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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도

등록일 2022-03-13 18:44 게재일 2022-03-1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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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이 숭숭 뚫린 슬도의 바위.

화면 가득 노란색이 손짓한다. 저기가 어딜까 하고 클릭해보니 ‘슬도’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섬에 우리 동네에는 아직 고개를 내밀지 못한 유채꽃이 환하게 피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해풍에 몸을 맡기고 노랑노랑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간식 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

달려가니 울산 대왕암 근처였다. 소문을 나만 들은 게 아닌지 주차장이 꽉 찼다. 마침 빠지는 차가 있어서 차를 내려놓고 섬을 향해 걸었다. 이제는 섬이라 불러도 되나 싶게 작은 슬도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갔다.

울산 동구 방어진항 끝에 있는 슬도는 바위에 구멍 투성이라고 곰보섬, 또 항으로 들어오는 거센 파도를 막아주는 바위섬에 갯바람과 파도가 부딪칠 때마다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슬도(瑟島)라 불려 이름이 여러 개이다. 슬도의 본래 이름은 시루섬이었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이 비슷한 슬도가 됐다. 퇴적된 사암이 켜켜이 층리를 이룬 슬도의 모습은 여지없는 시루떡 모양새다. 떡 찌는 시루에 구멍이 숭숭 난 점을 보면 시루섬이란 이름이 안성맞춤이다.

바위가 백 만개가 넘는 구멍으로 뒤덮였다. 모두 돌맛조개가 판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슬도 인근에서 돌맛조개가 발견된 적은 없다고 한다. 구멍들은 표면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수면에 잠긴 부분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수면 아래로 내려갈수록 둥근 형태가 뚜렷하다. 어떤 구멍에는 따개비나 덩굴 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돌맛조개가 버린 ‘집’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까지 슬도에 대한 공식적인 학술조사는 없었다. 최근 슬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방파제(150m가량)가 설치된 뒤부터 관심이 늘었다.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 슬도 인근 주민들은 바위의 구멍이 파도에 의해 뚫렸을 것으로 짐작했단다. 섬 꼭대기에도 구멍이 있는 것을 보면 해저 암반이 융기해 섬이 생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물속에 잠겨 있을 때 조개가 구멍을 팠을 것이란 얘기다. 슬도의 퇴적암층에 꼬막 화석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바위에 난 큰 구멍이 하얗다. 파도가 들어와 말라 소금으로 변했다. 섬 위에 우뚝 선 하얀 등대에 푸른 고래가 휘감고 헤엄쳐 오른다. 그 앞에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한 마리를 등대 높이만큼 세웠다. 슬도의 거문고 소리에 맞춰 푸른 고래들이 유유히 바다로 향할 듯하다.

대왕암까지 오솔길이 나 있다. ‘슬도 바다길’이라고 해파랑길의 한 구간이다. 등대에서 걸어 나와 소리박물관을 지나다 보면 말 한 마리 키우는 카페가 있다. 성끝마을이다. 동네 이름이 성끝마을인 이유는 조선 시대 이곳에 말을 키우려고 울타리를 쳤는데 마성이라 불렀고 그 끝자락에 있는 마을이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을 담장에 벽화를 감상하며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노랑의 물결이 눈을 환하게 하고, 쐬아아 밀고 들어오는 파도가 귀를 시원하게 만든다. 왼쪽은 유채꽃 바다(키가 유난히 작다 했더니 알고 보니 청경채 꽃이라고 했다), 오른편은 동해다. 두 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입에 머금는 순간처럼 몸이 화하다.

슬도의 가장 매력은 또 있다. 동해에서 드물게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것. 말간 하늘보다 수평선 위로 바삐 귀가를 서두르는 듯 자리를 정리하는 해를 뭉싯거리는 구름이 가리기라도 하면 더 멋진 풍경화가 그려진다. 물이 빠져나갈 때면 등대가 물끄러미 바닷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기다렸다는 듯 등대 뒤편으로 붉은 기운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노을의 부름에 대답하듯 산책로에 불빛이 들어오고 등대도 빛을 쏟아낸다.

내항에 불빛이 길게 일렁인다. 밤의 방파제를 산책하노라면 고흐가 그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낮보다 깊어진 파랑의 하늘에 노란 별이 점점이 박히고, 물 위로 불빛이 흔들리는 그림이 방어진항의 밤 풍경 그대로였다.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들이 모여든 등대 주위로 슬도가 연주하는 밤의 소나타가 그윽하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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