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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에 내리다

등록일 2022-04-10 20:33 게재일 2022-04-1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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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공원에 칠층탑이 보인다.

남편의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었다.

안성에 터를 잡은 아들을 데려다주고 차를 돌려 내려오는 길, 충주휴게소에 들렀다. 졸음도 쫓을 겸 벤치를 찾아 잠시 쉬려고 고속도로에서 내렸는데 휴게소 벤치는 흡연석이 된 상태였다. 어디로 가나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톨게이트를 발견했다. 충주는 신기하게도 휴게소에서 바로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로 내려설 수 있게 쪽문을 내놓은 것이었다. 느림의 미학 충청도 사람들의 또 다른 배려인듯싶었다.

남편은 한 곳만 들렀다 가자며 내비게이션에 중앙탑을 찍어보라고 했다. 사실 포항에서 경기도까지 다녀가며 길만 보는 것이 아쉬워 역사탐방이라도 하자고 조르고 싶었지만 오랜 시간 운전대를 잡아야 할 남편에게 미안해서 입을 떼지 못하던 참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충주에 내려서길래 얼른 조수가 되어 검색에 나섰다. 중앙탑공원이 6분 거리에 있었다. 아파트 숲을 벗어나자마자 들이 보이는 시골풍경이 펼쳐졌다.

역사교육학과를 나온 남편은 학창시절 매해 수학여행을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고 한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구들과 역사학자를 가이드로 모시고 대형버스를 맞춰 1년에 한 번씩 여행을 간다는 건 역사교육학과 학생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만리장성을 쌓는 것도 큰 재미였단다. 여행에서 돌아와 팀을 나눠 주제발표 했던 장소가 여기였다며 남편은 눈빛이 아련해졌다. 그 눈길 따라 저어기 탑 하나가 뾰족이 고개를 내밀었다.

남한강을 옆에 둔 너른 공원이다. 그 한가운데 칠층탑이 홀로 섰다. 절 마당에 사리를 넣기 위해 세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곳 유적지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으므로 사찰명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국보 제6호이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부에 위치한다고 해 ‘중앙탑이 본명 같지만 별명이고,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본명이다. 지금은 이곳이 중앙탑면이라고 하니 탑이 유명해 동네 주소까지 바꾼 경우다.

중앙탑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설화 가운데 통일신라 원성왕(재위 785∼798)과 관련된 설화는 탑의 건립 시기와도 관련된다. 내용은 원성왕 때 신라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남북 끝 지점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보폭을 가진 잘 걷는 사람을 정하여 출발시켰더니 항상 이곳에서 만났기에 이곳에 탑을 세우고 중앙임을 표시했다고 한다.

탑 근처에 국사책에 나오는 더 유명한 비석이 있다. 정식 명칭은 충주 고구려비이지만 학창시절에 달달 외웠던 것은 중원 고구려비다. 장수왕의 남진 순수비(南進巡狩碑)로, 화강암으로 된 사면에 예서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국보로 넓은 들판의 중앙이라는 뜻의 ‘중원’을 썼으니 중요한 곳임이 분명하다. 찾아가니 멋진 박물관을 지어 비석이 더이상 비와 바람을 맞지 않게 방을 만들어 주었다. 한 방에는 광개토대왕릉비의 탁본이 있는데 워낙 높아서 반쯤은 뉘어놓았다. 6미터가 넘는 높이라니 상상만으로는 그 웅장함을 다 느끼지 못했다.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북한 땅에 있어서 아쉬운 마음뿐이지만 충주 고구려비도 이제야 알현하니 미안함에 한참을 비석 주위를 맴돌았다.

박물관 마당에 비석을 발견한 곳을 표시해 놨다.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을 적에는 산밑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붙어있던 시골 동네였는데 지금은 산책로와 전망대까지 갖춘 공원으로 변했구나 한다. 30여 년을 지나며 멋진 집 한 채 마련한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앞으로 학생들에게 낡은 사진이 아니라 현장감 넘치는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더 자세히 본다. 남편의 얼굴에 20대 청년의 미소가 스친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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