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에 익숙한 바이올린 소리가 통화연결음이다. 봄에는 봄이, 여름엔 여름이더니 12월부터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그것도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 노래로 곡명이 잘 못 알려진 ‘2악장 라르고’이다. 겨울이 왔다고 음악으로 알려준다.
겨울이면 내 고향 안동에서는 집 집마다 겨우살이 준비로 김장에다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난젓이다. 난젓은 겨울에만 해 먹는 음식인데 동태나 생태를 물 좋은 놈으로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가운데 큰 뼈만 없애고 대가리부터 꼬리, 내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두들겨서 만들었다. 무를 아주 많이 채 썰어서 넣고 마늘, 생강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다 고춧가루를 넣고 버무릴 때, 국간장과 천일염으로 간을 맞췄다. 제일 나중에 재피가루를 넣은 후 단지에 차곡차곡 재운다. 시원한 곳에 놓고 발효시켜서 겨우 내 먹는 별미였다. 닭찌짐처럼 씹을 때마다 잔뼈가 씹히는 식감이 독특하다. 그러니 잘 두드려야 한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께서 젓갈을 특히 좋아하셔서 매일 상에 서너 가지를 올렸다. 명란, 창란같은 것은 장에 나가셔서 깡통째로 사다 놓고 드셨다. 젓갈용 작은 접시가 몇 개, 김, 생선의 제일 중간 토막, 달걀찜 같은 찬이 차려진 할아버지 전용 개다리소반을 들고 사랑채에 내 갔던 기억이 있다.
난젓을 담그는 날은 온 동네가 명태 다지는 소리로 떠들썩했다고 한다. 칼부터 쇳돌에 갈아야 한다. 제사가 많아서인지 할아버지 칼 가는 솜씨는 깔끔했다. 요즘 내가 쓰는 부엌칼로 생선을 다졌다가는 이가 다 나갈 테니, 대장간 불에서 달구며 만든 무거운 식칼을 사용해야 한다. 명태 본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난타가 이어진다.
고기가 준비되면 무채를 썬다. 무는 접실무가 맛이 좋다. 우리 동네를 접실이라 부르던 조선 시대에 영조(英祖) 임금이 접실무의 맛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하에게 구해 오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게으른 신하는 한양의 동대문시장에서 무를 구해다 바쳤고, 그게 들통나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니 내 고향 무맛은 안 봐도 비디오다. 싱싱한 동해에서 잡은 명태에 달고 맛있는 접실무를 버무려 만들었으니 최고의 반찬이었다.
고향 떠나온 지 40년이 넘은 나는 잊어버린 음식이었다. 평택 사는 인숙이가 삼촌이 즐겨서 자주 해 먹었다며 그 맛을 기억하고 만드는 방법까지 알고 전해주었다. 지금 안동에도 해 먹는 집이 그리 많지는 않다고 했다. 오래 다져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도마 소리가 아랫집에 들려서 아파트에서는 항의 들어올 일이라 더 하기 힘들다. 시골집 마당에 멍석 깔고 집안 여자들이 다 나와 다지고 썰며 수다로 하루가 저물어야 만들어진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고 우리 엄마 세대가 돌아가시면 난젓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
난젓 기억나냐고 친정엄마께 전화로 여쭈었다. ‘느 할아버지가 육고기에 생선 없이 식사하는 분이냐.’ 는 이야기부터 마뜰에서 소 피를 사와 선짓국을 끓였다는 이야기, 부엌은 창살이 뚫린 곳이라 한 데나 마찬가지여서 상에 접시를 놓자마자 얼어서 주르륵 미끄러지더라, 찬물에 손이 얼면서 끼니때면 식구마다 상을 차리니 상이 네 개였다고, 그땐 젊어서 감당했었지 한다.
퇴근 시간이 맞아 아들 회사 앞에서 나오길 기다리며, 컬러링보다 음질이 좋은 것으로 골라 비발디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 겨울 중 2악장을 들었다. 아름다운 선율로 표현한 것이 쨍하게 추운 겨울을 지나온 뒤 따뜻한 난로 옆에서 뜨개질하는 할머니와 가족들이 평화롭게 쉬는 듯한 풍경이 그려진다. 추운 겨울이지만 오히려 푸근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며 충전하라는 소리 같다.
난젓이 담겼던 단지가 바닥을 보일 즈음이다. 그러니 긴 겨울이 반은 지났다. 소한 얼음이 대한에 녹는다고 하는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 대한이 그제다. 봄이 멀지 않았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