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이틀째 내린다. 기우제를 지내며 오래 기다린 만큼 반가워 봄비님이라 치켜세운다. 창가에 밤새 속살거린 빗소리 덕분에 바스락거리던 세상이 촉촉해졌다. 물빛 머금은 봄을 맞으러 우산을 받쳐 들고 나들이를 나섰다.
신경주역에 다다르니 비는 안개로 모습을 바꾸며 산 위로 기어오른다. 기찻길을 이고 선 다리 밑을 지나 들어가니 동네가 나타났다. 화천 3리다. 화천이라는 동네 이름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꽃내’라고 불렀다 한다. 후에는 꽃내가 화천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꽃내가 더 정겨운데 누가 한자 이름으로 고쳐 불렀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다.
김유신 장군이 보았던 꽃이 무슨 꽃일까, 마을 안으로 접어드니 논두렁 가에는 하얗게 매화가 피었고, 빈 밭에는 주인 몰래 광대나물이 가득 피어 보라색 이불을 펼쳐놓은 듯하다. 신라 화랑들은 이 길로 산에 올라 몸과 마음을 수련하였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훈련하는 모습 또한 꽃처럼 아름다웠을 것이다. 꽃내를 서성이며 이 동네를 오르내리는 화랑의 행렬을 상상해 본다. 산 정상에는 김유신이 검으로 내리쳤더니 반으로 갈라졌다는 바위가 있다. 그래서 산 이름이 단석산이 된 것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낮게 모여 앉은 집부터 산수유 한 그루씩 담장 안에 들여놨다. 산수유 마을이라고 불릴만하다. 몸에 띠를 두른 당산나무 옆으로 계곡을 따라가지를 늘어뜨린 노란 물결이 차를 세우게 했다. 길옆에 주차하고 집에서 내려온 커피를 나눠 마시며 비에 젖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산수유를 감상했다.
속이 따뜻하게 데워졌으니 백석암을 향해 걷기로 했다. 금방 백석암의 아랫절이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저수지가 나타나면서 민가는 사라진다. 산길이지만 차를 타고 오르는 것도 가능하다. 길을 따라 오를수록 산수유나무가 식구를 불려갔다. 단석산을 오르는 길이 가팔라질 때까지 포장이 된 길이다. 백석암까지 1킬로미터 정도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올 즈음 산수유 군락지가 펼쳐진다.
골짜기 가득 산수유가 들어차 물안개마저 노란빛이다. 물소리도 계곡을 훑어 내려오다 노랗게 취한 듯 부서진다. 우리 일행도 몸피 굵은 산수유가 오래 묵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을 알아차리고 잠시 제자리에 머물러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졌다. 비가 내리는 날씨라 잔뜩 흐린 하늘이었지만 숲은 노랗게 조명을 밝혀놓았다.
함께 이야기를 들으려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 위에 물이 고였다. 그 속에 산수유가 빨갛게 지난 열매를 떨궈 놓자, 참나무가 빈 가지를 드리운다. 가만히 보니 까만 가지에 빨간 꽃이 핀 한 폭의 수묵화였다. 반영이다. 반영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한 것을 다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봄이 지난가을이 전해준 빨간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비를 통해 표현한 시였다.
무엇에 반영하느냐에 따라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비치는 상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다. 거울과 같이 매끄러운 곳에 반영이 되면 선명하게 비칠 것이고, 잠시 고인 물에 어린 모습은 부드러운 선으로 상이 맺힐 것이다. 하지만 시냇물과 같이 움직임이 있는 물에 반영이 된다면 흔들리는 형태로 일렁일 것이다.
산수유는 약재로 쓰려고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다. 그래서 집 가까이 심어서 열매를 약으로 썼다. 누구는 신장에 좋으라고 길렀고, 누구는 겨울에 약해진 몸을 보하려고 열매를 땄다. 안에 든 코르닌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유사해서 꾸준하게 챙기면 갱년기 증상에도 좋다고 하니 친구들과 함께 챙겨 먹어야 할 약재다.
김종길 시인은 아버지가 따온 붉은 열매가 자신의 몸속에 붉게 흐르게 했고, 문태준 시인은 농부처럼 산수유나무도 그늘을 넓히며 한 해 농사를 짓는다고 썼다. 그렇게 산수유는 농사꾼이라는 물체에 닿아서 약재로, 시인에게 닿아서 수십 년을 사람들에게 읊조려지는 시로 반영되었다. 봄의 반영에 나를 드리운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