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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콘수국

등록일 2021-06-27 18:29 게재일 2021-06-2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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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오월 보름달을 닮은 팝콘수국.

밤마실을 다녀오는 길, 신항만 도로에서 우리 동네로 내려서자 하늘이 잘 보였다. 핑크빛 달이 둥실 떴다. 오늘이 보름이었지.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차의 속도를 줄였다. 아파트 가까이 갈수록 달이 건물 사이로 숨어버린다. 도시인들을 낯설어하는 어여쁜 달을 조금 더 보고 싶어 길가에 차를 세웠다.

달에 취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집에 들어와 핸드폰을 열어보니 톡방마다 달 사진이 올라왔다. 망원렌즈로 가까이 당겨 찍었는지 토끼들이 밟아놓은 자취가 선명한 분홍 달이 수다방마다 휘영청 떠올랐다. 스트로베리 문이라 이름 붙여진 달이다. 여러 사진 중에 유독 동그란 달이 오늘 발견한 수국의 색을 닮았다.

수국을 보러 간 이는 홍차 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다. 오늘 같은 날 차를 달여놓고 친구들을 초대하는 것을 즐기는 고상한 취미를 가진 분이 있어서 모이게 됐다. 요즘 집을 리모델링 중이라며 가진 물건 정리도 할 겸 마구 나눠주신다. 족자 하나를 꺼내시며 그린 화가의 사연과 그 그림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동화처럼 들려주어서 차향과 이야기에 취하게 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눈빛에 사연이 가득 고여있어 삶이 참 풍부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에 듣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림값으로 차 한잔 대접하려고 지인의 집 근처 카페에 가자고 했다. 야생화 가득한 정원을 가진 집이다. 논길을 따라 길을 잡으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것도 논과 밭 가에 찻집이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하셨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5분 거리에 있는 곳인데도 오늘 처음 와본다고 해서 비밀의 숲을 찾아가는 파랑새가 된 나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늦은 오후라 손님이 거의 없었다.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인데 오늘은 우리들만의 정원이 되어주었다. 함께 간 두 사람 모두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꽃이 길을 안내하는 오솔길을 걸으며 내내 탄성을 터뜨렸다. 꽃 이름이 무얼까 검색도 하고 사진을 찍느라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오후의 정원에서 풍기는 향에 취해 말소리도 부쩍 줄었다.

하지(夏至) 무렵은 수국의 계절이다. 정원 곳곳에 수국이 한창이었다. 문 앞에 푸른 빛의 수국이 손님을 맞고, 정원 중앙에 사과나무 밑에는 연분홍빛의 아나벨수국이 수런거렸다. ‘어머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감탄 속에 신기한 색의 수국 한그루를 발견했다. 짙은 인디안핑크 같기도 하고 회색이 살짝 섞인 것도 같은 오묘한 색이었다.

다들 와서 보라고 불렀다. 꽃잎의 생김새도 여느 수국의 모양이 아니었다. 꼬글꼬글한 입들이 모여 도란거리는 모습이 앙증맞은 소녀를 떠올리게 했다. 무릎을 굽혀 꽃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한 장의 꽃잎이 네 갈래로 안으로 오목하니 말려들어 다부지게 오므린 아기의 손 모양이다. 그 안에 이슬을 가득 담으려는 건가. 한참을 들여다보며 넋을 놓았다. 이런 색은 누가 만들어 냈을까 궁금해 꽃을 가꾸는 친구에게 이름을 물으니 팝콘수국이라고 했다.

밤이 깊을수록 달 사진이 톡방에 더 많이 떠올랐다. 볼수록 자태와 색깔이 팝콘수국과 닮았다. 달 사진 사이에 팝콘수국의 사진을 올렸다. ‘오늘 보름달과 닮았지요?’하니, 다들 놀라워했다. 팝콘수국이란 꽃도 처음 보고 그 모습이 보름달과 닮아있어서 더 그랬다. 수국은 오래전부터 우리 곁에 머물렀기에 라틴어로 ‘물그릇’이란 뜻을 간직했다. 이름에 어울리게 작가들은 초여름 비가 오는 날을 묘사할 때 수국을 등장시켜 시인에겐 푸른 은유가 되고 수필가에겐 분홍색 복선이 되기도 한다.

달이 음력 오월 보름의 하늘로 마실을 나오는 날에 맞춰 분홍빛 수국이 환하게 떠올랐다. 연두색 연서(戀書)를 써서 쪽지로 접어 수국 가지 속에 숨겨놓았다가 오늘 환하게 펼쳐 보이려고 달과 힘을 합쳤다. 달의 인력이 밀물과 썰물을 만들다 남은 힘으로 팝콘이 툭툭 터지듯 수국에 가득 담긴 물을 끌어당겨 꽃잎을 틔웠다. ‘뻥이오~’ 하는 예고도 소리 소문도 없이 밤하늘 가득 팝콘수국이 폈다. /김순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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