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식물과 같다. 어느 쪽이나 싱싱할 때 심어두지 않으면 뿌리박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싱싱한 젊음 속에서 싱싱한 일들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 비평가 생트뵈브가 우리에게 남긴 명언이다.
공감하는 명언에 충실하고자 오늘 추억 하나를 남겼다. 경양식이라는 낱말이 옛날을 떠올리게 해서 오래된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는 내 말에 친구들 모두 얼른 따라나섰다. 입구부터 복고풍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묵직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벨벳이 눈에 뜨였다. 푹신한 쿠션까지 더해 소파 깊숙이 당겨 앉고 싶게 했다.
오래된 포스터와 샹들리에로 꾸민 실내장식은 이 집이 오래 한자리를 지켰노라고 말해주었다. 최근에 레트로풍이 유행이라는데 그래서인지 젊은 연인도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고르고 있었다. 추억이라는 뜻의 준말인 레트로는 과거의 추억이나 전통을 그리워해 그것을 본뜨려고 하는 성향을 말한다. 뉴트로·힙트로·빈트로 등의 새로운 개념도 등장했다. 뉴트로는 새로움(New)과 복고(Retro)를 합친 신조어로, 레트로가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과거에 유행했던 것을 다시 꺼내 그 향수를 느끼는 것이라면, 뉴트로는 같은 과거의 것인데 이걸 즐기는 계층에겐 신상품과 마찬가지로 새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래되어도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빈티지하다’라는 말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집이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에 올드카 번호판 느낌의 철판을 살짝 덧대어 놓았고, 2인 식탁에는 뜨개실로 레이스 뜨기를 해서 늘어뜨렸다. 다락방 같은 분위기라 아늑했다. 들창의 형식으로 열어놓은 창문도 요즘 보기 드물어 시골 할아버지 댁에 온 듯한 기분으로 추억을 더듬었다.
경양식(輕洋食)의 한자를 풀이하면 ‘가벼운 서양 요리’라는 뜻이다.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세월이 흐르며 한국식으로 완성됐다. 20대에 소개팅하러 나간 곳이 대부분 양식당이었다. 그땐 포항에도 이런 집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언제 마지막으로 왔던가 추억의 책장을 넘기려는데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우린 경양식 대표메뉴인 돈가스와 부채살 스테이크와 연어 샐러드를 시켰다. 그러자, 모든 코스에 샐러드가 기본으로 나오니 샐러드 말고 다른 음식을 시키는 게 나을 거 같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파스타로 바꿨다. “빵으로 하시겠습니까, 밥으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묻지 않았다. 이 집은 식전빵-스프-샐러드-김치와 피클-본식-디저트 순서로 꽉 채워 주는 곳이었다. 돈가스가 나올 때 밥을 접시에 얇게 펴 담아 오니 빵과 밥을 고를 필요가 없다. 너무 좋다.
경양식과 그렇지 않은 곳을 가르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절대 돈까스나 다른 고기메뉴들을 썰어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질하러 간다는 말이 곧 양식집에 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 돈가스와 스테이크는 썰어줘야 추억 완성이다.
오늘 제대로 썰었다. 식전빵은 피자 도우를 구운 것 같은 모양의 따뜻한 빵이고, 수프도 오뚜기 수프가 아닌 단호박 맛이 깊게 났다. 샐러드에는 색색의 채소 위에 견과류까지 토핑되어 대접 제대로 받는 손님으로 만들어 줬다. 돈가스는 돈가스 맛집이고 스테이크 굽기도 적당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종업원들이 지나며 슬쩍 보다가 돈가스 접시가 비어가자 디저트를 고르라 했다. 귤차, 커피, 아이스크림 중에 나는 커피를 친구는 귤차를 선택했다. 은은한 귤차는 단지 모양의 미니어처와 작은 꽃병이 함께 차려진 찻상이었고 다섯 가지 과일이 얌전히 깎여서 소스로 그림이 그려진 접시에 분홍장미가 살포시 누운 채로 함께 나왔다. 탄성을 지르며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하나씩 대접받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주인장이 스물아홉 살에 ‘에덴동산’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26년 동안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심어 주었다. 생트뵈브가 와도 별 몇 개는 주고 남을 추억 맛집이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