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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의 심급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페이스북이 트위터에 이어 크고 작은 문단 일들을 실어나르는 도구가 되었다. 과장을 하고 엄살을 피우고 그렇지 않아도 현시욕에 사로잡힌 이들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다.‘정파고’라는 분이 각 SNS의 특징을 인용해 놓은 것이 있다. 페이스북: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다. 트위터: 나 이렇게 병신이다. 인스타그램: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 트위터 요약의 비어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누군가 이렇게 정리해 놓았다고 한다.그러고 보면 문학인들이 아직은 인스타그램에 몰두하지 않는 것도 이해는 간다. 문학인이 나 이렇게 잘 먹고 산다는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가기에는 아직들 배가 고프다고 할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이스북에서 얼마 전에 표절 논란이 하나 일었다. 이런저런 사례들로 문단에서 표절은 아주 치명적임이 입증되었지만, 요행히 피해 가는 사람도 있고, 별일 아닌 것이 크게 과장되기도 한다.한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나들이를 했는데, 마침 입에 올리기 꺼림칙한 표절 논란으로 큰 곤욕을 치르신 분을 만났다. 사태의 전말에 대해 나 나름대로 판단은 섰지만 이 글에서 그 판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직접 당사자를 대면하면 그냥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 나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돌아오는 말씀이 뜻밖이었다.당신은 지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 지나칠 지 모르지만 그래도 평정심을 많이 되찾았다 하셨다.그래, 나는 그분께 어떻게 그러실 수 있으셨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 문단에서 그런 일은 보통 일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당신은, 어떤 일이 생기면, 마음에 문제를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려는 욕구가 일게 되는데, 젊은 시절부터 그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오셨다고 하셨다. 그래, 이번에도 일을 당하여 당신 자신을 옹호하려는 마음이 이는 것을 깨달으며, 당신이 잘못한 일로부터 생겨난 문제라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다.이에 나는 겉으로 큰 반응을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내 자신의 숱한 경험으로도 무슨 일이든 나는 옳고 나와 갈등하는 다른 이는 그릇되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둘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나 자신이 옳은 일도 많았고, 틀리고 그릇된 경우도 참 많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내가 옳았던 일도 더 넓은 견지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경우도 아주 많았다. 또 근본적으로는, 세상에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날 때, 그 몸과 마음에 무슨 옳고 옳지 못함이 함께 있었겠는가.표절 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물텀벙에 빠져 허우적도 거리셨을 텐데, 그렇게까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기까지, 그분은 얼마나 자신을 모질게 대했어야 할까.마음의 심급.내 머릿 속에 떠오르는 다섯 개의 글자다.마음의 심급을 생각해 본다. 어느 깊이에 이르러야 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을지 헤아려 본다. 그리고 끝내 완전한 옳음에는 이를 수 없을, 불완전한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 물을 건너가는 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다. 괴로운 심사가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기대해 보면서.

2024-06-24

무서운 아이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작가이자 시인 이상의 최후의 소설 ‘실화’에서 ‘주인공 나’는 진실한 사랑에의 믿음을 잃고 일본 도쿄에 와 버렸다. 이 도쿄 간다(神田)의 하숙방에서 ‘나’는 독백한다.“여기는 동경이다. 나는 어쩔 작정으로 여기 왔나? …. 콕토가 그랬느니라. 재주 없는 예술가야. 부질없이 네 빈곤을 내세우지 말라고.….”여기 등장하는 장 콕토는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앙팡 테리블)’을 쓴 작가였다. 이상 소설 덕분에 나는 결국 장 콕토의 ‘무서운 아이들’을 찾아 읽게 된다.누군가 알라딘 서평에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쓴 게 있다. “사회에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의 규칙과 자기 안으로 침잠에 들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동성애, 근친상간, 자살 등의 소재가 다뤄진다.”이 ‘무서운 아이들’은 그후 세간에서 새롭게 성장하는, 나타나는 기린아를 표현할 때 자주 애용되었다. 늘 그렇게 쓰여 왔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 이 ‘무서운 아이들’의 새로운 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나는 이 ‘무서운 아이들’이 이미 십 년 전에 우리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출현했다고 믿는다. 이들은 사회에 무관심하다기보다 오히려 철저히 사회에 순치된 존재들이다. 그 방식이 역설적이다. 그들은 이 사회체계 안에서 적응과 성공과 출세를 꿈꾼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올바름도 속으로 버릴 태세가 되어 있다. 원한과 적대감을 품은, 욕망 덩어리 존재들은 자신을 아직 아이로 착각하며 가차없이 자기 욕망을 추구한다.기성세대를 향해 원한과 적대를 품은 이 아이들은 자신들이 ‘빈곤’하다고, 제대로 된 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고 외친다. 무서운 사실은 이 아이들이 올바름을 가장한다는 사실이며, 그러면서 윗세대뿐 아니라 자신들의 세대 내에서도 온갖 모략과 술수로 무한 투쟁을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자를 사정없이 짓밟을 수 있는 역설적인 윤리적 우월감으로 스스로 무장해 있다.이 40 전후의 ‘무서운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나는 나 자신이 속한 586세대가 비민주적 체제에는 저항했지만 그 사회적, 경제적 체제에는 철저히 순응했고 그후 그 반쪽짜리 이상을 정당화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무서운 아이들’은 586세대의 다음다음 세대에 해당한다. 세대를 거듭하며 악은 진화했고 번성했다. ‘무서운 아이들’의 세대에 이르러 노동, 여성, 정치적 올바름은 도구화, 수단화되는 양상을 나타낸다. 늘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외치지만 그 올바름은 마키아벨리즘적인 속성을 보인다.물론 언제나 그렇듯 이 진단과 표현은 세대 전체가 아니라 세대의 어떤 전형적인 일부를 가리킨다. 그러나 어느 세대든 두드러진 일군의 무리가 사회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 이들이 주도할 한국 사회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도 따뜻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또, 불쌍한 것은 이 ‘무서운 아이들’의 아래 세대들이다. 그들, 지금의 이십대 후반, 삼십대 전반기의 젊은이들, 이들은 ‘무서운 아이들’ 아래서 힘들게 생존해 가야 한다.

2024-06-10

지옥에서 극락을 만들라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까마득한 후배 교수와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교정을 거닐었다. 봄은 무르익었고, 오가는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행복해 보였다.그러나 나는 혼자 근심을 짊어진 사람처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세상은 곳곳이 모두 잘못되지 않은 것이 없건만, 제대로 된 쪽으로 미래 삶의 방향을 틀려 할 때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힘든 길을 걸어온 것이다.내가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에서 하루키의 논리에 대항하고자 했던 것이 쓸데없는 만용이었던 것 같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하루키는 말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동안 세 가지 네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텐데, 왜 하나뿐인 귀중한 인생을 그렇듯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허비한단 말인가.그때 나는 어떻게든 하루키가 옳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그의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고 싶었다. 오죽하면 하와이에서 하루키가 낭독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루키와 주인공이 만나는 한 장면을 쓰기 위해 왕복 250만원이 드는 난생 처음의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더란 말인가.이 소설을 쓴 후, 얼추 십년이 흐른 것 같다. 나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나는 더 많은 문제들에 휩쓸려 있다. 나는 하루키가 비난했던,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들에 시간을 바쳐 왔다. 남은 것이 없었다.내 이야기를 들은 젊은 후배가 나를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만해 한용운이 삼일운동으로 감옥에 가서 2년 6개월인가를 살았더란다. 수감되었던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검색으로 확인해보고 싶지만 지금 그럴만한 힘도 없다. 아무튼 긴 시간이다. 감옥에서 나오니, 세상은 지옥과도 같았다고 한다. 그때 만해가 깊이 생각한 끝에 얻은 경구가 하나 있다고 한다.“지옥에서 극락을 만들라.”나는 이 말을 듣고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작해야 스물한 살 때 겨우 한 달을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를 속성으로 졸업한 내가 아니던가. 만해가 겪은 고통의 크기는 실로 헤아릴 수가 없다.그리고 감옥에서 나와서 본 세상은 이광수의 ‘재생’이나 현진건의 ‘적도’에 나오는 현실처럼 끔찍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지옥을 극락으로 만들겠다니, 이런 의지의 정신력은 과연 어디서 솟아나는 것인가.만 하루가 지난 후 나는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외솔 최현배의 시조에 나타난 ‘님’에 대해 쓰고 있었다. 만해에게만 ‘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외솔에게도 ‘님’은 있었다.캄캄한 밤이 되었다. 알고리즘 때문인지 내가 일을 하면서 틀어놓은 유튜브에서 어떤 연세드신 선생 한 분이 성경 강의를 하신다. 열왕기였는지 요한계시록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한마디 말만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고통을 영광으로 만들라.”옛사람들은 인생이 얼마나 힘든지 진정한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2024-05-27

‘혼(混)’ 자, ‘혼(昏)’ 자 한자어 공부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이 시대를 잘 살아 가려면 한자 공부를 좀더 해야겠다. 그중에서도 이 두 글자 ‘혼’을 잘 알아야 하겠다.‘혼돈(混沌)’은 마구 뒤섞여 있어 갈피를 잡을 수 없음이다. 또는 그런 상태를 가리킨다. ‘어목혼주(魚目混珠)’란 물고기의 눈알과 구슬이 뒤섞인다는 뜻으로 가짜와 진짜가 마구 뒤섞임을 가리킨다.‘일어혼전천(一魚混全川)’은 한 마리 물고기가 온 냇물을 흐려놓음이다. ‘혼탁(混濁)’은 불순물이 섞이어 깨끗하지 못하고 흐림이다. ‘혼돈씨(混沌氏)’는 하는짓이 모호하거나 정신이 흐리멍텅한 사람을 농담으로 일컫는 말이다. ‘혼돈주(混沌酒)’는 여러 가지 술을 한데 뒤섞은 술을 가리킨다. 요즘말로 ‘폭탄주’를 말하는가 보다.‘혼돈탕(混沌湯)’은 여러 가지 음식을 뒤섞어서 끓인 국이란다. 요즘으로 따지면 부대찌개인가 보다. ‘혼선(混線)’은 말이나 일 따위가 갈래가 얽혀 종잡을 수 없음이다. ‘혼란기(混亂期)’는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어지러운 시기다. 요즘 같은 때를 가리킨다고 봐야 한다.‘혼신결혼(混信結婚)’은 종교가 다른 사람끼리 결혼함이다. ‘혼돈개벽(混沌開闢)’은 혼돈한 시대를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뜻이라고 한다. ‘옥석상혼(玉石相混)’은 옥과 돌이 섞여 있다는 것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한데 섞여 있음을 가리킨다.‘혼명(昏冥)’은 어둡고 캄캄함이다. ‘혼혼(昏昏)’은 정신이 아뜩하여 희미함을 말함이다. ‘혼혼맹맹(昏昏儚儚)’은 매우 흐릿하고 가물가물한 모양이다. ‘혼미(昏迷)’는 정신이 흐리고 멍하게 됨을 가리킨다. ‘혼암(昏暗)’은 불빛 따위가 없어 밝지 아니함을 가리킨다.‘혼란(昏亂)’은 마음이 어둡고 어지러움이다. ‘혼탕(昏蕩)’은 정신이 어둡고 어리둥절함이다. ‘혼왕(昏王)’은 어리석고 둔한 임금을 말한다. 옛날에 그런 대통령도 있었다.‘혼계(昏季)’는 나이가 젊고 세상 물정에 어두움을 말한다. ‘혼매(昏昧)’란 어둡고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모름이다. ‘혼한(昏漢)’은 어리석어 사리에 어두운 남자를 말한다.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모양이다. ‘병혼(病昏)’은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함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자주 그러셔서 안타깝고 괴로웠다.‘혼타(昏惰)’는 어리석고 게으름이다. ‘혼포(昏暴)’는 사리에 어둡고 사나움을 가리킴이다. 이런 사람은 정말 위험하다. ‘혼태(昏怠)’도 어리석고 게으름이다.‘기혼(氣昏)’은 정신이 아득하고 기력이 흐리멍텅함을 말한다.‘노혼(老昏)’은 늙어서 정신이 흐림이다.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혼침(昏沈)’은 정신이 푹 까무라침이다. ‘혼혹(昏惑)’은 사리에 어두워 미혹함을 말한다. 젊은 사람도 이렇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 ‘혼야(昏夜)’는 어둡고 깊은 밤을 말한다.‘혼암(昏闇)’은 어리석고 못나서 일에 어두움이다. 또는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가 부패되어 있음이다. 지금 이 나라의 상태를 설명하기에 정확하다. ‘혼폐(昏閉)’는 어둡고 꼭 막힘이다.더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으랴. 4·10 총선 전후의 우리 사회, 정말 어디로 가는 것일까?

2024-05-13

펠리컨

방민호 서울대 교수 펠리컨 이야기를 한다 해놓고 하이에나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된다. 하이에나는 오해를 많이 산다. 남이 일껏 잡아놓은 먹이를 가로챈다거나 썩은 고기를 즐긴다는 등 말이다.주로 야간에 사냥하는 탓에, 사람들이 낮에 남의 먹잇감 뺏는 그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들씌워 놓았다던가, 심지어 오히려 사자들이 하이에나 것을 빼앗는 경우가 많다던가.펠리컨은 우리 말로 사다새다. 우리나라에서도 산 적 있다고 한다. 주머니처럼 생긴 큰 부리를 가졌다. 이 부리 아래쪽이 피부로 되어 있어 주머니처럼 부풀어 오른다. 여기에 먹잇감을 저장하기도 하고, 새끼들 먹이는 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뜨거워진 체온을 식히는데 이 주머니의 넓은 표면적이 좋은 역할을 한단다.오래전 어떤 작가가 이 펠리컨을 소재 삼아 알레고리 소설을 썼다. 알레고리는 텍스트 내의 기호가 그 바깥의 어떤 의미를 가리키게 되어 있다. ‘개미와 베짱이’ 같은 우화에서. 개미는 부지런한 자를, 베짱이는 게으른 자를 가리킨다. 베짱이도 자기 할 일은 하고 살 텐데, 이솝은 자기의 우화에서 베짱이를 게으른 짐승으로 ‘불쌍하게’ 만들었다.우리의 작가도 펠리컨을 좀 불쌍하게 만들었다. 작중에서 펠리컨은 입이 큰 ‘놈’이다. 우리는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사람을 ‘라우드 스피커’(loud speaker)라고 한다. 비유적으로 시끄러운 사람, 제 주장이 센 사람을 가리킨다. 작중에서 펠리컨은 목소리가 큰 자, 나아가 목소리만 큰 자 같은 의미를 띈다. 이 소설에서 이 목소리만 큰 자는 민중주의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중에 출현하는 펠리컨은 민중을 위한다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작가는 이런 사람들을 힐난하는 뜻으로 이 소설의 펠리컨을 기호화했다. 나는 이 작가를 아주 능력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솜씨를 이렇게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쓴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그로부터, 한정된 사람의 삶의 감각으로 보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옛날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기가 힘들다. 특히 정치적 견해 같은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변하기가 쉽다.이렇게 말하면 애꿎은 펠리컨이 화를 낼 것 같다. 요즘 왜 이렇게 펠리컨들이 많은가? 바야흐로 펠리컨들 시대가 아니냐 말이다. 펠리컨들은 자신들이 정의를 위하고 정치적으로 옳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라고 한다. 이 펠리컨 무리를 들여다보면 그네들 발갈퀴 밑에 정말 고립되어 있고 약하고 상처 입은 물고기들이 짓밟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무서운 펠리컨들은 부지런히 제 먹잇감을, 그러니까 자신들의 정의를 위한 희생양을 찾아 그 큰 부리로 우악스럽게 물고 찍는다. 이 펠리컨들의 정의는 저보다 약해 보이는 자들을 사납게 물어뜯는 정의다. 페이스북이나 유튜브는 이 무서운 펠리컨들이 즐겨 사는 곳이다.부디 힘 약한 사람들, 모질지 못한 사람들은 그곳들 출입을 조심하기 바란다. 자기 귀가 얇다고, 그래서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는 수가 많다고 늘 불안해 하는 분들도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나는 이 펠리컨들이 정치적 파당의 어느 쪽에만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펠리컨은 지구상에 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아주 넓은 곳에 분포한다.

2024-04-29

진실이란 어려운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요즈음 학생들과 함께 1980년대 소설 읽기를 하는데, 지난주에는 마침 박태순 소설 편이다.‘어머니’라고,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주변의 여러 일들을 사실적으로 엮어 놓은 작품이다. 무크지 시절의 ‘실천문학’ 1985년경에 실렸다.이 이야기를 읽자니, 여러 해 전, 박태순 선생이 살아계셨을 때, 충북 수안보로 선생을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그 무렵 나는 소설집 ‘정든 땅 언덕 위’(민음사, 1973)를 헌책방에서 얻어 읽은 후였다.수안보는 선생이 어머니를 돌보려고 가서 정착하게 된 곳이라 하였다. 그때 만난 선생의 마지막 인상이 참으로 처연했다. 수안보 연립주택 맨 윗층, 걸어서야 올라갈 수 있는 5층인가에 홀로 거주하고 계시던 선생은 내가 찾아간 것을 몹시 반겨 주셨다. 같이 들어간 음식점에서 선생은 잘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시고, 오로지 띄엄띄엄 말씀만을 하셨다.사람은 아무리 힘들어 보여도 살아 있을 때는 며칠이라도, 몇 달이라도, 아니 몇 년이라도 늘 그렇게 살아있을 것 같다. 운명을 달리하고 보면, 아하, 그것이 그분 생의 마지막 국면이었다고 깨닫게 된다.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 꼭 그러했다.‘실화소설’ 딱지가 붙은 ‘어머니’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박태순 자신이 직접 겪고,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만으로 썼다. 그래서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한다.진실이란 어려운 것이다. 리얼리스트들은, ‘사실’ 뒤에 웅크리고 있는 진실에 육박하고 있노라 자신하는 경우가 많다. 그 많은 경우에 있어 망상인 경우가 많다.1980년대는 더욱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이니, 노동자니 하는 말이 그런 망상을 잔뜩 품고 있었다. 박태순이 말하는 민중이며 노동자는 사회과학 지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요, 스스로 겪고 생각한 것을 일인칭의 시점으로 말한 것이었다.오늘은 세월호 참사가 난 지 십 년이 된다. 벌써 십 년이었나? 채만식은 해방이 되고 나서, 여승,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했다.세월호를 둘러싼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 말해 왔다 할 수 있는가? 정부가 바뀌고 나서 밝혀질 줄 알았던 진실이 오히려 꽁꽁 숨어 버린 것을, 나는 깊은 환멸 속에서 경험했다. 그러고 나서 정부가 한 번 더 바뀌었다. 이번에도 큰 참사가 났다. 이를 둘러싼 진실은 수면아래 먼 깊은 곳에 잠겨 있다.나는 지금 정치 세력의 어느 한 쪽을 편들어 주려고 진실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입장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처절히 깨달았음을 말한다.바로 며칠 전 나라의 큰 일이 있었다. 이 큰 일을 둘러싼 진실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작금의 현실에 비추어 아마도 영영 모르고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모두들 자신이 믿는 바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런 미망(迷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이것이 우리네 인생의 비극이요, 희극이다.그렇다고 생각하기라도 할 수 있다면, 그래도 한 발자국은 나아간 것일까? 무엇을 향해서?

2024-04-15

저마다 사는 길

방민호 서울대 교수 첫 방문인데, 뭘 사가야 할까?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니, 옛날 같으면 크리넥스 티슈를 한 박스 가져가야겠지만 첫 만남에 영 어울리지 않는다.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결국 과일이다. 하필 과일 금이 엄청 올랐다는 때였다. 사과가 ‘금과’가 되었다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이날의 만남도 벌써 석 주는 지났다.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니 과일은 백화점 과일이 제일 맛있다는데, 들를 시간이 없다. 큰 슈퍼마켓에 들어가 사과, 딸기, 바나나, 천혜향 같은 것을 한 바구니씩 사니 값이 꽤 나간다. 무게도 제법이다.이제 들고, 선화동, 대전에서 가장 전통적인 동네, 하지만 시가지 중심이 둔산 지구로 옮아간 후 30년 동안 내리막길만 걸어온 동네로 간다. 거기에 그는 살고 있다고 했다. 전화로 그런 얘기를 듣고 자신만만했다. 선화동이라면, 광천식당이나 청양칼국수다 해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나다니던 곳, 커서도 때만 되면 동창 친구와 만나는 약속을 정하는 곳이다.역사를 연구한다는 그는 나보다 대학 학번이 두 학번이 위로, 외교학과를 나왔고 법학박사였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모든 일과 멀어져서 역사를 연구하고 책을 쓰면서 내 옛날 동네 선화동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었다.드디어, 나는 그가 사는 원룸 빌딩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고, 초인종을 누르고 밖으로 나온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어수선해서 맞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했다.내게는 서울로 올라와 기숙사 생활 잠깐 하고 자췻집, 하숙집을 이리저리 전전하며 스무 집 정도를 옮겨 다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전화 통화를 통해서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나는 발 디딜 틈 없는 현관 바닥과 정리도 되어 있지 않은 주방과 각종 원서들이 어지럽게 꽂혀 있는 거실의 책장을, 서서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이 원룸의 풍경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자고 먹고 책을 꽂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어색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태연하게 자신의 거처로 맞아들인 그 사람. 무거운 과일 봉지는 베란다 쪽 바깥에 다른 짐 쌓인 곳에 팽개치듯 얹어 놓고 곧바로 그가 열중하고 있는 고구려, 발해, 몽골 이야기로 들어간다.나는 귀로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가 구사하는 러시아어, 몽골어, 만주어, 중국어, 아랍어는 몇 개도 알아들을 수 없다. 부지런히 듣고 있는 시늉을 하며 나는 속으로 나의 생각을 이어간다.참 희귀한 사람이군. 경륜을 감추고 책만 읽었더라는 허생이라기보다, 먼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역사를 밝히신 단재 신채호 같은 사람…. 이 사람의 공부 길을 계속해서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그런 것 같다. 세상을 사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돈을 따라가는 길, 지위를 구하는 길, 이름을 높이는 길…. 그런데 희한하게도 다른 길을 가는 분들이 있다. 없지 않다. 이들이야말로 사회의 빛이다. 소금이다. 이 글을 쓰는 때가 하필 선거 때다.

2024-04-01

책을 다시 돌보려는 마음

방민호 서울대 교수 꿈을 꾸었다. 무슨 일인가로 나를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쫓겼고, 나중에 잡혔는지 그러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꿈 한가운데 있던 일만 선연히 남았다.어느 큰 파도가 치는 바다로 달려가 뛰어들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나는 마치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그 파도 굽이쳐 감기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파도는 한없이 크다 해도 좋은 정도였다. 내 키를 열 곱 스무 곱 넘도록 거대하게 솟아오른 파도 속, 그 아래로, 아래로 나는 끝 모르고 파도의 물기둥 벽을 타고 내려갔다.파도는 검푸르다고도, 소랏빛이라고도 할 수 없이 신비로운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나는 태양빛을 푸른빛 셀로판지처럼 막아주는 거대한 물기둥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빨려들 듯 내려가는 것이었다.또 다른 내가, 그렇게 아득히 멀어져 가는 내가 마치 하나의 점처럼 작아졌다고 느낄 즈음에 꿈이 깼다.아침이 이미 아주 늦도록 잠들어 있었다. 어제는 하루종일 이광수를 이야기하는 학술대회 자리에 있었고, 그저께는 수업을 하고 박사논문 발표하는 학생들과 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 그 전에는 어땠더라? 잡지 ‘맥’을 교정을 보고 모자란 부분을 기웠다. 그 전에는 우정권 선배가 목월 시 유작들 발굴하는 일, 기자회견 자리에 있었고.눈을 뜨면서, 오늘은 꼭 파주에 가봐야 한다고 생각한다.책들이 어떻게 되었을까?대학원 학생들에게 다음 주에는 꼭 ‘노동해방문학’ 창간호부터 끝날 때까지 누락된 것 없는 열 몇 권을 다 갖다 보여주겠다고 했다. 벌써 몇 번을 찾아보았는데, 없다. 몇 년 전 학교 건물 4층을 리모델링 한다고 전부 비우라고 할 때, 어디로 갔을까? 파주였을까? 아니면 단체로 보관해 준다는 창고에 휩쓸려가 사라져 버린 걸까?파주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처음 책들을 갖다 둘 때는 주말에는, 2주일에 한 번,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가서 옮겨놓은 책들을 돌볼 작정이었다. 미련스러운 것이 사람, 욕심껏 사들이기는 했는데, 둘 곳 없을 것은 내다보지 못했다.되도록 햇빛 받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벌써 몇 년째 아직도 유리창에 햇빛 차단용 셀로판 지를 붙이지 못했다. 몇 개 미닫이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먼지에도 속수무책인 책들. 들이는 것만 일이 아니요, 책도 식물을 기르듯, 화초를 기르듯 물 주고 돌봐야 하는 것을, 몰라도 너무 모른 무지의 나날들이었다.어디로 갔을까? ‘노동해방문학’은 무크지 황토빛 ‘실천문학’도 낙질은 있지만 분명 잘 두었었는데….그런데, 있다.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책들이 오늘 책장 맨 하단 구석에 그대로 꽂혀 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말함인가 한다.내친 김에 어지럽게 꽂혀 있는 아이들을 이제는 다시 마음 잡고 돌보기로 한다. 앞에서 물을 준다 했지만, 이 아이들은 습기도, 햇빛도, 추위도, 먼지도, 몹시 힘겨워 하는 애들이다.나의 삶의 증명 같은 아이들. 나와 같이 깊은 바닷속 같은 심연을 향해 함께 가는 아이들. 이제 다시 물을 주고 돌봐 주기로 한다. 더 알뜰하게 가꿔 보기로 한다.

2024-03-18

미셀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

방민호 서울대 교수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데, 또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미셀 들라크루아, 파리의 벨 에포크’ 전시가 있다고 했다. 내 의지로는 지금 갈 수 없는 형편, 사람에 이끌려 외출을 감행했다.들라크루아라면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낭만주의 화가밖에 알지 못한 나였다.그 오랜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의 그림을 보러 가야 하나? 그런데 아니다.미셸 들라크루아는 1933년 2월 26일 출생해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화가. 구글에서 이 화가를 검색하면 “the ‘naif’ style”(나이브한 스타일)의 프랑스 화가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naif’는 프랑스말, ‘naive’로도 쓰며, 영어의 ‘naive’와 같은 말이다. ‘naive’는 우리말로도 “저 사람 참 나이브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그 ‘나이브’다.블로그 ‘형설지공’에 이 프랑스말 ‘naive’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다. 이 말은 라틴어 ‘nativus’, ‘태어난, 타고난, 자연적인’ 등의 뜻을 가진 말에서 나왔다.이 말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단순하고 세련되지 않다”는 뜻이다.이른 봄, 아직은 추운 오후 네 시 반의 어스름을 뒤로 하고 한가람 미술관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아주 놀라고 만다. 거기에, 화가 자신이 ‘벨 에포크’(Belle Epoque·아름다운 시대)라 부른 유년기의 파리의 풍경이 가득히 흐르고 있다. 미셸 들라크루아는 풍경화가이고, 파리와 그 인근의 거리 풍경을 평생에 걸쳐 그려온 사람이다.원래 ‘벨 에포크’는 19세기 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의 유럽, 평화를 누리며 경제나 문화가 급속히 발전한 유럽의 한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다. 그런데 화가인 미셸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유년 시절,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파리, 나치가 점령하기도 한 전쟁 중의 파리가 포함된 시기를 ‘벨 에포크’라 불렀다고 한다.유럽사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려는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를 이른바 ‘30년 전쟁기’라 부른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벌어진 종교전쟁이 본래의 ‘30년 전쟁’(Dreißigjahriger Krieg)이라면, 이 새로운 ‘30년 전쟁’은 유럽 현대사를 보다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용어인 것이다.화가인 미셸 들라크루아는 이 전쟁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말일까? ‘나이브’한 스타일의 화가라는 설명처럼 그는 사회·역사적인 흐름에는 그토록 둔감했단 말인가?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전쟁의 참상에 주목할 때, 어떤 사람은 전장을 헤치고 흐르는 삶의 온기, 활기 같은 것에 주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전시실 가득히 피어난 파리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우리는 삶을 이렇게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사회적 관계망에 주목할 때 삶은 힘겹다. 하지만 각각의 개체들의 생명의 온기, 활기에 눈을 맞추면 삶은 아름답고 따뜻한 것이 된다. 이 다르게 보는 각도에 삶의 숨은 희망이 있다.

2024-03-04

마지막 학술대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지난 수요일부터 등이 독한 벌레에 물린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벌레에 물린 줄 알았다. 빈대가 새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뉴스의 기억이 오래되지 않았다. 지구 온난화라니, 사람들 모르는 벌레가 상륙할 수도 있었다.피부과에 가야 하지만 여유가 없었다. 설날 연휴, 돌아가신 지 일 년 되신 아버지 기일, 미뤄 두었던 만남들, 밀린 논문, 비평의 원고들. 무엇보다 금요일 날 학술대회가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술대회를 잘 마치고 보자는 심산이었다.금요일이 오자 새벽부터 일찍 집을 나섰다. 여러 손님들을 초빙한 대회였다. 오전에는 드크레센조라고, 프랑스 마르세이유 대학의 한국학 전공 교수 분이 발표를 하기로 했다. 창원의 시낭송대회 때 이 분 발표가 참 경청할 만했다. 국립국어원 원장으로 가신 장소원 선생님도 모처럼 학교에 오셔서 발표해 주신다. 오후에는, 국회의원 김종민, 우리 과 선배인데다 내게는 동아리 선배이기도 하다. 바깥의 시국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커뮤니케이션 3.0’ 시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언론에게 알리지 않는 비공식 초청이다. 영국 추리소설가협회던가에서 수여하는 대거상 번역소설 부분의 수상자 윤고은 작가가 와주기로도 했다. 마지막, 김남일 작가, 내가 1994년 등단해서 알게 된 작가 가운데 이렇게나 솔직, 소박, 성실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선배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그린 오수연 선배의 ‘황금지붕’을 가지고 발표를 해주기로 했다.그밖에도 발표자가 많았다. 이번 학술대회는 특별히 통상적인 학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한국 어문학의 미래’를 주제로 삼아 이야기하기로 했다. 특별히 ‘미래소설’들을 다룬 세션을 둔 것도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화두로 삼아 보자는 취지에서였다.일요일인 오늘 결국 대상포진으로 판명이 났다. 침인지 칼인지로 등을 쿡쿡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가급적 맨 앞자리를 지키려고 했다. 여러 생각이 났다.스무 해 가까이 어떤 과제의식에 쫓기듯 살아온 것이었다. 정체성은 자유이지만 구속이기도 하다고 밀었다. 그래도 뭔가 이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긴 시간이었다. 어렵게 ‘BK21’ 지원 프로그램을 따냈지만, 중간평가에서 밀렸다.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갈 것인가? 돈이 없으면 움직이기도 어려운 오늘의 연구 환경이다.한국학 연구는 나의 터전이고, 내가 아무리 창작에 관심이 있다 해도, 떠날 수도 없고 버려서도 안되는 터전이다. 그리고 이제 막 포스트 콜로니얼조차 벗어나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갖게 된 참이다. 당혹스러운 상황이다.착잡한 심중에서 한 가지 생각이 인다. 이제는 나 개인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연구팀이다, 학회다, 를 넘어 홀가분한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든, 글쓰기든 해야 할 때라는 것.그러고 보면 놓치는 것은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좋은 일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듯, 나쁜 일도 모든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2024-02-19

가오슝에서 타이완을 생각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가오슝 시는 타이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타이완 남부에 있다. 아주 큰 컨테이너 항구를 가진 항구도시다.타이완에 대한 나의 기억은 무엇보다 조용한 나라라는 것이었다. 타이페이에 2박 3일 머물러 본 기억밖에 없으나, 그 차분함은 오래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거리의 가게 간판들은 번자체 한자여서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의 규모나 운영 방식은 한국과 일본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한국인, 일본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몸에 배인, 일본인들과도 다른 차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억눌려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 큰 실례가 될 것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이 절제는 어떤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것 같았다.이번의 가오슝행은 학교의 공식행사였다. 코로나 이후 학교 구성원들이 처음으로 단체여행을 떠난 것이다. 인천공항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밀린 원고를 생각하며 시름겨워 했다. 세 시간 넘게 일찍 나와 수속을 빨리 마치고 어느 구석에 앉아 마저 일을 끝내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가오슝 공항에 도착하자 안내해 주시는 분이 우리를 맞았는데, 타이완에서 나서 자란 한국인이라고 했다. 성은 ‘박’이요, 할아버지 때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만주에 계시다 타이완으로 옮겨 왔고, 여기서 어선을 사들여 사업을 했노라고 했다. 그렇게 오래 전부터 타이완에 살았다니. 나는 모자란 소설가다운 호기심으로 이 분의 가계에 흥미를 가졌다.시가에는 선거의 분위기가 아직 다 가시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아주 뜨거워서 ‘탈중국’의 민진당 후보 라이칭더가 간신히 승리했다고 했다. 표차가 100만표를 넘지 못했고 국민당의 허우유이 후보도 많은 득표를 했기에, 앞으로 정국이 험난할 것이라 했다.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은 ‘박’ 선생에 따르면 대만에는 한국 해방 당시 3만명이나 되는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했다. 아주 많다고는 할 수 없어도 생각보다 많은 숫자였다.타이완이라면 일본과 일찍 관계가 깊었다. 청일전쟁에 패한 청나라가 일본에 타이완을 넘겨주면서 1945년 일본 패전까지 일본 통치가 이어졌다. 본래의 원주민 대신에 대륙 쪽의 한족이 이주해서 주류 사회를 이루었고, 공산당에 밀린 장제스가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겨 오면서 오래 독재 통치가 이어졌다. 그 사이에 타이완은 일본에 기대어 경제를 운영해 왔다. 도로에는 일본 자동차가 넘치고 거리의 건물들은 일본식 조립 방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한국이 타이완을 ‘배신’하기 이전에 타이완 정부는 한국계, 한국 유학생들에게 아주 관대했다고 한다. 한국이 타이완, 곧 중화민국에 사전에 알리지도 않고 단교하고 지금의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기까지는 말이다.지금 카타르에서 아시안컵 축구대회가 한창이다. 타이완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한국팀이 지기를, 잘 안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고 한다. 가오슝에서의 2박 3일, 나는 잠시나마 한국인 아닌 타이완 사람들의 심정이 되어본다. 같은 사태도, 누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2024-02-05

여기서는 거기서와 많은 것이 다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김포공항으로 한국을 떠나기까지 무척이나 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겨울이 되자 밀린 일들을 어떻게든 소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2월까지도 정말 복잡하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했는데, 1월이 되어서도 2023년 13월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학술대회를 하나 치러내야 했다. 탈북작가들 연구에 관한 것인데, 나는 몇 년 동안 이 일에 어떻게든 매달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지명, 도명학, 김정애, 설송아, 김유경 같은 작가며 시인들이 그렇게 귀해 보일 수 없었다. 한반도 같은 현실에서는 이 작가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한다는 느낌만으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되는 것이다.‘K 학술 사업’이라는 게 있어, ‘개설 한국현대소설사’라는 것을, 동영상을 여덟개를 찍어야 하는데, 겨우 두 개를 준비해 놓고는 여행 이후로 일정들을 다 미뤄 놓아야 했다. 한국현대소설사라는 것도, ‘개설’밖에는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식사, 모방사와는 다른 종류의 것을 써야겠다고 마음은 먹었던 것이, 이번에도 과연 내실은 없이 시간만 채우는 것은 아닌지 무척 걱정을 해야 했다.13월 초에는 나 말고 세상도 어지럽기만 했다. ‘아포유’나 ‘아메리카고조선’ 같은 유튜버들은 텔레비전 방송사들이나 여타 유튜브 방송이 송출한 동영상들을 정밀 분석하며 과연 사태의 진상은 어떠냐를 두고 보름이 넘도록 화제를 이어갔다. 여행을 준비하는 틈틈에도 사태의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다른 것은 시간적으로도 여행 기간에 절대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정말 잠시라도 한국에서의 모든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직항으로는 비행기삯도 비싸기는 비싸지만 차라리 경유해서 가는 편이 떠나는 절차로서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다.다행히 미국 비자는 지지난 해인가 ESTA 비자를 받아놓은 것이 있어 큰 수고는 덜었다.늘 그렇듯 촉급하게 서두르는 것도 싫어 이번에는 세 시간쯤 여유를 두고 김포공항으로 향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전철역에 다 가서야 여권을 빠뜨린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을, 몇 번을 이곳저곳 뒤진 끝에 드디어 찾기는 찾았다.김포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서야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여행가방에는 허영자 선생의 시선집 한 권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문학이론서의 한국어 번역본 감수할 것 복사본뿐. 그렇게 태평양을 건너서 나흘째. 생각한다. 여기서는 거기서와 많은 것이 다르다. 풍경도, 사람들 살아가는 것도, 사고방식도, 주제도. ABC마트 옆에 딸린 카페에서 아이스카라멜 마키아토를 하나 시켜놓고 앉았다. 커피 맛만은 다르지 않은 것 같은 것은 다만 착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곳에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을, 다만 우연으로 바다 건너에서 모든 문제들 속에서 살아온 것이었을 뿐인지도. 돌아가서, 그냥 매이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갓 먼지처럼 바람 속으로 와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내 생각과 느낌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다시 한 번 ‘상대성’의 진리를 가슴에 새겨 본다.

2024-01-22

내 몸에 흐르는 여러 차원의 시간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사람은 살면서 신비체험을 할 때가 있다. 마음이 환하고 깨끗한 사람은 세상을 상세히 알지 않고도 꿰뚫어 보고, 이 세상을 하나로 삼고 그 하나 너머의 빛을 맞아들일 수 있다. 세속 잡사에 휘둘리기 쉬운 체질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이런저런 일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짧은 인생을 덧없이 보낸다.나는 후자 쪽의 유형에 가까운 사람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학생 시절은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신문마다 목소리가 하나로 다르지 않은 것을 가판대에서 이 신문도 사보고 저 신문도 사보며 같은 기사를 혹시 조금이라도 다른 어조가 있을세라 반복해서 읽곤 했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나는 여전히 뉴스에 목말라 있다. 정치적 진실이 언론들이 전달하는 것에서 늘 멀리 있음을 알기에 홍수같이 밀려드는 뉴스의 숲속을 헤매며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제대로 전하는 곳을 찾아 헤맨다.그런데 최근 어느 날이다. 늘 늦게 자는 버릇에, 몇 번씩 깨는 습벽으로 나의 잠은 아주 저질스럽다 하겠는데, 그날 새벽 문득 깨어나니 머릿속이 한없이 깨끗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아무런 무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좀 더 시간이 흘러 정신이 돌아오면서, 이제는 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흘러들었다. 일간신문의 정치면에 거리를 두고 내 몸속에 흐르는 삼십 년 단위, 백 년 단위, 천 년 단위, 만년 단위의 시간의 흐름에 귀를 기울여야겠었다.그러고 보면 ‘나’라는 존재는 세속적인 차원의, 인간학적인 차원의, 생물학적인 차원의, 그리고 우주적인 차원의 삶, 생명이 흘러가는 전도체와도 같은 것을, 저 칼 융의 ‘원형 상징’에 관한 책을 읽고 그토록 깊은 감화를 받고도 나는 여전히 풍진 속을 헤매며 살아가고 있다.젊은 날 칼 융의 ‘무의식’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국문과 대학원생 연구실을 내려와 저녁 어스름 빛을 받으며 학교를 내려가는데, 갑자기 세상이 ‘블루’하게 보였다. 마음속의 무의식이 세상에 마치 블루한 필터를 끼워 놓은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신비스러운 푸른 빛을 발산하는 것이었다.그 융은 그때 책에서 말했다. 무의식은 어둠만 아니라 빛으로도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들 무의식에는 저 인류의 시원으로부터 쌓여 온 삶의 온갖 기억과 자혜가 저장되어 있다고. 이제는 정말 그 모든 시간들을 함께, 아울러 의식해야겠다고 생각한다.새해를 앞뒤로 하여 이 나라에는 사람들 마음을 흔드는 큰 사건들이 많았다. 너무나 잘 알려진 스님의 돌연한 입적, ‘기생충’과 ‘나의 아저씨’로 사람들 심중에 깊이 들어온 연기인의 죽음, 또 갑작스러운 정치인 피습 사건. 모두 삶의 덧없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삶의 더 깊은 차원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차원 다른 여러 시간들이 내 몸에 흐르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더 여유 있게, 더 정갈하게, 더 고요하게 살아가고 싶다. 사람의 삶은 찰나의 빛과 같으니 말이다.

2024-01-08