 119 불러서 병원으로 가고 있대요. 같이 가실래요?” 시동생과 함께 병원으로 가는 길에 목 뒤가 당겨오며 머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다. 독사가 내 머리를 물은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님은 그새 치료를 끝내고 병실에 계셨다. 어디 물리신 거냐고 여쭈니 오른손 중지를 보여주셨다. 퉁퉁 부었을 줄 알았는데 워낙 마르신 분이라 그런가, 다행히 붓기가 없었다.어머님은 내가 결혼하고부터 봐왔지만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지간한 일은 속으로 삭이고 혼자 해결하셨다. 둘째 아들과 큰며느리가 궁금한 눈빛으로 옆에 서 있으니 천천히 입을 떼셨다. 산에 동네 친구분들과 나물을 하러 가셨단다. 나물 따라 자꾸 오르다 뭔가 손이 따끔해서 가시에 찔렸나 하고 장갑을 벗어보니 이빨 자국이 선명해서 독사에게 물렸다는 것을 직감했단다. 그래서 바로 옷핀으로 마구 찔러서 피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입으로 피를 빨아 뱉고를 반복하고 운동화 끈을 끊어서 손가락에 묶었단다. 병원에 오니 의사 선생님이 응급처치를 잘해서 다행이라고 칭찬하셨단다.산속 깊은 곳이라 내려오면서 바로 전화하면 119가 기다릴까 봐 산을 거의 내려오면서 여기쯤이면 기다리지 않아도 될 시간이겠지 싶어 그때야 전화를 걸었단다. 그러고선 그래도 병원을 가는데 몸빼바지는 예의가 아니라고 집에 가서 바지 갈아입고 의료보험카드 챙겨서 구급차를 탔다고 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그 말끝에 시동생 “어지간하면 화장도 하고 오지 그랬노, 엄마?” 어머님은 누워서도 종일 뜯은 나물 상할까 봐 걱정이셨다. 그때 시동생에게 동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머님을 문 뱀이 무슨 뱀이냐고 묻자 “뱀이 뭐 이름표 달고 다니나, 이따가 엄마한테 인상착의 물어볼게.”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자주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나지만, 특히 봄에 내 곁을 다녀가시는 듯하다. 쑥 뜯을 시기가 오면, 산에 고사리가 필 무렵, 오천 장날 난전에 할머니들이 봄나물을 내놓고 파는 것을 보면 더 선명하게 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묵밭두댁이, 무시나물, 참뜯까리, 우산나물, 산초나물, 재피나물, 콩대가리나물, 취나물, 쑥, 두릅, 고추나물, 달래나물, 부지깽이나물, 어름순(국수나물), 꽃나물, 어머님과 2006년 산에 가서 뜯은 나물들이다. 어머님 입에서 나는 소리를 그대로 적어본 것이라서 표준말도 아니고 정확한 풀 이름은 따로 있을 것이다.그해 봄, 어머님이 독사에 물리신 거다. 남편이 저녁 야간 당번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어머니 병문안을 가잔다. 낮에 갔다 왔지만, 아이들이 할머니 궁금하다고 해서 또 따라나섰다. 할머니가 독사에 물렸다니까, 아홉 살인 둘째가 “뱀한테 물렸으면 진짜 큰일인데 다형이다.” 다행이란 말을 처음 배웠는지 ‘다형’으로 들은 것 같다. 독사는 독이든 뱀인데 다른 종류인 줄 아는 둘째. 모든 게 서툰 녀석이 “아버지, 음료수라도 사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다. 제법 컸구나 싶다.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요구르트, 홍삼 사탕, 초콜릿을 사 들고 갔다. 병실에 도착하니 밤 10시라 불 끄고 주무시는 어머니를 깨워서 한참 재롱떨다가 왔다. 손자 둘이 왔더니 평소에 9시 전에 주무시는 분이 기분이 좋으신지 오래 견디셨다.그 손자가 16년이 지나 다 커서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 멀리 안성에 첫 살림을 내주었다. 3월에 기다리던 첫 월급을 받았다. 어엿한 직장인이 된 모습을 어머님이 보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아마 살림 내는 날 반찬까지 이것저것 해주시며 멀리까지 따라가 보셨으리라. 보내놓고 자주 안부를 물으셨으리라. 첫 월급으로 산 빨간 내복 선물로 받고 눈물지으셨으리라. 장가보내도 되겠네 하시며 둘째 손을 잡으셨으리라.봄이라 더 어머님 생각이 간절하다. /김순희(수필가)

2022-05-01

읽는다

혼자 묵독한다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진 불가능했다. 그 이전엔 혼자서 책을 눈으로만 읽으며 사색에 잠기면 불온하며 위험한 자로 취급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말없이 읽어 부하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시저도 연애편지를 소리 내서 읽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니 지금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다.하지만 나는 혼자서 조용히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늦은 밤일수록 책 읽는 속도가 난다. 묵직한 책을 들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쫙, 글쓴이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때론 내 생각은 다른데 하며 밑줄 옆에 메모를 남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지 못한다. 줄을 긋고 모서리를 접기도 해야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책 속에 있던 무심한 낱말이 그 순간 내게로 들어와 나만의 문장이 된다.물건 사는 것 자체를 즐긴다. 눈으로 하는 쇼핑을 더 좋아하지만, 가끔 꼭 쓸모가 있지 않은 물건도 보기에 좋으면 그냥 사버린다. 볼펜, 수첩, 티셔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많다. 물건뿐만 아니라 책도 충동구매를 한다. 신문에 광고를 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책 소개하는 걸 보고 덜렁 주문해버린다.또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란 이유로 내용도 보지 않고 사버리기도 한다. 고인이 된 작가의 단편집이 그랬다.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지금 아니면 못 살 것 같아서 저질렀다. 한정판이라는데 하면서. 다른 물건도 그렇지만, 책은 절판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음에 사야지 하다가 놓친 책이 여러 권이다. 그래서 눈에 들어올 때 사야 한다.책이 배달되어 오는 날은 설렌다. 택배 상자를 뜯으며 연애편지를 볼 때 기분을 느낀다. 받은 책 겉장을 넘겨 그 책을 산 날짜와 이유와 그날의 기분 정도를 메모한다. 그래야 내 책이 된다. 오늘 도착한 택배는 상자가 아니라 비닐 포장만으로 우리 집까지 달려왔다. 명화가 많이 담겨 책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걱정을 하며 뜯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배달 기사가 던졌는지 다른 상자에 눌린 것인지 뾰족한 책 모서리가 눌리고 찢겨 있었다.받자마자 읽으려고 준비한 마음이 무색해졌다. 교환신청을 하니 다음날 새 책이 당도했다. 파란 표지를 조심히 넘겨 책을 두 번 받은 사연과 기분까지 적어, 내 책이라는 표시를 남겼다. 서문을 읽으며 작가의 손을 맞잡는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제 친구처럼 아는 책이 됐다. 그렇게 사 모은 것들이 한방 가득하다.문제는 다 읽지 못한다는 점. 단행본이면 그날로 보았을 것을 전집은 방학 때 읽어야지, 주말에 봐야지, 미루다 몇 년이 흘렀다. 저렇게 묶여 있으니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못 읽은 상태다. 책꽂이를 볼 때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다. 다른 곳에 갔으면 사랑받으며 읽혔을 것을. 내 욕심에 갇혀 책꽂이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지개 한번 켜지 못했다. 집을 새로 단장하면서 먼저 정리한 것이 책장이다. 잡지류를 일 번으로, 색이 누렇게 변한 소설을 또 내놨다. 남편은 학창시절의 전공 서적도 버리려 했다. 안된다, 그건. 내가 그은 밑줄과 여백에 써놓은 글귀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며 그 손에서 구해냈다. 두 권인 것과 죽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전집, 아이들 백과사전은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한 달 동안 반을 버렸다.리모델링 후 새로 맞춘 책꽂이에 주제를 나눠서 꽂았다. 역사, 시, 수필, 소설, 그림책, 그 외의 책을 영역별로 꽂으며 또 3분의 1을 버렸다. 책 사이로 난 틈으로 여유가 들어앉으니 내 마음에도 또 살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공간이 생겨 허허로웠다.조선 시대 선비들의 낭랑한 책 읽는 소리는 여인이 담장을 넘게 했고, 글을 배우지 못하게 한 계집아이가 귀동냥으로 천자문을 익힐 수 있게 했다. 글 읽는 소리는 비록 작지만,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도하며 오늘 밤도 펜을 들고 쓰윽쓰윽 읽는다. /김순희(수필가)

2022-04-24

백만 원의 행복

둘째가 첫 월급을 탔다.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저축은 몇 달 뒤부터 하겠단다. 설레하는 아이를 보며 수년 전 일이 떠올랐다.첫아이가 아르바이트 한 달 되는 날이라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주꾸미 집에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했다. 처음 며칠은 발바닥이 아프다며 두꺼운 양말을 찾기도 하고, 손목이 저리다고도 했다. 어떤 날은 어린아이 손님이 식당 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데려온 엄마들은 왜 야단을 안 치냐고 잔소리를 했다. 한 달에 두 번만 쉬니 매일 출근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그러다 일주일이 지나니 적응을 하는지, 가게에서 같이 일하는 이모님들과 나눈 이야기도 집에 돌아오면 내게 조곤조곤 들려주었다. 역시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며 사장님은 부모님이 식사를 해도 돈을 받는 프로라며 “아버지는 절대로 장사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보탰다. 허투루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아르바이트는 돈만 버는 일이 아니었다. 일을 통해 여러 사람도 만나게 되니 인간관계를 배우게 했다. 가족이 함께 고깃집을 갔을 때였다. 반찬을 가져다주는 아주머니께 큰아이는 감사하다고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평소엔 부끄러워 눈길을 피하던 녀석이 말이다. 모자란 반찬을 더 달라고 종업원을 부르자 시킬 것 있으면 한꺼번에 부탁하란다.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힘들더라고 이왕이면 동선을 줄여주라며 배려하는 것이다.그렇게 아들에겐 지루한 한 달이 지나갔다. 아침부터 언제 월급을 주나 싶어 설렜다고 한다. 3시가 되자 돈을 세는 사장님을 보고 오늘은 인사도 더 깍듯하게 해야지 마음속으로 되뇌었단다. 봉투를 받아들고 나와 세어보니 사장님이 이만 원을 더 넣었다며 내게 전화를 했다. 두툼한 봉투에서 느껴지는 그립감이 장난이 아니더라며 걸어오는 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단다. 세뱃돈과 함께 통장에 넣으니 잔액이 백만 원이 넘었다. 어찌나 기쁜지 카드 기계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고 했다. 열심히 고생해서 번 돈이라 그런지 백만 원이 정말 큰돈 같다고 말이다.아들과 같은 나이에 나도 아르바이트 인생이었다. 고3 친구들이 학력고사를 치던 날에도 시험장이 아닌 곳에서 일했었다. 원서를 내긴 했다. 대학을 가지 말라던 엄마 몰래 대학교에 직접 가서 내고 왔었다. 전형료와 그곳까지 가는 차비는 언니가 보내주었다. 하지만 시험날이 되기 전부터 엄마는, 합격했는데 못 보내주면 더 마음이 아프니 시험 치러 가지 말라고 매일 나무랐다. 그러면서 나를 한 사무실에 취직시켰다. 시험날, 하루가 어찌나 길었던지 아는 누군가를 길에서 볼까 봐 사무실 심부름으로 은행에 갈 때도 나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전기대학은 그렇게 놓쳐버렸다.교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마지막 방법을 썼다. 집에서 가까운 전문대학 유아교육과에 원서를 썼고 엄마에게 한 번만이라도 시험을 보고 싶다고 졸랐다.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며, 몇 달 공부를 손에서 놨다 치는 시험이니 떨어질 거라며 혀를 찼다. 하지만 엄마의 바람과 달리 나는 덜컥 합격해버렸다. 학교 다니는 내내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졸업 후 첫 직장에서 받은 월급이 십만 원을 고스란히 부모님께 드렸었다.그때의 나보다 부자인 큰아이에게 월급날이니 한 턱 쏘라고 했다. 만 원 이상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러면서도 통장 잔액을 생각하며 내내 즐거워한다. 내 돈 보태 탕수육을 얻어먹으며 지헌이가 백만 원의 행복을 오래 기억하길 바란다./김순희(수필가)

2022-04-17

중원에 내리다

남편의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었다.안성에 터를 잡은 아들을 데려다주고 차를 돌려 내려오는 길, 충주휴게소에 들렀다. 졸음도 쫓을 겸 벤치를 찾아 잠시 쉬려고 고속도로에서 내렸는데 휴게소 벤치는 흡연석이 된 상태였다. 어디로 가나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톨게이트를 발견했다. 충주는 신기하게도 휴게소에서 바로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로 내려설 수 있게 쪽문을 내놓은 것이었다. 느림의 미학 충청도 사람들의 또 다른 배려인듯싶었다.남편은 한 곳만 들렀다 가자며 내비게이션에 중앙탑을 찍어보라고 했다. 사실 포항에서 경기도까지 다녀가며 길만 보는 것이 아쉬워 역사탐방이라도 하자고 조르고 싶었지만 오랜 시간 운전대를 잡아야 할 남편에게 미안해서 입을 떼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충주에 내려서길래 얼른 조수가 되어 검색에 나섰다. 중앙탑공원이 6분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숲을 벗어나자마자 들이 보이는 시골풍경이 펼쳐졌다.역사교육학과를 나온 남편은 학창시절 매해 수학여행을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고 한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들과 역사학자를 가이드로 모시고 대형버스를 맞춰 1년에 한 번씩 여행을 간다는 건 역사교육학과 학생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만리장성을 쌓는 것도 큰 재미였단다. 여행에서 돌아와 팀을 나눠 주제발표 했던 장소가 여기였다며 남편은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 눈길 따라 저어기 탑 하나가 뾰족이 고개를 내밀었다.남한강을 옆에 둔 너른 공원이다. 그 한가운데 칠층탑이 홀로 섰다. 절 마당에 사리를 넣기 위해 세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6호이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 ‘중앙탑이 본명 같지만 별명이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본명이다. 지금은 이곳이 중앙탑면이라고 하니 탑이 유명해 동네 주소까지 바꾼 경우다.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 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탑 근처에 국사책에 나오는 더 유명한 비석이 있다. 정식 명칭은 충주 고구려비이지만 학창시절에 달달 외웠던 것은 중원 고구려비다. 장수왕의 남진 순수비(南進巡狩碑)로, 화강암으로 된 사면에 예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국보로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뜻의 ‘중원’을 썼으니 중요한 곳임이 분명하다. 찾아가니 멋진 박물관을 지어 비석이 더이상 비와 바람을 맞지 않게 방을 만들어 주었다. 한 방에는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이 있는데 워낙 높아서 반쯤은 뉘어놓았다. 6미터가 넘는 높이라니 상상만으로는 그 웅장함을 다 느끼지 못했다.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북한 땅에 있어서 아쉬운 마음뿐이지만 충주 고구려비도 이제야 알현하니 미안함에 한참을 비석 주위를 맴돌았다.박물관 마당에 비석을 발견한 곳을 표시해 놨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적에는 산밑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붙어있던 시골 동네였는데 지금은 산책로와 전망대까지 갖춘 공원으로 변했구나 한다. 30여 년을 지나며 멋진 집 한 채 마련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앞으로 학생들에게 낡은 사진이 아니라 현장감 넘치는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더 자세히 본다. 남편의 얼굴에 20대 청년의 미소가 스친다. /김순희(수필가)

2022-04-10

칠포로 가는 길

포항에 산다는 것만으로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걸어서 10분이면 반짝이는 윤슬이 펼쳐지니 출근할 때마다 눈이 환해지고, 파도 소리 배경으로 소나무 숲을 거닐며 눈 호강 귀 호강을 겸할 수 있다.오늘 걸어볼 길은 영일만 북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해파랑길 18코스로 칠포해수욕장에서 오도리까지다. 길 가다 발견한 안내도에 이곳은 “동해안 연안 녹색길” 이라고 한다. 바다를 끼고 연결한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물멍을 때리다 보면 칠포항에 다다른다. 칠포리 해안로 1546번길이다.독서회 회원인 문숙씨가 세컨 하우스를 지은 동네이다. 회원들과 하루를 같이 밤을 보내기로 한 날, 도시와는 달리 고요한 밤에 항구까지 밤마실을 나갔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 사서 밤일하는 등대를 향해 걸었다. 코끝이 기분 좋게 시린 밤이었다. 우리 발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 목소리를 낮춰가며 웃었다. 한두 시간 먼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붙이고 다시 항구로 일출을 보러 가는데도 5분이면 충분했다.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날에 칠포항을 또 찾았다. 밤 산책을 하던 항구를 돌아서자제주도 어느 바닷가인가 싶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검고 큰 바위가 듬성듬성 물에 몸을 담그고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바위에 낚시꾼들이 미리 와 찌를 드리우고 무언가를 열심히 낚는다. 아이들도 돌 틈 사이에 머리를 박고 친구를 불렀다.가까이 가서 보려고 바닷가로 내려가니 굵은 모래에 몽돌이 뽀작뽀작 소리를 낸다. 돌 하나하나가 다 어여쁘다. 함께 걷던 남편이 하트모양의 돌을 손에 올려주며 자기 마음이라고 해서 웃었다. 우리 소리를 듣고 파도가 잽싸게 몽돌 사이를 빠져나가며 까르르 웃었다.칠포성이라 불린 이곳 칠포리는 포항에서 수군만호진이 있던 곳으로 바다를 지키는 군사기지였다. 고종 8년(1870)에 동래로 옮겨 가기 전까지 7개의 포대가 있는 성이라서 ‘칠포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칠포(七浦)라고도 부르는데 절골에 옻나무가 많아서, 또는 해안의 바위와 바다색이 옻칠한 듯 검은 데서 연유한다고 한다.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제주 여행 중이냐고 답장이 왔다. 칠포항이라 하니 ‘이렇게 좋은 곳을 왜 몰랐지?’ 한다. 과거 군사 보호 구역으로 해안경비 이동로로 사용되었던 길을 동해안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감상하며 탐방할 수 있는 트레킹 로드로 만들어 이제는 단절되었던 칠포리와 오도리 두 마을을 잇는 상생로가 됐다.몽돌해변에서 나무 데크를 따라 5분 오르면 해오름 전망대다. 해오름은 포항-울산 간 고속도로 완전개통을 계기로 포항, 울산, 경주 3개 도시가 함께하는 동맹의 이름이다. 위 3개 도시 모두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지역이면서 대한민국에 산업화를 일으킨 ‘산업의 해오름’지역이라는 점과 대한민국 경제 재도약의 ‘해오름’이 되겠다는 의미다.걷다 말고 발아래 바다를 바라본다. 물빛이 하도 좋아 눈에 한참 담았다. 앞에서 보면 타이타닉호를 연상케 하는 배 모습이고 계단을 내려서면 돛대가 높이 솟았다. 뱃머리 쪽으로 걷다 보면 구멍 뚫린 발판 사이로 바람이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구멍을 통해서 속이 훤히 보이는 동해의 속살은 더 깊고 푸르다. 사실 이 표현은 남편의 시선일 뿐 고소공포증이 중증인 나는 멀리서 사진만 찍어 주었다.전망대에서 오도리 간이해수욕장까지 1km 거리다. 가는 길에 갈매기의 까만 눈동자도 보고 주상절리도 찾으며, 드라마에서 치과로 나왔던 곳이 손님이 가득 찬 카페로 변신한 것을 확인하다 보면 오토캠핑장이 나온다. 주말엔 빈자리를 찾기 힘들 만큼 인기다.북파랑길을 자세히 더듬으니 보물상자처럼 숨은 명소를 발견한다. 차를 타고 수도 없이 그곳을 지나쳤어도 알지 못했지만, 속도를 늦추니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여러 사람 눈에 뜨이지 않아 조용히 산책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곧 드러날 일, 인파가 몰리기 전에 자주 영역표시를 해야겠다. /김순희(수필가)

2022-04-03

목련이 목련했다

목련 투어를 나섰다. 지난해는 보문단지와 동리목월문학관 지나 서출지까지 발도장을 찍었었다. 올해는 다른 곳으로 골랐다.첫 코스로 화천리 산수유 보러 갔다가 발견한 목련 한 그루다. 어느 문중의 선산인지 햇살 가득한 언덕에 봉분이 나란히 몇 기 엎드린 곳에 꽃나무가 병풍처럼 들러져 있었다. 그 나무 중 우뚝 키가 큰 목련이 봉오리를 가득 달고 있었다. 며칠이면 꽃문을 열 것으로 보여 오늘 찾았다.산비탈에 주춤주춤 차를 세우는데, 아직 만개하지 않은 목련이 노란 산수유 군락지 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반긴다. 가지에 산새들이 다닥다닥 앉은 모양새다. 가까이 가려니 꽃그늘에 평상이 하나 놓였고 그 아래 잔디밭에 손님 셋이 소풍 온 듯 무언가 나누며 소담스럽게 웃는 소리가 번졌다. 산소에 다니러 온 주인장인가 싶어 목련 사진만 찍고 갈게요 하니, 자신들도 객이니 걱정하지 말고 찍으라 했다. 하늘을 배경으로 한 컷, 산수유와 더불어 한 컷, 활짝 핀 가지를 줌으로 당겨 한 컷 찍었다. 마지막으로 목련을 보러 온 그들을 넣어서 원경으로 한 컷 더 찍었다.찍으며 보니 찻상이 참 곱다. 다도를 즐기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 곳을 찾아다니며 꽃자리를 깔고 즐긴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만났다. 아기자기한 상꾸밈을 보고 감탄하자 차 한 잔 맛보라며 자리를 내준다. 민폐 같아 사양하니, 세 사람 중에 큰 카메라를 옆에 둔 분이 자신도 목련 찍으러 와서 처음 만난 사이니 그냥 껴 앉으라고 부추겼다. 못 이기는 척 꼽사리를 꼈다. 앉자마자 우리가 올 것을 알고 기다렸단 듯 붉은색의 천으로 된 찻상을 깔아주며 찻잔에 받침까지 받쳐서 삼색 과일까지 담아 꾸미는 것이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벌이 내는 날갯짓 선율을 들으며 오래된 보이차와 눈 속에서 딴 국화차와 초록빛 고운 말차까지 대접받았다.차를 마시는 사이에 꽃 사진을 찍으러 사람들이 주위를 서성댔다. 나만 아는 곳인가 했더니 좋은 사진을 찍으려고 잘도 좋은 곳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꽃 향에 차향에 사람 향에 취해 생각보다 오래 머무른 듯해서 서둘러 감사 인사를 나누고 다음 장소로 발길을 재촉했다.두 번째 찾아간 곳은 오릉이다. 넓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기와 담장 위로 솟아오른 목련이 햇살에 하얗게 빛나는 모습이 눈부셨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참을 넋 놓고 꽃 감상을 했다. 안으로 들어가 소나무 숲을 따라 돌다 보면 능이 넷이다가 셋으로 줄었다 다시 다섯으로 돌아온다. 오릉은 4명의 신라초기 박씨 왕들과 박혁거세왕의 왕비인 알영부인의 능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신라의 초기 묘들은 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닌 널무덤 또는 덧널무덤으로 조사돼 이 오릉이 신라초기의 왕릉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넓은 능을 다 돌아보려면 하루해도 모자란다. 오늘의 우리 목표는 숭덕전 앞의 목련이다. 멀리서 보니 벌써 웨딩 사진 찍는 일행들과 바주카포 같은 렌즈를 달고 온 동호회 사람들이 자리를 옮겨가며 목련의 자태에 홀려있었다. 많은 이들 중에 빨간 외투를 입고 찍기도 하고 찍히기도 하는 여인이 눈에 뜨인다. 산수유 그늘에서도 열심히 서성대던 일행이었다. 내가 들고 간 빨간 하트 우산을 빌려 사진을 찍더니 어디서 산 것이냐 묻는다. 가격까지 알려드리니 주변의 다른 분까지 받아적는다. 히힛, 역시 사진에 진심인 분이다. 담장에 붙어서 나란히 심은 탓에 기와지붕이 꽃그늘에 가려진다. 목련의 키가 거기에 서 있던 시간을 말해주려고 건물의 높이를 뛰어넘었다. 파란 하늘, 까만 기와 하얀 목련의 삼박자가 카메라 셔터의 속도를 빠르게 했다.친구가 새로 집을 지었다. 목련 투어를 다니는 내 생각이 나서 한 그루 심어야겠다고 집 어느 즈음에 심으면 좋은지 나에게 물었다. 아파트에만 살아온 내가 어찌 알겠나 했더니 이곳에서 답을 얻었다. 담장 따라 심어놓으니 어느새 담을 훌쩍 뛰어넘어 밖을 지나는 사람도 즐기고 담 안의 주인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담을 수 있으니 좋다. 목련이 하루를 가득 채웠다. /김순희(수필가)

2022-03-27

봄의 반영

비가 이틀째 내린다. 기우제를 지내며 오래 기다린 만큼 반가워 봄비님이라 치켜세운다. 창가에 밤새 속살거린 빗소리 덕분에 바스락거리던 세상이 촉촉해졌다. 물빛 머금은 봄을 맞으러 우산을 받쳐 들고 나들이를 나섰다.신경주역에 다다르니 비는 안개로 모습을 바꾸며 산 위로 기어오른다. 기찻길을 이고 선 다리 밑을 지나 들어가니 동네가 나타났다. 화천 3리다. 화천이라는 동네 이름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꽃내’라고 불렀다 한다. 후에는 꽃내가 화천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꽃내가 더 정겨운데 누가 한자 이름으로 고쳐 불렀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김유신 장군이 보았던 꽃이 무슨 꽃일까, 마을 안으로 접어드니 논두렁 가에는 하얗게 매화가 피었고, 빈 밭에는 주인 몰래 광대나물이 가득 피어 보라색 이불을 펼쳐놓은 듯하다. 신라 화랑들은 이 길로 산에 올라 몸과 마음을 수련하였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훈련하는 모습 또한 꽃처럼 아름다웠을 것이다. 꽃내를 서성이며 이 동네를 오르내리는 화랑의 행렬을 상상해 본다. 산 정상에는 김유신이 검으로 내리쳤더니 반으로 갈라졌다는 바위가 있다. 그래서 산 이름이 단석산이 된 것이라 한다.마을 입구에 낮게 모여 앉은 집부터 산수유 한 그루씩 담장 안에 들여놨다. 산수유 마을이라고 불릴만하다. 몸에 띠를 두른 당산나무 옆으로 계곡을 따라가지를 늘어뜨린 노란 물결이 차를 세우게 했다. 길옆에 주차하고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나눠 마시며 비에 젖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산수유를 감상했다.속이 따뜻하게 데워졌으니 백석암을 향해 걷기로 했다. 금방 백석암의 아랫절이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저수지가 나타나면서 민가는 사라진다. 산길이지만 차를 타고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길을 따라 오를수록 산수유나무가 식구를 불려갔다. 단석산을 오르는 길이 가팔라질 때까지 포장이 된 길이다. 백석암까지 1킬로미터 정도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올 즈음 산수유 군락지가 펼쳐진다.골짜기 가득 산수유가 들어차 물안개마저 노란빛이다. 물소리도 계곡을 훑어 내려오다 노랗게 취한 듯 부서진다. 우리 일행도 몸피 굵은 산수유가 오래 묵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제자리에 머물러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졌다. 비가 내리는 날씨라 잔뜩 흐린 하늘이었지만 숲은 노랗게 조명을 밝혀놓았다.함께 이야기를 들으려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 위에 물이 고였다. 그 속에 산수유가 빨갛게 지난 열매를 떨궈 놓자, 참나무가 빈 가지를 드리운다. 가만히 보니 까만 가지에 빨간 꽃이 핀 한 폭의 수묵화였다. 반영이다. 반영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한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봄이 지난가을이 전해준 빨간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비를 통해 표현한 시였다.무엇에 반영하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비치는 상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거울과 같이 매끄러운 곳에 반영이 되면 선명하게 비칠 것이고, 잠시 고인 물에 어린 모습은 부드러운 선으로 상이 맺힐 것이다. 하지만 시냇물과 같이 움직임이 있는 물에 반영이 된다면 흔들리는 형태로 일렁일 것이다.산수유는 약재로 쓰려고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다. 그래서 집 가까이 심어서 열매를 약으로 썼다. 누구는 신장에 좋으라고 길렀고, 누구는 겨울에 약해진 몸을 보하려고 열매를 땄다. 안에 든 코르닌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유사해서 꾸준하게 챙기면 갱년기 증상에도 좋다고 하니 친구들과 함께 챙겨 먹어야 할 약재다.김종길 시인은 아버지가 따온 붉은 열매가 자신의 몸속에 붉게 흐르게 했고, 문태준 시인은 농부처럼 산수유나무도 그늘을 넓히며 한 해 농사를 짓는다고 썼다. 그렇게 산수유는 농사꾼이라는 물체에 닿아서 약재로, 시인에게 닿아서 수십 년을 사람들에게 읊조려지는 시로 반영되었다. 봄의 반영에 나를 드리운다./김순희(수필가)

2022-03-20

슬도

화면 가득 노란색이 손짓한다. 저기가 어딜까 하고 클릭해보니 ‘슬도’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섬에 우리 동네에는 아직 고개를 내밀지 못한 유채꽃이 환하게 피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해풍에 몸을 맡기고 노랑노랑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간식 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달려가니 울산 대왕암 근처였다. 소문을 나만 들은 게 아닌지 주차장이 꽉 찼다. 마침 빠지는 차가 있어서 차를 내려놓고 섬을 향해 걸었다. 이제는 섬이라 불러도 되나 싶게 작은 슬도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갔다.울산 동구 방어진항 끝에 있는 슬도는 바위에 구멍 투성이라고 곰보섬, 또 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에 갯바람과 파도가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슬도(瑟島)라 불려 이름이 여러 개이다. 슬도의 본래 이름은 시루섬이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이 비슷한 슬도가 됐다. 퇴적된 사암이 켜켜이 층리를 이룬 슬도의 모습은 여지없는 시루떡 모양새다. 떡 찌는 시루에 구멍이 숭숭 난 점을 보면 시루섬이란 이름이 안성맞춤이다.바위가 백 만개가 넘는 구멍으로 뒤덮였다. 모두 돌맛조개가 판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슬도 인근에서 돌맛조개가 발견된 적은 없다고 한다. 구멍들은 표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면에 잠긴 부분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수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둥근 형태가 뚜렷하다. 어떤 구멍에는 따개비나 덩굴 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돌맛조개가 버린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것이다.지금까지 슬도에 대한 공식적인 학술조사는 없었다. 최근 슬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방파제(150m가량)가 설치된 뒤부터 관심이 늘었다.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슬도 인근 주민들은 바위의 구멍이 파도에 의해 뚫렸을 것으로 짐작했단다. 섬 꼭대기에도 구멍이 있는 것을 보면 해저 암반이 융기해 섬이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 조개가 구멍을 팠을 것이란 얘기다. 슬도의 퇴적암층에 꼬막 화석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바위에 난 큰 구멍이 하얗다. 파도가 들어와 말라 소금으로 변했다. 섬 위에 우뚝 선 하얀 등대에 푸른 고래가 휘감고 헤엄쳐 오른다. 그 앞에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한 마리를 등대 높이만큼 세웠다. 슬도의 거문고 소리에 맞춰 푸른 고래들이 유유히 바다로 향할 듯하다.대왕암까지 오솔길이 나 있다. ‘슬도 바다길’이라고 해파랑길의 한 구간이다. 등대에서 걸어 나와 소리박물관을 지나다 보면 말 한 마리 키우는 카페가 있다. 성끝마을이다. 동네 이름이 성끝마을인 이유는 조선 시대 이곳에 말을 키우려고 울타리를 쳤는데 마성이라 불렀고 그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마을 담장에 벽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노랑의 물결이 눈을 환하게 하고, 쐬아아 밀고 들어오는 파도가 귀를 시원하게 만든다. 왼쪽은 유채꽃 바다(키가 유난히 작다 했더니 알고 보니 청경채 꽃이라고 했다), 오른편은 동해다.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입에 머금는 순간처럼 몸이 화하다.슬도의 가장 매력은 또 있다. 동해에서 드물게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 말간 하늘보다 수평선 위로 바삐 귀가를 서두르는 듯 자리를 정리하는 해를 뭉싯거리는 구름이 가리기라도 하면 더 멋진 풍경화가 그려진다. 물이 빠져나갈 때면 등대가 물끄러미 바닷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기다렸다는 듯 등대 뒤편으로 붉은 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노을의 부름에 대답하듯 산책로에 불빛이 들어오고 등대도 빛을 쏟아낸다.내항에 불빛이 길게 일렁인다. 밤의 방파제를 산책하노라면 고흐가 그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낮보다 깊어진 파랑의 하늘에 노란 별이 점점이 박히고, 물 위로 불빛이 흔들리는 그림이 방어진항의 밤 풍경 그대로였다.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모여든 등대 주위로 슬도가 연주하는 밤의 소나타가 그윽하다./김순희(수필가)

2022-03-13

바람을 기다리는 집

7번국도를 달리다 재미난 이정표를 발견했다. ‘바깥멋질’, 위로 가면 울진 평해가 나오고 옆으로 가면 학곡1리와 바깥멋질이 나온다고 초록색 바탕에 하얗게 써놓았다. 입말로 부르는 듯한 동네 이름을 관공서에서 떡하니 간판에 새겨놓은 게 신기해서 차를 돌려 들어가 보았다. 그냥 빈집이 늘어가는 평범한 시골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누군가 나처럼 궁금해서 알아보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바깥멋질은 옛날 고을 원님이나 관찰사가 평해에 부임할 때 머무르며 행차를 준비했던 곳이란다. 조용한 동네에 왁자지껄한 퍼레이드를 보는 그 자체가 큰 구경거리여서인지, 그곳을 언제부턴가 ‘멋질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도를 보면 ‘안멋질’도 있어서 동네를 바깥과 안으로 구분해 불렀다. 우리나라 어르신들이 이름을 참 쉽고 알맞게 짓는다는 걸 새삼 느낀다.목적지 없이 해안선을 따라가다가 경치 좋은 곳에 차를 멈추자는 게 오늘의 여행 콘셉트였다. 국도에서 내려서 해안선 가까이 드라이브 길로 달렸다. 소나무 숲 사이로 바다가 언듯언듯 비쳐서 더없이 좋았다. 그러다가 ‘대풍헌’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내비게이션에서 찾으니 5분 거리라 그리로 말머리를 돌렸다. 다가갈수록 바다가 가까워지더니 항구 가까이 독도 모양의 조형물이 나앉았다. 그 앞에 말쑥한 한옥이 우리를 맞는다.새로 단장하고 문을 연 지 일 년 된 수토문화전시관, 그 뒤로 대풍헌이 자리했다. 그 이름을 풀이하면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다. 서남풍이 불면 배를 띄우고 한류를 타면 울릉도까지 하룻밤 하루낮이 걸렸다. 울릉도에는 육지로 돌아오기 위한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인 ‘대풍감’이 있다. 그곳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수토사들이 묵었는데, 수색하여 토벌하는 일을 맡은 관리였다.예부터 우리는 새로운 말을 잘 만들어내고, 또 경제적으로 짧게 잘도 줄였던가 보다. 대풍헌과 수토사에서 지금은 부먹찍먹, 단짠단짠 같은 말은 나이 든 사람들도 그 뜻을 다 알지만 ‘많관부’라고 하면 대부분 모를 것이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를 줄였다. 별다줄이다. 별 걸 다 줄인다는 말이다. 그중에 대풍헌처럼 창의력이 돋보이는 신조어도 있다. 임신 중기에 먹성이 늘어 잘 먹는 것을 입덧에 빗대어 먹덧이라 하고, 무엇이든 처음 접하는 일이라고 어린이를 붙여서 요리 초보는 요린이, 주식 초보는 주린이라는 표현도 귀엽다.조선 시대에 울릉도와 독도를 침략하여 벌목과 어로를 일삼는 왜군을 수색하여 토벌하는 수토사를 2-3년마다 파견하였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동해의 난류와 한류가 울진 앞바다에서 만나 먼바다 방향으로 흘러나감으로 울진 구산포항이 울릉도로 가기에 가장 적합했다는 사실을 조선사람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언어조합능력 또한 그런 지혜에서 나온 것이리라.고급 관리들은 이곳에서 잠을 잤지만, 200여 명의 수군들은 근처에 월송포진성에서 야영을 하고 있다가 출항했다고 한다. 인근의 마을 사람들과 유지들이 각출해서 이들의 숙식을 해결했다고 대풍헌 내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이 문화재로 인정받아 전시관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수토사문화전시관에는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퀴즈 교실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즐길 수 있고, 독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화면이 있어서 섬의 작은 집과 그 아래로 해안선을 간지럽히는 파도와 섬 사이를 나는 괭이갈매기도 볼 수 있다.전시관을 나와 전망대로 오르면 수토사들을 추모하는 공원이 있다. 비석과 출정 모습이 재현된 석판 그림을 보면 역사에 새겨진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구산항전망대가 있다. 날씨 좋은 날은 망원경으로 울릉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푸른 바다 전경이 마음을 탁 풀어놓게 만들어, 바람을 기다리며 여기에 머물렀을 수토사들의 숨결도 함께 느껴본다. 순풍이 불자 수토선에 일행들을 싣고 깃발을 휘날리며 나서는 이들의 모습이 멋지다. 바다로 미끄러져 가는 당당한 뒷모습을 상상하니 멋질골이라 부르고 싶다. /김순희(수필가)

2022-03-06

안강송(安康松)

안강으로 소풍을 갔다. 소나무의 모양이 특별한 숲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흥덕왕릉에 간다고 하니 집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다들 잘 모르는 눈치다. ‘태정태세문단속 예성연중집단속’,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조선의 왕들은 우리 입에 오르내렸지만, 신라의 왕은 몇 대인지도 모른다. 우선 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까지 총 56명이고 그중 소재 불명을 빼면 왕릉은 총 37여 기가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덤은 단 8기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추정할 뿐이다.그 가운데 제42대 흥덕왕릉에 도착했다. 능의 주변 비석에 ‘흥덕’이라는 글자 덕분에 주인이 분명해진 운 좋은 능이다.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어래산 기슭 능골에 있다. 능골은 왕릉이 있는 고을이라서 붙은 이름 같다. 주차장이 얼마 전에 새로 만들었는지 훤하다. 화장실에 들르니 천장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손을 씻으니 수도꼭지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와서 추운 날씨에도 기분이 좋았다. 흥덕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인가, 하며 웃었다.능을 만나려면 먼저 소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사실 소나무에 가려서 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레솔이 빽빽하다.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둘러서서 능을 감싸 안았다. 솔밭 사이로 바람 소리를 따라 걸었다. 갈비가 쌓여 푹신한 오솔길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잔가지가 투닥투닥, 산비둘기가 낯선 손님이 왔다고 경계하며 부부 울었다. 용솟음치며 올라가듯 비스듬히 누운 나무, 두 그루가 꽈배기처럼 껴안고 자라는 나무, 드디어 소나무 병정들 사이로 능이 보인다.흥덕왕은 부인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천 년이 지나도록 신라의 로맨티스트라 불렸다. 하지만 막상 소나무 숲 앞에 놓인 안내표지판을 보면 놀랄 것이다. 장화 부인은 남편이자 삼촌인 흥덕왕이 두 동생을 살해하는 현장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왕이 부인을 사랑했다는 말이 진짜일까 싶다. 왕위에 오른 지 2개월 뒤에 왕비가 죽었다. 왕은 무덤을 안강읍에 정하고 자신도 죽으면 그 자리에 합장하라고 했다. 자기가 묻힐 자리를 미리 정해둔 것이다. 왜 왕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정했을까.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죄의식 때문에 경주의 중심지를 피했던 것이라 짐작해본다.구석에 있어서일까, 신라의 능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다. 봉분과 그 둘레의 십이지신상, 무인상과 문인상, 4마리의 석사자에 석주까지 이렇게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원성왕릉과 이곳이다.봉분 둘레의 네 방향에는 석사자 네 마리가 지키는데 모두 보는 방향이 제각각이다. 왕릉의 주변을 천 년이나 한눈팔지 않고 경계하는 충직한 모습이다. 드디어 능에 다가서서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본다. 열두 마리의 동물이 판에 새겨져 그 특징을 보고 무슨 동물일까 맞춰가며 거닐다 보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세월에 뭉개져 귀가 쫑긋한 토끼와 구불구불한 몸의 뱀만 모습을 알아볼 정도였다.왕릉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거북이를 못 보고 지나치기 쉽다.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소나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흥덕왕릉의 이름을 지켜준 거북이니까 등이며 발의 모습도 살펴주길 바란다. 이 거북은 등에 비석을 지고 있는 귀부인데 아쉽게도 비석과 머릿돌은 사라졌다.능을 다 돌아보았다면 이곳의 백미인 소나무 숲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일 때다. 소나무를 솔이라 부르는데 솔은 으뜸을 의미하는 말 ‘수리’ 또는 ‘술’이 변한 것으로 나무 중에서 최고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름철 강우량이 적을 뿐 아니라 온도 격차가 심해 소나무가 살기에 아주 좋지 않은 곳에서 자라느라 안강의 소나무는 구부러지고 뒤틀린 모양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주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지역만의 특징적인 소나무라 ‘안강송’이란 이름도 따로 붙여주었다. 흥덕왕릉을 지킨 공덕을 인정받아 정이품송처럼 이름을 얻었다. 드높은 소나무 숲에서 마음을 씻었다. /김순희(수필가)

2022-02-27

편백나무가 지키는 주상절리

새밭골로 산책을 나갔다. 시댁에서 아버님이 일주일간 혼자 지낸 집 설거지를 끝내고도 아직 해가 남은 오후, 좀 걸을까 했더니 남편이 길을 잡았다.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도 시댁에 가도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 뿐 동네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차 타고 한참 거리의 장기읍성은 자주 올랐어도 사부작사부작 걷는 동네 길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봉산초등학교 뒤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자신들만의 길인지 개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남편이 이 학교 학생일 때 교장 선생님 사택으로 썼던 건물이 사라지고 깔끔한 전원주택이 들어섰다. 그 앞을 지나 신작로를 따라갔다. 동네에 집들도 주인처럼 나이가 들어 허물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주인을 만나 새 단장을 한 집은 전입생처럼 아직 앉은 자리를 낯설어하는 모습이다.도랑을 따라 걷다 산모퉁이를 돌자 갈비뼈를 드러낸 야산이 옆으로 누웠다. 까만 육각형의 뼈가 나란히 붙어선 모습이 켜켜이 장작을 쌓아 깊은 산골에 나무꾼이 겨우살이를 준비해 놓은 형상이다. 가까이 가니 산밑으로 떨어져 나온 검은 돌도 모두 각진 모습을 잃지 않았다. 길옆에 물이 얼어붙어 있는 계곡을 채운 것도 검고 각이 졌다. 모두 주상절리다.시댁 코앞에 주상절리가 있다는 것을 이제야 보다니, 남편에게 이런 귀한 풍경을 왜 이제야 보여주었냐고 따졌다. 달전리 주상절리는 몇 번이나 찾아가 보았으면서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알려주지 않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속상했다. 2000년에 천연기념물로 등재된 달전리 주상절리는 과거 포스코 및 국가산업 단지를 매립할 때 사용되었으나, 발견된 이후 지질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받고 있다. 아직 이곳은 포항 시민 대부분이 모르는 눈치다.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과 같은 화산암에서 형성되는 육각기둥 모양의 돌기둥을 의미한다. 주상은 수직으로 세워진 것, 또는 나무 기둥, 그루터기란 뜻이고 절리는 암석에서 볼 수 있는 나란한 결, 갈라진 틈이라는 뜻이다. 뚜렷한 육각기둥이 잘 발달한 이곳에서는 용암이 식어 주상절리가 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와 붙어있던 일본이 잡아당기는 힘으로 벌어진 틈을 따라 땅속 깊은 곳에 있던 마그마가 솟아오르면서 일어난 화산활동으로 현무암이 만들어진 것이다.포항 일대는 대략 1억3500만 년 전에서 약 6500만 년 전 현무암과 화성암, 그리고 퇴적암이 분포한다.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신생대 제3 퇴적분지가 분포해 그 당시 살았던 생물의 화석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런 포항은 지질공원으로 불러야 마땅하다.달전리와 새밭골 말고도 주상절리가 또 있다. 두 곳이 산에 묻혀 있었다면 구룡포해수욕장 옆에 자리한 주상절리는 바다에 빠진 상태다. 일본 미야자키의 도깨비 빨래판처럼 파도가 까만 돌섬 사이로 쉼 없이 밀려온다. 용암이 나오는 모습 그대로 멈춘 모양이라 화산폭발 때를 상상하게 만든다. 전망대도 있고 바다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도 만들었다. 이곳이 주상절리라는 표지판을 세우고 주차장까지 마련해서 제법 관광객이 찾아온다. 주차장 바닥에 돌 모양으로 마무리를 했는데 둥글둥글하다. 주상절리가 각이 진 것처럼 흉내 내어 만들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바닷가에 부서진 돌도 그 수많은 파도에도 아직 둥글어지지 못했다. 근처에 건물 주위에 쌓은 축대에도 그 흔적을 가져다 썼다. 새밭골의 주상절리는 깨뜨려서 냇가에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철망을 쌓을 때 사용했다. 산으로 내를 막았다. 쑤욱 들어간 산허리가 지나는 사람들 보기에도 민망해서인지 2018년에야 편백나무 285본을 심었다고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속살이 드러나게 해서 미안하다고 연고 바르고 밴드도 붙였다. 하지만 1억 년이 넘는 역사를 품은 곳을 편백나무에게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무리수이다. 관심의 눈길을 새밭골 주상절리에게도 나눠주길 바란다. /김순희(수필가)

2022-02-20

카펫을 깔며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달래야 할 것은 카펫만이 아니다. 요즘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오래 접혔던 카펫을 펼친 것처럼, 아무리 혼자 삭히려 해도 쉽지 않다. 올해로 결혼 십이 년째인 나는 그동안 부부싸움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남편의 성격이 느긋하고 참을성이 많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내 마음도 물론 한몫했다. 내 어릴 때, 부모님은 자주 말다툼을 했다. 늘 작고 사소한 것들로 누가 옳으니 그르니 티격태격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결혼하면 절대 싸우지 않으리라, 특히 자식 앞에선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그 다짐이 조금씩 무너지더니 며칠 전엔 새벽이 될 때까지 목소리 높여가며 싸움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둘째 아이가 아직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것이 꼬투리가 되었다. 남편은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했다. 급기야 시어머니는 자신을 일곱 살에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잘 가르쳤다면서, 나와 비교하기까지 했다. 언성이 높아질 만하자 남편은 아이들 잘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아이들이 잠들자 남편은, 요즘의 내 모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서 다시 말을 꺼냈다. 결혼 전의 다소곳하던 모습은 다 어디 갔냐고 했다. 자신이 상상하고 기대했던 현모양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어 실망스럽다며 한숨을 토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난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다. 남편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려고 했을 뿐이다. 수납장에 맞춰 카펫을 접어 넣듯이.십 년이 한계였나 보다. 나는 참아 왔던 말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하루가 멀다하고 늦게 들어오면서, 어쩌다 내가 약속이 있어 나가면 왜 빨리 들어오라고 시간을 정해 주느냐, 그러지 마라. 내가 시댁에 하는 만큼 당신은 처가에 했느냐, 똑같이 해라. 내 하는 것의 반만 해도 사위 잘 봤다고 동네 소문이 날 것이다. 둘째가 한글 모르는 것도 내 탓만 하지 마라, 아이들 교육을 엄마 혼자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아빠도 참여해서 같이 키우자….’ 카펫이 등허리를 곧추세우며 수납장 속에서의 시간을 성토하듯이 나는 남편에게 가슴속에 접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꼬깃꼬깃해진 채 쏟아져 나온 말들은 남편 앞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남편은 얼버무리듯 그만 자자며 자릴 피했다.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크기를 재는 자기만의 자가 한 개씩 있지 않을까? 남편을 만나면서 나는 재단사가 되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내 마음을 대보곤 했다. 모양이 맞지 않아도 가위질은 차마 못 해 이리저리 내 마음을 겹접었다.‘접었다’라는 표현이 맞다. 내 생각은 접어서 마음속 수납장에 넣어 두었다. 색종이는 접어서 비행기로 날리고 예쁜 꽃을 피워 빛나게 할 수도 있지만, 마음은 접으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마음 접었다함은 거의 포기했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제때제때 풀어야 한다. 작은 생채기라 해서 돌보지 않고 접어두었더니 나도 모르는 새 가슴 한켠에 쌓였나 보다. 그런 상처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아질 거라 여겼다. 내색하지 않으니 남편 또한 내가 어떤 불만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싸우지 않겠다는 애초의 내 다짐이 오히려 문제를 만든 셈이었다. 카펫에 누워 남편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싸움이 아닌 대화를 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카펫의 구겨진 자리가 펴지듯 내 마음도 편안해질 것 같다. /김순희(수필가)

2022-02-13

수(藪)를 듣다

북송리 북천수의 사계절을 들었다. 다들 숲이라 이름 붙일 때 이곳은 수(藪)라 불렀다. 수풀, 덤불이라는 뜻의 수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져 매일 한 시간 이상 걷자고 마음먹고 찾아간 곳이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 해였다.북송리 북천수, 소나무 숲의 이름이 특별하다. 다른 고장에도 있을 테지만 포항은 동네 숲을 많이 간직한 도시다. 선비가 지와 예를 갖추듯 푸른 동해와 깊은 계곡까지 겸비했다. 해안선이 길어서 바람을 막고자 방풍림으로 해송을 길게 심었고, 동네마다 둘레에 나무를 심어 가꿨다. 내 어릴 적 학교 소풍 장소였던 송도 솔밭과 기계 서숲, 여인의 숲, 청하 관송전, 덕동숲, 언뜻 기억나는 곳만도 이만치이다.두내, 양촌,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 등으로 불리던 자연마을들은 1914년에 통합되어 북송리가 되었다. 북송리에 북천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북천수가 있어서 북송리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결국, 솔숲이 행정구역 통합을 이루어낸 셈이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은 이 숲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낸 후 마을 앞산에서 산제를 지낸다. 이때 전년도에 묻어둔 간수의 상태를 보고 그해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풍습이 있다. 이처럼 북천수는 수해방지림인 동시에 방풍림의 역할을 해 왔으며, 오랜 기간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역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마을 숲으로 인정받아 2006년 3월 28일 천연기념물 제46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흥해현지도’와 1938년 조사된 ‘조선의 임수’에 이 숲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조선 철종 때 흥해 군수 이득강이 북천에 제방을 쌓고 4리에 걸쳐 숲을 조성하였는데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숲의 길이가 2천400m, 너비는 150m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광복 직전에 일본인들이 크게 훼손하여 대부분의 노송이 잘리는 운명에 처한다. 그 이후로도 수십 년 동안 무단벌목, 방치에 따른 주민 생활오물 투여, 농경지 개발 등으로 인하여 북천수는 숲으로서의 고유한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전통마을 숲 복원사업으로 일대 정비를 거치면서 오늘날의 형태로나마 남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규모는 길이 1천870m, 너비 70m(천연기념물 지정구역 면적은 21만1천923㎡)로 조성 당시 규모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상당 정도 회복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송림은 4곳으로 하동 송림, 예천 금당실 송림,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 그리고 북천수이다.이 숲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숲 가운데 세 번째로 긴 숲으로 알려져 있다. 수종은 소나무와 곰솔이다. 소나무는 뿌리가 깊게 자라기 때문에 방풍림으로 제격이라고 한다. 소나무의 줄기는 붉은색을 띠고 곰솔은 검은색이다. 검은 솔이라 부르다 곰솔이 되었다 한다. 두 나무를 정확히 구분하는 방법은 새순을 보는 것이다. 소나무의 새순은 줄기와 같이 적갈색이나 곰솔은 회백색을 띤다.숲 가장자리에 서부초등학교가 자리했다. 학교 둘레에 소나무가 가득한 걸 보니, 오래전에는 이곳도 북천수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양덕동에 사는 민영 선생님은 아이들을 숲에서 뛰놀게 하려고 이 학교에 보낸다. 자신의 차가 없어서 아이 둘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포은도서관 앞에서 흥해로 가는 차로 갈아탄다. 서부초는 1, 2교시 합쳐서 수업하고 쉬는 시간이 30분이다. 점심시간에도 얼른 밥을 먹어치우고 밖에 나가려고 한다. 아이들은 숲에서 곤충도 관찰하고 솔방울도 주우며 산책을 즐긴다. 민영 선생님이 매일의 수고로움을 겪으면서도 이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북천수라고 했다.숲 옆을 흐르는 곡강천을 옛날에는 북천이라 불렀다. 북천변에 심은 나무 북천수는 이제 거대한 마을 숲이 되어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서부초에서 아이들을 키우듯, 숲에는 자연 발아유도지 4곳을 설정하여 유목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였다. 아름드리 둥치가 숲의 과거라면 솔방울이 뿌리내려 서로 키가 다른 어린 소나무들이 숲의 미래다./김순희(수필가)

2022-02-06

난젓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에 익숙한 바이올린 소리가 통화연결음이다. 봄에는 봄이, 여름엔 여름이더니 12월부터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그것도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 노래로 곡명이 잘 못 알려진 ‘2악장 라르고’이다. 겨울이 왔다고 음악으로 알려준다.겨울이면 내 고향 안동에서는 집 집마다 겨우살이 준비로 김장에다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난젓이다. 난젓은 겨울에만 해 먹는 음식인데 동태나 생태를 물 좋은 놈으로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가운데 큰 뼈만 없애고 대가리부터 꼬리, 내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두들겨서 만들었다. 무를 아주 많이 채 썰어서 넣고 마늘, 생강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다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릴 때, 국간장과 천일염으로 간을 맞췄다. 제일 나중에 재피가루를 넣은 후 단지에 차곡차곡 재운다. 시원한 곳에 놓고 발효시켜서 겨우 내 먹는 별미였다. 닭찌짐처럼 씹을 때마다 잔뼈가 씹히는 식감이 독특하다. 그러니 잘 두드려야 한다.우리 집은 할아버지께서 젓갈을 특히 좋아하셔서 매일 상에 서너 가지를 올렸다. 명란, 창란같은 것은 장에 나가셔서 깡통째로 사다 놓고 드셨다. 젓갈용 작은 접시가 몇 개, 김, 생선의 제일 중간 토막, 달걀찜 같은 찬이 차려진 할아버지 전용 개다리소반을 들고 사랑채에 내 갔던 기억이 있다.난젓을 담그는 날은 온 동네가 명태 다지는 소리로 떠들썩했다고 한다. 칼부터 쇳돌에 갈아야 한다. 제사가 많아서인지 할아버지 칼 가는 솜씨는 깔끔했다. 요즘 내가 쓰는 부엌칼로 생선을 다졌다가는 이가 다 나갈 테니, 대장간 불에서 달구며 만든 무거운 식칼을 사용해야 한다. 명태 본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난타가 이어진다.고기가 준비되면 무채를 썬다. 무는 접실무가 맛이 좋다. 우리 동네를 접실이라 부르던 조선 시대에 영조(英祖) 임금이 접실무의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하에게 구해 오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게으른 신하는 한양의 동대문시장에서 무를 구해다 바쳤고, 그게 들통나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니 내 고향 무맛은 안 봐도 비디오다. 싱싱한 동해에서 잡은 명태에 달고 맛있는 접실무를 버무려 만들었으니 최고의 반찬이었다.고향 떠나온 지 40년이 넘은 나는 잊어버린 음식이었다. 평택 사는 인숙이가 삼촌이 즐겨서 자주 해 먹었다며 그 맛을 기억하고 만드는 방법까지 알고 전해주었다. 지금 안동에도 해 먹는 집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오래 다져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도마 소리가 아랫집에 들려서 아파트에서는 항의 들어올 일이라 더 하기 힘들다. 시골집 마당에 멍석 깔고 집안 여자들이 다 나와 다지고 썰며 수다로 하루가 저물어야 만들어진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고 우리 엄마 세대가 돌아가시면 난젓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난젓 기억나냐고 친정엄마께 전화로 여쭈었다. ‘느 할아버지가 육고기에 생선 없이 식사하는 분이냐.’ 는 이야기부터 마뜰에서 소 피를 사와 선짓국을 끓였다는 이야기, 부엌은 창살이 뚫린 곳이라 한 데나 마찬가지여서 상에 접시를 놓자마자 얼어서 주르륵 미끄러지더라, 찬물에 손이 얼면서 끼니때면 식구마다 상을 차리니 상이 네 개였다고, 그땐 젊어서 감당했었지 한다.퇴근 시간이 맞아 아들 회사 앞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컬러링보다 음질이 좋은 것으로 골라 비발디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겨울 중 2악장을 들었다.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한 것이 쨍하게 추운 겨울을 지나온 뒤 따뜻한 난로 옆에서 뜨개질하는 할머니와 가족들이 평화롭게 쉬는 듯한 풍경이 그려진다. 추운 겨울이지만 오히려 푸근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며 충전하라는 소리 같다.난젓이 담겼던 단지가 바닥을 보일 즈음이다. 그러니 긴 겨울이 반은 지났다. 소한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고 하는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 대한이 그제다. 봄이 멀지 않았다./김순희(수필가)

2022-01-23

그리운 닭찌짐

언니들이 드라이브하자고 나를 싣고 달렸다. 신광을 지나 구불구불한 동네 길을 지나 기계로 향했다. 기계가 종착지인가 했더니 산을 넘어 죽장에 다다랗다. 계곡에 물이 얼었다. 커다란 김장배추 절이는 것으로 보이는 깊은 다라이에 아이들을 싣고 삼촌쯤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줄을 달아 얼음을 지치고 있다. 놀이공원에 바이킹을 타는 듯한 아이들의 표정이 멀리서도 보였다. 그곳이 종착지인가 했더니 더 깊은 산속으로 차를 몰았다. 입암서원을 지나 산을 넘으니 청송으로 접어드니 썰매장 가득 사람들로 붐볐다. 추운 날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얼굴에 웃음꽃을 머금었다. 우리는 그곳도 그냥 지나쳤다. 가다 보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지키는 동네가 나타나고, 사과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쌌다. 낮게 엎드린 산의 능선이 공룡의 등허리를 닮아서 어느 시대 즈음에 이곳에 어슬렁거리던 티라노사우루스를 상상했다.그렇게 두 시간을 달려 언니들의 선택지는 누룽지불백숙 맛집이었다. 구불구불 돌아서 오니 어디인지 모르겠다가 차에서 내리니 자주 지나치던 곳이었다. 영양에 가려고 영덕-상주 간 고속도로에서 내리자마자 만나는, 약수로 백숙을 하는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손님을 부르는 그 동네였다. 점심시간을 조금 지나 갔더니 한산했다. 백숙, 닭불고기 두 개 다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세트메뉴가 있었다. 밑반찬 상이 차려졌다. 샐러드, 겉절이, 장아찌 사이에 정체 모를 무침 하나가 놓였다. 한 입 먹으니 사과무침이었다. 사과가 많이 나는 청송다운 반찬이다. 상주에 가면 감말랭이 무침이 있듯이 말이다. 매콤한 사과가 입맛을 돋우어 배가 더 고파졌다.언니들이 추천한 집이라 물에 빠진 고기 싫어하는 나는 닭불고기가 무척 궁금했다. 밑반찬으로 초요기를 하는데 전 한 접시가 나왔다. 닭불고기란다.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김치전인가 할 만큼 겉모양이 닮았다. 젓가락으로 한 점 뜯어 먹으니 닭 맛이 느껴졌다. 불 향이 더해져 자꾸 손이 갔다. 닭찌짐 같다고 했더니, 언니들이 그게 뭐냐고 물었다.어릴 적 제사가 있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마당에 판을 벌였다. 먼저 칼을 갈고 제사에 쓰일 고기 손질을 하셨다. 소고기, 돔배기를 비롯한 생선을 장만해 부엌의 며느리에게 보내고 드디어 닭을 꺼냈다. 살이 많은 다리와 가슴은 따로 쪄서 상에 올리고, 그 나머지 날개, 목 따위 닭의 모든 부위를 도마에 놓고 다지셨다. 닭 뼈가 세다며 칼이 오래 도마 위를 오갔다.그렇게 할아버지의 역할이 끝난다. 그때부터는 집안 여자들이 맡는다. 뒤집은 솥뚜껑이 뜨겁게 달면 제일 먼저 배추전를 부친다. 차례로 갖가지 전이 구워질 때쯤, 할아버지의 닭 손질이 끝나 배달된다. 다진 닭고기는 고기가 서로 붙을 정도의 밀가루만 섞어 기름을 두르고 지진다. 이것을 닭찌짐이라 불렀다. 다졌지만 닭의 잔뼈와 오도독뼈가 존재감을 버리지 않아 씹는 식감이 남달랐다.안동이 고향인 내가 닭찌짐을 열심히 설명해도 모두 처음 듣는 음식이라고 했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낱말이 나오거나, 음식 이름인데 처음 접하는 것이라 상상이 가지 않을 때, 그때마다 물어보는 척척박사님이 있다. 오늘 딱 맞게 집으로 초대해 주셨다. 정갈하게 내온 팥죽을 한 그릇 맛있게 먹은 후, 닭찌짐 이야기를 하니, 지인의 경주 할머니 댁에서도 제사 음식으로 썼다고 했다. 쇠고기 섭산적이 귀해 닭고기로 대신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안동은 종가가 많아서인지 제사 장부터 고기 손질까지 남자가 참여해서 보기 좋다는 칭찬도 얹어주었다.청송에서 우리 앞에 놓인 닭불고기가 붉은 양념이라면, 제사 음식이었던 닭찌짐은 고춧가루 없이 누르스름했다. 물론 식감이 완전히 달라 같은 음식이라고 하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오랜 칼질이 무색해질 터이니 모양만 닮은 걸로 하자. 그나마 뒤따라 나온 누룽지백숙이 늘 먹던 백숙보다 한 단계 위라 닭찌짐보다 한 수 아래인 닭불고기도 인정해주기로 했다. /김순희(수필가)

2022-01-16

에덴동산

추억은 식물과 같다. 어느 쪽이나 싱싱할 때 심어두지 않으면 뿌리박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싱싱한 젊음 속에서 싱싱한 일들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 비평가 생트뵈브가 우리에게 남긴 명언이다.공감하는 명언에 충실하고자 오늘 추억 하나를 남겼다. 경양식이라는 낱말이 옛날을 떠올리게 해서 오래된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는 내 말에 친구들 모두 얼른 따라나섰다. 입구부터 복고풍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묵직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벨벳이 눈에 뜨였다. 푹신한 쿠션까지 더해 소파 깊숙이 당겨 앉고 싶게 했다.오래된 포스터와 샹들리에로 꾸민 실내장식은 이 집이 오래 한자리를 지켰노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레트로풍이 유행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젊은 연인도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추억이라는 뜻의 준말인 레트로는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을 그리워해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뉴트로·힙트로·빈트로 등의 새로운 개념도 등장했다. 뉴트로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레트로가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유행했던 것을 다시 꺼내 그 향수를 느끼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같은 과거의 것인데 이걸 즐기는 계층에겐 신상품과 마찬가지로 새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래되어도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빈티지하다’라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집이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에 올드카 번호판 느낌의 철판을 살짝 덧대어 놓았고, 2인 식탁에는 뜨개실로 레이스 뜨기를 해서 늘어뜨렸다. 다락방 같은 분위기라 아늑했다. 들창의 형식으로 열어놓은 창문도 요즘 보기 드물어 시골 할아버지 댁에 온 듯한 기분으로 추억을 더듬었다.경양식(輕洋食)의 한자를 풀이하면 ‘가벼운 서양 요리’라는 뜻이다.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세월이 흐르며 한국식으로 완성됐다. 20대에 소개팅하러 나간 곳이 대부분 양식당이었다. 그땐 포항에도 이런 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언제 마지막으로 왔던가 추억의 책장을 넘기려는데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우린 경양식 대표메뉴인 돈가스와 부채살 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를 시켰다. 그러자, 모든 코스에 샐러드가 기본으로 나오니 샐러드 말고 다른 음식을 시키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파스타로 바꿨다.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밥으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묻지 않았다. 이 집은 식전빵-스프-샐러드-김치와 피클-본식-디저트 순서로 꽉 채워 주는 곳이었다. 돈가스가 나올 때 밥을 접시에 얇게 펴 담아 오니 빵과 밥을 고를 필요가 없다. 너무 좋다.경양식과 그렇지 않은 곳을 가르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절대 돈까스나 다른 고기메뉴들을 썰어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질하러 간다는 말이 곧 양식집에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 돈가스와 스테이크는 썰어줘야 추억 완성이다.오늘 제대로 썰었다. 식전빵은 피자 도우를 구운 것 같은 모양의 따뜻한 빵이고, 수프도 오뚜기 수프가 아닌 단호박 맛이 깊게 났다. 샐러드에는 색색의 채소 위에 견과류까지 토핑되어 대접 제대로 받는 손님으로 만들어 줬다. 돈가스는 돈가스 맛집이고 스테이크 굽기도 적당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종업원들이 지나며 슬쩍 보다가 돈가스 접시가 비어가자 디저트를 고르라 했다. 귤차, 커피, 아이스크림 중에 나는 커피를 친구는 귤차를 선택했다. 은은한 귤차는 단지 모양의 미니어처와 작은 꽃병이 함께 차려진 찻상이었고 다섯 가지 과일이 얌전히 깎여서 소스로 그림이 그려진 접시에 분홍장미가 살포시 누운 채로 함께 나왔다.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하나씩 대접받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인장이 스물아홉 살에 ‘에덴동산’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26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심어 주었다. 생트뵈브가 와도 별 몇 개는 주고 남을 추억 맛집이다. /김순희(수필가)

2022-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